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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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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훈 시대는 3세기 중반부터 7세기까지 일본 열도에 존재했던 시기로, 강력한 정치체인 야마토 정권이 성립되고 고분(분구)이 널리 축조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전방후원분(열쇠 구멍 모양의 고분)이 특징적으로 나타났으며, 왕족과 귀족의 대형 고분, 지방 호족의 고분 등 계층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규모의 고분이 조성되었다.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와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아스카 시대로 이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훈 시대는 크게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되며, 각 시기별로 고분의 형태, 축조 방식, 부장품 등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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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훈 시대
개요
다이센 고분, [[오사카]]에 있는 [[닌토쿠 천황]]의 무덤, [[모즈 고분군]] 중 하나
다이센 고분, 오사카에 있는 닌토쿠 천황의 무덤, 모즈 고분군 중 하나
시기300년 ~ 538년
주요 특징거대한 고분 건설, 야마토 정권의 성장
이전 시대야요이 시대
다음 시대아스카 시대
정치
주요 세력야마토 정권
특징호족 연합 정권, 씨족 제도 발전
사회
계층지배 계층 (호족), 피지배 계층 (농민, 수공업자)
문화고분 문화, 도래인의 문화 유입
경제
주요 산업농업 (벼농사 중심), 수공업
교역한반도 및 중국과의 교류 활발
문화 및 기술
고분전기에는 전방후원분 중심, 후기에는 원분, 방분 등 다양화
유물하니와, 스에키
기술도래인을 통해 선진 기술 유입 (철기 제작, 토목 기술)
한반도와의 관계
영향한반도 남부에 일본식 고분 건설
교류활발한 인적, 물적 교류

2. 역사

2001년 한일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고훈 시대 일본과 한반도 간의 관계를 포함한 두 단계의 공동 역사 연구를 진행했다. 주요 쟁점은 당시 일본이 한반도에 세웠다고 알려진 통치 기구인 "임나일본부"였다. 논쟁 끝에 양국 역사학자들은 한국 남부에 일본인이 존재했다는 점과, "임나일본부"라는 용어가 당시 사용되지 않았고 오해를 유발하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했다.[41][42][43][44][45] 그러나 당시 한국에 있던 일본인의 지위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일본 측은 일본인이 세운 기구가 한국인의 통제를 받지 않고 일본인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으며, 가야 연맹과 외교 협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 측은 이 기구가 가야의 외교 사무소였으며, 일본인을 가야의 관료로 고용했다고 주장했다. 이 협력은 2010년 최종 보고서 발표와 함께 종료되었으며, 공동 연구 의사록 전문은 일본 측에 의해 공개되었다.[41][42][43][44][45]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시대에 야마토 왕권이 의 통일 정권으로 확립되었다고 한다. 야마토 (나라현)를 본거지로 한 다이오를 수장으로 하는 야마토 왕권은 지역 호족을 규합하여 강대한 세력을 갖추고 일본국의 기원이 되는 야마토 국가를 성립시켜 나간 시대로 여겨진다.

전방후원분의 출현이 특징이며, 방어를 위한 환호 취락이 특징인 야요이 시대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질서의 시대이다. 이 시대의 문화를 고분 문화라고 부른다.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후 일본 열도에서는 대규모 전쟁의 증거가 발굴되지 않았고, 방어를 위한 야요이 시대의 환호 취락도 사라지면서 야마토 조정은 큰 전쟁 없이 일본 통일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대외 관계에서는 4세기 이후 한반도에 진출하여 신라백제를 신속시키고, 고구려와 격렬하게 싸웠다는 광개토대왕의 광개토대왕비 문구 등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고구려와 왜의 전쟁, 왜·왜인 관련의 조선 문헌). 5세기에는 왜의 5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으며, 왜가 한반도에서 얻은 자원은 갑옷, 무기, 농기구, 공구 등에 사용되었다. 대륙으로부터는 한자, 불교, 유교가 전래되었다. 또한 《수서》에는 신라백제가 왜국을 진귀한 물품이 많은 대국으로 여겨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3세기 전기 의 역사 문헌(위지왜인전)에는 왜왕(친위왜왕) 히미코와 그 본거지인 야마타이국이 등장한다. 야마타이국이 음의 유사성으로 인해 후의 야마토 왕권(야마토국)의 모체라는 설이 있지만, 고고학적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자세한 내용은 "야마타이국#논쟁" 참조).

야마토 왕권 성립기에는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의 무덤(전방후원분)이 나라 분지를 중심으로 등장했다. 야요이 말기에는 기나이, 기비, 이즈모, 쓰쿠시 등 각 지역마다 특색있는 묘제가 전개되었지만, 전방후원분에는 이러한 각 지역의 특징이 융합된 모습이 나타나 야마토 왕권이 열도 각 지역의 정치 세력이 연합하여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야마토 왕권은 야마토 지방(기나이)을 본거지로 하여 혼슈 중부에서 큐슈 북부까지 지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국을 대표하는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지배 영역 확장의 과정에서 크고 작은 세력 및 부족과의 충돌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일본서기》 등에 나타나는 사도장군 및 야마토 타케루 설화는 자세한 역사적 사실이 불분명하다.

