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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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규는 후한 말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군으로, 현재의 산시성 샹펀현 출신이다. 그는 여러 관직을 거치며 전투 준비와 물자 보급에 기여하여 부후작에 봉해졌고, 동오의 장수 여범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228년 조휴와 함께 오나라를 침공했으나, 석정 전투에서 조휴가 주방의 계략에 빠지자 가규는 조휴를 구출하고 퇴각을 도왔다. 가규는 석정 전투 직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가충은 진나라에서 관료로 활동했고, 손녀 가남풍은 진 혜제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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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년 출생 - 제갈근
제갈근은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으로 손권의 신임을 받았으며, 촉한의 제갈량과 조위의 제갈탄과 함께 삼국시대에 걸쳐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 174년 출생 - 조순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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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기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였던 사마의는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중용되며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가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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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가규 |
본명 | 가구 (賈衢) |
자 | 양도 (梁道) |
출생 | 174년 |
사망 | 약 228년 10월 (54세) |
출생지 | 산시성 샹펀현 |
배우자 | 유씨 (柳氏) |
자녀 | 가충 가혼 (賈渾) |
직업 | 군인, 정치가 |
시호 | 숙후 (肅侯) |
작위 | 양리정후 (陽里亭侯) |
관직 | |
건위장군 (建威將軍) 임기 시작 | 222년 |
건위장군 (建威將軍) 임기 종료 | 228년 |
섬긴 군주 (건위장군) | 조비, 조예 |
예주자사 (豫州刺史) 임기 시작 | 220년 |
예주자사 (豫州刺史) 임기 종료 | 222년 |
섬긴 군주 (예주자사) | 조비 |
위군태수 (魏郡太守) 임기 | 220년 |
섬긴 군주 (위군태수) | 조비 |
2. 생애
가규(賈逵)는 후한 말과 삼국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인물로, 현재의 산시성샹펀현(襄汾縣)인 허둥군(河東郡) 샹링현(襄陵縣) 출신이다. 여러 현령, 태수, 재상의 주부를 거치며 뛰어난 행정 능력과 군사적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202년 건안 7년, 원상이 곽원을 보내 하동을 공격했을 때, 가규는 강읍(絳邑)을 지키며 백성들을 보호했다. 곽원의 계략에 빠질 뻔했으나, 오히려 곽원의 모사 축오(祝奧)를 속여 7일 동안 곽원의 진격을 늦추는 지략을 발휘했다.[1]
205년 건안 10년, 고간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가규는 민지현령(澠池縣令)으로서 장염(張琰)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장염에게 거짓으로 협력하는 척하며 병사를 얻어 성을 수리하고, 모반을 꾀하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장염에게 저항하여 장염을 패배시켰다.[2]
이후 가규는 조조의 신임을 얻어 승상주부, 간의대부 등을 역임하며 조조의 장례를 주관하고 조비의 즉위를 돕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한 후에는 예주자사로 임명되어 오나라와의 국경 지대를 안정시키고, '가후거'라는 운하를 건설하는 등 치적을 쌓았다.
