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부 알파라즈 알이스파하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부 알파라즈 알이스파하니는 9세기 페르시아에서 태어나 바그다드에서 성장한 아랍의 학자이자 작가이다. 그는 우마이야 왕조의 후손으로, 이슬람 세계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지식을 쌓았다. 알이스파하니는 방대한 분량의 백과사전인 《노래의 책》을 저술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며, 이 책은 아랍 시, 음악, 시인, 음악가에 대한 일화와 풍속을 담고 있다. 그는 또한 《탈리비드 전투》, 《시를 짓는 노예 여성들》 등 여러 저작을 남겼으며, 그의 작품은 아랍 문학과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랍의 역사가 - 아마드 이븐 야햐 알발라두리
    아마드 이븐 야햐 알발라두리는 9세기 아바스 왕조 시대 페르시아 출신 역사가이자 지리학자로, 아랍인들의 정복 활동과 영토 역사를 다룬 《푸투흐 알불단》 등의 저서를 남겼다.
  • 아랍의 시인 - 아부 누와스
    아부 누와스는 8세기 압바스 왕조 시대의 아랍 시인으로, 술과 소년애를 주제로 한 파격적인 시를 통해 명성을 얻었으며, 아랍 문학사에서 새로운 시풍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아랍의 시인 - 칼릴 지브란
    레바논 출신의 칼릴 지브란은 아랍어와 영어를 사용하여 시, 소설, 수필, 그림, 철학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작가이자 화가로, 《예언자》와 같은 작품으로 종교, 사랑,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며 세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 897년 출생 - 경순왕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고려에 항복하여 왕건의 사위가 되었으며 고려 경종의 장인이자 사심관 제도의 첫 번째 인물이다.
  • 897년 출생 - 양융연
    양융연은 오나라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홍농군왕의 자리를 계승하고 오나라 국왕으로 즉위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했으나, 서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사후 선왕으로 시호를 받았다.
아부 알파라즈 알이스파하니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우마이야 왕조 마지막 칼리프인 마르완 2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란이스파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아바스 왕조 시기 이라크로 이주하여 부와이흐 가문의 보호를 받았다.

그는 당대 유명 음악가 이브라힘 알마우실리가 정리한 자료 등을 바탕으로 고대부터 아바스 왕조 시대까지 아랍인의 시와 노래, 관련 인물들의 전기를 집대성한 기념비적인 저작 『노래의 책』(Kitāb al-Aghānī|키탑 알아가니ar)을 편찬했다. 이 책은 아랍 문학아랍 음악, 당시 풍속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노래의 책』은 완성 후 함단 왕조의 군주 사이프 알다울라에게 헌정되었으며, 알안달루스의 하캄 2세를 비롯한 당대 지식인과 권력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후대의 역사가 이븐 할둔은 『역사 서설』에서 이 책을 "아랍인의 문서고"라고 칭송했다.

2. 1. 가문 배경

알이스파하니(al-Isfahani)라는 별칭은 이란 고원의 도시 이스파한을 가리키지만[1], 이것이 반드시 그의 출생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2][3][4][5][6] 이 별칭은 그의 가문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알이스파하니는 아버지 쪽 친척을 언급할 때 이 수식어를 사용했다.[7][8]