일본서기》에는 제10대 스진 천황이 호쿠리쿠, 도카이, 사이도, 탄바 사방면에 사도장군을 파견한 것과 제12대 게이코 천황의 큐슈 원정, 그리고 그의 아들 야마토 타케루노 미코토(『고사기』에서는 야마토 타케루)가 서쪽의 구마소를 정벌하고 동국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전승은 야마토 시대를 거치며 왕권이 확대된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2. 1. 전기 (3세기 중반 ~ 4세기)

3세기 전기에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는 왜국(친위왜왕) 히미코와 그 본거지 야마타이국이 등장하는데, 야마타이국이 야마토 정권의 모태라는 설이 있으나 고고학적 증거는 부족하다. 3세기 후반에는 나라 분지를 중심으로 초기 전방후원분이 형성되어 이 지역에서 강력한 정치체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4세기 중엽까지 기나이에서 기타큐슈에 이르는 넓은 영역이 야마토 정권 아래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66]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따르면, 나라 분지 세력이 열도 각지의 호족 세력(기비, 가쓰라기 등)과 연합하여 야마토 정권으로 점차 성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기타큐슈 세력은 쇠퇴하였다. 다만, 기타큐슈 세력이 나라 분지로 이동하여 그곳의 세력을 제압하고 야마토 정권을 세웠다는 견해도 있다.

야마토 정권 성립기에는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의 전방후원분나라 분지를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야요이 말기에는 기나이, 기비, 이즈모, 쓰쿠시 등 각 지역마다 특색 있는 묘제가 있었지만, 전방후원분에는 이들 지역의 특징이 융합된 모습이 나타난다. 따라서 야마토 정권은 열도 각 지역의 정치 세력이 연합하여 성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야마토 정권은 야마토 지방(기나이)을 본거지로 혼슈 중부에서 큐슈 북부까지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 야마토 정권은 왜국을 대표하는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지배 영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세력 및 부족과 충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 등에는 사도장군 및 야마토타케루 설화 등 이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있지만, 자세한 역사적 사실은 불분명하다.

가장 오래된 일본의 고분은 3세기 말에 지어진 호켄야마 고분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라현 사쿠라이시에 있다. 사쿠라이시의 마키무쿠 지구에서는 4세기 초에 하시하카 고분을 비롯한 덮개 구멍 고분이 건설되었다.

설명 참조
5세기 (도쿄 국립 박물관)의 금박 청동 장식 철제 ''단고'' 갑옷과 투구

2. 1. 1. 야마토 정권의 성립

3세기 중반, 나라 분지를 중심으로 초기 전방후원분이 형성되면서 야마토 정권이 성립되었다. 야마토 정권은 기나이에서 기타큐슈에 이르는 넓은 영역의 여러 지역 국가들 (기비, 가쓰라기 등)과 연합하여 성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기타큐슈의 세력은 쇠퇴하였다.[66]

야마토 정권 성립기에는 야요이 말기 각 지역의 특색있는 묘제가 융합된 전방후원분나라 분지를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이는 야마토 정권이 열도 각 지역의 정치 세력이 연합하여 성립되었음을 보여준다.

야마토 정권은 야마토 지방(기나이)을 본거지로 혼슈 중부에서 큐슈 북부까지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국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야마토 정권은 지배 영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세력 및 부족과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등 사서에서 야마토타케루 설화 등을 통해 이를 짐작할 수 있으나, 그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3세기 전기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는 왜국왕(친위왜왕) 히미코야마타이국이 나타나는데, 야마타이국이 야마토 정권의 모태라는 설이 있으나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66]

2. 1. 2. 공백의 4세기

266년부터 413년까지 진(晉)의 역사 문헌에 일본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일본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공백의 4세기'라고 부른다. 이는 본래 일본과 교류하던 대방군팔왕의 난으로 쇠퇴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6] 하지만, 후대에 편찬되어 신뢰성에 의문이 있는 한반도 사서에는 4세기에 해당하는 시기 왜국의 간섭에 대한 기술이 있으며, 고고학적 조사에서도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활발한 교류가 발견된다.

4세기의 일본 모습을 전하는 당대 자료는 백제의 왕자가 천황에게 보냈다고 전해지는 칠지도와, 왜가 백제와 신라를 꺾었다고 기록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문 두 가지뿐이다.

"수수께끼의 4세기"라고도 한다.

2. 2. 중기 (5세기)

야마토 정권은 호족층과 협력하여 호족층의 무력을 국조군이라 부르며 왜군을 담당하게 했다. 이 시기에는 전방후원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5세기 금박 청동 장식 철제 단고 갑옷과 투구에서 당시의 기술력을 엿볼 수 있다.

일본 서기에 따르면, 이 시대에 야마토 왕권이 의 통일 정권으로 확립되었다고 한다. 5세기 후반에는 한반도 남부에도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데, 이는 일본인이 만들었거나 일본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5세기 야마토 정치체는 강력한 씨족(豪族)에 의해 구별되었다. 각 씨족은 족장이 이끌었으며, 족장은 씨족의 가미에게 신성한 의식을 행했다. 씨족 구성원은 귀족이었고, 왕실은 야마토 조정을 통제했다. 씨족 지도자에게는 카바네라는 칭호가 수여되었다.

고훈 시대는 야마토 시대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이 지역 족장이 시대 말에 황실 왕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마토 씨족은 고훈 시대 동안 다른 정치체 중 하나를 지배했을 뿐이다.

금도금된 칼자루, 고훈 시대 후기, 6세기


야마토 조정규슈혼슈의 씨족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여 씨족 족장에게 칭호를 수여했다. 야마토는 야마토 지배자들이 다른 씨족을 억누르고 농지를 획득함에 따라 일본과 동의어가 되었다. 중국의 모델을 바탕으로 중앙 행정 및 황실 조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씨족으로는 소가, 가쓰라기, 헤구리, 코세, 기비, 오토모, 모노노베 씨족, 나카토미, 인베 씨족 등이 있었다. 장인은 길드로 조직되었다.

