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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타치바나히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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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야마토타케루의 전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본서기』에서는 호즈미 씨의 딸이자 야마토타케루의 아내로, 해상에서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지는 희생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 『고사기』에서는 야마토타케루의 화공 사건에서 쿠사나기의 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바다에 투신하기 전 와카를 읊는 등 더욱 인간적인 면모와 애틋한 감정을 강조하여 묘사된다. 그녀의 희생은 야마토타케루가 동쪽 정벌을 완수하는 데 기여했으며, 지바현 모바라시에는 그녀를 기리는 킷쥬 신사가 있다. 또한, 『히타치 국 풍토기』에서는 오오타치바나히메 또는 타치바나 황후로 등장하며, 『선대구사본기』에서는 여러 자녀를 낳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지명 유래 전설과 신사, 무녀로서의 상징성을 가지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숭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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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타치바나히메
기본 정보
오토히메 신사
오토히메 신사
다른 이름오토타치바나히메노미코토 (弟橘媛命)
오토히메 (弟姫)
신화적 정보
출신오와리 씨
배우자야마토타케루
주요 관련 장소사가미국
우라가 수도 (浦賀水道)
오토히메 신사 (弟橘比賣神社)
군마현
인물 정보
활동 시기야마토 시대 (고훈 시대)
사인입수 (入水) (바다에 몸을 던짐)
기일음력 2월 11일
관련 인물아버지: 미요케노무라지오오마루 (美夜受村主忍麻呂)
어머니: 와니 씨 (和珥氏)
전승
희생야마토타케루의 동쪽 정벌 당시, 우라가 수도의 거친 바다를 잠재우기 위해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희생
유언"나는 죽지만, 당신은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십시오." (일본서기)
사후야마토타케루오토타치바나히메를 그리워하며 "나의 아내여!"를 외침. 그녀의 유해는 해변에 떠밀려 와 무덤이 만들어짐.
신앙
모셔지는 곳오토히메 신사, 군마 현 등
신앙의 형태해상 안전, 순산 기원 등
기타
관련 문화재오토타치바나히메 관련 유적지, 신사 등

2. 전승 속의 오토타치바나히메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와 『고사기』 양쪽에 기록된 인물이다. 두 기록 모두 그녀가 남편 야마토타케루의 동쪽 정벌 중, 거친 바다를 건널 때 해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희생함으로써 야마토타케루가 위기를 넘기고 임무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공통된 이야기를 전한다.[15][3][17][5] 그녀의 이러한 자기희생적인 행동은 후대에 깊은 인상을 남겨 일본 각지에 관련 신사전설이 전해지게 되었다.[16][4][19][6] 각 기록에 나타난 구체적인 내용과 해석은 하위 문단에서 상세히 다룬다.

2. 1. 『일본서기』의 기록

일본서기』에 따르면 오토타치바나히메는 호즈미 씨의 선조인 오시야마노 스쿠네(忍山宿禰)의 딸이며, 야마토타케루와의 사이에서 와카타케히코 왕(稚武彦王)을 낳았다.[13][1]

『일본서기』에는 야마토타케루가 사가무(相模)에서 가미쓰후사(上総)로 건너가려 할 때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야마토타케루는 하시리미즈(馳水) 바다를 보고 "이 작은 바다쯤이야 뛰어서라도 건널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자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배가 표류하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야마토타케루를 따라온 오토타치바나히메가 "지금 풍랑이 심하여 배가 가라앉으려 합니다. 이는 반드시 해신(海神)의 뜻일 것입니다. 제가 야마토타케루 님을 대신하여 바다에 들어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파도를 헤치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러자 폭풍우는 즉시 멈추었고, 배는 무사히 해안에 닿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바다를 하시리미즈(馳水)라고 불렀다고 한다.[15][3]

오토타치바나히메의 희생 덕분에 야마토타케루는 가미쓰후사에서 육오국(陸奥国)으로 이동하여 에미시 정벌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때 큰 거울을 배에 걸고 해로를 따라 아시노우라(葦浦)를 돌고 타마노우라(玉浦)를 건너 에미시의 경계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15][3]

