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 3세 (키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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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그 3세는 1267년부터 1284년 사망할 때까지 키프로스 왕이자, 1268년부터 예루살렘 왕으로 재위했다. 그는 키프로스의 이사벨라와 안티오키아의 앙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261년 어머니가 섭정직을 물려준 후 섭정이 되었다. 1267년 위그 2세가 사망한 후 키프로스 왕위를 계승했고, 1268년 콘라드 3세가 사망하자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십자군 국가를 방어하고 정부 시스템을 개선하려 노력했으나, 귀족들의 반발과 샤를과의 갈등으로 인해 아크레를 포기하고 키프로스로 돌아갔다. 이후 아크레 재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284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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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 3세 (키프로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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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키프로스 왕 |
재위 기간 | 1267년–1284년 |
예임자 | 위그 2세 |
계승자 | 요한 1세 |
칭호 | 예루살렘 왕 |
재위 기간 | 1268년–1284년 |
예임자 | 콘라트 3세 |
계승자 | 요한 2세 |
섭정 | 샤를 1세 (1277년–1284년) |
섭정 유형 | 경쟁자 |
배우자 | 이사벨라 드 이벨린 |
가문 | 푸아티에-안티오크 가문 |
부친 | 앙티오키아의 앙리 |
모친 | 키프로스의 이사벨라 |
사망일 | 1284년 3월 24일 |
사망지 | 티레, 티레 영주 |
자녀 | 요한 1세, 키프로스 왕 앙리 2세, 키프로스 왕 티레의 아말릭 마리아, 아라곤 왕비 키프로스의 기, 키프로스 경찰서장 마가렛, 아르메니아 왕비 |
2. 혈통 및 초기 생애
위그는 1233년경 키프로스의 이사벨라와 안티오키아의 앙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이사벨라는 키프로스 국왕 앙리 1세의 여동생이었고, 아버지 앙리는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4세 공의 막내아들이었다.
위그의 어머니인 이사벨라는 어린 국왕 키프로스의 휴 2세의 이모였고, 왕족 혈통으로서는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다. 국왕의 어머니 안티오크의 플레상스는 1261년 사망할 때까지 그를 대신하여 섭정을 맡았다. 이사벨라는 휴 2세의 추정 상속인으로서 섭정을 맡을 자격이 있었고, 그녀는 이 자리를 자신의 아들인 안티오크의 휴(훗날 위그 3세)에게 양보했다. 그는 유능한 통치자로 평가받았다.
14세였던 위그 2세는 1267년 12월 성년에 이르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에 그의 사촌이자 섭정이었던 안티오키아의 위그, 즉 위그 3세가 키프로스 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위그 3세의 대관식은 1267년 12월 25일 니코시아에 있는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남작들은 왕이 부재한 통치 기간 동안 왕권으로부터 상당히 독립되어 있었다. 위그 3세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정부 시스템 개혁을 시도하여, 키프로스에서 이미 사용하던 내각과 기밀 인장 제도를 예루살렘 왕국에도 도입하려 했다. 이전 섭정들은 법적 근거가 약한 상태에서 왕실 영토의 상당 부분을 귀족이나 기사수도회에 넘겼는데, 위그 3세는 즉위와 함께 이러한 양도가 무효라고 선언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아르수르 영지를 성 요한 기사단에게, 시돈 영지를 템플 기사단에게, 그리고 티레 영지를 몽포르의 필리프에게 양도한 것이었다. 위그 3세는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지만,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타협할 의사도 있었다.
위그 3세는 아크레를 재점령하기 위해 두 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279년, 그는 대규모 키프로스 군대를 이끌고 티레로 향했다. 힘을 과시하고 뇌물을 통해 도시의 권위를 회복하려 했으나, 몽포르의 존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보죄의 윌리엄의 지속적인 반대로 계획은 좌절되었다. 키프로스로 돌아온 그는 보복으로 템플 기사단의 재산을 압수하고 요새를 파괴했다. 템플 기사단은 교황에게 불만을 제기했고, 교황은 위그 3세에게 재산 반환을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1277년부터 맘루크에 맞서 본토를 지원하는 데 제약이 있었지만, 위그 3세는 프랑코-몽골 동맹의 일환으로 몽골 제국이 맘루크가 점령한 레반트 침공을 시도할 때 이를 지원할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위그 3세는 아내 이벨린의 이사벨라와의 사이에서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위그의 외할머니인 상파뉴의 앨리스는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주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는 1243년 자신의 종손자인 예루살렘의 콘라트 2세를 대신하여 왕국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앨리스가 1246년에 사망하자, 섭정 자리는 그녀의 이복 여동생인 키프로스의 멜리센데의 주장을 물리치고 그녀의 아들, 즉 위그의 외삼촌인 키프로스의 앙리 1세에게 넘어갔다. 앙리 1세는 1253년 사망할 때까지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으로서 본토를 다스렸다.
