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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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는 1970년 4월 8일 서울특별시 와우산 비탈면에 건설된 시민아파트가 붕괴된 사건이다. 6.25 전쟁 이후 서울 인구 급증으로 인한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설된 이 아파트는 부실 시공으로 인해 붕괴되었으며, 이 사고로 34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당했다. 사고 이후 김현옥 서울시장은 사임했으며, 시민아파트 전체에 대한 안전 점검 결과 많은 동이 안전 기준에 미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건은 이후 성수대교 붕괴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 부실 공사로 인한 참사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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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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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개요 | |
명칭 | 와우 아파트 붕괴 사고 |
발생 위치 |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
발생 날짜 | 1970년 4월 8일 |
원인 | 부실 공사 |
결과 | 건물 완전 붕괴 |
인명 피해 | |
사망자 | 33명 |
부상자 | 40명 |
실종자 | 알려진 바 없음 |
기타 | |
관련 정보 | 와우아파트 문서 참고 |
2. 건설 배경
1960년대부터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택 부족이 심각해졌고, 빈곤층의 주거 환경은 열악하여 무허가 판자촌([슬럼])이 시내 곳곳에 형성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발탁된 김현옥 시장은 1969년 판자촌 도시 재개발과 빈곤층 주민을 위한 시민 아파트 건설을 발표했다. 조속한 주택 공급을 위해 민간 건설 회사들이 참여했다.
2. 1. 서울시 인구 급증과 주택난
6.25 전쟁 이후,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한강 도강이 자유로워졌다. 이로 인해 많은 전쟁 피해자들이 서울로 들어왔고,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걸쳐 서울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무허가 불량 건물의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1]1960년대부터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택 부족 문제가 심각해졌다. 특히 빈곤층의 주거 환경은 매우 열악하여 무허가로 건설된 판자촌([슬럼])이 시내 곳곳에 형성되었다.
2. 2. 시민아파트 건설 계획
6.25 전쟁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이전까지 제한되었던 한강 도강이 자유롭게 되었다. 많은 전쟁 피난민들이 서울로 들어왔고,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걸쳐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무허가 불량 건물도 급격히 늘어났다.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무허가 건물 정리를 지시했다. 김현옥 서울 시장은 각 구청에 지시하여 무허가 건물 전수조사를 실시, 136,650동을 집계했다. 김현옥 시장은 이 중 46,650동은 '양성화'라는 이름으로 리모델링하고, 나머지 9만 동은 시민아파트를 건립하여 주민들을 이주시키거나 경기도 광주군(현재의 성남시)에 대단지를 조성하여 이주, 정착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1968년 12월 3일, 대대적인 시민아파트 건립 계획이 발표되었고, 1969년 한 해 동안 32개 지구에 406동 15,840가구의 아파트가 건립되었다.
1960년대부터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택 부족이 심각해졌고, 특히 빈곤층의 주거 환경이 열악하여 무허가 판자촌([슬럼])이 시내 곳곳에 형성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발탁된 김현옥 시장은 1969년 판자촌 도시 재개발과 빈곤층 주민을 위한 시민 아파트 건설을 발표했다. 빠른 주택 공급을 위해 민간 건설 회사들이 참여했다.
3. 붕괴
와우아파트는 서울특별시가 와우산 일대에 건설한 시민 아파트 중 하나였다. 1969년 6월 26일에 착공하여 불과 반년 만인 12월 26일에 5층 건물 16개 동이 준공되었으나, 준공 직후부터 건물에 금이 가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
1970년 새해에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붕괴 위험 때문에 1개 동에서는 주민 전원이 대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35분경, 대피한 동과는 다른 동이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이 사고로 아파트 주민 33명이 사망했고, 경사면 아래에 있던 주택과 점포 3채도 휩쓸려 1명이 희생되었다.
