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암보히망가 왕실 언덕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암보히망가 왕실 언덕은 마다가스카르의 중앙 고원 지대에 위치한 역사적 유적지로,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메리나 왕국의 중요한 정치적, 영적 중심지였다. 언덕은 '푸른 언덕' 또는 '아름다운 언덕'을 의미하며, 요새화된 마을 로바(Rova)에는 왕궁, 무덤, 신성한 장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암보히망가는 19세기 프랑스 식민지 시대와 2009년 정치 위기, 2012년 사이클론 지오반나 등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보존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마다가스카르의 사회 - 마다가스카르의 인구
    마다가스카르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여 2022년 약 2,961만 명으로 추산되며, 15세 미만 인구 비율 감소 및 25-64세 인구 비율 증가 등의 인구 구조 변화와 함께 높은 출산율, 낮은 기대 수명, 낮은 문해율, 열악한 보건 환경 등 개발도상국의 특징을 보인다.
암보히망가 왕실 언덕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암보히망가의 전경
암보히망가의 전경
공식 명칭암보히망가의 왕실 언덕
위치마다가스카르
등재 기준(iii), (iv), (vi)
ID950
등재 연도2001년
면적59 ha
완충 지역425 ha
지역아프리카
상세 정보
설명암보히망가는 마다가스카르의 역사와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전통적인 요새화된 왕실 정착지 (rova)이다.
중요성암보히망가는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메리나 왕국의 정치적, 정신적 중심지였으며, 오늘날까지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에게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2. 역사

"암보히망가"(Ambohimanga)는 말라가시어로 "언덕"을 뜻하는 '암보히'(ambohi)와 "신성한", "푸른", "아름다운" 또는 "좋은"을 의미하는 '망가'(manga)가 합쳐진 말이다.[4] 18세기 초 안드리마시나발로나 왕이 현재의 이름을 붙였다.[4]

1865년 암보히망가


초기에는 바짐바족이 거주했고, 이후 메리나족이 이주해왔다. 16세기 중반 안드리안멜로 왕 통치 아래 이메리나 왕국으로 통일되었으며, 그는 토성벽, 석조 문, 깊은 방어 참호를 이용해 언덕 마을을 요새화했다.[1]

1793년 안드리안포이님리나는 안타나나리보 정복 후 수도를 안타나나리보로 옮겼지만, 암보히망가는 영적 수도로 남았다.[4] 라다마 1세는 안타나나리보 이주 전후로 암보히망가에 자주 머물렀다. 라나발로나 1세는 마한드리호노 부지를 개조하고 여러 건물을 옮겼으며, 돼지를 금지했다.[4] 라소헤리나, 라나발로나 2세 등 후계 여왕들도 이곳에 흔적을 남겼다.[4]

19세기 대부분, 특히 라나발로나 1세 통치 기간(1828~1861) 동안 암보히망가는 외국인 방문이 금지된 "금지된 도시"였다.[1] 1897년 프랑스 식민 행정부는 왕족 유물 등을 안타나나리보로 이전했고,[1] 20세기 초에는 신성한 숲을 제거했다. 그럼에도 암보히망가는 오늘날까지 이메리나에서 중요한 상징이다.[1]

2. 1. 초기 정착과 요새화

마다가스카르 중앙 고원은 기원전 200년에서 서기 300년 사이에 섬의 최초 정착민들[1]인 바짐바족이 처음으로 거주했으며, 이들은 동남부 보르네오에서 피로그를 타고 와 섬의 울창한 숲에 단순한 마을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까지 동남부 해안에서 온 메리나 민족이 점차 중앙 고원으로 이주해[2] 기존 바짐바 정착지 사이에 언덕 꼭대기에 마을을 건설했는데, 이들은 현지 왕들이 다스렸다. 암보히망가 언덕 주변에는 잉고리켈리사힐로자, 안드리안치도니나, 라몸바, 코토사로트라의 무덤을 포함해 최소 4명의 바짐바족 무덤이 있으며 순례지이다. 16세기 중반, 안드리안멜로 왕(1540–1575)의 통치 아래 분산된 메리나 공국들은 이메리나 왕국으로 통일되었으며, 그는 바짐바족을 몰아내거나 동화시키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바짐바족과의 갈등으로 안드리안멜로는 토성벽, 석조 문, 깊은 방어 참호를 사용하여 언덕 마을을 요새화했다. ''로바''라고 불리는 이 요새화된 마을 모델은 1895년 마다가스카르의 프랑스 식민지화까지 이메리나 전역의 귀족 계급에 의해 전파되었다.

암보히망가 꼭대기에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은 15세기, 메리나가 고원에 도착했을 때 세워졌을 가능성이 크다.[3] 16세기에는 원래의 계곡 숲이 논으로 바뀌었고,[1] 암보히망가 주변 계곡 근처의 증가하는 인구는 "경작지 사람들"을 의미하는 탄차(Tantsaha)라는 부족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구전에 따르면 암보히망가 로바 부지에 처음 정착한 사람은 1700년경 당시 인구가 없던 언덕 꼭대기로 이주한 이마모 고원 영토의 폐위된 왕자 안드리암보로나였다. 그는 조카, 아내, 어머니 라톰포베를 동반했다. 안타나나리보의 왕궁에서 이메리나를 통치한 메리나 왕 안드리마시나발로나(1675–1710)는 24km 떨어진 언덕 남쪽에서 가족이 불을 지르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수도에서 그 부지의 가시성은 안드리마시나발로나가 아들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안드리안의 거처로 암보히망가를 원하게 했다. 안드리암보로나와 그의 가족은 왕의 잇따른 요청에 따라 베바토의 왕궁 부지를 포함하여 언덕의 여러 부분으로 세 번 이주하는 데 동의했다. 잠시 동안 그와 왕자는 베바토의 이웃집에서 살았고, 안드리암보로나와 그의 가족은 마침내 언덕을 떠나 멀리 떨어진 고원 마을 암바톨람피로 이주하여 남은 생을 살았다. 왕은 그들의 시신을 암보히망가에 매장했다.[4]

1710년 안드리마시나발로나는 이메리나 왕국을 네 개의 분면으로 나누어 네 명의 가장 좋아하는 아들에게 통치하도록 했다.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안드리안은 동부 분면인 아바라드라노를 받았고 암보히망가에 있는 그의 로바를 수도로 만들었다. 아바라드라노의 초대 왕(1710–1730)으로서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안드리안은 또한 부지의 방어벽과 최초의 일곱 개의 문을 건설했다.[1]

2. 2. 암보히망가 로바의 건설과 확장

암보히망가는 마다가스카르어로 '푸른 언덕' 또는 '아름다운 언덕'을 의미한다. 언덕 위 로바(Rova)에는 왕궁과 요새 흔적이 남아 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공개되어 있다. 왕궁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7개의 문이 있다. 7개의 문 위치는 점성술로 결정된 것으로 추측된다. 요새 성벽은 돌과 달걀 흰자위로 만든 시멘트로 지어졌으며, 달걀 흰자위는 약 1,600만 개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요새 내부 왕궁은 메리나 왕국이 마다가스카르를 최초로 통일했을 때 왕이 살았던 목조 건물이며, 1788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1]

마다가스카르 중앙 고원은 기원전 200년에서 서기 300년 사이에 섬의 최초 정착민들[1]인 바짐바족이 처음으로 거주했으며, 이들은 동남부 보르네오에서 피로그를 타고 와 섬의 울창한 숲에 단순한 마을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까지 동남부 해안에서 온 메리나 민족이 점차 중앙 고원으로 이주해[2] 기존 바짐바 정착지 사이에 언덕 꼭대기에 마을을 건설했는데, 이들은 현지 왕들이 다스렸다. 16세기 중반, 안드리안멜로 왕(1540–1575)의 통치 아래 이메리나 왕국으로 통일되었으며, 그는 바짐바족을 몰아내거나 동화시키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바짐바족과의 갈등으로 안드리안멜로는 토성벽, 석조 문, 깊은 방어 참호를 사용하여 언덕 마을을 요새화했다. ''로바''라고 불리는 이 요새화된 마을 모델은 1895년 마다가스카르의 프랑스 식민지화까지 이메리나 전역 귀족 계급에 의해 전파되었다.

