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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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광수는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심액의 아들이자 남인 산림으로 활동했다. 그는 동생 심광사의 장인 이명준에게 학문을 배웠고, 1627년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635년 봉림대군의 사부로 발탁되었으며,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척화론을 주장했다. 이후 인조와 효종, 현종 대에 걸쳐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나,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송논쟁이 벌어졌을 때 남인 산림으로서 3년설을 주장하다 서인에게 패하여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사후 숙종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청안군에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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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나라에 항거하다 분신자결한 김익겸은 사헌부 지평에 증직되고 충렬사에 제향되었으며,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와 소설가 김만중의 아버지이다. - 청남 - 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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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는 조선 후기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 해석과 북벌론을 주장한 남인Strong 계열의 문신이자 학자로, 예송 논쟁과 당쟁에 관여하다 경신환국으로 사사되었다.
심광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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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심광수 |
한자 이름 | 沈光洙 |
자 | 희성(希聖) |
호 | 노연(魯淵) |
출생일 | 1598년 |
사망일 | 1662년 |
국적 | 조선 |
당파 | 남인 |
봉호 | 청안군(靑安君) |
분야 | 성리학 |
학력 | |
학력 | 1627년(인조 5년) 생원(生員)·진사(進士)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감 |
경력 | |
주요 경력 | 왕자사부 |
주요 경력 | 사헌부 지평 |
주요 경력 | 세자시강원 진선 |
주요 경력 | 사헌부 장령 |
주요 경력 | 경연관 |
주요 경력 | 승지 |
주요 경력 | 공조참의 |
가족 | |
아버지 | 심액(沈詻) |
어머니 | 정경부인 안동 권씨(安東 權氏) |
형제 | 심광사(동생, 종친부전부) |
배우자 | 증 정부인 안동 권씨(安東 權氏) |
자녀 | 1남 1녀 |
양자 | 심백(沈栢, 동생 심광사의 아들) |
2. 가계
증조부는 경기도 관찰사 증영의정 청파부원군(靑坡府院君) 심전(沈銓)이고, 조부는 경기도 관찰사 증영의정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 심우승(沈友勝)이며, 부친은 이조판서 청송군(靑松君) 심액(沈詻)이다. 어머니는 병조판서 권징(權徵)의 딸인 정경부인 안동 권씨이다.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외조부이자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손자 윤이석(尹爾錫)의 장인은 심광사(沈光泗)로 그의 형이고, 남인 산림(南人 山林) 윤선도의 사위 심광면(沈光沔)과는 사촌 지간이다.
심광수는 동생 심광사의 장인 이명준에게 학문을 배웠다. 1627년(인조 5년) 생원, 진사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1635년(인조 13년) 봉림대군(효종)의 사부(師傅)로 뽑혔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했으며, 최명길의 참형을 요구하고 소현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는 것에 반대하는 등 강력한 척화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춘천으로 퇴거하였다.[1][2][3]
3. 생애
인조는 산림 은일 우대 정책으로 심광수를 사헌부 지평에 임명하였다. 효종은 심광수를 세자시강원 진선, 사헌부 장령, 첨지중추부사 겸 경연관, 상의원 정, 사복시 정, 승지로 임명하였고, 현종은 경연관, 공조참의로 임명하였다.[1]
효종 승하 후 현종 즉위 초, 자의대비 복상 문제를 놓고 서인과 남인 간에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심광수는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 산림의 기년설(1년설)에 맞서 허목, 윤휴, 윤선도와 함께 3년설을 주장했으나, 서인에 패하여 윤선도와 함께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일찍 사망하였다.[1][4][5]
3. 1. 초기 생애
심광수는 동생 심광사(沈光泗)의 장인 이명준(李命俊)에게 학문을 배워 1627년(인조 5년) 생원(生員)·진사(進士)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으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1635년(인조 13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사부(師傅)로 뽑혔다.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인조를 호종했으며 강력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여 화의론자(和議論者)인 최명길의 참형을 요구하고, 당시 세자였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볼모로 청(淸)에 보내는 데에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춘천으로 퇴거하였다.
