이프소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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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프소스 전투는 기원전 301년에 벌어진 전투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권력 다툼인 디아도코이 전쟁의 중요한 국면을 보여준다. 이 전투에서 안티고노스 1세와 데메트리오스 1세 부자는 셀레우코스 1세,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안티고노스 1세의 영토가 분할되었고, 헬레니즘 시대의 주요 왕국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 리시마코스 왕조, 카산드로스 왕국이 등장하며,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분열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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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소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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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이프소스 전투 |
관련 분쟁 | 디아도코이 전쟁 |
시기 | 기원전 301년 |
위치 | 프리기아 이프소스 (튀르키예 아피온카라히사르 주 차이르바으 부근) |
결과 | 연합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안티고노스 왕조 |
교전국 2 | 리시마코스 왕조 안티파트로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 |
지휘관 및 지도자 | |
안티고노스 왕조 | 안티고노스 1세 (전사) 데메트리오스 1세 피로스 1세 |
연합군 | 셀레우코스 1세 리시마코스 안티오코스 1세 카산드로스 프레펠라우스 플레이스타르코스 |
병력 규모 | |
안티고노스 왕조 | 보병 70,000명 기병 10,000명 코끼리 75마리 (플루타르코스) |
연합군 | 보병 64,000명 기병 15,000명 코끼리 500마리 낫 전차 120대 (플루타르코스) |
피해 규모 | |
안티고노스 왕조 | 보병 5,000명과 기병 4,000명 외 전멸 (플루타르코스) |
연합군 | 불명 |
추가 정보 | |
관련 전투 | 제1차 전쟁 카멜의 성벽 전투 헬레스폰트 전투 오르키니아 전투 크레토폴리스 전투 노라 공성전 제2차 전쟁 메갈로폴리스 공성전 비잔티움 전투 코프라테스 강 전투 파라이타케네 전투 테게아 전투 피드나 전투 가비에네 전투 제3차 전쟁 티레 공성전 카리아 원정 트랄레스 전투 카우누스 전투 이아소스 전투 칼키스 전투 가자 전투 뮈오스 전투 바빌로니아 전쟁 제1차 바빌론 공성전 티그리스 강 전투 제2차 바빌론 공성전 제3차 바빌론 공성전 아부 25일 전투 제4차 전쟁 피레아스 전투 메가라 전투 뮌키아 전투 살라미스 해전 파트니쿰 프세우도스토눔 로도스 공성전 아테네 공성전 칼리드로모 산 전투 시돈 공성전 이프소스 전투 암피폴리스 전투 케르소네소스 원정 코루페디온 전투 |
2. 배경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광대한 제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후계자 자리를 놓고 그의 유력한 장군들 사이에서 치열한 권력 다툼, 즉 디아도코이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 초기에는 여러 장군들이 각축을 벌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노련한 안티고노스 1세가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는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포함한 제국의 아시아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에게 해의 제해권까지 확보하며 알렉산드로스 제국 전체의 통치권을 노리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안티고노스의 강력한 세력 확장과 야심은 다른 후계자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그리고 동방 영토를 확보한 셀레우코스 1세는 공동의 위협인 안티고노스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반 안티고노스 동맹을 결성하여 안티고노스의 패권 장악을 저지하고자 했고, 이러한 대립 구도는 결국 기원전 301년 프리기아의 이프소스 평원에서 벌어진 대규모 결전, 즉 '''이프소스 전투'''로 이어지게 되었다.
2. 1. 디아도코이 전쟁의 전개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유력한 장군들 사이에서 권력 다툼과 영토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디아도코이 전쟁의 시작이다.기원전 315년에 끝난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의 결과, 안티고노스 1세는 마케도니아 제국의 아시아 영토, 즉 소아시아, 시리아 및 광대한 동부 태수령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안티고노스는 제국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할 수 있는 강력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안티고노스의 급격한 세력 확장은 다른 주요 후계자들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기원전 314년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마케도니아 통치자), 리시마코스(트라키아 통치자),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 통치자)의 연합군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이 전쟁은 기원전 311년 네 명의 지도자 간 강화 조약 체결로 일단락되었으나, 긴장 관계는 계속되었다.