암보히망가 꼭대기에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은 15세기, 메리나가 고원에 도착했을 때 세워졌을 가능성이 크다.[3] 16세기에는 원래 계곡 숲이 논으로 바뀌었고,[1] 암보히망가 주변 계곡 근처 증가하는 인구는 부족 이름인 탄차(Tantsaha, "경작지 사람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구전에 따르면 암보히망가 로바 부지에 처음 정착한 사람은 1700년경 당시 인구가 없던 언덕 꼭대기로 이주한 이마모 고원 영토의 폐위된 왕자 안드리암보로나였다. 그는 조카, 아내, 어머니 라톰포베를 동반했다. 안타나나리보 왕궁에서 이메리나를 통치한 메리나 왕 안드리마시나발로나(1675–1710)는 24km 떨어진 언덕 남쪽에서 가족이 불을 지르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수도에서 그 부지 가시성은 안드리마시나발로나가 아들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안드리안의 거처로 암보히망가를 원하게 했다. 안드리암보로나와 그의 가족은 왕의 잇따른 요청에 따라 베바토 왕궁 부지를 포함하여 언덕 여러 부분으로 세 번 이주하는 데 동의했다. 잠시 동안 그와 왕자는 베바토 이웃집에서 살았고, 안드리암보로나와 그의 가족은 마침내 언덕을 떠나 멀리 떨어진 고원 마을 암바톨람피로 이주하여 남은 생을 살았다. 왕은 그들 시신을 암보히망가에 매장했다.[4]

암보히망가는 77년간의 내전 후 안드리안포이님리나 왕의 성공적인 이메리나 재통일 군사 작전의 출발점이었다.


1710년 안드리마시나발로나는 이메리나 왕국을 네 개 분면으로 나누어 네 명의 가장 좋아하는 아들에게 통치하도록 했다.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안드리안은 동부 분면인 아바라드라노를 받았고 암보히망가에 있는 그의 로바를 수도로 만들었다. 아바라드라노 초대 왕(1710–1730)으로서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안드리안은 또한 부지 방어벽과 최초 일곱 개 문을 건설했다.[1] 안드리마시나발로나가 의도한 대로 각 영토를 평화롭게 통치하는 대신, 그의 네 아들은 이웃 영토를 장악하기 위한 일련의 전쟁을 시작하여 이메리나 농민들에게 기근과 고통을 초래했다.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안드리안은 암보히망가에서 그의 통치 권위를 강화하고 주변 마을에 거주자를 유치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그의 지배하에 있는 토지를 늘리기 위해 형제들과 싸웠다.[1] 그는 양아들 안드리암벨로마시나(1730–1770)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그는 베사카나 원래 부지 옆에 지은 마한드리호노 부지에서 암보히망가에서 아바라드라노를 계속 통치했다. 안드리암벨로마시나는 암보히망가를 대폭 확장하고 방어를 강화하여 그의 주요 라이벌인 안타나나리보 통치자가 고용한 사칼라바 전사들 공격을 로바에 성공적으로 격퇴할 수 있었다.[1] 그는 장남 안드리안자피(1770–1787)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손자 안드리안포이님리나를 안드리안자피 뒤를 잇도록 지정했다.[1] 약하고 부당한 통치자인 안드리안자피는 암보히망가에 수도를 유지하면서 난자카나라는 새로운 개인 부지를 건설했지만 종종 인근 마을 일라피에 거주했다.[1]

안드리안포이님리나는 1787년에 끝난 폭력적인 분쟁에서 안드리안자피를 폐위시켰다. 그 후 왕은 암보히망가를 이메리나의 12개의 신성한 언덕을 자신의 통치 하에 두는 성공적인 작전 출발점으로 사용하여 안타나나리보 언덕 도시를 포함하여 분열된 이메리나 왕국 네 분면을 자신의 주권 하에 재통일하고 77년간 내전을 종식시켰다. 그의 통치에 대한 지지를 통합하기 위해 안드리안포이님리나는 수많은 귀족 카스트 대표들을 동원하여 암보히망가를 확장하고 요새화하는 가장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새로운 도시 성벽, 문, 방어 참호, 그리고 전통 양식으로 지은 장미목 궁전 마한드리호노 건설을 명령했다.

1794년, 정치적인 이유로 메리나 왕국 수도는 안타나나리보로 옮겨졌다. 안타나나리보 천도 후에도 여왕을 위한 별장이 이 언덕 요새 내부에 마련되었다. 이 별장은 프랑스인 엔지니어 장 라보르드(Jean Laborde)의 기술 지도로 1870년에 건설되었다. 2005년 현재 복원된 별장이 세워져 있으며, 내부에 전시된 유럽풍 가구와 조도는 당시의 것이다. 건물 밖에도 가마가 전시되어 있다.

2. 3. 이메리나 왕국의 통일과 수도 이전

안드리마시나발로나 왕(1675~1710)은 24km 떨어진 안타나나리보의 왕궁에서 이메리나 왕국을 통치하던 중, 암보히망가 언덕 남쪽에서 가족들이 불을 지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아들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안드리안의 거처로 암보히망가를 원했다. 왕의 요청에 따라 안드리암보로나와 그의 가족은 베바토의 왕궁 부지를 포함하여 언덕의 여러 부분으로 세 번 이주했다. 안드리암보로나와 그의 가족은 결국 암바톨람피로 이주하여 남은 생을 살았고, 왕은 그들의 시신을 암보히망가에 매장했다.[4]

1710년, 안드리마시나발로나는 이메리나 왕국을 네 개의 분면으로 나누어 네 명의 아들에게 통치하도록 했다.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안드리안은 동부 지역인 아바라드라노를 받았고, 암보히망가를 수도로 삼았다. 아바라드라노의 초대 왕(1710~1730)으로서[1] 그는 암보히망가의 방어벽과 최초의 일곱 개의 문을 건설했다.[1] 그러나 네 아들은 이웃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이메리나의 농민들에게 기근과 고통을 초래했다.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안드리안은 암보히망가에서 통치 권위를 강화하고 주변 마을에 거주자를 유치하는 데 힘썼으며, 형제들과 싸워 영토를 늘렸다.[1]

그는 양아들 안드리암벨로마시나(1730~1770)에게 왕위를 계승받았다. 안드리암벨로마시나는 암보히망가를 확장하고 방어를 강화하여 사칼라바 전사들의 공격을 막아냈다.[1] 그는 장남 안드리안자피(1770~1787)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손자 안드리안포이님리나를 안드리안자피의 후계자로 지정했다.[1] 약하고 부당한 통치자였던 안드리안자피는 난자카나라는 새로운 개인 부지를 건설했지만 종종 일라피에 거주했다.[1]

안드리안포이님리나는 1787년에 안드리안자피를 폐위시켰다. 그는 암보히망가를 이메리나의 12개의 신성한 언덕을 자신의 통치하에 두는 작전의 출발점으로 삼아, 안타나나리보를 포함한 이메리나 왕국을 재통일하고 77년간의 내전을 종식시켰다. 그는 암보히망가를 확장하고 요새화했으며, 새로운 도시 성벽, 문, 방어 참호, 그리고 전통 양식으로 지은 장미목 궁전 마한드리호노의 건설을 명령했다.

1793년 안타나나리보 정복 이후, 안드리안포이님리나는 이메리나의 정치적 수도를 암보히망가에서 안타나나리보로 옮겼지만, 암보히망가를 왕국의 영적 수도로 선포했다. 중요한 전통 의식은 암보히망가에서 계속 열렸고, 안드리안포이님리나는 정기적으로 마한드리호노 궁전에 머물렀다. 그의 아들 라다마 1세는 안타나나리보로 이주하기 전 암보히망가의 난자카나 부지에 살았고, 이주 후에도 암보히망가를 자주 방문했다.

2. 4. 프랑스 식민 통치와 독립 이후

19세기 대부분, 특히 라나발로나 1세 여왕(1828–1861) 통치 기간 동안 암보히망가는 외국인 방문이 금지되어[1] "금지된 도시"라는 별칭을 얻었다. 1897년 프랑스 식민 행정부는 저항 정신과 민족 정체성을 약화시키기 위해 왕족의 유물과 중요한 소지품을 암보히망가에서 안타나나리보로 이전했다.[1] 이는 마다가스카르인, 특히 고원 지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초 프랑스는 인근 언덕에 있던 신성한 숲을 제거하여 이 지역을 더욱 변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보히망가는 오늘날까지 이메리나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있다.[1]

3. 지리

암보히망가는 마다가스카르의 중앙 고원 지대에 위치하며,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북동쪽으로 약 24km 떨어져 있다.[1] 언덕은 동쪽 면에서 주변 지형보다 약 약 137.16m 가량 급격하게 솟아 있으며 서쪽으로 갈수록 완만하게 경사져 있다. 언덕 정상에 위치한 동명의 왕립 도시는 주변 언덕과 계곡의 탁 트인 전망을 제공하며, 언덕 경사면과 계곡 바닥에는 암보히망가 마을 주민들의 가옥이 자리 잡고 있다. 왕립 도시의 북쪽과 남쪽 언덕 경사면을 덮고 있는 계단식 논은 17세기와 18세기에 언덕과 주변 마을 주민들에게 주요 식량원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암보히망가의 정상은 주변 언덕과 전통적으로 지정된 이메리나의 12개의 신성한 언덕들보다 더 높으며, 이는 다른 유사한 언덕 마을에 비해 이 지역의 정치적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고도는 또한 진격하는 적군을 감시하기 위한 훌륭한 관점을 제공했다. 주변 계곡과 계단식 논에서 솟아 있는 이 언덕은 신성한 특성으로 인해 고원의 광범위한 산림 벌채로부터 면제된 숲으로 덮여 있다. 언덕과 그 정상에 있는 왕립 도시를 포함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역은 59헥타르의 면적에 걸쳐 있으며, 425헥타르의 완충 구역을 가지고 있다.[1]

암보히망가 왕실 도시 주변의 마을들은 적어도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암보히망가 언덕 주변의 계곡이 처음으로 논으로 바뀌었을 때이다.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북동쪽으로 약 21km 떨어져 있으며, 차로 1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다. 합승 버스가 1시간에 몇 대 정도 운행되고 있다 (2016년 현재).

