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불 협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영불 협상(Entente Cordiale)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제국의 부상에 공동 대응하고 식민지 경쟁을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일련의 협정이다. 1904년 4월 8일, 식민지 문제를 중심으로 한 주요 협약이 체결되었으며, 이집트와 모로코에 대한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뉴펀들랜드,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시암, 마다가스카르, 뉴헤브리디스 등 다양한 지역의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협상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삼국 동맹이 붕괴된 것과는 달리 지속되어 연합국의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삼국 협상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100주년과 1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개최되었으며,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한 앙탕트 코르디알 장학금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04년 프랑스 - 1904년 하계 올림픽 프랑스 선수단
1904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한 프랑스 선수단은 육상 종목에서 알베르 코레의 마라톤 은메달과 미국 선수들과 연합한 4마일 단체 달리기 1위를 기록했으며, 알베르 코레이의 국적 및 소속팀 기록에 논란이 있다. - 1904년 발효된 조약 - 콘스탄티노플 협약
콘스탄티노플 협약은 1888년 수에즈 운하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고자 체결되었으며, 평시와 전시를 막론하고 모든 선박의 운하 통행을 보장하고 운하 봉쇄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1904년 영국 - 1904년 하계 올림픽 영국 선수단
1904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한 영국 선수단은 톰 카일리의 육상 10종 경기 금메달과 존 데일리의 육상 2590m 장애물 경주 은메달을 획득하여 총 2개의 메달을 땄다. - 1904년 영국 - 도거 뱅크 사건
1904년 러일 전쟁 중 발트 함대가 도거 뱅크에서 영국 어선을 일본 어뢰정으로 오인 공격하여 발생한 도거 뱅크 사건은 영국 내 반러 감정 고조와 국제적 논란을 야기했으며, 러시아의 보상금 지급에도 불구하고 러일 전쟁과 대한제국에 대한 열강의 영향력 확대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불 협상 | |
---|---|
기본 정보 | |
![]() | |
조약명 | 영불 협상 |
서명일 | 1904년 4월 8일 |
서명국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
사용 언어 | 프랑스어 영어 |
협상 배경 | |
주요 원인 | 영국-독일 해군력 경쟁 심화 프랑스의 독일 제국에 대한 견제 필요성 증대 파쇼다 사건 이후 영국의 프랑스에 대한 외교적 협력 필요성 증가 |
주요 목표 |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 인정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 인정 양국 간의 식민지 분쟁 해결 |
주요 내용 | |
식민지 관련 합의 |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영국의 간섭을 인정하고, 이집트에서 프랑스의 정치적 활동을 포기함 영국은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를 인정함 뉴펀들랜드와 서아프리카에서의 영토 분쟁을 해결함 |
기타 합의 | 양국 간의 상호 이해 증진 및 협력 강화 주요 국제 문제에 대한 협력적 접근 양국 간의 정보 공유 및 외교적 협력 강화 |
협상 영향 | |
국제 관계 변화 | 영국과 프랑스 간의 외교적 관계 개선 독일 제국 고립 정책의 강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원인 중 하나로 작용 |
역사적 의의 | 양국 간의 장기적인 협력 관계의 기반 마련 유럽의 세력 균형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옴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외교적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침 |
현대적 영향 | 현대 영국-프랑스 관계의 기반을 형성 유럽 통합에 간접적인 영향 |
기타 | |
관련 사건 | 파쇼다 사건 (1898년) 제1차 모로코 위기 (1905년) 제2차 모로코 위기 (1911년) |
관련 인물 | 폴 캉봉(駐英大使) |
장소 | 불퇴유 성 |
2. 배경
"Entente Cordiale"는 프랑스어 단어로, 보통 "우호 협정" 또는 "우호적 이해"로 번역된다. 이 용어는 1843년 영국 외무장관 애버딘 경이 자신의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 국가 간의 "우호적이고 좋은 이해"를 언급한 데서 유래했다.[1] 이는 프랑스어로 ''Entente Cordiale''로 번역되어 같은 해 루이 필립 1세가 프랑스 상원에서 사용했다.[1] 오늘날 이 용어가 사용될 때 거의 항상 의미하는 것은 두 번째 ''Entente Cordiale'', 즉 1904년 4월 8일 영국과 프랑스 두 강대국 사이에 런던에서 서명된 서면 및 부분적으로 비밀 협정을 의미한다.
