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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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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는 1505년 포르투갈의 초대 인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동아프리카와 인도에서 요새 건설, 해상 무역 통제,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를 수행했다. 알메이다는 킬와, 몸바사 등 동아프리카 지역을 공격하고, 안제디바, 칸나노르, 코친, 퀼론에 요새를 건설했다. 1508년 차울 해전에서 아들을 잃었지만, 1509년 디우 해전에서 승리하여 포르투갈의 인도양 무역 독점 기반을 마련했다. 알부케르크와의 갈등 이후, 1509년 총독직을 사임하고 귀국 중, 1510년 케이프타운에서 현지 부족과의 전투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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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의 초상화 (1545년 이후)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의 초상화 (1545년 이후), 작자 미상
칭호각하
이름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
직함
직책제1대 인도 부왕
임기 시작1505년 9월 12일
임기 종료1509년 11월 4일
군주마누엘 1세
전임트리스탕 다 쿠냐
후임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개인 정보
출생 이름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
출생1450년경
출생지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사망1510년 3월 1일
사망지희망봉 테이블 만
국적포르투갈인
직업군인, 탐험가, 인도 부왕
알려진 이유인도양에서 포르투갈 해군 패권 확립
자녀로렌수 드 알메이다

2. 초대 인도 총독

포르투갈인도양 진출 초기, 현지에서의 군사적 충돌과 교역소 방어의 어려움이 커지면서 상주 총독 파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1505년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는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를 최초의 포르투갈령 인도 부왕(Viceroy)으로 임명했다.[41][1] 알메이다에게는 단순한 행정 책임자를 넘어 외교, 전쟁, 사법의 전권이 주어졌다.[42][16]

알메이다는 동아프리카인도 말라바르 해안에 요새를 건설하고, 현지 세력과의 동맹을 통해 포르투갈의 향료 무역을 독점하며, 이집트 맘루크 왕조와 같은 경쟁 세력을 견제하라는 임무를 받았다.[45][44][1] 그는 1505년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출발하여, 동아프리카의 킬와, 몸바사 등을 정복하고 요새를 건설하며 인도양으로 향하는 길목을 확보했다. 인도에서는 안제디바 섬, 칸나노르, 코친 등지에 요새를 건설하거나 강화하며 포르투갈 세력의 기반을 다졌다.

재임 기간 동안 알메이다는 아들 로렌수와 함께 여러 차례 해전을 치렀다. 칸나노르 해전(1506)에서는 승리했지만, 차울 해전(1508)에서는 맘루크-인도 연합 함대의 기습으로 아들 로렌수를 잃는 패배를 겪었다.[3] 아들의 복수를 위해 임기가 만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임자 알부케르크에게 자리를 넘겨주지 않고[71] [72], 1509년 디우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맘루크 세력을 인도양에서 몰아내고 포르투갈의 해상 우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4] 디우 해전 승리 후, 알메이다는 알부케르크와의 갈등 끝에 부왕 직을 인계하고 1509년 말 포르투갈로 귀국길에 올랐다.[27]

2. 1. 시대적 배경

이슬람 세력이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을 통제하고 중개 무역으로 높은 이익을 얻으면서, 향신료를 비롯한 동방 물품의 가격이 크게 올랐다. 이는 유럽 국가들이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지중해북해 무역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포르투갈아프리카대서양 탐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희망봉을 발견하면서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 개척 가능성이 높아졌다.[36]

주앙 2세(재위 1481~1495) 시기에 활발히 추진되던 해양 개척 사업은 1491년 아폰수 왕세자의 갑작스러운 사망[37] 이후 후계 문제로 인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잠시 주춤했다. 여기에 1493년 스페인의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 간의 해양 영토 분쟁[38]이 발생하여 신항로 개척 사업은 더욱 지연되었다. 스페인 출신 교황의 중재안[39]이 포르투갈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소지가 있었으나, 주앙 2세는 이에 불복하고 스페인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 분쟁을 마무리 지었다.