4. 구조

암보히망가는 이중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왕궁으로 이어지는 7개의 문이 설치되어 있다. 7개의 문 위치는 점성술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요새 성벽은 돌과 계란 흰자로 만든 시멘트로 만들어졌으며, 계란 흰자는 1,600만 개 분량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1]

세 명의 메리나 통치자가 로바 내에 건설한 세 개의 건물은 19세기 마다가스카르 왕국 시대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뚜렷한 건축 양식을 띠고 있으며, 이는 유럽의 영향력이 왕실에 빠르게 유입되고 확장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유적지는 전통적인 메리나 양식과 유럽 양식 및 건설 방식이 혼합되어 있다. 왕실 도시의 주요 건축 특징과 배치는 15세기부터 고지대에서 주를 이루었던 로바 건설의 전통적인 모델을 따른다. 전통에 따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집은 나무와 초목(생물 재료)으로 지어지고, 죽은 사람들의 무덤은 돌(차가운 불활성 재료)로 지어진다. 건설에 사용된 특정 나무와 식물 재료의 선택은 각각 뚜렷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전통적인 사회 규범과 영적 신념을 반영했다. 1996년 이후 많은 건물들이 해당 건물이 처음 세워졌던 시대에 적합한 전통 재료와 건설 방식으로 복원되었다.[1] 요새 내부의 왕궁은 메리나 왕국이 마다가스카르를 최초로 통일하였을 때의 왕이 살았던 목조 건물이며, 1788년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 1. 요새와 성벽

암보히망가는 이중의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왕궁으로 이어지는 7개의 문이 설치되어 있다. 7개의 문 위치는 점성술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요새의 성벽은 돌과 계란 흰자로 만든 시멘트로 만들어졌으며, 계란 흰자는 1,600만 개 분량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1]

암보히망가의 방어 참호와 문


15세기부터 이메리나의 요새화된 왕실 도시의 전형적인 방어 참호(hadivory)와 석벽이 암보히망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참호의 깊이는 최대 30m이다.[1] 마자바토카나라고 불리는 이 부지의 가장 오래된 참호는 현대 로바 뒤에 위치해 있으며 언덕의 첫 번째 알려진 왕인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니안드리안나의 통치보다 앞선 것으로 보인다. 현지 전통에 따르면 이 참호는 16세기 초 안드리안자카 왕의 명령에 따라 파여졌으며, 그는 이 부지를 바짐바와의 전쟁에서 군사적 공격을 시작하는 지점으로 사용했을 수 있다.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니안드리안나는 언덕 꼭대기 정착지 주변에 체계적인 방어망을 처음 구축했다. 암보히망가의 이 첫 번째 왕은 처음에는 Ambavahadikely라는 문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던 베바토 구역 주변에 참호를 팠다.[1]

이 정착지는 암파니디남포로나[1]와 암바바하디치옴비옴비라는 두 개의 추가 진입 지점이 있는 북동쪽의 두 번째 인접 공간에 참호를 건설하여 확장되었으며, 후자는 두 개의 바위로 형성된 자연적인 관문이었다. 이 후자의 입구는 왕실 도시가 정식으로 설립되기 전에도 그 공간에 접근하는 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관문으로 간주한다. 로바가 설립된 후, 이 입구는 통치자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예약되었으며, 이는 북동쪽 방향의 영적 중요성과 조상과의 연관성을 반영한 것으로, 조상의 축복과 "hasina"는 통치자의 권력과 정당성의 기초를 제공했다.[6] 또한 희생된 소를 구역 안으로 들이는 데에도 사용되었다.[1]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니안드리안나는 이후 돌 절벽과 가파른 숲이 우거진 경사면과 같은 일련의 자연 방어 시설로 서쪽으로 확장하여 방어 참호를 팔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는 암바바하디마하자자, 안드라노보아항기, 암바바하디안트안드라노마시나라는 몇 개의 추가 문을 건설했다.[1]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는 "파나포아나" 노동력을 사용하여 도시 주변의 참호를 확장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언덕을 완전히 둘러싸는 참호가 파였고, 기존 참호 옆에 일련의 참호가 파여 도시를 적들로부터 더욱 보호했다.[1] 현재의 방어벽은 라나발로나 1세 여왕의 통치 기간인 1830년경에 재건되었다.[1]

총 14개의 석문을 통해 왕실 구역에 접근할 수 있다. 18세기 초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니안드리안나가 건설한 7개의 내부 관문 외에도, 1794년 이전에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의 통치 기간 동안 건설된 외부 벽과 7개의 문이 있어, 이는 이메리나의 왕의 재통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가장 크고 주요한 문은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암바토미트상가("서 있는 돌")로 알려져 있다. 매일 아침과 저녁, 20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팀이 직경 4.5미터, 두께 30cm, 무게 약 12톤의 거대한 돌 원반을 굴려 문을 열거나 닫았다.[1] 1525년에서 1897년 사이에 건설된 이메리나의 대부분의 벽으로 둘러싸인 왕실 마을의 전형적인 이 형태의 문("말라가시"어로 "vavahady")은 약탈자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보호했다. 관문 꼭대기에는 감시 초소가 있다. 안다카나라고 불리는 두 번째 주요 입구는 서쪽 벽에 위치해 있다. 그 돌 원반도 온전하며,[1] 그 길은 잘린 돌로 포장되어 있다. 암바토미트상가와 안다카나 모두 산 자의 관문으로 여겨졌으며, 시신은 그들을 통과할 수 없었고, 죽은 자와 최근에 접촉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통행이 거부되었다.[1] 미안드리바히니라는 북쪽 관문은 잘 보존된 돌 원반을 유지하고 있으며, 시신을 부지 안으로 또는 밖으로 운반해야 할 때 사용되는 두 개의 입구 중 하나였다.[1] 시신을 위한 두 번째 관문은 암보아라라고 불렸다.[1] 남쪽 안드라노마트사초 관문의 돌 원반도 상태가 좋다. 이 관문과 안솔라트라, 암피차라나는 주로 감시 지점으로 사용되었다.[1] 18세기 말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는 암바바하디안트안드라노마시나 문을 돌 대신 나무로 만든 다른 문으로 대체하고 이름을 암바바하디마시나로 변경했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 인방에서 작은 나무 조각을 깎아 전통적인 할례 의식에서 의식적인 역할을 하는 신성한 난로 불을 지폈다. 문 안쪽의 붉은 흙과 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나무 판자는 모두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메리나를 떠날 여행을 예상하는 군인이나 다른 사람들은 안전한 귀환을 보장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떠나기 전에 흙 한 줌과 나무 판 조각을 가져갔다.[1]

몇 개의 큰 돌이 암보히망가 벽 바깥의 관문 근처나 지점에 땅에 박혀 있다. 통치자들은 이 돌 위에 서서, 각 돌은 뚜렷한 이름으로 식별되어 대중에게 연설을 했다. 남쪽에는 암바토마시나와 암바토메날로하라는 돌이 있었고, 암바토랑고티나는 북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후자의 돌은 특히 중요했다. 여기서 암바토포치 씨족의 열두 지도자들이 처음으로 안드리안자피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의 조카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 왕위를 차지한 후,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는 이 부지를 사용하여 새로운 법과 칙령을 처음 선포했으며, 이는 나중에 왕국 전역에 발표되었다. 이곳은 또한 암보히망가에서 정의를 시행하는 주요 장소였다.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가 왕위를 계승한 후, 그는 어미가 죽은 검은 소인 레마인티("검은 것")를 창으로 반복적으로 찔러 희생시켰다. 그 동물이 죽은 후, 그 동물은 조각으로 잘려 그 자리에 묻혔다. 그 후 레마인티는 왕실 연설과 칙령에서 정기적으로 언급되어 수호자, 즉 통치자와 그의 법의 보호를 그릇되게 잊으려는 사람들의 운명을 암시했다.[1]