야마토 정권을 구성했던 많은 씨족과 지역 족장들은 황족 또는 가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5세기 동안 가쓰라기 씨족이 조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세력이었고 황족과 통혼했다. 가쓰라기 씨족이 쇠퇴한 후, 5세기 후반에는 오토모 씨족으로 대체되었다. 부레쓰 천황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오토모노 카나무라는 게이타이 천황을 새로운 군주로 추천했다.

2. 2. 1. 왜 5왕의 시대

5세기, 중국 남조(南朝)의 송(宋)나라 역사서 『송서』에는 왜 5왕(倭五王)이 등장한다. 왜 5왕은 중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책봉을 받았다. 왜왕 무(武)는 유랴쿠 천황으로 비정되며, 그의 상표문(上表文)에는 조상 대대로 왜의 국토를 통일한 과정과, 왜가 한반도 남부를 정벌하고 중국에 조공하려 했으나 고구려의 방해를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57]

順帝昇明二年, 遣使上表曰: 「封國偏遠, 作藩于外, 自昔祖禰, 躬擐甲冑, 跋涉山川, 不遑寧處. 東征毛人五十五國, 西服衆夷六十六國, 渡平海北九十五國, 王道融泰, 廓土遐畿, 累葉朝宗, 不愆于歲. 臣雖下愚, 忝胤先緒, 驅率所統, 歸崇天極, 道逕百濟, 裝治船舫, 而句驪無道, 圖欲見吞, 掠抄邊隸, 虔劉不已, 每致稽滯, 以失良風. 雖曰進路, 或通或不. 臣亡考濟實忿寇讎, 壅塞天路, 控弦百萬, 義聲感激, 方欲大擧, 奄喪父兄, 使垂成之功, 不獲一簣. 居在諒闇, 不動兵甲, 是以偃息未捷. 至今欲練甲治兵, 申父兄之志, 義士虎賁, 文武效功, 白刃交前, 亦所不顧. 若以帝德覆載, 摧此强敵, 克靖方難, 無替前功. 竊自假開府儀同三司, 其餘咸各假授, 以勸忠節.」 詔除武使持節·都督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3= 순제 승명 2년(478)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기를, “봉해진 나라가 먼 곳에 치우쳐 있으며, 바깥에 번국을 이루고 있는데, 과거의 조상으로부터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산천을 누비느라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동으로는 모인(毛人) 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는 중이(衆夷) 66국을 복종시켰으며, 바다 건너 해북(海北) 95국을 평정하니, 왕도는 화락하고 편안하며, 땅을 넓히고 왕기를 아득히 크게 하였으며, 여러 대에 걸쳐 조종(朝宗)하여, 해마다 어긋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이 비록 아주 어리석으나 조상의 뒤를 이어 다스리는 곳을 이끌고 중국의 조정을 존중하고자 하였습니다.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구려(句驪)가 무도하여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고, 변방의 속한 곳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비록 길을 나서지만 혹은 통하고 혹은 통하지 못합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濟)가 실로 원수가 천로(天路)를 막는 것에 분노하니, 활을 쏘는 병사 100만이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크게 일어나고자 하였으나, 갑자기 아버지와 형을 잃으니, 수성(垂成)의 공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마지막 한 삼태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상중에 있어 병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쉬고 있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갑옷과 무기를 잘 갖추어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하니, 의롭고 용맹스러운 병사들이 문무로 공을 이루어, 번쩍이는 칼날이 눈앞에 닥쳐도 또한 눈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만약 황제의 세상을 뒤덮는 덕으로써 이 강적을 무찔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이전의 공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가수(假授)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모두 각각 [적당한 관작을] 가수하여, 충절을 권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조하여 무를 사지절,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4= 송서 권97 열전 제57 이만 (동북아역사재단 역)중국어

사이타마현 교다시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 명문과 구마모토현 다마나시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은상감명 대도 명문은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2. 2. 2. 대외 전쟁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쳐, 왜(倭)는 한반도에서 백제, 신라,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다.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왜・고구려 전쟁)[10] 왜는 한반도로부터 을 도입하고 전국에서 군마를 사육하기 시작했다.[10]

2. 3. 후기 (6세기 ~ 7세기)

캡션 참조
고분 시대에 일본으로 보내진 중국 청동 거울에 그려진 전차의 세부 묘사. 에타-후나야마 고분 출토, 구마모토현 (도쿄 국립 박물관)


도래인은 류큐 열도 또는 한반도를 통해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일본에 한자,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 등 중요한 중국 문화 요소를 도입했다. 야마토 정부는 도래인의 지식과 문화를 높이 평가하여 특혜를 제공했다.[11]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혼슈 기나이 지역의 1,182개 씨족 중 317개가 외국 출신이었다. 이 중 163개는 중국(한(漢)으로 기록), 104개는 백제, 41개는 고구려, 6개는 신라, 3개는 가야 연맹 출신이었다.[12] 이들은 356년부터 645년 사이에 일본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훈 시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이민자들 중에는 와니, 유즈키노 키미, 아치노 오미가 있었으며, 각각 가와치노후미 씨족/가와치노아야 씨족[13], 하타 씨족[14][15], 야마토노아야 씨족[16][17]의 창시자였다. 백제신라 출신의 많은 이민자들은 민족적으로 유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진 천황 치세 동안 일본에 도착하여 이나리와 같은 외래 신을 포함한 별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18][19]

4세기부터 일본에 정착한 다른 이민자들은 일본 씨족의 시조가 되었다. 고지키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 이민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아메노히보코로, 3세기 또는 4세기 경 스이닌 천황 시대에 일본에 정착한 신라의 전설적인 왕자이다.

