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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드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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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베르 드묑은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가톨릭 사회 사상가로, 프랑스 육군에서 복무하고 파리 코뮌 진압에 참여했다. 그는 가톨릭 노동자 단체를 조직하여 제3공화국에 영향을 미쳤으며, 왕당파 의원으로 활동하며 사회 개혁을 지지했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보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국민의 사기 진작에 기여했다. 그는 프랑스 학사원 회원이 되었으며, 191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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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드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콩트 알베르 드 뮌
콩트 알베르 드 뮌
이름아드리앵 알베르 마리, 콩트 드 뮌
출생1841년 2월 28일
출생지뤼미니-넬-오르모, 센-에-마른 주, 프랑스 왕국
사망1914년 10월 6일
사망지보르도, 프랑스 제3공화국
정치
정당인민 자유 행동 1901-1914

2. 생애

생시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알제리 전쟁(1862년)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파리 코뮌 진압에도 참여했다. 1871년 말부터는 프랑스 전역에 걸쳐 '가톨릭 노동자 서클 협회'(L'Oeuvre des Cercles Catholiques d'Ouvriersfra)를 조직하여 사회 운동을 전개했으며, 이는 당시 제3 공화국의 정치 지형에 영향을 미쳤다.

하원 의원으로 선출된 후에는 여러 해 동안 왕당파와 협력하는 정치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1892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레룸 노바룸의 정신에 따라, 제3 공화국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존중한다면 공화국을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드레퓌스 사건 때는 반(反)드레퓌스 진영에 서서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고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는 공화주의 정치가인 쥘 페리와 대립했으며,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그의 보수적이고 가톨릭 중심적인 사상을 드러냈다.

"교회와 혁명은 서로 화해할 수 없다. 교회가 혁명을 죽이지 못하면 혁명이 교회를 죽이게 될 것이다."[36]

2. 1. 초기 생애

유물론 철학자 헬베티우스. 드 묑의 아버지 쪽 증조부


알베르 드 묑은 루미니-네슬-오모의 센에마른주에서 드 묑 후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누이 안토닌 드 묑은 우르셀 공작과 결혼하여 벨기에로 이주했으며, 이로 인해 알베르는 우르셀 공작의 처남이 되었다. 드 묑의 아버지 쪽 증조부는 계몽주의 철학자 엘베티우스였고,[2] 외조부는 샤를 10세 치하에서 외무 장관을 지낸 오귀스트 드 라 페로네였다.[3]

그는 프랑스 육군에 입대하여 알제리에서 복무했다(1862년). 1869년에는 제국 왕자 루이-나폴레옹으로부터 소위로 임관했다.[4]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메츠 인근 전투에 참전했다. 메츠가 프로이센군에 항복하면서 그는 포로가 되어 아헨으로 보내졌고,[5] 그곳에서 사회 개혁 사상가인 르네 드 라 투르 뒤 팽을 만났다. 독일 포로 생활 중 그는 빌헬름 에마누엘 폰 케텔러 주교의 사회 문제에 대한 저술을 접하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드 묑과 뒤 팽은 석방된 후 노동 계급이 처한 어려움에 대응하기로 뜻을 모았다.[6]

로보 병영에서 코뮌 지지자들의 대량 처형, 프레데릭 릭스의 판화. 코뮌 진압은 드 묑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파리 코뮌 진압 작전에 참여하여 폴 드 라드미로 장군의 참모로 복무했다.[5] 코뮌 진압 과정에서 목격한 양측의 극심한 폭력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코뮌 가담자들의 열정에 감명받는 한편, 노동 계급 문제에 대한 상류층의 무관심에 분노를 느꼈다.[6] 이후 코뮌의 원인에 대한 의회 조사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악은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됩니다. 한편으로는 노동 계급의 상류층에 대한 깊은 증오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의 노동자 복지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과 진실과 오류를 구별하는 능력의 완전한 부재가 있습니다. 계급 사이에는 오늘날 시간과 더 나은 도덕 교육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깊은 심연이 있습니다. 저는 힘만으로는 어떠한 개선도 가져올 수 없다고 믿습니다.[7]