228년, 조예(曹叡)의 치세 동안 가규는 조휴(曹休)와 함께 오나라를 침공하는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석정 전투(石亭之戰)에서 조휴는 주방의 계략에 빠졌지만, 가규는 주방의 항복을 의심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비록 오나라 군대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가규는 패배한 조휴를 구출하여 퇴각을 도왔다. 가규는 전투 직후 사망했다.[1]
가규의 아들 가충(賈充)은 위나라 섭정 사마소(司馬昭)의 측근으로, 진 왕조에서도 관료로 복무하며 가문의 번영을 이어갔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가규는 원래 가구(賈衢)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나중에 가규(賈逵)로 고쳤다. 군리(郡吏)로 관직을 시작하여 강읍(絳邑)의 장(長)이 되었다. 202년(건안 7년), 원상이 곽원을 보내 하동의 여러 성읍을 공격했으나, 가규가 지키는 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곽원이 흉노의 난제호주천까지 동원하자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으나, 백성들은 가규를 해치지 않았다. 곽원은 가규를 등용하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죽이려 했으나 강읍 백성들의 반대로 사면되었다. 가규는 피씨현을 요충지로 여겨 곽원이 쉽게 하동을 점령하자 그곳이 점령될까 우려하여, 곽원의 모사 축오(祝奧)를 속여 7일 동안 곽원의 진격을 늦추었다.[1]이후 가규는 무재(茂才)로 천거되어 민지현령(澠池縣令)에 임명되었다. 205년(건안 10년), 고간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자 장염(張琰)이 이에 호응하려 했다. 가규는 장염을 만나다가 변고를 알아차렸으나, 사로잡힐 것을 우려해 거짓으로 장염의 편에 섰다. 그는 장염에게서 병사를 받아 성을 수리하고, 모반을 꾀하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장염에게 저항하여 장염을 패배시켰다.[2]
가규는 산시성샹펀현(襄汾縣)인 허둥군(河東郡) 샹링현(襄陵縣) 출신이다.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10대 초반에 부모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법 등의 학문에 힘써 조부로부터 "어른이 되면 장군으로 출세할 것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가규의 활약은 손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무재가 되어 면지현령이 되었다. 고간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염이 이에 호응하려 했다. 가규는 계책을 써서 장염의 병력을 빼앗고, 면지의 반란자를 모두 제거했으며, 성벽을 수리하여 장염을 격파했다. 그 후 조부의 상으로 관직을 떠났다.
조정의 실권을 쥔 조조의 부름을 받아 사공연(속관)이 되었다. 의랑이 되어 사예의 군사를 담당했다. 마초 정벌 때 조조로부터 홍농 태수 대리로 임명되어 조조와 대면했다. 조조는 가규를 마음에 들어하여 "태수가 모두 가규와 같다면 걱정할 일이 없을 텐데"라고까지 말했다. 후에 둔전 도위와 직무를 놓고 다투어 면직되었지만, 조조의 총애는 변함없어 승상주부에 발탁되었다.
2. 2. 조조와의 만남과 활약
건안 7년(202년), 원상이 곽원을 파견해 하동의 각 성읍을 함락시켰으나, 가규가 지키는 성은 함락하지 못했다. 곽원이 흉노의 선우 난제호주천까지 불러 오자 성은 곧 무너지려 했으나, 부로들은 끝내 가규를 해치지 않았다. 읍을 무너트린 후 곽원은 가규를 쓰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죽이려 했으나 강읍의 아전과 백성들이 반대하여 사면되었다. 가규는 피씨현을 요충지로 여기고 있었는데, 곽원이 쉽게 하동을 제압하자 피씨현이 곽원에게 점령될 것을 두려워하여 곽원의 모사 축오(祝奧)를 의심케 해 7일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1]무재로 천거되고 민지현령에 제수되었다. 건안 10년(205년), 고간이 조조에게 모반을 일으키자 장염(張琰)이 이에 호응하려 했다. 가규는 모르는 채로 장염을 만나다가 변고가 일어났음을 알았으나, 사로잡힐 것을 두려워해 거짓으로 장염의 편에 섰다. 현의 치소가 있는 여성(蠡城)은 성벽과 해자가 견고하지 않은데, 장염에게서 병사를 받아 성을 수리하고, 모반을 꾀하는 자들을 전부 주살하고 장염에게 항거하니 장염은 패배했다.[1]
