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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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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수광은 당나라 말기 심주 출신으로, 노룡절도사 유인공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애첩을 범한 후 쫓겨났으며, 907년 유인공을 공격하여 노룡절도사를 자칭했다. 이후 형 유수문과의 갈등, 후량에 대한 복속, 그리고 이존욱과의 대립을 거치며 세력을 확장했다. 911년 스스로 대연황제를 칭했지만, 이존욱의 공격을 받아 유주가 포위되었고, 결국 913년 항복했다. 이듬해 처형되었으며, 그의 통치는 폭정과 외교적 고립으로 특징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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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유수광
한자 표기劉守光
로마자 표기Yu Sugwang
신분
작위오대 십국 시대 연나라황제
통치 기간
재위 시작911년 9월 8일
재위 종료914년 1월 4일
연호
연호응천(應天, 911년 9월 8일 ~ 914년 1월 4일)
생애
출생미상
출생지당나라 심주(深州, 지금의 하북성 형수시의 현급시 심주시) 악수(樂壽縣, 지금의 하북성 창주시 헌현) (?) (유인공의 본적)
사망일914년 2월 16일
사망지진나라 태원부
가족 관계
아버지유인공
배우자이황후, 축황후
자녀아들 유계위(劉繼威), 유계순(劉繼珣), 유계방(劉繼方), 유계조(劉繼祚), 유계옹
형제자매형 유수문, 동생 유수기
국가
왕조연(燕)
기타
연호Yìngtiān (應天)
연호 기간911년 9월 8일 – 914년 1월 4일

2. 생애

wikitext

유수광은 심주(深州) 사람으로 노룡절도사 유인공의 아들이다.[5][6] 유인공에게 애첩 나씨(羅氏)가 있었는데, 유수광이 나씨를 취하자 화가 난 유인공은 수광을 매질하고 쫓아내었다.[9] 이에 수광은 개평 원년(907년) 유인공을 공격하여 붙잡고, 스스로 노룡절도사를 칭하였다.[9] 형 유수문이 이 소식을 듣고 수광을 토벌하려고 하였으나 기소 전투에서 패배하였고,[9] 이듬해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남은 세력이 유수문의 아들 유연좌를 추대하여 저항하였으나 910년 끝내 투항하였다.[8]

원래 심성이 용렬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알려진 유수광은 이 일로 더욱 교만해져 포악한 일을 저질렀다. 911년 8월에 스스로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하고 연호를 응천(應天)이라 바꾸었다. 황제 즉위 직후부터 진왕(晉王) 이존욱의 공격을 받았다. 이존욱이 이승훈을 보내 축하하게 했을 때, 유수광은 이승훈이 대등한 국가를 대표하는 사절의 역할을 하는 대신,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임을 선언해야 한다고 고집했다.[3] 분노한 유수광은 이승훈을 투옥하고 나중에 살해했다.[3][12]

912년 봄, 주덕위는 조의 장수 왕덕명과 의무의 장수 정암과 연을 공격하도록 했다.[3] 유수광은 후량의 태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태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를 돕기로 결정했다.[3] 그러나 후량 황제는 진의 장군 이존심에게 패배하여 물러났고, 심각한 병에 걸려 다시 유수광을 돕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킬 수 없었다.[3] 912년과 913년 초의 잇따른 전투에서 주덕위와 다른 진의 장군들은 연의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했고, 그 과정에서 연의 장군 단정규와 원행흠을 사로잡아 연의 사기를 크게 꺾었다.[3]

912년 여름에 유주를 포위했다.[3] 유수광이 겸손한 어조로 평화를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자 주덕위는 조롱하며 제안을 거절했지만, 유수광이 다시 간청하자 유수광의 평화 제안을 이존욱에게 전달했다.[3] 913년 겨울, 유주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3] 유수광은 이존욱이 직접 와서 자신의 항복을 받아들이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3] 이존욱이 도착하여 유수광에게 그가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유수광은 망설이며 항복하지 않았다.[3] 그러나 이소희가 항복하여 진군에게 도시의 절박한 상황을 알렸고, 진군은 가장 격렬한 공격을 감행하여 도시가 함락되었다.[3]

