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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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민주당(NDP)은 1961년 캐나다노동회의와 협동연방당의 합당으로 창당된 캐나다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초대 당수는 토미 더글러스였으며, 공공 의료보장제도를 추진하는 등 진보 정치 운동에 기여했다. 2011년 총선에서는 제1야당으로 부상했으나, 이후 2015년 총선에서 의석이 감소하며 제3당으로 물러났다. 1961년 창당 이후 토미 더글러스, 데이비드 루이스, 에드 브로드벤트, 오드리 맥러플린, 알렉사 맥도너, 잭 레이턴, 토마스 멀케어, 자그미트 싱 등이 당 대표를 역임했다. NDP는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사회주의를 모두 포괄하며, 공공 의료, 팔레스타인 국가 지지 등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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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민주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신민주당 |
| 원어 이름 | New Democratic Party Nouveau Parti démocratique |
| 약칭 | NDP NPD |
| 국가 | 캐나다 |
| 설립일 | 1961년 8월 3일 |
| 본부 위치 | 온타리오주 오타와 |
| 색상 | 주황색 |
| 웹사이트 | NDP NPD |
| 이전 정당 | 협동 영연방 연합 신당 |
| 국제 조직 | 진보동맹 |
| 지도부 | |
| 당대표 | 자그미트 싱 |
| 전국 총괄 책임자 | 루시 왓슨 |
| 부대표 | 알렉상드르 불리스 |
| 원내대표 | 피터 줄리안 |
| 전국 회장 | 메리 쇼톨 |
| 조직 | |
| 청년 조직 | 캐나다 신민주적 청년 |
| 노동 조합 제휴 | 캐나다 노동 연맹 |
| 당원 및 지지자 | |
| 당원 수 | 124,620명 |
| 당원 수 집계 년도 | 2017년 |
| 정치적 입장 | |
| 정치적 성향 | 중도좌파 ~ 좌익 |
| 이념 |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협동주의 |
| 의회 현황 | |
| 상원 의석 | 0석 / 105석 |
| 하원 의석 | 25석 / 338석 |
2. 역사
1961년 캐나다노동회의와 협동연방당의 합당으로 신민주당이 창당되었고, 토미 더글러스 서스캐처원주 주지사가 초대 당수로 취임하였다.
1962년 총선에서 4위, 1965년 총선에서 3위를 기록했으며, 연방 차원의 공공 의료보장제도를 추진하여 진보정치운동의 실례로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토미 더글러스는 캐나다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이후에도 하원에서 3~4위의 의석을 꾸준히 확보하여 왔다.
1972년 총선에서 당시 피에르 트뤼도 정권 여당인 자유당이 과반수를 넘지 못하자, 각료 협력(1974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과반수를 획득함으로써 해소)을 하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0년 이후 3회(1980년, 1984년, 1988년)에 걸쳐 치러진 총선에서 연속으로 30석 이상을 획득했다. 그러나 1993년 캐나다 총선에서는 9석 획득에 그치며 최악의 결과를 기록하고, 공식 정당 지위를 상실했다.[86] 이는 브리티시컬럼비아주와 온타리오주에서 신민주당 정권에 대한 실망과 상당수의 당 지지층이 자유당에 투표한 결과였다. 또한, 직전 1988년 총선에서 진보보수당에 대한 비판 여론이 신민주당과 자유당으로 분산된 결과 진보보수당이 승리했던 경험에 대한 반성도 작용했다.
1997년 캐나다 총선에서는 21석을 획득하여 다소 당세를 회복했지만, 2000년 캐나다 총선과 2004년 캐나다 총선에서는 우익 정당인 캐나다연합의 정권 획득 저지를 위한 당 지지층의 전략적 투표로 인해 각각 13석과 19석을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2004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하면서, 신민주당은 자유당에 대한 각료 협력의 대가로 건강보험 민영화 반대와 교토 의정서 준수 등 당의 정책을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
2003년 잭 레이턴이 당수로 취임하였다. 2006년 캐나다 총선에서 29석, 2008년 캐나다 총선에서는 37석을 획득하며 1980년대 수준의 지지율을 회복했다.