2. 2. 『고사기』의 기록

고사기』에 따르면, 야키쓰(焼津)에서 사가무노 구니노미야쓰코(相武国造)에게 속아 화공(火攻) 위기에 처했다가 야마토히메노 미코토에게 받은 쿠사나기의 검으로 벗어난 야마토타케루가 하시리미즈 해(走水海)에 이르렀을 때, 바다가 거칠어져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17][5] 이때 바다의 신(와타츠미)의 분노로 풍랑이 일어 배가 나아가지 못하자,[18][6]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제가 당신을 대신하여 바다로 들어가겠습니다. 당신은 부디 동쪽 지역의 정벌을 완수하여 천황에게 보고하십시오."라고 말하며 야마토타케루를 대신해 바다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17][5] 그녀는 바다에 들어가기 전, 왕골로 만든 거적(菅畳) 여덟 장, 가죽으로 만든 거적(皮畳) 여덟 장, 명주로 만든 거적(絹畳) 여덟 장을 파도 위에 깔고 그 위에 앉아 바다로 들어갔다.[17][5][19][6] 그러자 거친 파도가 잠잠해져 배는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17][5][19][6]

이때 오토타치바나히메는 다음과 같은 와카(和歌)를 읊었다.[19][6]

:さねさし 相武(さがむ)の小野(をの)に 燃ゆる火の 火中(ほなか)に立ちて 問ひし君はも|사네사시 사가무노 오노니 모유루 히노 호나카니 타치테 토이시 키미와모일본어

:(→ 사가무의 들판에서 타오르던 불길 속에서도 나의 안위를 물어주셨던 당신이여!)

이 노래는 야마토타케루가 사가무에서 화공을 당했을 때 자신을 걱정해주었던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고사기』에만 기록되어 있다. 야마토타케루에 대한 그녀의 깊은 마음과 두 사람의 굳건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그로부터 7일 뒤,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이 해안가로 떠내려왔다. 사람들은 그 빗을 수습하여 능(御陵)을 만들어 안치했다.[19][6]

2. 3. 전승 비교 및 해석

일본서기고사기 모두 야마토타케루의 동쪽 정벌 중 오토타치바나히메가 바다에 몸을 던져 해신의 노여움을 풀고 남편의 목숨을 구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나, 세부적인 묘사에는 차이가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오토타치바나히메는 호즈미 씨(穂積氏)의 선조 오시야마노 스쿠네(忍山宿禰)의 딸로, 야마토타케루와의 사이에서 와카타케히코노 미코(稚武彦王)를 낳았다.[13][1] 사가무(相模)에서 가미츠후사(上総)로 건너가려 할 때, 야마토타케루가 바다를 얕보고 호언장담하자 갑자기 폭풍이 일어 배가 표류하게 되었다. 이때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이는 반드시 해신의 짓입니다. 천한 첩이 왕의 목숨에 대신하여 바다에 들어가렵니다"라고 말하고는 파도를 헤치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폭풍이 즉시 멎고 배는 무사히 해안에 닿을 수 있었다고 한다.[15][3] 사람들은 그 바다를 '치수(馳水)'라 불렀다. 이후 지바현 모바라시 혼노(本納)에는 야마토타케루가 다마노우라(玉浦)로 건너와 귤나무(橘)를 오토타치바나히메의 묘표로 삼았다는 전승에서 유래한 기쓰기 신사(橘樹神社)가 세워졌다. 이 신사는 오토타치바나히메를 해상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16][4]

『고사기』에서는 야마토타케루가 하시리미즈 해(走水海, 우라가 수도)를 건널 때 해신의 노여움으로 풍랑이 일어 배가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묘사된다.[17][5] 이때 오토타치바나히메는 "내가 남편인 황자의 몸을 대신해 바다 속으로 들어가오니, 부디 황자께서 동쪽으로 나아가시는 길을 보우하소서"라고 말하며, 왕골 거적(스가타타미, 菅畳) 여덟 겹, 가죽 거적(가와타타미, 皮畳) 여덟 겹, 명주 거적(키누타타미, 絹畳) 여덟 겹을 파도 위에 깔고 그 위에 앉아 바다로 들어갔다.[19][6] 『고사기』는 특히 오토타치바나히메가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 불렀다는 와카를 기록하고 있다.

