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정명공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정명공주는 조선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로, 유일한 적녀이자 영창대군과 함께 사랑받았으나,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인해 광해군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와 함께 유폐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공주로 복권되었고, 혼인을 통해 홍주원과 7남 1녀를 두었으며, 조선 시대 공주 중 가장 장수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녀는 서예에 능했고, 인조와 효종 시대를 거쳐 종친의 어른으로 존경받았으며, 혜경궁 홍씨와 원빈 홍씨의 선조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603년 출생 - 도쿠가와 요리후사
    도쿠가와 요리후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1번째 아들이자 미토 번의 초대 번주로서, 미토 도쿠가와 가문을 창설하고 고산케의 기슈 도쿠가와 가문과 관계를 맺었으며, 쇼군 이에미쓰의 신임을 받아 부장군이라 불렸으나 미토 번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는 제한적이었다.
  • 1603년 출생 - 예로페이 하바로프
    예로페이 하바로프는 17세기 러시아의 탐험가로서 아무르 강 유역을 탐험하고 러시아에 귀속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중국과의 충돌을 겪고 아무르 강 지도를 작성했다.
  • 1685년 사망 - 야마가 소코
    야마가 소코는 에도 시대 초기의 유학자이자 병법가로, 주자학을 비판하며 고학을 주창하고 무사도를 재정립했으며, 《무가사기》와 《중조사실》 등의 저서를 통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685년 사망 - 고사이 천황
    고사이 천황은 에도 시대 일본의 제111대 천황으로, 고미즈노오 천황의 아들이자 고코묘 천황의 뒤를 이어 재위 기간 동안 재해와 천재지변을 겪었으며 학문과 예술에 능해 문집을 남겼다.
  • 조선 선조의 자녀 - 광해군
    광해군은 조선 제15대 국왕으로, 임진왜란 중 세자로 책봉되어 전란 수습에 기여하고 즉위 후 대북파를 등용,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고 후금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으나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으며, 대동법 시행, 『동의보감』 편찬 등의 업적과 폐모살제 등의 논란으로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
  • 조선 선조의 자녀 - 흥안군 (1598년)
    흥안군 이제는 선조의 열번째 서자이자 활달한 성격의 왕자였으나,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국청 없이 처형되었고, 위성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나 작위와 시호는 철회되었으며, 묘소는 사라졌지만 흥안대로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정명공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정명공주
정명공주 영정사진 (추정)
출생일1603년 6월 27일
출생지정릉동 한성 조선
사망일1685년 9월 8일
사망지안동별궁, 북부 안국방, 한성 조선
묻힌 곳파주 경기도 오리동?
가문이씨 (출생 시)
풍산 홍씨 (혼인 시)
가족 관계
아버지선조
어머니인목왕후
배우자홍주원(1623년 결혼, 1672년 사망)
자녀홍태망
홍만용
홍만형
홍만희
홍태량
홍태육
홍태임
홍만회
이름
한글정명공주
한자貞明公主
로마자 표기Jeongmyeong Gongju
일본어貞明公主

2. 생애

1603년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로 태어났다. 유일한 적녀였기에, 남동생 영창대군과 함께 몹시 사랑받았다.

그러나 영창대군의 탄생은 북인이 소북과 대북으로 나뉘어 왕위를 두고 대립하는 원인이 되었다. 1608년 아버지 선조가 사망하고, 영창대군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광해군이 즉위했고, 소북파는 제거되었다. 정명공주는 어머니 인목왕후와 함께 경운궁에 유폐되었고, 동생 영창대군과도 헤어졌다. 1614년에는 영창대군이 강화도에서 살해당했다. 할아버지 김제남은 사약을 받았고, 어머니의 친족도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어머니는 대비 지위를 폐위당하고 서궁(西宮)으로 불렸다. 유폐 중에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서예에 힘썼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목왕후와 정명공주는 인조를 지지하는 서인에 의해 복권되었다. 당시 20세로 결혼 적령기를 넘긴 정명공주를 위해 혼인 절차가 진행되었고, 홍주원(1606년 ~ 1672년)과 혼인했다. 어머니 인목왕후의 요청으로 인조로부터 광대한 저택과 토지를 받았다. 남편 홍주원과의 사이에서 7남 1녀를 낳았다.

1672년 남편 홍주원이 사망하고, 1685년 정명공주는 83세로 사망했다. 조선에서 가장 장수한 공주로, 6명의 왕의 시대를 살았다.

