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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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1453년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군인으로, 포르투갈의 인도양 제국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군사 경력을 쌓았으며, 1503년과 1506년 두 차례에 걸쳐 인도 원정에 참여했다. 1509년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으로 임명되어 고아를 점령하고, 말라카를 정복하여 동방 무역의 거점을 확보했다. 또한, 호르무즈를 재정복하는 등 포르투갈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는 1515년 고아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업적은 포르투갈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1453년 리스본 근처 알란드라에서 태어났다.[15] 그의 아버지는 궁정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며, 포르투갈 왕실과 먼 사생아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디니스 왕의 사생아 아들인 아폰수 산체스, 알부케르크 영주의 후손이었다. 그는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의 궁정에서 수학과 라틴어를 배웠으며, 그곳에서 훗날 주앙 2세가 되는 주앙 왕자와 친구가 되었다.[16] 젊은 시절부터 군인으로서의 재능을 보였고, 주로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방면에서 활동했다.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2. 1. 초기 군 복무 (1471–1509)
1471년, 아폰수 5세의 지휘 아래 모로코의 탕헤르 정복과 아르질라 정복에 참여했으며,[17] 그곳에서 수년간 장교로 복무했다. 1476년에는 주앙 왕자를 따라 카스티야와의 전쟁에 참전했으며, 토로 전투에도 참여했다. 1480년에는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를 도와 오트란토의 오스만 제국 침공을 격퇴하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 원정에 참여했다. 1481년 주앙이 주앙 2세로 즉위한 후 포르투갈로 돌아온 알부케르크는 왕의 마병대장이자 수석 마부(포르투갈어: ''estribeiro-mor'')가 되었으며, 주앙 2세의 통치 기간 내내 이 직책을 유지했다.[17][16] 1489년에는 북아프리카에서 군사 작전에 다시 참여하여 라라체 시 인근 루코 강에 있는 섬인 그라시오사 요새의 방어 사령관을 맡았다. 1490년 알부케르크는 주앙 2세의 경호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495년 아르질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그의 동생 마르팀이 그의 곁에서 싸우다 사망했다.
3. 인도 원정 (1503–1515)
마누엘 1세 국왕은 사촌 주앙 2세의 사망 후 왕위에 오르자, 전임 국왕의 절친이자 17살 연상이었던 알부케르크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8년 후, 1503년 4월 6일, 알부케르크는 사촌 프란시스쿠 드 알부케르크와 함께 인도에 대한 첫 번째 원정에 파견되었다. 각자 3척의 배를 지휘했으며, 두아르테 파체쿠 페레이라와 니콜라우 코엘류와 함께 항해했다. 그들은 코지코드 (칼리컷, Kozhikode)의 자모린 세력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고, 코친 (Cohim, 코치)의 왕을 안전하게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 대가로 코친 왕은 포르투갈인에게 포르투갈 요새 '이마누엘' (포트 코치)를 건설하고 콜람 (Coulão, 퀼론)과 무역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는 동방 포르투갈 제국의 토대를 마련했다.[7]
3. 1. 두 번째 인도 원정 (1506–1509)
1506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트리스탕 다 쿠냐가 이끄는 함대의 일부를 지휘하며 인도양으로 향했다.[7] 이 원정의 목표는 소코트라 섬을 정복하고 요새를 건설하여 홍해 무역을 차단하는 것이었다.[7] 알부케르크는 "아라비아 해안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모잠비크에 도착할 때까지 다 쿠냐의 지휘를 받았다.[18]
함대는 1506년 4월 6일 리스본을 출발했다. 알부케르크는 직접 자신의 배를 조종해야 했다. 모잠비크 해협에서 주앙 다 노바 선장과 그의 배 ''플로르 드 라 마르''를 구조하여 함대에 합류시켰다.[21] 동아프리카 해안의 아랍 도시들을 공격한 후, 소코트라 섬을 정복하고 수크에 요새를 건설했다. 그러나 소코트라는 전략적 문제로 4년 후 포기되었다.[19]
