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다다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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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카가 다다후유는 1327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서자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사가미의 도쇼지에 맡겨졌다. 이후 다다요시의 양자가 되었고, 다카우지와의 갈등 속에서 나가토 단다이에 임명되어 규슈로 파견되었다. 간노의 소란을 겪으며 다카우지와 대립했고, 남조 세력과 협력하여 교토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사이고쿠에서 은거하다가 1400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다섯 아들을 두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가키쓰의 난 이후 쇠퇴했다.
다다후유는 가랴쿠 2년(1327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서자로 태어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머니 에치젠노 쓰보네(越前局)는 출신을 알 수 없는 여성이었다.[1] 어린 시절 이름은 이마쿠마노(新熊野)였다.
다다후유는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전해지며, 적자는 후유우지이다. 후유우지의 아들 요시타카는 가키쓰의 난에 연루되어 사망했다.[25] 후유우지 이외의 아들들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막내인 호잔 켄친(宝山乾珍)은 젯카이 츄신의 제자로 교토 상국사 녹원원의 탑주였으나 1441년 가키쓰의 난 이후 사망했다.[24] 승적에 들어간 아들 중 한 사람은 다다후유가 발원해 지었다고 전하는 승강사의 주지였으며, 에도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약했던 아시카가 기잔(足利義山) 등이 있다.
2. 생애
어린 시절 다다후유는 친아버지인 다카우지에게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고 사가미 가마쿠라의 도쇼지(東勝寺)에 맡겨졌다. 1345년) 무렵 환속하여 교토로 상경, 다카우지에게 부자로서의 대면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11] 이후 도쿠세이겐 겐에의 거처에서 배우면서 교토에서 근근히 살아가다가 다다요시에게 양자로 들어가 다다후유(直冬)라는 이름을 받았다.
1348년, 남조 세력 토벌을 위해 기이로 출진하여 큰 공을 세웠다.[13] 1349년 4월, 나가토 단다이(長門探題)에 임명되어 사이고쿠(西国)로 파견되었다.[14]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으로 다다요시와 모로나오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자, 다다후유는 다다요시를 지원했다.[14] 다다요시가 실각한 후, 다다후유는 규슈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다카우지에 맞섰다. 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 등과 협력하여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를 몰아내고,[20] 한때는 규슈 단다이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다요시가 사망하면서 다다후유는 고립되었고, 결국 다카우지에게 패배하여 주고쿠 지방으로 도피했다.
1358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사망하고, 남조 세력도 막부의 거듭되는 공세에 쇠퇴하여, 1363년)에는 오우치 히로요, 야마나 도키우지 등도 막부에 항복하여 다다후유 세력은 와해되었다. 1366년)의 서장을 마지막으로 다다후유는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다.[21]
다다후유가 사망한 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다다후유가 사망했을 때 나이가 일흔네 살이었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언급된다. 오에이 7년(1400년 4월 5일)에 이와미에서 서거하였다고 적고 있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22]
2. 1. 어린 시절
다다후유는 가랴쿠 2년(1327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서자로 태어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의 어머니 에치젠노 쓰보네(越前局)는 출신을 알 수 없는 여성이었다.[1] 다다후유의 어린 시절 이름은 이마쿠마노(新熊野)였다.
어린 시절 다다후유는 친아버지인 다카우지에게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고 사가미 가마쿠라의 도쇼지(東勝寺)에 맡겨졌다. 도쇼지에서 문제아로 여겨졌던 다다후유는 고코쿠 6년/조와 원년(1345년) 무렵 환속하여 교토로 상경, 다카우지에게 부자로서의 대면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11] 이후 도쿠세이겐 겐에의 거처에서 배우면서 교토에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다다후유를 눈여겨본 겐에는 다카우지의 동생 다다요시에게 이 문제를 상담하였다. 다다요시는 그의 소개로 다다후유와 면담했지만, 다카우지로부터는 부자로서의 대면이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다다요시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다다후유를 양자로 삼았고, 다다후유(直冬)라는 이름을 받았다.