백제와 신라는 군사적 지원을 대가로 왕자들을 야마토 조정에 인질로 보냈다.[20][21][22][23] 무령왕은 462년 일본 규슈 (筑紫)에서 인질의 아들로 태어났으며,[24] 일본에 아들을 남겼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야마토노 후비토의 친척 (다카노노 니이가사)는 백제 무령왕의 10대손으로, 고닌 천황후궁으로 선택되었으며, 간무 천황의 어머니였다. 2001년, 아키히토 천황은 간무 천황을 통해 자신의 고대 한국 왕실 혈통을 확인했다.[25]

5세기에는 왜의 오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 한반도에서 얻은 자원을 갑옷, 무기, 농기구, 공구 등에 사용했다. 대륙으로부터는 한자불교, 유교가 전래되었다. 《수서》에 따르면, 신라백제는 왜국이 진귀한 물품이 많은 대국이라고 하여 왜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5세기 후반에는 한반도 남부에도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데, 일본인이 만들었거나 일본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5세기 초인 413년 (동진의희 9년)에 왜국이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진서』안제기에 기록되어 있다. 421년 (・영초 2년)에 『송서』왜국전에 "왜찬"의 기사가 보인다. 이후 왜왕에 관한 기사가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데, 찬, 진, 제, 흥, 무로 이어진다. 이들이 "왜의 오왕"이다. 왜의 오왕은 『일본서기』에 보이는 천황과의 비정이 시도되었으나, 반드시 비정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왜왕 무는 유랴쿠 천황으로 여겨지고 있다. 무는 중국 황제에게 상표한 문서에서 선조 대대로 고생하여 왜의 국토를 통일한 공적을 기록했다.

사이타마현교다시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 명문과 구마모토현타마나시에다후네야마 고분 출토 은상감명 대도 명문에서 그 치세의 일단을 알 수 있다. "장도인(杖刀人)","전조인(典曹人)"으로 보아, 5세기 말에는 "부(部)"의 제도가 아직 성립되지 않았다. 시마네현마쓰에시오카다야마 고분 출토 철도 명문 "액전부신(額田部臣)"을 통해, 6세기 중반에는 부민제의 시행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신・대련의 제도가 생겨, 대신에는 헤구리 씨, 대련에는 오오토모 씨・모노노베 씨가 선출되었다. 씨와 성의 제도가 어느 정도 성립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 명문과 에다후네야마 고분 출토 철도 명문에 기록된 "와카타케루 대왕"은 왜의 오왕의 무에 비정되는 유랴쿠 천황을 말한다.

일본 국가의 성립을 고찰하면 야마토 왕권이 확대되고 왕권이 강화 통일되어 갔던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후, 아스카 시대에 들어가 다이카 개신에 의해 "일본"이라는 국호와 함께 연호의 사용이 시작되었다.

2. 3. 1. 국가 체제의 정비

안칸 천황, 센카 천황, 긴메이 천황 대에 걸쳐 야마토 정권은 지역 국가에서 벗어나 중앙 집권적인 초기 국가 형태로 발전했다.[57] 왕권은 씨(氏)를 가진 모노노베씨, 오토모씨, 소가씨 등 유력 호족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신(臣), 연(連), 국조(國造), 군사(郡司) 등의 지위가 있었다.

센카 천황 통치기에 소가씨가 대신(大臣)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으며, 스슌 천황 대에는 소가씨가 권력을 독점했다. 592년 스슌 천황소가노 우마코에게 암살당했다.[57] 소가노 이나메, 소가노 우마코, 소가노 에미시, 소가노 이루카로 이어지는 소가씨 일족은 을사의 변(645년)으로 몰락할 때까지 약 반세기 동안 정치를 주도했다.

2. 3. 2. 불교의 전래

백제 성왕(재위 523년 ~ 554년)은 538년 긴메이 천황(재위 539년 ~ 571년)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내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67]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에는 불교 교리는 탁월하지만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도 있었다.[68]

왜국 조정은 불교 수용을 둘러싸고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긴메이 천황소가노 마치의 후손이자 호족인 소가노 이나메는 불교를 수용하려 했으나, 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는 이에 반대하여 긴메이 천황은 이들 사이에서 갈등했다.[69][70]

552년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노리사치계 등에 딸려 일본에 파견하였다.[71]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로 장엄했던 이 번개는 그 구체적인 모습이 전해지지 않는다.[72] 같은 해 백제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 기술자, 의사, 음악가까지 일본에 파견하였다.[73] 성왕은 의박사,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파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538년 불교의 전래는 고훈 시대에서 아스카 시대로 전환하는 사건이었으며, 이는 같은 세기 후반 수나라의 중국 통일과 시기가 일치한다. 일본은 중국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시대 간 종교적 차이에 문화적 맥락을 더했다.

3. 정치

야마토 정권은 오키미(大王, 대왕)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갖추었다. 왕권 아래에는 유력 호족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氏)와 성(姓)을 가지고 정권에 참여했다. 지방에는 국조(國造), 군사(郡司) 등의 지방관이 파견되어 통치를 담당했다.[57]

안칸 천황(531년-535년), 센카 천황(535년-539년), 긴메이 천황(539년-571년)의 각 왕조를 통해 지역 국가에서 벗어나 초기 국가를 형성해 나갔다. 왕권의 기원은 우지(, 氏)를 가진 모노노베씨, 오토모씨, 소가씨 등이 있었고, 신(臣), 연(連), 국조(國造), 군사(郡司) 등의 지위가 있었다. 지방에서는 기비씨계 씨족이 우지, 신(臣)을 세우는 등 각지의 호족들이 부 등을 만들어 세력을 펴고 있었다.