소코트라에서 함대는 분리되었다. 트리스탕 다 쿠냐는 인도로 향했고, 알부케르크는 7척의 배와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 만의 오르무즈로 향했다. 1507년 7월 무스카트를 정복하는 등 여러 도시를 정복하고, 9월 25일 호르무즈에 도착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포르투갈의 조공국으로 만들었다.[23]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의 샤 이스마일 1세()는 조공을 요구했고, 알부케르크는 대포알, 화살, 무기를 주며 "이것이 마누엘 1세 국왕의 영토에서 요구된 조공을 지불하기 위해 포르투갈에서 주조된 화폐"라고 응수했다.[24] 알부케르크는 승리의 성모 요새 건설을 시작했으나,[25] 장교들의 반란으로 인해 1508년 1월 오르무즈를 포기해야 했다.[27]
3. 1. 1. 칸나노르에서의 체포 (1509)
아폰수는 1508년 12월 칸나노르의 말라바르 해안에 도착하여 부왕인 돔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 앞에서 왕으로부터 받은 밀봉된 서한을 열어보았는데, 서한에는 그가 알메이다의 후임 총독으로 임명되어 있었다.[19] 아폰수를 오르무즈에서 버린 장교들의 지지를 받은 부왕은 이에 상응하는 왕실 명령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임기가 1월에나 종료된다고 항의하며 미로셈의 맘루크 함대와 싸워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할 의향을 밝히며, 아폰수가 맘루크 함대와 직접 싸우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다. 아폰수는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립을 피하여 코치로 이동하여 왕의 추가 지시를 기다렸다.[28]
1509년 2월 3일, 알메이다는 맘루크, 오스만, 칼리컷의 자모린, 구자라트 술탄의 연합 함대와 해상 디우 해전을 벌였다. 그의 승리는 결정적이었다. 오스만과 맘루크는 인도양에서 물러났고, 이후 한 세기 동안 포르투갈의 지배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8월, 아폰수의 전직 장교들이 디우구 로페스 드 세퀘이라의 지원을 받아 그가 통치에 부적합하다고 주장하는 청원을 한 후, 아폰수는 칸나노르의 세인트 안젤로 요새에 감금되었다.[29][30]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투옥되었다고 여기며 머물렀다.
3. 2.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 (1509–1515)
1509년 11월 4일, 아폰수는 인도 주둔 포르투갈의 두 번째 총독이 되었으며, 그는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는 포르투갈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했으나,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코이코이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32] 아폰수는 취임 후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고 향신료 무역을 통제하려 했다.[33]
초기에, 마누엘 1세 국왕과 리스본의 그의 의회는 인도양에서 세 가지 관할 구역을 설정하여 권력을 분산시키려 했다.[19] 1509년, 귀족 디우구 로페스 데 세케이라는 말라카의 술탄 마흐무드 샤와 협정을 맺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함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하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조르제 데 아기아르에게는 희망봉과 구자라트 사이의 지역이 주어졌다. 그는 두아르테 데 레모스의 뒤를 이었지만, 코친으로 떠났다가 포르투갈로 돌아가 함대를 아폰수에게 남겼다.
== 고아 정복 (1510) ==
1510년 1월, 아폰수는 국왕의 명령에 따라 자모린이 부재중임을 인지하고 칼리컷으로 진격했지만, 마샬 쿠티뉴가 자모린의 궁전을 공격했다가 매복에 걸리면서 실패했다. 아폰수는 후퇴 중에 심하게 부상을 입었고, 쿠티뉴는 사망했다.[19][34]
이후 아폰스는 티모지로부터 디우 해전 이후 고아에 은신해 있던 이집트 맘루크 술탄국 함대와 싸우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는 정보와[35] 술탄 유수프 아딜 샤의 질병, 데칸 술탄국 간의 전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35] 비자푸르 술탄국으로부터 고아를 점령하기 위해 기습을 감행했다.
1510년 3월 4일부터 5월 20일까지 첫 번째 공격이 있었으나, 성채의 열악한 상태, 힌두교 주민들의 지지 감소, 이스마일 아딜 샤의 공격 등으로 인해 아폰스는 도시를 포기했다.
3개월 후인 11월 25일, 아폰스는 개편된 함대를 이끌고 고아에 다시 나타나 하루도 안 되어 이스마일 아딜 샤와 그의 오스만 동맹군으로부터 고아를 점령했다. 12월 10일에 항복했으며, 시의 이슬람 수비병 9000명 중 6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6] 아폰스는 힌두교 주민들의 지지를 다시 얻었다.
