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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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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묵은 자퉁군 부현 출신의 촉한의 학자이다. 익주에서 고문 경학을 배우고,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권학종사로 임명되었다. 유비가 황제에 즉위한 후 태자복으로 유선에게 좌씨전을 가르쳤으며, 제갈량의 북벌에 군좨주로 참여했다. 제갈량 사후 태중태부를 역임하다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윤종이 촉한의 박사가 되었다. 진수는 윤묵을 당대의 학자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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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묵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윤묵
원어 이름尹默
사잠 (思潛)
출생지쓰촨성몐양시
직업관리, 학자
자녀윤종
관직
태자복 (太子僕)221년 ~ 223년
간의대부 (諫議大夫)223년 ~ 227년
군좨주 (軍祭酒)227년 ~ 234년
태중대부 (太中大夫)234년 ~ ?
군주유선
승상제갈량

2. 생애

윤묵(尹黙)은 현재의 쓰촨성면양시 동쪽에 위치한 자퉁군(梓潼郡) 부현(涪縣) 출신이다. 당시 익주(益州, 현재의 쓰촨성과 충칭시를 포함) 사람들은 고문(古文)에 익숙하지 않았다. 윤묵은 고향 출신인 이인(李仁)[1]과 함께 형주(荊州, 현재의 후베이성후난성을 포함)로 가서 사마휘송충(宋忠, 송중자(宋仲子)로도 알려짐)에게 고문을 배웠다. 그는 유교 경전과 역사에 정통하게 되었고, 특히 『좌전(左傳)』을 전공했다. 그는 『좌전』을 사용하여 『춘추(春秋)』를 해석한 유흠(劉歆), 『좌전』을 주석한 정중(鄭眾)과 가규(賈逵)와 같은 초기 학자들의 발자취를 따랐다. 윤묵의 저작은 매우 인기를 얻어 독자들은 그의 주석서를 읽은 후 원본을 참조할 필요가 없었다.[2]

214년, 유비가 익주를 점령한 후 윤묵을 권학종사(勸學從事)로 임명했다. 221년, 유비가 황제를 칭하고 촉한(蜀漢)을 건국한 후 아들 유선(劉禪)을 태자로 책봉하면서 윤묵은 태자복(太子僕)으로 임명되어 유선에게 『좌전』과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223년, 유비가 사망하고 유선이 뒤를 잇자, 윤묵은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다. 227년경, 제갈량이 조위(曹魏)에 대한 일련의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한중(漢中)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윤묵은 군제주(軍祭酒)로 임명되었다. 234년 제갈량이 사망한 후, 윤묵은 성도(成都)로 돌아와 태중대부(太中大夫)를 역임했다. 그는 불특정 시기에 사망했다. 아들 윤종(尹宗)은 그의 유산을 이어받아 촉한 조정에서 박사(博士)가 되었다.[3]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거의 이름만 등장한다.

2. 1. 초기 생애와 유학

익주에서는 대부분 금문으로 된 경학을 중시하고 장구의 정확한 독음은 중시하지 않았다. 윤묵은 그러한 학문의 협소함에 실망해 멀리 형주로 유학하여 사마휘, 송충, 이선 등과 함께 고문으로 된 경학을 학습했다.[1]

거기서 여러 경서와 사서에 모두 통달하며 좌씨의 춘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유흠의 조례, 정중, 가규 부자, 진기, 복건의 주석 등을 거의 암송하여 두 번 다시 책을 살펴볼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2]

214년, 유비가 익주를 통치하던 유장을 몰아내고 익주를 장악한 후, 윤묵을 권학종사(勸學從事)로 임명했다.[3]

2. 2. 촉한에서의 관직 생활

214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고 익주목을 겸임하게 되면서 윤묵을 권학종사(勸學從事)로 임명하였다.[1][2][3]

220년, 조비가 헌제에게서 황제 자리를 빼앗자, 윤묵은 유비에게 황제 즉위를 권하는 상소를 올린 인물 중 한 명이었다.[3]

221년, 유비가 황제에 즉위하고 유선을 태자로 삼으면서 윤묵은 태자복(太子僕)에 임명되어 유선에게 좌씨전을 가르쳤다.[2][3]

223년, 유선이 황제 자리를 이어받자 윤묵은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다.[2][3]

227년, 제갈량한중에 주둔하며 위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북벌을 준비할 때, 윤묵은 군좨주(軍祭酒)로 임명되어 제갈량을 따랐다.[2][3]

234년, 제갈량이 사망한 후 윤묵은 성도로 돌아와 태중태부(太中大夫)를 역임하다가 사망하였다.[2][3]

3.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윤묵에 대해 "윤묵은 《좌전》에 정통했다. 그는 덕망으로 명성이 높지는 않았지만, 당대의 학자였다"라고 평했다.[4]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2
[2] 서적 Sanguozhi vol. 42
[3] 서적 Sanguozhi vol. 42
[4] 서적 Sanguozhi vol.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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