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토 정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야마토 정권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일본 열도 주요부를 지배했던 정치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1970년대까지는 '야마토 시대'와 '야마토 조정'으로 불렸으나, 고고학적 연구의 진전에 따라 '고훈 시대'와 '야마토 정권' 또는 '야마토 왕권'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야마토 정권의 수장은 대외적으로 '왜왕'으로 불렸으며, '치천하대왕' 등의 칭호도 사용했다. 야마토 왕권은 3세기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시대로부터 시작되어, 4세기 전방후원분 시대, 5세기 대형 고분 시대를 거치며 세력을 확장했다. 6세기에는 율령제 국가로 전환되었고, 7세기에는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며 천황을 칭하게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나라현의 역사 - 야마토국
야마토국은 일본의 옛 행정 구역으로, 나라현을 중심으로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치와 문화의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했다. - 나라현의 역사 - 야규번
야규번은 야규 신카게류의 창시자 야규 무네노리가 쇼군가의 검술 스승이 된 후 시작되어, 한때 하타모토로 격하되기도 했으나 다이묘로 복귀하여 야규 가문이 13대에 걸쳐 통치한 번으로, 역대 번주는 쇼군가의 검술 스승 역할을 수행했다. - 일본의 옛 나라 - 고시국
고시국은 7세기 후반 일본에 존재했던 국가로, 여러 기록에서 다르게 표기되었으며, 야마토 왕권의 지배가 미치지 못한 일본해 연안 지역이었으나 다이카 개신 이후 여러 개의 국으로 분할되었고, 그 명칭은 현재까지도 다양하게 사용된다. - 일본의 옛 나라 - 구마소
구마소는 고대 일본의 문헌에 등장하는 부족 이름으로, 현재의 미야자키현과 가고시마현 지역에 거주하며 야마토 정권에 저항한 세력으로 추정되며, 야마토타케루에 의해 정벌되었다는 전설과 함께 구마모토현 등의 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 야마토 정권 - 전방후원분
전방후원분은 일본에서 야요이 시대 분구묘에서 발전한 고분으로, 전방부와 후원부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반도 남부에서도 유사한 형태가 발견되어 고대사 연구에 활용된다. - 야마토 정권 - 야마토 시대
야마토 시대는 4세기 초 일본 긴키 지방을 중심으로 성립되어 오키미를 중심으로 한 귀족 계급이 형성되었으며, 쇼토쿠 태자가 국내 체제를 혁신하고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다가 710년 헤이조쿄 천도로 나라 시대로 이어진 시대이다.
야마토 정권 | |
---|---|
지도 | |
정부 | |
정부명 | 야마토 왕권 야마토 정권 |
배경색 | #daa520 |
대표 | 대왕 왜왕 |
지역 | 왜국 · 야마토 지방 |
정청 소재지 | 야마토 지방 |
기관 | 대신 (황별씨족) 대련 (신별씨족) |
이전 정부 | 니기하야히노미코토의 정권 (사서에 의한 전설) 휴가 삼대 (사서에 의한 전설) 지방 정권 |
비고 | 2세기 말 ~ 3세기에 야마토 지방과 기비, 세토 내해, 또는 북큐슈, 산인 지방, 도카이 지방까지 포함한 지역을 초월한 유력 호족들이 야마토 분지 동남부, 미와 산기슭의 마키무쿠 유적에 정치 연합을 형성한다. 8세기 율령제 확립 과정에서 "조정"으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
존속 기간 | |
시작 | 3세기 |
끝 | 701년 |
수도 | |
수도 | 아스카쿄 (538년 ~ 694년) 후지와라쿄 (694년 ~ 710년) |
언어 | |
공용어 | 고대 일본어 |
왕조 | |
왕조 | 야마토 왕조 |
종교 | |
종교 | 신토 불교 |
정치 체제 | |
정부 형태 | 군주제 |
지도자 | |
지도자 칭호 | 대왕 |
지도자 이름 | 오오도노 (507년–531년) |
지역 | |
지역 | 야마토국 |
주민 | |
데모님 | 야마토인 |
역사 | |
연대 | 고훈 시대 250년 ~ 538년 아스카 시대 538년 ~ 710년 |
주요 사건 | |
주요 사건 | 다이카 개신 642년 다이호 율령 701년 |
카바네 | |
카바네 |
2. 명칭에 대하여
1970년대 이전까지 일본 역사에서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시대 구분 명칭으로 '야마토 시대'가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일본 열도의 주요 부분을 지배하고 있던 정치 세력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이 일반적이었다.
1970년대 이후, 고분 발굴과 이화학적 연대 측정 및 연륜 연대 측정 등 과학적 조사 방법의 발전으로 고분 시대 연구가 진전되었다. 그 결과, '야마토 시대'라는 시대 구분 명칭과 '야마토 조정'이라는 정권 명칭이 부적절하다는 견해가 일본 역사 학계에서 유력해졌다. 1980년대 이후 시대 구분 명칭으로는 '고분 시대'가, 정권 명칭으로는 '야마토 정권(ヤマト政権)' 또는 '야마토 왕권(ヤマト王権)'이 보편화되었다.[130]
그러나 '야마토', '조정'이라는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며, '야마토 조정'을 사용하는 연구자도 소수 존재한다. 2020년 현재, 각종 미디어에서는 '정권', '왕권', '조정' 등의 표기가 혼재되어 통일되지 않았다.[131][132][133]
2. 1. '야마토'를 둘러싸고
8세기 이전에 완성된 『고사기』, 『일본서기』를 비롯한 문헌, 금석문, 목간 등에는 '大和(야마토)'가 아닌 '倭(야마토)'로 표기되었다. 3세기 야마타이국에 대한 기록이 위지왜인전에 나타난다. 701년 다이호 율령 제정으로 국명 등을 두 글자로 표기하도록 하면서 '大倭'가 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변경을 거쳐 757년경 '大和'로 바뀌었다. 요로 율령 이후 '大和' 표기가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에, 7세기 이전 정치 세력을 '大和'로 표기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견해가 있다.[13][14] 그러나 다케미쓰 마코토처럼 3세기 후반부터 이 명칭을 사용하는 연구자도 있다.[8]'야마토'라는 단어는 다음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15]
# 국명 '일본'의 훈독 (고대 일본 국가 전체)
# 령제국으로서의 '大和' (위에서 언급한 야마토국)
# 나라 분지 남동부 미와산 기슭 일대 (야마토국의 이소키군, 도이치군, 왜국조)
가장 좁은 의미인 3번은 출현기 고분이 집중된 지역으로, 왕권의 중추가 있던 곳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령제국 大和(2번)를 연상시키는 '大和' 표기보다 3번을 명확히 하는 '야마토'가 더 적절하다는 견해가 있다.
시라이시 다이치로는 나라 분지·교토 분지에서 오사카 평야에 걸쳐 북쪽의 요도가와 수계와 남쪽의 야마토가와 수계에서 고분 형태가 크게 다르다는 점에 주목한다.[106] 그는 '야마토'가 야마토가와 수계 지역, 즉 후대의 야마토와 가와치국(와카야마현 포함)을 합친 지역이라고 본다. 즉, 시라이시에 따르면 가타카나 표기 '야마토'는 1~3번의 의미 외에 야마토가와 수계(야마토와 가와치)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사용된다.
한편, 세키 가즈히코는 '大和' 표기는 8세기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倭', '大倭'로 표기되었으므로, 4~5세기 정권을 표현하는 데는 '왜왕권', '대왜왕권'이 적절하지만, 양자의 혼란을 막기 위해 '야마토' 표기가 타당하다고 주장한다.[16] 반면, 위에서 언급한 다케미쓰 마코토처럼 '大和' 표기를 사용하는 연구자도 있다.[8]
2. 2. '조정'을 둘러싸고
'조정'은 본래 천황이 정무를 보는 곳을 의미하며, 나아가 천자를 중심으로 한 관료 조직을 갖춘 중앙집권적 정부 및 정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군주 칭호로 '천자' 또는 '천황' 칭호가 확립되지 않았고, 여러 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다.예를 들어 세키 가즈히코(関和彦)는 '조정'을 '천황의 정치의 장'이라고 정의하고, 4세기・5세기의 정권을 '야마토 조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16] 기토 기요아키(鬼頭清明)도 이와이의 난 당시 긴키(近畿) 지방에 여러 왕조가 병립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계체 천황 이전은 '야마토 조정'과 무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야마토 조정'이라는 용어는 계체 천황 이후인 6세기부터 사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17]
2. 3. '국가', '정권', '왕권', '조정'
1970년대 전반까지 일본 역사에서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시대 구분 명칭으로 '야마토 시대'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 시기 일본 열도 주요부를 지배한 정치 세력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이 일반적이었다.1970년대 이후 고고학 발굴 조사가 진척되고, 리화학적 연대 측정이나 나이테 연대 측정 등 과학적 조사법이 사용되면서 고분의 편년 연구가 발전하였다. 고고학과 문헌사학의 협력으로 고분 시대 정치 조직에 대한 연구가 확장되면서, '야마토 시대'라는 시대 구분 명칭과 '야마토 조정'이라는 정권 명칭은 부적절하다는 견해가 유력해졌다. 1980년대 이후 시대 구분 명칭으로는 '고분 시대'가, 정권 명칭으로는 '야마토 정권(ヤマト政権)' 또는 '야마토 왕권(ヤマト王権)'이 보편화되었다.[130]
하지만 '야마토', '조정'이라는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며, '야마토 조정'을 사용하는 연구자도 소수 존재한다. 2020년 현재, 각종 미디어에서는 '정권', '왕권', '조정' 등의 표기가 혼재되어 통일되지 않았다.[131][132][133]
'조정(朝廷)'은 본래 천자가 정무를 행하는 곳을 의미하며, 나아가 천자를 중심으로 한 관료 조직을 수반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의미한다. 군주 칭호로서 '천황'이 성립되지 않고 여러 관제가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정'이라는 용어 사용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다. 세키 가즈히코(関和彦)는 '조정'을 '천황의 정치적 장소'로 정의하고, 4세기·5세기 정권을 '야마토 조정'이라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16]
세키 가즈히코는 '왕권'은 '왕의 정치적 권력', '정권'은 '초역사적인 정치 권력', '국가'는 '그것들을 포함하는 권력 구조 전체'라고 정의한다.[16] 용어 포함 관계는 조정 < 왕권 < 정권 < 국가 순이지만, '조정'을 '국가'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예도 있어 혼란이 있다고 지적한다.[16][18]
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는 '야마토 왕권'을 "4, 5세기 킨키 중추 지역에 성립한 왕의 권력 조직"으로, 『고사기』·『일본서기』의 천황 계보에서는 스진부터 유랴쿠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19] 또한 '왕권'을 "왕의 신료로서 결집한 특권 집단의 공동 조직"으로, "고분 시대에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정의한다.[20] 시라이시 다이이치로(白石太一郎)는 "일본 열도 각지 정치 세력의 연합체"를 '야마토 정권', "키나이 왕권"을 '야마토 왕권'으로 칭하여 양자를 구별한다.[21]
야마오에 따르면, 왕권의 시대 구분은 다음과 같다.
