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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데사 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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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데사 백국은 1098년 제1차 십자군 지도자 보두앵 1세가 에데사를 점령하면서 건국된 최초의 십자군 국가이다. 보두앵 1세는 에데사의 영주 토로스를 설득하여 후계자가 되었으나, 토로스가 암살당한 후 백작이 되었다. 이후 보두앵 1세가 예루살렘 왕국을 건국하면서 사촌 보두앵 2세에게 백작위가 계승되었고, 초기 백작들은 아르메니아인과 결혼하는 등 아르메니아인과의 관계가 깊었다. 하란 전투에서의 패배, 무슬림 세력과의 잦은 전쟁, 조슬랭 2세의 무능함 등으로 인해 1144년 에데사가 함락되고, 1150년 조슬랭 2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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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8년 제1차 십자군 전쟁 중 보에몽 1세가 시리아 북부 안티오키아를 수도로 건국한 십자군 국가인 안티오키아 공국은 비잔티움 제국과 경쟁하며 영토를 확장했으나 맘루크 왕조의 침략으로 1268년 멸망, 이후 내분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속국이 되었다.
에데사 백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일반 명칭에데사
존속 기간1098년 – 1144년
국가 지위십자군 국가
수도에데사 (1098년–1144년; 1146년) (현재의 튀르키예 샨르우르파)
투르베셀 (1144년–1146년; 1146년–1150년) (현재의 튀르키예 가지안테프 오우젤리)
공용어라틴어 (공식/의례)
고대 프랑스어 (대중적)
시리아어 (대중적)
이탈리아어
아르메니아어
아랍어
그리스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공식)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동방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이슬람교
유대교 (대중적)
정치 체제봉건 군주제
현재 국가시리아
튀르키예
문장 설명불로뉴 가문과 쿠르트네 가문의 문장
지도 설명1131년 이전 에데사 백국의 확장
역사
이전 국가토로스 치하의 에데사
계승 국가셀주크 제국
후계 국가장기 토후국
콤네노스의 비잔티움 제국
주요 사건제1차 십자군 (1096년–1099년)
건국 (1098년)
누르 앗 딘에게 정복, 나머지는 마누엘 1세 콤네노스에게 매각 (1144년)
통치자
초대 백작보두앵 1세 (1098년–1100년)
마지막 백작조슬랭 2세 (1131년–1150년)
통치자 칭호에데사 백작

2. 에데사 백국의 성립

1098년 제1차 십자군 원정 중 보두앵 드 불로뉴가 에데사 지역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에데사 백국이 건국되었다. 보두앵은 에데사의 영주 토로스를 설득하여 자신을 양자이자 후계자로 삼게 한 후, 시민 폭동으로 토로스가 암살되자 그의 뒤를 이어 에데사 백작이 되었다.

1100년 보두앵의 형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사망하자, 보두앵은 예루살렘 왕 보두앵 1세가 되었고, 에데사 백국은 사촌인 보두앵 2세에게 넘어갔다. 이후 1118년 또는 1119년에는 조슬랭 1세가 백작위를 계승했다.

초기 에데사 백작들은 주변 아르메니아인 군주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이들과 빈번하게 결혼했다. 보두앵 1세는 킬리키아 왕국의 콘스탄틴 1세의 손녀와, 보두앵 2세는 말라티아 영주의 딸과, 조슬랭 1세는 콘스탄틴 1세의 딸과 결혼했다.

2. 1. 건국 과정

1098년 제1차 십자군의 지도자 중 한 명인 보두앵 드 불로뉴안티오키아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십자군 본대에서 이탈하여 킬리키아를 거쳐 에데사로 원정을 갔다. 토로스는 모술의 케르보가를 비롯한 셀주크 왕조의 튀르크계 세력으로부터 도시를 지켜달라고 요청하며 보두앵을 에데사로 불렀다.

보두앵 1세가 1098년 2월 에데사에 입성하는 장면. 아르메니아인 성직자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보호 아래에서 해방된 것을 축하하며 맞이하고 있다.
(그림)조제프 니콜라 로베르 플뢰리


1098년 2월 6일, 에데사에 도착한 보두앵은 토로스를 설득하여 자신의 양자이자 후계자로 삼는 데 성공했다. 토로스는 동방 정교회 신자였으나,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믿는 주민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토로스는 양자 의식 후 며칠 뒤 시민 폭동으로 암살되었는데, 보두앵이 이 사건에 관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1098년 3월 10일, 보두앵은 토로스의 뒤를 이어 에데사 통치자가 되었고, 백작임을 선언하여 에데사 백국이 건국되었다.

2. 2. 초기 통치자들

제1차 십자군 당시, 보두앵 1세는 안티오키아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십자군 본대를 떠나 킬리키아를 거쳐 에데사로 갔다. 1098년 에데사에서 토로스를 설득하여 자신을 양자이자 후계자로 삼게 하였다. 토로스는 동방정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아르메니아 정교를 믿는 주민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얼마 뒤 폭동으로 암살당했다. 보두앵은 토로스의 뒤를 이어 에데사 백작이 되었다.