영불 협상은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패배 등으로 인해 다른 유럽 강국들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프랑스와, 유럽 대륙에서 고립주의 정책을 유지하며 세력 균형을 추구하던 영국, 양국 모두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세기 말, 보어 전쟁 이후 영국의 자신감 상실과 독일 제국의 부상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서 양국 관계 변화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2]
2. 1. 유럽 열강 간 경쟁 심화
19세기 말,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 분할과 같이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서 식민지 확보 경쟁을 벌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오랜 기간 동안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특히 아프리카 대륙에서 충돌이 잦았다. 1898년 수단에서 발생한 파쇼다 사건은 양국 간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는데, 프랑스가 영국에 비해 불리함을 인지하고 물러서면서 외교적 굴욕을 당했다.[3]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양국은 상호 협력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새로 임명된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독일과의 미래 분쟁에 대비하여 영국의 우정을 얻고자 하였다.[3]
2. 2. 독일 제국의 부상
1870년~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복수를 위해 자를란트와 루르 지역을 정복하려 할 것을 우려하여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 하였다.[2]보어 전쟁 이후, 영국은 자신감을 잃고 독일 제국의 부상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1881년 3월, 프랑스의 정치가 레옹 갬베타와 앨버트 에드워드 왕자는 브르퇴이유 성에서 만나 독일을 상대로 한 동맹을 논의하기도 하였다.[3]
2. 3. 영국의 고립주의 정책 수정
19세기 말까지 영국은 유럽 대륙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고립주의' 정책을 고수해 왔다.[2] 그러나 1899년부터 1902년까지 벌어진 보어 전쟁을 겪으면서, 영국은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3] 이에 따라 영국은 동맹 상대를 찾기 시작했다.1881년 3월, 프랑스의 정치가 레옹 갬베타와 영국의 앨버트 에드워드 왕자는 브르퇴이유 성에서 만나 독일을 견제하기 위한 동맹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분할을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 간의 갈등으로 인해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특히 1898년 파쇼다 사건에서 프랑스는 영국에 밀려 외교적 굴욕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임명된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앞으로 독일과의 분쟁에 대비하여 영국의 우호 관계를 맺고자 했다.[3]
1898년부터 1901년까지 조셉 체임벌린 식민지 장관의 주도로 영국과 독일 간의 회담이 세 차례 열렸다. 그러나 영국은 3국 동맹에 가입하지 않고 독일과의 협상을 중단했으며, 대신 프랑스와의 동맹을 다시 추진하였다.[3]
러일 전쟁이 발발할 조짐을 보이자, 프랑스와 영국은 각각 동맹국을 지원하다가 전쟁에 휘말릴 위기에 처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 굳건한 동맹 관계였고, 영국은 영일 동맹을 체결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은 전쟁을 피하고자 오랜 갈등 관계를 해소하고, 식민지 문제에 대한 협상을 진행했다.[4] 그 결과, 1904년 4월 8일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와 영국 외무장관 랜즈다운 경, 그리고 폴 캉봉 주영 프랑스 대사는 식민지 문제에 대한 협정에 서명했다.[5]
2. 4. 프랑스의 대독(對獨) 안보 추구
프랑스는 1870년부터 1871년까지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독일에 대한 복수심과 안보 불안에 시달렸다.[2]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전쟁 패배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자를란트와 루르 지역을 정복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용하여, 프랑스를 잠재적 동맹국들로부터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독일의 군사력 증강에 맞서기 위해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2]1881년 3월 초, 프랑스 정치가 레옹 갬베타와 웨일스 왕자 앨버트 에드워드는 브르퇴이유 성에서 만나 독일을 상대로 한 동맹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독일과의 미래 분쟁에 대비하여 영국의 우정을 얻고자 했다.[3]
3. 협상의 전개
1903년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의 프랑스 방문은 양국 관계 개선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양국 정부는 식민지 문제와 관련된 여러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본격적인 협상에 착수했다.