- 190년대-260년대: 왕권 태동기
- 270년경-370년경: 초기 왕권 시대
- 370년경-490년경: 왕권 완성 시대. 이후 왕권에 의한 종족 통합(490년대부터), 초기 국가 건설(530년경부터)이 이어진다.[20]
2. 4. '야마토 왕권'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1970년대 초까지 일본 역사에서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시기를 '야마토 시대'라고 불렀고, 이 시기 일본 열도를 지배한 정치 세력을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이라고 칭했다.1970년대 이후, 고분 발굴과 리화학적 연대 측정, 나이테 연대 측정 등 과학적 조사법의 발전으로 고분 시대 연구가 진전되면서, '야마토 시대'와 '야마토 조정'이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가 일본 역사 학계에서 유력해졌다. 이에 따라 '고분 시대'라는 용어가 '야마토 시대'를 대체하여 역사 연구 및 고등 교육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은 아직 확립된 기술이라고 부르기 어려우며, 많은 연구자들이 고분 시대의 정확성과 측정 방법에 대한 결점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7]
최근에는 '야마토 왕권(ヤマト王権)', '야마토 정권(ヤマト政権)', '왜 정권(倭政権)' 등의 용어도 사용되고 있다. 고대사학자 야마오 유키히사(Yamao Yukihisa)는 "야마토 왕권"을 "4세기와 5세기에 킨키 중부 지역에 성립한 왕의 권력 구조"로 정의하며,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천황 계보에서 스진 천황부터 유랴쿠 천황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19]
시라이시 다이이치로(Taiichiro Shiraishi)는 "야마토 정권"을 "일본 열도 전역의 정치 세력 연합"으로, "야마토 왕권"을 "키나이 왕권"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21] 즉, 야마토 정권은 일본 열도 각지의 정치 세력들이 연합한 형태이고, 야마토 왕권은 그 중심에 있던 킨키 지역의 왕권이라는 것이다.
2020년 현재, 언론에서도 '정권', '왕권', '조정' 등의 용어가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통일된 용어는 없다.[9][10][11][12]
2. 5. 분자생물학에 의한 남계 유전자 계통
해플로그룹 D-Z1500 변이를 가진 남성이 서기 1년경 출현했다.[107] 이 변이는 그 남성의 남계 후손에게 계승되어 서기 100년경에 D-1504 변이를 일으켰다.[109] 서기 200년경 D-1504의 남계 후손이 D-CTS8093 변이를 일으켰고, 이 변이를 가진 남성의 남계 후손들은 일본 열도 각지로 확산되어 현재 일본 남성의 약 10%를 차지한다.[108] CTS8093 변이를 가진 남성들의 계통이 서기 200년부터 700년까지 일본 열도 중심부에서 강대한 권력을 유지하며 국가 건설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여겨진다.[109]2. 6. '야마토 조정'
‘야마토 조정’은 율령 국가 성립 이전의 유력 정치 세력, 야마토 시대의 정부, 아스카 시대 또는 고훈 시대 후반의 중앙집권적 정부를 의미한다.1970년대 전반까지 일본 역사에서 4세기부터 6세기 무렵까지의 시기를 나타내는 시대 구분 명칭으로 '야마토 시대'가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일본 열도의 주요 부분을 지배하고 있던 정치 세력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이 일반적이었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의 고고학계 발굴 조사가 진척되고 중요한 고분들에서 발견된 성과가 축적되었다. 더욱이 고고학 조사에서 이화학적 연대 측정이나 연륜연대측정 등의 과학적인 조사법이 사용되기 시작하고, 그 정도가 향상되어 고분의 편년 연구도 한층 더 발전하였다. 또한 고고학적인 고분 조사와 문헌사학(일반적으로는 역사학)이 서로 제휴하여 조사와 연구를 하게 되었고, 그 대상은 고훈 시대의 정치 조직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야마토 시대’라는 시대구분명, ‘야마토 조정’이라는 정권명이 결코 적절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이 견해는 일본 국내의 역사학회 등에서 유력한 것으로 자리잡았고 1980년대 이후 시대 구분명으로써는 ‘고훈 시대’가, 또한 정권명으로써는 ‘야마토 정권(大和政権)’ 또는 ‘야마토 정권(ヤマト政権)’, (이 정권이 왕권임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야마토 왕권(大和王権)’ 또는 ‘야마토 왕권(ヤマト王権)’이라는 용어가 보급되었다.[130]
다만 ‘야마토’, ‘조정’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해서는 일본 학계에서도 여전히 여러 가지 견해가 병립하고 있으며 ‘야마토 조정’을 사용하는 연구자도 소수나마 존재하고 있다.
2020년 시점에서 일본의 각종 미디어에서는 ‘정권’, ‘왕권’, ‘조정’이라는 각 표기가 혼재되어 있으며 통일된 것은 없다.[131][132][133]
3. 수장의 칭호
야마토 왕권의 수장은 대외적으로 "왜왕(倭王)"이라 칭했고, 국내에서는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 "대왕(大王)", "대공왕(大公王)" 등으로 칭했다.[110] 5세기경부터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아메노시타시로시메스오키미)"이라는 국내용 칭호가 성립한 것이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밝혀졌는데, 이는 이 시기에 왜국이 중국 왕조와 다른 별개의 천하라는 의식이 생겨났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평가된다.[110]
4. 야마토 왕권의 역사
247년 대방군의 장정(張政)이 야마타이국(邪馬台国)과 쿠누노쿠니(狗奴国) 간의 전쟁에 대한 칙령으로 여왕을 훈계하였다. 『위지(魏志)』에 따르면, 히미코 사후 내전이 발생했으나, 히미코의 씨족 출신인 13세 소녀 이요(도요(臺與))가 왕이 되었다.[29]
266년 일본 여왕의 사절이 서진 낙양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 진구황후 시대에 인용된 진기의기(晋紀儀記, 현존X)에 있는데, 이 여왕은 도요로 추정된다. 『일본서기』는 도요의 행위를 진구황후의 행위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있다.[29] 『진서』에는 여왕 언급은 없지만, 사이전(四夷傳)과 오제기(武帝紀)에 266년 일본 조공이 언급된다.[29]
쿠누노쿠니는 야마타이국 남쪽에 있었다.[29]
4. 1. 왕권의 성립
야요이 시대 후한서 동이전에 따르면, 107년 “왜면토국왕 수승”이라는 기록을 통해 “왜”라는 영역과 “왕”이라는 군주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지 왜인전에는 “지금 사역이 통하는 곳 삼십 국”이라는 기록이 있어, 3세기까지 소국 분립 상태가 계속되었다고 추정된다.소국 간 정치적 결합은 『후한서』의 “환령의 사이에 왜국 크게 어지러워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주가 없었다”라는 기록처럼 견고하지 않았다. 고고자료에서도 깊은 해자와 토루를 두른 환호취락, 벼농사에 부적합한 고지의 고지성취락이 확인되며, 무덤에서 전쟁으로 인한 사망이 분명한 유골이 다수 출토되었다. 조몬 시대 수렵 도구였던 석촉은 야요이 시대에 대형화되어 무기로 변화, 소국 간 항쟁이 격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묘제는 산인 지방 이즈모의 사방출입분구묘(四隅突出墳丘墓)가 가장 발전, 후대 고분 시대 방분(方墳)이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의 원형이 되었다. 규슈 남부 지하식횡혈묘, 북부 옹관묘, 주고쿠 지방 상자식석관묘, 긴키 지방·히무카(미야자키현) 목관묘 등 지역별 주류 묘제가 다양했고, 토갱묘가 많은 동일본은 뼈를 토기에 넣는 재장묘 등 지역색이 뚜렷했다. 정방형 주구묘(方形周溝墓)는 긴키에서 서일본 각지로 퍼졌고, 규모가 큰 것도 있어 유력 수장이 나타났음을 짐작하게 한다. 야요이 시대 지역성은 긴키 동탁, 세토나이 지방 동검, 규슈 동과(중기)-동모(중기-후기) 등 청동기 종류 차이에도 나타난다.
