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석 (15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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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경석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인조, 효종 시기에 걸쳐 활동했다. 충청도 제천 출신으로 김상헌, 이경직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26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여 우부승지가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대사헌과 부제학을 겸임하며 남한산성에 들어갔고, 예문관 제학으로서 삼전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이후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송시열과의 갈등으로 인해 말년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에 있으며, 1985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경석은 충청도 제천 출신으로, 형 이경직과 김상헌에게서 배웠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관직에 진출하여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갔다. 1637년 삼전도비의 비문을 썼으며, 이 일로 훗날 송시열에게 비판받았다.
이경석은 사후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송시열은 이경석을 '향원(鄕原)'[9]에 비유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10] '향원'은 '악덕 지방 유지'와 비슷한 뜻이다.[1] 송시열은 이경석이 굴욕적인 내용의 비문을 짓는 시늉만 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1]
2. 생애
1638년 예문관·홍문관 대제학, 1639년 이조 판서를 역임했다. 1641년 소현세자의 스승으로 청나라 심양에 갔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1645년 우의정에 올랐고, 1649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1650년 효종의 북벌 계획이 청나라에 알려지자, 자청하여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되기도 했다.[4]
1653년 영중추부사로 임명되었으며, 1664년에 은퇴하여 기로소에 들어갔다. 1668년 궤장을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백헌집 (白軒集)》이 있으며, 사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초기 생애
충청도 제천 출신으로, 호조판서와 도승지를 지낸 형 석문(石門) 이경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에 청음 김상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3년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1617년 증광별시에 급제하였지만 인목대비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당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예문관 검열, 봉교로 승진하였다. 1626년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고, 바로 중직대부로 승진하여 이조좌랑을 거쳐 동년 중시문과에 갑과로 합격,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우부승지가 되었다.
1628년 9월 17일 소무원종공신 1등(昭武元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632년 가선대부에 임명되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산림의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만나 나이를 떠나 고담준론을 펼쳤다. 인조 반정 이후 공신들이 자신들이 임금을 세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며 특권과 전횡을 부리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김집, 송시열,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인조에게 알려 산림 학자들을 적극 천거하여 등용하게 했다. 같은 서인 당원이었기에 공신들은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송시열, 송준길 등은 반정 공신들의 전횡과 인조의 뜻에 영합하려는 일(정원군의 원종 추숭론 등)에 적극 반대하고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복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반정공신들의 반격과 반발에 대비해 산림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견해주었다.
2. 2. 관직 생활과 정치 활동
1613년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1617년 증광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인목대비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당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예문관 검열, 봉교로 승진하였다. 1626년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고, 바로 중직대부로 이조좌랑에 승진했다. 같은 해 중시문과에 갑과로 합격하여 당상관으로 승진, 우부승지가 되었다.
1628년 9월 17일 소무원종공신 1등(昭武元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632년 가선대부에 임명되었다.
오래전부터 산림의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만나 나이를 떠나 고담준론을 펼쳤다. 인조 반정 이후 공신들의 특권과 전횡을 보고 분개하여, 김집, 송시열,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인조에게 알려 산림 학자들을 적극 천거하여 등용하게 했다. 같은 서인 당원이었기에 공신들은 별로 개념하지 않았으나 송시열, 송준길 등은 반정 공신들의 전횡과, 인조의 뜻에 영합하려는 일(정원군의 원종 추숭론 등)에 적극 반대하고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복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반정공신들의 반격과 반발에 대비해 그는 산림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견해주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대사헌과 부제학을 겸임하면서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며, 1637년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면서 삼전도비의 비문을 썼다.
1638년 예문관·홍문관 대제학에 올랐으며, 1639년 이조 판서에 올랐다.
1641년 소현세자의 이사(貳師)로 청나라 심양에 갔으며, 1642년 청나라 황제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잠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645년 이조 판서가 되었고, 같은 해 4월 이조판서 직에 있었고 9월에 우의정에 올랐다. 신도비명에는 이때 그가 이조판서 자격으로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 탄옹 권시를 등용했다고 쓰여 있다.[3]
1645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48년(효종 9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때 예송 문제다 발생하자 그는 이조판서 송시열의 예론(禮論)을 지지한다.[1] 송준길과 송시열은 재야 시절에 서울에 오면 백헌의 집을 찾아 서로 즐겁게 만났던 관계였고, 이는 천거를 받아 조정에 나갔을 때도 지속되었다.[1]
1649년 영의정이 되었고, 1650년 효종의 북벌 계획이 청나라에 알려지자 청나라 첩자의 밀고로 왕을 체포하려 하자, 자신이 자청하여 벌을 받겠다 하여 백마산성으로 위리안치되기도 했다.[4]
그러나 현종 2년(1661) 67세의 백헌은 고산 윤선도 해배건으로 인해 서로 틈이 생기게 되었고, 마침내 현종 10년(1669) 우암 송시열이 삼전도비 비문을 지은 백헌을 풍자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송시열은 고전의 수이강 부분[5]을 언급하며 그를 조롱하였고,[6][7] 그의 문하생들이 송시열의 비아냥에 분노하여 논쟁이 벌어졌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발탁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송시열과 원수가 된다.
1653년 영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
2. 3. 송시열과의 갈등
그는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과 나이를 떠나 교류하였다. 인조 반정 이후 공신들의 특권과 전횡을 비판하며, 김집, 송시열,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인조에게 알려 산림학자들을 적극 등용하게 했다. 같은 서인이었으나 송시열, 송준길 등은 반정 공신들의 전횡과 인조의 뜻에 영합하는 일(정원군의 원종 추숭론 등)에 반대하고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복권을 주장했다. 그는 반정공신들의 반발에 대비해 산림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견하였다.