913년 유수광은 도망쳤으나, 부인들과 아들과 함께 사로잡혀 이존욱에게 넘겨졌다.[2] 914년 봄, 이존욱은 유인공과 유수광을 포함한 유씨 일가를 왕처직과 왕융의 초청으로 의무와 성덕 절도를 순회하는 개선 행진에 데려갔다.[2] 태원으로 돌아온 후 유수광이 처형될때,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저는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합니다. 전하께서 큰 업적을 세우고 싶으시다면 저를 살려 당신 밑에서 일하게 해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2] 이씨 황후와 주씨 황후는 그를 꾸짖고 운명을 받아들였지만 유수광은 마지막 순간까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2]

2. 1.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유수광은 심주(深州) 사람으로 노룡절도사 유인공의 아들이다.[5][6] 유인공은 건녕 4년(897년)에 이극용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군벌이 되었다. 유수광은 천복 3년(903년)경, 평주자사로 임명되었다. 어느 날,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그의 처남 술률아발을 보내 평주를 공격해 오자, 유수광은 화친을 청하는 척하며 성 밖에 연회장을 차리고 잔치를 벌였다. 잔치가 무르익는 사이에, 그는 매복시켰던 군사들에게 거란 장수들을 사로잡게 한 다음, 성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인질로 삼았다.

천우 4년(907년)의 어느 때부터인가(구체적인 시점은 미상) 또는 그 이전 무렵, 유수광은 유인공이 총애하는 나씨(羅氏)와 바람을 피웠다. 이 사실을 안 유인공은 유수광을 매를 쳐서 집에서 내쫓아 버리고 더 이상 그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해 3월 6일(907년 4월 21일), 주전충은 그의 장군인 박주자사 이사안(李思安)을 북로행군도통(北路行軍都統)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노룡군의 군부 유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 해 여름 4월 3일(907년 5월 17일), 이사안이 지휘하는 선무군은 곧바로 유주 밑에 이르렀다. 이때 유인공은 유주성 서쪽 대안산(大安山, 지금의 북경시 방산구에 있는 )의 별장에 있었는데, 유주성이 이사안의 공격에 대처하지 못하고 거의 함락될 뻔한 사태가 벌어졌다. 유수광은 성 밖에서 군대를 정비하여 성안으로 들어와서 성을 지켜냈다. 이어 그는 성 밖으로 병력을 출동시켜 이사안이 지휘하는 선무군과 교전 끝에 그들을 패퇴시켰다. 그 후, 유수광은 절도사를 자칭하고 그의 부장 원행흠과 이소희(李小喜)를 보내어 대안산에 있던 유인공의 별장을 공격하게 하였다. 유인공은 군사들을 보내어 이에 맞서려 했지만, 이소희는 그를 무찌르고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유수광은 유인공을 가택 연금시키고, 평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던 유인공의 여러 장수들과 막료들, 측근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유수광은 그 후 907년 가을,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 애제로부터 제위를 찬탈하고 새로운 후량을 건국한 태조에게 신하가 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상소에서 단지 "임시" 절도사의 직함을 사용했다. 908년 가을, 태조는 그를 노룡 절도사로 임명하고 명예 재상 직함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하사했다.[9] 태조는 또한 그를 하간왕으로 봉했으며, 908년에는 그 직함을 연왕으로 격상시켰다.[11]