247년 야마타이국(邪馬台国)과 쿠누노쿠니(狗奴国) 간 전쟁에 대방군 장정(張政)이 파견, 칙령으로 여왕을 훈계했다. 히미코 사후 남성 왕 즉위 후 내전 발생, 히미코 씨족 출신 13세 소녀 이요(도요)가 왕이 되어 통치했다. 『일본서기』 진구황후 시대 인용 진기의기(晋紀儀記, 현존X)에 266년 일본 여왕 사절이 서진 낙양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여왕은 도요로 추정된다. 『일본서기』는 도요 행위를 진구황후 행위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진서』에는 여왕 언급은 없지만, 사이전(四夷傳)과 오제기(武帝紀)에 266년 일본 조공이 언급된다.[29] 쿠누노쿠니는 야마타이국 남쪽에, 야마타이국 동쪽 바다 건너 천 리에 또 다른 일본 국가, 서쪽에 일출의 땅, 북서쪽에 읍곡현, 북쪽에 이토국이 있었다.[29]
시라이시 타이이치로는 "3세기 중엽, 히미코 사후 연합 질서 재편, '구노국' 연합 합병으로 세력권 확대한 야마타이국 중심 광역 정치 연합이 3세기 후반 이후 왜국 정부"라고 주장한다.[30] 당시 기나이 소국 연합 중심지가 나라현에 있었다는 것이 그 근거다.[31] 이 곳은 나라 분지 남동부 미와산 기슭, 아스카 시대 '대도시'가 있던 곳으로, 도시 계획 흔적 유구, 운하 등 토목 공사가 이루어졌다. 정치 도시로 제사용 도구 수납 토갱 30기 이상, 제사용 건물, 의식 가설 건물 등이 발견, 도카이 지방, 호쿠리쿠 지방, 긴키 지방, 아사세 세토우치, 기비국, 이즈모, 소수 북규슈 토기가 출토되었다. 가라코·가기 유적의 약 10배, 요시노가리 유적 약 6배, 7세기 말 후지와라궁에 필적, 다와라모토 유적 상회 가능성도 있는 거대한 유적이다.[32] 다케미쓰 마코토는 가모 유적이 '야마토 조정' 발상지라고 주장한다.[8]
특징적인 부채꼴 무덤(분구 길이 90m)은 다른 지역보다 크며, 산인 지방 이즈모 사우돌출형 분묘, 기비국 방패형 분묘 등 각 지역 문화를 포괄적으로 계승했다. 기비 분구 위 특별한 그릇, 항아리 채용은 기비가 야마토 중요 동맹국이었음을 시사한다.[33]
전방후원분 출현과 확산은 야마토 왕권 성립 기준으로 유력하다.[35] 성립 시기는 3세기 중엽, 후엽, 4세기 초 등 다양하다.[36][37][38] 야마토 왕권은 긴키 지방 및 각지 호족 포함 연합 정부, 오키미 중심 중앙집권 국가라는 견해가 공존한다.[36][37][38]
3세기 후반경부터 긴키 등 서일본 각지에 대규모 고분(전방후원분)이 출현, 몇 미터 길이 갈대 널에 시신 매장, 구덩이식 석실, 주술적 의미 거울, 무기류 부장품이 특징("출현기" 고분)이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 나무의 나이테 연대측정 한계, 측정치-문헌 기록 차이로 4세기 출현설도 있다.[7][39]

출현기(고분 시대 전기) 고분 균일성은 각 지역 수장 공통 무덤 제도, 공동 매장, 연합 성립, 광역 정치 연합 형성 견해로 이어진다. 킨키 중심 도카이・호쿠리쿠-규슈 북부 확산, 4세기경 스진 천황 재위 시기와 중복, 고분 집중 출현, 중앙 지배자 구니노미야쓰코 파견, 확산 견해도 있다.
200m 이상 출현기 고분은 나라현 사쿠라이시 하시하카 고분(280m), 덴리시 니시데노즈카 고분(234m)뿐, 나라 분지 남동부(좁은 의미 야마토) 집중, 타 지역과 규모 단절은 킨키(야마토) 중심 세력 주도 정치 연합 시사, "야마토 정권", "야마토 왕국", "전방후원분 체제"로 불린다.[40]
요시무라 다케히코는 스진 천황 이후 왕권을 "야마토 왕권"으로 지칭, 초기 야마토 왕권-야마타이국 관계에 대해 "고고학 연구로 야마타이국 킨키 지방 가능성이 높지만 역사적 증명은 아니다. 초기 야마토 왕국과 계보 관계도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고 서술한다.[41] "분묘 건설-정권/국가 성립 의미 여부 문제, 고분 위치-정치 기반 부여 종래 견해 재검토 필요, 특정 지역 영향력 수장 집단-특정 소지역 기반이면 『일본서기』 '잇따른 천도' 현상 불가"라고 지적, 전방후원분 출현 시기 선후 관계없이 야마토 왕권 성립 시기-안돈잔 고분(소진릉) 출현 시기 수십 년 시차를 주장한다.[41]
4. 1. 1. 소국의 발생
야요이 시대에는 107년 왜국왕 수이쇼(倭国王帥升일본어)에 대한 기록이 후한서 東夷伝일본어에 남아있어, '왜'라는 영역과 '왕'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지왜인전( 魏志倭人伝일본어)에 따르면 3세기까지도 소국 분립 상태가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24]한나라 한 환제와 한 영제 시대에 왜국이 크게 혼란스러워 소국들끼리 서로 싸웠다는 기록(桓霊の間、倭国大いに乱れ更相攻伐して歴年主なし일본어)은 소국 간의 정치적 결속이 약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고학적으로도 깊은 해자와 토루를 갖춘 환호취락, 고지대에 위치한 고지성 취락, 무기화된 석촉 등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증거들은 소국 간의 항쟁이 치열했음을 시사한다.[25]
4. 1. 2. 야마타이국과 여왕 히미코 정권
3세기 전반, '''야마타이코쿠'''(야마타이국)를 중심으로 한 왜의 여러 나라들이 히미코를 여왕으로 추대하여, 위(魏)에 사신을 보내 「친위왜왕」 금인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야마타이국에는 「어른」과 「아랫사람」 간의 신분 차이, 형벌, 조세 제도, 철화를 사용한 시장이 있었고, 중앙에서 파견된 감찰관으로 추정되는[111]「'''일대률'''」이 속국 이토국에 배치되는 등, 어느 정도 성숙한 통치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위지왜인전』에 따르면, 야마타이국의 동쪽에는 바다를 건너 천 리 이상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왜의 나라가 있으며, 야마타이국의 서쪽에는 회계가, 북서쪽에는 대방군, 북쪽에는 이토국이 있었다. 또한 야마타이국과 대립 관계에 있던 나라로 남쪽의 '''구누국'''을 언급하고 있다.[112]
히미코 사후 남왕이 즉위했으나 내란이 발생했고, 히미코 일족의 13세 소녀 일요(대여라고도 기록됨)가 왕위에 올라 다시 통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에 인용된 『진기거주[113]』에는 266년(태초 - 태시는 오기) 왜 여왕의 사자가 서진의 수도 낙양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여왕이 대여로 추정된다.[114] 현존하는 『진서』 사이전과 무제기에도 266년 왜인의 조공은 기록되어 있으나, 여왕이라는 기록은 없다.
야마타이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근기설」과 「규슈설」이 대립하는데, 근기설은 3세기에 근기에서 북부 규슈에 이르는 통일적인 광역 정권이 이미 성립되었다고 보는 반면, 규슈설은 북부 규슈 일대의 지방 세력으로 한정하며 일본 열도의 통일은 더 후대의 일이라고 본다.
4. 1. 3. 야마타이국과 마키무쿠 유적
나라 분지 남동부의 마키무쿠 유적은 당시 기내 지방 국읍 연합의 정치·경제 중심지였다고 여겨진다.[115] 이 유적은 아스카 시대에 “대시(大市)”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미와산 기슭에 위치하며, 도시 계획의 흔적이 있고, 운하 등 토목 공사도 이루어졌다. 제사용 도구를 수납한 구멍이 30여 기나 있고 제전, 제사용 가설 건물도 발견되었으며, 동해 지방에서 호쿠리쿠, 긴키, 아잔 세토나이, 기비, 이즈모는 물론이고 아주 조금이지만 북부 규슈의 토기도 들어왔다. 마키무쿠 유적은 국내 최대급 환호 취락인 다카라코·카기 유적의 약 10배, 요시노가리 유적의 약 6배에 달하는 7세기 말 후지와라궁에 필적하는 거대한 유적으로, 다가성 유적보다도 클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8] 야마타이국의 중심 취락으로 보는 설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마키무쿠 유적 근처에는 마키무쿠 고분군이라고 불리는 초기 전방후원분 군이 있는데, 그중에는 히미코의 유력 비정 후보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와카토코노히야쿠소히메노미코토'''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하시하카 고분'''이 있다. 이시즈카 고분 등 가리비 모양 고분(마키무쿠식 전방후원분)도 전방후원분에 앞서는 형식의 고분이면서 봉토 길이가 90미터에 달해 다른 지역을 훨씬 능가하는 규모이다.
국립민족학박물관은 탄소 연대 측정으로 마키무쿠 고분군의 성립 시기를 3세기 중반으로 보고 있으며, 히미코를 종주로 하는 소국 연합(야마타이국 연합)이 야마토를 근거지로 하는 “야마토 정권” 또는 “야마토 왕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다만 탄소 연대 측정법에는 50년 또는 100년 정도 오차가 있을 수 있어,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시라이시 타이이치로(白石太一郎)는 마키무쿠 고분군이 이즈모 지방의 사방 돌출형 분구묘, 기비국 지방의 방패모양 분구묘 등 각 지역 문화를 종합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기비 등에서 분구 위에 세워져 있던 특수기대·특수호가 채용되는 등, 야마토 정권의 맹우로서 기비 세력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한경, 후한경이나 도검류 등 한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은 북큐슈에서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지만, 마키무쿠 유적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따라서 『위지왜인전』에 나오는 활발한 한반도나 한국과의 교류는 증명되지 않고, 마키무쿠 유적은 야마타이국과는 관련이 없다는 견해도 있다.[115]
4. 1. 4. 야마토 왕권의 성립
야마토 왕권의 성립은 전방후원분의 출현과 확산을 기준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35] 성립 시기는 3세기 중엽, 후반, 말, 4세기 초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36][37][38] 야마토 왕권은 킨키 지방뿐 아니라 각지의 호족을 포함한 연합 정권이었다는 견해와 오키미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였다는 견해가 공존한다.[36][37][38]3세기 후반경부터 킨키 지방을 비롯한 서일본 각지에 대규모 고분이 나타났다. 이 고분들은 모두 전방후원분 형태였으며, 몇 미터 길이의 널빤지에 시신을 매장하고 구덩이식 석실을 만들었으며, 부장품으로는 주술적 의미를 지닌 거울과 무기류가 있었다. 이를 "출현기" 고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방사성탄소연대측정과 나무의 나이테 연대측정의 기술적 한계와 측정치와 문헌 기록 간의 큰 차이로 인해, 4세기 출현설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7][39]
출현기(고분 시대 전기) 고분의 균일성은 당시 각 지역 수장들의 공통적인 무덤 제도로 조성되었고, 수장들이 공동으로 매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들 사이의 연합이 성립되어 광역적인 정치적 연합이 형성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 연합은 킨키를 중심으로 도카이・호쿠리쿠에서 규슈 북부에 이르렀다. 한편, 4세기경에는 스진 천황의 재위 시대와 겹치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분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에 따라 중앙의 지배자가 각지에 국조(쿠니노미야츠코)를 파견하여 확산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200미터가 넘는 규모의 출현기 고분은 나라현 사쿠라이시에 있는 하시하카 고분(280미터)과 나라현 덴리시에 있는 니시데노즈카 고분(234미터)뿐이다. 이 고분들은 나라 분지 남동부(좁은 의미의 야마토)에 집중 분포하고, 다른 지역과 규모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이 정치적 연합을 킨키 지방, 특히 야마토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주도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이 정권을 "야마토 정권" 또는 "야마토 왕권"이라고 부른다. 균일한 전방후원분의 출현을 기반으로 정권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이 정권을 때로는 "전방후원분 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40]
4. 2. 왕권의 전개
247년 대방군의 장정이 야마타이국과 쿠누노쿠니 간의 분쟁을 보고하고 칙령으로 여왕을 훈계하였다. 『위지』에 따르면, 히미코 사후 내전이 발생했으나, 히미코의 씨족 출신인 13세 소녀 이요(도요)가 왕이 되어 다시 통치하였다. 266년 일본 여왕의 사절이 서진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여왕은 도요로 추정된다.[29]3세기 후반 긴키 지방에 '왕권'이 수립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왕권'이나 '왕족 혈통'의 존재 여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견해가 있다.[19] 규슈 왕조설 외에도 야마타이국과 야마토 왕국의 공존설, 고대 이즈모와 키비에 특정 세력이 존재했다는 다중 왕조설 등이 제기되었다.[42]
266년 이후 약 150년간 왜에 관한 기록이 대륙 사서에서 사라진다.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전반의 일본 열도는 사료가 부족하여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정치와 문화를 추론해야 한다.