2011년 신민주당은 연방 의회에서 자유당, 퀘벡 블록과 연합하여 보수당 소속의 스티븐 하퍼 총리를 불신임하였다. 이로 인해 치러진 2011년 캐나다 총선에서 잭 레이턴이 이끄는 신민주당은 103석을 확보하며 사상 처음으로 제1 야당으로 부상하였다.[96] 그러나 잭 레이턴은 암으로 투병하다 제1 야당 대표가 된 지 3개월여 만에 사망하였다.
2015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승리하고 보수당에게 공식 야당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2016년 4월 10일, 토마스 멀케어 당수가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고 발표했다.[89]
신민주당은 연방정부에서 정권을 차지한 적은 없으나, 온타리오주,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노바스코샤주, 매니토바주 등 일부 지방정부에서 정국을 주도해왔다. 특히 매니토바 주에서는 1999년부터 2016년 선거까지 계속 집권 정당이었고, 2017년부터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집권 정당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앨버타주의 신민주당이 지방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2. 1. 창당 배경
1956년, 캐나다노동총연맹(CLC)이 탄생한 후, CLC와 협동연방(CCF) 간에 캐나다의 조직 노동과 좌익 정치 세력 간의 연합을 이끌어내기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20] 1958년, CCF와 CLC의 합동 위원회인 신당 건설을 위한 전국위원회(NCNP)가 새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만들기 위해 구성되었으며, 각 그룹에서 10명의 위원이 참여했다.[20] NCNP는 향후 3년 동안 전국 대회를 열 때까지 당의 임시 이름인 신당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20] 이 과정에서 많은 신당 클럽이 설립되어 같은 생각을 가진 캐나다인들이 창당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신당 클럽 대표 6명이 전국위원회에 추가되었다.[20] 1961년, 5일간의 창당 대회가 끝나면서 당의 원칙, 정책 및 구조가 확립되었고, 신민주당이 탄생했으며, 오랫동안 CCF의 서스캐처원 주총리였던 토미 더글러스가 초대 당수로 선출되었다.[20]2. 2. 초기 발전 (1960년대 ~ 1990년대)
1961년 5일간의 창당대회를 통해 토미 더글러스를 당수로 선출하며 신민주당이 창당되었다.[21] 1962년 총선에서 4위, 1965년 총선에서 3위를 기록했고, 연방 차원의 공공 의료보장제도를 추진하여 진보정치운동의 사례로 주목받았다.
1971년 당 대표 선거에서 '와플'이라는 활동가 그룹이 당 장악을 시도했으나, 노조원들의 도움을 받은 데이비드 루이스에게 패배했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피에르 트뤼도가 이끄는 자유당 소수 정부를 지지하며 연금 지수화, 국영 기업 페트로캐나다 설립 등 여러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법안 통과에 기여했다.[21]
1974년 신민주당은 진보보수당과 협력하여 불신임안을 통과시켰으나, 총선 결과 트뤼도 자유당이 과반수 정부를 탈환하면서 신민주당은 의석의 절반을 잃었다. 루이스는 1975년 당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에드 브로드벤트(1975~1989) 하에서 신민주당은 서민 경제 문제에 중점을 두며 대중적 이미지를 추구했다.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조 클락의 소수 정부 시절, 존 크로즈비의 1979년 예산안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여 진보보수당 정부를 붕괴시키고 1980년 선거를 통해 자유당이 재집권하는 데 기여했다.
1984년 선거에서 브라이언 멀러니가 이끄는 진보보수당이 캐나다 역사상 최다 의석을 차지한 가운데, 신민주당은 30석을 얻었고, 집권 자유당은 40석으로 감소했다.
1988년 선거에서 신민주당은 43석을 확보하며 기록을 세웠으나, 자유당이 캐나다-미국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며 주요 대안으로 부상했다. 1989년 브로드벤트는 14년간의 연방 당수직에서 물러났다.[22]
1989년 당 대표 대회에서 데이브 배럿 전 BC주 총리와 오드리 맥러플린 유콘 의원이 경쟁했다. 배럿은 서부 소외감에 대한 우려와 퀘벡 집중 중단을 주장했으나, 퀘벡 지부의 반발을 샀다.[23] 맥러플린은 전통적인 접근 방식으로 선거 운동을 펼쳐 캐나다 주요 연방 정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맥러플린은 퀘벡에서 지지 기반 확대를 시도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90년 샹블리 보궐선거에서 필 에드먼스턴이 승리하며 퀘벡에서 첫 선거 승리를 기록했다.