1495년 주앙 2세가 사망하고 마누엘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지체되었던 신항로 개척 사업은 다시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1497년 7월, 바스코 다가마가 이끄는 함대가 리스본을 출발하여 1498년 5월 20일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함으로써, 유럽과 인도를 직접 잇는 해상 무역로를 개척하는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바스코 다가마의 첫 항해 이후에도 포르투갈 왕실은 지속적으로 인도 원정대를 파견했다. 초기에는 말라바르 해안의 주요 세력이었던 캘리컷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기존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 상인들과의 마찰이 불가피했다. 1500년 캘리컷 교역소 습격 사건으로 포르투갈인들이 희생되었고, 이에 대한 보복 과정에서 미리호 학살 사건[40](1502년) 등 충돌이 격화되면서 양측의 갈등은 깊어졌다.

포르투갈의 초기 인도 원정 (1~6차)
차수사령관출발귀국함대 규모주요 활동 및 사건
1바스쿠 다 가마1497년 7월1499년 9월4척신항로 개척
2카브랄1500년 3월1501년 6월13척교역소 습격 사건 (1500년 7월)
3주앙 다 노바1501년 3월1502년 9월4척칸나노르(칸누르)에 교역소 설치, 칸나노르 해전 (1501년 12월)
4바스쿠 다 가마1502년 2월1503년 9월20척순례선 미리호 학살, 캘리컷의 코친 침공 (1503년 3월)
5알부케르크1503년 4월1504년 9월10척코친에 요새 건설, 캘리컷의 코친 침공 (1504년 3월)
6로포 소아레스 드 알베르가리아1504년 4월1505년 7월13척크랭가노레와 판다레인 전투



당시 범선 항해는 계절풍에 의존했기 때문에, 포르투갈 함대는 특정 시기에 인도를 떠나야 했다. 이 공백기를 틈타 캘리컷은 포르투갈의 동맹 도시인 코친 등을 공격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1503년, 1504년). 이로 인해 현지 교역소와 포르투갈인들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았으며, 안정적인 무역 활동을 위해서는 강력한 상주 군사력과 현지 동맹과의 지속적인 협력[45]이 필수적이었다. 즉, 단순한 교역소 운영을 넘어, 요새를 건설하고 상주 병력을 배치하여 인도양에서의 포르투갈 세력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커졌고, 이는 결국 인도 총독(부왕) 파견 결정으로 이어졌다.

2. 2. 총독 파견의 필요성

바스쿠 다 가마의 1차 원정(1497-1499)을 포함하여 총 6차례에 걸쳐 포르투갈 왕실 주도의 인도 원정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누엘 1세는 인도 현지에 총독을 파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초기 포르투갈은 향신료 무역으로 가장 번성하고 말라바르 해안 지역에서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캘리컷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기존 상권을 주도하던 중동 상인들과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1500년 카브랄이 이끈 2차 원정대 시기 교역소가 습격당해 포르투갈인 54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1502년 바스쿠 다 가마가 이끈 4차 원정대가 인도 순례선 '미리호'를 공격하여 300명이 넘는 인도인을 학살하는 사건[40] 등으로 양측의 갈등은 깊어져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포르투갈의 초기 인도 원정 (1~6차)
차수사령관출발귀국함대 규모활동 내용 및 주요 사건
1바스쿠 다 가마1497년 7월1499년 9월4척신항로 개척
2카브랄1500년 3월1501년 6월13척교역소 습격 사건 (1500년 7월)
3주앙 다노바1501년 3월1502년 9월4척칸나노르에 교역소 설치, 칸나노르 해전 (1501년 12월)
4바스쿠 다 가마1502년 2월1503년 9월20척순례선 미리호 학살, 캘리컷의 코친 침공 (1503년 3월)
5알부케르크1503년 4월1504년 9월10척코친에 요새 건설, 캘리컷의 코친 침공 (1504년 3월)
6로포 소아레스1504년 4월1505년 7월13척크랭가노레와 판다레인 전투