4세기 중엽까지 도호쿠 지방 남부에서 규슈 지방 북부에 이르기까지 양식화된 고분이 확산되었다. 이는 동일본의 광대한 지역이 야마토를 중심으로 하는 광역 정치 연합(야마토 왕권)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초기 수장묘는 서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이, 동일본에서는 전방후방분이 많았다.
열도 각지의 수장은 야마토 왕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하고, 왕과 같은 형식의 고분 조영과 수장위 계승 의례를 행하여 야마토 정권 연합에 참여했다. 야마토 왕은 대외적으로 왜를 대표하고 무역 등의 이권을 차지했으며, 각 수장에게 철재 등을 공급하고 공물 등 물적・인적 대가를 제공받았다. 기비 외에 북간토 지역, 코즈케 등이 야마토 정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규슈 남부의 히우가나 무쓰의 센다이 평야도 중시되었는데, 이 지역들은 야마토 정권 연합의 프런티어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2. 1. 전방후원분 체제 (고분 시대 전기 전반)
늦어도 4세기 중엽까지는 도호쿠 지방 남부에서 규슈 지방 북부에 이르기까지 양식화된 고분이 확산되었다. 서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이, 동일본에서는 전방후방분이 많았다. 이러한 고분 분포는 열도 각지 수장 계층의 위계질서를 시사한다.[49] 전방후원분은 야마토 정권의 성립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로 여겨진다.[40]전기 고분 봉분 위에는 원통형 하니와가 배치되었고, 부장품은 주술적·종교적 색채가 짙었다.[51][54] 여기에는 마노로 만든 팔찌, 마가타마(구슬), 철제 무기, 농기구 등이 포함된다.[54] 이러한 부장품은 매장된 수장이 정치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농경 의례를 행하며 신을 숭배하는 사제이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55]
야마토 정권은 각 지역 수장들이 야마토 왕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하고, 왕과 같은 형식의 고분 조영과 수장위 계승 의례를 행하며 연합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야마토 왕은 대외적으로 왜를 대표하고 무역 등의 이권을 차지했으며, 각 수장에게 철재 등을 공급하고 공물 등 물적・인적 대가를 제공받았다.
4. 2. 2. 칠지도와 광개토대왕릉비 (고분 시대 전기 후반)
36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칠지도는 백제 왕세자가 마한에서 356년에 건국하여 야마토 왕에게 헌상한 것으로, 야마토 왕국과 백제 왕국 간의 동맹 체결을 보여준다.[56][57] 일본서기에는 십이지가 야마토 왕에게 헌상되었고, 십이지 순서를 두 단계 앞당겨 계산하면 실제 연도는 372년이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일본은 가야 여러 국가들, 특히 임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 지역에서 생산된 철 자원을 확보했다. 한편, 한반도 북부에는 만주 동부 산림 지역에서 기원한 퉁구스계 민족 국가인 예맥의 고구려가 313년에 대방군을 침략하여 멸망시켰고, 4세기 후반 남쪽으로의 확장을 계속했다.[59]
중국 길림성(吉林省)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고구려가 일본과 연결된 백제를 패퇴시키고, 400년과 404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일본과 싸워 신라를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구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와 왜인 관련 한국 문헌).[60]
4. 2. 3. 거대 고분의 시대 (고분 시대 중기 전반)
4세기 말부터 5세기까지는 고분 시대 중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무덤에 함께 묻는 물건(부장품) 중 무기와 갑옷의 비율이 높아지고, 말갖춤(마구)과 단갑(판갑옷), 투구(가부토) 등 기마전에 사용되는 물품이 증가했다. 이러한 변화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일본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구려 군대는 기병 부대를 중심으로 싸웠다.[61]이러한 부장품의 변화를 두고, 과거에는 북방 유라시아 유목민이 일본 농경민을 정복하고 "야마토 조정"을 세웠다는 기마민족설이 제기되기도 했다.[61] 그러나 5세기 이전에 한반도에서 야마토계 전방후원분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기마 기술, 갑옷, 도구가 일본에 급속히 유입되어 체제를 변화시켰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오히려 3세기 이후 일본에서는 수장 및 왕의 무덤 형식인 전방후원분이 계속 만들어졌고, 초기와 중기 고분 사이에 강한 연속성이 나타난다. 따라서 기마민족설은 현재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61]
중기 고분의 가장 큰 특징은 그 규모가 매우 크다는 것이다. 특히 5세기 전반, 오사카 평야 남부인 가와치 평야에는 호다야마 고분(전 오진 천황릉, 길이 420미터)과 오오야마 고분(전 닌토쿠 천황릉, 길이 525미터)이 축조되었는데, 이들은 진시황릉과 견줄 만한 세계 최대 규모의 무덤이다. 이는 야마토 왕권의 강력한 힘과 권위를 보여준다.
이러한 대규모 고분의 위치 변화는 야마토 왕권의 중심지가 나라 분지에서 가와치 평야로 이동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라이시 타이치로(白石太一郎)는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야마토-야나기모토 고분군(나라 분지 남동부), 사키타치나미 고분군(나라 분지 북부), 우마미 고분군(나라 분지 남서부), 후루이치 고분군(가와치 평야), 모즈 고분군(가와치 평야) 등 대규모 고분이 야마토 강 유역에 집중 분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고분 시대 내내 기나이 지배계급의 대규모 무덤이 이 수계 내에서 이동했음을 나타내며, 야마토 왕권 내 동맹 세력의 이동을 시사한다.[62]
4세기에 나라 분지 미와산 부근에 거대한 고분이 집중된 반면, 5세기에는 가와치에 대규모 고분이 축조된 것을 바탕으로 왕조 교체, 즉 "왕조교체설"을 주장하는 이론도 있다. 4세기(고분 시대 초기) 왕조를 미와 왕조("이리" 왕조 또는 스진 천황 왕조), 5세기(고분 시대 중기) 가와치의 세력을 가와치 왕조("웨이크" 왕조, 오진 천황 왕조 또는 닌토쿠 천황 왕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이론은 미즈노 유(水野裕)가 제기하고, 이노우에 미츠사다(井上光貞)가 오진 신왕조론으로,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가 가와치 왕조론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 왕조 교체론은 여러 측면에서 비판받고 있다.[64]
5세기 전반에는 야마토 이외의 지역, 예를 들어 휴가, 쓰쿠시, 기비, 고즈케, 탄고 등지에서도 대규모 전방후원분이 축조되었다. 그중 오카야마시의 조잔 고분(길이 360미터)은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고분이며, 기비 씨족의 강력한 힘과 철기구 사용, 그리고 야마토 정권 통합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각 지역의 강력한 씨족들이 야마토 왕권에 종속되면서도 각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웠음을 보여준다.[21]
5세기 초는 귀화인의 첫 번째 물결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왕인, 아치노오미(阿知使主), 유즈키노키미(柚木君) (야마토노아야 씨족과 하타 씨족의 조상)가 오진 천황 시대에 귀화했다고 전한다. 스에키 사용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며, 귀화인이 전래한 기술로 생각된다.[21]
5세기, 일본은 중국 역사서에 다시 등장한다. 왜의 오왕인 산(讃), 진(珍), 제(済), 흥(興), 무(武)는 중국 남조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고, 황제의 신하가 되어 칭호와 벼슬을 받았다. 중국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책봉 체제라고 한다. 이는 한반도 남부 국가(임나와 가라)에서 이권을 얻기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 제와 무는 한반도 남부를 지배할 권한을 부여받았다.[21] 왜왕들은 한반도 지배권을 중국 남조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책봉 체제에 편입되었다.[21]
4. 2. 4. 와카타케루 정권 (고분 시대 중기 후반)
ワカタケル大王|와카타케루 대왕일본어 시대인 5세기 후반에서 6세기는 귀화인 제2기의 시대였다.[66]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되자,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다.[65] 이들은 '임래한인(いまきのあやひと)'이라 불렸다.왜왕 무의 상표문(478년)에는 왜 왕권이 동, 서, 북의 여러 나라를 정복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67] 사이타마현의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금상감명철검)과 구마모토현의 에다후나야마 고분 출토 철도(은상감명대도) 명문에는 'ワカタケル大王|와카타케루 대왕일본어'(유랴쿠 천황)의 이름이 나타난다.[68] 이는 왜 왕권이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나리야마 고분과 에다후나야마 고분 출토 철검 명문을 통해, 당시 지방 호족들이 대왕을 섬기며 왕권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봉사 관계는 '인제'라고 불린다.[69] 명문에는 '천하를 다스리는…대왕'(에다후나야마),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돕다'(이나리야마)라는 문구가 있어,[70] 송나라 황제 중심의 '천하'와는 별개로, 왜 대왕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71]
귀화인들은 도작부, 금직부, 안작부, 화부 등 기술자 집단(품부)으로 조직되었고, 한자를 사용하여 야마토 왕권의 기록, 재물 출납, 외교 문서 작성 등을 담당했다.[72] 이러한 귀화인들의 조직화를 통해 반조와 부로 구성된 관료 조직이 점차 형성되었다.