1645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48년(효종 9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때 예송 문제가 발생하자 그는 이조판서 송시열의 예론(禮論)을 지지했다.[1] 송준길과 송시열은 재야 시절 서울에 오면 백헌의 집을 찾아 교류하였고, 이는 조정에 나간 후에도 지속되었다.[1]
1661년 윤선도 해배 문제로 송시열과 틈이 생겼고, 1669년 송시열이 삼전도비문을 지은 그를 풍자하며 비판했다. 송시열은 고전의 수이강 부분을 언급하며 그를 조롱하였고,[5][6][7] 그의 문하생들이 송시열의 비아냥에 분노하여 논쟁이 벌어졌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발탁한 송시열과 원수가 되었다.
송시열은 그를 ‘향원(鄕原)’[9]에 비유했다.[10] ‘향원’은 ‘악덕 지방 유지’ 정도에 해당된다.[1] 송시열의 명분론에 의하면, 그가 굴욕적인 비문을 짓지 않고 짓는 시늉만 했으면 되었는데 자존심을 무너뜨린 상태로 지었다는 것이다.[1]
그러나 그의 손자 이하성(李夏成)은 “우리 임금이 몸을 굽히고 욕을 참으신 것은 종묘사직과 만백성을 위한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인조께서는 장유(張維), 조희일(趙希逸) 및 조부에게 함께 의논해 하룻밤 사이에 지어오라고 명하였는데, 소를 올려 끝까지 사양하였지만 사세가 급박하여 할 수 없이 지었습니다.[11][1]”라며 비문이 왕의 강압에 따른 것이었음을 호소했다.
3. 사상과 평가
3. 1. 부정적 평가
우암 송시열은 백헌 이경석을 '향원(鄕原)'[9]에 비유했다.[10] '향원'은 현대어로 '악덕 지방 유지' 정도에 해당한다.[1] 송시열의 명분론에 따르면, 이경석이 굴욕적인 문자를 동원해 비문을 짓지 않고 짓는 시늉만 했어야 했는데, 자존심을 모두 무너뜨린 채 비문을 지었다는 것이다.[1]
그러나 이경석의 손자 이하성(李夏成)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우리 임금이 몸을 굽히고 욕을 참으신 것은 종묘사직과 만백성을 위해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인조께서는 처음에 신풍부원군 장유, 전부사(前府使) 조희일 및 제 조부에게 함께 의논해 하룻밤 사이에 지어오라고 명하셨는데, 소를 올려 끝까지 사양하였지만 사세가 급박하여 할 수 없이 지어 바쳤던 것입니다."[11][1] 즉, 비문은 이경석의 의지가 아니라 왕의 강압에 따라 지어졌다는 것이다.
4. 저서 및 작품
- 백헌집
5. 가계
이경석은 조선 제2대 임금인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의 6대손이다. 아버지는 이유간이고, 어머니는 개성 고씨 고한량의 딸이다.[12][13][14][15][16]
관계 | 이름 | 비고 |
---|---|---|
7대조 | 정종 이경 | 조선 2대 국왕 |
6대조 | 덕천군 이후생 | |
현조 | 신종군 이효백 | |
고조 | 완성군 이귀정 | |
증조 | 함풍군 이계수 | |
할아버지 | 이수광 | |
아버지 | 이유간 | |
어머니 | 개성 고씨 | 고한량의 딸 |
부인 | 전주 류씨 | 류색의 딸 |
장남 | 이철영 | |
며느리 | 보성 오씨 | 오행민의 딸 |
손녀 | 전주 이씨 | 여산 송씨 송섬에게 출가 |
손자 | 이우성 | |
손녀 | 전주 이씨 | 창원 황씨 황일에게 출가 |
손자 | 이하성 | |
손녀 | 전주 이씨 | 임천 조씨 조홍기에게 출가 |
며느리 | 기계 유씨 | 유반의 딸 |
손녀 | 전주 이씨 | 문화 류씨 류봉정에게 출가 |
장녀 | - | 임천 조씨 조원기의 처 |
형 | 이경직 | 호는 석문 |
조카 | 이장영 | |
조카 | 이후영(이기영) | |
조카 | 이정영 | 호는 서곡 |
형 | 이경설 | 금구현령 역임 |
6. 묘소
이경석의 묘소는 부인과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우측에는 묘비가 봉분쪽을 향하고 있다. 봉분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각 1쌍씩 서있다.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는 신·구비 2기가 묘역입구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박세당이 글을 짓고 이광사가 글을 써서 영조 30년(1754년)에 세운 것과 "징으로 쫘내" 마모가 심해 후손들이 1975년에 1기를 새로 세운 것이다. 1985년 9월 20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weekly.hankoo[...]
[2]
문헌
인조실록
1638-02-08
[3]
서적
서계집
[4]
서적
서계집
[5]
서적
주자대전
[6]
서적
송자대전
[7]
문헌
현종실록
1668-11-27
[8]
문헌
백헌집
[9]
인용
논어
[10]
서적
송자대전
1669-05
[11]
문헌
연려실기술
[12]
위치
후릉 (조선)
[13]
위치
덕천군 묘역
http://www.cha.go.kr[...]
[14]
위치
신종군 묘역
http://www.seongnam.[...]
[15]
위치
완성군 묘역
http://www.cha.go.kr[...]
[16]
위치
함풍군 묘역
[17]
위치
효민공 석문 이경직 묘역
http://www.cha.go.kr[...]
[18]
위치
문충공 백헌 이경석 묘역
http://www.cha.go.kr[...]
[19]
위치
효간공 서곡 이정영 묘역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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