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우치 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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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우치 요도는 도사번의 방계 가문 출신으로, 14대 번주의 양자가 되어 번주 자리에 올랐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도사 번주가 되어 요시다 토요를 등용하여 번정 개혁을 추진했지만, 안세이 대옥으로 은거했다. 이후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동맹을 인지하고 대정봉환을 추진하여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시도했다. 메이지 유신 초기에는 막부 해체에 반대하며 막부의 명맥을 유지하려 했으나, 신정부 수립 후 내국사무총재를 사퇴하고 과음으로 사망했다. 그는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진보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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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예회의는 1860년대 막말 일본에서 막부 권위 실추와 존왕양이 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유력 다이묘들의 조정 참여 기구였으나, 쇼군의 독선과 다이묘 간 대립으로 성과 없이 와해되어 막부 타도 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 야마우치 요도 - 안세이 대옥
안세이 대옥은 1858년 이이 나오스케가 서구 열강과의 통상 조약 체결 반대 세력과 쇼군 후계자 관련 세력을 탄압한 사건으로, 요시다 쇼인 등을 처벌하고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당했으며, 메이지 유신의 배경이 되었다.
야마우치 요도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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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야마우치 요도 / 야마우치 도요시게 |
시대 | 에도 시대 후기 (막말) - 메이지 시대 |
출생 | 분세이 10년 음력 10월 9일 (1827년 11월 27일) |
사망 | 메이지 5년 음력 6월 21일 (1872년 7월 26일) |
개명 | 데루에 (어린 시절 이름) → 도요시게 → 닌도 → 요도 |
별칭 | 게이카이스이코 (鯨海酔侯) |
묘소 | 오이 공원 |
관위 | 종4위 하 도사 국 수 시종 참예 종4위 상 근위부 좌근위권소장 의정 내국 사무 총재 종2위 곤주나곤 의사 체재 취조방 총재 제도료 총재 학교 지사 상국 의장 사향간지후 정2위 증위 종1위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요시 도쿠가와 이에사다 도쿠가와 이에모치 |
번 | 도사 번 번주 |
씨족 | 도사 야마우치 씨 |
아버지 | 야마우치 도요아키 |
어머니 | 세대 (히라이시 씨) |
양아버지 | 야마우치 도요아쓰 |
형제 | 유키 (이가 씨 리의 아내) 야마우치 요도 야마우치 도요미쓰 |
아내 | 산조 마사코 (가라스마루 미쓰마사의 딸, 산조 사네쓰무의 양녀) |
자녀 | 야마우치 도요노리 미쓰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비) 야에코 (고마쓰노미야 요리히토 친왕 비, 후의 아키모토 오키토모의 계실) |
양자 | 야마우치 도요노리 |
일본어 표기 | |
로마자 표기 | Yamauchi Yōdō |
가나 | やまうち ようどう |
한자 | 山内容堂 |
한국어 | 야마우치 요도 |
추가 정보 | |
참고 | 도사 야마우치 씨는 도사에서도 예로부터 "야마우치"라고 불렸으며, 에도 막부가 편찬한 《완성중수제가보》에도 "야마우치"라고 후리가나가 있다. 야마우치 도요시게 근대 일본인의 초상 국립국회도서관 |
2. 출신 배경
야마우치 요도는 도사번의 방계 가문인 야마노우치 남저가 출신으로, 야마우치 도요아키(10대 번주 도요카즈의 4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번주의 적자들은 에도의 야마우치 집안 저택에서 성장하지만, 그는 방계였기 때문에 고치성에서 자랐다. 그의 집안은 본가에 가장 가까운 방계로서 영주로부터 1500석 정도의 영지를 분봉받았다.
요도는 젊은 나이에 도사 번의 번주가 되었지만, 정통성과 배경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여 개혁을 추진했다.[1]
도요시게는 도자마 다이묘였으나, 마쓰다이라 슌가쿠, 다테 무네나리,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함께 '사현후'로 불리며 막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베 마사히로 사후 이이 나오스케가 대로에 취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야마우치 도요시게는 은거 후 '요도'라는 호를 사용하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도사 번 내에서는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41] 1860년, 요도와 갈등을 빚었던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 문 밖의 변으로 암살되면서 근신에서 풀려났다.