5세기 후반, 야마토 왕권의 왕만이 대규모 전방후원분을 조영하면서 대왕의 권위가 크게 확대되었고, 야마토 정권의 성격이 변화했다.[73]
4. 3. 왕권의 동요와 변질
야마타이국과 쿠누노쿠니(狗奴国) 사이에 전쟁이 있었고, 247년 대방군의 장정(張政)이 칙령으로 여왕을 훈계하였다. 히미코 사후 남성 왕이 즉위했으나 내전이 발생, 13세 소녀 이요(壹與)가 왕이 되어 통치하였다. 266년 일본 여왕의 사절이 서진 낙양에 조공을 바쳤는데, 이 여왕은 도요(臺與)로 추정된다.[29]475년, 백제 한성이 고구려에 함락되고 개로왕 등이 살해되자 웅진으로 천도했다.[65] ‘금래한인’이라 불리는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5세기 후반~6세기 유랴쿠 천황 시대는 이주민 유입의 두 번째 물결 시기다.[66] 유랴쿠 천황은 왜의 다섯 왕 중 부왕으로 확인된다.
478년 「상표문」에는 왜 왕권이 동쪽, 서쪽, 북쪽의 많은 나라를 정복, 지역 호족들을 복속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67]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이나리야마 검)에는 471년 명문과 “와카타케루 대왕”이 새겨져 있다. 이는 유랴쿠 천황의 이름과 일치하며, 구마모토현 에다 후나야마 고분 출토 철검 명문에도 같다. “부왕의 상표문”의 정복 업적과 일치한다.[68]
이나리야마 고분 철검 명문에는 일본 동부 강력 씨족이 “대왕” 궁궐 호위무사장을, 에다 후나야마 고분 철검 명문에는 일본 서부 강력 씨족이 오키미 수행원 문관을 역임했음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왕권에 역할을 했다. 이 시대 야마토 왕권과 지방 세력 간 봉사 관계는 “닌세이”로 알려져 있다.[69] 명문에는 “천하를 다스리는…대왕”(에다 후나야마 고분),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돕는다”(이나리야마) 문구가 있다.[70] 이는 중국 황제 중심 천하(天下)와 별개로, 일본 오키미 중심 천하(天下) 개념 출현을 보여준다. 중국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질서가 오키미 아래 형성됨을 보여준다.[71]
금래한인들은 토기, 견직물, 안장 제작, 회화 등 기술자 집단(품부)으로 조직되어 동한씨 관리를 받았다. 야마토 왕권 기록, 물품 출납, 외교 문서 작성 등에 한자를 사용한 사람들은 사부(史部)라 불렸고, 야마토 왕권 조직에 책임졌다. 이주민 조직화를 계기로 관리자 반조와 부민으로 구성된 관료 조직이 만들어졌다.[72]
5세기 후반 고분 분포를 보면, 지쿠시, 키비, 코노, 효가, 탄고 등은 대형 전방후원분 축조가 중단, 200미터 초과 대형 전방후원분은 야마토 왕권 왕들만 축조했다. 이 시기 야마토 왕권 오키미 권위가 확대, 야마토 왕권 성격이 변화했다.[73] 히라노 쿠니오는 세계대백과사전 「야마토 죠테이」 항목에서 “왕권 중심 일정 수 신하 집단에 의한 정치 조직 형성 단계”로 “조정” 개념을 제창, 와카타케루 시대 “야마토 조정” 성립 견해를 밝혔다.[74]

와카타케루 사후, 5세기 후반~말엽 거대 전방후원분 축조가 쇠퇴, 소형화되고, 소규모 원분 등이 집단 조영되는 군집분이 나타나고, 일부는 횡혈식석실 채용도 보인다. 이는 거대 고분 축조 지역 대수장 권위가 저하, 중소 수장층 대두를 의미한다. 와카타케루 대왕 왕권 강화책은 성공했지만, 구래 세력 반발로 왕권이 일시 약화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5세기 후반 이후 지방 수장층과 야마토 왕권 관계는, 이나리야마 철검, 에다후나야마 대도 명문, 고고학적 해석으로, 지방 수장이 직접 야마토 대왕과 결부된 것이 아니라, 오오토모 씨, 모노노베 씨, 아베 씨 등 기내 씨족과 강한 유대를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 왕은 “대왕”으로 전제적 권력을 보유했지만, 대왕과 각지 수장층 유대는 희박해졌다. 대왕 지위 자체가 기내 호족 연합 기관으로 변질된다. 5세기 말~6세기 초, 『일본서기』에 단기간 세이네이 천황, 겐조 천황, 닌켄 천황, 부레쓰 천황 4명의 대왕이 잇따라 나타나 왕통 동요를 시사한다.
이러한 왕권 동요 배경으로, 이 시기 중국 왕조 교류도 단절된다. 야마토 왕권은 백제와 우호 관계로 한반도 남부 경제적·정치적 기반을 구축했지만, 백제 세력 후퇴로 야마토 왕권 반도 지위도 저하되었다. 철 자원 수입 감소, 왜 국내 농업 개발 침체로, 왕권과 호족들 정치적·경제적 구심력 저하 견해도 제시된다. 6세기 들어, 고구려에 압박받던 백제와 신라가 정치 체제 정비, 세력 회복, 가야 진출을 꾀한다.
6세기 초 오미 국~호쿠리쿠 지방 수장층 배경 응신 천황 5세손 오호도 대왕(계체 천황)이 야마토에 왕통을 통일했다. 그러나 나라 분지 진입에 20년이 필요, 왕권 확립이 순조롭지 않았다. 527년 규슈 북부 유력 호족 쓰쿠시노키미 이와이가 신라와 연계, 야마토 왕권과 군사 충돌했다(이와이의 난). 난은 진압, 왕권의 한반도 남부 진출 쇠퇴, 오오토모 가네무라 조선 정책 실패, 한반도 내 일본 세력 급속 약화.[120] 계체 천황 사후, 531년~539년 왕권 분열, 안칸 천황·센카 천황 왕권과 킨메이 천황 왕권 대립(신해의 변)도 있다. 오호도 대왕 이후, 도호쿠 지방~규슈 남부 전역 통합 급속 진행, 이와이의 난 후 둔창 설치, 국내 정치 통일 진전 견해가 유력하다. 540년 오호도 대왕 옹립 오오토모 가네무라는 실각한다.
4. 3. 1. 계체·킨메이조의 성립 (고분 시대 후기 전반)
5세기 후반부터 5세기 말까지, 와카타케루 대왕 사후 거대한 전방후원분 건설이 감소하기 시작하여 크기가 전반적으로 작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거대한 무덤을 건설했던 지역 수장들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소규모 수장들의 세력이 커지고 있음을 나타낸다.[75] 와카타케루의 왕권 강화 계획이 성공했지만 동시에 기존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왕권이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는 견해도 있다.[75]5세기 후반 이후 지역 수장들과 야마토 정권의 관계는, 이나리야마 철검과 에다 후나야마 철검의 명문과 고고학적 해석이 시사하듯이, 직접적인 연결이 아니라 간접적인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지역 수장들과 오토모 씨, 모노노베 씨, 아베 씨 등 기나이 지역의 유력 씨족들과의 강한 유대 관계를 바탕으로 야마토 왕권을 구성했던 것으로 보인다.[76] 오오키미(大王)로서 전제적인 권력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오오키미와 각 지역 수장들 간의 유대는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오오키미의 지위 자체가 점차 기나이 유력 씨족들의 연합 기관으로 변모해 갔다.[77]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까지의 『일본서기』에는 세이네이 천황, 겐조 천황, 닌켄 천황, 부레쓰 천황 등 네 명의 오오키미가 짧은 기간에 연이어 등장하여 왕통 자체가 심각하게 흔들렸음을 시사한다. 이후 워호도 왕(계체 천황)의 즉위는 왕통 단절 또는 왕조 교체로 간주해야 한다는 이론(왕조 교체론)도 있다.[78]
이러한 왕실 혼란을 배경으로 이 시기에는 중국 왕조와의 교류도 단절되었다. 야마토 왕권은 백제와의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한반도 남부에 경제적·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지만, 백제의 세력 약화와 함께 한반도 내 야마토 왕권의 지위도 상대적으로 쇠퇴하였다. 그 결과 철 자원 수입이 감소하고 와(倭)의 농업 발전이 정체되면서 왕권과 그에 속한 씨족들의 정치·경제적 구심력이 약화되었다는 견해도 있다.[76] 6세기에는 고구려의 압력을 받던 백제와 신라 모두 정치 체제를 정비하여 세력을 회복하고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6세기 초, 오미에서 호쿠리쿠 출신의 수장 출신 오오키미 워호도(계체 천황)가 야마토에 들어와 왕통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워호도가 나라 분지에 들어오기까지 20년이나 걸린 것은 이 왕권의 수립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527년, 오오키미 워호도(계체 천황) 재위 시, 규슈 북부의 유력 가문인 쓰쿠시노키미 이와이가 신라와 결탁하여 야마토 왕권과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이와이의 난). 반란은 신속히 진압되었지만, 이로 인해 한반도 남부로의 왕권 확장이 쇠퇴하고 오토모노 카나무라의 대외 정책이 실패하면서 한반도에서 와(倭)의 영향력이 급격히 흔들렸다. 계체 천황 사후, 531년부터 539년까지 왕권 분열 가능성이 제기되며, 안칸 천황과 센카 천황의 왕권과 킨메이 천황의 왕권이 대립했다는 주장도 있다(계체 천황과 킨메이 천황의 내전). 반면 오오키미 워호도(계체 천황) 등장 이후 도호쿠 지방에서 규슈 남부에 이르기까지 전 지역의 통합이 급속히 진행되었고, 특히 이와이 반란 이후 각지에 미야케(屯倉)라 불리는 직할 지역이 설치되면서 국내 정치 통일이 진전되었다는 견해가 주류다.[76] 참고로 540년에 오오키미 워호도(계체 천황)를 지지했던 오오토모노 카나무라는 실각하였다.[79][80]
4. 3. 2. 야마토 국가에서 율령제로 (고분 시대 후기 후반)
6세기 전반, 야마토 왕권은 철 모래를 이용한 제철 기술이 발달하여 철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짐에 따라 대외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562년, 가야 지역이 백제와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야마토 왕권은 한반도 내 권력 기반을 상실했다.[81]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반도로부터 역법 등 중국의 문화를 점진적으로 수용하고, 강력한 씨족과 인민들을 통합·조직화하여 내정을 강화했다.야마토 왕권 내부에서는 중앙 권력층 씨족 간의 지배권 다툼과 전장(田荘) 및 부민(部民)의 획득을 둘러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오토모 씨족 몰락 이후, 소가 이나메와 모노노베 오코시는 불교 수용 여부를 놓고 대립했다. 다음 세대에서는 오오미(大臣) 소가 우마코와 오무라지(大連) 모노노베 모리야가 무력 충돌(정미의 난)을 벌였다.[82][83]