5세기 후반에 등장한 야마토 정치체는 강력한 씨족(豪族, 고족)에 의해 구별되었다. 각 씨족은 씨족의 장래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 씨족의 가미(숭배 대상)에게 신성한 의식을 행하는 족장(氏上, 우지노카미)이 이끌었다. 씨족 구성원은 귀족이었고, 야마토 조정을 통제하는 왕실은 절정에 달했다. 씨족 지도자에게는 가문의 이름을 대체하는 계급과 정치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속된 칭호인 가바네가 수여되었다.

야마토 조정규슈혼슈의 씨족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여 씨족 족장에게 칭호(일부는 세습)를 수여했다. 야마토는 야마토 지배자들이 다른 씨족을 억누르고 농지를 획득함에 따라 일본과 동의어가 되었다. 중국의 모델(한자의 채택 포함)을 바탕으로, 그들은 중앙 행정 및 고정된 수도 없이 부속 씨족 족장이 참석하는 황실 조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씨족은 소가, 가쓰라기, 헤구리 씨족과 코세 씨족이 야마토국과 비젠국에 있었고, 기비 씨족은 이즈모국에 있었다. 오토모와 모노노베 씨족은 군사 지도자였고, 나카토미와 인베 씨족은 의례를 담당했다. 소가 씨족은 정부의 수석 장관을, 오토모와 모노노베 씨족은 부장관을 제공했으며, 지방 지도자는 쿠니노미야쓰코라고 불렸다. 장인은 길드로 조직되었다.

통치자의 공식적인 칭호는 "왕"이었지만, 이 시대에는 스스로를 "오키미(大王, "대왕")"라고 불렀다. 이나리야마 검과 에타 후나야마 검 두 개의 검에 새겨진 글귀는 ''아메노시타 시로시메스''(治天下; "천하를 다스리는 자")와 ''오키미''로, 이는 통치자들이 천명을 언급했음을 나타낸다. ''아메노시타 시로시메스 오키미''라는 칭호는 7세기까지 사용되었으며, 이후 ''천황''으로 대체되었다.

센카 천황 통치기에는 소가씨가 대신이 되어 기세를 올려 스슌 천황(587년-592년) 대에는 소가씨 대신 혼자 정권을 잡았다. 스슌 천황은 592년 소가노 우마코에 의해 암살당한다. 소가노 이나메, 소가노 우마코, 소가노 에미시, 소가노 이루카를 비롯한 소가씨 일족이 정권을 잡은 뒤 고교쿠 천황 4년(645년) 을사의 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반세기 동안 소가씨에 의한 정치가 계속되었다.

열린 무덤, 안에 사람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인물
이시부타이 고분, 나라현에 있는 후기 고분

4. 사회

4세기 말에서 6세기 중기까지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인해 백제가야 사람들이 일본 열도로 피난 오면서 도래인이 급증했다.[64] 이들은 선진 기술을 전파하여 일본 사회 발전에 기여했고, 야마토 정권으로부터 특혜를 받으며 외교와 경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64]

5세기 후반, 야마토 정치는 강력한 씨족(고족)들이 이끌었다. 각 씨족은 족장(氏上, 우지노카미)이 이끌었으며, 족장은 씨족의 가미(숭배 대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씨족 구성원은 귀족이었고, 야마토 조정을 이끄는 왕실은 그 정점에 있었다. 씨족 지도자에게는 ''카바네''라는 칭호가 주어졌는데, 이는 가문의 이름을 대신하는 계급과 정치적 지위를 나타냈다.

소가, 가쓰라기, 헤구리, 코세 씨족은 야마토비젠국에서 강력한 세력을 가졌고, 기비 씨족은 이즈모국에서, 오토모와 모노노베 씨족은 군사를 담당했으며, 나카토미와 인베 씨족은 제사를 담당했다. 소가 씨족은 정부의 수석 장관을, 오토모와 모노노베 씨족은 부장관을 맡았고, 지방 지도자는 ''쿠니노미야쓰코''라고 불렸다. 장인들은 길드로 조직되었다.

야마토 정권을 구성했던 많은 씨족과 지역 족장들은 황족 또는 가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씨족들이 중국 또는 한반도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기나이 지역의 1,182개 씨족 중 317개가 외국 출신이었다. 그중 163개는 중국, 104개는 백제, 41개는 고구려, 6개는 신라, 3개는 가야 연맹 출신이었다.[12]

와니, 유즈키노 키미, 아치노 오미는 각각 가와치노후미 씨족/가와치노아야 씨족[13], 하타 씨족[14][15], 야마토노아야 씨족[16][17]의 시조였다.

고분 시대 사람들은 하지기와 스에키를 식기, 조리기구, 저장 용기 등으로 사용했다. 4세기 후반 무렵, 도래인에 의해 도질 토기와 요업 기술이 전해져 스에키 생산이 시작되었다.

집락(무라)에는 수혈 건물(수혈 주거), 평지 건물, 고상 건물(굴립주 건물이나 벽건축물) 등이 있었다. 군마현 시부카와시의 구로이 봉 유적에서는 수혈 건물, 고상 건물 외에도 평지 건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5세기에 가마가 도입되어 조리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기 독은 가마에 설치하기 쉽도록 길어졌고, 찜기인 시루가 보급되었으며, 둥근 바닥의 坏(손잡이 식기)가 주류가 되었다. 가마신을 모시는 문화도 보급되었다.