4. 2. 베바토 구역

베바토(Bevato, "많은 돌"이라는 뜻, 피다시아나-베바토(Fidasiana-Bevato)라고도 함) 구역은 암보히망가 왕실 구역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17세기 말 안드리암보로나(Andriamborona)가 처음 이곳에 자신과 가족을 위한 집을 지었다.[1] 1710년부터 1730년까지는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니안드리안(Andriantsimitoviaminiandriana)이 거주했으며, 그는 세 차례에 걸쳐 구역을 확장했다.[1]

이 구역은 원래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안드리암벨로마시나(Andriambelomasina) 시대에 나무 울타리로 대체되었다. 라나발로나 1세(Ranavalona I)는 왕실 우상 라판타카(Rafantaka)가 있는 작은 집을 이전하여 구역을 서쪽으로 확장했으며, 라나발로나 2세(Ranavalona II) 시대에 서쪽으로의 확장이 완료되었다. 라나발로나 1세와 그의 후계자들 아래에서 베사카나(Besakana)는 국왕 친척들이 암보히망가를 방문했을 때 머무는 거처였다. 프랑스는 이 구역 내 모든 건물을 파괴하고 학교('에콜 오피시엘'(Ecole Officiel))를 건설했으며, 이후 마다가스카르 독립 후 철거된 암보히망가 시청('트라노포코노로나'(Tranompokonolona))이 들어섰다.[1]

언덕의 첫 번째 거주자인 안드리암보로나(Andriamborona)는 베바토에 어머니의 무덤을 지었다. 왕이 그에게 이전을 요청했을 때, 안드리암보로나(Andriamborona)는 자신의 집과 어머니의 무덤 모두를 옮기기로 동의했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왕은 무덤 자리에 큰 돌을 표시하고,[1] 그 근처에 로바(rova)에 첫 번째 왕실 거처를 자신의 집으로 지었다.[1] 그 후 이 돌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1]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Andrianampoinimerina)는 이 돌 위에 서서 즉위했으며,[1] 노예들은 그곳으로 끌려와 주군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이 돌은 판드로아나 축제 동안 ''볼라비타'' 제부(zebu)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에 사용되었다. 말을 타고 여행하는 군주는 말을 타고 내리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 그 위에 섰으며, 1869년 라나발로나 2세 시대에 궁정이 기독교화된 후 종교 의식이 여기서 열렸다.[1] 왕실 무덤은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Andrianampoinimerina)가 뜰을 확장하기 위해 라나발로나 1세(Ranavalona I) 시대에 마한드리호노(Mahandrihono) 구역으로 옮겨졌다.[1]

타타라 니 안드리나 에토 마다가스카라 필사본에 따르면,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니안드리안(Andriantsimitoviaminiandriana)이 지은 첫 번째 집은 베바토(Bevato)라고 불렸다. 이 집은 구역의 남쪽 끝에 위치했으며 국왕과 그의 부인들이 거주했다. 안드리암벨로마시나(Andriambelomasina)는 마나차라레히베(Manatsaralehibe, "크고 훌륭한"이라는 뜻)라는 두 번째 집을 짓고 점유했다. 이 집은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Andrianampoinimerina)에 의해 매우 존경받았으며, 탈옥수가 이 건물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면 사면되었고, 라나발로나 1세가 제거하지 않은 구역 내 유일한 역사적인 집이었다.[1]

다른 자료에 따르면, 구역 내에서 가장 오래된 두 집은 마히치엘라판자카(Mahitsielafanjaka, "정직한 자가 오래 통치한다"는 뜻)와 마나차라켈리(Manatsarakely, "작고 훌륭한"이라는 뜻)라고 불렸다. 이 집들은 18세기 초 안드리암보로나(Andriamborona) 또는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니안드리안(Andriantsimitoviaminiandriana)에 의해 지어졌으며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니안드리안(Andriantsimitoviaminiandriana)과 그의 12명의 부인이 거주했다고 한다.[1]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마나차라켈리(Manatsarakely)는 안드리안자피(Andrianjafy)가 거주했으며 나중에는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Andrianampoinimerina)의 부인들이 거주했다.[1] 이 집과 마히치엘라판자카(Mahitsielafanjaka)는 라나발로나 1세 시대에 시하나카(Sihanaka) 지역의 나무를 사용하여 벽을 재패널하여 개조되었다.[1]

구술 역사는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Andrianampoinimerina)가 구역 내에 두 번째 쌍의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1] 그의 통치부터 베바토(Bevato)는 마한드리호노(Mahandrihono) 다음으로 두 번째로 중요한 구역이 되었으며 왕실 부인과 하인들을 위한 네 채의 집을 포함했다. 그는 또한 1869년 기독교 개종자인 라나발로나 2세(Ranavalona II)가 왕실 우상을 상징적으로 불태우기 전까지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집에 왕실 우상 이판타카(Ifantaka)를 보관했다.[1] 마한드리호노(Mahandrihono) 구역에서 역사적인 차사라레이(Tsararay)를 제거한 후,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Andrianampoinimerina)는 베바토(Bevato) 구역에 같은 이름의 새 집을 지었다.[1] 차사라레이(Tsararay)는 부인들이 암보히망가를 여행할 때 거주하는 곳이었다.[1] 안타나나리보(Antananarivo)의 베바토(Bevato) 구역 역시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Andrianampoinimerina) 통치하에 국왕의 부인들을 위해 예약되었지만, 각 부인에게 자신만의 거처를 제공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집이 있었다. 부인들이 암보히망가로 여행할 때는 집을 공유해야 했으며, 공유를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도시 성벽 너머의 마을 사람들의 집에 머물렀다.[1]

라나발로나 1세(Ranavalona I)는 베바토(Bevato) 구역의 맨 끝에 한 쌍의 왕실 무화과나무를 심었고, 대중에게 연설할 때 그들 사이에 섰다. 이것들은 나중에 라나발로나 2세(Ranavalona II)에 의해 뜰 전체에 심어진 추가 무화과나무[1]와 식민지 시대에 프랑스에 의해 심어진 자카란다로 보완되었다.[1] 넓은 공간을 그늘지게 하는 무화과는 마다가스카르, 모리셔스, 레위니옹, 코모로에서 온 순례자들이 그 주변에 놓아두기 위해 방문한 희생된 제부의 뼈와 두개골, 특별한 표지석에 의해 강화된 ''하시나''(hasina)가 스며들었다고 여겨진다. 순례자들은 이 뜰에 모여 판드로아나 축제를 기념하며, 이 기간 동안 국왕은 역사적으로 국가의 죄를 씻고 사회에 질서와 조화를 회복하기 위해 의식적인 목욕을 했다. 오늘날 순례자들은 조상에게 경의를 표하고, 달래거나 교류하기 위해 제물이나 기도를 드린다.

암보히망가 전경


베바토(Bevato)는 더 큰 모임과 왕실 축제가 열리는 장소였지만,[1] 왕실 칙령과 공공 판결은 베바토(Bevato) 구역으로 이어지는 언덕 기슭의 암바랑고티나(Ambarangotina)의 신성한 뜰(''키안자''(kianja))에서 내려졌다.[1] 키안자(kianja)에서 국왕들은 새로운 법률과 법령을 발표하고 정의를 시행하기 위해 ''카바리''(kabary)를 전달했다.[1] 국왕은 키안자(kianja)의 ''바토마시나''(vatomasina, 큰 화강암 덩어리) 위에 서서 연설을 했으며, 이 돌은 벽돌 반쪽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일련의 계단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1]

4. 3. 마한드리호노 구역

마한드리호노 궁전은 안드리안암푸이니메리나 왕의 거처였다.