정미의 난에서 승리한 소가 우마코는 하쓰세베 친왕을 오키미(大王, 숭준 천황)에 옹립했지만, 두 사람은 점차 갈등을 빚었고 결국 우마코는 오키미를 살해했다.[84] 이후 그는 자신의 조카인 누카타베 황녀를 스이코 천황으로 즉위시키고, 우마야도 왕(쇼토쿠 태자)과 함께 견고한 정치 기반을 구축하여 관위 십이계와 십칠조 헌법을 제정했다.[85] 이를 통해 관료 조직 정비를 기반으로 오키미의 권력 강화 및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6세기 중반에 일본에 전래된 불교는 통치와 지배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강조되었고, 『천황기』와 『국기』와 같은 역사서도 편찬되었다. 이후, 씨족 제도를 기반으로 한 정치 형태와 제도는 점차 해체되었고, 야마토 왕국(大和国) 시대는 종말을 고하며 고대 율령 국가가 성립되었다.[86]
4. 3. 3. '일본'으로
7세기 중반,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야마토 왕권에서도 중앙 집권화의 필요성이 높아져 난파궁에서 대화개신이 이루어졌다.[87] 진신의 난에서 대왕 계승권을 획득한 덴무 천황은 후지와라쿄 건설을 시작했고, 지토 천황 때에는 아스카에서 천도했다.[87] 701년 대보율령이 완성되었고, 이 무렵부터 야마토 왕권은 "일본국"을 국호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처음에는 "日本"이라고 쓰고 "야마토"라고 읽었다), 대왕을 대신할 새로운 군주 호칭을 공식적으로 "천황"으로 정했다.[87]5. 사서의 기록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자나기노미코토와 이자나미노미코토 사이에서 태어난 태양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가 황실의 조상이라고 한다.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자식인 아마노오시호미미노미코토와 타쿠하타치치히메(타카마가하루히노미코토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니니기노미코토(천손)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명에 따라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를 통치하기 위해 타카마가하라에서 히우가의 소 지역 다카치호봉에 강림하였다(천손강림).
니니기노미코토는 오야마쓰미노카미의 딸 키하나노사카야히메를 아내로 맞이하여 히비키노미코토(해신, 하야토의 조상), 호사카노미코토(산신, 황실의 조상), 히아케리노미코토(오와리씨의 조상)를 낳았다. 산신과 해신에 관한 신화로는 「산신과 해신」이 있다.
호사카노미코토는 해신의 딸 토요타마히메를 아내로 맞이하여 히코나기사와카우카스사후키야마쓰히코노미코토를 낳았다. 히코나기사와카우카스사후키야마쓰히코노미코토는 어머니의 여동생 타마요리히메를 아내로 맞이하여 이쓰세노미코토, 이나이노미코토, 미케이리노노미코토, 이와토히코노미코토를 낳았다. 니니기노미코토부터 히코나기사와카우카스사후키야마쓰히코노미코토까지의 3대를 「히우가 삼대」라고 부른다.
5. 1. 전사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마테라스오미카미가 황실의 조상이며, 그의 손자인 니니기노미코토(천손)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명에 따라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를 통치하기 위해 히우가의 소 지역인 다카치호봉에 강림하였다(천손강림).[1]5. 2. 신무동정과 건국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와레히코노미코토는 히무카국에 있다가 갑인년에 45세가 되었을 때 동쪽으로 이동할 것을 권유하고 그 땅(나라 분지)으로 신무동정을 시작하였다. 하야스이노토에서는 쿠니쓰카미인 진히코(와코조의 시조)를 만나 그에게 시이네쓰히코라는 이름을 주고 길잡이로 삼았다. 치쿠시국우사의 이치주토궁, 같은 국 오카 수문을 거쳐 아키국의 에노미야, 키비국의 다카시마궁에 도착하였다. 이와레히코는 야마토의 지도자 나가스네히코와 싸웠고, 니기하야히노미코토는 그의 주군인 나가스네히코를 죽이고 귀순하였다. 신유년에 이와레히코노미코토는 카시하라궁에서 처음으로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신무 천황). "시구우텐카노텐노(始馭天下之天皇)"라 칭해졌다. 전승에 따르면 이것이 궁정과 황실의 기원이며, 일본의 건국으로 여겨진다.5. 3. 전승의 시대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자나기노미코토와 이자나미노미코토 사이에서 태어난 태양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가 황실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 자식인 아마노오시호미미노미코토와 타쿠하타치치히메(타카마가하루히노미코토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니니기노미코토(천손)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명령에 따라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를 통치하기 위해 타카마가하라에서 히우가의 소인 다카치호봉에 강림하였다(천손강림).니니기노미코토는 오야마쓰미노카미의 딸인 키하나노사카야히메를 아내로 맞이하여, 히비키노미코토(해신, 하야토의 조상), 호사카노미코토(산신, 황실의 조상), 히아케리노미코토(오와리씨의 조상)를 낳았다. 산신과 해신에 관한 신화로는 「산신과 해신」이 있다.
호사카노미코토는 해신의 딸인 토요타마히메를 아내로 맞이하여, 히코나기사와카우카스사후키야마쓰히코노미코토가 태어났다. 히코나기사와카우카스사후키야마쓰히코노미코토는 어머니의 여동생인 타마요리히메를 아내로 맞이하여, 이쓰세노미코토, 이나이노미코토, 미케이리노노미코토, 이와토히코노미코토를 낳았다. 니니기노미코토부터 히코나기사와카우카스사후키야마쓰히코노미코토까지의 3대를 「히우가 삼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수 | 이름 | 비고 |
---|---|---|
1 | 신무 천황(신일본이와요히코 천황) | |
2 | 스이제이 천황(신누나가와미미 천황) | |
3 | 안네이 천황(이소키즈히코타마데미 천황) | |
4 | 이토쿠 천황(다이니혼히코시게토모 천황) | |
5 | 고쇼 천황(칸쇼히코코시키네 천황) | |
6 | 고안 천황(니혼타리히코쿠니오시히토 천황) | |
7 | 고레이 천황(다이니혼네코히코타마타마 천황) | |
8 | 고겐 천황(다이니혼네코히코쿠니우키 천황) | 여동생으로 전해지는 야마토토토히모모소히메노미코토는 최고(最古)의 거대한 전방후원분[121]로 여겨지는 하시하카 고분의 매장자로 전해진다. 이 고분의 축조를 계기로 각지에서 전방후원분이 축조되기 시작한다. |
9 | 가이카 천황(와카니혼네코히코오히히 천황) |
스이제이 천황부터 가이카 천황까지는 기키에 업적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결사팔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수 | 이름 | 비고 |
---|---|---|
10 | 스진 천황(미마키리히코이소기와케 천황) | 「미하츠쿠니시라스메라미코토」라고도 불리며, 이 별칭은 신무 천황의 별칭과 동훈이다. 미와 씨에 오모노누시(大物主大神)를 모셨다. 일본서기에는 사도장군을 파견했다고 전하며, 이 장군 파견 기사가 최초의 본격적인 일본 통일 운동이다. 실존 가능성이 인정되는 가장 오래된 천황. |
11 | 스이닌 천황(타치메이리히코이소사카야 천황) | 씨름과 하니와의 기원은 수진 천황 시대에 있다고 여겨진다. |
12 | 게이코 천황(오오타리히코시네카리베 천황) | 규슈 정벌에 나섰고, 황자 야마토타케루은 동국으로 원정을 갔다고 전해진다. |
13 | 세이무 천황(와카타리히코 천황) | 아버지와 야마토타케루의 원정·평정을 받아 이 시대에 도호쿠에서 규슈에 이르는 여러 나라에 국조와 현주를 설치했다. 이것은 4세기 후반까지 도호쿠에서 규슈 남부에 걸쳐 고분(전방후원분, 전방후방분)이 축조된 것과 일치한다. |
14 | 주아이 천황(타리나카히코 천황) | 진구 황후는 주아이 천황이 죽은 후 구마소 정벌과 삼한 정벌을 하고, 그 후 즉위하지 않고 정무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
15 | 오진 천황(호다 천황) | |
16 | 닌토쿠 천황(오오사사키 천황) | “성제(聖帝)”라고 불리며, 가와치 평야의 개척에 힘썼고, 민가의 부엌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을 알고 조세를 면제하는 등 인정을 베푼 일화로 알려져 있다. |
17 | 리추 천황(오오에니키라이호베 천황) | |
18 | 한제이 천황(미즈하베 천황) | |
19 | 인교 천황(유 아사츠마 와카고 스쿠네 천황) | 이 시대에 중앙 호족과 각지의 호족에게 성씨를 주었다고 전해진다. |
20 | 안코 천황(아나호 천황) | |
21 | 유랴쿠 천황(오오하쓰세 와카타케 천황) | 『송서』왜국전에 기록된 “왜왕 무(倭王武)”로서 왜5왕의 마지막 인물로 여겨진다. 사이타마현의 이이누나야마 고분 출토 철검(금착명 철검)의 신해년(471년) 기년명, 구마모토현의 에다후네야마 고분 출토 철도 명에는 유랴쿠 천황의 이름과 일치하는 인명이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실존이 거의 확정된 가장 오래된 천황. |
5. 4. 고분 시대
계체 천황은 무열 천황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오오토모노 카네무라 등이 오미국 다카시마군에서 태어나 에치젠국에서 자란 응신 천황 5세손인 오토토리노 오우를 추대하여 즉위하였다.이에 황통이 단절되었다는 견해(왕조 교체설)가 있다. 계체 천황은 실재가 확정된 천황이며, 이후의 천황에는 실재가 의심되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현대까지 이어지는 모든 황실의 시조로 여겨진다.