3. 1. 사고 개요
와우아파트는 서울특별시가 와우산 일대에 건설한 시민아파트였다. 1969년 6월 26일에 착공하여 6개월 만인 12월 26일에 5층 건물 16개 동이 준공되었으나, 준공 직후부터 건물에 금이 가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1]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40분경,[1] 아파트 한 동이 붕괴되어 33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당했다. 무너진 아파트 잔해가 아파트 아래 판잣집을 덮쳐 판잣집 주민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 (총 사망자 34명, 부상자 40명)[1]
3. 2. 사고 원인
서울특별시는 와우산 일대에 시민아파트를 건설하였는데, 무면허 건설업자는 김현옥 시장의 업적을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파른 산 중턱에 와우아파트를 지었다. 건설 허가를 위해 (주) 대룡건설에 하청을 줬고, (주) 대룡건설은 다시 건설업자 박영배에게 하청을 줬다. 문제는 박영배가 무면허 건설업자였고, 관련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공사 자재를 아껴 철근 70개를 넣어야 할 기둥에 5개만 넣는 등 부실공사를 하였다. 김현옥 당시 서울특별시장은 '경무대에서 잘 보여야 한다'는 이유와 부동산 투기로 인한 땅값 상승 때문에 값싼 국유지인 와우산 기슭에 아파트를 짓는 무리수를 두었다.[1](주) 대룡건설이 맡은 제3공구 13~16동 아파트에 투입된 총예산은 관급자재로 시멘트 1만 6,614부대, 철근 105만 5,813t(932만 7,026원) 등 2,638만 3,455원이었다. 택지조성비 · 축대비 등을 제외하면 건축비가 평당 1만 원도 채 안 되는 부실한 공사였다.[1]
와우아파트는 1969년 6월 26일 착공해 6개월 만인 12월 26일 준공으로 공사 기간이 너무 짧았다. 와우시민아파트 15동의 설계상 건물 하중은 m2당 280㎏인데 무너진 15동의 실제 하중은 900㎏으로 m2당 600㎏ 이상 초과되었다. 설계 하중이 낮게 정해진 것은 당시 불량 무허가건물 입주자들의 생활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이었다.[1]
70도 경사진 산비탈에 위치한 와우아파트는 와우산 중턱인데다가 계곡을 끼고 있었다. 그러나 공사 시 이를 무시하고 아파트 뒤쪽만 암반 위에 얹고, 아파트 무게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앞쪽에 기둥 7개만 박아서 기초를 삼았다. 기둥 하나에 19mm 철근 70개씩이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5개 정도씩밖에 쓰지 않았다.[1]
콘크리트 배합 비율도 엉망이었다. 시멘트는 넣는 시늉만 내어 콘크리트라기보다는 모래와 자갈의 반죽에 가까웠고, 반죽할 때의 물도 불순물이 많은 하수도 물을 썼다. 기둥의 깊이는 2m 정도에 불과한, 암반이 아닌 부토(敷土) 위에 세워졌다. 결국 해빙기인 4월 지층이 내려앉아 건물이 무너졌다.[1]
결론적으로, 급격한 주택 부족 해소를 우선시한 나머지 과도한 일정과 비용 절감으로 부실 건축을 조장했다는 지적이 있다. 빈곤층 대상 주택 정비였음에도 브로커 개입으로 입주 비용이 상승, 설계에서 여유도가 현저히 낮았고, 예상보다 소득이 높은 중간층이 입주하여 설계 초과 하중이 발생했다.[1]
또한 아파트 건설을 하청받은 하청업체는 무면허였으며, 철근을 대폭 줄이거나 오수가 혼입된 시멘트 성분이 적은 질 낮은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등 부실 시공이 있었다. 급경사에도 불구, 공기 단축만을 이유로 지질 조사도 지반 보강도 없었고, 아파트를 지탱하는 말뚝 또한 튼튼한 암반층에 도달하지 못하고 눈 녹음으로 부드러워지는 정도여서 붕괴되었다. 하청업체의 부당한 헐값 매입과 시공업자와 감독 관청·관청과의 뇌물 수수 및 유착도 있었다.[1]
3. 3. 사고 결과
김현옥 서울시장은 사고 발생 일주일 뒤인 4월 16일에 시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관련자들이 구속되었다.[1] 시민아파트 안전 점검 결과, 405동 중 349동이 안전 기준에 미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 사고 발생 3개월 후 와우아파트 다동 뒤 축대가 무너졌고,[1] 1984년에는 와우산 일부가 폭우로 무너져 2명이 추가로 사망하기도 했다.[1]4. 붕괴 이후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로 김현옥 서울시장이 4월 16일 시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관련자들이 구속되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이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의 안전도를 점검한 결과, 대상 405동 중 349동이 안전 기준에 미치지 못해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충격적인 실태가 드러났다.[1]
사고 발생 3개월도 되지 않아 와우아파트 다동 뒤의 높이 3m 축대가 다시 무너졌고,[1] 1984년에는 2동 뒤편 와우산 일부가 폭우로 무너져 204호와 205호를 덮쳐 2명이 숨지고 3명이 중경상을 입기도 했다.[1]