당시 범선 항해는 계절풍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포르투갈 원정대는 보통 늦겨울인 1~2월에 인도를 떠나야 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 함대가 없는 기간 동안 캘리컷이 포르투갈의 우방인 코친 등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일이 1503년과 1504년에 반복되었다. 이는 현지에 설치된 포르투갈 교역소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안정적인 교역을 지속하고 현지 동맹국과의 상업적, 군사적 협력 관계[45]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주 병력을 증강하고 요새를 건설하며,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총독의 존재가 절실해졌다. 새로운 포르투갈 원정대는 통상 8월에야 인도에 도착했으므로, 1월부터 8월까지 약 7개월간 포르투갈 교역소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었다. 캘리컷과의 관계가 악화된 이상, 힘의 우위를 확보하고 단순한 교역소 수준을 넘어 현지에 요새를 건설하고 수비 인력을 늘려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향후 안정적인 해상 무역을 위한 필수적인 조치라고 판단되었다.

2. 3. 총독 임명

1505년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는 당시 50대 중반이었던 알메이다를 최초의 포르투갈령 인도(''Estado da Índia'') 부왕(Viceroy)으로 임명했다.[41][1] 이는 단순한 총독이 아닌, 외교, 전쟁, 사법의 전권이 위임된 높은 지위였다.[42][16]

알메이다는 캐러크 14척과 카라벨 6척 등 총 22척의 함대에 1,500명의 병력을 싣고 1505년 3월 25일 리스본을 출발했다.[43][1] 함대의 기함은 페르낭 소아레스(Fernang Soares)가 선장을 맡은 캐러크 '상 라파엘'(Sang Rafael) 호였다.[1] 이 항해에는 훗날 세계 일주를 하게 되는 페르디난드 마젤란도 동행했다.[18]

캐러크선. 알메이다는 동방 항해에 이 배 14척을 사용했다.


알메이다에게 주어진 주요 임무는 동아프리카와 인도 말라바르 연안에 요새를 건설하고, 현지 세력과의 동맹을 통해 포르투갈의 향료 무역을 확대하며, 인도양의 주요 상품 거래를 통제하여 오스만 제국이나 이집트 맘루크 왕조 같은 경쟁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45][44][1] 이는 마누엘 1세가 알메이다에게 내린 훈령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홍해나 그 근처 적당한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홍해를 봉쇄하면 더 이상 향신료가 맘루크에게로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도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 이외의 다른 어느 누구와도 교역하려는 헛된 환상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이 사제 요한의 땅과 가까우므로 두 가지 면에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곳의 기독교도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둘째로 우리의 국고를 늘릴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전쟁을 하고자 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45][46]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 포르투갈 세력권 (최대 확장)을 보여주는 인도, 벵골만, 히말라야 지역 지도

2. 4. 동아프리카에서의 활동

1505년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의 아프리카 항로 및 동아프리카 연안 요새 건설 위치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로부터 초대 포르투갈령 인도 부왕으로 임명된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는 인도양에서의 포르투갈 세력 확장을 위한 임무를 받았다. 특히 동아프리카 해안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여 포르투갈의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16]

1505년 3월 25일, 알메이다는 22척의 함선을 이끌고 리스본을 출발했으며[17], 이 함대에는 젊은 페르디난드 마젤란도 승선해 있었다.[18]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도착한 알메이다 함대는 먼저 소팔라와 모잠비크 섬을 거쳐 북상했다.

