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키 기요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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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치키 기요나오는 일본 육군 군인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며, 특히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 당시 중국군에 발포하라는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초기 군 경력과 중일 전쟁 참전을 거쳐, 태평양 전쟁 중에는 미드웨이 섬 점령 부대 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과달카날 전투에서 이치키 부대를 이끌었으나, 일루 강 도하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결설과 전사설이 존재하며, 사후 육군 소장으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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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키 기요나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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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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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이름 | 이치키 기요나오 (一木 清直) |
로마자 표기 | Ichiki Kiyonao |
출생 | 1892년 10월 16일 |
출생지 | 일본 시즈오카현 |
사망 | 1942년 8월 21일 (향년 49세) |
사망 장소 |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섬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916년 ~ 1942년 |
최종 계급 | 육군 소장 (사후 추서) |
군사 경력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과달카날 전역 |
주요 전투 | 중일 전쟁 루거우차오 사건 테나루 전투 (전사) |
2. 군 경력
1916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치키 기요나오는 1937년 노구교 사건 당시 중좌로 진급했고,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드웨이 섬 점령부대인 이치키 지대의 지대장이 되었다.
노구교 사건 당시에는 발포 명령에 "정말로 발포합니까?"라고 확인하는 등 소심하고 관료적인 면모를 보였다.[2]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믿고 충분한 정찰 없이 행군하다가 미국 해병대에 기습당해 부대가 전멸하는 등 실전에서 유연성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2년 8월 18일, 과달카날 탈환 작전 선봉으로 파견된 이치키는 핸더슨 비행장 동쪽 약 3km 지점인 일루강 하구 근처로 진출했다. 8월 20일 밤, 미 해병대 진지에 야습을 감행했으나 실패했고, 다음 날 우회 공격을 시도했지만 압도적인 미군 화력에 밀려 큰 피해를 보았다. 이후 이치키는 군기를 불태우고 자결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미군 측 기록에는 없어 논란이 있다.
이치키 기요나오의 주요 군 경력은 다음과 같다.
날짜 | 사건 |
---|---|
1916년 | 육군사관학교 28기 졸업, 육군 보병 소위 임관, 보병 제57연대 배속 |
1918년 | 육군 보병 중위 진급 |
1926년 | 육군 보병 대위 진급 |
1927년 | 보병 제57연대 중대장 |
1928년 | 지바현 모바라 농학교 배속[9] |
1930년 | 이치노미야 실업학교 배속[9] |
1931년 | 보병 제57연대 기관총대장[9] |
1933년 | 육군보병학교 (갑) 학생 |
1934년 | 육군 보병 소령 진급 |
1935년 | 육군보병학교 교관 |
1936년 | 지나 주둔 보병 제1연대 제3 대대장 |
1937년 7월 7일 | 루거우차오 사건 |
1938년 | 육군 보병 중좌, 육군보병학교 교관 |
1939년 | 겸임・육군 도야마 학교 교관 |
1940년 | 육군보병학교 재료창장 |
1941년 | 육군 대좌, 보병 제28연대장 |
1942년 5월 5일 | 미드웨이 섬 점령 부대의 "이치키 지대" 지대장 |
1942년 8월 21일 | 과달카날 전투의 일루 강 도하 전투에서 이치키 지대 선견대 괴멸, 이치키 대좌도 사망. 동일자로 육군 소장 진급 |
1943년 | 일본 육군이 육군 소장 진급 발표 |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난 이치키는 1916년 일본 육군 사관학교 제28기를 졸업했다.[1] 졸업 후 지바현에 있는 육군 보병학교에서 교관으로 두 차례 복무했다.[1]'''이치키 기요나오의 초기 생애 및 교육, 경력'''
연도 | 내용 |
---|---|
1916년 | 육군사관학교 28기 졸업, 육군 보병 소위 임관, 보병 제57연대 배속[1] |
1918년 | 육군 보병 중위 진급 |
1926년 | 육군 보병 대위 진급 |
1927년 | 보병 제57연대 중대장[9] |
1928년 | 지바현 모바라 농학교 배속[9] |
1930년 | 이치노미야 실업학교 배속[9] |
1931년 | 보병 제57연대 기관총대장[9] |
1933년 | 육군보병학교 (갑) 학생 |
1934년 | 육군 보병 소령 진급 |
1935년 | 육군보병학교 교관[1] |
2. 2. 중일 전쟁 참전
1934년, 이치키 기요나오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1936년에는 중국 주둔군에 배속되어 제1보병 연대의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2] 1937년 7월 7일, 마르코 폴로 다리 근처에서 일본군이 야간 훈련 중 공포탄을 발사했고, 중국군은 이를 공격으로 오인하여 몇 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다음 날 아침, 일본군 병사 한 명이 사라지자 이치키는 중국군이 그를 납치했다고 판단하여 완핑 공격을 명령했고, 이는 중일 전쟁의 첫 번째 실제 전투로 이어졌다.[2][3] 당시 무타구치 렌야 연대장의 발포 명령에 "정말로 발포하라는 명령입니까?"라고 확인한 일화가 있다.[2]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이치키는 일본으로 소환되어 1938년부터 1940년까지 특수 군사 장비 훈련 학교에서 교관으로 복무했다.
