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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 상귀니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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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는 1119년 십자군 국가인 안티오키아 공국과 이슬람 세력 간에 벌어진 전투로, 십자군의 참패로 끝났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 로제르는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전투를 시작했으나, 일가지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의 기습에 의해 패배했다. 이 전투로 로제르가 전사하고 안티오키아 공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전투는 십자군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무슬림이 셀주크 투르크의 도움 없이도 십자군을 격파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투의 이름인 '아제르 상귀니스'는 '피의 벌판'을 의미하며, 십자군의 참혹한 패배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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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 상귀니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아제르 상귀니스 전투
전체십자군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를 묘사한 그림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를 묘사한 그림.
날짜1119년 6월 28일
장소사르마다 근처
결과튀르키예의 결정적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안티오키아 공국
교전국 2알레포의 오르토퀴드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살레르노의 로제르†
지휘관 2일가지
병력
병력 1~3,700명
병력 2알 수 없음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3,500명
사상자 2알 수 없음

2. 배경

12세기 초,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 살레르노의 로제르는 알레포의 리드완 사후 찾아온 평화를 활용하지 못했다.[1]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 2세와 트리폴리 백국의 폰스 또한 각자의 이해관계로 로제르와 협력하지 않았다.[1] 1115년, 로제르는 사르민 전투에서 셀주크 군을 격퇴하며 군사력을 과시했다.[1]

1117년, 알레포는 오르토퀴드 가문의 아타베그 일가지에게 넘어갔고,[2] 1118년 로제르의 아자즈 점령으로 십자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놓였다.[2] 1119년, 일가지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침공했다.[2]

2. 1. 십자군과 무슬림 세력 간의 갈등

안티오키아 공국을 비롯한 십자군 국가들은 알레포모술을 중심으로 시리아 북부와 자지라 지역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1] 1113년 알레포의 리드완이 사망한 후 몇 년 동안 평화가 찾아왔지만, 보에몽 2세의 섭정으로 안티오키아 공국을 통치하던 살레르노의 로제르는 이러한 유리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1] 에데사 백작 보두앵 2세와 트리폴리 백작 폰스 역시 각자의 이익에만 몰두하여 알레포의 무슬림 세력에 맞서 로제르와 동맹을 맺는 데 소극적이었다.[1] 1115년 로제르는 사르민 전투에서 셀주크 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1]

1117년 알레포는 오르토퀴드 가문의 아타베그 일가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2] 1118년 로제르가 아자즈를 점령하면서 알레포는 십자군의 공격에 더욱 취약해졌다.[2] 이에 일가지는 1119년 안티오키아 공국을 침공하여 대응했다.[2] 로제르는 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 발렌스의 베르나르도와 함께 아르타에서 출정했다.[2] 베르나르도 총대주교는 아르타의 방어 시설이 튼튼하고 안티오키아와 가깝기 때문에 로제르 군대가 아르타에 머무는 동안 일가지 군대가 감히 안티오키아로 진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조언했다.[2] 또한 로제르에게 예루살렘 왕국의 왕 보두앵과 폰스에게 지원을 요청하라고 권했지만, 로제르는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았다.[2]

로제르는 일가지가 알아타리브 항구를 공격하는 동안 사르마다의 도로에 진을 쳤다.[3] 뷰에 퐁의 로베르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가 포위를 풀기 위해 출격했고, 일가지는 투르크 군대의 전형적인 전술인 거짓 퇴각을 다시 한번 시도했다.[3] 로베르의 군대는 항구에서 투르크 군대가 있는 곳으로 유인되어 매복 공격을 받았다.[3]

2. 2. 안티오키아 공국의 상황

안티오키아 공국은 다른 십자군 국가들과 함께 알레포모술을 거점으로 북시리아와 자지라를 지배하는 이슬람 국가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1] 1113년 알레포의 리드완이 사망한 후 몇 년 동안 평화가 찾아왔지만, 보에몽 2세의 섭정으로 안티오키아 공국을 다스리던 살레르노의 로제르는 이러한 유리한 상황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1] 에데사 백작 보두앵 2세와 트리폴리 백작 폰스 역시 각자의 이익에만 몰두하여 알레포의 무슬림 세력에 맞서 로제르와 동맹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1]