이듬해인 1871년 말, 드 묑은 뒤 팽과 함께 모리스 마이넹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창립자)의 요청에 따라 '가톨릭 노동자 서클 협회'(L'Oeuvre des Cercles Catholiques d'Ouvriers프랑스어)라는 이름으로 가톨릭 노동자 클럽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 클럽은 프랑스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으며, 지역의 부유층과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사교 활동을 하며 귀족 회원들의 강연을 듣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5]

2. 2. 군 복무

생시르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프랑스 육군에 입대하여 알제리에서 복무했다(1862년).[4] 1869년에는 제국 왕자 루이-나폴레옹으로부터 소위로 임관했다.[4]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메츠 주변 전투에 참전했다.[5] 메츠가 항복하면서 그는 포로가 되어 아헨(아ix-라-샤펠)으로 보내졌고,[5] 그곳에서 르네 드 라 투르 뒤 팽을 만났다. 독일에서의 포로 생활 동안 그는 빌헬름 에마누엘 폰 케텔러 주교의 사회적 가르침에 관한 저술을 접하고 깊은 영감을 받았다. 드 묑과 뒤 팽은 석방된 후 노동 계급이 처한 곤경에 대응하기로 뜻을 모았다.[6]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파리 코뮌 진압 작전에 참여하여 폴 드 라드미로 장군의 참모로 복무했다.[5] 이 과정에서 드 묑은 진압군과 코뮌 양측 모두가 저지른 폭력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코뮌 지지자들이 보여준 열정에 감명받는 한편, 노동 계급 문제에 대한 상류층의 무관심에 분노를 느꼈다.[6] 이후 코뮌의 기원에 대한 의회 조사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악은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됩니다. 한편으로는 노동 계급의 상류층에 대한 깊은 증오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의 노동자 복지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과 진실과 오류를 구별하는 능력의 완전한 부재가 있습니다. 계급 사이에는 오늘날 시간과 더 나은 도덕 교육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깊은 심연이 있습니다. 저는 힘만으로는 어떠한 개선도 가져올 수 없다고 믿습니다.[7]

2. 3. 가톨릭 노동 운동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 메츠가 항복하자 포로독일 아헨으로 보내졌다.[5] 그곳에서 르네 드 라 투르 뒤 팽을 만났고, 빌헬름 에마누엘 폰 케텔러 주교의 사회적 가르침에 관한 저술을 접하며 깊은 영감을 받았다. 드 묑과 뒤 팽은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후 노동 계급이 처한 어려움에 대응하기로 결심했다.[6]

전쟁 후, 드 묑은 파리 코뮌 진압에 참여하여 폴 드 라드미로 장군의 참모로 복무했다.[5] 그는 진압 과정에서 목격한 양측의 극심한 폭력에 큰 충격을 받았고, 파리 코뮌 지지자들의 열정에는 감명받았으며, 동시에 노동 계급 문제에 대한 상류층의 무관심에는 분노를 느꼈다.[6] 코뮌의 기원에 대한 의회 조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며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악은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됩니다. 한편으로는 노동 계급의 상류층에 대한 깊은 증오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의 노동자 복지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과 진실과 오류를 구별하는 능력의 완전한 부재가 있습니다. 계급 사이에는 오늘날 시간과 더 나은 도덕 교육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깊은 심연이 있습니다. 저는 힘만으로는 어떠한 개선도 가져올 수 없다고 믿습니다."[7]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1871년 말부터 드 묑은 뒤 팽, 그리고 생 빈센트 드 폴 형제회 창립자인 모리스 마이넹의 요청에 따라 '가톨릭 노동자 서클 협회'(L'Oeuvre des Cercles Catholiques d'Ouvriers프랑스어)라는 이름의 가톨릭 노동자 클럽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 클럽은 프랑스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서클'이라 불린 이 클럽들은 특정 지역의 부유층과 노동자들을 한데 모아 기도, 사교 활동을 하고 귀족 회원들이 강연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5] 이러한 활동은 당시 제3 공화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3. 정치 활동

생시르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알제리 전쟁(1862)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파리 코뮌 진압에도 참여했다.