1505년 7월, 함대는 킬와(Kilwa)에 도착했다. 알메이다는 1502년 바스코 다 가마가 킬와를 조공국으로 삼았던 것을 근거로[47] 조공 납부를 요구했으나, 당시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던 에미르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알메이다는 아들 로렌수와 함께 5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킬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에미르는 도시를 버리고 도주했고[48], 알메이다는 친 포르투갈 성향의 귀족 무하마드 아르코네(Muhammad Arcone)를 새로운 통치자로 세우고 조공과 요새 건설 동의를 받아냈다. 킬와는 최대 500톤급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좋은 항구를 가지고 있었기에, 포르투갈은 이곳에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를 건설하고 페로 페레이라 포가사(Pêro Ferreira Fogaça)와 100여 명의 수비대를 남겨두었다.[17][19]

킬와 정복 이후, 알메이다 함대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8월경 말린디의 오랜 경쟁 도시였던 몸바사를 공격했다. 약 1만 명의 인구를 가진 몸바사는 현지 아랍 군대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포르투갈군에게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포르투갈 측도 사상자가 발생했다. 포르투갈군은 말린디 술탄의 지원을 받았으며, 점령 후 몸바사를 철저히 약탈하고 불태웠다.[49][19] 같은 달, 알메이다 함대의 일부인 카라벨선은 주앙 호메르(João Homem)의 지휘 아래 잔지바르 섬을 점령하고 포르투갈 영토로 선언했다.

이러한 알메이다의 군사 활동은 스와힐리 해안의 주요 항구 도시들을 포르투갈의 통제하에 두어 인도양 무역로 장악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동시에 현지 세력의 강력한 반감을 사는 결과를 낳았다.

2. 5. 인도 연안 요새 건설

1505년 3월 25일,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는 인도 남서부 해안의 안제디바 섬, 칸나노르, 코친, 퀼론에 4개의 요새를 건설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초대 '인도 부왕'으로 임명되었다.[2][16] 마누엘 1세는 알메이다에게 외교, 전쟁, 사법의 전권을 위임했다.[16] 알메이다는 22척의 함대와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같은 날 포르투갈을 떠났다.[2][17] 이 항해에는 젊은 페르디난드 마젤란도 승무원으로 참여했다.[18]

알메이다의 1505년 인도 항로 및 주요 거점


인도로 가는 도중 알메이다 함대는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 국가들을 공격하여 킬와섬과 소팔라에 요새를 건설하고, 저항한 몸바사는 파괴하고 약탈했다.[19] 말린디를 거쳐 1505년 9월 13일, 알메이다는 인도 고아 근처의 안제디바 섬에 도착하여[50][20] 즉시 성 미구엘이라는 이름의 안제디바 요새 건설을 시작했다.[50][2] 요새의 안전 확보를 위해 10월 16일에는 인근 오노르(Onor)를 공격하여 지역 해적 세력을 굴복시켰다.[51]

안제디바 요새(Fort Anjediva), 안제디바 섬


10월 23일, 칸나노르에서는 현지 통치자인 콜라투리의 허가를 받아 성 안젤로 요새 건설을 시작했다.[50][2] 알메이다는 로렌수 드 브리토를 요새 책임자로 임명하고 150명의 병력과 2척의 배를 남겨두었다.[50][2]

성 안젤로 요새(Fort St. Angelo), 칸나노르


1505년 10월 31일, 알메이다는 8척의 배를 이끌고 코친에 도착했다.[50][2] 코친에서 그는 퀼론에 있던 포르투갈 무역상들이 살해되고 교회가 불탔다는 소식을 들었다.[50][2] 이에 알메이다는 아들 로렌수에게 6척의 배를 주어 퀼론 항구에 정박 중이던 27척의 캘리컷 선박들을 공격하여 파괴하라고 명령했다.[50][2] 알메이다는 코친에 머물며 기존의 마누엘 요새를 강화하고 본격적인 총독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2] 이듬해인 1506년 1월과 2월에는 향신료 등 교역품을 실은 배 10척을 세 차례에 걸쳐 포르투갈로 보냈다.[50]

2. 6. 칸나노르 해전(1506)

1506년 3월, 칸나노르 항구 입구에서 알메이다의 아들 로렌수 드 알메이다가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와 캘리컷의 지배자 자모린이 이끄는 인도 함대 사이에 칸나노르 해전이 벌어졌다. 자모린은 포르투갈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약 200척에 달하는 대규모 함대를 준비했다. 이 인도 함대는 이탈리아 밀라노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제작된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으며, 힌두, 아랍, 오스만 세력으로 구성된 연합 함대였다.[52]