3. 1. 식민지 문제 협상

영불 협상의 핵심은 식민지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합의였다. 양국은 모로코, 이집트, 뉴펀들랜드, 서아프리카, 시암(태국), 마다가스카르, 뉴헤브리디스(바누아투) 등 여러 지역의 식민지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가장 중요한 합의는 이집트와 모로코에 관한 것이었다. 프랑스는 이집트에서 영국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영국은 모로코에서 프랑스가 질서 유지 및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허용했다.[6] 수에즈 운하의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었고, 콘스탄티노플 조약이 발효되었으며, 모로코 해안 일부에 요새를 건설하는 것이 금지되었다.[6]
두 번째 문서는 뉴펀들랜드와 서아프리카 및 중앙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다루었다. 프랑스는 유트레히트 조약에 따른 뉴펀들랜드 서해안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지만, 해안 어업권은 유지했다. 그 대가로 영국은 프랑스에 야르부텐다(현재 세네갈과 감비아 국경 근처) 마을과 로스 제도(현재 기니의 일부)를 주었다. 또한 니제르 강 동쪽(현재의 니제르와 나이지리아)에 있는 프랑스와 영국령 사이의 국경 문제가 다루어졌다.[6]
마지막 선언은 시암, 마다가스카르, 뉴헤브리디스에 관한 것이었다. 시암에서 영국은 메남(차오프라야) 강 유역 동쪽에 제안된 프랑스의 세력권을 인정했고, 프랑스는 메남 유역 서쪽 지역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양측은 시암 영토를 합병하려는 생각을 포기했다. 영국은 마다가스카르에서 프랑스가 관세를 도입하는 것에 대한 반대를 철회했다. 양측은 뉴헤브리디스 원주민에 대한 관할권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어려움을 종식시키는 합의에 도달했다.[6]
결과적으로 이집트는 영국의 세력권, 모로코는 프랑스의 세력권으로 인정되었다. 프랑스는 모로코 처분 시 스페인의 이익을 고려해야 했다.[7] 영국은 프랑스에 로스 제도를 할양하고, 나이지리아 국경을 프랑스에 유리하게 조정했으며, 프랑스는 상부 감비아 계곡 통제에 동의하고 뉴펀들랜드 해안 특정 어장에 대한 독점권을 포기했다. 시암 (태국)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권이 개략적으로 제시되었고, 결국 식민지화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프랑스 인도차이나에 인접한 동쪽은 프랑스, 버마의 테나세림주에 인접한 서쪽은 영국의 영향권으로 제안되었다. 뉴헤브리디스에서는 양국 식민지 개척자 간 경쟁 완화 조치가 취해졌다.[7]
4. 협상의 내용
《앙탕트 코르디알》은 세 개의 문서로 구성되었다.
- 첫 번째는 이집트와 모로코에 관한 선언이었다.
- 두 번째는 뉴펀들랜드와 서아프리카 및 중앙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다루었다.
