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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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첨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활동한 문신으로, 공민왕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예부시 장원 급제 후 관직을 시작했다. 이인임 탄핵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기도 했으며, 공양왕에게 군주로서의 규범을 제시하는 등 고려 왕조의 중흥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 개국 후에도 관직을 역임하며 태종 대에 이르러 예문관대제학 등을 지냈다.
이첨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1345년에 태어나 1405년에 사망하였다.
이첨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다음은 그가 거쳐간 관직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표이다.
2. 생애
이첨의 고려 시대 행적은 하위 섹션인 "고려 시대"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고려 멸망 후, 이첨은 영산에서 2년간 머물렀다. 1394년 이흥무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합포(合浦)로 유배되었다가 10월에 종편이 허락되었다. 이첨은 영산현 서쪽 마고리에 거주하며[10] 집에 매화나무 두 그루를 심고 자신의 호를 쌍매당(雙梅堂)이라 하였다.[11] 1396년 1월 24일 중앙으로 소환되었다.
1398년 7월, 이첨은 이조전서 집현전직학사 지제교와 성균대사성 경연시강관이 되었다. 10월에는 중추원학사 도평의사사 보문각학사 지예문춘추관경연사 겸 성균대사성이 되었다.
1400년(정종 2년) 4월, 예문춘추관학사 동지경연사 겸 성균대사성이 되었다. 7월에는 첨서의흥삼군부사 동지의정부사 집현전학사 동지경연사 겸 성균대사성이 되었다. 11월에는 계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3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1401년(태종 원년) 7월, 예문관학사 동지경연사가 되었다.
1402년 의정부찬성이 되었고, 동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여 신효 등 33인을 뽑았다. 7월에는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가 되었다. 9월에는 지의정부사 판예조사 겸 판예빈시사 지경연춘추관사가 되었다. 11월, 명나라 영락제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하륜과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영락제가 하사한 조선 국왕의 인장과 고명을 가지고 이듬해 4월에 귀국하였다.
1403년 하륜, 권근과 함께 《삼국사략》을 편찬하였다. 4월,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보문각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가 되었다. 6월에는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보문각대제학 지경연춘추성균관사가 되었다. 7월에는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겸 사헌부 대사헌 보문각대제학 지경연춘추성균관사가 되었다.
1404년 2월,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성균관사가 되었고, 3월에는 판공조사가 더해졌다. 그러나 5월 25일 원평으로 유배되었다.[12] 태종은 이첨의 공로를 인정하여 원평 경내에서 이첨이 원하는 곳을 고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13] 8월에는 이직, 조박, 이첨, 한이 등에게 성균관에서 생도들을 가르치게 하였다.[14]
1405년 12월 사망하였다. 향년 61세.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2. 1. 고려 시대
이첨은 1345년(충목왕 원년) 3월에 태어났다.
1365년(공민왕 14년) 윤12월, 21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1368년(공민왕 17년) 4월에는 예부시에 장원하였다.[1] 공민왕은 이첨에게 잉어 그림을 하사하였고, 이첨은 어필이어도찬(御筆鯉漁圖贊)을 지어 하례하였다. 윤7월 예문검열(藝文檢閱, 정9품)이 되었다. 이듬해 정월에 예문수찬(藝文修撰)이 된 데에 이어 7월에 정7품 예문공봉(藝文供奉), 12월에는 우정언(右正言)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
1371년(공민왕 20년) 우정언(右正言)으로써 이인임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가[2] 조정랑 지춘주사(知春州事) 겸 권농방어사(勸農防禦使)가 되었다. 3년 뒤 12월에 좌정언(左正言) 지제교(知製敎)로 복귀하였다. 1375년(우왕 원년) 가을에 이인임 일파인 우인열(禹仁烈), 한이(韓理)에 의해 하동으로 유배되었다가 1377년에야 종편이 허락되었다.[3] 1384년(우왕 10년) 가을 7월에 시전교부령(試典敎副令)이 되어 돌아올 수 있었다.
