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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키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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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티오키아 공국은 제1차 십자군 이후 1098년 보에몽 1세에 의해 건국된 십자군 국가이다. 초기에는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후 공국을 건설하고 예루살렘 공략 대신 공국 확립에 힘썼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과의 갈등, 이슬람 세력의 공격,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간섭 등을 겪으며 쇠퇴했다. 1268년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에 의해 멸망하면서 동지중해 최대 도시였던 안티오키아는 폐허로 변했다. 안티오키아 공국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였으며, 예루살렘 왕국,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국 등 다른 십자군 국가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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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키아 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정식 명칭안티오키아 공국
고유 명칭Principatus Antiochenus (라틴어)
Princeté de Antioch (노르만 프랑스어)
시대중세
지위비잔티움 제국의 봉신 (1138년–1153년, 1159년–1183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봉신 (1254년–1260년)
일 칸국의 봉신 (1260년–1268년)
건국제1차 십자군 (1098년)
멸망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에게 정복 (1268년)
안티오키아 공국의 깃발
푸아티에-안티오크 가문의 문장에서 파생된 깃발
1135년 [[서아시아]] 국가들의 맥락에서 안티오키아 공국
1135년 서아시아에서 안티오키아 공국의 위치
수도안티오키아 (현재의 튀르키예 하타이 주 안타키아)
공용어중세 라틴어
고대 노르만어
고대 프랑스어
아르메니아어
아람어
그리스어
아랍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지배 계층 및 귀족)
동방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소수)
정치 체제봉건 군주제
통치자
보에몽 1세 (1098년–1111년, 초대 공)
보에몽 6세 (1252년–1268년, 마지막 공)
입법부
역사
이전 국가셀주크 제국
룸 술탄국
이후 국가맘루크 술탄국
킬리스 에미리트
현재 국가

2. 역사

안티오키아 공국은 제1차 십자군 원정 중 1098년 안티오키아 공방전 이후 남이탈리아 출신 노르만족 지도자 보에몽 1세가 세운 십자군 국가이다. 건국 초기에는 보에몽 1세와 탕크레드 등의 지도 아래 영토를 확장했으나, 주변 무슬림 세력 및 비잔티움 제국과의 끊임없는 충돌과 내부 지도력 공백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겪었다.

12세기 중반에는 예루살렘 왕국의 보호를 받거나 비잔티움 제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이며 봉신국과 같은 지위에 놓이기도 했다. 특히 르노 드 샤티용의 통치 시기는 비잔티움과의 관계 변화가 두드러졌다.

1180년 비잔티움 제국의 보호가 사라진 후 공국은 점차 쇠퇴하였다. 내부적으로는 계승 분쟁이 발생했고, 외부적으로는 살라딘의 등장과 같은 주변 정세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13세기에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과의 관계가 중요해졌으며, 훗날 몽골 제국과 동맹을 맺기도 했으나 맘루크 왕조와의 대립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겪었다. 결국 1268년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 수도 안티오키아가 함락되면서 공국은 멸망했다.

2. 1. 공국의 성립과 초기 발전 (1098년-1130년)

thumb, 중세 미니어처 그림]]

제1차 십자군 원정 이전 안티오키아셀주크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투르크인 총독 야기 시얀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셀주크 정복 이전부터 그리스인 주민이 많았기에, 동로마 제국은 이곳을 제국 고유의 영토로 간주하고[16] 셀주크로부터 회복하기를 원했다. 제1차 십자군의 본대는 1097년 10월 말, 400개가 넘는 탑으로 방어된 견고한 요새 도시 안티오키아에 대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1]

포위 공격 중 남이탈리아 출신 노르만족 귀족인 타란토의 보에몽은 도시의 소유권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1098년 6월 3일, 반년간의 포위 끝에 보에몽은 피루즈라는 아르메니아인 출신 탑 경비병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1] 점령 직후, 오랜 공성전에 지친 십자군은 성내의 무슬림 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동전, 1112–1119, 성 게오르기우스 기마상.