- 제27대: 안간 천황
- 제28대: 선화 천황
- 제29대: 흠명 천황
- 제30대: 민달 천황
- 제31대: 용명 천황
- 제32대: 숭준 천황
숭준 천황은 소가노 우마코의 명에 의해 암살당했고, 최초의 여제가 되는 추고 천황이 제33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6. 야마토 왕권의 연속성
와다 스이는 야마토 왕권에서 율령 국가로 이어지는 동안 본거지가 야마토에 일관되게 있었다고 주장하며, '와마토덴다(야마토의 둔전)'를 그 예로 들었다.[1] 다이호전령에 있는 다이와국의 30정의 둔전은 다이카 이전 시대의 와마토덴다의 계보를 잇는다고 여겨지며, 덴표 연간의 다이와국 정세장 등에서 도시군과 조카군(그리고 조조군)에 존재했던 것이 알려져 있다.[1] 『고사기』에는 경행천황 때에 정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현 대왕의 지위에 부속되는 왕위의 상징이었다고 한다.[1] 이는 율령 국가 천황제로 이어지기 때문에 야마토 왕권에서 율령 국가로 왕권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야마토'가 이소키군·토이치군을 중심으로 하는 미와산 기슭의 땅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고 한다.[1]
이시카미 신궁의 호쿠라는 야마토 왕권이 지방 호족으로부터 헌상받은 검과 신보를 보관하는 무기고였는데, 계보로는 3세기의 히미코의 칼과 거울과 연결된다는 것을 4세기의 칠지도가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2] 세습이나 왕권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고 해도 야마토 왕권, 고대 천황에게는 일관된 연속성이 있다고 여겨진다.[2]
7. 분자생물학적 고찰
Y염색체는 부계를 따라 장기간 추적하기에 적합하며, 1990년대 후반부터 Y염색체 해프로그룹 연구가 빠르게 발전했다.[122] SNP에 의해 정의되는 죠몬계 D1a2a 계통은 일본인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가지이며, CTS8093 SNP는 약 2000년 전에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남성의 10%를 차지한다. 이는 일본 지배자 계층으로 장기간 군림해 온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O1b2 계통은 일본인의 야요이계 후손을 나타낸다. C 계통 중 M8 SNP를 가진 계통은 YAP 변이가 없는 죠몬계이며, 일본 열도에 처음 도착한 계통으로 여겨진다.[125] M213 SNP를 가진 C 계통은 몽골, 여진, 만주 등 북방 유목 민족과 조상을 공유하며, 역사 시대 이후에 도래한 것으로 보인다.
O2 계통은 중국, 조선, 베트남 등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지만, 일본에서는 D1a2a, O1b2 두 계통보다 적게 나타난다.[126]
8. 신화 전승을 근거로 하는 여러 가지 일
신무 천황의 가시하라궁(橿原宮) 즉위(기원전 660년)를 기원으로 하는 '황기(신무천황 즉위 기원)'가 있다.[128] 황실에는 '삼종신기'라 불리는 신보, 즉 천조대신에게 받았다는 거울(야타노카가미), 칼(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 구슬(야사카노마가타마)이 전해진다.[128] 야마토 시대부터 이어지는 황실 행사로는 사방배(1월 1일), 신장제(10월 17일), 신상제(11월 23일)가 있으며, '대부' 역시 대보율령에 명문화된 오래된 궁중제사이다.
8. 1. 황기와 건국기념의 날
신무 천황의 가시하라궁(橿原宮) 즉위는 기원전 660년에 해당하며, 이를 기원으로 하는 기년법이 '황기(신무천황 즉위 기원)'이다.[128] 1940년은 황기 2600년에 해당하여, '기원 2600년 기념 행사'가 전국적으로 성대히 기념되었다.[128] 이 해에 생산이 시작된 영식 함상 전투기(일명 '제로센')는 황기의 하위 두 자릿수가 '00'인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128]
신무 천황의 즉위일은 『일본서기』에 따르면 음력 1월 1일이지만, 메이지 정부는 태양력 채택에 따라 1873년 '태정관포고' 제344호로 신력 2월 11일을 즉위일로 정했다.[128] 이는 서력 기원전 660년의 입춘에 가장 가까운 날이 신력 2월 11일에 해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128] 전쟁 전에는 2월 11일이 기원절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128] 기원절은 대일본제국헌법 공포일(1889년 2월 11일), 히로타 고키가 제안한 문화훈장 제정일(1937년 2월 11일)에도 선택되었고, 쇼와 천황 즉위 후에는 사방배(1월 1일), 천장절(4월 29일), 메이지절(11월 3일, 메이지 천황 생일)과 함께 '4대 절기'로 불리는 축제일이었다.[128]
기원절은 태평양 전쟁 종전 후 1948년에 폐지되었다.[128] '건국기념일'을 설치하는 안은 여러 번 제출되었지만 신무 천황의 실존 여부 등으로 인해 성립되지 못하고, 1966년에 타협안으로 '건국기념의 날'이 성립되었다.[128] 국민의 휴일에 관한 법률 제2조에서는 '건국기념의 날'의 취지를 "건국을 기념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1966년 축일법 개정으로 '국민의 휴일'에 추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128]
8. 2. 신보와 황실 행사
황실에 전해지는 신보는 '삼종신기'라고 불리며, 천조대신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거울(야타노카가미), 칼(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 구슬(야사카노마가타마)을 가리킨다.[128]야마토 시대에 기원을 가지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행사로는 1월 1일의 '사방배', 10월 17일의 '신장제', 11월 23일의 '신상제'가 있다. '대부' 또한 대보율령에서 처음으로 명문화된 오래된 궁중제사이다.
9. 관련 신사
- 이세 신궁: 천황가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를 모시고 있다.[88][89][90] 다루히토의 넷째 딸인 와타히메노미코토가 아마테라스를 섬길 땅을 찾아 야마토, 오미, 미노를 동쪽으로 여행한 후, 신탁을 받아 대신이 있는 이세에 신궁을 세운 것이 이 신궁의 기원이라고 한다.[91] 주신은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이다.
- 오미와 신사: 나라 분지의 남동쪽에 위치해 있으며,[92] 야마토 궁정의 발상지로 여겨진다.[1] 짐무 천황 동정 이전 이 지역의 최초 주민이었던 미와 씨족의 우지가미이다.[93] 주요 신은 오모노누시노오카미이며, 미와산은 신성한 산이다. 오오쿠니누시노카미가 자신의 사치미타마인 오오미와의 신을 일본의 삼제산(미와산)에 궁을 지어 모시게 한 것이 이 신사의 기원이라는 설이 있다. 오늘날에도 본전을 가지지 않고, 배전에서 미와산을 신체로 받들어 모시는 고신토(원시 신도)의 형태를 남기고 있다.
- 아쓰타 신사: 주요 신은 일본 삼종신기 중 하나인 쿠사나기의 검의 신인 아쓰타노오카미이다.[97][98] 야마토타케루는 오와리 국 주지사의 딸인 미야즈히메와 결혼하여 노코노에서 쓰러졌다고 한다.[99] 신체는 쿠사나기노츠루기이다.
- 이소노카미 신사: 짐무 천황 때부터 섬겨 온 강력한 씨족인 모노노베 씨족의 우지가미이다. 스진 천황 재위 중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참조
[1]
웹사이트
「大和朝廷」ではなく、「ヤマト王権」という用語を使うのはなぜですか。|株式会社帝国書院
https://archive.toda[...]
[2]
서적
Gardner's art through the ages
Thomson/Wadsworth
[3]
서적
Lonely Planet Japan
https://archive.org/[...]
Lonely Planet Publications
[4]
서적
A History of Japan: From Stone Age to Superpower
https://books.google[...]
Springer
2012-04-17
[5]
웹사이트
Kotobank - Kuni no miyatsuko
https://kotobank.jp/[...]
2022-06-19
[6]
서적
A History of Japan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14-09-11
[7]
웹사이트
木材の年輪年代法の問題点―古代史との関連について
http://washiyamataik[...]
2022-06-16
[8]
서적
Kodai nihon tanjō no nazo : Yamato chōtei kara tōitsu kokka e
PHP Kenkyūjo
2006
[9]
웹사이트
全く新しい古墳の楽しみ方を紹介します! あなたも絶対行きたくなる!ミステリアス古墳スペシャル |NHK_PR|NHKオンライン
https://www6.nhk.or.[...]
2020-03-22
[10]
웹사이트
まほろば再発見:黒塚古墳(天理市) 「卑弥呼の鏡」大量出土 /奈良
https://mainichi.jp/[...]
2022-06-13
[11]
웹사이트
ヒエ塚古墳、全長は129メートル 発掘調査、基底石など発見 天理 /奈良
https://mainichi.jp/[...]
2022-06-13
[12]
웹사이트
<まちの話題>伊勢山神社春の大祭 8日、豊作と世の平安祈る {{!}} まちの話題 {{!}} 佐賀新聞ニュース
https://www.saga-s.c[...]
2022-06-13
[13]
서적
Yamato Imperial Court
Heibonsha
[14]
서적
Kofun asuka jidai.
新人物往来社
1990-12
[15]
서적
(추정)
[16]
서적
Kofun asuka jidai.
新人物往来社
1990-12
[17]
서적
Yamato chōtei to Higashi Ajia
Yoshikawa Kōbunkan
[18]
서적
Shinpen kokumin Nihon shi
Hara Shobō
[19]
서적
Nihon kodaishi kenkyū jiten
Tōkyōdō Shuppan
1995
[20]
서적
Kofun no hajimari o kangaeru
Gakuseisha
2005
[21]
서적
(추정)
[22]
서적
Kojiki, Nihon shoki o shiru jiten
Tōkyōdō Shuppan
[23]
서적
Sekai dai hyakka jiten. 001.