  • 산 옆에 서있는 사가무의 / 조그마한 들판에서 / 피어오르는 불, 그 불길 속에서도 / 저를 불러주신 당신이여 (さねさし 相武の小野に 燃ゆる火の 火中に立ちて 問ひし君はも|사네사시 사무노 오노니 모유루 히노 호나카니 타치테 토이시 키미와모일본어)![19][6]

이 노래는 과거 야마토타케루가 아이부 국조(相武国造)의 함정에 빠져 화공을 당했을 때 자신을 걱정해주었던 것에 대한 감사와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으며, 『고사기』에만 전해진다. 이 와카는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인간적인 감정과 야마토타케루와의 깊은 유대를 보여준다. 그녀가 바다에 들어간 지 7일 후, 그녀의 이 해변으로 떠내려왔고, 야마토타케루는 이를 거두어 능(어릉)을 만들어 안치했다고 한다.[19][6]

두 기록 모두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자기희생적인 행동을 통해 야마토타케루가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고사기』는 희생 장면의 구체적인 묘사(여러 겹의 거적)와 와카 삽입을 통해 오토타치바나히메의 감정과 내면을 더욱 부각하며 그녀를 단순한 희생자가 아닌, 강한 의지와 감정을 지닌 인물로 그리고 있다. 이는 위기 상황에서 주체적인 결단을 내린 여성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는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오토타치바나히메를 잊지 못한 야마토타케루는 이후 슬픔의 탄식을 한다. 『일본서기』에서는 우스이 고개(碓日の嶺)에서, 『고사기』에서는 아시가라 고개(足柄の坂本)에서 야마토타케루가 동쪽을 바라보며 "아, 사랑하는 나의 아내여(吾妻はや|아즈마와야일본어)"라고 슬피 외쳤다고 전한다. 이 일화는 오늘날 일본의 동부 지역을 '아즈마(吾妻)'라고 부르게 된 유래를 설명하는 지명 기원 설화로 알려져 있다.[20][21][7][8]

3. 히타치 국 풍토기

『히타치 국 풍토기』에는 오토타치바나히메가 '''大橘比売命|오오타치바나히메노 미코토일본어''' 또는 '''橘皇后|다치바나 오키사키일본어'''(타치바나 황후)로 등장하며[22][9], 남편 야마토타케루는 '''倭武天皇|야마토타케루노 스메라미코토일본어'''(야마토타케 천황)로 표기되어 부부가 각각 천황황후로 불리고 있다.[22]

이 기록에는 나메가타 군 조에서 야마토타케루가 야마토에서 내려온 오오타치바나히메와 아후카(安布賀)라는 곳에서 재회한 이야기[23][10]와, 다카군 조에서 야마토타케루는 들판에서, 타치바나 황후는 바다에서 서로 사냥 경쟁을 벌인 이야기[24][11]가 실려 있다.

3. 1. 나메가타 군(行方郡)조

《히타치 국 풍토기》(常陸国風土記)의 나메가타 군(行方郡) 조에 따르면, 오토타치바나히메는 大橘比売命|오오타치바나히메노 미코토일본어 또는 橘皇后|다치바나 오키사키일본어(타치바나 황후)로, 남편 야마토타케루는 倭武天皇|야마토타케루노 스메라미코토일본어(야마토타케 천황)로 기록되어 천황황후로 칭해진다.[22][9] 이 기록에는 야마토에서 내려온 오오타치바나히메가 아후카(安布賀)라는 곳에서 야마토타케루와 재회했다고 언급되어 있다.[23][10] 아후카는 현재의 이바라키현 이타코시나메가타시 지역으로 비정된다.

3. 2. 다가 군(多珂郡)조

『히타치 국 풍토기』 다카군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여기에 야마토타케 천황이 들판에 행차하시어, 타치바나 황후를 보내 바다에 임하여 어로(漁)하게 하여, 포획의 이익을 서로 겨루게 하려 하셨다. 산과 바다의 물건으로 나누어 탐색하셨다"[11]. 이는 야마토타케 천황이 들판에서, 타치바나 황후가 바다에서 각각 사냥 경쟁을 벌인 것을 의미한다.