함락된 지 불과 4일 후, 모술의 아타베그 케르보가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가 도착하여 도시를 탈환하기 위해 역으로 십자군을 포위했다.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을 지원하러 출정했으나, 안티오키아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잘못된 정보를 듣고 회군했다.[1]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베드로 바르톨로뮤라는 수도사가 성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십자군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1] 1098년 6월 28일, 보에몽이 이끄는 십자군은 성 밖으로 나가 케르보가의 군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에는 케르보가에 대한 내부 불만으로 일부 이슬람 지휘관들이 전투를 소극적으로 임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1]

승리 이후 안티오키아의 지배권을 놓고 십자군 지도자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툴루즈의 레몽 4세는 도시를 비잔티움 황제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보에몽은 황제가 약속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으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했던 충성 맹세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도시를 차지했다. 보에몽과 그의 이탈리아 노르만 세력은 결국 지배권을 확보했고, 보에몽은 독자적인 공작 지위에 올라 보에몽 1세로서 안티오키아 공국을 세웠다. 그는 십자군의 본래 목표였던 예루살렘 공략에는 참여하지 않고 안티오키아 공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1]

1100년, 보에몽 1세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다니슈멘드 왕조와의 멜리테네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의 조카 탕크레드가 공국의 섭정이 되어 통치했다. 탕크레드는 이 기간 동안 공국의 영토를 확장하여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킬리키아타르수스와 항구 도시 라타키아를 점령했다.

보에몽 1세는 몸값을 지불하고 1103년 풀려났으나, 1104년 더 많은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나면서 다시 탕크레드를 섭정으로 남겼다. 1107년 보에몽은 새로 모은 군대로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했으나, 1108년 두라초(현재 알바니아두러스) 근처에서 알렉시오스 1세에게 패배하고 데볼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 조약은 보에몽이 죽으면 안티오키아 공국이 비잔티움 제국의 봉신국이 되고, 과거 점령했던 제국 영토를 반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보에몽은 또한 에데사 백국보두앵 2세 및 에데사의 조슬랭 1세와 함께 알레포 인근에서 싸웠으나, 보두앵과 조슬랭이 이슬람 군대에 포로로 잡히자 탕크레드가 에데사 백국의 섭정까지 겸하게 되었다. 보에몽은 1111년 이탈리아로 돌아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보에몽 1세가 사망하자 알렉시오스 1세는 데볼 조약의 이행을 요구하며 탕크레드에게 안티오키아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탕크레드는 트리폴리 백국, 예루살렘 왕국 등 다른 십자군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탕크레드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실질적인 기반을 다졌으나 1112년 사망했다.

탕크레드의 뒤를 이어 그의 조카인 살레르노의 로저가 보에몽 1세의 어린 아들 보에몽 2세의 섭정이 되었다. 로저는 1113년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1115년 텔 다니트 전투에서 무슬림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는 등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다. 그러나 1119년 6월 27일, 로저는 ''아게르 상구이니스 전투''(피의 들판)에서 이슬람 군대에게 참패하고 전사했다.

로저의 죽음으로 안티오키아는 다시 지도자 공백 상태에 빠졌고, 예루살렘 왕국보두앵 2세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안티오키아는 1126년까지 사실상 예루살렘 왕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보두앵 2세는 이 기간 중 상당 부분을 이슬람 세력의 포로로 지냈다).

1126년 성년이 된 보에몽 2세가 동방으로 와서 섭정 보두앵 2세의 딸 알리스와 결혼하고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1127년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 1세와 영토 분쟁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보에몽 2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고, 불과 4년 만인 1130년 전투 중 사망했다. 공국은 그의 어린 딸 콩스탕스에게 상속되었고, 보두앵 2세가 다시 섭정을 맡게 되었다(그가 1131년 사망할 때까지). 이처럼 잦은 지도자의 교체와 외부 세력의 간섭은 시리아 북부에서 안티오키아 공국의 초기 영향력을 점차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2]

2. 2. 예루살렘 왕국의 영향과 비잔티움의 간섭 (1130년-1163년)