이븐 하즘(994–1064)에 따르면, 그의 조상 중 일부인 마지막 우마이야 칼리프 마르완 이븐 무함마드(691–750)의 후손들이 이스파한에 정착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자료는 알이스파하니가 마르완 2세의 후손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이븐 알나딤만이 그가 히샴 이븐 압드 알말리크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알이스파하니 가문의 가장 오래된 정보는 증조부 아흐마드 이븐 알하얌(Ahmad ibn al-Ḥithām)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는 835년에서 847년 사이에 사마라에 정착했다. 따라서 '알이스파하니'라는 별칭에도 불구하고, 가문은 실제로는 이스파한보다는 주로 사마라에 기반을 두었고 이후 바그다드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키타브 알아가니』에 따르면, 증조부 아흐마드 이븐 알하얌은 사마라에서 특권적인 삶을 누렸으며, 그의 아들들은 당시 아바스 왕조 수도의 엘리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아들 중 압드 알아지즈 이븐 아흐마드는 "알무타와킬(847–861 통치) 시대의 고위 서기 중 한 명(''min kibār al-kuttāb fī ayyām al-Mutawakkil'')"이었다. 다른 아들이자 알이스파하니의 할아버지인 무함마드 이븐 아흐마드는 아바스 왕조 관리, 재상 이븐 알자야트(847년 사망), 서기 이브라힘 이븐 알아바스 알술리(792–857), 재상 우바이다 알라 이븐 술레이만(901년 사망) 등과 교류했으며, 탈리비드(알리의 후손) 명사들과도 연관이 있었다. 그중에는 바누 하심의 지도자였던 알후세인 이븐 알후세인 이븐 자이드도 포함된다. 이러한 아바스 왕조 궁정과의 긴밀한 관계는 무함마드의 아들들인 알하산과 알후세인(알이스파하니의 아버지)에게까지 이어졌다.

알이스파하니는 『아가니』 여러 곳에서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 이븐 타와바(Yaḥyā ibn Muḥammad ibn Thawāba)를 외할아버지로 언급한다. 타와바 가문이 시아파였고 알이스파하니에게 시아파적 성향을 물려주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타와바 가문을 시아파로 명확히 언급한 것은 후대 인물인 야쿠트 알하마위(1178–1225)의 기록에서만 나타난다.

당시 아바스 왕조 엘리트 가문 중에는 시아파 성향을 보이거나 알리 가문 및 그 지지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았다. 알이스파하니의 가문 역시 알리의 후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타와바 가문과 같은 시아파 성향 가문과 교류하며 알리와 알리 가문에 대한 존경심을 공유했을 수 있다. 그러나 타와바 가문이 극단적인 시아파였다는 증거는 없으며, 알이스파하니 가문에 대한 정보 부족과 당시 종파적 정체성의 유동성을 고려할 때, 알리 가문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명확한 시아파 정체성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요약하면, 알이스파하니는 아바스 왕조의 관리, 서기, 명사, 그리고 알리 가문 인사들을 포함하는 엘리트 네트워크에 깊이 연관된 가문 출신이었다.

2. 2. 출생 및 사망 연도

알 이스파하니의 출생 및 사망 연도는 일반적으로 알-카티브 알-바그다디가 제시한 바에 따라 897년 또는 898년 출생, 967년 사망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알 이스파하니의 제자인 무함마드 이븐 아비 알-파와리스의 증언에 기초한 것이다.[4] 그러나 다른 자료에서는 다른 연도를 제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븐 알-나딤(995년 또는 998년 사망)은 970년대(이슬람력 360년대)를, 아부 누아임 알-이스파하니(948–1038년)는 967–968년(이슬람력 357년)을 사망 연도로 제안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연도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의 사망 시기를 967년 이전으로 기록한 자료는 없지만, 그 이후로 기록한 자료는 여럿 존재한다. 또한, 알 이스파하니가 저술했다고 알려진 ''키타브 아다브 알-구라바''(《이방인의 예절》)에는 그가 967년에 여전히 젊음의 절정기에 있었다는 내용이 있어, 967년 사망설과 배치된다. 다만, 이 책이 실제로 알 이스파하니의 저작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논란이 있다.