, , (청동), 등의 금속 소재는 모두 수입품이었다. 고분 시대 후기에 사철 제철이 시작되었지만, 금, 은, 동 제련은 아스카 시대부터 나라 시대 시기였다.[48][49][50]

4세기 말 ~ 5세기에는 이 도입되어 군사, 농경, 하역 등에 사용되었고, 각지에 목이 설치되었다.

수도 경작은 소구획 수전이 계속 만들어졌고, 수백~수천 단위로 집합하여 넓은 수전면을 형성하는 예가 나타났다.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에는 직사각형의 대형 수전이 나타났고, 새로운 수전 조성 기술이 도입되었다.

5. 문화

고분 시대에는 중국과 한반도로부터 문자와 유교, 불교 등 다양한 문화가 전래되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하지기와 스에키라는 독특한 형태의 토기를 사용했다. 청동기는 제사용으로, 철기는 실생활 도구와 무기로 사용되었다.[48][49][50]

5세기에는 도래인에 의해 가마가 도입되어 조리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가마는 열효율이 좋아 널리 보급되었으며, 가마신을 모시는 문화도 함께 전래되었다.[46][47] 말 사육은 군사, 농경, 운송 등에 활용되었다.[51]

하니와 케이코 갑옷을 입은 병사


''하니와'' 말 조각상


기병은 갑옷을 입고 검과 기타 무기를 휴대했으며, 동북아시아와 유사한 진보된 군사 방법을 사용했다. 관개, 양잠, 직조는 이주민들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하타씨는 양잠과 특정 유형의 직조를 도입했다.[27]

6. 대외 관계

5세기에는 왜의 5왕이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책봉을 받았다.[29] 왜가 한반도에서 얻은 자원은 갑옷, 무기, 농기구, 공구 등에 사용되었다. 대륙으로부터는 문자(한자)와 불교·유교가 전래되었다. 또한, 《수서》에 따르면, 신라백제는 왜국이 진귀한 물품이 많은 대국이라고 하여, 왜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술이 존재한다.

2001년 한일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에 따라, 일본과 대한민국 역사학자들은 고훈 시대 동안 일본과 한반도 간의 관계를 포함한 두 단계의 공동 역사 연구를 진행했다. 쟁점은 당시 일본이 한반도에 세웠다고 여겨지는 통치 기구인 "임나일본부"였다. 논쟁 끝에 일본과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한국 남부에 일본인이 존재했으며,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당시 사용되지 않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했다.[41][42][43][44][45] 그러나 당시 한국에 있던 일본인의 지위에 대해서는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일본 측은 일본인이 한국에 세운 기구가 한국인의 통제를 받지 않고 일본인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으며, 가야 연맹과 외교 협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 측은 이 기구가 가야의 외교 사무소였으며, 일본인을 가야의 관료로 고용했다고 주장했다. 이 협력은 위 내용을 설명하는 최종 보고서가 2010년에 발표되면서 종료되었다.[41][42][43][44][45]

6. 1. 백제와의 관계

백제근초고왕(재위 346년 ~ 375년)은 왜와 국교를 수립하고 많은 선진 문화를 전했다.[74]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양국은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다.[75] 백제와 왜의 국교 수립은 366년(진구 황후 46년, 근초고왕 21년)[76]에 이뤄졌다.[77] 왜는 백제와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백제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입했으며, 한반도로부터 많은 기술자와 농민이 도래하여 각종 기술을 전하는 등[78] 백제의 일본 문화 전파는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다. 근초고왕 때, 유교경전에 밝은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이후 박사 왕인(王仁)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경사를 가르쳤다.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있어 유교적 이념은 다른 토착신앙이나 불교보다도 많은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각 국가들은 고대 사회의 형성기에 유교 사상의 수입에 적극적이었다.[79] 당시 백제가 왜에 보낸 칠지도는 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 중 하나이다.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때부터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하구에 위치한 하동을 대왜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한성에서 천안을 거쳐 금강상류로 와서 남원에서 섬진강을 타고 하동으로 가는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하동에서 쓰시마섬을 축으로 해서 이키섬, 그리고 규슈마쓰우라 반도(松浦半島)에 이르는 길과 쓰시마섬에서 오키노시마(沖ノ島), 후쿠오카현 북쪽 해안에 이르는 길이 생겨났다.[80]

스다하치만 동경


현존하는 인물화상경(5~6세기)은 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이 게이타이 천황(재위 507년 ~ 531년)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인데, 이것은 백제와 왜의 친밀한 관계를 증명한다. 무령왕은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85]516년 고안무(高安茂)[86]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문화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무령왕의 왕위를 계승한 성왕(재위 523 ~ 554년)도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다.

