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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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립은 촉한의 인물로, 유비가 형주를 점령한 후 등용되어 장사 태수를 지냈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었을 때 시중으로 임명되었으나, 유선 즉위 후 이엄 휘하에 있는 것을 불만스러워하며 조정을 비판하다가 유배되었다. 제갈량 사후 복귀를 기대했으나, 결국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제갈량은 요립을 방통과 함께 형주의 뛰어난 인재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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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립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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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료립 |
원어 이름 | 廖立 |
자 | 공연 (公淵) |
출생지 | 후난성 창더시 |
사망지 | 쓰촨성 마오현 |
직업 | 관료 |
관직 경력 | |
바군 태수 | 기원후 215년 ~ 219년 경 |
장사 태수 | 209년 ~ 215년 |
시중 | 219년 ~ 223년 |
장수교위 | 223년 ~ ? |
섬긴 군주 | |
관련 인물 | |
상관 | 제갈량 |
2. 생애
요립은 무릉군 임원현 출신으로, 209년 유비가 형주를 점령했을 때 등용되어 장사 태수가 되었다. 제갈량은 손권의 사자에게 요립을 방통과 더불어 형주의 뛰어난 인재라고 소개하는 등 높이 평가했다. 215년, 여몽이 형주를 점령하자 성도로 탈출하여 파군 태수가 되었다. 220년 유비를 한중왕(漢中王)으로 옹립하고,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유선 즉위 후 장수교위가 되었으나, 이엄의 밑에서 한직에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조정을 비판하다 서민으로 강등되어 문산군으로 쫓겨났다. 유배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제갈량이 죽자 관직 재임용 희망을 버리고 슬퍼했다. 훗날 강유가 요립의 집을 방문했을 때, 요립은 의기가 쇠하지 않고 논의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며 칭찬받았다. 요립은 유배지에서 죽고, 처자식들은 촉으로 돌아왔다.
2. 1. 초기 생애와 등용
요립은 무릉군 임원현(臨沅縣, 현재의 창더시 후난성) 출신이다.[1] 209년 유비가 형주를 점령했을 때 등용되어 장사 태수로 임명되었다.[2] 당시 요립은 30세가 채 되지 않았지만, 유비는 그를 종사(從事)로 등용하고 장사 태수로 발탁했다.[2]211년, 유비가 익주(현재의 쓰촨성과 충칭시 일대)로 진군했을 때 제갈량을 형주에 남겨두었는데, 이때 유비의 동맹인 손권은 제갈량에게 국정을 잘 다스릴 인재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제갈량은 "방통과 요립은 형주 출신의 인재들입니다. 그들은 저를 도와 국정을 다스릴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3]
215년, 유비와 손권 사이에 형주 영토 분쟁이 발생하자, 손권은 여몽에게 형주 남부의 세 군을 점령하도록 했다. 요립은 장사군을 버리고 성도로 도망쳐 유비에게 합류했다. 유비는 요립을 높이 평가하여 장사를 잃은 것에 대해 책망하지 않고 파군(현재의 충칭시) 태수로 임명했다.[4]
219년, 유비가 한중 전투에서 한중군을 장악하고 스스로 한중왕을 칭하자, 요립을 시중(侍中)으로 임명했다.[5]
2. 2. 형주 상실과 익주에서의 활동
209년 유비가 형주를 점령했을 때 등용되어 장사 태수로 임명되었다.[1] 제갈량은 손권의 사자에게 요립을 "방통과 더불어 초(형주)의 뛰어난 인재"라고 소개하는 등 높이 평가했다.[3]215년, 여몽이 형주의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을 점령하였을 때 요립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성도로 돌아와 파군태수로 임명되었다.[4] 유비는 요립을 높이 평가했기에 장사를 잃은 것에 대해 그를 책망하지 않고 대신 파군 (현재의 충칭시) 태수로 임명했다.[4]
219년, 유비가 한중 전투에서 한중군을 장악하고 스스로 한중왕을 칭하자, 요립을 시중으로 임명했다.[5] 220년에는 유비를 한중왕으로 옹립하는데 참여했다.
