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카이로 회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카이로 회담은 1943년 11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영국, 중화민국의 수뇌들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만나 일본에 대한 전후 처리 방침을 논의한 회담이다. 배경에는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중국의 주권 옹호, 버마 전역에서의 연합군 협력, 그리고 전후 세계에 대한 각국의 구상이 있었다. 회담에서는 동남아시아 사령부 창설, 버마 반격 계획, 그리고 1943년 12월 발표된 카이로 선언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 요구, 만주, 대만 등 중국 영토 반환, 한국의 독립 명시 등이 이루어졌다. 카이로 선언은 한국 독립을 최초로 국제적으로 약속한 것이었으나, '적절한 시기'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인해 이승만 등은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회담은 연합국의 협력을 강화하고 일본에 대한 전후 처리 방향을 제시했지만, 이후 연합국의 전략 변화와 미국의 원조 축소 등으로 인해 그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43년 이집트 - 카이로 선언
    카이로 선언은 1943년 미국, 영국, 중화민국이 일본 침략 억제와 전후 처리를 논의한 카이로 회담 결과 발표된 공동 성명으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 만주·대만·펑후 제도 반환, 한국 독립 약속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연합국의 대일 방침과 포츠담 선언의 기초가 되었으나, "적절한 시기에"라는 문구와 댜오위다오 영유권, 대만 지위 논쟁 등 논란이 있다.
  • 1943년 회의 - 테헤란 회담
    테헤란 회담은 1943년 11월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총서기가 모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의 협력 강화 및 전후 세계 질서 구축을 논의한 회담으로, 오버로드 작전 개시 결정, 소련의 대일전 참전 약속, 국제연합 설립 기반 마련 등의 결과를 낳았으나 폴란드 국경 문제, 독일 암살 계획설 등의 논란도 있었다.
  • 1943년 회의 - 카사블랑카 회담
    카사블랑카 회담은 1943년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총리가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만나 제2차 세계 대전 전략을 논의하고 추축국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카사블랑카 선언을 발표한 회담이다.
카이로 회담
회의 개요
명칭카이로 회담
다른 명칭Operation Sextant (작전명)
날짜1943년 11월 22일 - 1943년 11월 26일
장소알렉산더 컴스톡 커크의 저택
위치카이로, 이집트 왕국
참여자장제스(중화민국)
윈스턴 처칠(영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미국)
결과카이로 선언 발표
관련 서적Winston Spencer Churchill, The Second World War: Closing the Ring (1951)
일본어 명칭カイロ会談 (카이로 카이단)
장제스,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이 1943년 11월 25일에 회의에서
장제스,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1943년 11월 25일)

2. 배경

카이로 회담은 1943년 11월 22일부터 11월 26일까지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연합국 회담이다. 회담 장소는 3대 피라미드 근처에 있는 이집트 주재 미국 대사 알렉산더 커크의 저택이었다.[25] 회담에는 미합중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장제스가 참석했다.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일소 중립 조약으로 인해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장제스와의 면회를 피했기 때문에 불참했다.[25]

미국은 프랑스인도차이나를 되찾는 것을 원하지 않아 장제스에게 인도차이나 지배권을 제안했으나, 장제스는 거절했다.[26]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었고, 12월 1일에는 라디오를 통해 "카이로 코뮤니케"(Cairo Communiqué프랑스어)가 발표되어[27] 연합국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까지 군사 행동을 계속할 것을 선언했다. 카이로 회담 종료 이틀 후 스탈린은 이란 제국의 테헤란에서 루스벨트, 처칠과 회담했다(테헤란 회담).