2. 1. 유년기

1603년 6월 27일(음력 5월 19일) 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에서 선조의 열 번째 딸이자 유일한 적녀로 태어났다.[14] 당시 선조는 52세,[2] 인목왕후는 19세였다. 어린 정명공주는 선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는데, 선조는 52세의 나이에 본 늦둥이 딸을 무척 귀여워했다고 전해진다.[14] 그러나 1608년 3월 16일, 정명공주가 6세, 남동생 영창대군이 3세였을 때 선조는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어머니 인목왕후를 통해 정명공주는 먼 왕족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외할아버지 쪽으로는 정위공주의 7대손, 외할머니 쪽으로는 7대조가 임영대군이었다. 정위공주는 조선 문종, 조선 세조, 임영대군의 언니였다. 따라서 정명공주는 소헌왕후와 세종의 8대손이 된다.

정명공주는 아버지 쪽 할머니를 통해 훗날 인조와 인열왕후의 며느리가 될 민회빈 강씨의 고종사촌이었으며, 김안로의 고종사촌이기도 했다.

영창대군의 탄생은 왕위 계승에 대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북인은 소북파와 대북파로 나뉘어 대립했는데,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대북파는 이복 오빠 광해군을 지지했다. 1608년 선조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사망하자, 영창대군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고, 소북파는 제거되었다.

2. 2. 광해군 시대: 유폐

1603년 6월 27일(음력 5월 19일) 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정명공주는 선조의 유일한 적녀였다.[14] 선조는 52세에 얻은 늦둥이 딸을 매우 아꼈으나, 이복 오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불행이 시작되었다. 계축옥사로 외할아버지 김제남과 동생 영창대군이 역모죄로 처형되었고,[15] 어머니 인목왕후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었다.[15] 이때문에, 정명공주는 어머니와 함께 경운궁에 유폐되었고, 동생 영창대군과도 헤어졌다.

인목왕후는 폐서인이 되었으며, "공주의 늠료(廩料)와 혼인은 옹주의 예에 따른다"는 규정에 따라[16] 정명공주 또한 옹주로 강등될 위기에 처했다. 류간은 대비(인목왕후)를 후궁으로 대우한다면 공주도 옹주로 강등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이첨은 공주를 폐서인하되 늠료와 혼인만 옹주의 예에 따르도록 했다.[16]

1614년, 유폐된 강화도에서 동생인 영창대군이 9세의 나이로 독살되었다. 이는 광해군이 어린 영창대군을 왕위 계승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아들을 잃은 인목왕후는 딸마저 잃을까 두려워 광해군이 정명공주의 안부를 물으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17]

11세 때 천연두에 걸렸을 때는 치료할 수 없다는 미신 때문에 북인들이 일부러 자르지 않은 고기를 보내기도 했다.

어린 시절 글쓰기를 좋아했던 정명공주는 유폐 중에도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아버지 선조의 필체를 흉내 낸 편지를 썼는데, 이 글씨는 '''화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30~40세 무렵에는 서예와 한자 쓰기를 그만두었다.

2. 3. 인조반정 이후: 복권과 혼인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정명공주는 공주로 복권되고 어머니 인목왕후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정명공주는 21세로, 이미 혼기가 한참 지난 나이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서둘러 공주를 혼인시키기 위해 부마간택령을 내렸다.[17] 그러나 공주의 나이가 너무 많아 전국에서 단 아홉 명만이 부마단자를 내어 간택령에 응했다.[17] 결국 부마단자를 받는 기한을 늘리고 신랑감의 나이 제한을 약화한 끝에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을 부마로 간택했다.[18]

그 과정에서 인목왕후는 사위 홍주원에게 왕만이 탈 수 있는 어승마를 타고 궁에 들어오라고 하여 조정에 문제를 일으켰으나,[19] 인조는 반정의 명분 때문에 인목왕후를 벌하지 못했다.[20] 인조는 인경궁의 재목과 기와를 내어주어 정명공주의 살림집을 짓게 하고[21] 또 정철을 내어주는 등[22] 그녀를 후대하였다.

본래 《경국대전》에서는 공주의 집은 50간을 넘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었는데, 정명공주의 집은 200간에 이르렀고, 경상도에만 8,076결[23]에 이르는 넓은 땅을 하사받는 등 엄청난 호사를 누렸다.[20] 이때 정명공주에게 내려진 사유지가 바로 일제강점기까지 소작쟁의가 일어나는 악명높은 암태도다.

