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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19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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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용은 일제강점기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으며, 광복 후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6.25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보병학교 교장, 제6, 12사단장을 역임했으며, 5.16 군사 정변 이후 강원도지사를 지냈다. 이후 교통부 차관, 철도청 청장을 거쳐 기업인으로 활동하다 200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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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192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명이룡
다른 이름이집룡
출생일1923년 8월 4일
사망일2009년 9월 10일
출생지함경북도 경성군
사망지강원도 정선군
묘소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 61호
군 경력
소속 조직만주국군
대한민국 육군
군 복무대한민국 육군
최종 계급소위(만주국군)
소장(한국 육군)
참전한국 전쟁
정치 경력
정당무소속
강원도지사군정관선기 제13대 강원도 도지사
임기1961년 8월 25일 ~ 1963년 12월 16일
대통령윤보선 대한민국 대통령
송요찬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백낙준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김현철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송요찬 대한민국 내각수반
백낙준 대한민국 내각수반 권한대행 서리
박정희 대한민국 내각수반
김현철 대한민국 내각수반
교통부 차관제16대 교통부 차관
임기1966년 9월 28일 ~ 1970년 10월 21일
대통령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국무총리정일권 대한민국 국무총리
백두진 대한민국 국무총리
철도청장제6대 철도청 청장
임기1970년 10월 22일 ~ 1971년 6월 12일
대통령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국무총리백두진 대한민국 국무총리
학력
학력대한민국 국방대학원 행정학 석사
기타 경력
경력동국대 행정학과 초빙교수
신민주공화당 최고위원 겸 당무위원
자유민주연합 당무위원 겸 고문

2. 일제강점기 활동

1923년 8월 4일[3] 국경 지대인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제강점기 간도특설대에 복무하며 항일 무장 세력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가 만주에서 “조선인 항일세력은 조선인의 손으로 잡는다”는 목표 아래 친일파를 앞세워 만든 조선인 부대로, 팔로군,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대와 만주 북서부에 잔존해 있던 대한독립군단을 토벌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 부대 1기생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했다. 그는 “군인이 되고 싶었는데, 조선인 부대라고 하기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 시절의 기억을 숨기지 않고, 간도특설대가 백두산 밑 안투현에서 김일성 부대를 토벌 대상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다만 재중 동포(조선족) 사회에서 간도특설대의 만행으로 전해지는 부녀자 성폭행,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부인했다.[6]

2. 1. 간도특설대 복무

그는 간도특설대 1기생으로 1938년부터 일제가 패망하던 1945년까지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하였다.[4]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북부에 있던 사회주의 계열 민족 해방세력인 팔로군,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대와 만주 북서부에 잔존해 있던 대한독립군단을 토벌하기 위한 특수 목적을 띈 독립군 토벌 부대였다. 간도특설대가 살해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하며, 강간·약탈·고문을 당한 이들도 적잖다.[5]

그는 간도특설대 출신으로서 간도특설대에 대해 제대로 증언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1938년 지원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로, “군인이 되고 싶었는데, 조선인 부대라고 하기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대 근무설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분은 만주 보병 8퇀(團)”이라고 했다. 박정희·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년 7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라고 증언했다.[6]

2. 2. 박정희 관련 증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대 근무설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분은 만주 보병 8단(團)"이라고 했다.[6] 박정희·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년 7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라고 증언했다.[6]

3. 해방 이후 군 경력

이용은 광복 후 미군정 지역으로 내려와 1947년 육군사관학교에 제7기로 입학하여 이듬해인 1948년 소위로 임관했다. 육군보병학교(1949), 미국 육군보병학교(1954), 육군대학(1957), 국방대학원(1961)에서 수학하였다.

6.25 전쟁 이전 육군보병학교 교수부 술과(術科, 현재 전술학과)에서 공격 교관은 이용 소령, 방어 교관은 박경원 소령이었다. 이용은 국군의 전술 수준이 맹아(萌芽) 단계일 때 육군보병학교에서 국군의 공격·방어 전술을 개발, 정착시킨 인물로, 전쟁 이후 작전·교육 관련 직책을 주로 맡았다.