3. 3. 『히타치 국 풍토기』의 의의

『히타치국 풍토기』에서는 오토타치바나히메를 '''大橘比売命|오오타치바나히메노 미코토일본어''' 또는 '''橘皇后|다치바나 오키사키일본어'''(다치바나 황후)로[22][9], 남편 야마토타케루를 '''倭武天皇|야마토타케루노 스메라미코토일본어''' 또는 '''야마토타케 천황'''으로 표기하여[22], 부부가 각각 천황황후로 칭해졌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사기』나 『일본서기』와는 다른 관점을 제공하며, 특히 오토타치바나히메의 황후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行方郡 조에는 "또, 야마토타케 천황의 후(后) 오오타치바나히메노 미코토가 야마토에서 내려와 이 땅에 와서 만났다. 때문에 安布賀邑|아후카 읍일본어이라 한다."[23][10] 라고 기록되어 있어, 야마토타케루가 야마토에서 내려온 오오타치바나히메와 아후카 읍(현재의 이바라키현 이타코시나메가타시)에서 재회했음을 전한다.

또한, 多珂郡 조에는 "여기에 천황(야마토타케루)이 들판에 행차하시어, 다치바나 황후를 보내 바다에 임하여 어로(漁)하게 하여, 포획의 이익을 서로 겨루게 하려 하셨다. 산과 바다의 물건으로 나누어 탐색하셨다."[24][11] 라고 하여, 야마토타케루는 들판에서, 다치바나 황후는 바다에서 각자 사냥 경쟁을 벌인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오토타치바나히메가 단순히 남편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독자적인 활동을 하는 주체적인 인물로 묘사되었음을 보여준다.

4. 선대구사본기의 다치바나히메

선대구사본기』 7권 천황본기에는 오토타치바나히메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오토타치바나히메는 호즈미 씨 오시야마노 스쿠네의 딸이다. 게이코 천황 조에서는 오토타치바나히메가 와카타케히코노 미코(稚武彦王命일본어) 한 명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 세이무 천황 조에서는 아홉 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전해져 내용상 차이를 보인다.

4. 1. 게이코 천황 조

선대구사본기』 7권 천황본기의 게이코 천황 조에 따르면, 호즈미 씨 오시야마노 스쿠네의 딸인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와카타케히코노 미코(稚武彦王命)를 낳았다. 또한 같은 책의 세이무 천황 조에서는 오토타치바나히메가 아홉 아들, 즉 와카타케히코노 미코토(稚武彦王命), 이나이리와케노 미코토(稲入別命), 다케카와시노 미코토(武養鷲命), 아시카마미노카마미와케노 미코토(葦敢竈見別命), 오키나가타와케노 미코토(息長田別命), 이메히코노미코노 미코토(五十目彦王命), 이가노히코노 미코(伊賀彦王), 다케다노 미코(武田王), 사에키노 미코토(佐伯命)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4. 2. 세이무 천황 조

선대구사본기』 7권 천황본기의 세이무 천황 조에 따르면, 호즈미 씨 오시야마노 스쿠네의 딸인 오토타치바나히메가 9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는 같은 책의 게이코 천황 조에서 오토타치바나히메가 와카타케히코노미코 한 명만을 낳았다고 기록된 것과는 다른 내용이다.[1] 세이무 천황 조에 기록된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아홉 아들은 다음과 같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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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나이리노와케노미코 || 稲入別命|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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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케요와시노미코 || 武養鷲命|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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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카마도미노와케노미코 || 葦敢竈見別命|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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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가타와케노미코 || 息長田別命|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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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메히코노미코 || 五十目彦王命|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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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가히코왕 || 伊賀彦王|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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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케다왕 || 武田王|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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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에키노미코 || 佐伯命|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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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선대구사본기』의 특징

