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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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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광사는 조선 후기의 문신, 서예가, 화가, 저술가로, 본관은 전주이다. 그는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나 예조판서를 지낸 이진검의 아들이었으나, 부친의 탄핵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겪었다. 이후 나주 괘서 사건으로 백부가 처벌받으면서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글과 글씨를 가르친 죄목으로 전라남도 신지도로 이배되어 생을 마감했다. 그는 원교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하고 서예 이론을 체계화했으며, 산수화와 인물화에도 능했다. 주요 저서로는 『원교서결』, 『원교집선』, 『동국악부』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서예 작품으로는 이광사 행서 화기, 이광사 필적 원교법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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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광사
한자 이름李匡師
신한평 선생이 그린 이광사 선생 초상 (보물 제1486호)
신한평 선생이 그린 이광사 선생 초상 (보물 제1486호)
형제4남 1녀 중 막내
국적조선
도보(道甫)
원교(圓嶠)·수북(壽北)·두남(斗南)
출생일숙종 31년(1705)
거주지조선 한성부 원교산 산촌
조선 경기도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사망일정조 1년(1777) (향년 73세)
사망지조선 전라도 완도군 신지도 (지금의 대한민국 전남 완도군 신지면)
묘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기도 장단 송남(長湍 松南)의 거창지 고지도 소재 수북 리광사 선생 묘소
경력영조 이금 치세 시대 때의 백하 윤순(白下 尹淳)과,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의 문인
학자로서의 학파 성향은 강화학파
서예가로서의 특정 필체 성향은 원교체
분야유교
양명학
당파소론 후예 세력
가족 관계
예조판서 이진검(李眞儉)
파평 윤씨 부인 (윤지상(尹趾祥)의 女)
배우자초취: 안동 권씨 부인 (1718년 결혼~1738년 사별)
계취: 문화 류씨 부인 (1739년 재혼~1755년 사별)
자녀장녀: 이도희(李度熙)의 妻(초배 권씨 소생)
장남: 완산 이긍익(李肯翊, 초배 권씨 소생)
차남: 신재 이영익(李令翊, 계배 류씨 소생)
차녀: 질병으로 조졸(계배 류씨 소생)

2. 생애

경종 1년, 이광사의 부친 이진검은 노론 4대신을 탄핵하다가 경상도 밀양으로 유배되었고, 이광사는 당시 17세였다. 영조 31년 전라도 나주 괘서사건으로 백부 이진유가 처벌받을 때 연좌되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51세). 당시 이광사가 옥중에서 사사되었다는 소문이 돌아, 이 소식을 들은 부인 문화 류씨는 자살하였다.

이후 이광사는 부령에서 재지 문인들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쳐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전라남도 신지도(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금곡리)로 이배되었으며(58세), 그곳에서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광사가 사망한 이듬해 2월, 아들 형제는 선조들이 묻혀있던 경기도 장단 송남 거창지에 어머니 류씨와 이광사를 함께 묻었다. 현재 그의 묘역은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DMZ)의 수풀 속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고 있다.

2. 1. 가계 및 초기 생애

이광사는 1705년(숙종 31년) 조선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8대조는 완성군 이귀정, 7대조는 함풍군[6] 이계수이다. 6대조는 이수광, 5대조는 이유간이며, 이유간의 아들은 효민공 이경직, 이경설, 문충공 이경석이다. 4대조는 효민공 이경직, 3대조는 효간공 이정영이다. 이정영의 형제로는 백부(큰아버지) 이만성과 당숙(5촌) 북곡 이진유가 있다. 조부는 삼취헌 이대성이며, 조모는 풍양 홍씨로 홍만용의 딸이자 정명공주의 손녀이다. 부친은 각리 이진검이며, 모친은 파평 윤씨 윤지상의 딸이다.

이광사는 이광태, 이광제, 이광정 등 세 형과 누이 하나가 있었는데, 누이는 유원에게 출가하였다. 이광사는 안동 권씨 권성중의 딸과 혼인하여 장녀 이도희와 장남 이긍익을 낳았다. 이후 문화 류씨 류종원의 딸과 재혼하여 차남 이영익과 일찍 사망한 차녀를 두었다. 1721년(경종 1년), 이광사가 17세 때 부친 이진검은 노론 4대신을 탄핵하다 밀양으로 유배되어 사망하였다.

이광사의 가계
관계이름비고
8대조이귀정완성군
7대조이계수함풍군[6]
6대조이수광
5대조이유간우곡
4대조이경직효민공, 석문
3대조이정영효간공, 서곡
종조부 (할아버지 형제)이만성백부
당숙 (5촌)이진유북곡
조부이대성삼취헌
조모풍양 홍씨홍만용의 딸, 정명공주의 손녀
이진검각리
파평 윤씨윤지상의 딸
이광태
이광제
이광정
누이유원에게 출가
본인이광사원교
부인안동 권씨군수 권성중의 딸
장녀이도희
장남이긍익연려실
부인문화 류씨참봉 류종원의 딸
차남이영익신재
차녀질병으로 조졸



1719년(숙종 45년), 이광사는 15세에 고성 군수 권성중의 딸 안동 권씨와 혼인하였다.[6] 1721년(경종 1년), 17세에 부친이 이이명을 탄핵하다 밀양으로 유배되었다. 1731년(영조 7년), 27세에 첫 부인 권씨가 사망하였다. 1733년(영조 9년), 29세에 류종원의 딸 문화 류씨와 재혼하였다.