2. 2. 첫 출진과 나가토 단다이 임명
쇼헤이 3년/조와 4년(1348년), 다다후유는 남조 세력 토벌을 위해 기이로 출진하여 큰 공을 세웠다.[13] 그러나 아버지 다카우지는 다다후유의 공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요시아키라, 고노 모로나오 등 막부 요인들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13] 양아버지 다다요시는 다다후유를 교토에서 멀리 보내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13]
쇼헤이 4년/조와 5년(1349년) 4월, 다다후유는 나가토 단다이(長門探題)에 임명되어 사이고쿠(西国)로 파견되었다.[14] 이는 다다요시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지만, 일설에는 다카우지가 다다후유를 멀리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해석도 있다.[15] 나가토 단다이는 과거 가마쿠라 막부가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한 직책이었으나,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상설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다후유는 쇼군 다카우지의 아들이었기에 효조슈(評定衆) 등 많은 이들이 그를 수행했다.
2. 3. 간노의 소란과 다카우지와의 대립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으로 다다요시와 모로나오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자, 다다후유는 다다요시를 지원했다.[14] 다다요시가 실각한 후, 다다후유는 규슈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다카우지에 맞섰다. 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 등과 협력하여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를 몰아내고,[20] 한때는 규슈 단다이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다요시가 사망하면서 다다후유는 고립되었고, 결국 다카우지에게 패배하여 주고쿠 지방으로 도피했다.
이 무렵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쇼군 다카우지와 함께 이원정치를 행하던 다다요시와 각지에서 군사적 공적을 세웠던 집사(執事) 고노 모로나오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였고, 이는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이라고 불리는 내분으로까지 발전하였다. 1350년 8월에 모로나오의 쿠데타로 다다요시가 실각하자 다다후유는 다다요시를 도우러 상경하고자 했으나 하리마국(播磨)에서 아카마쓰 노리무라(赤松則村)에게 저지당했다. 다다후유는 빈고국(備後国)의 도모노쓰(鞆津)에 머무르면서 주변의 무사들에게 은상을 베풀며 인심을 장악하고 세력 굳히기를 도모하였다.
빈고가 나가토 단다이의 관할이기는 했지만 중추부인 나가토도 아닌 땅에 머무르는 것은 명백한 명령 위반이었고, 다다후유는 나가토뿐 아니라 주고쿠 지방에까지 군세를 재촉하는 등의 태도를 취하며 세력을 뻗쳤기 때문에 다카우지는 다다후유 토벌령을 내리게 된다.
1349년 9월 13일에 다다후유는 도모노쓰에서 모로나오의 명령을 받은 스기하라 마타사부로(杉原又三郎) 등의 200여 기(騎)에게 습격당했고, 이소베 사콘노소죠(磯部左近将監)나 가와시리 유키토시(河尻幸俊) 등의 도움으로 바다를 건너 규슈로 달아났다. 그 달에 히고국(肥後国) 가와시리 진(河尻津, 지금의 일본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으로 해서 규슈로 상륙해 들어온 다다후유는 아시카가 쇼군가의 권위를 이용해 고쿠진(国人) 세력이나 아소씨(阿蘇氏)에게 그들이 지배하던 영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등으로 규슈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넓혔다. 막부는 규슈로 간 다다후유에게 출가하여 교토로 올 것을 명하였으나 다다후유는 따르지 않았고, 다시금 다다후유에 대한 막부의 토벌 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규슈에는 남조로부터 정서장군(征西将軍)으로 임명된 왕자 가네요시 친왕(懐良親王)을 끼고 있는 남조측 무장 기쿠치씨(菊池氏)나 쇼군 아시카가 씨(무로마치 막부)의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 파견되어 하카타(博多)를 본거지로 삼고 있던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 가마쿠라 시대 이래의 전통적인 규슈의 토호인 다자이후(大宰府)의 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 등의 세력이 정립하고 있었는데, 다다후유는 다카우지로부터 다다후유의 토벌 명령을 받은 잇시키 씨 등과 싸우면서 가네요시 친왕의 정서부와 협력노선을 취해 다자이후 공략을 노렸다. 쇼니 요리히사는 처음에는 잇시키 씨와 협력해 다다후유와 싸웠으나, 다다후유의 세력이 광대해지자 잇시키 씨에 대한 대항심으로 1350년 9월에 다다후유편으로 돌아선다(《태평기》 등 일설에 따르면 요리히사가 다다후유를 사위로 맞았다고도 한다). 쇼니 씨의 가세로 세력을 더욱 확대한 다다후유 등은 잇시키 씨를 하카타에서 구축했다. 또한 다다후유는 간노로 개원된 뒤에도 약 1년 4개월 동안 예전의 연호인 조와를 그대로 사용한다.