1993년 총선에서 신민주당은 9석만을 얻으며 참패했고, 이는 창당 이후 최저 의석 수였다. 온타리오주 밥 레이와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마이크 하쿠트 정부의 인기 하락과 개혁당으로의 서부 표 이탈이 원인이었다.
맥러플린은 1995년 사임했고, 알렉사 맥도노(Alexa McDonough)가 뒤를 이었다. 1997년 총선에서 21석을 얻으며 다소 회복했고, 대서양 연안 캐나다 지역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 장 크레티앵 자유당 정부의 고용보험 및 사회 프로그램 삭감에 대한 반발을 이용한 결과였다.
2000년 총선에서는 메디케어 문제를 중심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으나, 캐나다 동맹(Canadian Alliance)의 승리를 막기 위한 전략적 투표로 인해 13석에 그쳤다. 맥도노는 2002년 가족 사정으로 당 대표직 사임을 발표했다.
2. 3. 제1야당 도약과 시련 (2000년대 ~ 현재)
2000년 11월 총선에서 신민주당은 주로 메디케어 문제를 중심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지만 상당한 지지율을 잃었다. 집권 자유당은 경제 실적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선거 운동을 벌여 1997년 총선에서 신민주당에 빼앗겼던 대서양 연안 지역 일부 선거구를 되찾았다. 새로운 지도자 스톡웰 데이(Stockwell Day) 하의 캐나다 동맹(Canadian Alliance)의 초기 높은 선거 전망 또한 동맹의 승리를 막기 위해 많은 지지자들이 전략적으로 자유당에 투표하면서 신민주당에 타격을 주었다. 신민주당은 13명의 국회의원으로 마무리되었는데, 공식 정당 지위를 위한 최소 기준을 간신히 넘었다.[86] 알렉사 맥도노(Alexa McDonough)는 2002년 6월 가족 사정으로 당 대표직 사임을 발표했다.토론토 시의원이자 캐나다 시정촌 연합(Federation of Canadian Municipalities)의 전 회장인 잭 레이턴(Jack Layton)은 2003년 1월 25일 토론토에서 열린 신민주당 당 대표 선출 대회(당 대표 선거)에서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24]
2004년 총선에서 신민주당은 엇갈린 결과를 얻었다. 득표수는 백만 표 이상 증가했지만, 레이턴이 낙관적으로 예상했던 40석 획득에는 실패하고 5석을 추가하여 총 19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특히 새롭게 결성된 보수당(캐나다 연합당과 진보보수당의 합병으로 탄생)에 근소한 차이로 두 명의 서스캐처원 현역 의원이 패배한 것은 신민주당에게 큰 실망이었다.
자유당은 재선되었지만, 이번에는 소수 정부가 되었다. 자유당과 신민주당을 합쳐 154석을 확보했는데, 권력 균형에 필요한 의석수에는 한 석이 부족했다. 과거 자유당 소수 정부 시절과 마찬가지로, 신민주당은 의료 민영화 반대, 교토 의정서 이행, 선거 개혁 등 당의 우선순위에 대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신민주당은 폴 마틴(Paul Martin) 총리의 정치적 입지가 후원금 스캔들로 불안해진 점을 이용하여 여러 연방 프로그램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냈고, 연방 예산에서 주요 양보가 이루어진다는 조건 하에 정부 전복을 돕지 않기로 합의했다.
2005년 11월 9일, 고머리 조사(Gomery Inquiry) 결과가 발표된 후, 레이턴은 자유당 정부에 사적 의료 서비스 금지가 신민주당의 지지 지속 조건이라고 통보했다. 자유당이 이를 거부하자, 레이턴은 11월 24일 여러 법안 통과를 위한 2월 총선 실시를 마틴 총리에게 요청하는 결의안을 제출하겠다고 발표했다. 자유당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2005년 11월 28일, 보수당 대표 스티븐 하퍼(Stephen Harper)의 불신임안이 레이턴에 의해 지지되어 야당 3당의 지지를 받아 통과됨으로써 총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2006년 총선에서 신민주당은 29석을 획득하여 2004년 19석보다 10석이나 크게 증가했다. 이는 당 역사상 네 번째로 좋은 성적이며, 1980년대에 누렸던 높은 지지율에 근접하는 결과였다. 신민주당은 의회 해산 당시 보유했던 18석을 모두 유지했다.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5석, 온타리오에서 5석, 그리고 노스웨스트 준주의 서부 북극(Western Arctic) 선거구에서 1석을 추가로 얻었다.