위그는 어머니 밑에서 사촌인 브리엔의 위그와 함께 자랐다. 브리엔의 위그는 위그의 이모, 즉 어머니의 죽은 언니인 마리아의 아들이었다. 위그는 이벨린 가문 출신의 이사벨라와 결혼했다. 이벨린 가문은 예루살렘 왕국의 주요 귀족 가문 중 하나였다. 이 결혼 혹은 약혼은 교황의 특별 면제가 발급된 1255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위그는 외모가 뛰어나고 매력적이었으나, 성미가 급하고 타인의 감정에 무신경한 면이 있었다.
3. 섭정
휴 2세는 또한 유럽에 거주하는 예루살렘의 콘라드 3세의 추정 상속인이었기 때문에, 안티오크의 휴는 섭정으로서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할 자격도 있었다. 그러나 휴 2세가 미성년자였으므로 그의 친족이 섭정을 행사해야 했고, 이사벨라는 1263년에 그 역할을 받아들였다.
1264년 이사벨라가 사망하자, 브리엔의 휴와 안티오크의 휴 사이에 예루살렘 섭정직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브리엔의 휴는 자신의 어머니가 안티오크의 휴의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자신이 섭정직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안티오크의 휴는 이미 키프로스의 섭정으로서 쇠퇴하는 본토 왕국에 군사적으로 더 기여할 수 있었고, 안티오크의 보에몽 6세 공작의 사촌이자 강력한 이벨린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어 더 나은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예루살렘 고등법원은 두 경쟁자가 어린 국왕의 친족으로서 동등하게 가깝지만, 그들 중 더 연장자인 안티오크의 휴가 우선권을 가져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 결정으로 안티오크의 휴는 사실상 휴 2세의 추정 상속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섭정으로서 위그는 십자군 국가를 방어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겼다. 그는 십 년 이상 만에 예루살렘 왕국을 방어하기 위해 키프로스 군대를 파견한 최초의 키프로스 통치자였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가 카이사레아 마리티마, 아르수르, 하이파, 사페드, 토론, 샤텔뇌프를 정복하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위그는 본토에 남아있는 유일한 왕실 도시인 아크레의 방어를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
4. 키프로스 왕 즉위
5. 예루살렘 왕 즉위
1267년 12월, 성년에 이르지 못한 14세의 위그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사촌이자 섭정이었던 안티오키아의 위그(위그 3세)가 키프로스 왕위를 계승했다. 위그 3세는 1267년 12월 25일 니코시아의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1268년 5월, 위그 3세는 아크레로 가서 예루살렘의 콘라드 3세의 공식 섭정이자 후계자로 인정받고자 했다. 예루살렘의 고등 법원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그의 고모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가 섭정 자리를 주장하며 나섰다. 마리아는 자신이 콘라드 3세와 더 가까운 친척이므로 섭정 자격이 더 있다고 주장했다. 위그 3세는 그들의 공통 조상인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 여왕의 증손자였지만, 마리아는 손녀였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는 마리아의 주장이 더 강력했고, 그녀는 이 논쟁을 위해 미리 준비해왔다. 그러나 위그 3세는 남성이었고, 이미 통치 경험이 있었으며,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더 적합한 후보로 여겨졌다. 마침 1268년 초 바이바르스가 자파, 보퍼트, 안티오크를 정복하는 등 외부 위협이 고조되자, 고등 법원은 위그 3세에게 유리하게 판결했다.
1268년 10월 29일, 콘라드 3세는 나폴리에서 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한 앙주의 샤를 1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이로써 위그 3세는 예루살렘 왕위에도 오르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왕국을 대신 통치할 바일리를 임명하는 대신, 키프로스와 아크레를 직접 오가며 통치했다. 이는 1220년대 이후 처음으로 예루살렘 왕국 본토에 상주하는 군주가 생긴 것을 의미했다.
6. 통치 정책
그의 주요 정책 중 하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티레를 소유한 강력한 몽포르 가문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위그 3세는 자신의 여동생 안티오크-루지냥의 마가렛을 필리프의 아들 티레의 존과 결혼시키고, 필리프가 티레를 존에게 양도하며, 위그 3세는 마가렛과 존의 후손에게 티레를 봉토로 인정하는 데 합의했다. 이 협정을 통해 위그 3세는 마리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269년 9월 24일, 티레 대성당에서 리다 주교에 의해 예루살렘 왕으로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다. 티레 대성당은 1187년 예루살렘 공방전 이후 예루살렘의 왕과 여왕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전통적인 장소였다.