다다후유는 자신의 세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규슈에서 재지 무사 세력을 독자적으로 확보할 필요성이 절실했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남조를 지지하면서도 자신의 양아버지(이자 숙부) 다다요시는 물론 자신과의 사이가 소원했던 친아버지 다카우지의 위세까지 빌려야 했다. 다다후유가 규슈로 도망친 시점에서 다급히 군사력을 모으고자 재지 무사들에게 발급한 문서에서는 다다후유 자신이 규슈로 내려온 것이 어디까지나 '교토'[16] 또는 '두 분 윗전'(兩殿,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아시카가 다다요시)[17]의 뜻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카우지는 다다후유 일당의 세력이 규슈 전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다다후유에 대한 토벌 명령을 내렸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엔타이랴쿠(園太暦)》 1349년 12월 6일 기사에는 교토에서 다다후유가 규슈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자신의 양아버지를 내쫓은 원흉 고노 모로나오 등을 벌하고자 상경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다카우지는 다다후유와 쇼니 씨와의 동조를 받아, 막부에서는 다카우지 자신이 규슈로 출병하기로 했다. 다카우지는 주고쿠 지방의 유력 고쿠진(国人)들에게 동원 명령을 내리고, 이를 알게 된 다다후유도 다카우지의 규슈 진공을 저지하고자 맞불을 놓듯 주고쿠 지방에 동원명령을 내린다. 이때 다다후유는 시코쿠(四国)에도 동원령을 내렸고 현지 영주들의 영지에 대한 소유권 인정이나 은상(恩賞) 급여 등도 자신의 이름으로 행했다. 1350년 6월 21일 다카우지는 선봉으로써 고노 모로나오의 동생인 고노 모로야스(高師泰)를 보냈으나, 다다후유측의 모모이 요시사토(桃井義郷)가 이와미국(石見)으로 내려와 다카우지군의 진군을 방해하였다. 모로야스가 이끌던 다카우지 군세는 미쓰미네산성(三角城) 전투에서 패하고 이즈모국(出雲)로 달아났다.[19] 게다가 그 와중에 다다요시 또한 교토를 탈출해 야마토국(大和)로 가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모아 남조에 귀순해 형 다카우지에 맞섰다.
이때 다카우지는 효고(兵庫)에서 비젠국(備前)의 미와(三石), 후쿠오카(福岡)로 와서 머무르고 있었고, 다다요시가 남조에 귀순해 자신에 맞서는 군사를 일으키고 세력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에 규슈로 가는 것을 중지하고 후쿠오카에서 곧바로 교토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그 사이에 교토 유수를 맡고 있던 요시아키라가 다다요시에게 쫓겨났다. 다카우지는 모로나오나 요시아키라와 함께 교토 탈환을 노렸으나, 다다요시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단바국(丹波) ・ 하리마국(播磨)로 물러나야만 했다. 1351년 2월, 다카우지는 다다요시와 화의를 맺었으나, 고노 모로나오・모로야스 형제는 다다요시측에게 살해당한다. 이로써 다다요시는 정계에 복귀했고 다다후유는 다다요시의 요구에 응해 다카우지로부터 3월에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 임명되었다.[20] 이 임명으로 해서 일시적으로나마 다다후유의 입장이 완전히 앞서게 되었다. 이 일로 1351년 6월 10일부터 다다후유는 조와 대신 간노 연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다카우지와 다다요시 사이에 다시 불화가 생겨나고 같은 해에 다카우지가 남조와 일시 강화를 맺었으며(쇼헤이 일통(正平一統)) 이때 다카우지는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後村上天皇)으로부터 다다요시 토벌령을 받아낸다. 다다후유에 대해서도 다시금 토벌령이 내려졌고, 잇시키 씨도 정서부와 협력해 세력을 회복했다. 1352년、가마쿠라에서 다다요시는 다카우지에게 항복했고, 도쇼지(東勝寺)에 유폐되어 2월 26일에 급서한다(다카우지에 의한 암살설도 존재하고 있다). 쇼헤이 일통은 파탄났고, 규슈에 있던 다다후유는 고립되었다.