2006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소수 정부를 구성했고, 처음에는 신민주당만이 보수당과 입법을 통과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일련의 의원직 변경 이후, 신민주당 또한 권력 균형을 쥐게 되었다. 신민주당은 39대 의회에서 정부에 대한 모든 네 번의 신임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정당이었다. 그러나 연방 책임법(Federal Accountability Act) 통과 및 대기 질 법 개정 추진 등 다른 문제에서는 보수당과 협력했다.
총선 이후, 2007년 오트몽(Outremont)의 보궐선거에서 신민주당 후보 토마스 멀케어(Thomas Mulcair)가 승리하면서 신민주당 의원단은 30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신민주당이 퀘벡에서 의석을 획득한 두 번째 사례이자 17년 만의 일이었다. 2008년 총선에서는 37석을 획득하여 1988년 43석 이후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여기에는 에드먼턴-스트라스코나 선거구에서의 돌파구도 포함되었는데, 신민주당이 앨버타에서 의석을 획득한 것은 당 역사상 두 번째였다.
2011년 총선에서 신민주당은 역대 최다인 103석을 획득하여 당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야당이 되었다. 퀘벡에서 75석 중 59석을 획득하는 역사적인 돌파구를 마련했으며, 몬트리올을 장악하고 퀘벡 시티와 오타와를 휩쓸었다. 이는 당 역사상 단 두 명의 당선자만 배출했던 주에서 당 의원의 대다수가 나오게 된 것을 의미한다. 퀘벡에서 신민주당의 성공은 47석 중 4석만을 남기고 몰락한 퀘벡 블록(Bloc Québécois)과 전국적으로 34석으로 급감하며 최악의 결과를 기록한 자유당의 몰락과 대비된다. 이는 신민주당이 공식 야당 자리를 차지하면서 자유당이 정부 또는 공식 야당이 아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신민주당은 이제 보수당 다수 정부에 맞서는 하원의 제2당이 되었다.
2011년 7월, 레이턴은 새로운 암 진단을 받고 9월 의회 재개 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건강상의 이유로 휴가를 발표했다. 그는 신민주당 대표 및 야당 대표직을 유지했다. 신민주당은 그가 제안한 헐-에일머(Hull—Aylmer) 의원 니콜 터멜(Nycole Turmel)이 그의 부재 중 당 대표 직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레이턴은 2011년 8월 22일 암으로 사망했다.[96]
2015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승리하고 보수당에게 공식 야당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2016년 4월 10일, 토마스 멀케어(Tom Mulcair) 당수가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고 발표했다.[89]
3. 이념 및 정책
신민주당(NDP)은 1961년 캐나다노동총연맹(CLC)과 협동연방(CCF)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CCF는 포퓰리즘, 농업주의, 사회주의적 뿌리에서 시작하여 현대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성장했다. CCF가 기독교좌파와 사회복음 운동의 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NDP는 세속주의적이고 다원적인 정당이다.[49] NDP는 뉴 레프트의 관심사를 포괄하여 LGBT 권리, 세계 평화, 환경 관리 등의 문제를 옹호한다.[50]
NDP는 혼합경제와 광범위한 복지를 지지하며, 좌파,[14][15] 민주사회주의 계파를 가지고 있다.[52] NDP는 진보적 사회민주당들의 정치 국제기구인 진보동맹의 회원이다.[2]
NDP 헌장은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사회주의 모두 당에 영향을 미쳤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민주사회주의" 전통을 당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언급하며, 보다 급진적인 협동연방(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의 연장선상에 있는 당의 역사를 명확히 포함하고 있다.