그의 제자들과 그에게 정보를 제공했던 사람들의 생몰 연대를 고려하여 추정해 보면, 알 이스파하니는 902년 이전에 태어나 960년 이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4]

2. 3. 교육 및 경력

아부 알파라즈 알이스파하니는 페르시아 이스파한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과 초기 학문은 바그다드에서 보냈다. 그는 마지막 우마이야 왕조 칼리프인 마르완 2세의 직계 후손이었으며[5], 이러한 배경으로 알-안달루스의 우마이야 통치자들과도 연관이 있어 서신을 주고받고 자신의 작품 일부를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찍부터 고대 아랍 유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명성을 얻었다.[6]

그는 지식을 넓히기 위해 이슬람 세계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후년에는 함단 왕조의 통치자 세이프 앗다울라가 있는 알레포와 부와이 왕조의 재상 이븐 아바드가 있는 라이 등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대표작인 《노래의 책》(Kitāb al-Aghānī|키탑 알아가니ar)을 세이프 앗다울라에게 헌정했다. 이 책은 아바스 왕조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 시대의 음악가인 이브라힘 알마우실리가 정리한 자료 등을 토대로 고대부터 아바스 왕조 시대까지 아랍인의 시가(詩歌)와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를 집대성한 것으로, , 아랍 음악, 시인, 음악가, 관련 일화 및 풍속 등을 담고 있는 백과사전적 저작이다. 총 21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집필에는 5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노래의 책》은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세이프 앗다울라는 이 책을 헌정받고 금화 1000개를 주었으며, 부족하다고 여겨 사과하기까지 했다. 알-안달루스의 하캄 2세 역시 이 책을 원하여 금화 1000개를 보내 사본을 입수했다. 부와이 왕조의 재상 이스마일 빈 아바드는 평소 30마리의 낙타로 책을 운반했지만, 《노래의 책》을 얻은 후로는 이 책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고 전해진다. 후대의 역사가 이븐 할둔은 그의 저서 『역사 서설』에서 이 책을 "아랍인의 문서고"라고 칭찬하며 그 가치를 인정했다.

알이스파하니는 작가로서 명료하고 간결한 문체를 구사했으며, "놀라운 진솔함과 솔직함"으로 내용을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정확한 출처(아랍어: أسانيد|아사니드ar) 기록과 정보의 세심한 검증을 중시했으며, 출처 자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도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때로는 시, 노래, 창작자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직접 밝히기도 했으며, 상충하는 정보에 대해서는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거나 가장 신뢰할 만한 설명을 제시했다.

개인적인 성향으로는, 우마이야 가문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시아파 성향을 보였다는 점이 후대 전기 작가들에게 주목받았다. 그의 가족 관계와 쿠파에서의 학습 경험 등을 고려할 때 그의 시아파 신념은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일부 초기 자료에서는 그를 자이디파(Zaydī)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그가 특정 이맘을 강조하거나 알리 계열의 반란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정확한 종파적 입장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는 알리와 그의 후손들에게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이전 칼리프들의 권위를 훼손하지는 않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2. 4. 성격, 선호도 및 신념

알이스파하니는 아바스 왕조 시대의 유명 음악가였던 이브라힘 알 마우실리(이샤크 이븐 이브라힘 알 마우실리)가 정리한 100개의 시와 악보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고대부터 당대까지 아랍인의 시와 노래를 집대성한 방대한 저작 『노래의 책』(Kitāb al-Aghānī|키타브 알 아가니ar)을 편찬했다. 그는 이 책을 포함한 저술 활동에서 정보의 출처를 세심하게 기록하고 명시하는 학문적 태도를 보였다. 덕분에 『노래의 책』은 후대에 잃어버린 노래 책이나 음악가 전기를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었다.