13대 도사 번주 야마우치 도요히로와 그의 동생인 14대 도사 번주 야마우치 도요아쓰가 연이어 요절하면서, 도사 번은 막부로부터 영지를 몰수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젊은 나이의 요도가 간택되어 14대 번주 도요아쓰의 양자가 되는 형식으로 번주 자리에 올랐다. 도요아쓰에게는 친동생 구마고로(훗날 16대 번주)가 있었으나 당시 3살이었기 때문에, 구마고로가 성장할 때까지 요도가 임시로 번주직을 수행하게 되었다.[1]
3. 영주 취임 초기
가에이 원년(1848년) 12월 27일, 도요노부는 고치를 출발하여 다음 달 21일에 에도에 도착, 같은 달 26일에 가독 상속을 막부로부터 허가받았다. 13대 번주였던 山内豊熙(야마우치 토요히로)가 사망하고, 그의 친동생인 山内豊惇(야마우치 토요준)이 뒤를 이었으나 10여 일 만에 급사하면서 야마우치 가문은 몰락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요노부가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번주에 취임할 수 있었다.[3]
하지만 번주 취임 초기, 은거 중이던 도요스케(豊資)가 건재했고, 번의 보수적인 중신들은 도요노부(豊信)의 일상을 감시했다. 번정에서도 도요노부는 스스로 중심이 되어 정책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후, 1853년 페리가 우라가에 입항하자, 요시노부(豊信)는 이 소식을 듣고 성에 중신들을 소집하여 의견서 작성을 진행했다. 이 의견서를 기초한 사람은 당시 학식으로 명성이 높았던 요시다 도요였다.
요도는 요시다 도요를 등용하여 번정 개혁을 추진했다. 요시다 도요는 '신오코제구미(新おこぜ組)'를 발탁하여 서양식 군비를 갖추고 해상 방위력을 높이는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재정 개혁을 서두르고, 나가사키에 번사들을 보내 서양식 학교에서 공부하게 하는 등 서양 문물에 정통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신분제를 완화하고 문무 관직을 새로 정비하는 개혁도 추진했다.
그러나 요시다 도요는 에도에 참근교대로 파견 갔다가 야마우치 집안의 인척이자 막부의 하타모토였던 마쓰시타 가헤이와 갈등을 일으켜 실각했다. 이후, 요시다 도요의 양자인 고토 쇼지로와 신오코제 구미의 중진이었던 후쿠오카 다카치카가 번정 개혁을 이어갔다.
4. 안세이 대옥
1858년(안세이 5년),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사현후 등은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이이 나오스케는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차기 쇼군으로 밀었다. 결국 이이 나오스케가 승리하여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되었다.
사현후들은 반발했고, 특히 도요시게는 이듬해 1859년 2월 은퇴 사직서를 제출하고 33세 나이에 은거했다. 이이 나오스케는 사현후 모두에게 근신 처분을 내렸고, 요시다 쇼인 등 많은 정치사상범들이 처형되었다. 이를 안세이 대옥이라 한다.[1]
5. 은거 후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1862년, 다케치 즈이잔을 중심으로 도사근왕당이 결성되어 요시다 도요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42] 요도는 도사근왕당을 인정하고 다케치 즈이잔의 신분을 상급 무사(上士)로 올려주기까지 했지만, 1863년 8월 18일의 정변 이후 공무합체파 귀족들과 사쓰마 번을 등에 업고 도사근왕당을 탄압하고 다케치 즈이잔을 처형했다.[42] 이후 요도는 교토 조정으로부터 참예(参預)직을 제안받았으나, 병을 이유로 사퇴했다.
1866년, 사카모토 료마 등의 중개로 삿초 동맹이 체결되자, 요도는 고토 쇼지로를 보내 이후 도막군(막부 타도군) 결성에 조슈 번, 사쓰마 번과 함께 참여했다. 1867년에는 사쓰마 번 주도로 설치된 사후회의에 참가했지만, 막부 권력 축소를 꾀하는 사쓰마 번의 주도를 싫어하여 결석을 계속했고 결국 이 회의는 단기간에 붕괴되었다.
5. 1. 삿초 동맹과 대정봉환
1867년, 요도는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동맹(삿초 동맹) 체결을 인지하고, 고토 쇼지로를 통해 도막군 결성에 참여했다.[1] 같은 해, 사쓰마 번 주도로 열린 사후회의에 참여했으나, 사쓰마 번 주도의 막부 권력 축소 움직임에 반발하여 회의는 결렬되었다.[1] 이후 사쓰마 번과 도사 번은 막부 토벌 대신 대정봉환을 추진하기로 합의(삿도맹약)했고, 요도는 이를 통해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시도했다.[1] 요도는 사카모토 료마의 '선중팔책'을 바탕으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대정봉환, 즉 천황에게 정권을 반환할 것을 건의했고, 요시노부는 같은 해에 이를 실행했다.[1]
6. 메이지 유신과 요도
1867년 음력 12월 9일, 황궁에서 열린 궁전회의(小御所会議)에서 요도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회의 참여를 주장하며 막부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요도는 이와쿠라 도모미 등 존왕양이파 귀족들이 막부 해체를 주도했다며 비판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평화적 정권 교체의 1등 공신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사관납지(辞官納地, 쇼군이 관직을 사퇴하고 막부 직할지를 국유지로 전환하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번들은 영지를 그대로 유지하는데 왜 막부만 빈사상태로 만드냐며 항의했다. 요도는 앞으로 일본의 정치적 구심점이 될 열후회의(列侯会議)는 도쿠가와 가문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43] 마쓰다이라 슌가쿠도 이에 동조했으나, 회의는 결국 막부 타도파의 의견대로 흘러갔다.[44][45][46][47][48][49][50]
1868년 음력 1월 3일, 도바·후시미 전투가 발발하자 요도는 도사 번 병력에게 전투에 가담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상경(上京)한 도사 번 병력은 요도의 명령을 무시하고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막부 측을 공격했다.