3. 1. 주요 정책
신민주당은 공공 의료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54] 이 당은 "모든 캐나다인이 신용카드가 아닌 건강보험 카드로 필요한 처방약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전국적인 보편적 공공 약제 프로그램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모든 사람의 건강 결과를 개선한다"는 목표를 추구한다.[54]또한, 전국 의료 시스템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여 치과 치료, 정신 건강 치료, 안과 및 청각 치료, 불임 시술 및 처방약을 포함시키는 것을 지지한다. 특히 치과 진료와 관련하여, 신민주당은 "캐나다인 3명 중 1명은 치과 보험이 없고, 6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비용 때문에 매년 치과를 방문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이 극심해져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을 때까지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55]
신민주당은 혼합경제와 광범위한 복지를 지지하며,[51] LGBT 권리, 세계 평화, 환경 관리 등의 문제를 옹호한다.[50] 당 헌장에서는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사회주의 모두가 당에 영향을 미쳤음을 명시하고 있다.[53]
3. 2. 팔레스타인 문제
신민주당(NDP)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지지한다. 2024년 3월, 신민주당의 팔레스타인 관련 동의안이 자유당과의 상당한 수정 합의 후 통과되었다. 특히, 이 동의안은 정부가 "팔레스타인 국가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것"을 촉구했지만, 이는 "협상된 두 국가 해결 방안의 일환으로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립을 위해 노력할 것"으로 수정되었다.[56]4. 주 및 준주 조직
대부분의 다른 캐나다 연방 정당들과 달리, 신민주당(NDP)은 주 및 준주 정당들과 통합되어 있다. NDP의 주 또는 준주 지부 회원이 되면 연방 정당 회원 자격이 자동으로 부여된다. 이는 한 사람이 연방 및 주 차원에서 서로 다른 정당의 회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회원 명단은 주와 준주에서 관리한다.
누나부트, 노스웨스트 준주, 퀘벡는 세 가지 예외이다. 누나부트와 노스웨스트 준주는 준주 의회가 무소속 합의 정부를 채택하고 있고, 각 준주가 단 하나의 연방 선거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연방 NDP는 해당 선거구 협회에 의해 홍보된다.
퀘벡에서는 역사적인 퀘벡 신민주당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연방 정당과 통합되었으나, 퀘벡 정당이 주권주의 강령을 채택한 후 두 정당은 구조적 유대를 끊기로 합의했다. 그 이후로 연방 NDP는 퀘벡 지부[57]에 의해서만 퀘벡에서 대표되었으며, 이 지부의 활동은 연방 수준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2011년 연방 선거에서 퀘벡에서의 돌풍 이후, NDP는 다음 퀘벡 총선에 맞춰 퀘벡에 주 정당을 재건할 계획을 발표했다.[58] 현대 퀘벡 신민주당은 2014년 1월 30일 퀘벡 최고 선거 관리관에 등록되었지만,[59] 2014년 선거에서 어떤 후보도 지명하지 못했다. 새로운 NPDQ는 퀘벡의 최근 주법이 주 정당이 연방 정당과 제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연방 NDP와 제휴하지 않는다.[60]
2016년 이후 퀘벡의 NDP는 지역 지도자와 지지 기반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쇠퇴해왔다.[61][62]
가장 성공적인 주 지부는 사스캐처원 신민주당으로, 1944년 토미 더글러스 하에서 협동연방(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으로서 처음 집권했으며, 그 이후 주 선거에서 11번 승리했다. 더글러스는 사스캐처원 주지사로서 캐나다 최초의 공공 자금 조달 보편적 의료 서비스 시스템을 주에 도입했기 때문에 캐나다에서 종종 "의료보험의 아버지"로 불린다. 사스캐처원 지부의 역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NDP는 2004년, 2006년, 2008년, 2011년 연방 선거에서 사스캐처원에서 의석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63] 그러나 2015년 연방 선거에서는 3석을 얻었다.[64] NDP는 보수당이 사스캐처원을 석권한 2019년 선거에서 다시 한번 사스캐처원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33]
신민주당은 또한 앨버타, 브리티시컬럼비아, 매니토바, 노바스코샤, 온타리오, 유콘에서 정부를 구성했다.
5. 역대 지도자
(출생–사망)
(1904–1986)
(서스캐처원)
버내비—코퀴틀람
나나이모—코위천—더 아일랜드
진보보수당
자유당
자유당
(1909–1981)

(1936–2024)

오샤와
진보보수당
자유당
자유당
진보보수당
(1936년생)

진보보수당
자유당
(1944–2022)

(노바스코샤)
핼리팩스
(1950–2011)

자유당
보수당
(1942년생)

(1954년생)

자유당
(1979년생)

(온타리오)
버내비 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