1388년(우왕 14년) 정월에 내부부령(內府副令) 예문응교(藝文應敎)가 되었다.[4] 2월에는 예문관응교(藝文應敎)로 성균직강(成均直講)을 겸하게 되었다. 위화도 회군 뒤인 8월에는 문하사인(門下舍人)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고 12월에는 전리총랑(典理摠郞) 진현관직제학(進賢館直提學) 겸 성균직강이 되고 다시 전리총랑(典理摠郞) 지제교에 제수되었다.
1389년(공양왕 원년) 6월에 시사헌집의(試司憲執義) 진현관직제학이 되고 12월에는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진현관직제학 지제교에 이어 우상시(右常侍)[5]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 경연강독관(經筵講讀官)[6]이 된다. 1390년(공양왕 2년) 3월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 보문각직제학 지제교가 되었고, 12월에는 밀직사(密直司) 좌부대언(左副代言)[7] 경연참찬관 겸 판종부사사(判宗簿寺事) 상서윤(尙瑞尹)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춘추관 지병조사(知兵曹事)가 되었다.
이첨은 공양왕에게 군주로서 지켜야 할 아홉 가지 규범을 제시하여 고려 왕조의 중흥책을 제시하고, 공양왕 앞에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독하거나 군주의 모범행동에 대한 글을 모아 제범(帝範)을 편찬하여 바치기도 하였다. 1391년(공양왕 3년) 좌대언(左代言)으로써 사직을 청한 이성계가 있는 평주(平州)의 온천으로 가서 궁온(宮醞)을 하사하며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불윤비답을 전하기도 하였다.[8] 12월에 밀직사(密直司) 지신사(知申事) 경연참찬관(經筵叅贊官) 겸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 우문관직제학(右文館直提學) 지제교로 춘추관편수관사(春秋館編修官事)로 채워졌다.
1392년(공양왕 4년) 감시를 맡아 이맹준 등 99인을 뽑았다. 이때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4월에 정몽주의 당여로 지목되어 결성(結成)[9]으로 유배되었다가 겨울에 종편이 허락되었다. 이 해에 고려는 멸망하였다.
2. 2. 조선 시대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12월에는 봉상대부 전리총랑(典理摠郞) 진현관직제학(進賢館直提學) 겸 성균직강이 되고 다시 봉상대부 전리총랑(典理摠郞) 지제교에 제수되었다.[1]
공양왕 원년(1389년) 6월에 중현대부(中顯大夫) 시사헌집의(試司憲執義) 진현관직제학이 되고 12월에는 봉순대부(奉順大夫)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진현관직제학 지제교에 이어 정순대부(正順大夫) 우상시(右常侍)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 경연강독관(經筵講讀官)이 되었다.[5][6] 1390년 3월에는 봉익대부(奉翊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보문각직제학 지제교가 되었고, 12월에는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密直司) 좌부대언(左副代言) 경연참찬관 겸 판종부사사(判宗簿寺事) 상서윤(尙瑞尹)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춘추관 지병조사(知兵曹事)가 되었다.[7]
이첨은 공양왕에게 군주로서 지켜야 할 아홉 가지 규범을 제시하여 고려 왕조의 중흥책을 제시하고, 공양왕 앞에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독하거나 군주의 모범 행동에 대한 글을 모아 제범(帝範)을 편찬하여 바치기도 하였다. 1391년 좌대언(左代言)으로써 사직을 청한 이성계가 있는 평주(平州)의 온천으로 가서 궁온(宮醞)을 하사하며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불윤비답을 전하기도 하였다.[8] 12월에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密直司) 지신사(知申事) 경연참찬관(經筵叅贊官) 겸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 우문관직제학(右文館直提學) 지제교로 춘추관편수관사(春秋館編修官事)로 채워졌다.
1392년 감시를 맡아 이맹준 등 99인을 뽑았다. 이때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4월에 정몽주의 당여로 지목되어 결성(結成)으로 유배되었다가 겨울에 종편이 허락되었다.[9] 이 해에 고려는 멸망하였다.