송요찬은 그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가는 곳마다 그를 불러 중용했다. 동기생 중 선두로 장성으로 진급한 이용은 5·16 당시 강원도지사로 나갔다가 복귀 후 소장으로 예편했다. 동기생들은 그의 강직한 성품을 두고 전형적인 군인이라 평했다.[3]

6.25 전쟁 이후 이용의 주요 이력은 다음과 같다.

날짜내용
1954년 7월미국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졸업.
1954년 8월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기획과장.
1954년 9월제3군단(군단장: 강문봉 소장) 참모장.
1955년 6월 1일준장 진급. 같은 해 10월,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
1957년 3월육군대학 졸업.
1957년 4월육군 교육총본부 관리참모부장.
1957년 6월제1군 작전참모.
1958년 3월제12사단장.
1959년 7월제6사단장.
1960년 4월육군보병학교 교장.
1961년 6월국방대학원 졸업.
1961년 7월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차장.
1961년 8월강원도지사.
1964년 1월육군본부 기획통제실장.
1965년 7월예비역 편입.


3. 1. 대한민국 국군 장교 임관

1948년 4월, 경비사관학교 제5기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여 제6연대 제11중대장 겸 육사 제7기 사관후보생 연대 교육대장을 맡았다.[1] 1948년 7월에는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1]

1949년 6월, 강영훈 대령이 연대장으로 있던 제12연대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부임하여 옹진반도에서 발생한 국경 분쟁에 참여하였다.[1] 같은 해 7월에는 육군 보병학교 전술학 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1]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유해준 중령이 이끄는 혼성연대 작전 주임 장교로서 임진강 전투에 참가하였다.[1] 6월 29일부터는 김홍일 소장의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보좌관으로서 한강 방어선 전투에 참여하였다.[1]

1950년 7월부터 민기식 부대 작전 참모로서 호남 방면 지연전에 참가하였고,[1] 8월에는 백인엽 대령이 사단장으로 있던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사단) 작전 참모(중령)로서 기계·안강 전투에 참여하였다.[1]

1951년 3월, 대령으로 진급하여 수도사단 제1기갑연대장을 맡아 동부 고지 쟁탈전을 지휘하였다.[1] 같은 해 11월부터는 백선엽 소장의 백야전 전투사령부에 합류하여 남부군 토벌 작전에 참가하였고, 1952년 7월에는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에 참여하였다.[1]

1952년 9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작전과장이 되었고,[1] 1953년 6월에는 제8사단 부사단장으로 금성 전투에 참여하였다.[1]

1954년 7월, 미국 육군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졸업하고,[1] 같은 해 8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기획과장, 9월에는 강문봉 소장이 군단장으로 있던 제3군단 참모장을 역임하였다.[1]

1955년 6월 1일, 준장으로 진급하였고,[1] 같은 해 10월에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이 되었다.[1] 1957년 3월, 육군대학을 졸업하고,[1] 4월에는 육군 교육총본부 관리참모부장, 6월에는 제1군 작전참모를 역임하였다.[1]

1958년 3월, 제12사단장이 되었고,[1] 1959년 7월에는 제6사단장을 맡았다.[1] 1960년 4월에는 육군 보병학교 교장이 되었고,[1] 1961년 6월 육군대학원을 졸업한 후, 7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차장을 역임하였다.[1]

1964년 1월, 육군본부 기획통제실장을 맡았으며,[1] 1965년 7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1]

3. 2. 6.25 전쟁 참전

6.25 전쟁 이전 육군보병학교 교수부의 술과(術科·현재 전술학과)에는 공격 교관 이용 소령과 방어교관 박경원 소령, 두 명의 이름난 장교가 있었다.