1100년 성묘의 수호자이던 형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죽자 보두앵은 예루살렘 왕 보두앵 1세가 되었고, 에데사 백국은 사촌인 보두앵 2세에게 물려주었다. 1118년 또는 1119년에는 유프라테스 강변 투르베셀의 영주였던 조슬랭 1세가 백작위를 계승했다.

초대 백작 3명은 모두 아르메니아인과 결혼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보두앵 1세는 킬리키아 왕국의 콘스탄틴 1세의 손녀 알다와, 보두앵 2세는 마라티아 영주의 딸 모르피아와, 조슬랭 1세는 콘스탄틴 1세의 딸과 결혼했다.

2. 3. 초기 십자군 국가들과의 관계

에데사 백작들은 주변의 아르메니아계 군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빈번하게 혼인 관계를 맺었다. 초대 백작 보두앵 1세는 아내가 죽자 킬리키아 왕국(소 아르메니아) 왕가의 군주 콘스탄틴 1세(재위: 1095년~1099년)의 손녀 알다와 결혼했다. 보두앵 2세말라티아 도시의 영주 가브리엘의 딸 모피아와 결혼했고, 조슬랭 1세는 콘스탄틴 1세의 딸과 결혼했다. 이러한 혼인 관계는 에데사 백국이 주변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 기여했다.

또한, 에데사 백국은 안티오키아 공국, 예루살렘 왕국 등 다른 십자군 국가들과도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보두앵 1세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되면서 에데사 백국은 보두앵 2세에게, 이후에는 조슬랭 1세에게 계승되었다.

3. 무슬림과의 전쟁

에데사 백국은 건국 초기부터 모술, 알레포 등 주변 이슬람 세력과 끊임없이 분쟁을 겪었다. 1104년 하란 전투에서 보두앵 2세와 에데사의 조슬랭 1세가 포로로 잡히는 등[1] 어려움을 겪었다. 1110년 유프라테스 강 동쪽 영토를 상실한 이후에는 이슬람 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에데사 자체에 대한 공격은 뜸해졌다.[1] 1122년 에데사의 조슬랭 1세와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아르투크 왕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고 석방되는 사건이 있었다.[1]

3. 1. 주요 전투 및 사건

연도사건설명
1104년하란 전투에데사 백국이 모술마르딘의 무슬림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보두앵 2세와 조슬랭 1세가 포로로 잡혔다.[1] 이 전투로 에데사는 셀주크 투르크의 분열을 틈타 모술과 바그다드로 가는 길을 장악하려던 계획이 좌절되었다.
1110년유프라테스 강 동쪽 영토 상실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모든 영토를 모술에게 빼앗겼다.[1]
1122년조슬랭 1세 포로조슬랭 1세가 알레포의 지방정권 아르투크 왕조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1]
1144년에데사 공방전장기가 이끄는 셀주크 투르크 세력에게 에데사가 함락되었다. 에데사 시민들은 공성전 경험이 부족했고, 결국 성벽이 무너지면서 함락되었다. 이 사건은 제2차 십자군의 원인이 되었다.
1146년에데사 재탈환 시도 실패장기 사후 조슬랭 2세가 에데사 탈환을 시도했으나, 누르 앗 딘에게 다시 함락되었다.


3. 2. 이슬람 세력과의 관계

초기 에데사 백국은 다니슈멘드 왕조, 아르투크 왕조 등 여러 이슬람 세력과 대립하거나 동맹을 맺는 관계를 반복했다. 1103년, 보두앵 2세는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1세를 다니슈멘드 왕조로부터 구출하는 것을 지원했고[1], 1104년에는 안티오키아 공국과 함께 킬리키아에서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다. 같은 해, 에데사는 모술의 공격을 받았고, 하란 전투에서 패배한 보두앵 2세와 조슬랭은 포로로 잡혔다.[1] 1108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보두앵 2세는 에데사의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갈릴리 공작 탕크레드와 싸워야 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무슬림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기도 했다.[1]

1110년,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모든 영토는 모술의 마우두드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마우두드는 십자군 축출보다는 자신의 세력 강화에 더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에데사 자체에 대한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1122년, 에데사의 조슬랭 1세는 알레포아르투크 왕조의 아타베크(영주) 바라크에게 패배해 포로가 되었고, 그를 구하러 온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 역시 포로로 잡혔다. 1123년, 조슬랭은 탈출에 성공했고, 1124년에는 보두앵 2세의 석방을 얻어냈다.