1119년 살레르노의 로제(루지에로)가 아게르 상구이니스 전투에서 전사한 후, 안티오키아 공국은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2세 국왕이 섭정을 맡게 되면서 사실상 예루살렘 왕국의 보호국 상태가 되었다.[11]

1126년 보에몽 1세의 아들인 보에몽 2세가 공위에 올랐으나, 1130년 소아시아 공략 중 다네시멘드 왕조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사망 후, 미망인이자 보두앵 2세의 딸인 아리크스가 안티오키아의 여공이 되어 통치하려 했다. 그녀는 당시 알레포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무슬림 군주 장기와 동맹을 맺으려 시도했으나, 아버지 보두앵 2세는 이에 반대하여 안티오키아를 장악하고 딸을 라타키아로 추방했다. 이로 인해 안티오키아 공국은 다시 예루살렘 왕(1131년부터는 풀크)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12]

1131년 보두앵 2세가 사망하자 예루살렘의 풀크가 섭정을 이어받았다. 풀크는 1136년 당시 10세였던 공국의 정식 계승자 콩스탕스를 36세의 레이몽 드 푸아티에와 결혼시켜 공위를 잇게 함으로써, 콩스탕스의 어머니 아리크스의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 오론테스강 동안의 영토는 이미 장기에게 정복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1138년, 비잔티움 제국 황제 요한네스 2세 콤네노스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안티오키아를 포위했다. 레이몽은 황제에게 신종을 맹세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 연합군이 무슬림 세력 하의 시리아를 공격하는 공동 작전이 펼쳐졌다. 알레포는 공략하기 어려웠으나 발라트, 비자아, 아테렙, 마라트 알-누만, 카파르타브 등의 요새를 점령했다.[4] 샤이저 포위전 당시 레이몽 공과 에데사의 조슬랭 2세 백작은 전투를 돕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샤이저의 아미르가 항복하고 배상금 지불과 조공을 약속하자 황제는 이를 수락했다.[4] 그러나 안티오키아로 귀환한 후, 에데사의 조슬랭 2세가 선동한 폭동으로 인해 황제는 안티오키아 성채를 확보하지 못한 채 철수해야 했다. 요한네스 2세는 모든 십자군 국가를 복속시키려 했으나 1143년 사망하면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1144년 에데사 백국이 장기에게 함락되면서( 에데사 포위전 ), 안티오키아 공국은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1146년 장기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누르 앗딘이 장기 왕조를 계승하여 안티오키아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파견된 제2차 십자군 ( 1148년 )은 안티오키아나 에데사가 아닌 다마스쿠스로 향했다가 별다른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났다. 결국 1149년, 레이몽 공은 이납 전투에서 누르 앗딘에게 패배하여 전사했고, 이 전투의 결과로 안티오키아 공국은 동쪽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레이몽 사후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가 명목상 섭정을 맡았으며, 1153년 레이몽의 미망인 콩스탕스가 샤티용의 레날드와 재혼했다. 레날드는 곧 비잔티움 제국과 충돌했는데, 특히 키프로스를 공격했다. 1158년 레날드는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이듬해 마누엘 황제가 직접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여 공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로써 안티오키아 공국은 마누엘 1세가 사망하는 1180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사실상 봉신국이 되었다. 비잔티움의 보호는 누르 앗딘의 위협으로부터 안티오키아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동시에 안티오키아는 비잔티움 군대에 병력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1160년 레날드는 무슬림에게 포로로 잡혔고, 섭정권은 안티오크의 라틴 총대주교에게 넘어갔다. (레날드는 1176년까지 풀려나지 못했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편, 마누엘 1세는 콩스탕스의 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와 결혼했지만, 콩스탕스가 명목상의 통치자로 간주되면서 1163년에 폐위되고 그녀의 아들 보에몽 3세가 공위를 계승했다.