1271년 6월,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가 북동쪽의 몽포르 성을 점령하면서 아크레가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었다. 바이바르스는 곧바로 키프로스에 대한 약탈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같은 해 5월 9일, 영국 왕자 에드워드가 약 1,000명의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에드워드 1세의 십자군의 일환으로 아크레에 도착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현지 기독교 세력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실망했다. 한편, 바이바르스의 키프로스 공격 실패는 오히려 키프로스 기사들을 동요시켰고, 그들은 위그 3세가 본토에서 복무하라는 소집 명령을 거부했다. 키프로스 기사들은 왕이 키프로스 밖에서 자신들을 위해 싸워줄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에드워드가 중재에 나섰고, 결국 키프로스 기사들은 왕 또는 그의 아들이 직접 지휘할 경우 매년 4개월 동안 해외에서 복무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사건은 위그 3세에게 상당한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이후 에드워드는 위그 3세가 바이바르스의 영토를 약탈하는 것을 도왔고, 1272년 초 위그 3세는 맘루크와 휴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 휴전 덕분에 아크레는 1291년 함락될 때까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1272년 6월 16일 동방을 떠났다.
본토에서 티레 외에 유일하게 평신도가 소유한 주요 봉토는 베이루트 영지였으며, 이벨린의 이사벨라가 영주였다. 그녀의 남편 스트레인지의 하모는 위그 3세를 불신했고, 1273년 임종을 앞두고 아내 이사벨라와 베이루트 영지를 바이바르스의 보호 아래 두었다. 당시 법에 따르면, 여성 봉신인 이사벨라는 왕이 제시한 세 명의 후보 중 한 명과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위그 3세는 유능한 기사를 동방으로 유치하기 위해 이사벨라와의 결혼을 제안하려 그녀를 키프로스로 데려갔다. 그러나 바이바르스가 이사벨라를 베이루트로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고, 왕국의 고등 법원마저 아무런 지원을 제공하지 않자 위그 3세는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이바르스가 사망한 한참 뒤에야 베이루트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몇 차례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위그 3세는 결국 무슬림 역사가들이 그를 칭했던 것처럼 "아크레의 왕" 이상의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티오크의 마지막 공작인 보에몬드 6세가 1275년에 사망하면서 어린 아들 보에몬드 7세와 딸 트리폴리의 루시아를 남겼다. 보에몬드 7세는 아버지로부터 트리폴리 백국을 물려받았지만 아직 미성년자였다. 위그 3세는 통치 가문의 가장 가까운 성인 남성 친척으로서 섭정권을 주장하기 위해 트리폴리로 향했다. 그러나 보에몬드 7세의 어머니인 아르메니아의 시빌라가 이미 가문의 관습에 따라 자신의 권리로 섭정 지위를 확보한 상태였다. 위그 3세는 트리폴리에서 아무런 지지를 얻지 못했고, 단지 라타키아를 포함하는 지역에 대해 바이바르스와 휴전을 협상하여 안티오크 공국의 마지막 남은 영토를 보존하는 작은 외교적 성과를 거두는 데 그쳤다.
7. 귀족들의 반발과 아크레 포기
위그 3세는 자신의 봉신인 이벨린 가문과 몽포르 가문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 간의 뿌리 깊은 반목은 해결하지 못했다. 특히 베네치아 상인들은 위그 3세가 제노바 측을 편애한다고 여겨 불만을 품었다. 템플 기사단과 튜튼 기사단 역시 위그 3세가 몽포르의 필리프와 화해한 것에 반대했으며, 아크레의 코뮌은 왕실이 다시 자신들의 문제에 개입하고 티레를 우대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당시 템플 기사단의 총장이었던 토마 베라르는 위그 3세를 싫어했지만 공개적으로 대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273년 그의 뒤를 이은 윌리엄 드 보죄는 위그 3세를 왕위에서 몰아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위그 3세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그의 고모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가 예루살렘 왕위에 대한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이었다. 위그 3세는 1273년 교황청에 마리아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대리인을 보냈지만, 마리아는 이미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앙주의 샤를에게 넘기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위그 3세는 1269년부터 샤를이 지중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심을 경계하고 있었다. 샤를은 자신의 친척이기도 한 템플 기사단 총장 윌리엄 드 보죄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시칠리아의 통치자이자 유명한 십자군 왕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9세의 동생인 샤를은 군사력과 외교력 면에서 위그 3세가 대적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샤를은 개인적으로도 위그 3세에게 적대적이었으며, 마리아의 예루살렘 왕위 주장뿐만 아니라 브리엔의 위그가 키프로스 왕위를 주장하도록 부추기기도 했다.