Heibonsha
1988
[24]
학술지
In Pursuit of Himiko. Postwar Archaeology and the Location of Yamatai
https://www.jstor.or[...]
1996
[25]
웹사이트
城の起源、弥生時代の環濠集落 吉野ケ里遺跡
https://www.asahi.co[...]
2022-06-16
[26]
웹사이트
下戸とは
https://kotobank.jp/[...]
2022-06-18
[27]
웹사이트
一大率とは
https://kotobank.jp/[...]
2022-06-18
[28]
웹사이트
Yamatai ancient kingdom, Japan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2-06-16
[29]
문서
Wajinden, Gohan Sho Yaden, Song Sho Ya Kokuden, Sui Sho Ya Kokuden
[30]
서적
(추정)
[31]
서적
邪馬台国の候補地・纒向遺跡
Shinsensha
2008
[32]
서적
(추정)
[33]
서적
(추정)
[34]
서적
邪馬台国と箸墓古墳
財団法人古代学協会
[35]
서적
畿内政権論, 前方後円墳体制論
[36]
웹사이트
「ヤマト王権」はどこに存在し、どの程度の地域を支配していたのか?(歴史人) - Yahoo!ニュース
https://news.yahoo.c[...]
2022-06-18
[37]
웹사이트
日本書紀を語る講演会 第4回 『書紀』の語るヤマト王権と河内|なら記紀・万葉
https://www3.pref.na[...]
2022-06-18
[38]
뉴스
ヤマト王権とは何か 奈良県の坂さん、新説で迫る:朝日新聞デジタル
https://www.asahi.co[...]
2020-03-18
[39]
웹사이트
速報「長野県の遺跡発掘 2015」講演会
https://naganomaibun[...]
2023-09-03
[40]
논문
「日本農耕社会の成立過程」都出比呂志
https://iss.ndl.go.j[...]
1991-01
[41]
서적
Iwanami kōza Nihon tsūshi
Iwanami Shoten
1993-1996
[42]
서적
幻想の多元的古代 万世一系イデオロギーの超克
[43]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44]
논문
Consideration for rebuilding the Kofun period: Is the front-back circle burial mound the prehistory of the Ritsuryo nation?
National Museum of Japanese History and Folklore
[45]
웹사이트
古墳時代前期とは{{!}}羽曳野市
https://www.city.hab[...]
2022-06-18
[46]
웹사이트
古墳時代中期とは{{!}}羽曳野市
https://www.city.hab[...]
2022-06-18
[47]
웹사이트
古墳時代後期とは{{!}}羽曳野市
https://www.city.hab[...]
2022-06-18
[48]
논문
Kofun and Asuka Periods, ca. A.D. 250–710
http://lcweb2.loc.go[...]
Federal Research Division, Library of Congress
2007-04-06
[49]
논문
日本古代国家形成論序説-前方後円墳体制論の提唱-
[50]
서적
世襲王権の成立
[51]
서적
Le Japon: Dictionnaire et Civilisation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Reference Library
[52]
서적
Kofun jidaishi
Yūzankaku
2005
[53]
서적
Shinwa kara rekishi he (神話から歴史へ)
Chūō Kōronsha
[54]
서적
Nihon rekishi daijiten (日本歴史大辞典)
Kawade Shōbō Shinsha (河出書房新社)
[55]
서적
Kodai Shintō no honshitsu
Hōsei Daigaku Shuppankyoku
1989
[56]
서적
Encyclopedia of the Japanese Sword II
[57]
서적
Die Übernahme der chinesischen Kultur in Japans Altertum
LIT Verlag
[58]
서적
'History Wars' and Reconciliation in Japan and Korea. The Roles of Historians, Artists and Activists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US
2016
[59]
서적
Korea: Tradition and Transformation - A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Hollym International
[60]
서적
Sources of Korean Tradition: From the Sixteenth to the Twentieth Centuries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6-11-21
[61]
서적
Himiko igo : yomigaeru kūhaku no sekai
Tokuma Shoten
1982
[62]
서적
[63]
서적
[64]
서적
[65]
웹사이트
History of Baekje Seen through Capital Cities- Songpa-Gu
https://www.songpa.g[...]
2022-06-16
[66]
웹사이트
Fifth-Century Building Unearthed in Japan - Archaeology Magazine
https://www.archaeol[...]
2022-06-18
[67]
서적
宋书
中华书局
[68]
서적
The Emergence of Japanese Kingship
Stanford University Press
[69]
서적
国造制・部民制の研究
八木書店
[70]
서적
謎の七支刀 : 五世紀の東アジアと日本
https://iss.ndl.go.j[...]
中央公論社
1983
[71]
웹사이트
初期ヤマト王権とは? 〜彼らはどこから来たのか?〜 - 時空トラベラー THE TIME TRAVELER'S PHOTO ESSAY
https://blog.goo.ne.[...]
2022-06-18
[72]
서적
日本史大事典
[73]
논문
長突円墳(前方後円墳)は大和王権の政治的記念物か
雄山閣
2005
[74]
백과사전
World Encyclopedia 1988
Heibonsha
[75]
서적
関東の後期古墳群
[76]
인용
1999
[77]
인용
1999
[78]
서적
Nihongi
1998
[79]
서적
Kodansha Encyclopedia of Japan: Niju-Saka
https://archive.org/[...]
Kodansha
1983
[80]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07-30
[81]
서적
仏教の勝利
Shogakkan
1980
[82]
서적
The Prince and the Monk: Shōtoku worship in Shinran's Buddhism
Shogakkan
1980
[83]
서적
Practically Religious: Worldly Benefits and the Common Religion of Japan
University of Hawaiì Press
1998
[84]
웹사이트
Sushun {{!}} emperor of Japan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2-06-16
[85]
서적
Nihongi: Chronicles of Japan from the Earliest Times to A.D. 697
Keagan and Co.
1896
[86]
서적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Volume One: From Earliest Times to 1600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2
[87]
서적
Premodern Japan: a Historical Survey
Boulder, CO
2014
[88]
웹사이트
Section XXXIII.—The August Descent from Heaven of His Augustness the August Grandchild
https://www.sacred-t[...]
1882
[89]
서적
Kojiki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90]
위키소스
Nihongi: Chronicles of Japan from the Earliest Times to A.D. 697
Kegan Paul, Trench, Trübner & Co.
1896
[91]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1834
[92]
서적
Visiting Famous Shrines in Japan
1964
[93]
문서
三輪高宮家系・大神朝臣本系牒略による。
[94]
서적
Cambridge History of Jap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95]
서적
Himiko and Japan's elusive chiefdom of Yamatai: archaeology, history, and mythology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7
[96]
서적
Buddhas and Kami in Japan: Honji Suijaku as a Combinatory Paradigm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3-08-29
[97]
서적
Japan at War: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ABC-CLIO
2013
[98]
웹사이트
玉籤集裏書 (Gyokusenshū uragaki)
http://kindai.ndl.go[...]
1725, 1898
[99]
서적
Studies in Shinto and shrines
Ponsonby Memorial Society
1953
[100]
뉴스
詳説日本史
山川出版社
1979
[101]
뉴스
まほろば再発見:黒塚古墳(天理市) 「卑弥呼の鏡」大量出土 /奈良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20-03-23
[102]
뉴스
ヒエ塚古墳、全長は129メートル 発掘調査、基底石など発見 天理 /奈良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20-02-29
[103]
뉴스
<まちの話題>伊勢山神社春の大祭 8日、豊作と世の平安祈る
https://www.saga-s.c[...]
佐賀新聞
2023-04-08
[104]
문서
恭仁京完全廃棄
784-09
[105]
서적
シャーマニズムの世界
講談社
1992-12-10
[106]
문서
淀川水系と大和川水系における前方後円墳・前方後方墳の分布
[107]
문서
年代推定
[108]
웹사이트
An update and frequency distribution of Y chromosome haplogroups in modern Japanese males
https://www.nature.c[...]
[109]
웹사이트
FTDNA Ancestral Path of CTS8093
https://discover.fam[...]
[110]
문서
小中華主義とヤマト王権の天下観
[111]
문서
魏の刺史との類似性
[112]
문서
魏志倭人伝からの引用
[113]
문서
文献の現存状況
[114]
문서
日本書紀における台与の記述
[115]
서적
邪馬台国と箸墓古墳
財団法人古代学協会
[116]
뉴스
圧倒的な王権の力証明」国内最多銅鏡の桜井茶臼山古墳 奈良・橿原で講演会
THE SANKEI NEWS
2023-11-06
[117]
뉴스
圧倒的な王権の力証明」国内最多銅鏡の桜井茶臼山古墳 奈良・橿原で講演会
THE SANKEI NEWS
2023-11-06
[118]
참고문헌
[119]
문서
日本書紀・古事記における葛城氏と吉備氏の没落
[120]
문서
日本書紀における大伴金村と任那
[121]
웹사이트
http://www.kashikoke[...]
橿考研
[122]
웹사이트
Y chromosome and Mitochondrial DNA haplogroups
http://www.scs.uiuc.[...]
2008-04-14
[123]
문서
Y染色体ハプログループの地域差
[124]
웹사이트
Atlas of the Human Journey
https://www3.nationa[...]
National Geographic
2008-04-14
[125]
문서
最初の到達
[126]
논문
A recent bottleneck of Y chromosome diversity coincides with a global change in culture
2015-03-13
[127]
웹사이트
Y-DNA Haplogroup Tree 2006
http://www.isogg.org[...]
International Society of Genetic Genealogy
2008-04-14
[128]
문서
明治節、文化の日、みどりの日、昭和の日の変遷
[129]
서적
古代豪族と大王の謎
宝島社新書
[130]
서적
詳説日本史
山川出版社
[131]
뉴스
黒塚古墳 「卑弥呼の鏡」大量出土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132]
뉴스
ヒエ塚古墳、全長は129メートル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133]
뉴스
伊勢山神社春の大祭
https://www.saga-s.c[...]
佐賀新聞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