2. 1. 국제 관계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대영 제국, 미국, 중화민국은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여 중국 내 치외법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중국의 주권을 옹호했다.[2] 1943년 1월 11일, 영국과 미국은 공동 선언을 발표하여 지난 세기 동안 중국에 불평등하게 부과되었던 모든 조약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3] 그러나 중국-영국 관계는 순탄치 않았는데, 이는 영국이 동아시아에서 누리던 세력권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1942년, 영국이 중국 국민군의 버마(현재 미얀마) 군사 개입에 동의하지 않자 중국 정부는 놀라움과 분노를 느꼈다. 중국은 제국주의를 종식시키기를 원했지만, 영국 제국주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처칠 또한 보수적인 영국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을 고수하며 아시아인들이 연합하여 연합국의 승리를 위해 싸울 수 있다고 믿기를 거부했다.[4] 그는 또한 중국에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이 세계 강국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1]

정치적으로, 영국은 중국을 고립시키고 싶을 정도로 중국에 대해 의심과 경멸을 동시에 품었다. 영국은 중국의 서방 열강에 대한 강력한 독립성이 인도와 같이 불만이 이미 끓어오르는 식민지독립 운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그들은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물자나 군대를 투입하는 것을 꺼렸다. 이탈리아 왕국나치 독일이 항복하더라도 영국 해군은 버마 대신 태평양에 여유 병력을 배치하는 것을 선호했다. 영국 참모총장인 앨런 브룩 경은 중국을 더욱 경멸했다.[5]

영국과 미국은 전후 기대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처칠은 전후 세계가 영국과 미국에 의해 지배되기를 원했지만, 루스벨트는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에 독립을 부여하고 모든 국가의 자결을 위한 우드로 윌슨의 비전을 형성하는 새로운 세계를 구상했다. 또한 루스벨트는 4개 경찰국가 (미국, 대영 제국, 소련, 중화민국)가 잠재적인 갈등으로부터 전후 세계를 인도하고 보호하기를 원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소련의 부상 때문이었는데, 미국 군사 전문가들은 소련이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평화 협정을 맺을 경우 영국 또한 패배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모든 군대를 유럽 전선에 투입하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 따라서 미국 군부는 승리를 위해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다.[4]

2. 2. 버마 전역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대영 제국, 미국, 중화민국은 버마 전역에서 일본군에 맞서 공동으로 싸웠지만, 각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차이로 인해 실질적인 동맹은 형성되지 못했다.[5]

영국은 버마 탈환보다 대서양 해전, 지중해 및 중동 전역 등 다른 전선에 집중하기를 원했다.[5] 윈스턴 처칠은 중국이 세계 강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인도 등 식민지의 독립 운동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여 중국 지원에 소극적이었다.[1][4][5]

반면, 중국은 버마를 통해 히말라야 산맥 상공의 험프 루트 외에 유일한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이 절실했다. 1942년 버마 함락으로 중국의 마지막 국제 보급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2][5]

미국은 4개 경찰국가 구상을 통해 중화민국을 전후 세계 질서 유지에 중요한 역할로 보았고, 소련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했다.[4]

이러한 상황에서 1943년 8월 제1차 퀘벡 회담에서 루이 마운트배튼 경을 최고 사령관으로 하는 동남아시아 사령부가 창설되었지만, 영국과 중국 간의 의견 불일치는 계속되었다.[4] 영국은 랑군 탈환에 소극적이었고, 중국은 남북 버마 동시 공격을 주장하며 군대 투입을 꺼렸다.[5] 한편, 미국은 도약 작전 전략을 수립하며 중국 전선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하기 시작했다.[7][8]

2. 3. 제1차 퀘벡 회담 (1943)

1943년 8월, 암호명 쿼드런트인 제1차 퀘벡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루이 마운트배튼 경을 이 지역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하는 새로운 연합 "동남아시아 사령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4] 그는 영국-미국 합동 참모 본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으며, 가능한 한 빨리 중국을 통한 공수 작전 경로를 확립하고 미얀마를 점령하여 윈난에서 침공하는 중국군과 연결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했다.