강화 조약 직후, 안티고노스는 제국의 동부 태수령을 되찾으려던 셀레우코스를 공격하면서 바빌로니아 전쟁이 발발했다. 기원전 311년부터 기원전 309년까지 이어진 이 전쟁에서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를 물리치고 바빌로니아 태수령과 동쪽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기원전 308년 무렵,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자 각지의 후계자들은 스스로 왕을 칭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항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안티고노스가 다른 지역에 집중하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에게 해와 키프로스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에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308년 프톨레마이오스와의 전쟁을 재개하며 제4차 디아도코이 전쟁을 일으켰다.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그리스로 보내 지배권을 확보하도록 했다. 데메트리오스는 기원전 307년 아테네를 점령하고 카산드로스가 임명한 총독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를 몰아낸 뒤 도시의 자유를 선포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는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기원전 306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함대를 크게 격파했다. 이 승리를 계기로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스스로 왕위를 주장했으며, 곧이어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그리고 카산드로스도 왕을 칭하게 되었다.

기원전 306년, 안티고노스는 이집트 침공을 시도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데메트리오스 함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실패하여 귀환해야 했다. 카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세력이 약화되고 셀레우코스가 여전히 동방 영토 확보에 주력하는 사이,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로도스로 눈을 돌렸다. 기원전 305년, 데메트리오스는 로도스를 포위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의 지원을 받은 로도스는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로도스는 데메트리오스와 타협하여, 동맹인 프톨레마이오스를 제외한 모든 적에 맞서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이 포위전은 데메트리오스에게 그리스에서 카산드로스를 공격할 자유를 주었다. 데메트리오스는 그리스로 돌아가 기원전 303년과 기원전 302년에 걸쳐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고 카산드로스의 주둔군과 친 안티파트로스파 정권을 몰아내는 데 힘썼다.
데메트리오스의 활동이 자신의 권력 기반인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위협한다고 판단한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와 화해를 시도했으나,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의 완전한 항복을 요구하며 이를 거절했다. 이에 카산드로스는 리시마코스와 협력하여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에게 사절을 보내 반 안티고노스 동맹을 결성할 것을 제안했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카산드로스는 프레펠라오스 지휘 하에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리시마코스에게 보내 아나톨리아에서의 공동 작전을 준비하게 했고, 자신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테살리아에서 데메트리오스와 대치했다. 결성된 반 안티고노스 동맹은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안티고노스를 분쇄하고자 했다. 기원전 301년, 셀레우코스와 리시마코스의 연합군이 주력이 되어 안티고노스와 '''이프소스 전투'''에서 격돌했다.
2. 2. 이프소스 전투 직전의 상황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후계자들인 디아도코이 사이에 디아도코이 전쟁이라 불리는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기원전 315년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안티고노스 1세는 마케도니아 제국의 아시아 영토(소아시아, 시리아 및 동부 사트라피)를 장악하며 제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할 수 있는 강력한 위치에 섰다. 그의 세력 확장은 다른 디아도코이인 카산드로스(마케도니아 통치자), 리시마코스(트라키아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 통치자)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는 기원전 314년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은 기원전 311년 잠정적인 평화 협정으로 마무리되었으나, 안티고노스는 곧바로 동부 사트라피에서 세력을 회복하려던 셀레우코스를 공격했다. 기원전 311년부터 기원전 309년까지 이어진 바빌론 전쟁에서 안티고노스는 패배했고,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와 동부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다른 경쟁자들이 소강 상태에 있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에게 해와 키프로스로 세력을 넓혔다. 이에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308년 프톨레마이오스와의 전쟁을 재개하며 제4차 디아도코이 전쟁을 시작했다.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를 그리스로 보내 기원전 307년 아테네를 점령하고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를 축출하며 도시의 자유를 선포하게 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는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살라미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함대를 격파했다. 이 승리에 고무된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곧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산드로스도 각자 왕을 칭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06년, 안티고노스는 이집트를 침공했으나 폭풍으로 데메트리오스 함대의 지원을 받지 못해 실패했다. 카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약화되고 셀레우코스가 동방 영토 안정에 집중하는 사이,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로도스로 눈을 돌렸다. 기원전 305년 시작된 로도스 포위전은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의 지원을 받은 로도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결국 로도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제외한 모든 적에 대항해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를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타협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로도스를 구원한 공로로 '소테르'("구원자") 칭호를 얻었지만, 실질적인 승리는 데메트리오스에게 돌아갔다. 그는 이제 자유롭게 그리스에서 카산드로스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고, 기원전 303년과 기원전 302년에 걸쳐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며 카산드로스의 세력을 몰아냈다.