1871년 말부터 프랑스 전역에 가톨릭 노동자 단체(fr)를 조직하며 제3 공화국 체제에 도전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하원 의원으로 선출된 후 여러 해 동안 왕당파와 협력하며 공화국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1892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레룸 노바룸 발표 이후, 제3공화국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존중한다면 공화국을 지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에는 반(反)드레퓌스 진영에 서서 드레퓌스의 유죄를 강력히 주장하고 반유대주의를 선동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공화주의자 쥘 페리의 강력한 정적이었으며, "교회와 혁명은 서로 화해할 수 없다, 교회가 혁명을 죽이지 못하면 혁명이 교회를 죽이게 될 것이다"[36]라는 발언으로 그의 반혁명적, 반공화주의적 신념을 드러냈다.

3. 1. 왕당파 의원

1871년 말부터 프랑스 전역에 가톨릭 노동자 단체(fr)를 조직하여 제3 공화국 체제에 도전했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사회적 가톨릭주의를 옹호하는 데 헌신했으며, 프랑스 제3공화국사회 정책을 비판하다가 결국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활동 금지령을 받았다. 이에 그는 위임직을 사임하고(1875년 11월), 이듬해 2월 왕당파이자 가톨릭 후보로 퐁티비 지역구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교회의 지원에 힘입어 당선되었고, 선거 과정에서 교황 비오 9세로부터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 기사단 훈장을 받았다. 이후 같은 선거구에서 치러진 다음 선거에서도 승리했지만, 선거 결과가 무효 처리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드묑은 이듬해 8월 재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고, 이후 수년간 공화국 반대 세력의 가장 두드러진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그는 "우리는 타협할 수 없는 반혁명을 형성한다"고 공언하기도 했다.[5]

1876년 3월, 드묑은 프랑스 의회에서 첫 연설을 했다. 그는 곧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요 인물로 자리 잡았으며, 뛰어난 웅변술과 강한 개성으로 반(反)교권주의자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당시 공화파 지도자였던 레옹 감베타는 젊은 드묑을 가리켜 '우파의 감베타' 또는 제2의 몽탈랑베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8]

그러나 그는 1878년 보편적 선거권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논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1879년부터 1881년까지 의원직을 유지하지 못했다. 드묑은 정치 경력의 상당 기간 동안 확고한 정통왕위 계승파였으며,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던 앙리, 샹보르 백작은 드묑의 자녀 중 한 명의 대부가 되어주기도 했다.[9] 그는 파리 백작이 왕위 계승을 준비한다는 의혹이 제기된 후 프랑스 왕족들의 추방 법안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왕당파 세력이 조르주 불랑제 장군을 지지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년간 왕당파와 협력했던 드묑은 1892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레룸 노바룸 발표 이후, 제3공화국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존중한다면 공화국을 지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변화의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반(反)드레퓌스 진영에 서서 드레퓌스 대위의 유죄를 강력히 주장하고 반유대주의를 선동하는 데 앞장섰다. 이는 그의 보수적이고 비타협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공화주의자 쥘 페리의 강력한 정적이었으며, "교회와 혁명은 서로 화해할 수 없다. 교회가 혁명을 죽이지 못하면 혁명이 교회를 죽이게 될 것이다"라는 발언[36]으로 그의 반혁명적, 반공화주의적 신념을 드러냈다.

3. 2. 공화국 지지 선언 (Ralliement)

알베르 드묑은 오랫동안 왕당파로서 공화정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우리는 타협할 수 없는 반혁명을 형성한다"고 말할 정도로 공화국 반대 세력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5] 보편적 선거권에도 반대했다.[9] 그의 영향력은 왕당파의 지지가 조르주 불랑제에게 향하도록 하는 데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드묑은 1892년 교황 레오 13세가 발표한 회칙 ''오 밀리외 데 솔리시튀드''에 따라 중요한 정치적 전환을 맞이했다. 그는 이 회칙을 준수하여, 제3공화국로마 가톨릭교회를 존중한다면 공화국 정부를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이는 '랄리망'(Ralliement|랄리망프랑스어), 즉 공화국 지지 선언으로 알려졌다. 일부 초기 기록에서는 레룸 노바룸 회칙을 언급하기도 하나, 공화국 지지를 직접적으로 촉구한 것은 ''오 밀리외 데 솔리시튀드''였다.