그러나 처칠은 영국이 무력으로 일본을 격파하고 아시아 식민지에서 영국의 지위를 회복하기를 원했다.[4] 결국 그는 미국의 촉구에 따라 버마 반격을 준비하기 위해 영국 해군을 유럽에서 동쪽으로 이동시키기로 마지못해 동의했다.[6]

3. 회담 진행 과정

카이로 회담은 미국 대사 알렉산더 컴스톡 커크의 이집트 왕국 관저에서 열렸으며, 기자 피라미드 단지에서 약 약 12.87km 떨어진 카이로 중심지에 있었다.[5] 회담에는 미국, 영국, 중화민국 3국의 지도자 외에도 영국과 미국의 합동 참모 본부 위원들이 참석했다. 중화민국 측에서는 샹전(상진) 장군, 린웨이(임위) 중장, 저우즈로우(주지로우) 중장, 양쉬안청(양현성) 중장[5], 위지시 등이 참석했고, 장제스는 미국 참모총장 조셉 워렌 스틸웰을 회담에 초대했다.[14]

3. 1. 회담 준비

모스크바 회담에서 카이로 회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미국은 이 회담을 통해 미국, 영국, 소련, 중화민국 4대 강국의 공동 행동 중요성을 확인하고자 했다.[2] 그러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소련-일본 중립 조약 때문에 장제스와의 만남을 꺼렸다.[4] 결국 회담은 장제스를 위한 카이로, 이오시프 스탈린을 위한 테헤란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9][10]

3. 2. 11월 21일 ~ 22일

1943년 11월 20일, 조지프 스틸웰이 처음 카이로에 도착했고, 11월 21일에는 장제스가 부인 쑹메이링 여사와 윈스턴 처칠과 함께 도착했다.[12] 처칠은 HMS 윌헬름 호를 타고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도착한 후 카이로로 비행했다.[12] 처칠은 장제스와 그의 부인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그 후 장제스를 지도실로 데려가 여러 전장에서의 영국군 현황과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15]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전함 USS 아이오와 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알제리 오란에서 에어포스 원을 타고 튀니스로 도착하여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을 만났다. 그날, 스틸웰은 장제스, 조지 마셜, 패트릭 헐리, 브레혼 B. 서머벨 장군과 만났다. 루스벨트는 11월 22일에 도착했고, 그날 오후 장제스는 쑹 여사와 처칠과 함께 루스벨트를 방문했다. 그날 저녁, 처칠, 루스벨트와 그들의 보좌관들은 예비 회담을 가졌다.[12] 중경 주재 미국 대사관의 차석 서기관인 존 패튼 데이비스는 미국의 군대를 사용하여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식민 제국을 재건하는 것을 반대하는 메모를 루스벨트에게 보냈다. 그는 중국 국민군의 부패와 무능함을 지적하고, 북부 버마에서 중국으로 가는 육상 통신로를 개설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제안했다.[12]

3. 3. 11월 23일

장제스는 "강력하고 강력한 해군 작전"과 "버마가 전체 아시아 전역의 핵심"임을 강조하며 타잔 작전을 지지했다.[11] 그는 랑군과 윈난성에서 병력을 투입할 의향이 있었지만, 작전 성공을 위해 공해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벵골만에서 대규모 해상 작전을 병행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 관리들은 중국이 자신들에게 관심 있는 문제만 논의하려 한다고 비판했다.[12]

3. 4. 11월 24일

蔣中正|장제스중국어는 1943년 11월 24일 윈스턴 처칠과 루이 마운트배튼을 만나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장제스는 북부 미얀마에서의 육상 작전과 함께 벵골 만에서의 해상 작전을 동시에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12] 그는 타잔 작전을 지지하며 양곤과 윈난 성에서 병력을 투입할 의향을 밝혔지만, 작전 성공을 위해서는 해상 우위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 연합군은 상륙 작전에 필요한 장비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처칠은 이탈리아를 격파하기 전까지는 인도양에 해군을 파견할 수 없다며 벵골 만에서의 대규모 해상 공세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4] 또한 처칠은 북부 버마에서의 육상 작전이 반드시 벵골 만 해상 작전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며,[5] 상륙 작전이 육상 작전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장제스는 상륙 작전이 적의 항공 전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고 반박했다.[12] 앨런 브루크 영국 제국 참모총장은 상륙 작전을 강행하려면 프랑스 상륙을 연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해군 어니스트 킹 제독은 버마 반격에 소극적이었으며, 동남아시아 사령부의 대규모 작전을 꺼렸다. 그는 이러한 작전이 일본 격파를 위한 전체 계획의 맥락에서 고려되어야 하지만, 전체 계획이 아직 합의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킹 제독은 일본 격파를 위해서는 태평양을 주 작전 전선으로 삼아야 하며, 아시아 대륙에서의 육상 작전은 필수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4]