2. 4. 인목왕후 사후와 말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정명공주는 공주로 복권되고 어머니 인목왕후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정명공주는 21세로, 이미 혼기가 한참 지난 나이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공주를 서둘러 시집보내기 위해 부마간택령을 내렸다. 그러나 공주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전국에서 단 아홉 명만이 부마단자를 내어 간택령에 응했다.[17] 결국 부마단자를 받는 기한을 늘리고 신랑감의 나이 제한을 약화한 끝에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을 부마로 간택했다.[18] 그 과정에서 인목왕후는 사위 홍주원에게 왕만이 탈 수 있는 말인 어승마를 타고 궁에 들어오라고 하여 조정에 문제를 일으켰으나,[19] 인조는 반정의 명분 때문에 인목왕후를 벌하지 못했다.[20]

인조는 인경궁의 재목과 기와를 내어주어 정명공주의 살림집을 짓게 하고[21] 또 정철을 내어주는 등[22] 그녀를 후대하였다. 본래 《경국대전》에서는 공주의 집은 50간을 넘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었는데 정명공주의 집은 200간에 이르렀고, 경상도에만 8,076결[23]에 이르는 넓은 땅을 하사받는 등 엄청난 호사를 누렸다.[20] 이때 정명공주에게 내려진 사유지가 바로 일제시대까지 소작쟁의가 일어나는 악명높은 암태도다.

정명공주는 선조와 인목왕후를 닮아 선이 굵고 힘이 넘치는 한석봉체를 잘 썼는데 조선 후기의 서예가 남구만은 자신의 저서에서 정명공주의 글씨를 칭찬하기도 했다.[24][25] 인목왕후 또한 한석봉체를 잘 써 생전의 선조를 기쁘게 했는데,[24] 정명공주도 서궁에 유폐되어 있을 당시 아버지 선조를 닮은 글씨를 쓰며 어머니를 위로하였으나 30대와 40대 때에는 붓글씨를 끊었고, 한문도 쓰지 않았다.[26] 인조의 의심을 살 것이 두려워 바느질과 가사에만 전념하며 의도적으로 정치를 외면하였다.[26]

인목왕후 사후 궁중에서 발견된 무도한 백서(帛書)로 인해 인조와 효종의 의심을 산 적도 있으나, 인조반정의 공신인 장유, 최명길 등의 구명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인조와 효종이 죽고 나자 현종, 숙종 2대 동안 정명공주는 종친의 어른으로서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26]

남편 홍주원과의 사이에 7남 1녀를 두었으며 1685년 9월 8일(음력 8월 10일) 8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 공주 가운데 가장 장수한 기록이었다.[26] 죽은 뒤 홍주원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숙종 때 이조 참판을 지낸 홍석보는 그녀의 증손자이며, 수찬 이인검은 외증손이다. 혜경궁 홍씨로 잘 알려져 있는 헌경왕후 홍씨는 그녀의 6대손이다.

3. 가족 관계

구 분내용
아버지선조 (1552년 11월 26일 ~ 1608년 3월 16일)
어머니인목왕후 (1584년 9월 15일 ~ 1632년 8월 16일)
형제
남편홍주원 (1606년 ~ 1672년 11월 3일)
자녀



정명공주는 소헌왕후세종의 8대손이다.[1]

4. 정명공주가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08-07
[2] 서적 조선 공주의 사생활 2011
[3] 서적 조선공주실록 역사의 아침 2009
[4]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08-07
[5] 문서 인조실록 1623-09-26
[6]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08-07
[7] 문서 인조실록 1623-12-07
[8] 문서 인조실록 1624-06-06
[9]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08-07
[10] 문서 인조실록 1625-02-12
[11]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08-07
[12]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08-07
[13]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08-07
[14] 서적 조선 공주의 사생활 북성재 2011
[15] 문서 본래 이름은 경운궁으로 현재의 덕수궁
[16] 문서 광해군일기 1618-01-30
[17] 서적 조선공주실록 역사의 아침 2009
[18] 문서 인조실록 1623-09-26
[19] 문서 인조실록 1623-12-07
[20] 서적
[21] 문서 인조실록 1624-06-06
[22] 문서 인조실록 1625-02-12
[23] 문서 환산하면 5,000만평
[24] 서적
[25] 서적 약천집
[26] 서적
[27] 문서 선원록
[28] 웹사이트 국역 국조인물고 - 홍영 https://terms.naver.[...]
[29] 문서 홍봉한·홍인한·홍상한의 조부
[30] 문서 인현왕후의 고모
[31] 문서 홍창한의 조부
[32] 웹사이트 한국고전종합DB - 《승정원일기》 http://db.itkc.or.kr[...] 1726-01-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