로렌수 드 알메이다가 지휘하는 포르투갈 함대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으나, 칸나노르 항구 입구에서 자모린의 함대를 성공적으로 가로막았다. 이어진 해전에서 포르투갈 함대는 인도 연합 함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52] 이 승리 이후 로렌수 드 알메이다는 남쪽으로 항해하여 오늘날의 스리랑카콜롬보까지 해안 지역을 탐험했다.

2. 7. 칸나노르 공성전(1507)

칸나노르와의 관계는 3차 원정대의 주앙 다노바가 1501년에 교역소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53]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는 1505년 10월 칸나노르 통치자의 허락을 받아 성 안젤로 요새를 건설하고, 로렌수 드 브리토(Lourenço de Brito)를 책임자로 임명하며 150명의 수비대를 상주시켰다.[54]

양국 간의 원만했던 관계는 칸나노르의 새로운 통치자가 즉위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에 우호적이던 칸나노르 통치자가 1506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캘리컷의 자모린은 새로운 통치자 선정 과정에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로 인해 칸나노르의 새로운 통치자(콜라티리 군주)는 자모린에게 협조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53]

1502년 다가마의 4차 원정 이후 포르투갈은 자신들의 관할 구역에서 안전통행증(카르타즈)을 발급하고 있었는데,[55][56] 이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선박을 침몰시키고 선원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57] 이러한 포르투갈의 행태는 토착 상인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심어주었으며, 포르투갈의 만행에 크게 분노한 인접 지역민들은 그들의 통치자인 콜라티리(칸나노르의 지배자)에게 이에 대한 응징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53]

칸나노르 해전(1506)에서 패배한 후 복수를 계획하던 캘리컷의 자모린은 이러한 분위기를 기회로 삼아 콜라티리를 설득하여 연합했고, 1507년 4월 27일 칸나노르의 안젤로 요새를 포위 공격하였다.[53]

콜라티리는 4만 명의 군대를 동원했고, 캘리컷의 자모린은 대포 21문과 병사 2만 명을 지원했다.[58] 개전 초기에 포르투갈은 우수한 화력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나, 포위전이 4개월 동안 장기화되면서 보급품이 떨어지고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1507년 8월 27일, 트리스탕 다 쿠냐(Tristão da Cunha)가 이끄는 포르투갈 8차 원정대가 도착하면서 전세는 다시 포르투갈에게 유리하게 역전되었다.[53]

2. 8. 차울 해전(1508)

포르투갈의 강력한 해군력과 화력 앞에 육상과 해상에서 연이어 패배한 인도 토착 세력과 이슬람 상인들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59] 맘루크 왕조는 이미 1504년 캘리컷 인근 판다레인(Pandarane)에서 자국민 철수 작전이 포르투갈의 공격으로 실패한 경험이 있어[60] 인도 문제 개입을 고려하고 있었다.

해전 경험이 부족했던 맘루크 왕조는 베네치아 공화국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함대를 구성했다.[61] 포르투갈의 등장으로 동방무역 독점적 지위를 위협받던 베네치아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지중해식 전투함을 공급하며 맘루크 왕조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베네치아 조선 기술자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건조한 배를 분해하여 수에즈 지역으로 옮긴 뒤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신속하게 함대를 준비했다. 후세인 알-쿠르디(미르 후세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맘루크 함대는 홍해를 거쳐 1507년 9월 디우 항에 도착하여 전투 준비를 마쳤다.[62]