2. 4. 몰락과 죽음
쇼헤이 13년/엔분(延文) 3년(1358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사망하고, 남조 세력도 막부의 거듭되는 공세에 쇠퇴하여, 쇼헤이 18년/조지(貞治) 2년(1363년)에는 오우치 히로요, 야마나 도키우지 등도 막부에 항복하여 다다후유 세력은 와해되었다. 이는 간노의 소란으로 시작된, 다카우지파와 다다후유파에 의한 무로마치 막부 내분극의 종막이었다. 쇼헤이 21년/조지 6년(1366년)의 서장을 마지막으로 다다후유는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다.[21]
일설에 따르면,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사후 3대 쇼군이 된 조카 아시카가 요시미쓰와 화해하고 이와미 땅에서 은거하는 것을 허락받았다고도 하고, 요시미쓰가 다다후유의 신병을 보호하고 있었다고도 한다. 다다후유는 아버지 다카우지나 이복동생 요시아키라보다 오래 살았고, 요시미쓰의 치세 중반기까지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시기의 그에 대해 적은 문서는 존재하지 않아 어떠한 만년을 보냈는지도 알 수 없다.[21]
다다후유가 사망한 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군서유종》(群書類従)에 실린 『아시카가 계도』(足利系図)나 『남산순수록』(南山巡狩録)은 겐추 4년/시토쿠 4년 7월 2일(1387년 8월 16일)로 되어 있고, 강목체 사서인 『사료종람』(史料綜覧)권7에는 「북조(北朝)의 궁내대보(宮内大輔) 종4위하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졸하였다」(北朝宮内大輔従四位下足利直冬卒ス)라는 강(綱)을 이 설에 따라 기재하고 있다. 『국사실록』(国史実録)이나 『가마쿠라 대일기』(鎌倉大日記) 등에서는 겐추 5년/가케이(嘉慶) 2년 7월 3일(1388년 8월 5일)에 이와미에서 사망하였다고, 『계도찬요』(系図纂要)에 실린 「아시카가 쇼군가 계도(足利将軍家系図)」나 「역대진서요략」(歴代鎮西要略) 등에는 오에이(応永) 7년 3월 11일(1400년 4월 5일)에 이와미에서 서거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여러 설 중에서 다다후유가 사망했을 때 나이가 일흔네 살이었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언급된다. 겐추 4년(1387년)이나 5년(1388년)의 경우는 다다후유가 태어났을 때 다카우지가 10세나 11세 때였다는 이야기가 되는 데다, 다다후유의 막내아들로써 승려로 출가하는 호잔 겐친(宝山乾珍)이 오에이 원년(1394년)에 태어났으므로 이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아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오에이 7년에 사망하였다고 하면 태어난 해는 가랴쿠 2년인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보다 연상이고, 겐친도 다다후유의 나이 예순여덟에 낳은 늦둥이 아들이라고 보아 앞뒤가 맞기 때문에, 이 몰년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22]
3. 가족 관계
3. 1. 다다후유의 편휘(偏諱)를 받은 인물
4. 현대 창작물에서의 등장
야마자키 유이치로, 쓰쓰이 미치타카가 배역을 맡은 1991년 NHK 대하드라마 태평기에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2]
사료
大日本史料
[3]
서적
日本中世の史的展開
文献出版
[4]
사료
大日本史料
[5]
논문
応永の乱と〈足利義氏〉
[6]
논문
室町前期における足利将軍家出身僧の身分と役割
[7]
웹사이트
足利高氏(足利尊氏)の家臣団と軍団
http://1st.geocities[...]
[8]
웹사이트
武家家伝_宮氏
http://www2.harimaya[...]
[9]
서적
인물총서 ‐ 아시카가 다다후유
깃카와고분칸(吉川弘文館)
2005
[10]
문서
[11]
문서
[12]
서적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정실, 아카바시 토코
분켄출판文献出版
[13]
서적
같은 책
2005
[14]
사료
대일본사료
[15]
서적
같은 책
[16]
문서
시키 문서
1349-09-16
[17]
문서
스오 깃카와 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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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가마쿠라기 왜구와 무로마치기 왜구의 성격과 그 주체 연구
[19]
사료
원태력
1350-11-10
[20]
사료
원태력
1351-03-03
[21]
서적
같은 책
[22]
서적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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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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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
2005
[25]
서적
같은 책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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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같은 책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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