1115년 로제르는 사르민 전투에서 셀주크 군의 공격을 막아냈다.[1] 1117년 알레포는 오르토퀴드 가문의 아타베그 일가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2] 1118년 로제르가 아자즈를 함락하면서 알레포는 십자군의 공격에 취약해졌다.[2] 이에 일가지는 1119년 안티오키아 공국을 공격했다.[2]

로제르는 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 발렌스의 베르나르도와 함께 아르타에서 출진했다.[2] 베르나르도 총대주교는 아르타가 방어에 유리하고 안티오키아와 가깝기 때문에, 로제르 군대가 아르타에 머무는 한 일가지 군대가 감히 안티오키아로 진군하지 못할 것이라고 조언했다.[2] 또한 로제르에게 예루살렘 왕국의 왕 보두앵과 폰스에게 지원을 요청하라고 했지만, 로제르는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았다.[2]

로제르는 일가지가 알아타리브 항구를 공격하는 동안 사르마다의 도로에 진을 쳤다.[2] 뷰에 퐁의 로베르 휘하의 소규모 군대가 포위를 풀기 위해 출진했고, 일가지는 투르크군의 전형적인 전술인 거짓 퇴각을 시도했다.[2] 로베르의 군대는 항구에서 투르크군이 있는 곳으로 유인되어 매복 공격을 당했다.[2]

3. 전투의 전개

안티오키아의 로제르는 예루살렘 왕국의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전투를 시작했다. 베르나르도는 아르타에서 방어하며 지원군을 기다릴 것을 조언했으나, 로제르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일가지는 다마스쿠스를 지배하는 부리드 가문의 에미르 톡테인의 원군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원군을 기다리는 것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6월 27일 밤, 일가지의 군대는 로제르의 진영을 포위했다. 로제르는 퇴로가 없는 급경사의 계곡에 진영을 설치했고, 700명의 기사와 투르코폴레스를 포함한 3,000명의 병력으로 급하게 다섯 개의 부대를 편성했다. 십자군은 V자 형태로 진을 쳤고, 좌익부터 우익까지 생 로의 로베르, 로제르 공, 프레넬의 기, 수도사 고프레이와 피에르가 지휘를 맡았다. 로제르는 레나드 멘소에르에게 여섯 번째 부대를 맡겨 후방을 지키게 했다.[1]

7월 28일 아침, 안티오키아 보병대와 투르크 궁병대 사이의 활 교환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십자군이 우세했다. 우익의 피에르와 수도사 고프레이 부대가 적을 격파했고, 프레넬의 기가 지휘하는 중앙 부대도 잘 싸웠다. 그러나 좌익에서 생 로의 로베르와 투르코폴레스들이 패배하여 로제르 부대로 도망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북풍이 불어와 십자군의 시야를 가린 것도 불리하게 작용했다.[2]

전투 전, 이슬람군의 카디(재판관) 아부 알파들 이븐 알카시샤브는 지하드의 의무를 강조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결국 투르크군의 양익이 십자군을 포위했다. 로제르는 자신의 군기 아래에서 얼굴에 칼을 맞고 전사했고, 십자군은 대부분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레나드 맨소에르는 사르마다 항에 피난했으나 일가지에게 붙잡혔다. 대법관 월터도 포로로 잡혔다가 나중에 이 전투에 대해 기록했다.

