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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 (6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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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은지는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 당나라에서 중역으로 활동하며 천주사마 칭호를 얻은 인물이다. 그의 조상은 요동에서 거주하다가 고구려에 복속되었고,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로 이주했다. 이은지는 낙양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묘지명과 아들 이회의 묘지를 통해 가계와 생애가 밝혀졌다. 그의 아들들은 당나라 무관으로 활동했으며, 이은지는 한족 여성과 결혼했다. 러우정하오는 묘지 사료와 역사서를 바탕으로 이은지의 선조에 대한 계보를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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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 (655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씨명이은지
본명이은지
한자 표기李隠之
출생655년
사망705년
국적고구려당나라
직업관료, 통역관
가계
배우자유씨 (하간현군)
자녀이회 외 2명
아버지이직
기타 정보
출생지고구려 요동
사망지당나라 낙양
묘지망산
본관요동

2. 생애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그의 생애는 발견된 묘지명을 통해 알려졌다. 장안 또는 낙양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당나라에서 중역(통역관)으로 활동하며 천주사마(泉州主島)라는 칭호를 얻었으나, 관직이 높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낙양에서 지내다가 망산(邙山)에 묻혔다.

2. 1. 가족 관계

묘지명에 따르면, 이은지의 조상은 3세기 말부터 요동에서 살았으며, 5세기에 요동이 고구려에 복속되면서 고구려인이 되었다. 이후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이다.

관계이름설명
할아버지이경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 이후 장안으로 이주했으나 곧 사망했다.
아버지이직아버지 이경이 일찍 사망하여 별다른 영예를 얻지 못했다.
부인하간현군 유씨(河間縣君 劉氏)한족이다.
장남이회(李懷)당나라의 무관. 당 현종 시기 위씨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웠다.
아들-두 명의 아들이 더 있었으며, 모두 당나라의 무관으로 활동했다.



이은지는 장안 또는 낙양에서 태어났으며, 당나라에서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천주사마(泉州主島)라는 칭호를 얻었다. 낙양에서 지내다 망산(邙山)에 묻혔다. 아버지 이직처럼 이은지 또한 관직이 높지 않았지만, 아들 이회가 공을 세워 가문의 명예를 높였다.

3. 출신 및 가계

이은지는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조상은 3세기 말부터 요동 지역에 거주했으며, 5세기 고구려가 요동을 복속시키면서 자연스럽게 고구려인이 되었다. 이후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로 이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은지의 할아버지 이경은 645년 당 태종고구려 원정 이후 장안으로 이주했으나,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이 때문에 아버지 이직은 별다른 지위를 얻지 못했고, 이은지 또한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는 장안 또는 낙양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당나라에서 이은지는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천주사마(泉州主島)라는 칭호를 얻었고, 주로 낙양에서 생활하다가 망산에 묻혔다. 그는 한족인 하간현군 유씨와 결혼했으며, 장남 이회를 포함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세 아들 모두 당나라에서 무관으로 활동했다. 특히 아들 이회는 당 현종 시기 위씨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은지와 아들 이회의 묘지명이 뤄양 부근에서 발견되어 가계와 행적의 일부가 밝혀졌다.

3. 1. 가계 고증

이은지의 묘지명이 출토되어 뤄양 구차오 각석 문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석의 길이는 48.5cm, 너비는 53cm이며, 22행의 해서체로 쓰여 있다. 묘지 덮개는 전서체로 "대당고이부군묘지명(大唐故李府君墓誌銘)"이라 적혀 있고, 원앙문(鴛鴦紋)과 당초문(唐草紋)이 새겨져 있다. 또한, 이은지의 아들 이회(李懐)의 묘지는 1928년 뤄양 북쪽 16km 지점의 난천좡촌(南陳庄村)에서 출토되었으며, 첸탕즈차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은지의 묘지명에는 그의 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其先遼東人也,晋상서령 胤即其枝類。祖敬、父直,孝德感天,聲馳楽浪,或乃輸忠勤以済世,誉洽扶余。公厭海瀕之俗,慕洛汭之化,渉譯来朝,随牒受官,驍果出于天資,断割由乎学殖。|그 선조는 요동 사람이니, 진(晋)의 상서령 윤(胤)이 곧 그 지류이다. 조부 경(敬), 부친 직(直)은 효성과 덕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낙랑(楽浪)에 명성을 떨쳤고, 혹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게 세상을 구제하여 부여에 칭송을 받았다. 공은 해안가의 풍습을 싫어하고 낙수(洛汭)의 교화를 사모하여, 여러 번 역(譯)을 거쳐 조공을 바쳤고, 첩(牒)을 따라 관직을 받아, 용맹하고 굳세기는 천성에서 나왔고, 과단성은 학문을 통해 얻어졌다.zho