2. 3. 르노 드 샤티용의 통치와 비잔티움의 지배 (1153년-1180년)

비잔틴 제국의 보호 아래 있던 안티오키아 공국


1153년, 콘스탄스 여공은 프랑스 출신의 기사 르노 드 샤티용과 결혼했다. 르노는 1147년 시리아에 도착하여 부와 영토를 얻으려는 야심을 가진 인물이었다.[2] 그는 콘스탄스와의 결혼을 통해 안티오키아의 새로운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비잔티움 제국과 충돌을 일으켰다. 르노는 사소한 구실을 빌미로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던 키프로스 섬을 공격하여 농촌, 교회, 수도원을 가리지 않고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 잔혹한 행위로 키프로스는 큰 타격을 입었다.

르노의 키프로스 약탈은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의 분노를 샀고,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1158년 마누엘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오자, 르노는 저항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황제의 진영에 나타나 맨발에 목에 밧줄을 건 초라한 모습으로 용서를 빌었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2] 1159년, 마누엘 1세는 승리한 군주로서 안티오키아에 입성하여 공국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이 사건 이후 안티오키아 공국은 마누엘 1세가 사망하는 1180년까지 사실상 비잔티움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다. 이 관계는 안티오키아에게 비잔티움 군대의 병력 제공 의무를 지우는 대신(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 당시 안티오키아 군대가 비잔티움 군에 합류했다), 누르 앗딘의 위협으로부터 공국을 보호하는 방패막이 되어주기도 했다.[2]

1160년, 르노는 알레포 북부를 약탈하려다 누르 앗딘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의 부재는 안티오키아의 섭정 문제를 야기했다. 콘스탄스 여공은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려 했으나, 공국의 귀족들은 콘스탄스가 아니라 그녀와 전 남편 푸아티에의 레몽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를 지지하며 콘스탄스와 대립했다. 결국 1163년, 콘스탄스는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었고, 아들 보에몽 3세가 새로운 공작으로 즉위했다. 르노는 1176년까지 풀려나지 못했고, 석방된 후에도 안티오키아로 돌아가지 않았다.[2]

보에몽 3세의 이름으로 발행된 동전 (1163–1201)


보에몽 3세는 즉위 직후인 1164년 하림 전투에서 누르 앗딘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의 결과로 오론테스 강이 안티오키아와 알레포 사이의 영구적인 경계선이 되었다.[2] 보에몽 3세는 1165년 안티오키아로 돌아와 마누엘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황제의 조카딸 중 한 명인 테오도라 콤네나와 결혼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가 안티오키아에 다시 자리 잡는 것에 동의했다.[2] 이는 안티오키아가 비잔티움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한편, 마누엘은 콘스탄스의 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와 결혼했다.[2]

안티오키아와 비잔티움 제국의 동맹 관계는 1180년 마누엘 1세 황제가 사망하면서 끝났다. 이로써 안티오키아는 지난 20년간 누르 앗딘과 같은 외부 세력의 개입을 막아주었던 강력한 보호자를 잃게 되었다.[2]

2. 4. 쇠퇴와 멸망 (1180년-1268년)

1180년 비잔티움 제국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가 사망하자 안티오키아는 외부의 강력한 보호자를 잃게 되었다. 이전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안티오키아를 봉신국으로 삼아 이슬람 세력에 대한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었으나, 이제 안티오키아는 독자적으로 외부 위협에 맞서야 했다.

이 시기부터 안티오키아 공국은 십자군 전쟁에서 이전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으며, 내부적으로는 공국의 지배권을 둘러싼 분쟁에 시달렸다. 1187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안티오키아는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함대 지원 덕분에 직접적인 피해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제3차 십자군 전쟁에서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당시 공국은 보에몽 3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의 아들 보에몽 4세는 하틴 전투 이후 트리폴리 백국의 섭정을 맡고 있었다.