할아버지가 죽어 관직을 떠났다가, 사도에게 초빙되어 속관이 되고 의랑으로써 사례군사에 참가했다. 건안 16년(211년), 조조가 마초를 치러 가다가 홍농을 지나면서, 가규에게 홍농태수를 대행하게 했다. 가규는 둔전도위가 도망친 백성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했는데, 둔전도위는 군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언어가 불순했다. 가규는 분노하여 둔전도위에게 죄를 묻고 다리를 부러트렸다. 이 일로 인해 면직되었으나, 조조는 이를 좋게 여기고는 승상주부로 삼았다. 후에 간의대부가 되었고, 하후상과 함께 군사 계책을 장관했다.[1] 건안 25년(220년), 조조가 죽자 조조의 장사를 주관했다. 조창이 장안에서 와 옥새가 어디 있는지를 묻자, 가규는 엄히 대답하여 조창을 물렸다. 마침내 조조의 관을 업으로 옮겼다. 이 해 6월, 조비가 대군을 일으키자 가규는 승상주부좨주를 맡았다.[1]
2. 3. 예주자사 시절과 대오나라 전선
문제가 위왕이 되자, 업현에 불법이 많아 가규는 업현령이 되었고, 한 달 뒤에는 위군태수가 되었다. 문제는 초현에 이르자 가규를 예주자사로 임명했다. 당시 천하는 기강이 풀어져 있었는데, 가규는 법령을 엄중히 집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병조종사가 옛 자사에게 휴가를 얻어 가규가 임명된 지 여러 달 후에야 나타나자, 이를 기화로 2천 석 이하 관리들 중에서 방종하여 법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모조리 면직시켰다. 문제는 가규를 '진정한 자사'라고 칭찬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예주를 표준으로 삼았으며, 가규를 관내후에 봉했다. 예주는 오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가규는 척후를 밝히고 전쟁 준비에 힘써 적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한편, 제방을 새로 쌓고 소익양피란 저수지를 만들고 200리의 운하를 뚫었다. 이 운하는 나중에 '가후거'가 된다.황초 3년(222년) 조휴, 장료와 함께 오나라를 쳐, 오나라 대장 여범의 군대가 폭풍우에 휩쓸린 틈을 타 공격하여 격파했다. 이 공적으로 양리정후에 봉해졌고, 건위장군이 더해졌다. 태화 원년(227년) 명제가 즉위했는데, 손권은 이때 예주 남쪽이고 장강에서는 400리 떨어진 동관에 주둔하고, 위나라 예주 군대는 수비하고 있는지라 오나라를 북쪽에서 위협하는 군대가 없어 오나라가 위나라의 침공을 받으면 동(여강)과 서(강하)의 군대를 합쳐 전력으로 항전할 수 있었다. 가규는 이를 타개하고자 예주에서 장강까지 이르는 직통로를 뚫어 오나라의 동서 군대가 서로 구원하는 형세를 끊고, 요구(潦口)로 나아가 주둔하면 동관을 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명제는 이에 동의하였다. 이듬해, 조휴가 오나라의 파양 태수 주방의 항복을 받아 환현으로 진격하였고, 명제는 가규에게 전장군 만총, 동완태수 호질 등 4군을 지휘하여 동쪽에서 조휴와 합류하게 했다. 그런데 동관에 방비가 없었으므로 가규는 오나라 군사가 환현에 집결했을 것이며, 조휴가 이와 싸우면 필패한다고 여겼다. 200리를 진군하였다가 조휴가 패전했음을 알았다. 가규는 서둘러 진격하고, 오나라 군대에 의병을 보여주어 물러나게 해 조휴를 구조했다.
원래 가규는 조휴와 사이가 나빴는데, 황초 연간 조비가 가규에게 절을 주려는 것을 조휴가 가규의 성격 문제를 들어 훼방을 놓았다. 협석에서 조휴가 졌을 때 가규가 없었으면 조휴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위략》에 따르면, 조휴는 가규가 늦게 온 것을 꾸짖고 조정에 상주하여 가규를 모함했으며, 가규도 돌아온 뒤 상주했다. 조정에서는 비록 가규가 옳지만, 조휴가 종실로 중임을 맡고 있었으므로, 아무에게도 잘못을 묻지 않았다.