3. 관직 연혁
시기 관직 1368년 (공민왕 17년) ~ 1391년 (공양왕 3년) 고려 시대 관직 1398년 (태조 7년) 7월 가선대부 이조전서 집현전직학사 지제교, 성균대사성 경연시강관 1398년 (태조 7년) 10월 가정대부 중추원학사 도평의사사 보문각학사 지예문춘추관경연사 겸 성균대사성 1400년 (정종 2년) 4월 가정대부 예문춘추관학사 동지경연사 겸 성균대사성 1400년 (정종 2년) 7월 가정대부 첨서의흥삼군부사 동지의정부사 집현전학사 동지경연사 겸 성균대사성 1401년 (태종 원년) 7월 가정대부 예문관학사 동지경연사 1402년 (태종 2년) 의정부찬성(《청선고》) 1402년 (태종 2년) 7월 자헌대부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1402년 (태종 2년) 9월 자헌대부 지의정부사 판예조사 겸 판예빈시사 지경연춘추관사 1403년 (태종 3년) 4월 정헌대부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보문각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1403년 (태종 3년) 6월 정헌대부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보문각대제학 지경연춘추성균관사 1403년 (태종 3년) 7월 정헌대부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겸 대사헌 보문각대제학 지경연춘추성균관사 1404년 (태종 4년) 2월 정헌대부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성균관사 1404년 (태종 4년) 3월 판공조사
3. 1. 고려
시기 | 관직 |
---|---|
1368년 (공민왕 17년) 윤7월 | 예문검열(藝文檢閱, 정9품) |
1369년 (공민왕 18년) 정월 | 예문수찬(藝文修撰) |
1369년 (공민왕 18년) 7월 | 예문공봉(藝文供奉, 정7품) |
1369년 (공민왕 18년) 12월 | 조청랑(朝請郞) 우정언(右正言) 지제교(知製敎) |
1371년 (공민왕 20년) | 조정랑 지춘주사(知春州事) 겸 권농방어사(勸農防禦使) |
1374년 (공민왕 23년) 12월 | 승봉랑(承奉郞) 좌정언(左正言) 지제교(知製敎) |
1375년 (우왕 1년) 4월 | 봉직랑(奉直卽) 우헌납(右獻納) |
1375년 (우왕 1년) 6월 | 좌헌납(左獻納), 지제교, 자금어대(紫金魚袋) |
1384년 (우왕 10년) 7월 | 봉선대부(奉善大夫) 시전교부령(試典敎副令) |
1388년 (우왕 14년) 정월 | 봉상대부(奉常大夫) 내부부령(內府副令) 예문응교(藝文應敎) |
1388년 (우왕 14년) 2월 | 예문관응교(藝文應敎, 정4품) 겸 성균직강(成均直講) |
1388년 (우왕 14년) 8월 | 봉상대부 문하사인(門下舍人)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정4품) |
1388년 (우왕 14년) 12월 | 봉상대부 전리총랑(典理摠郞) 진현관직제학(進賢館直提學) 겸 성균직강, 봉상대부 전리총랑(典理摠郞) 지제교 |
1389년 (공양왕 1년) 6월 | 중현대부(中顯大夫) 시사헌집의(試司憲執義) 진현관직제학 |
1389년 (공양왕 1년) 12월 | 봉순대부(奉順大夫)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정순대부(正順大夫) 우상시(右常侍)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 경연강독관(經筵講讀官) |
1390년 (공양왕 2년) 3월 | 봉익대부(奉翊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보문각직제학 지제교 |
1390년 (공양왕 2년) 12월 |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密直司) 좌부대언(左副代言) 경연참찬관 겸 판종부사사(判宗簿寺事) 상서윤(尙瑞尹)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춘추관 지병조사(知兵曹事) |
1391년 (공양왕 3년) 12월 |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密直司) 지신사(知申事) 경연참찬관(經筵叅贊官) 겸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 우문관직제학(右文館直提學) 지제교로 춘추관편수관사(春秋館編修官事) |
3. 2. 조선
태조 7년(1398년) 가을 7월, 이첨은 가선대부 이조전서 집현전직학사 지제교와 성균대사성 경연시강관을 겸하였다.[1] 같은 해 10월에는 가정대부 중추원학사 도평의사사 보문각학사 지예문춘추관경연사 겸 성균대사성이 되었다.[1]정종 2년(1400년) 4월, 이첨은 가정대부 예문춘추관학사 동지경연사 겸 성균대사성이 되었다.[1] 같은 해 7월에는 가정대부 첨서의흥삼군부사 동지의정부사 집현전학사 동지경연사 겸 성균대사성을 역임하였다.[1]