4. 백국의 몰락

1131년 에데사의 조슬랭 1세가 사망하고 에데사의 조슬랭 2세가 백작위를 계승했다. 이 무렵 장기가 알레포모술을 통합하여 에데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1]

1144년 에데사 함락 이후, 에데사 백국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1146년 장기의 사망을 틈타 조슬랭 2세가 에데사를 일시적으로 탈환했으나, 같은 해 11월 누르 앗 딘에게 다시 빼앗겼다.[1] 조슬랭 2세는 1150년 누르 앗 딘에게 사로잡혀 알레포에 감금되었고, 1159년 사망했다.[1]

조슬랭 2세 사후, 그의 아내는 남은 영토를 비잔티움 제국의 마누엘 1세 콤네누스에게 팔았으나, 이마저도 1159년 누르 앗 딘과 룸 술탄국에게 점령당했다.[1] 이로써 최초의 십자군 국가였던 에데사 백국은 가장 먼저 멸망했다.[1]

4. 1. 몰락 원인

에데사의 조슬랭 2세는 알레포모술을 통합한 장기의 위협이 커지는 상황에서 외교적 실책을 범했다. 트리폴리 백국과의 분쟁으로 지원을 받지 못했고, 안티오키아 공국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비잔티움 제국과 예루살렘 왕국 역시 요한네스 2세 콤네누스와 예루살렘의 풀크 사후 불안정한 상황이었다.[1]

1144년, 조슬랭 2세는 아르투크 왕조와 연합하여 에데사를 비웠고, 장기는 이 틈을 타 에데사를 포위 공격했다. 에데사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지만, 시민들은 공성전 경험이 부족하여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 결국 1144년 12월 24일, 장기는 에데사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시를 함락시켰다.[1]

이 사건은 제2차 십자군의 원인이 되었으며, 무슬림 세계에서는 지하드의 시작으로 여겨졌다. 조슬랭 2세는 에데사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150년 누르 앗 딘에게 사로잡혀 1159년 사망할 때까지 알레포에 감금되었다.[1] 그의 사후 에데사 백국의 남은 영토는 비잔티움 제국에 매각되었으나, 곧 누르 앗 딘과 룸 술탄국에 의해 점령되었다.[1]

4. 2. 몰락 과정

1131년 조슬랭 1세가 사망하면서, 조슬랭 2세가 에데사 백국의 군주가 되었다. 이 무렵 알레포모술을 통합한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에데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조슬랭 2세는 장기의 위협이 커지는 상황에서도 자국의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트리폴리 백국과의 분쟁에 몰두했다.

1144년, 조슬랭 2세는 안티오키아 공국 및 트리폴리 백국과의 불화, 비잔티움 제국과 예루살렘 왕국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디야르바크르의 아르투크 왕조와 동맹을 맺었다. 같은 해 가을, 조슬랭 2세는 전군을 이끌고 에데사 서쪽 투르베셀까지 약탈전을 나섰고, 이 소식을 들은 장기는 즉시 에데사를 포위했다. 에데사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나, 시민들은 공성전 경험이 부족했고, 결국 12월 24일 장기 군대에 의해 성벽이 무너졌다. 장기는 12월 26일 도시를 점령했고, 서양인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은 제2차 십자군의 원인이 되었고, 무슬림 세계에서는 지하드의 시작으로 여겨졌다.[1]

조슬랭 2세는 투르베셀에서 유프라테스 서쪽 영토를 통치하며 에데사 회복을 시도했다. 1146년 9월 장기가 급사하자 에데사를 일시적으로 탈환했으나,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의 공격으로 11월에 다시 함락되었다. 조슬랭 2세는 간신히 도망쳤으나, 1150년 누르 앗 딘에게 포로로 잡혀 알레포에 감금되었고, 1159년 그곳에서 사망했다.[1]

조슬랭 2세의 사후, 그의 아내는 남은 영토를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에게 매각했으나, 이 영토는 곧 1159년 누르 앗 딘과 룸 술탄국에게 점령되었다. 이로써 최초의 십자군 국가였던 에데사 백국은 멸망했다.[1]

5. 에데사 백작의 목록

이름재위 기간비고
보두앵 1세1098년 ~ 1100년
보두앵 2세1100년 ~ 1118년
탕크레드1104년 ~ 1108년섭정, 살레르노의 리처드 총독
조슬랭 1세1118년 ~ 1131년
조슬랭 2세1131년 ~ 1149년1159년 사망
조슬랭 3세1159년 ~명의만 백작


6. 인구와 구성

에데사는 십자군 국가 중 영토가 가장 넓었지만, 인구는 가장 적었다. 에데사 시 자체에는 약 10,000명의 주민이 거주했다. 백국의 나머지 지역은 주로 요새와 농촌으로 구성되었다.[1] 주민은 대부분 시리아 정교회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였으며, 일부 동방 정교회 신자와 아랍 무슬림도 있었다. 서양인(라틴족) 수는 적었지만, 에데사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 대주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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