2. 2. 관직 생활과 유배

경종 1년 부친 예조판서 이진검은 노론 4대신을 탄핵하던 중 경상도 밀양으로 유배(이광사는 당시 17세)되었다가 죽었고, 영조 31년 전라도 나주 괘서사건으로 백부 이진유(李眞儒)가 처벌을 당할 때 이에 또한 연좌되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51세)되었다. 사건 당시 이광사가 옥중에서 사사되었다는 소문이 돌아, 이 소식을 들은 부인 문화 류씨는 자살하였다. 이후 부령에서 재지의 문인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쳐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전라남도 신지도(지금의 대한민국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금곡리)로 이배(58세)되었으며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향년 73세). 이광사가 죽은 이듬해 2월 아들 형제가 선조들이 묻혀있는 경기도 장단 송남(長湍 松南) 거창지에 어머니 류씨와 동분합장하였으며, 현재 그의 묘역은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DMZ)의 수풀 속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막고 있다.

2. 3. 사망

영조 31년 괘서사건으로 백부 李眞儒중국어가 처벌을 당할 때 연좌되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사건 당시 이광사가 옥중에서 사사되었다는 소문이 돌아, 이 소식을 들은 부인 문화 류씨가 자살하였다. 이후 부령에서 재지의 문인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쳐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전라남도 신지도(완도군 신지면 금곡리)로 이배되었으며 그곳에서 73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4] 이광사가 죽은 이듬해 2월 아들 형제가 선조들이 묻혀있는 경기도 장단 송남 거창지에 어머니 류씨와 동분합장하였으며, 현재 그의 묘역은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DMZ)의 수풀 속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막고 있다.[4]

3. 작품 세계

이광사는 백하 윤순에게서 글씨를 배워 진서, 초서, 전서, 예서에 모두 능통했고, 원교체라는 독자적인 서체를 확립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은 산수, 인물, 풀과 벌레 등을 잘 그렸으며, 인물화에서는 남송원체화풍의 옛 방식을 따랐지만, 산수화에서는 새롭게 들어온 오파의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문인화풍을 보여주었다. 그는 서예 이론을 체계화한 <원교서결>, <원교집선>, <동국악부>와 같은 저술을 통해 후학 양성을 위한 귀중한 자료들을 남겼다. 작품으로는 '영의정 이경석 표', '우의정 정우량 지', '병조판서 윤지인 비', '김이원 신도비', '형조판서 이신의 표' 등이 있다.

3. 1. 서예

이광사는 백하 윤순에게서 글씨를 배워 진서, 초서, 전서, 예서에 모두 능했다. 그는 원교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확립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서예 작품으로는 <행서 4언시>(서울대 박물관 소장), 이광사 필적 원교법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그의 글씨는 전라남도 지역의 여러 사찰 현판으로도 남아있다. 해남군 대흥사의 "침계루" 및 "대웅보전" 현판, 강진군 백련사의 "만경루" 현판, 구례군 천은사의 "지리산 천은사" 현판 등이 그의 글씨이다.

3. 2. 회화

이광사는 산수화, 인물화, 풀과 벌레 그림을 잘 그렸다. 인물화는 남송원체화풍(南宋元體畵風)의 고식(古式)을 따랐고,[1] 산수화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吳派)의 남종화법(南宗畵法)을 토대로 소박하고 꾸밈없는 문인 취향의 화풍을 보였다.[1]

대표작으로는 1746년 오대의 인물화가 왕제한을 흠모하여 그렸다는 간송미술관 소장 <고승간화도>(高僧看畵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수도>(山水圖)가 있다.[1] 간송미술관 소장 <잉어도>(鯉魚圖)는 이광사가 머리와 눈만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긴 것을, 20년 후인 1773년(영조 49년, 이광사 69세)에 아들 이영익이 동천 종형의 별장에서 이어 그린 것이다.