마한드리호노(Mahandrihono, "기다릴 줄 안다") 단지는 암보히망가에서 가장 넓고 보존이 잘 된 곳이다.[1] 중앙 안뜰 동쪽에 위치하며 베바토보다 높은 곳에 있어 정치적 중요성이 더 크다는 것을 상징한다.[1] 18세기 초 안드리아벨로마시나가 처음 건립했으며, 그의 아버지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니안드리안나 통치 시대였다.[1] 안드리아벨로마시나는 이 단지를 돌담으로 둘러싸고 그 안에 자녀들을 위한 세 채의 집, 즉 마한드리(Mahandry, "기다릴 줄 안다")와 차라라이(Tsararay,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다")라는 나란히 지어진 두 개의 쌍둥이 집(tranokambana)과 마난드라이만자카(Manandraimanjaka, "통치하는 아버지를 두었다")라는 세 번째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의 이름을 통해 아버지를 찬탈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1]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니안드리안나가 죽자, 안드리아벨로마시나는 그를 쌍둥이 집 뒤에 안장했다.[1] 안드리안암포이니메리나 시대에 이 단지는 안타나나리보 로바의 마한드리후노 단지에 해당했으며, 선조들의 무덤 옆에 왕의 거처가 위치하여 왕만을 위해 사용되었다.[1]

안드리안암포이니메리나는 쌍둥이 집을 철거하고 훨씬 더 큰 마한드리후노 거처를 지었으며, 은색 새와 사슬로 장식했다.[1] 그는 또한 단지를 확장하고 돌담 바깥에 연례적으로 교체되는 voafotsy 나무 울타리를 추가했다. 만드라이만자카는 철거되었고[1] 그 자리에 안드리안암포이니메리나는 작은 탑이 있는 집을 지었으며,[1] 이를 만자카미아다나(Manjakamiadana, "통치하기 좋은 곳")라고 이름 짓고 임안자카치로아라는 왕실 삼피(우상)와 이를 보호하도록 지정된 수호자들의 거처로 삼았다.[1] 베바토 단지의 집에 보관된 이판타카와 암보히미라리 지역의 암보히망가에 있는 집에 보관된 켈리말라자, 이 두 개의 다른 우상은 근처에 보관되었다.[1] 라다마 1세 치하에서 돌담은 안드리안벨로마시나가 지었던 것과 같은 두 개의 쌍둥이 집을 포함한 세 채의 집을 둘러싸는 말뚝 울타리로 강화되었다.[1] 라나발로나 1세는 단지의 안뜰을 넓히고 만자카미아다나를 확장했다.[1] 그녀는 현재 단지를 둘러싸고 있는 돌담과 두 개의 돌 정문을 건설했다.[1] 라나발로나 2세는 단지의 돌담에 다시 말뚝 울타리를 추가했다.[1] 그녀는 만자카미아다나를 허물고 그 자리에 역사적, 영적으로 중요한 마소안드로 가옥[1]에서 가져온 나무를 사용하여 두 개의 하이브리드 말라가시-유럽식 파빌리온을 건설했다.[1] 프랑스 장군 조세프 갈리에니는 프랑스 식민 시대 초기에 이 유럽식 건물들을 자신의 여름 거처로 사용했다.[1] 2013년에 안드리안암포이니메리나의 원래 집, 재건된 무덤,[1] 두 개의 왕실 파빌리온[1]이 단지 내에 보존되어 있으며, 망루, 희생 제부(소)를 위한 우리, 라나발로나 1세 통치 기간에 건설된 두 개의 연못도 포함되어 있다.[1]

판드리암파하레마나에서 바라본 마한드리후노 궁전의 모습


안드리안암푸이니메리나(1787–1810) 왕 시대에 왕궁에 남아있는 건물 중 원래의 마한드리호노 궁전만 온전하게 남아있다.[1] 마한드리호노 궁전은 안드리안암푸이니메리나가 이메리나의 정치적 수도를 안타나나리보로 옮기기 전 그의 거처였으며,[1] 원래 초가지붕이 나무 지붕 널로 교체된 것을 제외하고는 건설 이후 원래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1] 단순한 나무 구조는 이메리나 귀족의 전통 양식으로 건설되었다.[1] 벽은 견고한 장미목으로 만들어졌으며, 1995년 화재로 파괴되기 전 안타나나리보의 로바 만자카미아다나의 지붕을 지탱했던 것과 매우 유사한 10미터 중앙 장미목 기둥으로 지탱되는 뾰족한 지붕으로 덮여있다.[1] 지붕 꼭대기의 양쪽 끝에 박공 빔이 교차하여 형성된 지붕 뿔(''tandrotrano'')은 원래 은으로 도금되었으며, 지붕 꼭대기 중앙에는 은색 독수리가 부착되었다.[7] 은 장식품 또한 집 내부 지붕 모서리에 걸려 있었다.[7] 건물의 이름은 건물 입구 중 하나 근처의 외부 벽에 부착된 흰색 대리석 명판에 새겨져 있다.[1] 이 집에는 안드리안암푸이니메리나의 무기, 드럼, 부적, 파노로나 판, 말뚝 위에 올려진 침대 등 여러 물건들이 있다.[1] 안드리안암푸이니메리나 시대에는 그의 아내들이 이 건물을 방문하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그곳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1] 이 장소는 매우 신성하다.[1] 라서헤리나 여왕과 그의 후계자들은 종종 임계석에 앉아 그들의 청중에게 연설했으며,[1] 많은 순례자들이 안드리안암푸이니메리나와 그의 조상들의 영혼과 연결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1] 방문객들은 안드리안암푸이니메리나의 영혼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관습에 따라 오른쪽 발로 집에 들어가 뒤로 물러나 나와야 한다.[1]

4. 4. 난자카나 구역

난자카나 구역은 암보히망가 로바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마한드리노로의 북동쪽에 자리한다.[1] 이 구역은 18세기 말 안드리안자피에 의해 처음 건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역 북쪽에는 주변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돌로 된 광장이 있는데,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가 이메리나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기 위한 군사 전략을 구상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전해진다.[1] 1861년 라나발로나 1세 여왕의 장례식이 난자카나 구역에서 거행되던 중, 의식용 화약 통에 불꽃이 튀어 폭발과 화재가 발생, 많은 구경꾼들이 사망하고 구역 내 세 채의 역사적인 왕실 저택이 파괴되었다.[1]

난자카나 구역은 18세기에 안드리안자피 왕에 의해 건설되었다.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 통치 기간 동안 난자카나 구역에는 왕의 자녀들을 위한 거처로 사용된 다섯 채의 집이 있었다. 난자카나("왕족의 장소")라고 불리는 집은 안드리암벨로마시나가 건설하고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가 개조했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에서 거주했다.[1] 그는 자신의 아들 라다마 1세가 마다가스카르 왕으로 즉위한 후 암보히망가를 방문할 때 머물 수 있도록 이 집을 개조했다. 구전에 따르면 난자카나 집 근처의 큰 돌은 안드리암벨로마시나와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가 통치 결정을 숙고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는 암보히망가에서 가장 큰 전통 가옥인 만남비타나("운이 따르는 곳")라는 2층집을 추가했다. 왕의 자녀들은 왕실 도시를 방문할 때 2층에서 잤고, 1층에는 팔랭킨과 보관함 등 왕실 재산이 보관되었다.[1] 이 집은 1861년 화재로 파괴되었고 라소헤리나 치세에 재건되어 그녀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1]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는 마한드리호노 구역에 있던 역사적인 마난드라임안자카 집을 철거하고 난자카나 구역에 같은 이름의 새 집을 지었다. 이 집 또한 1861년 화재로 파괴되었고, 나중에 라나발로나 2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화재로 파괴된 또 다른 집은 포힐로하("짧은")였는데, 라나발로나 1세는 1845년 안타나나리보 왕실 구역에서 암보히망가 난자카나 구역으로 이 집을 옮겼다. 포힐로하는 이후 라소헤리나에 의해 재건되었다.[1] 라나발로나 1세안타나나리보 로바에서 암보히망가 난자카나 구역으로 옮긴 다른 건물로는 켈리소아("아름다운 작은 것")와 마난차라가 있었다.

1871년, 이 부지에는 만자카미아다나 왕실 우상 저택이 있던 자리에 장미목으로 지어진 화려한 궁전 건물 두 채가 세워졌다. 더 크고 첫 번째 건물인 판드리아파헬마나[1]는 1층에 방문객을 맞이하는 방과 대형 살롱이, 2층에는 라나발로나 2세 여왕과 시녀들의 침실이 있었다.[1] 원래의 유럽식 가구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여왕에게 외국 고위 인사들이 준 많은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왕의 침실은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많은 방문객들이 그녀의 영혼에게 기도하기 위해 순례를 온다.[1]

두 번째로 작은 정자는 트라노피타라트라("유리 집")[1]로 알려져 있으며, 라나발로나 2세의 명령에 따라 1862년에 건설되었다. 여왕은 이 건물에서 대신들과 함께 상담을 했으며, 건물 사면에 있는 큰 창문들은 아래의 시골 풍경을 제공하여 여왕이 주변의 안전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건설에 사용된 유리는 1862년 패럿이라는 영국인이 수입했다.[1]

4. 5. 왕실 무덤

왕족의 유해가 ''tranomasina'' 아래의 묘에 안치되어 있다.