유선이 즉위하였을 때 장수교위로 임명되었는데, 한직에 있으면서 이엄의 밑에 있는 것을 싫어했다. 요립은 자신의 재능과 명성이 제갈량에 버금간다고 자부했기에, 이엄 등의 휘하에서 한직에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해 늘 불만을 품고 있었다.
어느 날, 요립은 장완과 이소에게 처우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게다가, 유비와 관우의 군사적 실패를 비판하고, 향랑, 곽유지, 문공을 범인이라고 깎아내리고, 왕련에 대해서도 그저 속물이라고 심하게 비난했다. 장완과 이소는 제갈량에게 이 발언을 그대로 전했다.
제갈량은 요립을 비방 죄로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으나, 유선은 유배형으로 감형했다. 요립은 서인으로 강등된 채 문산군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제갈량이 죽자 슬퍼하며 관직에 재임용될 희망을 버렸다.
강유가 요립의 집에 방문하여 의논을 하였는데, 요립은 의기가 쇠하지 않았고 논의하는 것도 자연스럽다며 칭찬하였다.
유배지에서 병사했고, 처자식은 성도로 돌아갔다.
2. 3. 유선 시대와 좌천
209년 유비가 형주를 점령했을 때 요립은 등용되어 장사 태수가 되었다.[6] 215년 여몽이 형주(장사, 영릉, 계양)를 점령하자, 요립은 성도로 탈출하여 파군 태수가 되었다.[6]220년 유비를 한중왕(漢中王)으로 옹립하고,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6]
유선 즉위 후 장수교위가 되었으나,[6] 이엄의 밑에서 한직에 있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7] 요립은 자신의 재능과 명성이 승상 제갈량과 동등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7] 요립은 조정을 비판하다 서민으로 강등되어 문산군으로 쫓겨났다.[8] 유배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다 제갈량 사후 관직 재임용 희망을 버렸다.[8]
강유는 요립의 집에 방문하여 의논을 하였는데, 요립의 의기가 쇠하지 않고 논의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며 칭찬하였다.
요립은 유배지에서 죽고, 처자식들은 촉으로 돌아왔다.[8]
2. 4. 유배 생활과 죽음
215년, 여몽이 형주의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을 점령하였을 때 요립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성도로 돌아왔다.[11] 유비는 요립을 높이 평가했기에 죄를 묻지 않고 파군 태수에 임명했다. 그러나 직무 수행 상황은 엉성했다고 한다.[11] 220년, 유비를 다른 신하들과 함께 한중왕(漢中王)으로 옹립하였고,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11] 유선이 즉위하였을 때 장수교위로 임명되었는데, 한직에 있으면서 이엄의 밑에 있는 것을 싫어했다.[11]요립은 자신의 재능과 명성이 승상인 제갈량에 버금간다고 자부했기에, 이엄 등의 휘하에서 한직에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해 늘 불만을 품고 있었다. 요립은 제갈량에게 경의 지위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엄조차 그 지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11]
어느 날, 요립은 장완과 이소에게 처우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게다가, 유비와 관우의 군사적 실패를 비판하는 것을 시작으로 향랑, 곽유지, 문공을 범인이라고 깎아내리고, 왕련에 대해서도 그저 속물이라고 심하게 비난했다. 장완과 이소는 제갈량에게 이 발언을 그대로 전했다.[11]
이에 요립은 조정을 비판하였고, 비방의 죄를 물어 서민으로 강등되어 문산군으로 쫓겨났다.[11] 제갈량은 이 건에 대해 상소를 올려 요립을 사형에 처할 것을 유선에게 요청했다. 유선은 조칙을 내려, 사형에 처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으니 유배형에 처하도록 명했다.[11] 유배지에서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제갈량이 죽자 슬퍼하며 관직에 재임용될 희망을 버렸다.[11]
촉 황제 유선은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요립은 관직에서 물러나 평민의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그와 그의 가족은 문산군(汶山郡, 현재 마오 현 쓰촨성 일대)으로 추방되어 농민으로 살면서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했다.[11]
이러한 처분을 받으면서도 요립은 제갈량이라면 언젠가는 복귀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234년 제갈량의 죽음을 알게 되자 "나는 결국 蛮民이 되어버리는구나"라고 눈물을 흘리며 복귀의 희망이 끊어진 것을 슬퍼했다.[12][13] 그는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이제 나는 남은 인생을 ''좌인''처럼 살아야 하는구나!"左袵|쭈어런중국어 ''좌인''(左袵)은 비한족 고대 중국 소수 민족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는 옷차림 스타일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에서는 "야만인"(즉, 소수 민족 구성원)을 비유적으로 지칭할 수도 있었다.[12][13]
몇 년 후, 촉 장군 강유가 문산군을 지나다가 요립을 방문하여 그가 여전히 자랑스럽고 야심만만한 사람임을 보았고, 말을 할 때 침착하고 차분함을 유지했다.[14] 강유는 군을 이끌고 문산군을 지나갔기 때문에 요립에게 인사를 하러 갔는데, 기개가 쇠하지 않았고 말투도 침착했기에 감탄했다고 한다.[14]
요립은 문산에서 알 수 없는 해에 사망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내와 자녀는 사면되어 촉의 수도 청두로 돌아갈 수 있었다.[14]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죽음을 슬퍼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할 뿐이다.[14]