이용은 전쟁 이전 국군의 전술 수준이 맹아(萌芽) 단계에 있을 때 육군보병학교에서 국군의 공격·방어전술을 개발, 정착시킨 주인공이다. 그는 전쟁 이후 작전·교육 관련 직책을 주로 맡았다. 전쟁 초기 육사·보병학교 교도대대를 통합한 혼성연대의 작전주임으로 보직돼 서부전선의 문산 축선을 방어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의 증원부대로 투입된 후, 민기식 부대 작전참모를 거쳐 송요찬 장군이 지휘하는 수도사단 작전참모로 근무했다.[3]

그는 송요찬 휘하에서 낙동강 방어 시 사단 작전참모로 경주 북방 전투를 치렀고,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진 시에는 양구·신고산 전투, 안변·영흥·함흥·길주·청진·부령 진격 작전, 흥남 철수 작전을 수행하며 수도사단이 '상승(常勝)의 타이거(맹호)부대'라는 별명을 얻게 하는 데 기여한 뛰어난 참모였다.[3]

이후 동기생 가운데 가장 먼저 연대장으로 승진한 그는 수도사단 기갑연대장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그는 동해안에서 금강산 턱밑의 전략거점인 월비산을 점령해 동해안의 전선을 북쪽으로 밀어올리는 데 크게 공헌했고, 이후에는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돼 혁혁한 전과를 올려 송요찬 장군의 큰 신임을 받았다.[3]

특히 1951년 6월 향로봉을 위협하는 향로봉 북쪽의 산두곡산 공격 시 당시 사단장이었던 송요찬이 이용에게 “이번 공격은 작전의 명참모였던 이용 대령에게 맡기기로 결심했으니까 이번 작전을 통해 명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얻도록 하라”라고 격려할 정도로 높은 신임을 받았으며, 이용은 목표를 조기에 탈취해 내는 데 성공하여 송요찬 사단장의 기대에 부응하는 한편 공격교관으로서의 위신도 세울 수 있었다.[3]

이후 송요찬은 그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이 가는 곳마다 그를 불러 중용했다. 동기생 중 선두로 장성으로 진급한 이용은 5·16 당시 강원도지사로 나갔다가 복귀 후 소장으로 예편했다. 그의 강직한 성품을 두고 동기생들은 그를 전형적인 군인이라 평했다.[3]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혼성연대(연대장: 유해준 중령) 작전 주임 장교로서 임진강 전투에 참가했다. 1950년 6월 29일부터 시흥지구 전투사령관(김홍일 소장) 보좌관으로서 한강 방어선 전투에 참가했다.

1950년 7월부터 민기식 부대 작전 참모로서 호남 방면 지연전에 참가했다.

1950년 8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사단, 사단장: 백인엽 대령) 작전 참모(중령)로서 기계·안강 전투에 참여했다.

1951년 3월, 수도사단 제1기갑연대장(대령). 동부 고지 쟁탈전을 지도했다. 같은 해 11월부터 백야전 전투사령부(사령관: 백선엽 소장)에 의한 남부군 토벌 작전에 참가했다. 1952년 7월의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에 참가했다.

1952년 9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작전과장.

1953년 6월, 제8사단 부사단장. 같은 해 7월에 발발한 금성 전투에 참가했다.

3. 3. 6.25 전쟁 이후

6.25 전쟁 이전 육군보병학교 교수부의 술과(術科, 현재 전술학과)에는 공격과 방어 교관으로 이름난 두 장교가 있었는데, 공격 교관은 이용 소령, 방어 교관은 육사 6기인 박경원 소령이었다.

이용은 전쟁 이전 국군의 전술 수준이 맹아(萌芽) 단계에 있을 때 육군보병학교에서 국군의 공격·방어 전술을 개발, 정착시킨 주인공이다. 그는 전쟁 이후 작전·교육 관련 직책을 주로 맡았다. 전쟁 초기 육사·보병학교 교도대대를 통합한 혼성연대의 작전주임으로 보직돼 서부전선의 문산 축선을 방어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의 증원부대로 투입된 후, 민기식 부대 작전참모를 거쳐 송요찬 장군이 지휘하는 수도사단 작전참모로 근무했다.

송요찬 휘하에서 낙동강 방어 시 사단 작전참모로 경주 북방 전투를 치렀고,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진 시에는 양구·신고산 전투, 안변·영흥·함흥·길주·청진·부령 진격 작전, 흥남 철수 작전을 수행하며 수도사단이 '상승(常勝)의 타이거(맹호)부대'라는 별명을 얻게 하는 데 기여한 뛰어난 참모였다.