처칠은 영국이 대규모 함대를 파견할 수는 있지만, 상륙 작전 시기는 미정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대표단이 상륙 작전을 압박하자, 처칠은 결국 안다만 제도 상륙에 동의했다.[5] 이후 참모총장들은 미얀마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중국과의 육상 연결을 재개하기로 합의했으며, 조지프 스틸웰이 북쪽에서 지상 공격을, 마운트배튼이 남쪽에서 상륙 작전을 지휘하여 벵골 만에서 안다만 제도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12] 버마 상륙 작전은 "가능한 한 빨리" 추진될 예정이었으나, 구체적인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 동남아시아 사령부는 계획된 작전에 대한 변경 사항을 제안할 수 있었다.

한편, 미국 대표단은 장제스에게 향후 6개월 동안 험프 항로를 통해 매달 8,900톤의 물품만 중국으로 수송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장제스는 미국에 이 수치를 10,000톤으로 늘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 대표단은 윈난-버마 고속도로 개통과 10,000톤의 군사 원조 수송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장제스는 미국이 더 이상 수송기나 항공기를 제공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미국에 더 많은 수송기 제공과 중국에 대한 대규모 작전 개시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12]

같은 날, 영국 외무 장관 앤서니 이든은 전 중화민국 외교부 장관 왕충후이와 만났다.[11]

3. 5. 11월 25일

루스벨트장제스에게 타잔 작전이 벵골 만에서의 대규모 상륙 공격으로 보완될 것이라고 약속하며, 제국주의에 맞선 장제스의 투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4][5] 두 사람은 인도차이나 반도가 프랑스 식민지로 반환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했다. 그들은 또한 동아시아에 대한 소련의 관심, 특히 중국 북동부에서 바다로 접근하려는 소련의 욕구에 대해 논의했다.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공산당과 협상하도록 설득하려 했고,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스탈린이 공산당의 마오쩌둥과의 장제스의 관계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얻어 달라고 요구하면서 대응했다. 장제스는 또한 스탈린이 중국 북동부의 중국 주권을 존중해 주기를 원했다.[4]

3. 6. 11월 26일 ~ 27일

11월 26일, 쑹메이링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10억달러 규모의 차관 계획을 논의했고, 루스벨트는 즉시 동의했다.[17] 장제스는 다음 해 3월 미얀마에 대한 연합 반격을 위한 계획을 확정하기 위해 어니스트 킹 제독과 만났다.[11] 오후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국과 영국의 지도자들을 자신의 거주지로 초대하여 차를 마시며 다음 해 3월의 행동 계획을 최종 확정했다. 장제스는 마운트배튼[13]과 만나 중국에 돈을 빌려주겠다는 약속에 대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직접 감사를 표했다.[17]

11월 27일, 장제스는 북아프리카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만난 후 카이로를 떠났다.[14] 쑹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장제스의 깊은 감사를 표하는 편지를 썼다.[14] 루스벨트 대통령과 장제스는 쑹이 통역을 맡아 오랫동안 우호적인 대화를 나눴다.[9]

4. 카이로 선언

1943년 12월 1일, 미국, 영국, 중화민국은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전후 처리 방침을 천명했다. 이 선언은 같은 해 12월 1일 라디오를 통해 ''카이로 코뮤니케''로 발표되었다.[21]