아들 이회의 묘지명에는 좀 더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昔晋氏馭乾,遼川塵起,天子親伐,実要□□。公之十二代祖敏為河内太守,預其選也。克滅之後,遂留鎮撫,風俗是依,因而為遼東人焉。至孫胤,挙孝廉,至河南尹,加特進,遷尚書令,為晋朝之推轂。曾祖敬,隋上谷郡従事。太宗東幸海関,訪晋尚書令李公之後,曰:有末孫孜。帝許其峻用,挈家以行,遂達長安,未貴而卒。痛哉!其子曰直,直生隠之,贈清源郡司馬,公即清源府君之長子。|옛날 진(晋)나라가 건(乾)을 타고, 요천(遼川)에 먼지가 일어났을 때, 황제가 친히 정벌하려 했고, 실로 □□를 요(要)했다. 공의 12대 조상인 민(敏)은 하내 태수를 지냈는데, 그 선발에 참여했다. 멸망시킨 후, 마침내 남아서 진압하였고, 풍속은 그 이로움을 의지하여, 마침내 요동 사람이 되었다. 손자인 윤(胤)에 이르러 효렴으로 추천되어 하남윤까지 이르렀으며, 특진이 더해져 상서령으로 옮겼으니, 진나라의 숭배를 받았다. 증조부 경(敬)은 수(隋)나라 상평군 종사였다. 태종(太宗)이 동쪽으로 해관(海關)에 행차하여, 진나라 상서령 이공(李公)의 후손을 찾으니, 왈: 말손 자(孜)가 있다고 했다. 황제가 크게 기용할 것을 허락하고, 집안을 다 데리고 행하니, 마침내 장안에 이르렀으나, 귀하게 되기 전에 죽었다. 슬프다! 그 아들을 직(直)이라 하니, 직(直)이 은지(隠之)를 낳았고, 청원군 사마(司馬)로 증직되었으니, 공은 곧 청원부군(清源府君)의 장자이다.zho

러우정하오는 이 묘지 사료들과 『삼국지』, 『진서』, 『북사』, 『신당서』 등을 토대로 이은지와 이회의 선조에 대한 고증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밝혀진 이씨 가문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이은지 가계 (러우정하오 연구 기반)
대수이름비고
12대조이민 (李敏)하내 태수, 진(晉)나라 때 요동 정벌 후 잔류 추정
11대조이신 (李信)
10대조이윤 (李胤)효렴 추천, 하남윤, 특진, 상서령 역임
......(중간 계보 생략)
증조부이경 (李敬)수(隋) 상평군 종사
조부이직 (李直)고구려에서 명성
이은지 (李隱之)본인, 에 귀화, 청원군 사마(司馬) 증직
이회 (李懷)
이지통 (李知通)



이은지는 "빈(殯)을 하남부 하남현 평락향의 언덕으로 옮겼"으며, 개원(開元) 27년(739년) 5월에 부인 유씨(劉氏)와 합장되었다. 새로 마련된 묘는 "공의 옛 묘의 서남쪽 1.5리"에 위치했다. 아들 이회는 천보(天寶) 4재(745년) 4월 22일에 부인 왕씨(王氏)와 "낙양현 평락향의 언덕, 주례에 따른다"는 원칙 하에 합장되었다. 이처럼 이은지와 이회 부자의 묘는 같은 구역 내에 위치하며, 이는 당나라 시기 가족 구성원이 공동묘지를 사용하는 관례를 따른 것이다. 이러한 점은 고구려에 동화된 한인(漢人) 후예였던 이들 부자가 순수한 고구려인과는 생활 규범에서 차이를 보였음을 시사한다.

3. 2. 묘지

발견된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그의 조상은 3세기 말부터 요동에서 살았으며, 5세기에 요동이 고구려에 복속되면서 고구려인이 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로 이주하였다.