그의 저작물 중 일부는 그의 종교적,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마카틸 알-탈리비인』(Maqātil al-Ṭālibiyyīn|마카틸 알 탈리비인ar)은 아부 탈리브의 후손 중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들의 기록인데, 서문에서 "행동이 칭찬할 만하고 믿음이 올바른(maḥmūd al-ṭarīqa wa-sadīd al-madhhab|마흐무드 알 타리콰 와 사디드 알 마드하브ar)" 탈리비들을 다룬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알-투시가 언급한 두 작품, 즉 알리와 그의 가족에 관한 쿠란 구절을 다룬 책(Kitāb mā nazala min al-Qurʾān fī Amīr al-Muʾminīn wa-ahl baytihi ʿalayhim al-salām|키타브 마 나잘라 민 알 쿠르안 피 아미르 알 무미닌 와 아흘 바야티히 알라야힘 알 살람ar)과 파티마가 파다크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담은 책(Kitāb fīhi kalām Fāṭima ʿalayhā al-salām fī Fadak|키타브 피히 칼람 파티마 알라야 알 살람 피 파다크ar)이 실제로 알이스파하니의 저술이라면, 이는 『마카틸 알-탈리비인』과 더불어 그의 시아파 지지 성향을 강하게 시사한다.

흥미로운 점은 알이스파하니 자신이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였던 마르완 2세의 8대손이라는 사실이다. 우마이야 왕조의 후예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 활동에서는 시아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존경심이 드러난다.

3. 주요 저작

아부 알파라즈 알이스파하니는 다방면에 걸쳐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작은 20권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백과사전인 《키타브 알 아가니》(음악의 책)이다. 이 외에도 그는 시를 직접 창작했으며, 메소포타미아이집트 지역 수도원에 관한 시 선집이나 족보 관련 저술 등 다양한 주제의 글을 남겼다.[6]

3. 1. 현존하는 저작

아부 알파라즈 알이스파하니는 여러 작품을 남겼으나, 현재까지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일부이다. 일부는 후대 문헌의 인용을 통해 내용의 일부가 보존되었고, 네 작품은 필사본 형태로 전해져 편집 및 출판되었다.[6]

'''키타브 알 아가니''' (كتاب الأغاني|키타브 알 아가니ara, 노래의 책): 아부 알파라즈의 가장 방대한 저작이자 대표작으로, 총 20권(후에 1권 추가)으로 구성된 백과사전적 작품이다.[6] 이 책은 이슬람 이전 시대부터 저자가 활동했던 10세기까지 아랍의 시와 노래, 음악가, 시인, 관련 일화, 풍속 등을 집대성했다.[8] 특히 메카, 다마스쿠스, 이스파한, 바그다드 등 주요 도시의 문화와 우마이야 왕조 궁정 생활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 당대 아랍 문명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8] 아부 알파라즈는 이 책을 집필하는 데 50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전해지며, 이스나드(전승 사슬) 방식을 사용하여 정보의 출처를 밝혔다. 이는 후대 연구자들이 잃어버린 이전 자료들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원래 시와 함께 악보가 기록되었으나 현재는 해독이 불가능하다. 이 책이 함단 왕조의 군주 사이프 앗-다울라에게 헌정되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부와이흐 왕조의 재상 알무할라비에게 헌정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이 책의 가치는 당대에도 높이 평가받아, 후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하캄 2세가 금화 1,000개를 보내 사본을 구하려 했을 정도였다. 이븐 할둔은 그의 저서 《역사 서설》에서 이 책을 "아랍인의 문서고"라고 칭찬했다.

'''마카틸 알탈리비인''' (مقاتل الطالبيين|마카틸 앗 탈리비인ara, 탈리비 가문 순교자들): 이슬람 초기부터 책이 완성된 925년경까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아부 탈리브 이븐 압드 알 무탈리브의 후손 약 200여 명의 전기를 모은 책이다. 아부 알파라즈는 서문에서 살해, 독살, 박해를 피해 도망치거나 감옥에서 사망한 인물들의 기록에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이 책은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시대 알리 가문 후예들의 봉기와 박해에 대한 중요한 1차 사료로, 특히 시아파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각 인물의 전기에는 이름, 혈통, 때로는 개인적 특성과 관련된 일화, 죽음에 대한 설명, 관련 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연대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초의 순교자인 자파르 이븐 아비 탈리브부터 시작한다.