태종 원년(1401년) 7월, 이첨은 가정대부 예문관학사 동지경연사가 되었다.[1] 태종 2년(1402년)에는 의정부찬성(《청선고(淸選考)》)을 거쳐,[1] 같은 해 7월 자헌대부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가 되었고,[1] 9월에는 자헌대부 지의정부사 판예조사 겸 판예빈시사 지경연춘추관사를 역임하였다.[1]
태종 3년(1403년) 4월, 이첨은 정2품상 정헌대부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보문각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가 되었다.[1] 같은 해 6월에는 정헌대부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보문각대제학 지경연춘추성균관사를,[1] 7월에는 정헌대부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겸 사헌부 대사헌 보문각대제학 지경연춘추성균관사를 역임하였다.[1]
태종 4년(1404년) 2월, 이첨은 정헌대부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성균관사가 되었고,[1] 3월에는 판공조사를 역임하였다.[1]
4. 평가 및 영향
이첨은 신돈 집권 시기에 이금강이 사재에 임명되었을 때, 간관들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자 신돈에게 질문을 받았다. 이첨은 자신의 가문과 자신의 현재 위치를 언급하며 족하다는 말로 자신의 뜻을 표현했고, 신돈은 침묵했다. 이 일로 이첨은 좌천되었다가 복직하였다.[15]
4. 1. 긍정적 평가
신돈 집권 당시 신돈의 측근이었던 이금강이 사재에 임명되었을 때, 간관들은 그의 고신에 서명하지 않았다. 신돈이 이첨에게 그 이유를 묻자, 이첨은 자신의 가문이 대대로 영동정을 지냈음을 언급하며 자신은 정언까지 오른 것으로 만족한다고 답했다. 이첨의 대답에 신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일로 이첨은 지통주사로 좌천되었다가 후에 다시 정언으로 복직하였다.[15]4. 2. 비판적 평가
이첨은 신돈 집권 시기에 신돈의 일파였던 이금강이 사재에 임명되었을 때, 간관들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는 상황에서 신돈의 압력에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신돈이 "왜 금강의 고신에 서명하지 않느냐"고 묻자, 이첨은 자신의 가문이 대대로 영동정을 지냈음을 언급하며, 자신은 정언까지 오른 것으로 족하다는 말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첨의 이러한 태도는 신돈에게 좌천되었다가 다시 복직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권력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면모를 보여준다.[15]5. 작품
6. 기타
해당 섹션은 원본 소스에 관련 내용이 없으므로 작성할 수 없습니다.
6. 1. 이첨이 등장하는 작품
- 《정도전》 (KBS, 2014년) : 배우 신용규
참조
[1]
서적
고려사 권제41 세가제41 공민왕 17년(1368년) 4월 12일 임자
고려사
[2]
서적
고려사 권제43 세가제43 공민왕 20년(1371년) 6월 21일 임인
고려사
[3]
서적
쌍매당협장문집
쌍매당협장문집
[4]
서적
고려사
고려사
[5]
서적
고려사 권제45 세가제45 공양왕 원년 12월 21일 을묘
고려사
[6]
서적
고려사 권제45 세가제45 공양왕 2년(1390년) 1월 12일 병자
고려사
[7]
서적
고려사 권제45 세가제45 공양왕 2년(1390년) 윤4월 17일 기묘
고려사
[8]
서적
고려사 권제46 세가제46 공양왕 3년(1391년) 3월 19일 병오
고려사
[9]
서적
결성읍지 명환편
결성읍지
[10]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慶尙道) 영산현(靈山縣) 우거조
신증동국여지승람
[11]
서적
동문선(東文選) 권제49 쌍매당명병서(雙梅堂銘幷序)
동문선
[12]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도 파주목(坡州牧) 임진정 시
신증동국여지승람
[13]
서적
태종실록 태종 4년(1404년) 5월 25일
태종실록
[14]
서적
쌍매당협장집
쌍매당협장집
[15]
서적
고려사 권제117 열전제30 제신 이첨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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