이 선언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 비서인 해리 홉킨스가 초안을 작성하고, 루스벨트가 수정했으며, 처칠이 수정한 후 결정되었다.[5]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쟁의 목적은 일본의 침략을 막고 처벌하는 것이다.[10]
  • 중화민국의 4대 강국 지위를 재확인하면서 "일본 제국이 9.18 사건 이후 중화민국으로부터 점령한 영토(만주, 포르모사, 페스카도레스를 포함한 뤼순 및 다롄 임차지)는 중화민국에 반환될 것"이다.
  •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빼앗은 다른 모든 영토에서도 추방될 것이며", "중국에 있는 일본 공공 및 민간 산업과 일본 상선은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완전히 접수되어야 한다"
  • "적절한 시기에 한국은 자유롭고 독립될 것"이라고 명시하여 전쟁 후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다.


카이로 선언은 처음으로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하고 일본 본토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5. 카이로 선언의 영향과 한계

이승만은 카이로 선언의 "적절한 시기"라는 표현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이 문구가 영미 양국의 친소적인 노선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즉시 승인받지 못하고, 결국 소련대일전에 참전하면서 38선 분단으로 이어졌다고 비판했다.[31]

1945년 샌프란시스코 국제연합 창립총회에 보낸 성명에서, 이승만은 스탈린이 직접 참석하지 않았음에도 카이로 회담에 그의 영향력이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국이 동아시아에서의 권익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미국 국무부가 임시정부 승인 요청에 대해 카이로 회담 이전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문제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입장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30]

이승만은 유럽과 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으며, 유럽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동남부 유럽의 게릴라들이 공산 계열과 비공산 계열로 나뉘어 있으며,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이 발칸반도를 경유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은 이 지역을 소련의 세력권에 맡기기로 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를 지원하려는 영국의 노력이 이러한 제한적인 정책 때문이며, 핀란드폴란드의 사례를 통해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경고했다.[30]

이승만은 중국에서 국민정부와 공산당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연합국이 중국 국민정부에 공산주의자들과의 협력을 요구하는 것은 소련의 제국주의적 행동을 묵인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갈 무렵,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만이 소련의 한국 점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종전 후 연합국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새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가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31]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 결과에 대해 "예상대로였으며, 혁명 대의에 있어 중요한 성과"라고 평가하며 대체로 만족했다.[4] 그는 루즈벨트의 태도가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그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이 통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5] 그러나 그는 영국과 미국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으며, 카이로를 떠나면서 "영국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사소한 이익도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루즈벨트가 버마에 상륙할 때 해군이 우리 군대와 협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예측했다.[10] 그는 또한 미국이 소련의 대일 전쟁 참전을 원한다는 결정에 경계심을 품었다.[4]

처칠은 처음에 장제스와의 회담이 너무 길고 시간 낭비라고 불평했다.[12] 그는 루즈벨트가 장제스와 협의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에 불만을 품으며, "영국과 미국의 관계자 간의 회담이 중국 문제로 인해 방해받고 매우 혼란스러워졌다."라고 말했다.[9] 하지만 처칠의 태도는 장제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우호적이었고, 장제스는 그를 "현대 정치가들에게는 드문, 선견지명이 있고 세련된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반면에 처칠은 장제스에 대해 "침착하고, 평정을 유지하며, 민첩하다... 명성과 권력의 절정에 있다."라고 평가했다.[15]

일본 국내에서는 카이로 회담에 대해 철저히 비판하는 보도가 이루어졌다. 1943년 12월 2일 아사히 신문(석간)은 카이로 회담에 대해 "일본을 삼등국으로 전락시키려는 일본 본토 처리까지 언급한 모욕적인 결의"라고 보도했다.