한편, 당시 이창 절도사였던 유수문은 유수광이 유인공을 전복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후량에 신하로 투항하여 군대를 일으켜 유수광을 공격했다. 형제의 군대는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다.[9] 이 대립 동안 유수광은 이극용의 아들인 후계자 이존욱 진왕의 도움을 받았다. 909년, 형제는 다시 기소 전투 (계소, 현대 톈진)에서 맞붙었다. 유수문은 처음에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초기 승리 중에 유수문은 군대에게 "내 형제를 죽이지 마라!"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유수문을 알아본 원흥인이 그에게 돌진하여 그를 사로잡았고, 그 후 전투는 이창 군대에 대한 패주로 바뀌었다. 유수광은 유수문을 체포하여 창주로 향했다.[8]

2. 2. 형제와의 갈등 및 세력 확장

유수광은 유인공의 아들로, 심주(深州) 사람이다.[9] 유인공에게는 애첩 나씨(羅氏)가 있었는데, 유수광이 사통하자 유인공은 분노하여 그를 매질하고 내쫓았다.[9] 907년, 유수광은 군사를 일으켜 유인공을 사로잡고 스스로 노룡절도사라 칭하였다.[9]

이 소식을 들은 형 유수문은 군사를 일으켜 유수광을 공격했으나, 기소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로잡혔다.[9] 유수광은 유수문을 암살하고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8] 유수문의 잔존 세력은 아들 유연좌를 옹립하여 저항했으나, 910년 유연좌가 항복하면서 유수광은 이창(義昌)을 점령하였다.[8]

한편, 유수광은 후량의 태조에게 신하가 되기를 청하였다.[9] 908년, 태조는 유수광을 노룡절도사로 임명하고 명예 재상 직함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하사했으며, 연왕(燕王)으로 격상시켰다.[11] 유수광은 후량과 진(晉)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이득을 취하려 하였다.[8]

유수광은 스스로 신의 도움을 받는다고 믿었고, 잔혹하고 방탕한 행동을 일삼았다.[8] 911년, 이존욱 등이 '상부'(尙父) 칭호를 제안하자, 유수광은 더욱 교만해져 황제를 참칭할 결심을 하였다.[3] 그는 반대하는 참모 손학(孫鶴)을 잔혹하게 처형하고, 연(燕) 황제에 즉위하여 연호를 응천(應天)이라 하였다.[3]

2. 3. 황제 즉위와 멸망

유수광은 심주 사람으로 유인공의 아들이다. 907년 아버지 유인공을 공격하여 붙잡고, 스스로 노룡절도사를 칭하였다. 형 유수문이 이 소식을 듣고 토벌하려고 하였으나 패배하였고, 이듬해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원래 심성이 용렬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알려진 유수광은 이 일로 더욱 교만해져 포악한 일을 저질렀다.

911년 8월에 스스로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하고 연호를 응천(應天)이라 바꾸었다. 황제 즉위 직후부터 진왕(晉王) 이존욱의 공격을 받았다. 이존욱이 이승훈을 보내 축하하게 했을 때, 유수광은 이승훈이 대등한 국가를 대표하는 사절의 역할을 하는 대신,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임을 선언해야 한다고 고집했다.[3] 분노한 유수광은 이승훈을 투옥하고 나중에 살해했다.[3][12]

912년 봄, 주덕위는 조의 장수 왕덕명과 의무의 장수 정암과 연을 공격하도록 했다.[3] 유수광은 후량의 태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태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를 돕기로 결정했다.[3] 그러나 후량 황제는 진의 장군 이존심에게 패배하여 물러났고, 심각한 병에 걸려 다시 유수광을 돕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킬 수 없었다.[3] 912년과 913년 초의 잇따른 전투에서 주덕위와 다른 진의 장군들은 연의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했고, 그 과정에서 연의 장군 단정규와 원행흠을 사로잡아 연의 사기를 크게 꺾었다.[3]