1201년 보에몽 3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트리폴리 백작 보에몽 4세와 손자 레몽 루펜 사이에 공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레몽 루펜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지원을 받았다. 보에몽 4세가 1207년에 권력을 장악했지만, 레몽 루펜은 1216년부터 1219년까지 잠시 안티오키아를 통치하기도 했다. 결국 1219년 보에몽 4세가 다시 공작위를 되찾으면서 안티오키아 공국과 트리폴리 백국은 동군 연합 관계가 되었다. 보에몽 4세 사후 보에몽 5세와 보에몽 6세가 뒤를 이었으나, 제5차 십자군, 프리드리히 2세의 제6차 십자군, 프랑스의 루이 9세의 제7차 십자군 등 후대의 십자군 전쟁에서 안티오키아 공국은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1254년, 보에몽 6세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공주 아르메니아의 시빌라와 결혼하며 양국 간의 오랜 권력 투쟁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이 결혼을 계기로 안티오키아는 사실상 킬리키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후 안티오키아는 맘루크 왕조와 몽골 제국 사이의 거대한 충돌에 휘말리게 되었다. 1260년, 장인인 킬리키아의 왕 헤툼 1세의 영향으로 보에몽 6세는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 제국에 복속하여 조공국이 되었다.[13] 보에몽 6세와 헤툼 1세는 몽골군과 함께 시리아 정복에 참여하여 알레포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다.[14]

그러나 1260년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이 이집트 맘루크 군대에 패배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는 몽골에 협력했던 안티오키아를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을 준비했다. 바이바르스는 마침내 1268년 안티오키아를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안티오키아 공성전 (1268년)). 바이바르스는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았다. 이로써 한때 강력했던 안티오키아 공국은 멸망하였다.

당시 아르메니아 필사본 삽화가 토로스 로슬린은 1268년 말라티아 복음서(MS No. 10675)의 간기에서 바이바르스에 의한 안티오키아의 파괴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시기에 위대한 안티오키아는 이집트의 사악한 왕에게 점령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그의 포로가 되었으며, 안티오키아 내의 신성하고 유명한 사원, 하나님의 집은 고통을 받았다. 불에 의해 파괴된 건물들의 놀라운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15]

안티오키아 공국이 멸망한 후, '안티오키아 공'이라는 칭호는 명목상으로만 남아 트리폴리 백작 가문이 단절된 후 키프로스 왕국의 왕들에게 넘어갔고, 때때로 왕가의 젊은 구성원에게 주어지는 명예 칭호로 사용되었다.

3. 역대 군주

wikitext

군주재위 기간비고
보에몽 1세1098년–1111년타란토 공작. 1100년–1103년 포로 상태.
탕크레드1100년–1103년, 1105년–1112년섭정
보에몽 2세1111년–1130년
살레르노의 루지에로1112년–1119년섭정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1119년–1126년, 1130년–1131년섭정
콩스탕스1130년–1163년여공
예루살렘의 풀크1131년–1136년섭정
레몽1136년–1149년콩스탕스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
샤티용의 레날드1153년–1160년콩스탕스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
보에몽 3세1163년–1201년
트리폴리의 레몽 4세1193년–1194년섭정
보에몽 4세1201년–1216년
안티오키아의 레몽 뤼펭1216년–1219년
보에몽 4세1219년–1233년복위
보에몽 5세1233년–1251년
보에몽 6세1251년–1268년


4. 사회와 문화

안티오키아 공국 사회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으로 추정되는 민족은 단성론을 믿는 아르메니아인이었으며, 이들은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도시와 농촌 지역에 거주했다. 그 외에도 '수리아니'라 불린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람어를 사용하는 시리아 정교회 신자(야코바이트)와 아랍어를 사용하는 멜키트파로 나뉘는 기독교 민족이었다.

1144년 에데사 백국이 함락되고 주변 지역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많은 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이 안티오키아 공국으로 피난했다. 이로 인해 모르 바르사우마에 대한 숭배가 확산되었고, 1156년에는 프랑크족의 기증으로 그를 기리는 교회가 세워지기도 했다. 이 교회의 초대 수도원장은 모르 바르 사우마 수도원 출신이었다.

공국의 수도와 남부, 동부 지역에는 무슬림도 거주했으나, 기록이 적어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소수 민족으로는 그리스인(그라이키)과 유대인도 있었다.

예루살렘과 유사하게 안티오키아 공국에도 여러 주요 관직이 존재했다. 여기에는 콘스터블, 원수, 영지 관리관, 공작, 자작, 집사, 실내관, 재상 등이 포함되었다.