이 단지는 원래 메리나 귀족 양식으로 지어진 12개의 왕실 무덤을 수용했으며, 작은 창문 없는 나무집(''tranomasina'')으로 덮인 석조 지하 묘는 귀족 계급을 나타냈다.[1] 이 무덤들의 봉우리는 남북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원래 다른 무덤의 북쪽에 위치한 네 개의 가장 큰 무덤에 묻힌 군주로는 안드리안치미토비아미니아드리안, 안드리암벨로마시나,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 라나발로나 1세, 라나발로나 2세가 있었고, 군주의 아내와 친척은 더 작은 무덤에 묻혔다.[8][1] 구전에 따르면, 19세기 전성기 시절 암보히망가 단지에는 12개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1897년 3월, 프랑스 당국은 이곳에 안치된 군주의 시신을 제거하고 안타나나리보의 로바에 있는 왕실 무덤으로 이장하면서 tranomasina를 파괴했다. 무덤 안에 있던 풍부한 장례 물품도 식민 당국이 민족학 박물관으로 바꾼 안타나나리보 로바 부지에 있는 만자카미아다나 궁전에 전시하기 위해 제거되었다. 이는 암보히망가 도시의 성역을 없애고, 지난 1년 동안 프랑스 식민 통치에 반대해 온 메날람바 저항군들의 사기를 꺾으며, 왕실 조상의 힘에 대한 대중의 믿음을 깨고, 메리나 통치자 하의 마다가스카르 주권을 계몽되지 않은 과거의 유물로 격하시키려는 노력이었다. 프랑스 수비대가 왕실 도시에 주둔했고 군사 건물이 석조 무덤 기초 위에 세워졌다.[1]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와 안드리마시나발로나의 무덤 위에는 부엌과 군대 매점이 건설되었다. 1904년까지 군사 건물도 철거되어 석조 무덤 기초만 남았다.[1]

메리나 왕족의 가장 신성한 두 장소를 훼손한 것은 프랑스 식민 권력의 정치적, 문화적 우위를 확립하기 위한 계산된 정치적 움직임이었다. 일반적인 견해로는, 암보히망가와 조상(특히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 사이의 연결은 왕실 도시를 부패한 정치와 조상 전통에서 벗어난 곳으로 여겨졌던 수도 안타나나리보보다 더욱 강력한 상징이자 정당한 권력의 원천으로 만들었다. 조상의 존재가 로바가 세워진 땅을 신성하게 만든다고 믿었던 메날람바 저항 군인들은 프랑스에 대한 공격에 사용할 무덤 기저에서 흙 한 줌을 가져가기 위해 암보히망가로 왔는데, 프랑스 당국은 군주의 시신을 무덤에서 제거하여 군인들의 신뢰와 연대감을 약화시키려 했다. 비록 무덤이 훼손되고 메날람바 군인들이 결국 패배했지만, 암보히망가는 그 신성한 성격을 유지했다. 2008년 라발로마나나 행정부 하의 마다가스카르 정부가 왕실 무덤을 재건했다.[1] 1995년 안타나나리보 로바의 무덤과 다른 구조물을 파괴한 화재 동안, 단 하나의 군주, 라나발로나 3세의 람바로 감싼 유해만이 불길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여왕은 암보히망가의 왕실 무덤에 다시 안치되었다.

5. 상징성과 문화적 의의

암보히망가는 마다가스카르어로 '푸른 언덕' 또는 '아름다운 언덕'을 의미한다. 이 언덕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마다가스카르를 통치한 메리나 왕국의 중요한 상징적 장소였다.

암보히망가의 로바(Rova)는 왕궁과 요새의 흔적을 포함하고 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공개되어 있다. 왕궁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7개의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데, 이 문들의 위치는 점성술에 따라 결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요새의 성벽은 돌과 계란 흰자를 섞어 만든 시멘트로 지어졌는데, 사용된 계란 흰자의 양은 약 1,600만 개로 추정된다.[1]

요새 내부의 왕궁은 메리나 왕국이 마다가스카르를 최초로 통일했을 때의 왕인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가 살았던 목조 건축물로, 1788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 내부에는 15m 높이의 큰 기둥이 있는데, 이 기둥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2,000명의 노예들이 운반해 온 것으로 전해지며, 운반 과정에서 100명 가까운 노예가 사망했다고 한다.

1794년 메리나 왕국의 수도는 안타나나리보로 옮겨졌지만, 암보히망가는 계속해서 왕실의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다. 여왕을 위한 별장이 요새 내부에 마련되었으며, 이 별장은 프랑스인 엔지니어 장 라보르드(Jean Laborde)의 기술 지도로 1870년에 건설되었다. 현재 복원된 별장에는 당시의 유럽풍 가구와 조명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건물 밖에는 가마가 전시되어 있다.

암보히망가 왕실 언덕은 세계 유산 등재 기준을 충족한다.


  • 기준 ⅲ: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말라가시 왕족의 사회적, 문화적 관습을 보여주는 독특한 유적이다.
  • 기준 ⅳ: 말라가시 문화의 주요 시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 양식의 특별한 사례이다.
  • 기준 ⅵ: 말라가시 왕족의 전통과 신념과 관련된 유형 및 무형 유산과 함께 살아있는 문화적 전통을 나타낸다.

5. 1. 상징 체계

암보히망가의 세 구역 배치와 구조물들은 15세기 초 메리나 고원 정착민들의 전통적인 설계를 따랐다. 로바는 오직 ''안드리안''(귀족)만이 설립할 수 있었고, 그 기초는 벽 밖의 주변 건물보다 높게 건설되었다. 로바 안에는 왕궁, 묘, ''키안자''(안뜰) 등이 포함되었다. 군주의 숙소는 로바의 북쪽에, 배우자들은 남쪽에 거주했다.

암보히망가의 방위와 수직적 배치는 이메리나의 두 가지 우주론적 개념을 구현한다. 더 오래된 시스템은 사회 정치 질서를 지배하며 통일된 중심에서 방사되는 네 개의 방위점 개념을 기반으로 했다. 더 최근의 시스템은 영적 질서를 지배하며 북동쪽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다. 암보히망가의 신성한 동쪽 부분에는 왕실 무덤, 성수 수조, 왕실의 상징인 ''피쿠스''와 ''드라세나'' 나무 등이 있었다. 북쪽 부분은 왕실의 판결이 내려지는 안뜰의 위치였으며,[1] 북쪽 방위점, 남성성, 정치 권력 간의 마다가스카르 연관성을 따랐다. 왕실 아내들의 집은 예전에는 부지의 남쪽에 위치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여성성과 영적 권력과 연관된 방위점이었다.

암보히망가의 많은 구조물의 방향과 배치는 안타나나리보 로바에서 복사되었다.[5] 안타나나리보에 대한 암보히망가 도시의 배치는 이러한 시스템을 반영한다. 중앙에 위치한 안타나나리보는 국가의 정치적 수도이며, 북동쪽에 위치한 암보히망가는 영적 수도로 여겨진다.

정치 질서의 시스템이 암보히망가의 배치에서 우위를 점하며, 도시의 신성함은 역사적으로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역할과 더 명시적으로 연관되었다. 19세기에 외국인의 부지 출입을 금지한 것은 종교적 질서보다는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이러한 상징 체계를 존중함으로써, 역대 통치자들은 조상의 축복을 확보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강화하며, 왕국의 보호와 안정을 보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암보히망가에서는 수직 공간과 고도의 중요성을 계급의 지표로 구현하는 것이 더 약하다. 왕실 도시 내의 각 새로운 구역 부지는 그 이전 구역보다 더 높은 지대에 위치하는 정도에 따라 선택되었고 방위 방향에 따라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난자카나 구역은 암보히망가 로바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마한드리노로의 북동쪽에 위치한[1] 이 구역은 18세기 말 안드리안자피에 의해 처음 건설된 것으로 여겨진다. 구역 북쪽에는 주변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돌로 된 광장이 있으며,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가 이메리나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기 위한 군사 전략을 구상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전해진다.[1] 1861년 라나발로나 1세 여왕의 장례식 때,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구경꾼이 사망하고 구역 내 세 채의 역사적인 왕실 저택이 파괴되었다.[1]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 치세 동안 난자카나 구역에는 그의 자녀들을 위한 거처로 사용된 다섯 채의 집이 있었다. 난자카나("왕족의 장소")는 안드리암벨로마시나가 지었고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가 개조했으며,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 집에서 살았다.[1] 그는 자신의 아들 라다마 1세가 마다가스카르 왕으로 즉위한 후 암보히망가를 방문할 때 이곳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개조했다. 구전에 따르면 난자카나 집 근처의 큰 돌은 안드리암벨로마시나와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가 통치 결정을 숙고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는 암보히망가에서 가장 큰 전통 가옥인 만남비타나("운이 따르는 곳")라는 2층집을 추가했다. 왕의 자녀들은 왕실 도시를 방문할 때 2층에서 잤고, 1층에는 왕실 재산이 보관되었다.[1] 이 집은 1861년 화재로 파괴되었고 라소헤리나 치세에 재건되었으며, 그녀는 이곳을 거주지로 사용했다.[1] 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는 역사적인 마난드라임안자카 집을 마한드리호노 구역에서 철거한 후 난자카나 구역에 같은 이름의 새로운 집을 지었다. 이 또한 1861년 화재로 파괴되었고, 나중에 라나발로나 2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또한 화재로 파괴된 집 중 하나는 포힐로하("짧은")라고 불리는 집이었는데, 라나발로나 1세는 1845년 안타나나리보의 왕실 구역에서 암보히망가의 난자카나 구역으로 이 집을 옮겼다; 포힐로하는 나중에 라소헤리나에 의해 재건되었다.[1] 라나발로나 1세가 안타나나리보의 로바에서 암보히망가의 난자카나 구역으로 옮긴 다른 건물로는 켈리소아("아름다운 작은 것")와 마난차라가 있었다.