이후, 인조가 산림 은일(山林 隱逸) 우대 정책의 일환으로 사헌부 지평에 임명하였다. 효종은 세자시강원 진선(世子侍講院 進善), 사헌부 장령, 첨지중추부사 겸 경연관, 상의원 정(尙衣院 正), 사복시 정(司僕寺 正), 승지로 임명하였고, 현종은 경연관, 공조참의로 임명하였다.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효종의 양모이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장렬왕후)가 3년 복상을 입어야 하느냐 1년 복상을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서인(西人)과 남인(南人)간에 예송논쟁(禮訟論爭)이 벌어졌다. 이때 심광수는 기년설(1년설)을 주장하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서인 산림들에 대항하여, 남인 산림 허목(許穆),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3년설을 주장하였으나, 서인에 패해 윤선도와 함께 유배당했다. 윤선도는 유배지에서 오래 살아 국보급의 주옥같은 명시와 명문, 명화등을 수두룩하게 남긴 반면, 그는 유배지에서 일찍 죽었다.[1][2][3][4][5]
3. 2. 관직 생활과 붕당정치
심광수는 동생 심광사(沈光泗)의 장인 이명준(李命俊)에게 학문을 배워 1627년(인조 5년) 생원(生員)·진사(進士)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으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1] 1635년(인조 13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사부(師傅)로 뽑혔다.[1]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인조를 호종했으며 강력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여 화의론자(和議論者)인 최명길의 참형을 요구하고, 당시 세자였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볼모로 청(淸)에 보내는 데에도 반대하였다.[1][2][3] 그러나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춘천으로 퇴거하였다.[1]
이후 인조는 산림 은일(山林 隱逸) 우대 정책의 일환으로 심광수를 사헌부 지평에 임명하였다. 효종은 세자시강원 진선(世子侍講院 進善), 사헌부 장령, 첨지중추부사 겸 경연관, 상의원 정(尙衣院 正), 사복시 정(司僕寺 正), 승지로 임명하였고, 현종은 경연관, 공조참의로 임명하였다.[1]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효종의 양모이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장렬왕후)가 3년 복상을 입어야 하느냐 1년 복상을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서인(西人)과 남인(南人)간에 예송논쟁(禮訟論爭)이 벌어졌다. 이때 심광수는 기년설(1년설)을 주장하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서인 산림들에 대항하여, 남인 산림 허목(許穆),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3년설을 주장하였으나, 서인에 패해 윤선도와 함께 유배당했다.[1][4][5] 윤선도는 유배지에서 오래 살아 국보급의 주옥같은 명시와 명문, 명화등을 수두룩하게 남긴 반면, 그는 유배지에서 일찍 죽었다.[1]
3. 3. 예송 논쟁과 유배
1635년(인조 13년)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사부, 師傅)으로 뽑혔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했으며 강력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여 화의론자(和議論者)인 최명길의 참형을 요구하고, 당시 세자였던 소현세자를 볼모로 청에 보내는 데에도 반대하였다.[1] 그러나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춘천으로 퇴거하였다. 이후에, 인조가 산림 은일(山林 隱逸) 우대 정책의 일환으로 사헌부 지평, 효종이 세자시강원 진선(世子侍講院 進善), 사헌부 장령, 첨지중추부사 겸 경연관, 상의원 정(尙衣院 正), 사복시 정(司僕寺 正), 승지, 현종이 경연관, 공조참의로 임명하였다.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효종의 양모이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장렬왕후)가 3년 복상을 입어야 하느냐 1년 복상을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서인과 남인간에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기년설(1년설)을 주장하는 송시열과 송준길의 서인 산림들에 대항하여, 남인 산림 허목, 윤휴, 윤선도와 함께 3년설을 주장하였으나, 서인에 패해 윤선도와 함께 유배당했다. 윤선도는 유배지에서 오래 살아 국보급의 주옥같은 명시와 명문, 명화등을 수두룩하게 남긴 반면, 그는 유배지에서 일찍 죽었다.[1][2][3][4][5]
4. 사후
5. 가계도
wiki
경기도 관찰사 증영의정 청파부원군(靑坡府院君) 심전(沈銓)의 증손이고, 경기도 관찰사 증영의정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 심우승(沈友勝)의 손자이며, 이조판서 청송군(靑松君) 심액(沈詻)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병조판서 권징(權徵)의 딸이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손자 윤이석(尹爾錫)의 장인이자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외조부인 심광사(沈光泗)의 형이고, 남인 산림(南人 山林) 윤선도의 사위 심광면(沈光沔)과는 사촌지간이다.
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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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인조실록
[2]
서적
효종실록
[3]
서적
현종실록
[4]
간행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문서
국역 국조인물고 - 심광수 묘갈문
[6]
문서
국역 국조인물고 - 심광수 묘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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