'''아다브 알구라바''' (أدب الغرباء|아다브 알 구라바ara, 이방인의 예절): 고향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는 이방인들의 경험과 감정을 다룬 이야기 모음집이다. 여행이나 망명 중 겪는 고난, 그들이 남긴 격언, 술을 마시기 위해 수도원을 방문하는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다만, 이 책이 실제로 아부 알파라즈의 저작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알이마 알샤와이르''' (الإماء الشواعر|알 이마 앗 샤와이르ara, 시를 짓는 노예 여성들): 아바스 왕조 시대에 시를 짓는 재능을 가졌던 노예 여성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후원자였던 재상 알무할라비의 요청으로 집필되었다. 아부 알파라즈는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는 주목할 만한 여성 시인을 찾기 어려웠다고 언급하며, 아바스 시대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연대순으로 배열했다. 총 31개 장에 걸쳐 32명의 여성 시인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각 인물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관련 시, 일화 등을 담고 있다.

완전한 필사본은 없지만 후대 저술가들의 인용을 통해 내용의 일부가 알려진 작품들도 있다.

  • '''알키얀''' (القيان|알 키얀ara): 노래하고 시를 짓는 재능을 가진 여성 노예들에 대한 전기 모음집이다.
  • '''알디야라트''' (الديارات|알 디야라트ara):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등지의 기독교 수도원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6] 수도원의 위치, 역사, 지리적 특징 등을 다루었다.
  • '''무자라드 알아가니''' (مجرد الأغاني|무자라드 알 아가니ara): 《키타브 알 아가니》의 요약본으로 추정된다. 칼리프 알마문의 시가 인용된 단편이 남아있다.


이 외에도 족보, 특정 주제에 대한 보고서, 음악 관련 저술 등 다수의 작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4. 평가 및 영향

아부 알파라즈 알이스파하니가 50년에 걸쳐 집필한 『노래의 책』(''Kitāb al-Aghānī|키탑 알아가니ar'')은 고대부터 아바스 왕조 시대까지 아랍인의 시가(詩歌)와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를 집대성한 작품이다. 이 책은 , 아랍 음악, 시인, 음악가에 대한 일화와 당시의 풍속을 담고 있는 백과사전적 성격을 지니며, 총 21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랍 문학, 음악, 역사, 사회, 문화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완성된 『노래의 책』은 함단 왕조의 군주 사이프 알다울라에게 헌정되었다. 사이프 알다울라는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아부 알파라즈에게 금화 1000개를 하사하고도 부족하다며 사과했다고 전해진다. 안달루스의 우마이야 왕조 칼리프였던 하캄 2세 역시 이 책을 탐내어 금화 1000개를 보내 사본을 구하려 했다. 또한, 부와이흐 왕조의 재상이었던 이스마일 빈 아바드는 평소 30마리의 낙타를 동원해 서적을 운반했지만, 『노래의 책』을 얻은 후에는 이 책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는 일화도 있다.

후대의 학자 이븐 할둔은 그의 저서 『역사 서설』에서 『노래의 책』을 가리켜 "아랍인의 문서고"라고 극찬하며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참조

[1] 간행물 Abu 'l-Faradj al-Isbahani
[2] 웹사이트 ABU'L-FARAJ EṢFAHĀNĪ https://web.archive.[...] Encyclopaedia Iranica 2017-04-02
[3] 논문 The Status and Roles of the Secular Musicians in the Kitab al-Aghani (Book of Songs) of Abu al-Faraj al-Iṣbahānī Asian Music, Vol. 17, No. 1
[4] 논문 Abū al-Faraj ʿAlī b. al-Ḥusayn al-Iṣfahānī, the Author of the Kitāb al-Aghānī https://en.wikiversi[...] 2020
[5] 서적 Ibn Khallikan's Biographical Dictionary, Volume 3 https://books.google[...] Oriental Translation Fund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1842
[6] 간행물 Abulfaraj
[7] 문서 al-Muwashshā
[8] 서적 Chambers Biographical Dictionary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