5. 2. 문화적 전통

암보히망가는 마다가스카르어로 "푸른 언덕" 또는 "아름다운 언덕"을 의미한다. 언덕 위에는 왕궁터와 그 주변을 둘러싼 요새터가 남아 있으며, 일부 건축물은 박물관으로 공개되어 있다. 왕궁은 이중의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왕궁으로 이어지는 7개의 문이 설치되어 있다. 이 7개의 문 위치는 점성술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요새의 성벽은 돌과 계란 흰자로 만든 시멘트로 만들어졌으며, 계란 흰자는 1,600만 개 분량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12]

요새 내부의 왕궁은 메리나 왕국이 마다가스카르를 통일했을 때의 Andrianampoinimerina|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영어 왕이 거주했던 목조 건물이다. 건축 연대는 1788년경으로 추정된다. 왕궁 내부에는 15m의 큰 기둥이 있는데, 이 기둥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2000명의 노예에 의해 운반되어 왔다고 전해지며, 운반 중에 100명 가까운 노예가 사망했다고도 한다.

1794년 메리나 왕국의 수도는 정치적인 이유로 안타나나리보로 옮겨진다. 안타나나리보 천도 후에도 여왕을 위한 별장이 이 언덕의 요새 내부에 마련되었다. 이 별장은 프랑스인 엔지니어 장 라보르드(Jean Laborde)의 기술 지도로 1870년에 건설되었다. 2005년 현재 복원된 별장이 세워져 있으며, 내부에 전시된 유럽풍 가구와 조도는 당시의 것이다. 건물 밖에는 가마가 전시되어 있다.

암보히망가의 세 구역 배치와 구조물들은 15세기 초 메리나 고원 정착민들에 의해 확립된 전통적인 설계를 따랐다. 관습에 따르면, 로바는 오직 안드리안(귀족)만이 설립할 수 있었다. 로바 안에는 적어도 하나의 라파(왕궁 또는 거처)와 하나 이상의 부지 설립자 및 가족 구성원의 파사나(묘)가 있었다. 또한 카바리(왕실 연설 또는 포고)를 전달하기 위해 군주를 백성 위에 높이는 바토마시나(신성한 돌)로 표시된 키안자(안뜰)도 포함되었다. 군주의 숙소는 일반적으로 로바의 북쪽에, 배우자들은 남쪽에 거주했다.

암보히망가의 신성한 동쪽 부분에는 왕실 무덤, 왕실 의식에 사용되는 성수 수조, 왕실의 상징인 수많은 피쿠스와 드라세나 나무가 포함된 조상 숭배와 관련된 구조물이 있었다.[1] 부지의 북쪽 부분은 왕실의 판결이 내려지는 안뜰의 위치였으며,[1] 북쪽 방위점, 남성성, 정치 권력 간의 연관성을 따랐다. 왕실 아내들의 집은 예전에는 부지의 남쪽에 위치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여성성과 영적 권력과 연관된 방위점이었다.

이러한 경쟁적인 우주론적 시스템은 도시의 주요 문이 방위점에 배치된 것과 군주가 사용하고 신성한 의식에서의 역할을 위해 지정된 북동쪽 문에도 반영되었다. 암보히망가의 많은 구조물의 방향과 배치는 암보히망가의 더 오래된 쌍둥이 도시인 안타나나리보의 로바에서 복사되었다.[5]

정치 질서의 시스템이 암보히망가의 배치에서 우위를 점하며, 도시의 신성함은 역사적으로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역할과 더 명시적으로 연관되었다. 예를 들어, 19세기에 외국인의 부지 출입을 금지한 것은 종교적 질서보다는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이러한 상징 체계를 존중함으로써, 역대 통치자들은 조상의 축복을 확보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강화하며, 왕국의 보호와 안정을 보장하고자 했다.

5. 3. 현대적 의의

암보히망가는 마다가스카르어로 "푸른 언덕", "아름다운 언덕"을 의미한다. 언덕 위 로바(Rova)에는 왕궁터와 그 주변을 둘러싼 요새터와 광장이 남아 있으며, 건축물의 일부는 박물관으로 공개되어 있다. 왕궁터보다 한 단 더 높은 곳은 언덕의 정상이며, 정상 주변은 원시림의 흔적인 Phyllarthron bojeranum|''Phyllarthron bojeranum''vi 등의 고유종과 약용 식물이 서식하는 수목원이 되어있다.[12]

왕궁은 이중의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왕궁으로 이어지는 7개의 문이 설치되어 있다. 7개의 문 위치는 점성술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요새의 성벽은 돌과 계란 흰자로 만든 시멘트로 만들어졌다. 계란 흰자는 1,600만 개 분량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요새 내부의 왕궁은 메리나 왕국이 마다가스카르를 통일했을 때의 Andrianampoinimerina|안드리안포이니메리나영어 왕이 거주했던 목조 건축물이다. 추정 건축 연대는 1788년경이다.

왕궁 내부에는 15m의 큰 기둥이 서 있다. 이 큰 기둥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2000명의 노예에 의해 운반되어 왔다고 전해진다. 또한 운반 중에 100명 가까운 노예가 사망했다고도 한다.

메리나 왕국의 수도는 정치적인 이유로 1794년 안타나나리보로 옮겨진다. 안타나나리보 천도 후에도 여왕을 위한 별장이 이 언덕의 요새 내부에 마련되었다. 이 별장은 프랑스인 엔지니어 장 라보르드(Jean Laborde)의 기술 지도로 1870년에 건설되었다. 2005년 현재는 복원된 별장이 세워져 있으며, 내부에 전시된 유럽풍 가구와 조도는 당시의 것이다. 건물 밖에도 가마가 전시되어 있다.

언덕에는 외래종 왕대, 란타나, 소나무 등이 침입해 있지만, 숲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12] 암보히망가 왕실 언덕은 다음의 세계 유산 목록 등재 기준을 충족한다.

  • 기준 ⅲ: 암보히망가 왕실 언덕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말라가시 왕족의 사회적, 문화적 관습을 증언하는 독특한 유적이다.
  • 기준 ⅳ: 암보히망가 왕실 언덕은 말라가시 문화의 주요한 시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 양식의 특별한 사례이다.
  • 기준 ⅵ: 암보히망가 왕실 언덕은 말라가시 왕족의 전통과 신념과 관련된 유형 및 무형 유산과 함께 살아있는 문화적 전통을 나타낸다.

6. 보존 및 관리

암보히망가는 19세기 후반부터 많은 메리나인들에게 조상들의 축복을 받은 이상적인 사회 질서의 구현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1995년 화재로 안타나나리보의 자매 로바가 파괴되면서, 암보히망가는 신성한 과거와 연결되는 마지막 남은 물리적 연결 고리라는 인식이 커졌다.[1] 암보히망가의 Tsimahafotsy 씨족과 귀족 중 일부 지식인들은 암보히망가만이 국가 수도로서 국가 지도자들에게 통치에 필요한 정당성과 지혜를 부여하는 조상들의 축복(''hasina'')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안드리아나 후손들이 유네스코에 암보히망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도록 로비하는 등, 암보히망가를 홍보하고 보호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암보히망가는 현재 여러 요인으로 인해 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다양한 주체들의 노력으로 보존 및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1982년과 1983년에 통과된 두 개의 국가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으며, 2006년부터는 문화부 산하 암보히망가 문화 유적 사무소(OSCAR)가 5개년 관리 계획을 수립하여 유적지를 관리하고 있다.[1] 또한 지역 주민, 마을 위원회, 민간 협회인 Mamelomaso, 유네스코, C.H.A.M 협회 등 다양한 주체들이 협력하여 유적지 보존에 힘쓰고 있다.[1][9][10]