성왕(재위 523 ~ 554년) 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67] 이 불교의 전파를 기점으로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구분짓는다. 성왕은 긴메이 천황(재위 539년 ~ 571년)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68]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은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긴메이 천황과 소가노 마치의 후손이자 호족인 소가노 이나메는 불교를 수용하려 했으나 또 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긴메이 천황은 둘 사이에서 시달리게 되었다.[69][70] 그리고,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딸려서 달솔 노리사치계 등을 일본에 파견(552년)하였다.[71] 이 번개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이므로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72]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73]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으며, 의박사,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6. 2. 신라와의 관계

왜는 신라 건국 초기부터 신라를 압박했다. 삼국사기가 신라 건국을 도운 호공이 일본 출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39] 신라는 왜구의 침입에 시달렸으며, 내물 마립간 때에는 왜병이 금성을 포위하기도 했다.[38]일본서기』는 신라의 왕자가 일본 천황을 섬기기 위해 일본에 와서[32] 다지마 국에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아메노히보코로 알려졌으며 그의 후손은 다지마 모리이다.[33]

6. 3. 고구려와의 관계

광개토대왕릉비에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에 걸쳐 왜(倭) 군이 한반도의 백제, 신라고구려와 싸운 것이 기록되어 있다.[4] 또한 그 직후부터 을 도입하기 시작하여, 전국에서 군마 사육에 힘썼다.

6세기에는 쓰쿠시 국조(筑紫国造) 이와이(磐井)가 신라와 통하면서 주변국들을 동원하여 왜 군의 침공을 막으려 했다고 『일본서기』에 기술되어 있으며, 이를 이와이의 난(527)이라 한다. 일본 학계에서는 거듭된 한반도 출병의 군사적, 경제적 부담이 북부 규슈에 가중되어 난이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시대에는 아직 북부 규슈 세력이 야마토 왕권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4]

6. 4. 중국과의 관계

야마토의 오왕(倭の五王)은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책봉을 받았다.[29] 413년 (동진 의희 9년) 왜국이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진서』 안제기에 기록되어 있다. 421년 ( 영초 2년) 『송서』 왜국전에 "왜찬"에 대한 기사가 실려있다. 이후 왜왕에 관한 기사가 중국 사서에 나타나게 되었고, 찬, 진, 제, 흥, 무로 이어진다. 이들이 왜의 오왕이다. 왜의 오왕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황과 비교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왜왕 무는 유랴쿠 천황으로 여겨지고 있다. 왜왕 무는 중국 황제에게 보낸 상표문에서 선조 대대로 고생하여 왜의 국토를 통일한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7. 고분

3세기 중반부터 6세기 말까지는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북쪽으로는 도호쿠 지방에서 남쪽으로는 규슈 지방 남부까지 계속 만들어져 왔기 때문에 '''전방후원분의 세기'''라고도 불린다. 전방후원분은 야마토 조정이 통일 정권으로서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각지의 호족에게 허가한 형식이라고 여겨진다.

3세기 후반부터 나라 분지에서 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이전 시대보다 규모가 큰 전방후원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4세기 초기에는 오사카 평야에서 거대 고분이 만들어졌으며, 4세기 말 무렵에는 키나이(畿内)의 일부 지방에서 선진적인 고분군이 출현했다. 5세기 중반에는 각지에 거대 고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6세기 말에는 일본 각지에서 거의 동시에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는 야마토 정권이 확립됨에 따라 중앙과 지방의 통치 조직이 완성되어 더욱 강력한 정권으로 성장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지지 않게 된 7세기에는 방분(方墳)·원분(円墳)이 계속 만들어졌으며, 오오키미(大王)의 무덤은 특별히 팔각분(八角墳)으로 만들어졌다. 7세기 이후를 '''종말기'''라고 부른다.

3D 컴퓨터 그래픽스로 그려진 열쇠 구멍 모양의 고분 (5세기 후지이데라시의 )


고분 시대의 보석 (대영 박물관)


고분(중국어 방언 ''kú'' 古 "고대" + ''bjun'' 墳 "분구")[7][8]3세기부터 7세기까지 일본에서 지배 계층을 위해 건설된 분구이며,[9] 고분 시대는 이 독특한 흙 무덤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무덤에는 커다란 석실이 있었고, 일부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고분은 둥근 모양, 사각형 모양, 조개 껍데기 모양, 열쇠 구멍 모양 등 4가지 기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열쇠 구멍 모양의 고분은 일본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양식으로, 앞부분은 사각형이고 뒷부분은 둥글다. 고분의 크기는 수 미터에서 400미터 이상에 이르며, 고분 둘레에는 흙으로 만든 토용(''하니와'')이 묻혀 있기도 했다.

고분 시대에는 왕족, 귀족의 대형 고분, 지방 호족의 고분, 횡혈묘 등의 집합묘, 원통형 하니와 관 등 죽은 자를 매장하는 묘에서 계층화가 두드러졌으며, 피장자 사이의 신체적 특징 차이도 나타났다.[56]

7. 1. 고분의 종류와 특징

고분(古墳)은 3세기부터 7세기까지 일본에서 지배 계층을 위해 건설된 분구이며,[7][8] 고분 시대는 이 독특한 흙 무덤에서 이름을 따왔다.[9] 무덤에는 커다란 석실이 있었고, 일부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고분은 둥근 모양(원분, 円墳), 사각형 모양(방분, 方墳), 조개 껍데기 모양, 열쇠 구멍 모양 등 4가지 기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열쇠 구멍 모양의 고분은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라고 불리며 일본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양식으로, 앞부분은 사각형이고 뒷부분은 둥글다. 고분의 크기는 수 미터에서 400미터 이상에 이르며, 고분 둘레에는 종종 흙으로 만든 토용(''하니와'')이 묻혔다.

3세기 중반 이후에는 출현기 고분이 나타난다. 전방부가 부채꼴로 펼쳐진 형태이며, 해자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 중에는 자연의 산을 이용한 경우도 있으며, 최고(最古)급 고분에 많다고 알려져 있다. 하니와가 확인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부키이시 등도 만드는 방식이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위지왜인전을 근거로 248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히미코의 묘가 원분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묘 자체가 특정되지 않았다.