3. 3. 저술

4. 가계도

8대조완성군(莞城君) 이귀정(李貴丁)
7대조함풍군[6](咸豊君) 이계수(李繼壽)
6대조이수광(李秀光)
현조우곡 이유간(愚谷 李惟侃)
고조효민공(孝敏公) 석문 이경직(石門 李景稷)
증조효간공(孝簡公) 서곡 이정영(西谷 李正英)
조부삼취헌 이대성(三翠軒 李大成)
조모풍양 홍씨, 홍만용의 딸 (정명공주의 손녀)
백조부이만성(李晩成)
당숙북곡 이진유(北谷 李眞儒)
각리 이진검(角里 李眞儉)
파평 윤씨, 윤지상(尹趾祥)의 딸
숙부이진휴(李眞休), 숙종 28년(1702) 식년시 장원
숙부서천 이진급(西泉 李眞伋)
숙부진사 이진위(李眞偉)
이광태(李匡泰)
이광제(李匡濟)
이광정(李匡鼎)
유원(柳垣)에게 출가
본인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부인안동 권씨, 군수(郡守) 권성중(權聖重)의 딸
장녀이도희(李度熙)
장자연려실 이긍익(燃藜室 李肯翊)
부인문화 류씨, 참봉(參奉) 류종원(柳宗垣)의 딸
차자신재 이영익(信齋 李令翊)
차녀질병으로 조졸
종형참의공(參議) 이광명(李匡明) (→ 강화학파 육대계승)
종질초원 이충익(椒園 李忠翊)
종손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명미당(明美堂), 조선 말기 정신적 지도자


5. 평가

이광사는 윤순에게 글씨를 배워 진서, 초서, 전서, 예서에 모두 능통했으며, 원교체라는 독자적인 서체를 개발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림에도 능하여 산수, 인물, 초충 등을 잘 그렸으며, 특히 산수화에서는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문인화풍을 보여주었다.[1] 서예 이론을 체계화한 《원교서결》, 《원교집선》, 《동국악부》 등의 저술을 남겨 후학 양성에 기여했다.[1]

5. 1. 긍정적 평가

윤순에게서 글씨를 배워 진서, 초서, 전서, 예서에 모두 능했으며, 원교체라는 독창적인 서체를 개발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은 산수, 인물, 풀, 벌레 등을 잘 그렸는데, 인물화는 남송원체화풍의 옛 방식을 따랐지만, 산수화는 새롭게 들어온 오파의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문인화풍을 보여주었다.[1]

서예 이론을 체계화한 《원교서결》, 《원교집선》, 《동국악부》와 같은 저술을 통해 후학들을 위한 귀중한 자료들을 남겼다.[1]

5. 2. 종합적 평가

백하 윤순에게서 글씨를 배워 진서, 초서, 전서, 예서에 모두 능했으며, 원교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만들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은 산수와 인물, 풀과 벌레를 잘 그렸다. 인물화에서는 남송원체화풍의 옛 방식을 따랐으나, 산수화에서는 새롭게 들어온 오파의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문인 취향의 화풍을 보였다.[1]

대표작으로는 <행서 4언시>(서울대 박물관 소장), 1746년 오대(五代)의 인물화가 왕제한(王齊翰)을 흠모하여 그렸다는 <고승간화도>(高僧看畵圖, 간송미술관 소장),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서예 이론을 체계화한 <원교서결>, <원교집선>, <동국악부> 등의 저술을 통해 후학을 위한 귀중한 자료들을 남겼다.[1]

작품으로는 '영의정 이경석 표', '우의정 정우량 지', '병조판서 윤지인 비', '김이원 신도비', '형조판서 이신의 표' 등이 있다.[1]

6. 이광사와 관련된 장소

이광사의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대학교박물관, 간송미술관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소장처작품명비고
국립중앙박물관보물 제1677-1호 이광사 행서 화기
국립중앙박물관보물 제1677-2호 이광사 필적 원교법첩
국립중앙박물관산수도
서울대학교박물관행서사언시
간송미술관고승간화도
간송미술관잉어도이광사가 머리와 눈만 그리고 미처 완성하지 못한 것을, 20년 후 아들 이영익이 이어 그림


6. 1. 유배지

이광사는 부친 이진검이 노론 4대신을 탄핵하다 경상도 밀양으로 유배(경종 1년)될 때 17세의 나이로 동행하였다.[1] 영조 31년에는 나주 괘서 사건으로 백부 이진유(李眞儒)가 처벌받을 때 연좌되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51세)되었다.[1] 당시 이광사가 옥중에서 사사되었다는 소문이 돌아, 부인 문화 류씨가 자살하기도 하였다.[1]

이후 부령에서 재지 문인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쳐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전라남도 신지도(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금곡리)로 이배(58세)되었으며, 그곳에서 향년 73세로 생을 마감하였다.[1]

6. 2. 작품 관련 장소


  • 해남군 대흥사에는 이광사가 쓴 현판 "침계루"와 "대웅보전"이 있다.
  • 강진군 백련사에는 이광사가 쓴 현판 "만경루"가 있다.
  • 구례군 천은사에는 이광사가 쓴 현판 "지리산 천은사"가 있다.

참조

[1] 문서 원교산, 서대문 밖의 인왕산 중 팔각산
[2] 웹사이트 고지도 http://kostma.net/e-[...]
[3] 문서 1705년
[4] 문서 1777년
[5] 문서 한국의 고문서를 다수 소장하고 있다.
[6] 문서 후손들은 정치적으로 소론(少論)계열이며, 정치/철학, 사상, 문학/역사, 예술, 항일(독립) 등의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 [[육진팔광 (덕천군파)]] * [[강화학파 육대계승 (덕천군파)]]
[7] 웹사이트 한국학자료포털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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