1508년 3월,[3] 맘루크-인도 연합 함대는 차울 근해에서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 총독의 아들인 로렌수 드 알메이다가 지휘하는 포르투갈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차울 해전).[63] 당시 로렌수의 함대는 상선을 호위하던 중이었는데, 접근하는 함대가 베네치아가 지원한 유럽식 전투함 형태였기 때문에[64] 아군의 다른 함대로 오인하고 경계를 소홀히 하다가 기습을 당했다.[63] 당시 아라비아해에는 인도로 파견된 본 함대 외에도 독립적으로 작전하는 포르투갈 함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포르투갈 함대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소수의 함선만이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로렌수가 타고 있던 기함은 집중 공격을 받아 침몰했고, 로렌수 역시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65][66][67][68][3] 맘루크-인도 연합 함대도 승리했지만 피해가 컸기 때문에 디우로 귀항했다.[69] 이 패배로 포르투갈은 인도 해역에서 일시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3]

2. 9. 디우 해전(1509)

1508년 3월, 맘루크 이집트와 구자라트 왕국 연합 함대는 차울 해전에서 알메이다의 아들 로렌수가 지휘하던 포르투갈 함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로렌수가 전사하면서 포르투갈은 인도 해역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3] 로렌수의 유해는 구자라트 측 사령관 말리크 아야스에 의해 정중하게 장례가 치러졌고, 알메이다는 말리크 아야스로부터 애도의 편지를 받았다.[23]

로렌수가 전사했을 당시 알메이다의 부왕 임기는 이미 만료되었고, 후임자인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왕의 임명장을 가지고 코친에 도착해 있었다.[14] [70] 그러나 아들의 복수와 차울 전투 포로 석방을 명분으로 내세운 알메이다는 알부케르크의 부임 인정을 거부하고 부왕 직 인수인계를 미루었으며[71] [72], 나중에는 알부케르크를 체포하기까지 했다.

1509년 2월에 벌어진 디우 해전의 전개 과정. 알메이다는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509년 2월 3일, 알메이다는 23척의 함대를 이끌고 디우 항구 근처에서 디우 해전을 벌였다.[73] 상대는 이집트 맘루크 술탄국, 오스만 제국, 칼리컷의 자모린, 구자라트 술탄의 연합 함대였으며, 이들의 동방 무역 독점을 우려한 베네치아 공화국라구사 공화국도 기술 및 해군 지원을 제공했다.[4] 알메이다는 이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73] [4] 맘루크-인도 연합 함대 사령관 후세인은 도주하였고, 포르투갈군은 생포한 포로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복수극을 벌였다. 전투 후 알메이다는 디우를 점령하는 대신,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교역소를 설치하는 데 만족했다.[74] 포르투갈 해군은 많은 전리품을 챙긴 후 디우에서 퇴각했다.

디우 해전의 승리는 결정적이었다. 오스만과 이집트 세력은 인도양에서 큰 타격을 입고 물러났으며, 포르투갈은 이후 약 100년 이상 인도 해상 무역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우위는 17세기 네덜란드와 영국의 부상으로 점차 약화되었다.[4] 디우 해전 이후, 칼리컷의 자모린은 포르투갈에 강화를 요청했고, 칼리컷에 포르투갈의 요새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했다.

디우 해전 승리 후 코친으로 돌아온 알메이다는 여전히 알부케르크에게 부왕 직 인계를 거부했다.[14] 두 사람은 인도의 경영 방침을 두고 근본적인 시각차를 보였다. 알메이다는 해상에서의 군사 활동을 통해 이슬람 상인들의 무역을 방해하는 데 집중해야 하며, 비용이 많이 드는 육상 거점 확보에는 부정적이었다. 반면 알부케르크는 호르무즈 섬 등에 요새를 건설하는 등 육상 거점 확보를 통해 무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4] 이러한 갈등은 현지의 포르투갈인들을 알메이다 파와 알부케르크 파로 나뉘게 했으며, 알메이다가 알부케르크를 투옥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14] [26] 이들의 불화는 포르투갈 본국에서 파견된 돔 페르난두 코우티뉴의 중재로 가까스로 해소되었다.[14] 결국 1509년 11월, 알메이다는 알부케르크에게 부왕 직을 인계하고 포르투갈로 귀국길에 올랐다.[27]