2. 4. 석정 전투와 죽음
황초 3년(222년) 조휴, 장료와 함께 오나라를 쳐, 오나라 대장 여범의 군대가 폭풍우에 휩쓸린 틈을 타 공격하여 격파했다. 이 공적으로 양리정후에 봉해졌고, 건위장군이 더해졌다. 태화 원년(227년) 명제가 즉위했는데, 손권은 이때 예주 남쪽이고 장강에서는 400리 떨어진 동관에 주둔하고, 위나라 예주 군대는 수비하고 있는지라 오나라를 북쪽에서 위협하는 군대가 없어 오나라가 위나라의 침공을 받으면 동(여강)과 서(강하)의 군대를 합쳐 전력으로 항전할 수 있었다. 가규는 이를 타개하고자 예주에서 장강까지 이르는 직통로를 뚫어 오나라의 동서 군대가 서로 구원하는 형세를 끊고, 요구(潦口)로 나아가 주둔하면 동관을 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명제는 이에 동의하였다.이듬해, 조휴가 오나라의 파양 태수 주방의 항복을 받아 환현으로 진격하였고, 명제는 가규에게 전장군 만총, 동완태수 호질 등 4군을 지휘하여 동쪽에서 조휴와 합류하게 했다. 그런데 동관에 방비가 없었으므로 가규는 오나라 군사가 환현에 집결했을 것이며, 조휴가 이와 싸우면 필패한다고 여겼다. 200리를 진군하였다가 조휴가 패전했음을 알았다. 가규는 서둘러 진격하고, 오나라 군대에 의병을 보여주어 물러나게 해 조휴를 구조했다.[1]
원래 가규는 조휴와 사이가 나빴는데, 황초 연간 조비가 가규에게 절을 주려는 것을 조휴가 가규의 성격 문제를 들어 훼방을 놓았다. 협석에서 조휴가 졌을 때 가규가 없었으면 조휴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위략》에 따르면, 조휴는 가규가 늦게 온 것을 꾸짖고 조정에 상주하여 가규를 모함했으며, 가규도 돌아온 뒤 상주했다. 조정에서는 비록 가규가 옳지만, 조휴가 종실로 중임을 맡고 있었으므로, 아무에게도 잘못을 묻지 않았다. 가규는 마침 병이 위독해져 죽었다. 시호를 내려 숙후(肅侯)라 했으며, 《위서》에 따르면 향년 55세였다.[1]
3. 평가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주어진 지시사항에 따라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출력하지 않습니다.)
4. 가족 관계
항목 | 내용 |
---|---|
할아버지 | 가습 |
아버지 | ? |
본인 | 가규 |
아들 | 가충, 가혼 |
5. 기타
가규는 후한 말기와 삼국 시대의 인물로, 여러 현령, 태수, 재상의 주부를 거쳤으며, 관할 지역의 전투 준비와 물자 보급에 기여한 공로로 부후작에 봉해졌다. 동오(東吳)의 장수 여범(呂範)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더 많은 칭찬을 받았다.
228년, 조예(曹叡)의 치세 동안 가규와 조휴(曹休)는 오나라를 침공하는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로 인해 석정 전투(石亭之戰)가 벌어졌다. 조휴는 오나라 장수 주방의 계략에 빠졌으나, 가규는 주방의 항복을 의심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오나라 군대가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규는 패배한 조휴를 구출하여 퇴각을 도왔다. 가규는 전투 직후 사망했다.
가규의 아들 가충(賈充)은 위나라 섭정 사마소(司馬昭)의 측근이었다. 그는 삼국 시대가 끝난 후 진 왕조에서도 관료로 계속 복무했으며, 딸 가남풍(賈南風)이 미래의 혜제와 결혼한 후 공작에 봉해졌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오의 주방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거짓 투항하는 것을 위군에서 유일하게 간파하여 진언하지만, 조휴의 노여움을 사 후군을 맡게 된다. 그러나 조휴가 오군에게 대패할 것을 예측한 그는 가장 먼저 구원에 나서 조휴의 위기를 구했고, 조휴로부터 감사를 받는다.
가규가 예주(豫州)에서 사망했을 때, 관리와 주민들이 가규를 존경하여 사당을 세웠다. 그 사당 앞에 잣나무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 나무를 사용하기 위해 몰래 베려고 했다. 도끼로 베기 시작했지만, 베인 자리가 즉시 재생되었다. 사람들은 이 괴이한 현상에 매우 놀랐다.
참조
[1]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5
[2]
서적
Sun Quan's biography in the Sanguozhi
Sanguozhi
228-10-15
[3]
서적
太平広記
和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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