데메트리오스의 그리스 활동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한다고 판단한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와 화해를 시도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의 완전한 굴복을 원하며 이를 거절했다. 이에 카산드로스는 리시마코스와 협력하여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에게 사절을 보내 반 안티고노스 동맹 결성을 제안했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카산드로스는 프레펠라오스 지휘 하에 상당한 규모의 마케도니아 군대를 리시마코스에게 보내 아나톨리아에서의 공동 작전을 준비하게 했고,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테살리아에서 데메트리오스와 대치했다.
기원전 302년, 리시마코스는 헬레스폰트를 건너 소아시아 침공을 개시했다. 람프사쿠스와 파리움이 항복했고, 시게이온은 공격 끝에 점령하여 수비대를 두었다.[7] 리시마코스는 프레펠라우스에게 병력 7,000명을 주어 아이올리스와 이오니아를 공격하게 했고, 자신은 아비도스를 포위했으나 데메트리오스가 보낸 해상 지원군 때문에 실패했다.[1] 이후 리시마코스는 헬레스폰트 프리지아를 정복하고 신나다를 점령했다.[1] 한편 프레펠라우스는 아드라미티온, 에페소스, 테오스, 콜로폰을 점령하고 내륙으로 진군하여 사르디스까지 함락시켰으나, 해상 지원을 받는 에리트라이와 클라조메나이는 점령하지 못했다.[1]
침공 소식을 들은 안티고노스는 안티고니아에서 준비 중이던 축제를 취소하고 급히 군대를 북진시켜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리카오니아를 거쳐 프리지아로 향했다.[8] 리시마코스는 안티고노스 대군의 접근 소식에 셀레우코스가 도착할 때까지 결전을 피하기로 결정하고, 참호와 말뚝으로 방어된 야영지에서 농성했다.[1] 안티고노스는 야영지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하려 했고, 리시마코스는 야간에 약 40마일 떨어진 도릴라이온으로 후퇴하여 새로운 야영지를 구축했다.[1] 안티고노스는 끈질기게 추격하여 다시 포위하고 투석기를 동원했지만, 리시마코스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 식량이 떨어지자 폭풍우 치는 밤을 틈타 다시 야영지를 버리고 후퇴했다.[1] 안티고노스는 추격을 시도했으나 겨울이 다가오고 악천후가 계속되자 추격을 포기하고 군대를 겨울 숙영지로 분산시켰다.[1] 리시마코스와 동맹군도 비티니아로 이동하여 헤라클레아 폰티카 인근에서 겨울을 보냈다.[1]
겨울 숙영 동안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가 동방에서 리시마코스를 지원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데메트리오스에게 그리스에서 군대를 이끌고 아시아로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 당시 그리스에서 작전 중이던 데메트리오스는 아버지의 소환 명령을 받고 카산드로스와 급히 휴전을 맺은 뒤, 에게 해를 건너 에페소스로 이동했다.[1][10] 그는 에페소스를 재탈환하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헬레스폰트 해협을 강력한 수비대와 함대로 봉쇄하여 유럽에서 아시아의 동맹군에게 지원군이 가는 것을 차단한 뒤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1]