3. 1. 로제르의 전략적 판단 오류

로제르는 일가지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군사적 역량만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전투에 임했다. 로제르는 퇴로가 별로 없는 급경사의 나무로 가득 찬 계곡에 진영을 설치하는 부주의함을 보였다.[1]

6월 27일 밤, 일가지의 군대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 도로를 이용하여 로제르의 진영을 빠르게 포위했다. 로제르의 군대는 700명의 기사와 투르코폴레스를 포함한 3,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기습에 대비해 급하게 다섯 개의 부대로 편성되었다.[1]

3. 2. 일가지의 기습과 포위

일가지는 다마스쿠스를 지배하는 부리드 가문의 에미르 톡테인의 원군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원군을 기다리는 것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결국 잘 사용되지 않는 도로를 이용하여 일가지의 군대는 6월 27일 밤동안 재빠르게 로제르의 진영을 포위하였다.[1] 로제르는 부주의하게도 퇴로가 별로 없는 급경사의 나무로 가득 찬 계곡에 진영을 설치했다.[1] 로제르의 군대는 700명의 기사와 투르코폴레스를 포함한 3,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기습을 당하자 급하게 다섯 개의 부대로 편성하였다.[1] 십자군은 끝부분이 이슬람군과 가장 멀리 떨어진 V자 형태로 진을 쳤다.[1] 좌익에서 우익에 이르는 각 부대는 생 로의 로베르, 로제르 공, 프레넬의 기, 수도사 고프레이와 피에르가 지휘를 맡았다.[1] 그러는 동안 로제르는 레나드 멘소에르 휘하의 여섯 번째 부대에게 후방을 지킬 것을 명했다.[1]

3. 3. 전투의 경과

6월 27일 밤, 일가지의 군대는 로제르의 진영을 급경사의 나무로 가득 찬 계곡에 포위했다. 로제르의 군대는 700명의 기사와 투르코폴레스를 포함한 3,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기습에 대비해 V자 형태로 다섯 개의 부대를 편성했다. 좌익부터 우익까지 생 로의 로베르, 로제르 공, 프레넬의 기, 수도사 고프레이와 피에르가 각 부대를 지휘했다. 로제르는 레나드 멘소에르에게 여섯 번째 부대를 맡겨 후방을 지키게 했다.[1]

7월 28일 아침, 전투는 안티오키아 보병대와 투르크 궁병대 사이의 활 교환으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십자군이 우세했다. 우익의 피에르와 수도사 고프레이가 지휘하는 부대가 적을 격파했고, 프레넬의 기가 지휘하는 중앙 부대도 잘 싸웠다. 그러나 좌익에서 생 로의 로베르와 투르코폴레스들이 패배하여 로제르 부대로 도망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2] 북풍이 불어와 십자군의 시야를 가린 것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전투 전, 이슬람군의 카디(재판관) 아부 알파들 이븐 알카시샤브는 병사들에게 지하드의 의무를 강조하며 사기를 북돋웠다. 그는 법률가의 터번을 썼지만 손에는 창을 들고, 열정적인 연설로 병사들을 격려했다.

결국 투르크군의 양익이 십자군을 포위했다. 로제르는 자신의 군기 아래에서 얼굴에 칼을 맞고 전사했고, 십자군은 대부분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살아남은 기사는 단 두 명뿐이었다. 레나드 맨소에르는 사르마다 항에 피난했으나 일가지에게 붙잡혔다. 대법관 월터도 포로로 잡혔다가 나중에 이 전투에 대해 기록했다. 십자군의 참패로 인해 이 전투는 라틴어로 "피의 벌판"을 뜻하는 '아제르 상귀니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3. 4. 로제르의 죽음과 십자군의 패배

7월 28일 아침, 기사들 앞에 서 있던 안티오키아 보병대와 투르크 궁병대 사이의 활 교환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십자군은 우익의 피에르와 수도사 고프레이가 지휘하는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여 적을 격파했을 때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프레넬의 기가 지휘하는 중앙 부대도 역시 전투를 유리하게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좌익에서의 싸움에서 순식간에 전투의 결과가 결정되었다.[2] 생 로의 로베르와 투르코폴레스들은 적에게 격파당해 로제르의 부대 쪽으로 도망쳤고, 로제르 부대를 혼란시켰다. 안티오크의 기사와 보병대들의 얼굴에 먼지를 실은 북풍이 불어와 시야를 가려 이들을 더욱더 혼란시켰다. 곧 투르크군의 양익은 십자군을 포위하였다.