이듬해 1월, 레오 13세는 드묑에게 서한을 보내 그의 결정을 칭찬하고 사회 개혁 노력을 격려했다.[5]

드묑의 공화국 지지 선언은 기존의 정치적 동지들 사이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오랜 친구이자 반유대주의 성향의 언론인 에두아르 뤼몽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뤼몽의 신문 라 리브르 파롤은 드묑과 교황 대사 도메니코 페라타 추기경을 강하게 비난했다.[10]

정치적으로도 드묑은 그 해 총선에서 패배하는 등 즉각적인 어려움을 겪었으나, 1894년 피니스테르주 (모를레)에서 다시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3. 3. 사회 개혁 활동

1871년 말부터 프랑스 전역에 Oeuvre Circles Catholiques d'Ouvriers|외브르 서클 가톨리크 두브리에fre (가톨릭 노동자 단체)를 조직하여 제3 공화국 시기 사회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초기에는 왕당파와 협력했으나, 1892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레룸노바룸과 ''오 밀리외 데 솔리시튀드''의 정신에 따라, 가톨릭 교회를 존중하는 공화국 정부를 지지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듬해인 1893년 1월, 교황 레오 13세는 드묑에게 서한을 보내 그의 결정을 칭찬하고 사회 개혁 노력을 격려했다.[5] 그러나 드묑의 공화국 지지는 오랜 친구였던 반유대주의 성향의 언론인 에두아르 뤼몽과의 관계 단절로 이어졌다. 뤼몽은 자신의 신문 라 리브르 파롤을 통해 드묑과 당시 교황 대사였던 도메니코 페라타 추기경을 강하게 비난했다.[10]

1897년에는 뛰어난 연설과 웅변으로 쥘 시몽의 뒤를 이어 프랑스 학사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저서 ''Ma vocation sociale|마 보카시옹 소시알fre'' (1908)에는 자신의 사회 활동에 대한 설명과 정당화가 담겨 있다.[5]

드묑은 사회주의에 대해 "사회주의는 논리적인 혁명이며 우리는 반혁명이다. 우리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다."고 말하며 단호한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회 개혁에 대한 진정성과 이상주의는 일부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칼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프랑스 노동자당(POF) 소속이었던 폴 라파르그는 국회 개원 연설에서 드묑을 "이 의회에서 제시된 최고의 사회주의 연설을 했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부 반성직주의 좌파 진영에서는 사회 가톨릭 운동과 프랑스 노동자당 간의 연대 가능성을 의심하기도 했다.[12]

1883년, 드묑은 프랑스에서 노동 조합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14] 그가 지지한 주요 사회 개혁 내용은 다음과 같다.[13]

개혁 분야주요 내용
노동 시간주당 노동 시간을 일요일 휴무 포함 58시간으로 제한
여성 노동자 보호여성의 야간 노동 금지, 출산 후 4주 휴식 보장
아동 노동아동 노동 폐지
사회 보험노령 연금 도입, 사고 및 건강 보험 도입
임금노동 착취 사업장에 대한 최저 임금 설정
노동 분쟁 조정공동 중재 위원회 설립
국제 협력노동 입법에 관한 국제 협약 추진


3. 4. 드레퓌스 사건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알베르 드묑은 드레퓌스 반대파의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며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강하게 드러냈다.

1897년 5월,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형인 마티외 드레퓌스는 사건의 재심을 요청하기 위해 드묑을 찾아갔다.[15] 마티외는 드묑이 군대에 대한 존경심이 깊고 약자를 돕는 성향이 있어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드묑은 군 지휘부에 대한 강한 충성심 때문에 드레퓌스가 무죄일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마티외에게 "이 문제에 대해 당신에게 할 말이 아무것도 없소."라고 말하며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16]

이처럼 드묑이 드레퓌스 사건에서 반대 입장을 취한 것은 군대에 대한 그의 강한 충성심 때문이었다. 또한 유대인들이 국제적인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는 등 그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 성향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는 유대인을 경멸적으로 지칭하는 youtres|유트르fra(영어의 "kikes"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비속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17][18][19]

3. 5. 말년

1899년 베르사유에서 열린 회의를 묘사한 르 몽드 일뤼스트레의 정치 만화. 드 묑은 오른쪽에서 네 번째 인물이다.