데메트리오스가 자리를 비우자 카산드로스는 동생 플레이스타르코스 지휘 하에 추가 지원군을 리시마코스에게 보냈다.[1] 헬레스폰트 통과가 어려워지자 플레이스타르코스는 흑해를 통해 오데소스 항구에서 헤라클레아로 병력을 수송하려 했으나, 함선 부족으로 분산 수송하던 중 일부는 데메트리오스 함대에 요격당하고 일부는 폭풍으로 난파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플레이스타르코스 자신도 간신히 목숨을 건져 헤라클레아에서 겨울 동안 회복해야 했다.[11] 한편, 아시아에 안티고노스 군대가 집중된 틈을 타 프톨레마이오스는 코엘레 시리아를 침공하여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1] 그러나 시돈을 포위하던 중 안티고노스가 승리했다는 잘못된 보고를 받고, 안티고노스가 남쪽으로 시리아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점령지에 수비대만 남기고 이집트로 철수했다.[1] 거의 같은 시기, 셀레우코스는 동방에서의 행군을 마치고 카파도키아에 도착하여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1]
기원전 301년 봄이 되자 양측 군대는 결전을 준비했다. 리시마코스와 셀레우코스는 본국을 오래 비워 불안했기 때문에 속전을 원했을 것이다.[1] 안티고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시리아 침공 전례 때문에 수도 안티고니아와의 연결이 끊기는 것을 우려하여 동맹군을 요격하기 위해 이동했다.[13] 마침내 두 군대는 신나다 북동쪽 약 50마일 지점의 이프소스 마을 근처의 넓은 평원에서 마주쳤다. 이곳은 동맹군의 우세한 코끼리 부대와 안티고노스 군의 수적으로 우세하고 잘 훈련된 기병대 양측 모두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14]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전투 직전 안티고노스 군대는 보병 약 70,000명, 기병 10,000명, 전투 코끼리 75마리로 구성되었다.[1] 이 병력의 대부분은 안티고노스가 시리아에서 직접 이끌고 온 군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데메트리오스가 그리스에서 데려온 군대에는 코끼리가 없었고 기병도 1,500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15] 현대 전문가들은 안티고노스 보병 70,000명 중 약 40,000명이 팔랑기테스였고, 30,000명은 다양한 종류의 경장보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
3. 전투
기원전 301년, 소아시아 프리지아의 이프소스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디아도코이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대결이었다. 안티고노스 1세와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가 이끄는 군대와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1세가 연합한 군대가 맞붙었다.
양측 모두 팔랑크스를 중심으로 군대를 배치했으나, 연합군은 셀레우코스 1세가 찬드라굽타와의 협정을 통해 인도로부터 얻어온 다수의 전투코끼리를 보유하여 코끼리 전력에서 우위를 점했다.[1] 이는 전투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술적으로 양측 모두 전장의 우익에서 기병을 이용한 강력한 공격을 시도하는, 당시 헬레니즘 시대 군대의 일반적인 방식을 따랐다.[20][21]
전투 초반, 안티고노스 군 우익의 데메트리오스 1세가 이끄는 정예 기병대가 연합군 좌익의 안티오코스가 이끄는 기병 부대를 성공적으로 공격하여 후퇴시켰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패주하는 적을 너무 깊숙이 추격하는 실수를 범하여[1] 자신의 부대를 본대와 멀리 떨어뜨려 고립시켰다.