912년 여름에 유주를 포위했다.[3] 유수광이 겸손한 어조로 평화를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자 주덕위는 조롱하며 제안을 거절했지만, 유수광이 다시 간청하자 유수광의 평화 제안을 이존욱에게 전달했다.[3] 913년 겨울, 유주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3] 유수광은 이존욱이 직접 와서 자신의 항복을 받아들이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3] 이존욱이 도착하여 유수광에게 그가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유수광은 망설이며 항복하지 않았다.[3] 그러나 이소희가 항복하여 진군에게 도시의 절박한 상황을 알렸고, 진군은 가장 격렬한 공격을 감행하여 도시가 함락되었다.[3]

913년 유수광은 도망쳤으나, 부인들과 아들과 함께 사로잡혀 이존욱에게 넘겨졌다.[2] 914년 봄, 이존욱은 유인공과 유수광을 포함한 유씨 일가를 왕처직과 왕융의 초청으로 의무와 성덕 절도를 순회하는 개선 행진에 데려갔다.[2] 유수광은 태원으로 돌아온 후 처형될때,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저는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합니다. 전하께서 큰 업적을 세우고 싶으시다면 저를 살려 당신 밑에서 일하게 해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2] 이씨 황후와 주씨 황후는 그를 꾸짖고 운명을 받아들였지만 유수광은 마지막 순간까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2]

3. 통치 스타일 및 평가

3. 1. 폭정과 난행

유수광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오만함을 버리지 않았다.[3] 예를 들어, 이존욱이 그의 오만함을 부추기기 위해 그의 관료 이승훈을 보내 축하하게 했을 때, 유수광은 이승훈이 대등한 국가를 대표하는 사절의 역할을 하는 대신,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임을 선언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분노한 유수광은 이승훈을 투옥하고[3] 나중에 살해했다.[12] 그는 또한 모든 병사들의 얼굴에 문신을 새겼다. 더 나아가, 그는 관료 봉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일으켜 의무를 공격하려 했고, 봉도는 투옥되었다. (봉도는 나중에 탈출하여 진으로 도망쳤다.)[3]

그가 의무를 공격하자, 왕처직은 진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이존욱은 주덕위를 보내 조의 장수 왕덕명과 의무의 장수 정암과 912년 봄에 연을 공격하도록 했다.[3] 유수광은 후량 태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태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를 돕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후량 황제는 진의 장군 이존심에게 패배하여 물러났고, 심각한 병에 걸려 다시 유수광을 돕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킬 수 없었다. (그는 그 해 말에 그의 아들 주우규 영왕에게 암살당했고, 주우규가 왕위를 차지하면서 연에 대한 후량의 지원에 대한 희망은 더욱 사라졌다.) 한편, 유수광만큼이나 폭력적인 유지위는 그의 지휘관 장만진에게 암살당했고, 장만진은 후량에 항복했다.[3]

912년과 913년 초의 잇따른 전투에서 주덕위와 다른 진의 장군들은 연의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했고, 그 과정에서 연의 장군 단정규와 원행흠을 사로잡아 연의 사기를 크게 꺾었다. 도시를 하나씩 점령하는 작전에 성공한 주덕위는 912년 여름에 유주를 포위했다. 유수광이 겸손한 어조로 평화를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자, 주덕위는 그를 조롱하였다.[3] 주덕위는 유수광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유수광이 다시 간청하자 유수광의 평화 제안을 이존욱에게 전달했다. 한편, 유수기와 양시후는 주덕위가 조를 구원하기 위한 작전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조의 영토로 들어갔다. 주덕위는 왕덕명을 조로 보내 진의 장군 이존심과 사건당을 도와 조를 방어하게 했지만, 포위를 풀지 않았다. 이후 이존욱이 장승업을 유주로 보내 주덕위와 포위 상황에 대해 논의하도록 하자, 유수광은 장승업에게 항복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장승업은 유수광이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은 전례를 언급하며 거절했다. 주덕위는 이어서 유수광의 반격을 격퇴했다.[3]