고아에서 아폰스는 최초의 포르투갈 주조소를 설립하여[37] 새로운 포르투갈령 인도 루피를 발행했다. 금화 크루자두 또는 ''마누엘'', 은화 ''에스페라'' 및 ''알프-에스페라'', 그리고 청동화 "레아이스"가 발행되었다.[38]
알부케르크는 고아에 ''고아 왕립 병원''을 설립했다.[39][40]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고아는 포르투갈령 인도의 중심지가 되었고, 구자라트 술탄과 칼리컷의 자모린은 동맹을 제안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아폰스는 고아를 사용하여 향신료 무역을 확보하고 페르시아 말을 비자야나가라와 힌두 왕자들에게 판매하여 그들의 지원을 받았다.[17]
1511년 아폰수가 공포한 정책에 따라 포르투갈 정부는 탐험가들에게 현지 여성과 결혼하도록 권장했다. 포르투갈 왕은 현지 여성과 결혼한 포르투갈 남성(''casados'')에게 자유민 신분과 왕실 세금 면제를 부여했다. 혼혈 결혼이 번성하여 메스티소가 태어났다. 그는 현지인을 포르투갈 행정부에 임명했고, 현지 관습에 간섭하지 않았다("사티"는 금지).
== 말라카 정복 (1511) ==
1511년 4월, 고아를 요새화한 후, 아폰수는 약 900명의 포르투갈인, 200명의 힌두 용병, 약 18척의 배로 구성된 병력을 이끌고 말라카로 향했다.[41] 페르디난드 마젤란도 이 원정에 참여했다.[19]
말라카 해협은 포르투갈이 점령하려 했던 가장 부유한 도시였으며, 말레이 상인들이 구자라트, 중국, 일본, 자바, 벵골, 페르시아, 아랍 상인들을 만나는 무역 네트워크의 중심지였다.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대부분 나무로 지어졌고 석조 건물은 거의 없었지만, 약 20,000명의 용병과 2,000개 이상의 대포로 방어되었다. 가장 큰 약점은 술탄 마흐무드 샤의 정부가 무슬림을 선호하여 다른 상인들 사이에서 불만을 야기했다는 점이었다.
아폰수는 깃발로 장식된 그의 배로 도시를 대담하게 접근하며, 대포 연발을 쏘았다. 그는 술탄에게 포로 석방, 손해 배상, 요새화된 무역 기지 건설 허가를 요구했다. 술탄은 포로들을 석방했지만, 포르투갈의 소수 군대에 감명을 받지 않았다. 아폰수는 항구에서 몇 척의 배와 4개의 해안 건물을 불태웠다. 말라카 강으로 도시가 나뉘어져 있어, 연결된 다리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7월 25일 새벽, 포르투갈인들은 상륙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저녁에 다리를 점령했다. 술탄의 반응을 기다린 끝에, 그들은 배로 돌아가 정크를 준비하여 병사, 대포, 모래 자루를 채웠다. 다음날, 술탄이 전투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나타난 격렬한 전투 후, 수비군은 흩어졌고 술탄은 도망쳤다.[19] 8월 15일, 포르투갈인들은 다시 공격했지만, 술탄은 도시에서 도망친 상태였다.[42]
아폰수는 말레이족의 반격을 막기 위해 말라카의 방어를 준비했으며,[41] 요새를 건설했다. 1511년 11월에 완공된 요새의 문은 "아 파모사"('유명한')로 알려져 있다.
1511년 11월 20일, 아폰수는 말라카를 정복하는 데 사용되었던 낡은 캐러벨선 ''플로르 지 라 마르''를 타고 말라바르 해안으로 출항했다. 항해 중, ''플로르 지 라 마르''는 폭풍우에 휘말려 난파되었고, 아폰수는 가까스로 익사하는 것을 면했다.[41]
== 말루쿠 제도 원정 (1512) ==
1511년 11월, 말라카를 확보하고 당시 비밀이었던 "향료 제도"의 위치를 알아낸 아폰수는 신뢰하는 안토니우 드 아브레우가 이끄는 세 척의 배를 그곳으로 보냈고, 부사령관은 프란시스쿠 세르랑이었다.[48] 말레이족 선원들이 자바, 소순다 열도, 암본섬을 거쳐 반다 제도로 안내하도록 모집되었고, 1512년 초에 그곳에 도착했다.[49] 그들은 그곳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면서 배에 육두구와 정향을 싣고 구매했다. 안토니우 드 아브레우는 그 후 암보이나로 항해했고, 세르랑은 몰루카스 쪽으로 항해했지만 세람 근처에서 난파되었다. 테르나테의 술탄 아부 라이스는 그들의 좌초 소식을 듣고, 강력한 외국과 동맹을 맺을 기회로 보고 그들을 1512년 테르나테로 데려와 섬에 요새를 건설하도록 허락했는데, 그곳이 1522년에 건설된 상 조앙 바티스타 드 테르나테 요새/Forte de São João Baptista de Ternatept였다.