이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셀레우코스 1세는 자신이 보유한 다수의 전투코끼리 부대를 투입하여, 추격에서 돌아오려는 데메트리오스 부대의 복귀 경로를 차단하고 안티고노스 군 본대로부터 분리시켰다.[28] 코끼리 부대의 존재는 말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아 데메트리오스의 기병대가 효과적으로 본대에 합류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29]
강력한 기병 부대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안티고노스 군의 중앙 보병 부대는 측면이 노출된 채 연합군의 압박에 직면했다. 안티고노스 1세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데메트리오스의 귀환을 기다렸으나, 결국 적의 투창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총사령관인 안티고노스가 전사하자 안티고노스 군의 전열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패배를 직감한 데메트리오스는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전장에서 퇴각했다. 이 전투는 디아도코이 전쟁 기간 중 벌어진 가장 규모가 큰 회전이었으며, 셀레우코스-리시마코스 연합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3. 1. 양측의 전력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티고노스의 군대는 전투 전에 보병 약 70,000명, 기병 10,000명, 그리고 전투 코끼리 75마리로 구성되었다.[1] 이 병력의 대부분은 시리아에서 진군한 안티고노스의 본대에서 충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이끌고 온 그리스 군대에는 전투 코끼리가 없었고 기병도 1,500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15] 디오도로스는 데메트리오스가 그리스에 약 56,000명의 보병(마케도니아 팔랑기테스 8,000명, 용병 15,000명, 그리스 도시 출신 병력 25,000명, 경보병 8,000명)을 보유했다고 기록했지만, 이 중 어느 정도가 아시아로 이동했는지는 불분명하다.[1] 현대 전문가들은 안티고노스 군의 보병 70,000명 중 약 40,000명이 팔랑기테스였고, 나머지 30,000명은 다양한 종류의 경보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한편,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1세 연합군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보병 총 64,000명, 기병 10,500명, 전투 코끼리 400마리, 낫 전차 120대를 보유했다.[1] 특히 셀레우코스 1세는 마우리아 제국의 찬드라굽타(산드로코투스)와의 협정을 통해 인도 인근 영토를 넘겨주는 대가로 얻은 다수의 전투 코끼리를 보유하고 있었다.[1] 디오도로스는 셀레우코스가 동부 사트라피에서 보병 20,000명, 기병 12,000명(기마 궁수 포함), 코끼리 480마리, 100대 이상의 낫 전차를 이끌고 왔다고 기록했다.[1] 코끼리와 전차의 수는 두 기록 간에 비교적 일치하지만, 디오도로스가 기록한 셀레우코스 군의 기병 수는 플루타르코스가 제시한 연합군 전체 기병 수보다 많다. 리시마코스 역시 최소 1,000명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현대 전문가들은 연합군 전체 기병 수를 15,000명으로 추산한다.[16] 셀레우코스 군을 제외한 나머지 보병 44,000명 중 카산드로스와 리시마코스가 각각 얼마만큼의 병력을 지원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카산드로스는 플레이스타르코스 휘하에 12,000명을 파견했지만, 그중 3분의 2가 흑해를 건너는 과정에서 손실되었다.[1] 현대 전문가들은 연합군 전체 보병 중 약 30,000명에서 40,000명이 팔랑기테스였고, 나머지는 경보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프소스 전투 양측 전력 비교'''
구분 | 안티고노스 1세 & 데메트리오스 1세 | 카산드로스 & 리시마코스 & 셀레우코스 1세 연합군 |
---|---|---|
보병 | 약 70,000명[1] (팔랑기테스 약 40,000명, 경보병 약 30,000명 추정[1]) | 약 64,000명[1] (팔랑기테스 약 30,000~40,000명, 나머지는 경보병 추정) |
기병 | 10,000명[1] | 10,500명 (플루타르코스[1]) ~ 15,000명 (현대 전문가 추정[16]) |
전투 코끼리 | 75마리[1] | 400마리[1] (셀레우코스가 찬드라굽타에게서 얻은 코끼리 다수 포함[1]) |
낫 전차 | 기록 없음 | 120대[1] |
3. 2. 전투의 전개

양측은 팔랑크스를 중앙에, 기병을 양익에 배치하는 마케도니아 표준 대형으로 군대를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20] 안티고노스 군은 우익에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가 지휘하는 정예 기병 부대와 경장 보병을 배치했고, 안티고노스 자신은 중앙의 보병 부대를 이끌었다.[1] 75마리의 전투코끼리는 보병 부대의 보호를 받으며 전열 앞에 배치되었다.[1]
한편, 셀레우코스-리시마코스 연합군은 셀레우코스가 찬드라굽타(산드로코토스)와의 협정을 통해 인도 인근 영토를 넘겨주고 얻은 다수의 전투 코끼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보유한 코끼리 중 일부(약 100마리로 추정[1])를 전열 앞에 배치했으며, 셀레우코스가 나머지 대부분을 예비대로 두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23] 연합군의 좌익 기병은 셀레우코스의 아들 안티오코스가 지휘했고,[1] 중앙 보병은 셀레우코스가, 우익 기병은 리시마코스가 이끌었다.