이 사고는 이후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고질적인 문제의 시작점이 되었다. 1970년대~80년대 하도급 비리, 준공 검사 허점 등 구조적인 문제점이 이 사고를 통해 드러났다.[1]
김현옥 시장은 사고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고, 붕괴된 동과 같은 시공업체가 시공한 3개 동에서도 주민들이 퇴거하여 즉시 해체·철거되었다. 시민 아파트의 신규 건설은 중단되었고, 이미 준공·입주한 아파트를 포함하여 재검사한 결과, 준공된 434개 동 중 349개 동에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2]
4. 1. 시민아파트 철거 및 재건축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로 김현옥 서울시장이 4월 16일 시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관련자들이 구속되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이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의 안전도를 점검한 결과, 대상 405동 중 349동이 안전 기준에 미치지 못해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충격적인 실태가 드러났다.[1]사고 발생 3개월도 되지 않아 와우아파트 다동 뒤의 높이 3m 축대가 다시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1] 1984년에는 2동 뒤편 와우산 일부가 폭우로 무너져 204호와 205호를 덮쳐 2명이 숨지고 3명이 중경상을 입기도 했다.[1]
현재 와우아파트는 철거되었고, 철거 부지는 녹지 공간인 와우공원으로 조성되었다.[1]
4. 2. 와우공원 조성
현재 와우아파트는 철거되었고, 철거된 부지는 녹지 공간인 와우공원으로 조성되었다.4. 3. 여파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실 공사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사고는 이후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고질적인 문제의 시작점이 되었다. 1970~80년대 하도급 비리, 준공 검사 허점 등 구조적인 문제점이 이 사고를 통해 드러났다.[1]사고 이후 시민아파트 전체에 대한 안전도 검사 결과, 시민아파트가 얼마나 허술하게 지어졌는지 명백히 드러났다. 그 결과 1971~1977년 동안 시민아파트 101동이 철거되었고, 철거 비용은 447동 건립 비용에 거의 맞먹는 50.07억원이 소요되었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고와 일련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부실공사라는 고질병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집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라는 속담처럼, 1970~80년대의 하도급 비리와 준공 검사의 허점은 이후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1]
시민 아파트 건설을 추진했던 김현옥 시장은 사고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고, 붕괴된 동과 같은 시공업체가 시공한 3개 동에서도 주민들이 퇴거하여 즉시 해체·철거되었다. 시민 아파트의 신규 건설은 중단되었고, 이미 준공·입주한 아파트를 포함하여 재검사한 결과, 준공된 434개 동 중 349개 동에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붕괴 위험이 높은 101개 동은 1977년까지 철거되었고, 나머지 아파트도 보수·보강하면서 점차 안전성이 높은 건물로 재건축하는 계획 수정이 불가피해졌다.[2]
5. 유사 붕괴 사건
국내에서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이, 해외에서는 2013년 다카 근교 건물 붕괴 사고, 이란의 플라스코 빌딩 붕괴, 영국의 그렌펠 타워 화재 참사|영어 등이 유사한 사건으로 꼽힌다.
5. 1. 국내 유사 사건
5. 2. 해외 유사 사건
6. 기타
나산백화점, 와우아파트, 마포아파트는 일반적인 주제이다. 1995년 바쿠 지하철 화재,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세월호 침몰 사고, 이태원 압사 사고는 기타 인명 사고와 관련된 주제이다.
참조
[1]
뉴스
「14分で1戸」…金日成時代にも建物崩壊事故が茶飯事(1)
https://japanese.joi[...]
2014-05-20
[2]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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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oisr-org.ws.[...]
법정대학대원사회문제연구소
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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