3. 삼국지연의에서의 요립
요립은 스스로 재능이 뛰어나다고 여겨 제갈량보다 자신의 능력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갈량은 왜 나를 알지 못하는가?"라며 불만을 품었다. 제갈량은 요립이 높은 지위를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자 그를 혐오하여 서민으로 강등시켜 유배 보냈다.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五丈原)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요립은 ‘다시 조정에 소환될 수 없다.’라며 한탄하였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죽음을 슬퍼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만 등장한다.
4. 평가
제갈량은 요립을 "방통과 나란히, 내 공업을 보좌할 자"라고 평가했다.[1] 유비에게 발탁되어 종사가 되었고, 30세가 되기 전에 장사군 태수로 발탁되었다.[1] 제갈량은 손권의 사자에게 요립을 "방통과 더불어 초(형주)의 뛰어난 인재"라고 소개하는 등 높이 평가했으나, 직무 수행 상황은 엉성했다고 한다.[1]
요립은 자신의 재능과 명성이 승상인 제갈량에 버금간다고 자부했기에, 이엄 등의 휘하에서 한직에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해 늘 불만을 품고 있었다.[1] 제갈량에게 경의 지위를 달라고 요구했으나, 제갈량은 이엄조차 그 지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1]
어느 날, 요립은 장완과 이소에게 처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유비와 관우의 군사적 실패를 비판하고, 향랑, 곽유지, 문공을 범인이라고 깎아내리고, 왕련에 대해서도 그저 속물이라고 심하게 비난했다.[1] 장완과 이소는 제갈량에게 이 발언을 그대로 전했다.[1]
제갈량은 요립을 비방 죄로 사형에 처할 것을 유선에게 요청했으나, 유선은 유배형에 처하도록 명했다.[1] 요립은 서인으로 강등된 채 문산군으로 유배되었다.[1]
이러한 처분에도 요립은 제갈량이라면 언젠가 복귀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제갈량의 죽음을 알게 되자 복귀의 희망이 끊어진 것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1]
이후 강유는 군을 이끌고 문산군을 지나가다 요립에게 인사를 하러 갔는데, 기개가 쇠하지 않았고 말투도 침착했기에 감탄했다고 한다.[1]
요립은 유배지에서 병사했고, 처자식은 성도로 돌아갔다.[1]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죽음을 슬퍼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할 뿐이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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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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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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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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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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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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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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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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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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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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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Zhuge Liang 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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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Zhuge Liang 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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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Meaning of 左袵 (zuǒ rèn)
http://www.chinesewo[...]
2018-05-26
[13]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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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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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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