3. 알부케르크와의 갈등

1508년 차울 전투에서 아들 라우렌수가 전사했을 당시, 알메이다의 부왕 임기는 이미 만료된 상태였고 후임자인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코친에 도착해 있었다[14]。그러나 알메이다는 아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으로 알부케르크에게 총독직 인계를 거부했다. 그는 1509년 2월 디우 해전에서 인도와 맘루크 왕조 연합군을 격파하여 아들의 복수를 달성했지만[14], 전투에서 승리하고 코친으로 귀환한 뒤에도 알부케르크에게 부왕 직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14]

두 사람의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인도 경영 방침의 차이였다[14]。알메이다는 해상에서의 군사 행동을 통해 이슬람 상인들의 해상 무역을 방해하는 것을 중시했으며, 많은 비용이 드는 육상 거점을 확보하고 강화하는 데에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반면, 알부케르크는 육상 거점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무역을 확대하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24]。이러한 전략적 견해 차이는 1506년부터 아라비아해 방면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며 호르무즈 섬에 요새를 건설했던 알부케르크의 부하 일부가 그의 방침에 반발하여 알메이다에게 도망쳐 불만을 토로하는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25]

주앙 데 바로스의 『아시아사』와 같은 기록에 따르면, 당시 코친에 있던 포르투갈인들은 알메이다 파와 알부케르크 파로 나뉘어 대립했으며, 이들의 불화는 현지 주민들에게도 알려질 정도였다[26]。갈등이 격화되면서 한때 알부케르크가 투옥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14]。결국 포르투갈 본국에서 파견된 특사 돔 페르난두 코우티뉴가 중재에 나서면서 두 사람의 대립은 해소될 수 있었다[14]1509년 11월, 알메이다는 마침내 부왕 직을 알부케르크에게 넘겨주고 포르투갈 본국으로 귀국길에 올랐다[27]

4. 사망

1509년 12월, 알부케르크에게 총독 자리를 넘겨준 알메이다는 인도를 떠나 포르투갈로 귀국길에 올랐다. 1510년 2월 말, 물을 보충하기 위해 희망봉 근처의 테이블만(Table Bay)에 도착하여 현지 원주민인 코이코이인(ǃUriǁ'aikua 또는 고링하이콰라고도 불림)을 만났다.[75][6]

처음에는 우호적인 교역이 이루어졌으나, 일부 선원들이 인근 코이코이인 마을에서 소를 훔치려 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76][29] 이 과정에서 코이코이인 주민이 사망하거나[76] 포르투갈 측에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29] 상황이 악화되자 코이코이인들은 분노하여 포르투갈인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알메이다는 1510년 3월 1일 아침, 자신의 선장 페드로와 호르헤 바레토 등이 마을을 공격하는 것을 허락했다.[7] 이후 알메이다는 해변에서 부하들을 기다리던 중 코이코이인들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기함 선장 디오고 다 운호스가 상륙 보트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려 알메이다와 부하들은 배로 퇴각할 수도 없었다.[77] 결국 알메이다는 코이코이인들에게 포위된 채 싸우다가 선장 11명을 포함한 64명의 부하들과 함께 전사했다.[8][9] 다른 기록에서는 150명 중 5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도 한다.[30] 이 사건은 훗날 솔트강 전투로 알려지게 된다.

알메이다의 시신은 같은 날 오후 수습되어 현재 케이프타운 해안가에 묻혔다.[77][10] 그가 평소 몸에 지녔던 값비싼 물건들은 모두 벗겨진 상태였다.[31] 역사가 니콜라스 베르군스트는 알메이다가 부하들의 음모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일부 부하들이 의도적으로 코이코이인들을 도발한 뒤 알메이다의 퇴로를 막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11]

알메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불만을 자주 드러내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은 포르투갈 전체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고 전해진다.[32]

알메이다의 후원자,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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