이후 동기생 가운데 가장 먼저 연대장으로 승진한 그는 수도사단 기갑연대장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동해안에서 금강산 턱밑의 전략 거점인 월비산을 점령해 동해안의 전선을 북쪽으로 밀어올리는 데 크게 공헌했고, 이후에는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돼 혁혁한 전과를 올려 송요찬 장군의 큰 신임을 받았다.

특히 1951년 6월 향로봉을 위협하는 향로봉 북쪽의 산두곡산 공격 시 당시 사단장이었던 송요찬이 이용에게 “이번 공격은 작전의 명참모였던 이용 대령에게 맡기기로 결심했으니까 이번 작전을 통해 명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얻도록 하라”라고 격려할 정도로 높은 신임을 받았으며, 이용은 목표를 조기에 탈취해 내는 데 성공하여 송요찬 사단장의 기대에 부응하는 한편 공격 교관으로서의 위신도 세울 수 있었다.

이후 송요찬은 그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이 가는 곳마다 그를 불러 중용했다. 동기생 중 선두로 장성으로 진급한 이용은 5·16 당시 강원도지사로 나갔다가 복귀 후 소장으로 예편했다. 그의 강직한 성품을 두고 동기생들은 그를 전형적인 군인이라 평했다.

다음은 6.25 전쟁 이후 이용의 주요 이력이다.

날짜내용
1950년 6월 25일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혼성연대(연대장: 유해준 중령) 작전 주임 장교로서 임진강 전투에 참가. 6월 29일부터 시흥지구 전투사령관(김홍일 소장) 보좌관으로서 한강 방어선 전투에 참가.
1950년 7월민기식 부대 작전 참모로서 호남 방면 지연전에 참가.
1950년 8월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사단, 사단장: 백인엽 대령) 작전 참모(중령)로서 기계·안강 전투에 참여.
1951년 3월수도사단 제1기갑연대장(대령). 동부 고지 쟁탈전을 지도. 같은 해 11월부터 백야전 전투사령부(사령관: 백선엽 소장)에 의한 남부군 토벌 작전에 참가. 1952년 7월의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에 참가.
1952년 9월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작전과장.
1953년 6월제8사단 부사단장. 같은 해 7월에 발발한 금성 전투에 참가.
1954년 7월미국 육군 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졸업.
1954년 8월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기획과장.
1954년 9월제3군단(군단장: 강문봉 소장) 참모장.
1955년 6월 1일준장 진급. 같은 해 10월,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
1957년 3월육군대학 졸업.
1957년 4월육군 교육총본부 관리참모부장.
1957년 6월제1군 작전참모.
1958년 3월제12사단장.
1959년 7월제6사단장.
1960년 4월육군 보병학교 교장.
1961년 6월육군대학원 졸업.
1961년 7월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차장.
1961년 8월강원도지사.
1964년 1월육군본부 기획통제실장.
1965년 7월예비역 편입.


4. 정계, 관계 및 경제계 활동

5·16 군사 정변 이후 강원도 도지사를 맡아 정치에 참여했으며, 예편 후 무임소장관 특별보좌관(차관급), 교통부 차관, 철도청 청장을 역임했다. 1973년부터 3년간 인천합금철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고, 1976년부터 1978년까지 2년간 인천제철 사장을 역임했다. 2005년에는 자랑스런 육사인상을 수상하였다.

4. 1. 정치 및 행정 경력

1947년 육군사관학교에 7기로 입학하여 이듬해인 1948년 소위로 임관했다.[3] 육군보병학교(1949년), 미국 육군보병학교(1954년), 육군대학(1957년), 국방대학원(1961년)에서 수학하였다.