3. 2. 1. 고아 정복 (1510)
1510년 1월, 아폰수는 국왕의 명령에 따라 자모린이 부재중임을 인지하고 칼리컷으로 진격했지만, 마샬 쿠티뉴가 자모린의 궁전을 공격했다가 매복에 걸리면서 실패했다. 아폰수는 후퇴 중에 심하게 부상을 입었고, 쿠티뉴는 사망했다.[19][34]
이후 아폰스는 티모지로부터 디우 해전 이후 고아에 은신해 있던 이집트 맘루크 술탄국 함대와 싸우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는 정보와[35] 술탄 유수프 아딜 샤의 질병, 데칸 술탄국 간의 전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35] 비자푸르 술탄국으로부터 고아를 점령하기 위해 기습을 감행했다.
1510년 3월 4일부터 5월 20일까지 첫 번째 공격이 있었으나, 성채의 열악한 상태, 힌두교 주민들의 지지 감소, 이스마일 아딜 샤의 공격 등으로 인해 아폰스는 도시를 포기했다.
3개월 후인 11월 25일, 아폰스는 개편된 함대를 이끌고 고아에 다시 나타나 하루도 안 되어 이스마일 아딜 샤와 그의 오스만 동맹군으로부터 고아를 점령했다. 12월 10일에 항복했으며, 시의 이슬람 수비병 9000명 중 6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6] 아폰스는 힌두교 주민들의 지지를 다시 얻었다.
고아에서 아폰스는 최초의 포르투갈 주조소를 설립하여[37] 새로운 포르투갈령 인도 루피를 발행했다. 금화 크루자두 또는 ''마누엘'', 은화 ''에스페라'' 및 ''알프-에스페라'', 그리고 청동화 "레아이스"가 발행되었다.[38]
알부케르크는 고아에 ''고아 왕립 병원''을 설립했다.[39][40]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고아는 포르투갈령 인도의 중심지가 되었고, 구자라트 술탄과 칼리컷의 자모린은 동맹을 제안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아폰스는 고아를 사용하여 향신료 무역을 확보하고 페르시아 말을 비자야나가라와 힌두 왕자들에게 판매하여 그들의 지원을 받았다.[17]
1511년 아폰수가 공포한 정책에 따라 포르투갈 정부는 탐험가들에게 현지 여성과 결혼하도록 권장했다. 포르투갈 왕은 현지 여성과 결혼한 포르투갈 남성(''casados'')에게 자유민 신분과 왕실 세금 면제를 부여했다. 혼혈 결혼이 번성하여 메스티소가 태어났다. 그는 현지인을 포르투갈 행정부에 임명했고, 현지 관습에 간섭하지 않았다("사티"는 금지).
3. 2. 2. 말라카 정복 (1511)
1511년 4월, 고아를 요새화한 후, 아폰수는 약 900명의 포르투갈인, 200명의 힌두 용병, 약 18척의 배로 구성된 병력을 이끌고 말라카로 향했다.[41] 페르디난드 마젤란도 이 원정에 참여했다.[19]
말라카 해협은 포르투갈이 점령하려 했던 가장 부유한 도시였으며, 말레이 상인들이 구자라트, 중국, 일본, 자바, 벵골, 페르시아, 아랍 상인들을 만나는 무역 네트워크의 중심지였다.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대부분 나무로 지어졌고 석조 건물은 거의 없었지만, 약 20,000명의 용병과 2,000개 이상의 대포로 방어되었다. 가장 큰 약점은 술탄 마흐무드 샤의 정부가 무슬림을 선호하여 다른 상인들 사이에서 불만을 야기했다는 점이었다.
아폰수는 깃발로 장식된 그의 배로 도시를 대담하게 접근하며, 대포 연발을 쏘았다. 그는 술탄에게 포로 석방, 손해 배상, 요새화된 무역 기지 건설 허가를 요구했다. 술탄은 포로들을 석방했지만, 포르투갈의 소수 군대에 감명을 받지 않았다. 아폰수는 항구에서 몇 척의 배와 4개의 해안 건물을 불태웠다. 말라카 강으로 도시가 나뉘어져 있어, 연결된 다리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7월 25일 새벽, 포르투갈인들은 상륙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저녁에 다리를 점령했다. 술탄의 반응을 기다린 끝에, 그들은 배로 돌아가 정크를 준비하여 병사, 대포, 모래 자루를 채웠다. 다음날, 술탄이 전투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나타난 격렬한 전투 후, 수비군은 흩어졌고 술탄은 도망쳤다.[19] 8월 15일, 포르투갈인들은 다시 공격했지만, 술탄은 도시에서 도망친 상태였다.[42]
아폰수는 말레이족의 반격을 막기 위해 말라카의 방어를 준비했으며,[41] 요새를 건설했다. 1511년 11월에 완공된 요새의 문은 "아 파모사"('유명한')로 알려져 있다.