1868년 음력 1월 7일, 요도는 사이고 다카모리로부터 '막부 타도의 전투가 임박했다'는 밀서를 받았고, 가신인 다니 다테키로부터 이미 개전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2년 전 맺었던 삿도밀약에 따라 진쇼타이(迅衝隊)를 이끌고 상경했다. 요도는 교토 전투를 마치고 신정부군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는 진쇼타이 부대원들에게 '자중자애(自重自愛)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7. 유신 후 만년
메이지 신정부가 구성되자 야마우치 요도는 내국사무총재 자리를 받았다. 그러나 유신 후 신분제가 철폐되어 가신 및 백성과 신분 차이가 없어짐에 실망하여 이듬해 자진 사퇴했다.[1] 한편 메이지 유신의 1등 공신인 기도 다카요시와는 죽이 맞아 자신의 도쿄 저택에 자주 초대했다. 메이지 유신까지의 추억을 나누고 술잔을 기울이며 앞으로 신정부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대해 견해를 나누기도 했다. 요도는 원래 에도의 도사 번저를 나와 새로 도쿄 하코사키(箱崎)의 옛 다야스 도쿠가와 가(田安徳川家)의 별장을 사서 이주했다.
1872년(메이지 5년) 다년간의 과음으로 뇌일혈을 일으켜 곧 서거했다. 향년 46세였다.[6] 묘소는 에도의 도사 번저(土佐藩下屋敷) 터인 도쿄도 시나가와구 오이 공원(大井公園)이다.[7]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유신 전후 경력담」에서 요도에 대해, “유신 후 불평으로 술을 마시고 게이샤를 첩으로 삼았지만, 본래는 신중한 사람이었다”라며 말년의 모습을 아쉬워하는 발언을 했다.[6]
8. 평가
야마우치 요도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요도를 "타고난 기질이 웅장하고, 참으로 영웅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라고 평가하며, 문학, 시, 서예, 그림 등 다방면에 능숙하여 노련한 유학자나 장인들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고 칭찬했다.[32] 이타가키 타이스케는 요도가 "모든 것이 비범"하고 "사소한 것에 구애받지 않는 영웅 호걸의 기질"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또한 요도가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요시다 도요를 등용한 사례를 통해 그의 인재 등용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33]
하지만 요도는 자신을 “경해취후(鯨海酔侯)”라 칭하며 술을 즐기고 감정에 휘둘려 의견을 자주 바꾸는 등 세상을 등진 사람 같은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은거 방에 “취옹미인루(酔擁美人樓)”라는 편액을 걸어 둔 일화는 다이묘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는데, 모리 케이친(毛利敬親)은 이를 두고 요도가 스스로 영웅을 가장하는 것이라 평하기도 했다.[31]
8. 1. 긍정적 평가
- 26세에 요시다 도요를 발탁하여 참정직에 임명하고, 서양 군비 채용, 해방 강화, 재정 개혁, 번사(藩士)의 나가사키 유학, 신분 제도 개혁, 문무관 설립에 의한 학문 장려 등 번정 개혁을 단행했다.[31]
- 무예에 뛰어나, 군학은 호조류(北条流), 궁술은 요시다류, 마술은 오쓰보류(大坪流), 창술은 이심류(以心流), 검술은 무외류(無外流), 이합술은 14세에 하세가와류(長谷川流)를 배우고 18세에 목록(目録)을 얻었다. 특히 이합의 실력은 엄청났다.[31]
- 한시(漢詩)는 미누라 만지로(箕浦万次郎)에게, 문장은 마쓰오카 키켄(松岡毅軒)에게 배웠다.[31]
- 혁신파 인사들과 교류가 잦았으며, 수도파(水戸派)의 대표적인 학자인 후지타 도코(藤田東湖)의 조언에 깊이 공감하여 자신의 호를 “용당(容堂)”으로 고쳤다.[31]
- 모리 케이친(毛利敬親) 등 장주번(長州藩) 관계자들과 교류가 있었다.[31]
- 영국 외교관 미드포드는 요도 공을 “50년 전 영국의 정치가와 비슷하여 방종한 쾌락주의자였다”라고 회고했다.[31]
8. 2. 부정적 평가
- 오쿠마 시게노부는 "제멋대로 하고 술을 많이 마시고, 기생을 불러 시끄럽게 하는 난폭자라면 토사의 요도공 정도였을 것이다"라고 평가했으며,[34] "언행은 매우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다"라고도 말했다.[35]
- 미우라 고로는 야마우치 요도를 "호탕한 기질로, 꽤 난폭한 일도 하고, 난폭한 말도 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미우라 고로는 1871년 10월, 이와쿠라 도모미나 기도 다카요시 등의 해외 여행 환송회에서 요도가 하치스카 시게나가에게 "도둑의 자손 주제에, 건방진 말을 하지 마라"라고 고함을 질렀던 일화를 소개하며, 기도 다카요시도 "야마우치 요도라는 사람은, 끔찍한 말을 하는 사람이다"라며 놀랐다고 전했다.