6.25 전쟁 이전 육군보병학교 교수부 술과(術科, 현재의 전술학과)에는 공격 교관 이용 소령과 방어 교관 박경원 소령이 있었다. 이용은 전쟁 이전 국군의 전술 수준이 맹아(萌芽) 단계에 있을 때 육군보병학교에서 국군의 공격·방어 전술을 개발, 정착시킨 인물이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육사·보병학교 교도대대를 통합한 혼성연대의 작전주임으로 보직되어 서부전선 문산 축선을 방어하는 국군 제1사단 증원부대로 투입되었다. 이후 민기식 부대 작전참모를 거쳐 송요찬 장군이 지휘하는 수도사단 작전참모로 근무했다.

송요찬 휘하에서 낙동강 방어 시 사단 작전참모로 경주 북방 전투를 치렀고,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진 시에는 양구·신고산 전투, 안변·영흥·함흥·길주·청진·부령 진격 작전, 흥남 철수 작전을 수행하며 수도사단이 '상승(常勝)의 타이거(맹호)부대'라는 별명을 얻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동기생 중 가장 먼저 연대장으로 승진하여 수도사단 기갑연대장으로 맹활약했다. 동해안에서 금강산 인근 월비산을 점령해 동해안 전선을 북쪽으로 확장했고,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되어 전과를 올렸다.

1951년 6월, 향로봉 북쪽 산두곡산 공격 시 사단장 송요찬은 "작전의 명참모였던 이용 대령에게 맡기기로 결심했으니 명지휘관으로서 명성을 얻도록 하라"라고 격려했다. 이용은 목표를 조기에 탈취하여 송요찬의 기대에 부응하고 공격 교관으로서의 위신도 세웠다.

송요찬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가는 곳마다 중용했다. 동기생 중 가장 먼저 장성으로 진급한 이용은 5·16 당시 강원도지사를 지내다 복귀 후 소장으로 예편했다. 동기생들은 강직한 성품의 그를 전형적인 군인이라 평했다.

5·16 이후 강원도 도지사를 맡아 정치에 참여했으며, 예편 후 무임소장관 특별보좌관(차관급), 교통부 차관, 철도청 청장을 역임했다. 1973년부터 3년간 인천합금철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고, 1976년부터 1978년까지 2년간 인천제철 사장을 역임했다.

4. 2. 경제계 활동

利用중국어은 5·16 군사 정변 이후 강원도 도지사를 역임하고, 예편 후 무임소장관 특별보좌관(차관급), 교통부 차관, 철도청 청장을 역임했다.[3] 1973년부터 3년간 인천합금철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고, 1976년부터 1978년까지 2년간 인천제철 사장을 역임했다.[3]

연도직책
1966년 4월무임소장관 특별보좌관
1966년 9월교통부 차관
1970년 10월철도청 청장
1973년 6월인천합금철 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1976년 2월인천제철 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1992년 12월성우회 사무총장


5. 사망

이용은 2008년 9월 10일경부터 노환으로 와병하던 중 5개월이 지난 2009년 2월 10일 사망하였다.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3]

6. 학력

연도학력 및 수료
1948년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7기
1949년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1954년미국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
1957년대한민국 육군대학
1961년대한민국 국방대학원 행정학 석사
1966년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7. 수상

훈격훈장비고
을지을지무공훈장
충무충무무공훈장
화랑화랑무공훈장
황조황조근정훈장
3등근무공로훈장
새마을훈장
미국 동성훈장
월남훈장



그 외 내각수반 표창 및 각 지구 전공 표창 등 기타 기장, 휘장 등을 다수 포상받았다.

참조

[1] 뉴스 조선인부대 말만 믿고 입대…민간인 학살說은 사실무근 http://www.segye.com[...] 2008-01-18
[2] 서적 간도특설대 : 1930년대 만주, 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토벌부대' 서해문집
[3] 문서 1922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다. 육군사관학교동창회, 위의 글
[4] 웹사이트 이용의 진술조서 http://blog.daum.net[...]
[5] 간행물 일본군 장교 되어 독립군 토벌했는데, 독립유공자 묘역 옆에 잠들다니…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19-07-30
[6] 간행물 "조선인부대 말만 믿고 입대…민간인 학살說은 사실무근" https://news.naver.c[...] 세계일보 200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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