1511년 11월 20일, 아폰수는 말라카를 정복하는 데 사용되었던 낡은 캐러벨선 ''플로르 지 라 마르''를 타고 말라바 해안으로 출항했다. 항해 중, ''플로르 지 라 마르''는 폭풍우에 휘말려 난파되었고, 아폰수는 가까스로 익사하는 것을 면했다.[41]
3. 2. 3. 말루쿠 제도 원정 (1512)
1511년 11월, 말라카를 확보하고 당시 비밀이었던 "향료 제도"의 위치를 알아낸 아폰수는 신뢰하는 안토니우 드 아브레우가 이끄는 세 척의 배를 그곳으로 보냈고, 부사령관은 프란시스쿠 세르랑이었다.[48] 말레이족 선원들이 자바, 소순다 열도, 암본섬을 거쳐 반다 제도로 안내하도록 모집되었고, 1512년 초에 그곳에 도착했다.[49] 그들은 그곳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면서 배에 육두구와 정향을 싣고 구매했다. 안토니우 드 아브레우는 그 후 암보이나로 항해했고, 세르랑은 몰루카스 쪽으로 항해했지만 세람 근처에서 난파되었다. 테르나테의 술탄 아부 라이스는 그들의 좌초 소식을 듣고, 강력한 외국과 동맹을 맺을 기회로 보고 그들을 1512년 테르나테로 데려와 섬에 요새를 건설하도록 허락했는데, 그곳이 1522년에 건설된 상 조앙 바티스타 드 테르나테 요새/Forte de São João Baptista de Ternatept였다.
4. 행정 및 외교 (1512–1515)
4. 1. 에티오피아와의 관계 (1512)
1512년 12월, 에티오피아에서 온 사절 마테우스가 고아에 도착했다.[51] 마테우스는 1507년 소코트라에 포르투갈인이 도착한 후 섭정 여왕 엘레니가 보낸 사절로, 증가하는 이슬람의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한 연합을 찾기 위해 포르투갈 왕의 대사 자격으로 파견되었다.[51] 그는 오랫동안 찾던 "프레스터 존"의 사절로서 아폰수에 의해 고아에서 큰 영예를 받았다. 그의 도착은 1513년 마누엘 1세에 의해 교황 레오 10세에게 알려졌다.[51] 마테우스는 아폰수의 경쟁자들로부터 그가 위조자나 이슬람 스파이일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지만, 아폰수는 그를 포르투갈로 보냈고, 국왕은 그들의 보고에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51]
4. 2. 홍해 원정 (1513)
맘루크가 수에즈에서 두 번째 함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증원군이 아덴에 도착하기 전에 진격하길 원했고, 이에 따라 아덴을 포위했다.[52] 아덴은 요새화된 도시였지만, 격렬한 전투가 반나절 동안 이어진 후 아폰수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브엘만데브 내의 홍해를 항해한 최초의 유럽 함대로서 제다에 도달하려 했지만, 바람이 불리하게 작용하여 5월에 카마란 섬에 정박했고, 병사들 사이의 질병과 신선한 물 부족으로 인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7] 1513년 8월, 아덴에 도달하려는 두 번째 시도 후, 그는 실질적인 결과를 얻지 못한 채 인도에 돌아왔다. 이집트의 힘을 파괴하기 위해 그는 나일강의 흐름을 변경하여 전국을 황폐하게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마누엘 1세 국왕에게 편지로 썼으며,[7] 무함마드의 시신을 훔쳐 모든 무슬림이 성지를 떠날 때까지 몸값을 요구할 의도였다.[53]
알부케르크의 원정은 수에즈에 도달하는 데 실패했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 함대가 홍해를 침범한 것은 이슬람 세계를 경악시켰고, 카이로에 공포가 확산되었다.[54]
4. 3. 칼리컷과의 관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재임 기간 동안 1502년 칼리컷에서 포르투갈인 학살 이후 지속된 포르투갈과 칼리컷의 자모린 간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켰다.[55] 해상 무역이 부진하고 봉신들이 이탈하면서 포르투갈과의 갈등에 대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자, 자모린의 조정은 내분에 휩싸였다. 집권 자모린은 암살되었고, 알부케르크의 사주를 받은 경쟁자가 그를 대체하여 평화 회담이 시작되었다.[55] 포르투갈인들은 칼리컷 자체에 요새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고, 원하는 만큼의 후추와 생강을 정해진 가격으로 얻을 권리와 칼리컷 관세의 절반을 연례 조공으로 획득했다.[55] 요새 건설은 수석 건축가 토마스 페르난데스의 감독 하에 즉시 시작되었다.[55]
4. 4. 호르무즈 재정복 및 사망 (1515)