선대구사본기』 제7권 천황본기(天皇本紀|텐노혼키일본어)의 기록에 따르면, 오토타치바나히메는 호즈미 씨(穂積氏|호즈미 우지일본어) 오시야마노 스쿠네(忍山宿禰|오시야마노 스쿠네일본어)의 딸이다. 해당 기록의 게이코 천황 조에서는 오토타치바나히메가 와카타케히코노 미코(稚武彦王命|와카타케히코노 미코일본어)를 낳았다고 전하며, 세이무 천황 조에서는 그녀가 다음의 아홉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와카타케히코노 미코토 稚武彦王命|와카타케히코노 미코토일본어
  • 이나이리와케노 미코토 稲入別命|이나이리와케노 미코토일본어
  • 다케카와시노 미코토 武養鷲命|다케카와시노 미코토일본어
  • 아시카마미노카마미와케노 미코토 葦敢竈見別命|아시카마미노카마미와케노 미코토일본어
  • 오키나가타와케노 미코토 息長田別命|오키나가타와케노 미코토일본어
  • 이메히코노미코노 미코토 五十目彦王命|이메히코노미코노 미코토일본어
  • 이가노히코노 미코 伊賀彦王|이가노히코노 미코일본어
  • 다케다노 미코 武田王|다케다노 미코일본어
  • 사에키노 미코토 佐伯命|사에키노 미코토일본어

5. 신사와 전설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일본 신화 속 인물로, 남편 야마토타케루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일본 각지의 신사에서 해상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그녀와 관련된 다양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오토타치바나히메의 희생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야마토타케루가 사가미(相模)에서 가즈사(上総)로 건너가려 할 때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을 만나 배가 표류하게 되었다. 이때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이것이 해신(海神)의 노여움 때문이라며 야마토타케루를 대신해 바다에 뛰어들었고, 그 후 폭풍이 그쳤다고 한다.[15][3] 『고사기』에서는 야마토타케루가 하시리미즈 해(走水海)에서 거친 파도를 만나 나아가지 못하자, 오토타치바나히메가 남편의 동정(東征)을 기원하며 여러 겹의 거적을 파도 위에 깔고 앉아 바다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그녀가 남긴 와카(和歌)와 7일 뒤 해변으로 떠내려온 이야기도 『고사기』에 기록되어 있다.[17][5][19][6]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일본 각지, 특히 간토 지방을 중심으로 신으로 숭배받고 있으며, 그녀를 모시는 여러 신사가 존재한다.[16][4] 또한, 야마토타케루가 아내를 그리워하며 외쳤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지명 전설[20][21][7][8]이나 그녀의 옷소매가 떠내려왔다는 지명 전설[12][25] 등 그녀와 관련된 지명 유래담도 전해진다. 한편,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이름과 희생적 행위를 연관 지어 그녀를 무녀(巫女)의 시조로 보는 설도 존재한다.[12][25]

5. 1. 주요 신사

오토타치바나히메와 관련된 주요 신사는 다음과 같다.

  • 기쓰기 신사(橘樹神社): 지바현 모바라시 혼노(本納)에 위치한다. 야마토타케루구주쿠리 해변 다마우라(玉浦)로 건너간 후, 타치바나(橘) 나무를 오토타치바나히메의 묘표로 삼았다는 전승에서 유래했다.[16][4] 이 신사는 오토타치바나히메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며, 엔기시키 내사(延喜式内社)에 등재된 가즈사 국의 5개 주요 신사(五社) 중 하나이자 니노미야(二宮)이다. 또한 일본의 정사에 기록된 신격(神格)인 오토타치바나히메를 모시는 유일한 신사이기도 하다.[16][4] 신사의 전승에 따르면,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야마토타케루가 가진 쿠사나기의 검을 노리는 악한 용신(龍神)이 폭풍을 일으켰다고 설명하며, 자신이 대신 바다에 들어가 용을 물리치고 검과 야마토타케루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 이로 인해 기쓰기 신사는 해상 안전의 수호신으로 숭배받고 있다.[16][4]
  • 아즈마 신사(吾妻神社/吾嬬神社): 간토 지방 일대에 분포하는 신사들로, 오토타치바나히메 또는 야마토타케루와 관련이 깊다. 야마토타케루가 오토타치바나히메를 그리워하며 "아, 사랑하는 나의 아내여(吾妻はや)"라고 외쳤다는 고사에서 '아즈마'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20][21][7][8] 지바현 외에도 가나가와현 등지에 기쓰기 신사와 동명의 신사가 존재한다.[16][4]
  • 합사(合祀)된 신사: 노보노 신사(能褒野神社)나 하시리미즈 신사(走水神社)처럼 야마토타케루를 주신으로 모시는 신사에 오토타치바나히메가 함께 합사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16][4]
  • 이시키리쓰루기야 신사: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출신 씨족인 호즈미 씨가 이 신사의 사가(社家, 신사를 대대로 관리하는 가문)의 조상이라는 연고로, 신사 내 카미노샤(上之社)의 부도 신사(婦道神社)에 오토타치바나히메가 제신으로 모셔져 있다.[16][4]