- 마지막 선언은 시암(태국), 마다가스카르, 뉴헤브리디스(바누아투)에 관한 것이었다.[6]
이 합의는 어업과 식민지 경계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었으며, 이집트는 영국의 세력권, 모로코는 프랑스의 세력권으로 인정되었다. 《앙탕트 코르디알》은 공식적인 동맹은 아니었고 긴밀한 협력을 포함하지 않았으며, 독일을 겨냥한 것도 아니었지만, 독일의 공격에 대비하여 프랑스와 영국 간의 더 강한 관계를 위한 길을 열었다. 이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야 수립된 공식적인 영불 군사 동맹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7]
장기적인 관점에서, 《앙탕트 코르디알》은 거의 1000년 동안 지속된 두 국가와 그 전신들 사이의 간헐적인 분쟁을 종식시키고,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종식 이후 존재해 온 ''사실상의 협정''을 보다 공식적인 협정으로 대체했다는 의의를 갖는다.[8] 테오필 들르카세 프랑스 외무장관은 프랑스와 영국의 이해가 서유럽에서 독일 동맹 체제(삼국 동맹 (1882))에 대항하여 프랑스에게 어느 정도의 안전을 제공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의 정책이 《앙탕트 코르디알》로 정점을 이루었다. 협상 성공의 공은 폴 캉봉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와 랜즈다운 경 영국 외무장관에게 돌아간다. 《앙탕트 코르디알》 체결로 두 강대국은 각각 스스로 몰두했던 사실상의 고립을 줄였다. 영국은 일본(1902)을 제외하고는 주요 강대국 동맹이 없었고, 프랑스는 프랑스-러시아 동맹만 있었다. 이 협정은 독일의 정책이 오랫동안 프랑스와 영국의 적대 관계에 의존해 온 독일에게 위협이 되었다. 1905년 모로코에서 프랑스를 견제하려는 독일의 시도(탕헤르 사건 또는 제1차 모로코 사태)와 《앙탕트 코르디알》을 뒤엎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것을 강화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 프랑스와 영국 참모본부 간의 군사 회담이 시작되었고, 프랑스와 영국의 연대는 알헤시라스 회의(1906)와 제2차 모로코 사태(1911)에서 재확인되었다.
4. 1. 이집트와 모로코에 관한 선언
프랑스는 이집트에서 영국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영국은 모로코에서 프랑스가 질서를 유지하고 지원을 제공하도록 허용했다. 수에즈 운하의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었고, 콘스탄티노플 조약이 발효되었으며, 모로코 해안 일부에 요새 건설이 금지되었다.[6] 이 조약에는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의 행정에 "상황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을 다룬 비밀 부속서가 포함되어 있었다.4. 2. 뉴펀들랜드와 서아프리카 및 중앙아프리카에 관한 협정
프랑스는 유트레히트 조약에 따라 뉴펀들랜드 서해안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지만, 해안 어업권은 유지했다. 그 대가로 영국은 프랑스에 야르부텐다(현재 세네갈과 감비아 국경 근처) 마을과 로스 제도(현재 기니의 일부)를 주었다. 추가 조항은 니제르 강 동쪽(현재의 니제르와 나이지리아)에 있는 프랑스와 영국령 사이의 국경을 다루었다.[6] 영국은 프랑스에 로스 제도(프랑스령 기니 해안)를 할양하고, 프랑스에 유리하게 나이지리아의 국경을 정의했으며, 상부 감비아 계곡에 대한 프랑스의 통제에 동의했고, 프랑스는 뉴펀들랜드 해안의 특정 어장에 대한 독점권을 포기했다.[7]4. 3. 시암, 마다가스카르, 뉴헤브리디스에 관한 선언
시암(태국)에서 영국은 메남 (차오프라야 강) 유역 동쪽에 제안된 프랑스의 세력권을 인정했고, 그 대가로 프랑스는 메남 강 유역 서쪽 지역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양측은 시암 영토를 합병하려는 생각을 포기했다.[6] 영국은 마다가스카르에서 프랑스가 관세를 도입하는 것에 대한 반대를 철회했다. 양측은 "뉴헤브리디스(바누아투) 원주민에 대한 관할권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어려움을 종식시키는" 합의에 도달했다.[6]5. 협상의 결과
영불 협상은 양국 간의 오랜 갈등을 해소하고, 20세기 초 국제 정세 변화에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5. 1.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영국 외무부에서는 '앙탕트(Entente)'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게 여겼다. 1911년 초 프랑스 언론 보도에서 삼국동맹의 활력과 앙탕트의 침체를 대조적으로 다룬 후, 아이어 크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기본적인 사실은 앙탕트가 동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아무런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앙탕트는 단지 사고방식일 뿐입니다."[9]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이탈리아가 중립을 지키면서 삼국동맹이 붕괴된 반면, 앙탕트는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아이어 크로의 논평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6. 협상 이후
7. 100주년과 120주년 기념
2004년 《친선협약》(Entente Cordiale) 100주년을 기념하여 4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프랑스 국빈 방문과 11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영국 방문 등 여러 공식 및 비공식 행사가 열렸다. 영국군(영국 왕립 해병대 군악대, 영국 근위 기병대, 영국 그레나디어 근위대, 영국 왕립 기병 포병대)이 파리 바스티유의 날 행렬을 최초로 이끌었고, 레드 애로우즈가 상공을 비행했다.