9. 기타
야마우치 요도는 술을 좋아하고 호방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에도에 아야세 초당(綾瀬草堂)이라는 별장을 짓고 십수 명의 첩과 함께 술과 시를 즐기며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료고쿠(両国)・야나기바시(柳橋) 등을 주유하며 가산을 탕진했는데, 가신들의 충언에도 "일찍이 다이묘가 파산한 전례가 없었다. 내가 선례를 남겨주마"라고 호언장담하며 막무가내였다고 한다.[54]
메이지 유신 이후 요도는 8월 18일 정변 때 다케치 즈이잔을 죽여 도사 번에 삿초 양번 세력(번벌)을 대적할 인물이 없어졌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요도의 생애는 여러 작품에서 다뤄졌다. 2010년 NHK 대하드라마 료마전에서는 노년의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실제 요도의 나이는 다케치 즈이잔보다 불과 2살 위로, 작품의 배경이 된 막말에서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30대 말에서 40대 초였다.
요도를 다룬 작품은 다음과 같다.
'''서적'''
- 취해서 뵙겠습니다(시마 료타로 문예춘추)
- 괴해취후 산내용당(요시무라 슈크호 신초사, 중앙공론신사)
- 막말무뢰 산내용당(시마모토 마사히코 총문사) 만화
- 어이! 료마(다케다 테츠야&코야마 유 쇼가쿠칸)
- 냐옹냐옹 일본사(소니시 켄지 지쓰교노니혼샤)
'''영상 작품'''
작품명 | 방송사 | 방영 연도 | 배우 |
---|---|---|---|
만화 일본사 (일본TV) | 일본TV | 스즈키 야스아키(鈴木泰明) | |
오~이! 료마 | NHK 종합 | 1992년 | 에하라 마사시(江原正士) |
용과 같이 維新! | 요시다 히로아키 | ||
료마가 유쿠 | NHK 대하드라마 | 1968년 | 토쿠다이지 신 |
천황의 세기 | 아사히 방송 | 1971년 | 칸세 에이후 |
카츠 가이슈 | NHK 대하드라마 | 1974년 | 우스이 마사아키 |
료마가 유쿠 | TV 도쿄 | 1982년 | 쿠로카와 야타로 |
막말 청춘 그라피티 사카모토 료마 | 니혼 TV | 1982년 | 비트 타케시 |
타하라사카 | 니혼 TV | 1987년 | 야마다 고이치 |
사카모토 료마 | TBS | 1989년 | 와카바야시 고 |
쇼부가 고토쿠 | NHK 대하드라마 | 1990년 | 아라시 케이시 |
도쿠가와 요시노부 | NHK 대하드라마 | 1998년 | 시오야 슌 |
료마가 유쿠 | TV 도쿄 | 2004년 | 우카지 고지 |
아츠히메 | NHK 대하드라마 | 2008년 | 이마 타쿠야 |
료마전 | NHK 대하드라마 | 2010년 | 콘도 마사오미 |
야에의 벚꽃 | NHK 대하드라마 | 2013년 | 타나카 류조 |
사이고돈 | NHK 대하드라마 | 2018년 | 오타카 아키라 |
청천을 꿰뚫어 | NHK 대하드라마 | 2021년 | 미즈카미 류지 |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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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でうっぷんを晴らす…幕末の英雄が迎えた「46歳のあっけない最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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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했소이다(『酔って候』, 욧떼소로)
분슌분코우(文春文庫)
2003-10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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