자신을 둘러싼 반대에 지친 위그 3세는 1276년 10월, 돌연 아크레를 영원히 떠나기로 결정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템플 기사단이 아크레 인근의 한 마을을 사들이면서 의도적으로 왕의 승인을 구하지 않고 그의 권위를 무시한 사건이었다. 템플 기사단과 베네치아인들은 위그 3세의 퇴거를 반겼지만, 구호 기사단, 튜튼 기사단, 그리고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렌티노의 토마스는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위그 3세가 머물고 있던 티레로 대표단을 보내 최소한 왕국의 행정을 맡을 대리인이라도 임명해 줄 것을 간청했다. 분노한 위그 3세는 그의 매형인 몽포르의 존의 중재를 받아들여 이벨린의 발리안을 행정관으로 임명한 뒤, 즉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났다. 이후 그는 교황 요한 21세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주장했다.
1277년 3월, 마리아는 교황의 승인 아래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샤를에게 매각하는 절차를 완료했다. 몇 주 후 샤를의 대리인인 산 세베리노의 로제가 아크레에 도착하여 왕국의 통치권을 요구했으나, 위그 3세는 아무런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로제는 샤를을 예루살렘의 왕으로 선포하고 남작들에게 샤를의 대리인으로서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남작들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두 차례나 위그 3세에게 기존의 충성 서약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티레의 존과 베이루트의 이사벨라와 같은 주요 영주들은 여전히 위그 3세를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며 샤를에게 충성하기를 거부했다.
8. 아크레 재탈환 시도와 최후
1282년, 시칠리아에서 샤를에 대항하는 대규모 봉기인 시칠리아 만종이 일어나 로제 드 산 세베리노가 소환되었다. 또한 베이루트의 이사벨라가 사망하고 그녀의 영지가 여동생인 에쉬바에게 넘어갔는데, 에쉬바의 남편 몽포르의 험프리는 위그 3세의 절친한 친구였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 힘입어 위그 3세는 아크레 탈환 의지를 다시 다졌고, 1283년 7월 말 아들 앙리 및 보에몽과 함께 키프로스에서 출항했다.
그러나 그는 아크레에 바로 상륙하지 못하고 베이루트로 표류하여 8월 1일 그곳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의 군대가 티레로 진군하는 동안 무슬림 습격자들의 매복 공격을 받았는데, 위그 3세는 이를 템플 기사단이 사주한 것으로 의심했다. 바다를 통해 티레에 도착한 위그 3세는 불길한 징조들을 겪었다. 그의 기가 바다에 빠지고, 모인 성직자들이 들고 있던 십자가가 실수로 그의 유대인 궁정 의사의 머리를 깨뜨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는 아크레에서 환영받기를 기다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아크레의 샤를 측 대리인(bailiff)이었던 오도 푸알레치엔은 맘루크와 휴전을 막 체결한 상태였기에, 위그 3세는 자신이 공격할 경우 맘루크의 개입을 우려했을 수 있다.
1283년 11월 3일, 위그 3세는 가장 아끼던 아들 보에몽을 잃었다. 더욱 큰 타격은 그의 친구이자 매형인 몽포르의 존의 죽음이었다. 키프로스인들은 약속된 4개월의 복무 기간이 끝나자 그를 떠났지만, 위그 3세는 티레에 남아 1284년 3월 24일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생존한 맏아들 존 1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이듬해 사망했고, 다른 아들인 앙리 2세가 왕위를 이었다.
9. 자녀
이름 설명 요한 1세 1285년 사망, 위그 3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됨 보에몽 1283년 사망 앙리 2세 1324년 사망, 요한 1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됨 아말릭 1310년 사망, 앙리 2세를 몰아내고 실질적인 통치자가 됨 아이메리 1316년 사망, 아말릭의 뒤를 이어 잠시 통치함 가이 그의 아들 휴 4세가 앙리 2세를 계승함 마리아 1322년 사망, 아라곤의 국왕 하이메 2세와 결혼 마르그리트 1296년 사망, 아르메니아의 국왕 토로스 3세와 결혼 앨리스 갈릴리 공작이자 베들레헴의 명목상 군주 이벨린의 발리앙과 결혼 (이벨린의 필립의 아들) 엘비스 이사벨라 1319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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