런던 워털루 국제역과 파리 북역에는 영국과 프랑스 국기를 표현하고, "친선협약"이라는 단어가 겹쳐진 포스터가 게시되었다. 일부 프랑스 정치 지도자들은 파리에서 출발하는 열차의 종착역 이름이 "워털루"인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런던 종착역 이름은 영국이 이끄는 연합군이 나폴레옹 군대를 패배시킨 워털루 전투(1815년)를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98년 프랑스 정치인 플로랑 롱그페는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에게 이름 변경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2007년 11월 세인트 판크라스 국제역이 유로스타 서비스의 새로운 런던 종착역이 되었다.
2024년 4월, 《친선협약》 12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헌병대 공화국 근위대가 버킹엄 궁전 근위병 교대식에 참여했다.
8. 앙탕트 코르디알 장학금
1995년 10월 30일 런던에서 열린 영불 정상회담에서 영국 총리 존 메이저와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영불 협상의 정신을 계승하여, 영국과 프랑스 학생 간 교류를 지원하는 '앙탕트 코르디알 장학금' 제도를 발표했다.[13]
이 제도는 영국과 프랑스 학생들이 도버 해협 건너편에서 1년 동안 학업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한다. 영국 학생들을 위한 제도는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관에서 관리하며,[14] 프랑스 학생들을 위해서는 프랑스의 영국문화원과 파리 주재 영국 대사관에서 관리한다.[15][16] 자금은 민간 부문과 재단에서 제공한다. 이 제도는 상호 이해를 증진하고 미래의 영국과 프랑스 지도자들 간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프로그램은 1993년부터 1996년까지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였던 크리스토퍼 말라비 경에 의해 시작되었다.[17]
참조
[1]
서적
Pax Britannica? British Foreign Policy 1789–1914
[2]
서적
The Struggle for Mastery in Europe, 1848–1918
[3]
서적
The Struggle for Mastery in Europe, 1848–1918
[4]
백과사전
Entente Cordiale (European history) –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http://www.britannic[...]
2010-03-08
[5]
서적
The Mirage of Power; Vol. 1, British Foreign Policy 1902–14
[6]
간행물
Franco-British Rivalry over Siam, 1896–1904
[7]
서적
The War That Ended Peace: The Road to 1914
[8]
서적
The Struggle for Mastery in Europe, 1848–1918
[9]
서적
Great Britain and France, 1911–1914
Cambridge University Press
[10]
뉴스
Waterloo insult to French visitors
http://news.bbc.co.u[...]
BBC News
1998-11-06
[11]
뉴스
Passengers ready for a second battle of Waterloo
http://www.timesonli[...]
2004-03-12
[12]
웹사이트
A Seoul rally and a solar eclipse: photos of the day – Monday
https://www.theguard[...]
2024-04-08
[13]
서적
Crossing the Channel
http://www.francobri[...]
Franco-British Council
[14]
웹사이트
Entente Cordiale scholarships on the website of the French Embassy in London
http://www.ambafranc[...]
[15]
웹사이트
Entente Cordiale scholarships on the website of the British Council France
http://www.britishco[...]
[16]
웹사이트
Entente Cordiale scholarships on the website of the British embassy in France
http://ukinfrance.fc[...]
[17]
서적
Are International Exchange and Mobility Programmes Effective Tools of Symmetric Public Diplomacy?
http://cadair.aber.a[...]
Aberystwyth University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