5. 십자군 국가들과의 관계



안티오키아 공국과 다른 라틴 동방 국가들(에데사 백국,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국)의 관계는 협력과 갈등이 교차하는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관계는 주로 두 가지 요인에 의해 형성되었다. 첫째는 안티오키아 군주들이 라틴 동부 지역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였고, 이는 에데사 및 예루살렘과의 갈등으로 이어지곤 했다. 둘째는 외부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라틴 통치자들 간의 동맹 필요성이었다. 이러한 동맹은 봉건적 유대 관계와 통치 가문 간의 혼인 동맹을 통해 강화되었다.[5]

초기 보에몽 1세는 에데사 백국의 초대 백작 보두앵 드 불로뉴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099년에는 함께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기도 했으며, 에데사를 포함한 지역에 라틴 성직자를 주교로 임명하는 등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7] 또한 보에몽 1세는 1100년에 보두앵 드 부르크를 안티오키아 민병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8] 하지만 트리폴리 백국을 세우려던 툴루즈의 레이먼드 4세와는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레이먼드는 보에몽 대신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와 동맹을 맺었다.

1100년 보에몽 1세가 다니슈멘드 왕조와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후, 그의 조카 탕크레드가 섭정을 맡았다. 탕크레드는 에데사의 소유권을 두고 보두앵 드 부르크와 갈등을 빚었으며(1108-1109), 이는 보에몽 1세가 살레르노의 리샤르를 에데사 지휘관으로 임명했음에도 탕크레드가 인도를 거부하면서 불거졌다.[9] 탕크레드는 트리폴리 백작 기욤-조르당과도 갈등했지만, 1109년 기욤-조르당이 툴루즈 소유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트리폴리를 툴루즈의 베르트랑에게 넘기면서 갈등이 해결되었다. 이후 베르트랑은 예루살렘 왕국보두앵 1세와 동맹을 맺었다.[9]

1111년 마우두드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가 공국을 위협했을 때, 다른 라틴 국가들은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며 공동으로 대응했다.[10] 1112년 탕크레드가 사망하고 살레르노의 로저가 섭정이 되어 에데사를 장악하면서 안티오키아, 에데사, 예루살렘 왕국 간의 관계는 개선되는 듯 보였다. 1115년 사르민 전투에서는 에데사 군대가 안티오키아 군대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1118년에는 세 국가의 군대가 연합하여 이집트와 다마스쿠스 군대의 위협에 맞서기도 했다.[10]

그러나 1119년 살레르노의 로저가 아게르 상구이니스 전투에서 전사하고 성인 후계자가 없게 되자,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가 섭정을 맡으면서 북부 시리아의 권력 균형이 변화했다. 이 시기 에데사의 쿠르트네의 조슬랭은 안정적인 통치를 구축하며 안티오키아의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 보두앵 2세는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1126년 동방에 도착한 보에몽 2세와 자신의 딸 앨리스를 결혼시켰다.[11] 하지만 1127년에는 보에몽 2세와 에데사의 조슬랭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여 조슬랭이 공국을 침공하는 사건도 있었다. 1130년 보에몽 2세가 사망하면서 발생한 계승 위기는 북부 시리아에 대한 안티오키아의 주도권 상실로 이어졌다.[12]