5. 1. 연합국의 입장 변화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제2차 세계 대전을 조기에 종결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중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부차적인 문제로 만들었다.[4] 그는 독일이 패배하는 즉시 소련이 일본과 싸우도록 하면서 유럽 서부 전선을 열려고 노력했다.[10] 또한 그는 일본에 대한 주요 전선이 태평양에 있어야 한다고 느껴 동남아시아에서의 반격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12] 처칠 또한 버마의 늪지 정글에서 일본과 싸우는 것은 바다에 뛰어들어 상어와 싸우는 것과 같다고 선언하며, 중국이 진정으로 4강 중 하나라면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4] 따라서 처칠은 루스벨트에게 장제스에게 한 약속을 철회하도록 촉구했고, 루스벨트는 소련이 협력하면 전쟁을 조기에 종결할 수 있으며, 중국의 입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다.[10] 미국과 영국이 프랑스 서부 전선을 열기 위해 상륙정을 사용해야 했기에 처칠의 주장은 루스벨트에게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5]

테헤란 회담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카이로로 돌아와 처칠은 공식적으로 버캐니어 작전(버마 상륙 작전)의 취소를 제안했다. 루스벨트는 처음에는 장제스에게 약속했으므로 그의 인정을 받지 않고서는 이를 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륙정 부족이 약 18~20척에 불과하므로 서부 전선에서 연합군의 계획을 과도하게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5] 12월, 영국-미국 합동 참모 본부는 안다만 제도 점령이 그 손실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며 타잔 작전 취소를 결정했다. 처칠은 버캐니어 작전에 막대한 양의 물품이 필요하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작전을 우기철이 끝난 후에 연기하고 상륙정을 더 비용이 많이 드는 유럽 전선에 할당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2] 처칠은 버캐니어 작전의 취소를 주장했고, 미국 제독 어니스트 킹은 이에 반대했다.

12월 5일, 군사 고문들과 상의한 후 루즈벨트는 마침내 처칠의 요구에 동의하고 버캐니어 작전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루즈벨트는 장제스에게 전보를 보내[5] 중국이 먼저 단독으로 반격을 시작하거나, 연합군이 해상에서 대규모 공세 능력을 갖게 되는 1944년 11월까지 기다릴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 결정을 번복하려 했고, 처칠에게 중국이 윈난군을 계속 증강하겠지만 계획된 수륙 양용 작전이 예정대로 시작되지 않는 한 버마로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렸다.[4]

5. 2. 군사 원조 축소

루스벨트는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약속했지만,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히말라야 산맥의 험프 루트를 통한 수송 비행 횟수를 늘려 중국에 물자를 공급하고 일본을 원거리 폭격하는 데 동의했다.[9] 또한 중국에 공수 물량을 12,000톤으로 늘리고, 미국 공군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가 중국 기지에서 일본을 폭격할 것이라고 구두로 약속했다.[15] 루스벨트는 더 나아가 중국에 90개 육군 사단을 장비하고 훈련시키겠다고 구두로 약속했으며,[8] 30개 중국 사단을 즉시 장비하고 나중에 60개 사단을 더 장비하겠다고 약속했다.[19]

하지만, 이러한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중국과의 구두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나는 중국-버마-인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여전히 매우 실망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은 우리가 매번 약속을 어겼고, 어떤 약속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5] 특히, 60개 사단 장비 제공 약속은 1945년 8월 쑹쯔원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번복되었다.[14]

버마 전역의 일환으로 계획되었던 작전 부커니어가 취소된 후, 장제스는 10억 달러 차관을 요청했고 루스벨트는 구두로 동의했지만, 미국 관리들은 이를 "갈취"로 여겨 요청을 거절했다.[17]

5. 3. 전후 처리 문제

카이로 선언에서 합의된 영토 반환 문제는 이후 얄타 회담에서 뤼순, 다롄 등의 주권 문제로 이어지며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4][13] 루스벨트와 장제스는 전쟁 후 다롄을 자유 항으로 만드는 것을 논의했고,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 간에 합의된 사항 중 하나는 다롄을 국제 감시 하에 자유 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5]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뤼순을 소련의 조차 군항으로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카이로 선언에서 발표된 영토 주권 상실을 초래했다.[4][13]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이 요구한 잃어버린 영토 회복은 이후 스탈린[13]에 의해 지지되었으며, 이는 전쟁 이후 일본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종식시키기 위함이었다.[22] 카이로 선언 다음 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카이로 회담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8]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해, 루스벨트는 과도기적 조치로 국제 신탁 통치를 설립할 계획이었고, 그의 제안은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에 의해 수용되었다.[5]