이후 당나라에서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천주사마(泉州主島)라는 칭호를 얻었고, 낙양에서 지내다 망산에 묻혔다. 장남 이회(李懷)를 포함한 세 아들이 있었으며, 모두 당나라의 무관으로 활동했다.

이은지의 묘지(墓誌)가 출토되어 현재 뤄양 구차오 각석 문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석은 길이 48.5cm, 너비 53cm이며, 해서체로 22행이 새겨져 있다. 묘지 덮개에는 전서체로 "대당고이부군묘지명(大唐故李府君墓誌銘)"이라 쓰여 있고, 원앙문과 당초문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이은지의 아들 이회(李懷)의 묘지가 1928년 낙양 북쪽 16km 지점의 난천좡촌(南陳庄村)에서 출토되었으며, 첸탕즈차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은지 묘지명에는 그의 선조가 요동 사람이며, 진(晋)의 상서령 이윤(李胤)이 그 지류라고 언급되어 있다. 조부 이경(李敬)과 부친 이직(李直)은 낙랑부여 지역에서 명망이 높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은지 본인은 해안가 풍습을 떠나 낙양의 문화를 따랐으며, 여러 차례 조공 사절의 통역관 역할을 수행했고, 이를 통해 관직을 얻었다고 한다.

이회 묘지명에는 선조 이민(李敏)이 진(晋)의 하내 태수였으며, 이후 요동에 남아 정착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손자인 이윤(李胤)은 효렴으로 추천되어 하남윤과 상서령을 지냈다. 증조부 이경(李敬)은 수나라 상평군 종사였으며, 당 태종이 동쪽 정벌 시 이윤의 후손을 찾아 이경의 손자 이자(李孜)를 발탁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이자(孜)의 아들 이직(李直)이 이은지를 낳았으며, 이직은 청원군 사마(司馬)로 추증되었다.

러우정하오는 이 묘지명과 『삼국지』, 『진서』, 『북사』, 『신당서』 등의 사료를 토대로 이씨 가문의 계보를 "이민(李敏) - 이신(李歆) - 이윤(李胤) - □□ - □□ - □□ - □□ - □□ - □□ - 이경(李敬) - 이직(李直) - 이은지(李隱之) - 이회(李懷) - 이지통(李枝通)"으로 밝혔다.

이은지는 하남부 하남현 평락향의 언덕에 묻혔으며, 개원 27년(739년) 5월에 부인 유씨(劉氏)와 합장되었다. 새로운 묘는 원래 묘의 서남쪽 1.5리 지점에 마련되었다. 아들 이회는 천보 4재(745년) 4월 22일에 부인 왕씨(王氏)와 낙양현 평락향의 언덕에 주례에 따라 합장되었다. 이처럼 이은지와 이회 부자의 묘는 같은 구역에 위치하여 당나라 시기 가족 공동묘지의 관례를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구려화된 한인(漢人) 후예인 이들 부자가 순수한 고구려인과는 생활 규범에서 차이를 보였음을 시사한다.

4. 평가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태어나 활동한 인물이다. 할아버지 이경이 당으로 이주한 후 일찍 사망하여 아버지 이직과 본인은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족 여성과 결혼하고 아들 이회가 공을 세우는 등, 그의 가문은 당 사회에 적응하고 융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비록 이은지 개인의 사회적 성취는 크지 않았으나, 후대 가문 번성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4. 1. 당나라 사회 적응

장안 또는 낙양에서 태어났다. 이은지의 할아버지 이경당 태종고구려-당 전쟁 이후 645년에 장안으로 이주했다. 이경은 장안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에, 이은지의 아버지 이직은 별다른 영예를 얻지 못했고, 이은지 또한 관직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은지의 아들 이회는 당 현종 시기 위씨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활약했다. 이은지가 결혼한 하간현군 유씨는 한족이다.

4. 2. 문화적 융합

장안 또는 낙양에서 태어났다. 이은지의 할아버지 이경고구려-당 전쟁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 이후 장안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경은 장안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고, 그 영향으로 아버지 이직과 이은지 본인은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은지는 한족인 하간현군 유씨와 결혼했는데, 이는 당시 이주민과 한족 간의 문화적 융합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후 아들 이회는 당 현종 때 위씨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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