6. 1. 위협 요인

암보히망가는 인간과 자연, 두 가지 요인에 의해 보존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인구 증가와 가난으로 인해 주변 숲에서 불법으로 식물과 나무를 채취하여 자연환경이 훼손되고 있으며, 유적지의 숲과 나무 구조물은 화재에도 취약하다.[1] 1995년 안타나나리보에 있는 암보히망가의 자매 로바가 정치적 방화로 의심되는 화재로 파괴된 이후, 암보히망가도 비슷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1]

2012년 2월 마다가스카르를 강타한 사이클론 지오반나는 유적지에 큰 피해를 입혔다. 안드리안아포이니메리나 집 지붕널이 바람에 날아가 역사적 유물들이 외부에 노출되었고, 마한드리호노 구역을 둘러싼 나무 울타리도 심하게 손상되었다. 특히 숲의 피해가 컸는데, 토착 약용 식물과 나무 군락이 파괴되었고, 왕의 도시를 그늘지게 했던 많은 신성한 나무들이 뿌리째 뽑혔다. 여기에는 피다시아나 안뜰 주변과 제부 우리 안에 있던 신성한 무화과나무도 포함되며, 이 중 두 그루는 17세기부터 특정 왕실 의식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11]
사이클론 지오반나가 2012년 2월에 17세기 베바토 구역의 신성한 무화과나무를 뿌리째 뽑았다.
폭풍 직후, OSCAR는 피다시아나 안뜰의 신성한 돌을 그늘지게 했던 나무 대신 무화과나무를 심을 계획을 발표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심었던 대부분의 역사적인 자카란다 나무도 이때 파괴되었다. 이러한 피해는 전통주의자들 사이에서 메리나 군주들이 제정한 전통적인 금기를 다시 지켜야 한다는 요구를 불러일으켰다. 여기에는 유적지 내 돼지 반입 금지, 왕의 도시 구역 내 돼지고기, 담배, 술, 대마초 섭취 금지 등이 포함된다.[11]

6. 2. 보존 노력



암보히망가는 2011년에 97,847명의 방문객을 맞이한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1] 방문객들은 요금을 지불하는데(외국인 10000MGA, 현지인 400MGA),[1] 이 요금은 주로 유적지 보존에 사용된다.[1] 암보히망가 로바 코뮌은 왕의 도시를 방문하는 관광객과 순례자들에게 농업과 서비스를 제공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작지만 번창하는 시골 마을이다.[1] 유적지에서 다국어 투어 가이드를 고용할 수 있으며, 이들은 유적지의 특징과 역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제공한다.[1] 사진 촬영은 야외에서는 허용되지만 역사적인 건물 내부에서는 금지된다.[1] 2009년 마다가스카르 정치 위기로 인해 관광객이 감소하여 유적지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1]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분류된 지역은 제국 시대 동안 접근이 제한되고 보호를 받았으며, 프랑스 식민지 시대 이후 1897년에 식민지 도메인 서비스에, 1939년에는 국립 목록에 포함되어 법적 인정과 보호를 받아왔다. 그 이후로 1982년과 1983년에 통과된 두 개의 국가법(역사적, 국가적 관심의 유적지 보호)의 혜택을 받았다. 2006년부터 문화부에서 설립한 암보히망가 문화 유적 사무소(OSCAR)는 유적지와 입구 수수료, 국가 보조금을 관리해 왔으며, 30명의 직원이 시행할 5개년 관리 계획을 개발했다. 이러한 관리 및 보존 활동은 암보히망가 로바 농촌 코뮌 내의 지역 주민들과 협력하여 수행되며, 모든 인접 구역의 대표와 지역 사회로 구성된 마을 위원회도 유적지 보호에 참여하고 있다.[1]

암보히망가의 보존은 민간 협회인 Mamelomaso의 지원을 받는다. 이 협회는 문화 유산에 대한 인식과 보호를 위한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으며, 고원 지대의 다른 수많은 문화적,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유적지 보존에 기여해 왔다. Mamelomaso는 암보히망가 숲을 다시 심는 데 도움을 주는 것 외에도 샘 근처 돌 복원, 언덕 주변에 정보 게시판 설치, 유적지 내 여러 보행로 포장에도 기여했다. 유네스코는 특별 재정 지원을 통해 기록적인 폭우와 산사태로 위협받는 암보히망가의 역사적 구조물을 복원했다.[9] [https://www.cham.asso.fr/cham-en C.H.A.M] 협회의 자원 봉사자들은 1995년 동안 복원 캠페인에 참여했다.[10]

암보히망가는 19세기 후반부터 많은 메리나인들에게 조상들의 축복을 받은 이상적인 사회 질서의 구현으로 여겨져 왔다. 1995년 화재로 안타나나리보에 있는 암보히망가의 자매 로바가 파괴되면서 이메리나에서 유적지가 갖는 중요성이 더욱 커졌고, 암보히망가가 이 신성한 과거로 연결되는 마지막 남은 물리적 연결 고리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암보히망가의 Tsimahafotsy 씨족과 귀족(''andriana'') 중 소수의 지식인들은 암보히망가만이 국가의 수도 역할을 하고 국가 지도자들에게 국가를 올바르게 통치하는 데 필요한 정당성과 지혜를 부여하는 조상들의 축복(''hasina'')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안드리나의 후손들은 유네스코에 암보히망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도록 성공적으로 로비하는 등, 암보히망가를 홍보하고 보호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암보히망가의 보존은 인간과 자연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암보히망가 주변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지만 비교적 빈곤하며, 때때로 주변 숲에서 불법적으로 식물과 나무를 채취하여 자연 환경을 위협한다. 유적지의 숲과 나무 구조물도 화재에 취약하다.[1] 1995년 안타나나리보에 있는 암보히망가의 자매 로바가 정치적 방화로 널리 알려진 화재로 파괴된 후, 암보히망가도 비슷한 운명을 겪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이클론 지오반나는 2012년 2월 마다가스카르를 통과하면서 유적지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안드리안아포이니메리나의 집 지붕널이 바람에 날아가 역사적인 물건들이 외부에 노출되었다. 마한드리호노 구역을 둘러싼 나무 울타리도 심하게 손상되었다. 숲에는 토착 약용 식물과 나무의 대규모 구역이 파괴되었다. 왕의 도시를 그늘지게 했던 많은 신성한 나무가 뿌리째 뽑혔으며, 피다시아나 안뜰 주변과 제부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무화과나무가 포함되었다. 뿌리째 뽑힌 두 그루의 나무는 17세기부터 특정 왕실 의식의 물리적 닻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특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폭풍이 발생한 직후 OSCAR는 피다시아나 안뜰의 신성한 돌을 그늘지게 했던 뿌리째 뽑힌 나무 대신 무화과나무를 심을 계획을 발표했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심어진 대부분의 역사적인 자카란다도 파괴되었다. 유적지에 대한 피해의 정도는 전통주의자들로 하여금 메리나 군주들이 제정한 전통적인 금기에 대한 준수를 요청함으로써 유적지의 신성함에 대한 존중을 새롭게 요구하게 했다. 여기에는 유적지에서 돼지를 금지하고, 왕의 도시 구역에서 돼지고기, 담배, 술, 대마초의 섭취를 금지하는 것이 포함된다.[11]

참조

[1] 논문 A refined chronology of prehistoric Madagascar and the demise of the megafauna
[2] 논문 The Structure of Trade in Madagascar, 1750–1810
[3] 웹사이트 Royal Hill of Ambohimanga http://www.wmf.org/p[...] World Monuments Fund 2012-09-22
[4] 논문 Anciennes residences royales: Essai de monographics sur Ambohimanga et Ambositra http://www.fonds-pat[...] 2013-01-17
[5] 논문 Un Exemple de Syncretisme Esthetique au XIXe Siecle: Le Rova de Tananarive d'Andrianjaka a Radama 1ere http://madarevues.re[...] 2013-01-18
[6] 웹사이트 Ambohimanga Rova http://www.ambohiman[...] Commune Urbaine d'Ambohimanga Rova 2013-01-17
[7] 뉴스 Nampoina, des cases de ses ancêtres aux Rova http://www.lexpressm[...] 2012-07-19
[8] 뉴스 Ambohimanga ou la colline bleue http://www.le-phoeni[...] 2012-09-22
[9] 웹사이트 Madagascar http://portal.unesco[...] UNESCO 2013-01-17
[10] 웹사이트 Association CHAM {{!}} Découvrez tous les chantiers ! https://www.cham.ass[...] 2024-04-17
[11] 뉴스 Madagascar: cyclone devastates historical site http://www.africarev[...] 2012-11-11
[12] 웹사이트 Royal Hill of Ambohimanga https://whc.unesco.o[...] 2023-05-0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