3세기 후반에는 서일본 각지에 특수한 항아리형 토기, 기대형 토기를 동반한 분구묘 (수장묘)가 나타난다. 그 후, 전방후원분의 시초로 여겨지는 원분, 이즈모 문화권 특유의 사우돌출형 분묘에서 변화한 대형 방분(方墳)이 대표적이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시마네현야스기시의 다이세이 고분으로 여겨진다. 전기에는 보기 드문 소환두대도가 출토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 분지에 대왕릉급 대형 전방후원분 건설이 집중되었다. 매장 시설은 수혈식 석실이며, 부장품은 주술적인 거울, , 검, 석제품 외에 '''철제 농기구'''가 보인다. 이 무렵, 원통 하니와가 성행하였다. '''하지키'''가 긴키에서 만들어져 각지에 보급되자, 그 후, 기재 하니와, 가형 하니와가 나타났다. 후쿠오카현오키노시마에서는 야마토 왕권에 의한 국가 제사가 시작된 시기로 여겨진다.

하시하카 고분


5세기 초, 왕묘급 대형 전방후원분이 나라 분지에서 가와치 평야로 옮겨지고, 더욱 '''거대화'''된 인물 하니와가 나타났다. 5세기 중반이 되면서, 기내의 대형 고분의 수혈식 석실이 좁고 긴 형태에서 폭이 넓은 형태로 바뀌고, 나가모치형 석관을 안치하게 되었다. 각지에 거대한 고분이 나타나게 되었고, 부장품으로는 마구갑옷 등의 군사적인 것들이 많아졌다.

5세기 후반에는 북부 규슈와 기내의 고분에 횡혈식 석실이 채용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북부 규슈의 대형 고분에는 석인・석마가 세워지는 것도 있었다. 이 무렵 오사카 남부에서 스에키의 생산이 시작되었고, 곡도 낫과 U자형 쟁기・괭이 날이 나타났다.

5세기 말에는 기내의 일부에 진보적인 군집분이 나타나, 대형 고분에 집 모양 석관이 사용되게 되었다. 동남 규슈 지방이나 북부 규슈에 지하식 횡혈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장식 고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6세기 전반에는 서일본의 고분에 횡혈식 석실이 활발하게 조성되었다. 간토 지방에도 횡혈 석실을 가진 고분이 나타났고, 북부 규슈에서는 석인·석마가 급속히 쇠퇴했다.

6세기 후반이 되면서, 북부 규슈에서 '''장식 고분'''이 성행했다. 하니와가 기나이에서 쇠퇴한 것으로, 간토 지방에서 성행하게 되었다. 서일본에서 군집분이 활발하게 조성되었다.

6세기 말에는 전국적으로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지지 않고, 방분(方墳), 원분(円墳), 팔각분(八角墳)이 주로 축조되게 된다. 이 시기의 고분을 종말기 고분이라고 한다. 646년의 박장령으로 고분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린 후에도, 도호쿠 지방홋카이도에서는 분구묘의 축조가 계속되어 말기 고분이라고 불리지만, 말기 고분이 고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7. 2. 고분의 변천

고분 시대의 고분은 시기에 따라 형태, 규모, 분포 지역 등에서 변화를 보인다.

3세기 후반, 나라 분지를 중심으로 초기 전방후원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마키무쿠 유적에 90m급 전방후원분 5기가 조성되었고, 3세기 중반에는 하시하카 고분이 조영되었다.[54] 주요 고분으로는 마키무쿠 이시즈카 고분(96m), 쿠로즈카 고분(130m) 등이 있다. 3세기 후반에는 서일본 각지에 분구묘가 나타났으며, 나라 분지에 대왕릉급 대형 전방후원분 건설이 집중되었다. 이 무렵 원통 하니와가 성행하였고, 하지키가 긴키에서 만들어져 각지에 보급되었다.

  • 주요 왕묘
  • * 하시하카 고분 (280m)
  • * 안동산 고분 (242m)
  • * 시부야 무코야마 고분 (310m)


4세기에는 오사카 평야에 거대한 고분들이 축조되었다. 5세기 초에는 왕묘급 대형 전방후원분이 나라 분지에서 가와치 평야로 옮겨지고, 더욱 거대화된 인물 하니와가 나타났다. 5세기 중반에는 기내 대형 고분의 수혈식 석실이 폭이 넓은 형태로 바뀌고, 나가모치형 석관을 안치하게 되었다. 부장품으로는 마구, 갑옷, 등의 군사적인 것들이 많아졌다. 5세기 후반에는 북부 규슈와 기내의 고분에 횡혈식 석실이 채용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 기내의 맹주묘
  • * 다이센 고분 (525m)
  • * 곤다 고뵤야마 고분 (420m)
  • * 가미이시즈 미산자이 고분 (365m)


6세기 전반에는 서일본 고분에 횡혈식 석실이 활발하게 조성되었다. 간토 지방에도 횡혈 석실을 가진 고분이 나타났고, 북부 규슈에서는 석인·석마가 급속히 쇠퇴했다. 6세기 후반에는 북부 규슈에서 장식 고분이 성행했다.

6세기 말부터는 전국적으로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지지 않고, 방분, 원분, 팔각분이 주로 축조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고분을 종말기 고분이라고 한다.[58] 646년 박장령으로 고분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

  • 종말기 고분
  • * 류가쿠지 이와야 고분 (78×78m의 방분)
  • * 석무대 고분 (약 50m의 방분)
  • * 하치만야마 고분 (지름 66m의 원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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