1513년, 칸나노르에서 아폰수는 샤 이스마일 1세의 페르시아 대사를 만났다. 이스마일 1세는 구자라트, 호르무즈, 비자푸르에 대사를 파견한 상태였다. 비자푸르에 파견된 샤의 대사는 아폰수에게 페르시아에 사절을 다시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미겔 페레이라가 호르무즈를 경유하여 타브리즈로 파견되어 샤와 맘루크 술탄을 물리치는 공통의 목표에 관해 여러 차례 면담을 가졌다.[59]1515년 3월, 아폰수는 호르무즈의 실질적인 정복을 완료하기 위해 왕을 만나 재상의 참석을 요청했다. 그는 곧바로 수행원들에게 재상을 찔러 죽이게 함으로써 왕을 "해방"시켰고, 페르시아 만의 섬은 저항 없이 항복하여 포르투갈 제국의 종속국으로 남게 되었다.[59] 호르무즈에서 아폰수는 샤 이스마일의 서신을 전달하는 대사를 만났고, 샤 이스마일은 아폰수에게 페르시아의 주요 영주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60] 그곳에서 그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사절을 접견하며, 새로운 요새 건설을 감독하는 한편 점점 더 병에 걸렸다. 그의 병세는 1515년 9월부터 보고되었다.[61]
이 시기에, 포르투갈 궁정의 그의 정적들은 그의 몰락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폰수가 포르투갈령 인도에서 권력을 찬탈하려 한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마누엘 1세 국왕의 질투심을 자극했다.[62] 차울 항구 근처에서, 그는 유럽에서 도착한 포르투갈 함대가 그를 그의 개인적인 적, 로푸 소아르스 드 알부게르기아로 교체한다는 소식을 담은 서신을 전달받았다. 적들이 자신을 상대로 꾸민 음모를 깨닫고 깊이 실망한 그는 "국왕 앞에서 나의 죄가 중대함이 틀림없다. 나는 백성을 사랑하여 국왕의 미움을 사고, 국왕을 사랑하여 백성의 미움을 받으니."라고 토로했다.[63]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고, 그는 기사였던 성 야고보 기사단의 코트를 입고 유언장을 작성했으며, 호르무즈의 선장과 고위 관리들을 임명하고, 포르투갈령 인도국의 주요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그의 선장들과 최종 회의를 열었다.[61] 그는 마누엘 국왕에게 간략한 편지를 써서 자신의 사생아에게 아폰수가 받았던 "모든 영예와 보상"을 부여해 줄 것을 요청하고, 마누엘에게 그의 충성을 확신시켰다.[59][64]

1515년 12월 16일,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고아를 눈앞에 두고 사망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도시에는 "큰 통곡 소리가 일어났고",[65]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신이 주요 선장들에 의해 의자에 실려 횃불을 든 군중 속에서 행렬을 이루는 것을 보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66]
5. 유산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포르투갈의 인도양 제국 건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69][70] 그의 사후, 그의 아들 브라스 드 알부케르크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전기 "Commentarios do Grande Affonso d'Alboquerque"를 출판했다.[70] 1572년에는 루이스 드 카몽이스가 쓴 포르투갈의 주요 서사시 ''루시타니아스''에 그의 행적이 묘사되었다.[70] 1934년에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상징주의 서사시 ''Mensagem''에서 기념되었다.
포르투갈 예수회가 고아에서 접목 기술을 통해 만든 알폰소 망고 품종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71][72] 리스본에는 그의 이름을 딴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광장이 있으며, 그곳에는 청동 조각상이 있다.
두 척의 포르투갈 해군 함정, 슬루프 NRP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1884)와 군함 NRP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5. 1. 더불어민주당 관점
5. 2. 국민의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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