5. 4. 한국 독립 문제

카이로 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명시한 최초의 국제 문서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적절한 시기"라는 모호한 표현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될 여지를 남겼고, 이는 결국 신탁통치 문제로 이어졌다.[31]

이승만은 카이로 선언에서의 "적절한 시기"라는 문구에 대해 영미국의 친소적인 노선으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바로 승인받지 못하고 즉각적인 독립을 이루지 못한 점을 비판하였다. 그는 소련이 대일 전쟁에 참가하게 됨에 따라 38선으로 분단되었다고 주장했다.

6. 한국의 관점

대한민국 임시정부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명했다.[31]

6. 1. 이승만의 비판

이승만은 카이로 선언의 "적절한 시기"라는 문구가 영미의 친소 노선으로 인해 임시정부의 즉각적인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소련의 참전과 38선 분단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31] 그는 1945년 샌프란시스코 국제연합 창립총회에 보낸 성명에서, 루즈벨트와 처칠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하에 두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했다.[31]

이승만은 성명에서 스탈린이 카이로 회담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영국이 동아시아에서의 권익 유지를 위해 편의주의적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비판하며, 미국 국무부가 임시정부 승인 요청을 거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29] 그는 카이로 회담이 한국 문제를 차후 결정에 맡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으며, 이는 아시아에서 소련의 입장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30]

나아가 이승만은 유럽과 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으며, 유럽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동남부 유럽의 공산화와 핀란드, 폴란드 문제 등을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연합국중국 국민정부에 좌우합작을 요구한 것과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 정책이 소련의 제국주의적 행동을 묵인하는 정책과 병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31]

이승만은 전쟁이 끝날 무렵,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만이 소련의 한국 약탈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이 해방됨과 동시에 연합국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조건으로 임시정부의 가승인을 요청했지만, 미국 정부가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31]

7. 결론 및 평가

카이로 회담은 연합국 지도자들이 모여 전시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특히 일본에 대한 전략과 전후 처리 방침을 결정한 중요한 회담이었다.[12] 이 회담은 중국이 참여한 유일한 연합국 정상회담이었으며,[6] 중화민국은 이 회담을 통해 연합국의 주요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가 동등한 입장에서 회담을 진행했다.[2] 회담 후 장제스는 중국에서 영웅으로 환영받았으며,[22] 중미 우호 관계는 절정에 달했다.[4] 루스벨트는 크리스마스 연설에서 "오늘날 우리는 중화민국과 깊은 우정과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그 어느 때보다 더 가까이 서 있다"라고 선언할 정도였다.[13]

하지만 카이로 회담은 중·미 관계의 전환점이기도 했다.[4] 회담 초기, 미국은 중국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여 처칠에게 중국의 중요성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회담 이후, 루스벨트는 장제스가 북부 버마 전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판단하여 그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22] 마운트배튼에 따르면 루스벨트와 처칠은 장제스의 요구에 분노했다.[5]

카이로 회담은 일본에 대한 요구 사항을 명확히 하는 데 기여했다. 히로히토 천황은 카이로 선언 발표 이후 어전회의를 소집했고, 온건 세력이 힘을 얻게 되었다.[8]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카이로 선언을 일본에 대한 무조건 항복 요구의 근거로 삼았다.[22]

그러나 전략적인 측면에서 카이로 회담의 중요성은 제한적이었다.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이 일본과의 전쟁 참전을 약속하면서 버마 및 동남아시아 군사 작전의 필요성이 줄어들었고,[22] 1945년까지 중국에 대한 원조는 스틸웰 고속도로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는데, 그 시점에서는 이미 중요성이 낮아진 상태였다.[22]