1896년 드 묑은 오스만 제국에 의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하미디 학살을 규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장 조레스조르주 클레망소, 그리고 공화주의 역사학자 에르네스트 라비세와 뜻을 같이하기도 했다.[20]

프랑스 내 가톨릭교도 사이에서 확산되던 반성직자주의에 맞서기 위해, 드 묑은 1901년 자크 피유와 함께 국민 자유 행동당을 결성했다.[21] 이념적, 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드 묑은 루이 바르투 총리와 개인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22]

3. 6. 제1차 세계 대전

말년의 알베르 드묑 백작


1911년부터 드묑은 삼국 동맹과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예견하며, 그 충돌의 시작점이 발칸 반도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과로와 마지막 선거 활동, 그리고 건강 문제로 인해 1914년 6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이 가지는 중요성을 처음에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7월 말이 되어서야 드묑은 조국에 전쟁이 임박했음을 확신했으며, 모든 프랑스인이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이라고 믿었다.[23]

전쟁 발발 직전인 1914년 7월 31일, 평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 지도자인 장 조레스가 암살당하자, 드묑은 격렬했던 과거의 정치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강력히 비난하며 조레스의 미망인에게 진심 어린 애도의 편지를 보냈다. 전기 작가 뱅자맹 마르탱은 이를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내 다양한 정치 세력이 단결한 신성 동맹 Union Sacrée프랑스어 형성의 첫걸음으로 평가했다.[24] 이러한 통합 정신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8월 4일 프랑스 하원이 독일에 대한 전쟁을 가결한 후, 드묑은 의사당을 가로질러 과거 파리 코뮌 진압에 참여했던 전직 기병 장교였던 자신과 단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았던 사회주의자 에두아르 바이앙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25]

의회 밖에서는 드묑의 또 다른 오랜 정적이자 프랑스-바티칸 관계 단절을 주도했던 테오필 델카세영국-프랑스 협상을 성공시킨 공로로 축하를 받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 드묑을 발견한 델카세는 몸을 기울여 "신께서도 우리와 함께하실까요?"라고 물었고, 드묑은 "그렇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신은 용서하시고, 가톨릭 신자들의 희생을 헤아리십니다.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라고 답하며 전쟁 앞에서 종교적, 정치적 갈등을 넘어서는 단결을 강조했다.[26]

드묑은 이전 프랑스의 모로코 정복 전투 당시부터 군대에 종교적 지원을 제공하는 군종 사제의 복귀를 위해 노력해왔다. 1913년 5월, 외젠 에티엔 국방 장관은 각 군단에 4명의 군종 사제를 배치하도록 지시했으나, 이는 서부 전선에서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자 턱없이 부족한 숫자임이 드러났고, 병사들 사이에서 더 많은 종교적 지원 요구가 빗발쳤다. 이에 르네 비비아니 총리는 드묑에게 무보수로 무기한 복무할 사제 250명을 모집할 권한을 부여했다. 드묑은 프랑스 적십자사 본부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모병 활동을 시작했다. 8월 27일에는 첫 군종 사제 부대가 준비되어 전선으로 파견되었으며, 1,000명이 넘는 사제들이 다음 파견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활동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드묑이 발행하는 신문 ''에코 드 파리'' 구독자들이 낸 성금으로 충당되었으며, 10만 프랑 이상이 모금되었다.[27]

1914년 8월 말,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은 비비아니 총리에게 아리스티드 브리앙, 알렉상드르 밀랑, 그리고 드묑을 포함시켜 내각을 확대 개편할 것을 권고했다. 비비아니는 브리앙과 밀랑의 입각은 수락했지만, 드묑의 입각은 거절했다. 대신 밀랑은 총리의 지지를 받아 드묑에게 군대의 보급 시스템을 감독하는 중책을 맡겼다. 드묑은 자신의 나이와 건강 때문에 직접 전투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지만, 이 직책을 통해 다시 군대와 직접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 임명은 드묑을 사실상 비공식적인 전시 각료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또한, 그가 매일 신문에 기고하는 전시 사설은 병사들과 시민들의 사기를 크게 높였고, 전쟁 부처에는 그의 글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그에게 "국민 신뢰부 장관"(ministre de la Confiance nationale프랑스어)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28]

제1차 마른 전투에서 조제프 조프르 원수가 거둔 반격의 성공을 확신했던 드묑은, 독일군의 파리 진격 위협으로 인해 푸앵카레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정부와 함께 보르도로 이동해야 했다. 1914년 10월 6일, 조프르의 성공적인 반격을 축하하고 다음 날 실릴 사설 작성을 마친 후, 드묑은 세상을 떠났다.[29]