전투는 양측 코끼리 부대의 격돌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디오도로스는 이 코끼리들이 마치 용기와 힘이 동등한 것처럼 싸웠다고 기록했다.[24] 전투가 시작되자 안티고노스 군 우익의 데메트리오스는 주력 기병을 이끌고 코끼리 부대 주위를 돌아 연합군 좌익의 안티오코스 부대를 공격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는 용맹하게 싸워 적을 격파했다.[1] 그러나 패주하는 적을 너무 깊숙이 추격한 나머지, 그의 부대는 본대와 멀리 떨어져 고립되었다.
이때 셀레우코스는 결정적인 기동을 감행했는데, 데메트리오스의 복귀를 막기 위해 약 300마리로 추정되는 코끼리 부대를 투입하여 데메트리오스 부대와 안티고노스 본대 사이를 차단했다.[28] 말들은 코끼리의 낯선 냄새와 소리에 겁을 먹어 접근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29], 데메트리오스의 기병대는 코끼리 방어선을 돌파하거나 우회할 수 없었다. 이 '코끼리 기동'은 전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지만, 이것이 미리 계획된 예비대의 투입이었는지, 아니면 전투 중의 즉흥적인 조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30] 코끼리 운용 경험이 풍부했던 셀레우코스가 이 기동을 지휘했을 가능성이 높다.[30]
데메트리오스의 기병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안티고노스 군의 팔랑크스는 우익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셀레우코스는 이 약점을 이용하여 직접 공격하는 대신, 안티고노스 팔랑크스 주위를 맴돌며 압박하고 투항을 유도하는 전술을 사용했다.[1] 실제로 일부 안티고노스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연합군 측으로 투항하거나 도주했다. 또한 연합군의 기마 궁수들이 노출된 팔랑크스 측면에 화살 공격을 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중앙의 안티고노스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데메트리오스의 귀환을 기다렸으나, 점차 연합군 보병에게 포위되었고 결국 투창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지휘관을 잃자 안티고노스 군의 전열은 완전히 붕괴되었다.[31] 패배를 직감한 데메트리오스는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전장에서 퇴각했다.
이 전투는 디아도코이 전쟁 기간 중 벌어진 가장 규모가 큰 회전이었으며, 셀레우코스와 리시마코스 연합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4. 결과
이프소스 전투는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가 이끄는 연합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 중에 안티고노스는 전사했으며, 그의 광대한 영토는 승리자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 사후 계승자들 간의 오랜 투쟁 끝에 그의 제국은 영구히 분열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안티고노스 군대의 궤멸과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는 남은 보병 5,000명과 기병 4,000명을 수습하여 에페소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그리스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한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아테네로부터 입성을 거부당하는 등 이전의 동맹 세력에게 외면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수비대가 여러 지역에서 추방당하고 이전 동맹국들이 다른 왕들에게 항복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재통합하려는 마지막 현실적인 기회는 이미 바빌론 전쟁에서 안티고노스가 패배하면서 사라졌다고 볼 수 있지만, 이프소스 전투는 이러한 실패를 최종적으로 확인시켜 준 사건이었다. 역사가 폴 K. 데이비스는 이프소스 전투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이 국제적인 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의 정점이었지만, 안티고노스는 이를 해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32] 이 전투는 제국의 분열을 확정지었으며, 이후 헬레니즘 시대의 정치적 지형과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32][33][34]
4. 1. 분할된 영토
이프소스 전투의 승자들은 패배한 안티고노스의 영지를 분할했다. 이로써 일시적으로 다음과 같은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네 왕국의 분립으로 알렉산더 제국의 분열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특히,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의 영지 대부분을 확보하여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프톨레마이오스와 리시마코스 등의 경계를 사게 되었고, 이후 셀레우코스는 이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셀레우코스는 이프소스 전투에서 패배했던 데메트리오스와 동맹을 맺어 이들에게 대항하는 길을 선택했고, 이를 통해 데메트리오스는 재기할 수 있었다.