913년 겨울, 유주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유수광은 이존욱이 직접 와서 자신의 항복을 받아들이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주덕위는 이 제안을 이존욱에게 전달했다. 이존욱이 도착하여 유수광에게 그가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유수광은 망설이며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수광에게 진의 공격에 맞서 싸우라고 주장했던 이소희가 항복하여 진군에게 도시의 절박한 상황을 알렸고, 진군은 가장 격렬한 공격을 감행하여 도시가 함락되었다. 유수광은 도망쳤다.[3]

3. 2. 외교적 고립

유수광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오만함을 버리지 않았다.[3] 예를 들어 이존욱이 그의 오만함을 부추기기 위해 그의 관료 이승훈을 보내 축하하게 했을 때, 유수광은 이승훈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임을 선언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분노한 유수광은 이승훈을 투옥하고[3] 나중에 살해했다.[12] 그는 또한 모든 병사들의 얼굴에 문신을 새겼다. 더 나아가, 관료 봉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일으켜 의무를 공격하려 했고, 봉도는 투옥되었다가 탈출하여 진으로 도망쳤다.[3]

유수광이 의무를 공격하자, 왕처직은 진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존욱은 주덕위를 보내 조의 장수 왕덕명과 의무의 장수 정암과 함께 연을 공격하게 했다.[3] 유수광은 후량의 태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태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원했지만, 진의 장군 이존심에게 패배하여 물러났다. 이후 후량 태조는 병에 걸려 다시 군대를 출동시킬 수 없었고, 곧 아들 주우규에게 암살당하면서 연에 대한 후량의 지원은 더욱 어려워졌다.[3]

912년과 913년 초, 주덕위와 다른 진의 장군들은 연의 도시들을 점령하고, 연의 장군 단정규와 원행흠을 사로잡아 연의 사기를 크게 꺾었다. 912년 여름, 주덕위는 유주를 포위했고, 유수광이 평화를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자 주덕위는 이를 조롱하며 거절했다.[3] 유수기와 양시후는 주덕위가 조를 구원하기 위한 작전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조의 영토로 들어갔지만, 주덕위는 왕덕명을 조로 보내 진의 장군 이존심과 사건당을 도와 조를 방어하게 하고 포위를 풀지 않았다. 이후 이존욱이 장승업을 유주로 보내 주덕위와 포위 상황에 대해 논의하도록 하자, 유수광은 항복 의사를 밝혔지만, 장승업은 유수광의 과거 행적을 언급하며 거절했다. 주덕위는 이어서 유수광의 반격을 격퇴했다.[3]

913년 겨울, 유주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유수광은 이존욱에게 직접 항복을 받으러 온다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존욱이 도착하여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유수광은 망설였다. 그러나 이소희가 항복하여 진군에게 도시의 상황을 알렸고, 진군은 공격을 감행하여 도시를 함락시켰다. 유수광은 도망쳤다.[3]

3. 3. 현대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4. 가계

유수광의 아버지는 당나라 말기 군벌이자 노룡군절도사를 지낸 유인공(劉仁恭)이다. 형으로는 의창군절도사를 지낸 유수문(劉守文)이 있었다. 유수문에게는 유연조(劉延祚) 등의 아들이 있었다. 유수광은 이황후와 축황후를 아내로 두었으나, 914년 이존욱에 의해 처형되었다. 생모가 미상인 자녀로는 장남 유계위(劉繼威)가 있었는데, 그는 912년 휘하 장수 장만진(張萬進)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른 아들들인 유계순(劉繼珣), 유계방(劉繼方), 유계조(劉繼祚)는 914년 이존욱에 의해 처형되었다. 서자인 유계옹(劉繼顒)은 901년에 태어나 973년까지 살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실제로는 동생 유수기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5. 연표

참조

[1] 웹사이트 Academia Sinica http://sinocal.sinic[...]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문서
[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8]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9]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0]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1] 서적 Old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https://zh.wikisourc[...]
[12]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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