5. 2. 지명 유래 전설

야마토타케루가 아내 오토타치바나히메를 잃고 슬퍼한 이야기에서 유래한 지명이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우스이 고개(碓日の嶺)에서, 『고사기』에 따르면 아시가라 고개(足柄の坂本)에서 야마토타케루는 "아, 사랑하는 나의 아내여(吾妻はや|아즈마 하야일본어)"라고 슬피 외쳤다고 한다.[7][8][20][21] 현대 일본 동부 지역을 부르는 말인 「아즈마」(吾妻)는 이 옛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며, 대표적인 지명 기원 설화 중 하나이다. 이러한 연유로 간토 지방 일원에는 아즈마 신사(吾妻神社/吾嬬神社)라는 이름의 신사가 분포하고 있다.

또한, 현재 도쿄만 연안의 지바현 소데가우라시(袖ケ浦市)와 나라시노시(習志野市)에 있는 소데가우라(袖ケ浦)라는 지명은 오토타치바나히메가 바다에 몸을 던질 때 입고 있던 옷의 소매(袖)가 떠내려왔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12][25] 전설에 따르면 오른쪽 소매와 왼쪽 소매가 각각 소데가우라시와 나라시노시에 떠내려왔다고도 한다.

5. 3. 무녀(巫女)로서의 오토타치바나히메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이름에 포함된 '타치바나(橘)'는 상록수로, 예로부터 신성한 나무로 여겨졌다.[12][25] 이러한 배경과 더불어, 그녀가 남편 야마토타케루를 위해 하시리미즈 해(走水海)의 거친 파도를 잠재우고자 스스로 몸을 던진 희생적 행위는 단순한 죽음을 넘어 신성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특히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그녀의 행동은 해신(海神)의 분노를 풀기 위한 제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는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토타치바나히메를 무녀(巫女)의 시조로 여기는 설이 뿌리 깊게 존재한다.[12][25] 그녀의 희생은 단순한 인신공양이 아니라,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고 인간의 염원을 신에게 전달하는 무녀의 본질적인 역할과 맞닿아 있다는 해석이다.

6. 한국의 관점에서의 재해석

오토타치바나히메 설화는 고대 일본야마토 정권 형성과 팽창 과정, 그리고 한반도와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특히 야마토 정권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해상 세력과의 충돌 및 통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1] 일부 연구에서는 오토타치바나히메의 희생이 당시 해상 활동의 위험성과 함께, 새로운 항로 개척이나 해상 세력 복속 과정에서 발생했을 수 있는 인신공양 풍습의 흔적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2] 또한, 야마토타케루의 동방 정벌 이야기는 고훈 시대 일본의 국가 형성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 과정에서 한반도 도래인 집단과의 교류 및 갈등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출신이나 배경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부족하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후대에 각색되고 신화화되는 과정에서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

참조

[1] 서적 日本書紀(上)全現代語訳
[2] 문서
[3] 서적 日本書紀(上)全現代語訳
[4] 서적 東京湾史
[5] 서적 古事記(中)全訳注
[6] 서적 古事記(中)全訳注
[7] 서적 日本書紀(上)全現代語訳
[8] 서적 古事記(中)全訳注
[9] 문서
[10] 서적 風土記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5
[11] 서적 風土記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5
[12] 서적 人物伝小辞典 古代・中世編
[13] 서적 동북아역사 자료총서123 역주 일본서기 1 동북아역사재단 2013
[14] 문서
[15] 서적 동북아역사 자료총서123 역주 일본서기 1 동북아역사재단 2013
[16] 서적 東京湾史
[17] 서적 역주 고사기 민속원 2009
[18] 문서
[19] 서적 역주 고사기 민속원 2009
[20] 서적 日本書紀(上)全現代語訳
[21] 서적 古事記(中)全訳注
[22] 웹사이트 亀井家譜
[23] 서적 風土記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5
[24] 서적 風土記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5
[25] 서적 人物伝小辞典 古代・中世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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