한편, 마케도니아 왕국에서는 몇 년 후 카산드로스가 사망하면서 안티파트로스 왕조 내에서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졌다. 이 혼란을 틈타 데메트리오스 1세가 안티파트로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곧 추방당했다. 이후 마케도니아는 단기 정권이 연이어 들어서고 무너지는 혼란기를 겪었다. 결국 데메트리오스의 아들인 안티고노스 2세가 기원전 276년에 마케도니아 왕으로 즉위하면서, 안티고노스 왕조가 마케도니아 왕국에 장기 왕조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시점에는 이미 리시마코스가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셀레우코스에게 패배하여 그의 왕국이 붕괴된 상태였다. 이로써 헬레니즘 시대는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라는 세 개의 주요 왕국이 병립하는 구도로 재편되었다.[33][34]
4. 2. 헬레니즘 세계의 재편

이프소스 전투의 승자들은 패배한 안티고노스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분열은 다음과 같은 네 왕국의 분립으로 사실상 결정되었다.
특히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의 영토 대부분을 확보하며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는 프톨레마이오스와 리시마코스 등의 경계를 불러일으켰고, 이후 셀레우코스는 이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셀레우코스는 이프소스 전투에서 패배했던 데메트리오스와 동맹을 맺어 다른 경쟁자들에게 맞서는 길을 선택했고, 덕분에 데메트리오스는 세력을 회복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한편, 마케도니아에서는 카산드로스가 사망한 후 안티파트로스 왕조 내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며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을 틈타 데메트리오스 1세가 안티파트로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고, 곧 마케도니아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마케도니아는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정권이 연이어 등장하고 사라지는 극심한 혼란기를 겪었다.
이러한 혼란은 데메트리오스의 아들인 안티고노스 2세가 기원전 276년 마케도니아 왕위에 오르면서 마침내 수습되었다. 그는 안티고노스 왕조를 창건하여 마케도니아에 장기적인 안정을 가져왔다. 이 시점에는 이미 리시마코스가 코루페디움 전투(기원전 281년)에서 셀레우코스에게 패배하여 그의 왕국이 붕괴된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이프소스 전투 이후의 혼란기를 거치며 헬레니즘 세계는 세 개의 주요 왕국으로 재편되었다.[33][34]
왕조 | 주요 통치 지역 |
---|---|
안티고노스 왕조 | 마케도니아 |
셀레우코스 왕조 | 시리아 및 동방 영토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이집트 |
이 세 왕국은 이후 헬레니즘 시대를 주도하며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는 복잡한 국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 사이의 오랜 투쟁 끝에 제국은 영구히 분열되었고, 이프소스 전투는 이러한 분열을 확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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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Greek History 480–431 BC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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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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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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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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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Kingdoms of the Successors of Alexander: After the Battle of Ipsus, B.C. 301
http://www.wdl.org/e[...]
1800-1884
[34]
웨이백
Kingdoms of the Successors of Alexander : After the Battle of Ipsus, BC 301
https://www.wdl.org/[...]
2017-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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