4. 유산

그가 사망하자 에드몽 로스탕은 미망인에게 "부인, 프랑스 국민의 영혼이 당신의 마음 주변에 모여 있습니다."라고 말했다.[30]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장례식에 조의를 표했다.[31]

드 묑의 장례식은 10월 10일 보르도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렸으며, 피에르 앙드리에 대주교가 주례를 맡았다. 이례적으로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 르네 비비아니 총리, 델카세, 다수의 국회의원과 상원 의원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묘지에서 하원 의장 폴 데샤넬은 조사를 통해 드 묑을 "프랑스의 불멸의 영예"라고 칭했다. 푸앵카레 대통령은 연설 중 공개적으로 눈물을 흘렸고, 데샤넬의 연설이 끝나자 그를 껴안았다. 자크 피우(Jacques Piou)는 또 다른 조사에서 "그는 인기 없는 이들을 옹호하며 생을 보냈지만,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으로 죽었다."고 평가했다.[32]

루이 바르투 총리는 드 묑을 "공화국의 모든 위대한 노동법의 협력자이자 때로는 선구자"라고 평가했다.[33] 훗날 샤를 드골 역시 그의 정치적 견해에 영향을 받았다.[34] 미국의 역사학자 바바라 터크먼은 그를 "고상한 이상을 가진 성실하고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했다.[35]

5.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899년 선거대통령8대정통왕당파0.12%1표9위낙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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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Albert de Mun https://www.jstor.or[...] 19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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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논문 Albert de Mun https://www.jstor.or[...] 1923-03
[5] 문서
[6] 논문 Count Albert de Mun: His Theory of the Social Apostolate https://www.jstor.or[...] 1953-03
[7] 서적 Count Albert de Mun Paladin of the Third Republic 1978
[8] 서적 Church and Revolution: Catholics in the Struggle for Democracy and Social Justice
[9] 서적 The Proud Tower: A Portrait of the World Before the War, 1890-1914; Barbara W. Tuchman's Great War Series Random House Publishing Group 2011
[10] 논문 Antisemitism in France before the Dreyfus Affair https://www.jstor.or[...] 1949-01
[11] 서적 The Proud Tower: A Portrait of the World Before the War, 1890-1914; Barbara W. Tuchman's Great War Series Random House Publishing Group 2011
[12] 논문 Jesus the Sans-Culotte': Marxism and Religion during the French Fin de Siècle https://www.jstor.or[...] 199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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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논문 The Social Catholic Movement in France under the Third Republic https://www.jstor.or[...] 19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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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적 Count Albert de Mun Paladin of the Third Republic 1978
[17] 서적 Ambivalent Alliance: The Catholic Church and the Action Française, 1899-1939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1985
[18] 서적 Dreyfus: Politics, Emotion, and the Scandal of the Century Henry Holt and Company 2010
[19] 서적 The Right in France from the Third Republic to Vichy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20] 서적 Count Albert de Mun Paladin of the Third Republic 1978
[21] 논문 Count Albert de Mun: His Theory of the Social Apostolate https://www.jstor.or[...] 1953-03
[22] 논문 Albert de Mun https://www.jstor.or[...] 1923-03
[23] 서적 Count Albert de Mun Paladin of the Third Republic 1978
[24] 서적 Count Albert de Mun Paladin of the Third Republic 1978
[25] 서적 Count Albert de Mun Paladin of the Third Republic 1978
[26] 서적 Count Albert de Mun Paladin of the Third Republic 1978
[27] 서적 Count Albert de Mun Paladin of the Third Republic 1978
[28] 서적 Count Albert de Mun Paladin of the Third Republic 1978
[29] 서적 Count Albert de Mun Paladin of the Third Republic 1978
[30] 논문 Albert de Mun https://www.jstor.or[...] 19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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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서적 Count Albert de Mun Paladin of the Third Republic 1978
[33] 논문 Count Albert de Mun: His Theory of the Social Apostolate https://www.jstor.or[...] 1953-03
[34] 논문 The Formation of de Gaulle's Political Philosophy: Legacies of the Belle Epoque. https://www.jstor.or[...] 1993
[35] 서적 The Proud Tower: A Portrait of the World Before the War, 1890-1914; Barbara W. Tuchman's Great War Series Random House Publishing Group 2011
[36] 서적 기독교의 역사 포이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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