전투 중에 로제르는 자신의 군기로 쓰이던 거대하고 보석이 박힌 십자가 깃발 아래에서 얼굴에 칼을 맞고 전사하였다. 나머지 십자군 병사들도 살해당하거나 사로잡혔다. 오직 두 명의 기사들만이 살아남았다. 레나드 맨소에르는 보두앵 왕을 기다리기 위해 사르마다 항에 피난하였으나, 후에 일가지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 다른 포로들 중에는 나중에 이 전투에 대하여 기록하게 되는 대법관 월터와 같은 이들이 있었다. 학살에 가까운 피해를 본 십자군의 패배는 이 전투에 라틴어로 "피의 벌판"을 뜻하는 ''아제르 상귀니스''라는 이름을 얻게 하였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이 전투는 무슬림 세력이 셀주크 투르크의 직접적인 지원 없이도 십자군을 격파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가지는 승리 후 주연에 빠져 안티오키아 공국으로 진군하지 않았다.[3] 이 틈을 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베르나르도는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오키아 공국은 이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었고, 아타리브, 제르다나, 사르민, 마아라트 알누만, 카프르 타브 등 주요 거점을 상실했다.[3]

'아제르 상귀니스'라는 라틴어 명칭은 성경에서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받은 돈으로 산 땅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다는 이 땅에서 자살했으며, 이곳은 아람어로 아켈데마치, 불가타 성경에서는 '아제르 상귀니스'라고 알려져 있다.

4. 1. 안티오키아 공국의 약화와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 확대

1119년 8월 14일 일가지는 하브 전투에서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와 폰스 백작에게 패배했고, 보두앵 2세는 안티오키아의 섭정직을 차지하였다. 보두앵 2세는 무슬림에게 빼앗겼던 마을들을 일부 되찾았다.[3] 그러나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의 결과로 안티오키아 공국은 약화되었고, 이후 10여 년간 무슬림 세력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결국 안티오키아 공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125년 아자즈 전투에서 십자군이 승리하면서 시리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4. 2. 십자군의 대응과 아자즈 전투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는 하브 전투에서 일가지에게 승리한 후 안티오키아의 섭정직을 차지하였다. 보두앵 2세는 무슬림에게 넘어간 마을들을 일부 되찾았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약화시켰고, 이후 10년 동안 무슬림의 계속된 공격을 불러왔다. 이러한 결과로 안티오키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후 십자군은 1125년 아자즈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시리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5. 역사적 평가 및 의의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는 무슬림 세력이 셀주크 투르크의 도움 없이도 십자군을 격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3] 그러나 일가지는 승리 후 주연에 빠져 안티오키아로 진군하지 않았고, 그 사이 베르나르도 총대주교는 방어 수단을 구축했다.[3] 이 전투로 안티오키아 공국은 많은 병력을 잃었고, 아타리브, 제르다나, 사르민, 마아라트 알누만, 카프르 타브 등의 영토를 무슬림에게 빼앗겼다.[3]

일가지는 이후 하브 전투에서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와 폰스 백작에게 패배했고, 보두앵 2세는 안티오키아의 섭정직을 맡아 잃어버린 영토 일부를 되찾았다. 그럼에도 이 전투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약화시켜 이후 10년간 이슬람 세력의 지속적인 공격을 초래했고, 결국 안티오키아 공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십자군은 1125년 아자즈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야 시리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5. 1. 전투 명칭의 유래

'아제르 상귀니스'는 라틴어로 성경에서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받은 돈으로 산 땅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다는 이 땅에서 자살했으며, 이곳은 아람어로는 아켈데마치, 불가타판에서는 ''아제르 상귀니스''라고 알려져 있다.

참조

[1] 서적 Smail
[2] 서적 Smail
[3] 서적 S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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