보에몽 2세 사후, 그의 어린 딸 콘스탄스가 공국을 상속받았고, 예루살렘의 풀크가 섭정을 맡았다. 1136년 콘스탄스는 레몽 드 푸아티에와 결혼했다. 레이먼드는 비잔틴 황제 요한네스 2세 콤네노스와 충돌했으나 결국 1138년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이후 비잔틴, 안티오키아, 에데사 연합군이 무슬림 시리아를 공격했지만, 레이먼드와 에데사의 조슬랭 2세는 샤이저 포위전 당시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황제의 분노를 샀다.[4] 1144년 에데사 함락 이후, 안티오키아는 누르 앗딘 장기의 공격을 받았고, 레이먼드는 1149년 이납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가 잠시 섭정을 맡았고, 콘스탄스는 1153년 르노 드 샤티용과 재혼했다. 레날드 역시 비잔틴과 충돌했으나 1158년 황제 마누일 1세 콤니노스에게 굴복했고, 안티오키아는 1180년 마누일 1세 사망 시까지 비잔틴의 봉신국 상태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안티오키아는 비잔틴에 군대를 제공해야 했지만, 누르 앗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는 이점도 있었다. 1163년 콘스탄스가 폐위되고 아들 보에몽 3세가 즉위했다. 보에몽 3세는 1164년 하림 전투에서 누르 앗딘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1165년 풀려났고, 이후 비잔틴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1180년 마누일 1세 사망 후 비잔틴의 보호는 끝났지만, 안티오키아는 이탈리아 도시 국가 함대의 도움으로 1187년 살라딘의 예루살렘 왕국 공격에서 살아남았다. 제3차 십자군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군대 잔당이 1190년 안티오키아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보에몽 3세가 1201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트리폴리의 보에몽 4세와 손자 안티오크의 레이몬드-루펜 사이에 안티오키아 계승 전쟁이 벌어져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보에몽 4세가 최종적으로 승리했지만(1219년), 이 과정에서 공국의 힘은 더욱 약화되었다. 보에몽 5세 시대에는 제5차 십자군, 제6차 십자군, 제7차 십자군 등 주요 사건에서 안티오키아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1254년, 보에몽 6세는 아르메니아 공주 시빌라와 결혼하여 양국 간의 오랜 권력 투쟁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이 시점에는 아르메니아가 더 강력한 세력이었고, 안티오키아는 사실상 아르메니아의 속국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장인인 아르메니아 왕 헤툼 1세의 영향으로 보에몽 6세는 1260년 훌라구 휘하의 몽골 제국에 복속하여 조공국이 되었다.[13] 보에몽 6세와 헤툼 1세는 몽골의 시리아 정복 전쟁에 동참하여 알레포다마스쿠스 점령에 참여했다.[14]

그러나 1260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이 패배하자,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국 술탄 바이바르스는 몽골에 협력했던 안티오키아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결국 1268년 바이바르스에 의해 안티오키아는 함락되었고, 북부 시리아 전역이 빠르게 함락되었다. 이는 사실상 안티오키아 공국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으며, 23년 후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레반트 지역의 십자군 국가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안티오키아 공"이라는 칭호는 트리폴리 백작 가문이 단절된 후 키프로스 왕국의 왕들에게 명목상으로 넘어갔다.

6. 더 보기

참조

[1] 서적 The creation of the Principality of Antioch : 1098–1130 https://archive.org/[...] The Boydell Press 2000
[2] 서적 The creation of the Principality of Antioch : 1098–1130 https://archive.org/[...] The Boydell Press 2000
[3] 서적 The creation of the Principality of Antioch : 1098–1130 https://archive.org/[...] The Boydell Press 2000
[4]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II: The Kingdom of Jerusalem and the Frankish East, 1100–1187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2
[5] 서적 The creation of the Principality of Antioch : 1098–1130 https://archive.org/[...] The Boydell Press 2000
[6] 서적 The First Crusade : a New History Simon & Schuster, Limited 2012
[7] 학술지 Gesta Tandcredi in expeditione Hierosolymitana
[8] 서적 The creation of the Principality of Antioch : 1098–1130 https://archive.org/[...] The Boydell Press 2000
[9] 서적 The creation of the Principality of Antioch : 1098–1130 https://archive.org/[...] The Boydell Press 2000
[10] 서적 The creation of the Principality of Antioch : 1098–1130 https://archive.org/[...] The Boydell Press 2000
[11] 학술지 Fulcher of Chartres: Chronicle of the First Crusade (Fulchei Carnotensis Historia Hierosolymitana). M. E. McGinty 1942-07
[12] 서적 The creation of the Principality of Antioch : 1098–1130 https://archive.org/[...] The Boydell Press 2000
[13] 서적 Mongols and the West Routledge 2005
[14] 서적 Histoire des Croisades
[15]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ume IV: The Art and Architecture of the Crusader States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77
[16] 문서 고대 로마 제국 영토, 7세기 이슬람 제국 점령, 10세기부터 11세기 후반까지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 및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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