2000년대 이후, 특히 2013년 70주년을 기점으로 카이로 회담은 서방보다 중국에서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이는 장제스가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과 동등하게 대우받은 유일한 회담이라는 상징성 때문일 뿐만 아니라, 현 중국 정부가 카이로 회담의 문구가 센카쿠 열도 분쟁에 대한 중국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믿기 때문이다.[23]

결론적으로, 카이로 회담은 연합국의 대일 전략과 전후 구상을 논의한 중요한 회담이었지만, 연합국 간의 이해관계 변화, 특히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 변화로 인해 그 합의 내용이 완전히 이행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참조

[1] 서적 The Second World War: Closing the Ring Houghton Mifflin Company, Boston
[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II Cambridge
[3] 서적 The Rise of Modern China OxfordUniversityPress
[4] 서적 War and Nationalism in China: 1925–1945 Routledge
[5] 서적 Churchill and Wartime Britain, 1939–1945 Taiwan Commercial Press
[6] 웹사이트 The Background of the Cairo Conference http://www.mh.sinica[...] 1972
[7] 웹사이트 Island-Hopping https://www.historyc[...] 2024-10-04
[8] 서적 America's Failure in China Shanghai People's Publisher
[9] 서적 History of Modern China Chinese University Publishing House
[10] 서적 Book of Modern Chinese History Chinese University Publishing House
[11] 서적 Diary of the History of the Republic of China Google
[12] 서적 Misreading the Foreign Land: American Relations with Russia and China in the 20th Century
[13] 학술지 Cairo Conference Taiwan Commercial Press 1973
[14] 서적 Changing China Times Culture Publishing Enterprise
[15] 서적 Reading Chiang Kai-shek's Diary from the Perspective of Big History China Social Sciences Press
[16] 서적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diplomatic papers: The Conferences at Cairo and Tehran 1943 https://digital.libr[...]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1
[17] 서적 Reading Chiang Kai-shek's Diary from the Perspective of Big History China Social Sciences Press
[18] 서적 Roosevelt and Churchill CITIC Press
[19] 서적 Cold War and Revolution: The Origins of the Soviet-American Conflict and the Chinese Civil War Columbia University Press
[20] 웹사이트 Indochina, France, and the Viet Minh War, 1945–1954: Records of the U.S. State Department, Part 1: 1945–1949 https://www.gale.com[...] 2018-11-10
[21] 뉴스 Cairo Communique, December 1, 1943 http://www.ndl.go.jp[...] Japan National Diet Library 1943-12-01
[22] 웹사이트 Staying There: Mena House, the Summit of Cairo https://winstonchurc[...] 2023-11-30
[23] 서적 China's Good War: How World War II is Shaping a New Nationalism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20
[24] 서적 The Second World War: Closing the Ring Houghton Mifflin Company, Boston
[25] 잡지 Alexander Kirk https://books.google[...] 2011-01-23
[26] 웹사이트 Indochina, France, and the Viet Minh War, 1945-1954: Records of the U.S. State Department, Part 1: 1945-1949 https://www.gale.com[...] 2018-11-10
[27] 웹사이트 카이로 선언 1943년 12월 1일 https://www.ndl.go.j[...] 국립국회도서관 2018-12-22
[28] 뉴스 미·영·중 수뇌, 대일전의 최종 목표 협의 (쇼와 18년 12월 2일 아사히 신문(석간))『쇼와 뉴스 사전 제8권 쇼와 17년/쇼와 20년』p43 매일 커뮤니케이션즈 간 1994년
[29] 문서 중국의 생존을 위한 장개석 총통의 투쟁이 중대한 시기에 이르렀을 때,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절대적으로 필요한 군수물자 보급이 크게 두절되었다.
[30] 문서 결국 후에 영미와 소련이 그리스에서 충돌하여 그리스 내전이 발발하게 되고 이로인해 트루먼 독트린이 1947년 초에 발표되는 원인이 되었다.
[31]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