2. 3. 태평양 전쟁 참전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이치키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3,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제7사단 제28보병연대 지휘를 맡아 미드웨이 섬 점령 임무를 부여받았다.[4]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패배하면서 이 작전은 취소되었다.[4]1942년 8월, 이치키와 그의 연대는 남부 전선의 제17군으로 전속되어 캐롤라인 제도의 트루크에 주둔하게 되었다.[4] 과달카날 전투의 일환으로 연합군이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섬에 상륙하자, 이치키는 그의 연대 일부(제28보병연대 제2대대, 포병 및 공병 포함, 별명 "이치키 부대")를 이끌고 헨더슨 비행장을 탈환하여 연합군을 섬에서 몰아내라는 임무를 받았다.[4]
8월 19일, 일본 구축함 6척은 이치키와 그의 병력 916명을 트루크에서 수송하여 과달카날의 타이부 포인트에 상륙시켰다.[4] 이치키는 잔여 연대가 도착할 때까지 교두보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해변이 비어 있고 섬의 방어가 허술하다고 판단하여 미군 전력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하고 125명의 후방 경비병을 남겨둔 채 야간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4] 이치키는 이전에 미 해병대를 여성적이고 겁이 많은 존재로 언급했기에, 적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4] 이치키는 몰랐지만, 미국 해병대는 그의 상륙을 알고 방어 진지를 구축해두었다.[4]
1942년 8월 21일의 테나루 전투에서 이치키는 엄청난 손실을 입고 패배했다.[5]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이치키가 개인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며, 일본 제국 참모본부가 이치키에게 공중, 해군, 중포 지원 없이, 15 대 1의 수적 열세로 준비된 진지를 공격하라는 자살 작전을 명령했으며, 미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치키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고 주장한다.[6] 그의 두 번째 부대에서 추가 병력이 도착했더라도 이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을 것이다.[6] 그러나 참모본부는 희생양이 필요했고, 실패의 책임을 이치키에게 돌리기로 결정했다.[6] 또한 참모본부가 미드웨이 작전 실패의 비밀이 누설될 것을 우려하여, 이치키 부대가 미드웨이 작전 실패로부터 직접 전투에 투입되도록 결정했다는 추측도 있었다.[6]
이치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서로 다르다. 적어도 한 가지 기록에서는 이치키가 전투 중에 전사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그가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한 수치심 때문에 자결했다고 한다.[6] 그의 공격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치키는 사후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치키 기요나오의 참전 관련 주요 시기는 다음과 같다.
날짜 | 사건 |
---|---|
1941년 | 대령 진급, 제7사단 제28보병연대 지휘, 미드웨이 섬 점령 임무 부여 |
1942년 5월 5일 | 미드웨이 섬 점령 부대의 "이치키 지대" 지대장 |
1942년 5월 14일 | 미드웨이 작전에 의해 이치키 지대는 수송선 2척 (젠요마루, 난카이마루)에 분승하여 히로시마현 우지나를 출격 |
1942년 5월 25일 | 사이판 섬 도착, 미드웨이 섬 공략을 상정한 상륙 훈련 실시 |
1942년 5월 28일 | 제2수뢰전대 (사령관: 다나카 라이조 소장)의 호위를 받아 사이판 출발 |
1942년 6월 5일 | 군기 제사 거행,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 |
1942년 6월 13일 | 괌 섬 도착 |
1942년 8월 6일 | 귀환 명령, 8월 7일 수송선 2척 (보스턴마루, 다이후쿠마루)에 분승하여 괌 출발 |
1942년 8월 12일 | 트럭 정박지에 도착, 제17군의 예속 |
1942년 8월 16일 | 이치키 지대는 선견대와 제2 후송대로 분할, 이치키 대좌는 선견대 916명을 이끌고 고속 구축함 6척에 분승, 트럭 정박지 출격. 속사포 등 중화기를 장비한 이치키 지대 제2후송대는 저속 수송선 2척에 분승, 제2수뢰전대 호위하에 동시 출격 |
1942년 8월 18일 | 이치키 지대 선견대는 과달카날 섬 타이보 곶에 상륙, 헨더슨 비행장 탈환을 목표로 서진 |
1942년 8월 20일 | 호위 항공모함 롱아일랜드가 전투기와 급강하 폭격기를 헨더슨 비행장에 공수, 미군 제해권 장악. 과달카날 섬으로 향하던 이치키 지대 제2후송대는 반전 퇴피 |
1942년 8월 21일 | 과달카날 전투의 일루 강 도하 전투 (미국명: 테나루 전투)에서 이치키 지대 선견대 괴멸, 이치키 대좌도 독전 중 사망. 동일자로 육군 소장 진급 |
1943년 | 일본 육군이 육군 소장 진급 발표 |
2. 4. 과달카날 전투와 최후
1942년 8월 18일, 이치키 기요나오는 과달카날 탈환 작전의 선봉으로 파견되어 타이보 갑에서 정보 부족으로 이틀을 허비한 후, 핸더슨 비행장 동쪽 약 3km 지점인 일루강 하구 근처로 진출했다.[4] 8월 21일 테나루 전투에서 이치키는 미군 전력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하여 큰 손실을 입고 패배했다.[5] 그는 이전에 미 해병대를 여성적이고 겁이 많은 존재로 언급했기에, 적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5]8월 20일 22시 30분, 에드윈 블록 중령이 이끄는 미국 1 해병연대 2대대 진지에 야습을 감행하여 두 차례의 백병전을 시도했으나, 철조망과 견고하게 구축된 적 진지의 기관총 사격으로 인해 야습을 포기해야 했다.[4] 다음 날, 이치키 부대는 일루강 동쪽 해변에 병력을 집결시켜 상류에서 우회하여 공격을 시도했으나, 압도적인 미군의 화력에 밀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포함해 777명의 피해를 입었다.[4] 이치키 기요나오는 군기를 불태운 후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하지만 이치키 기요나오의 자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본군 기록에는 이치키 부대장이 1500연대기를 태우고 자결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미군 측 기록에는 자결을 확인한 사람이 없어 전사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치키 기요나오가 실제로 자결했는지 여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4]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이치키 기요나오에게 개인적인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일본 제국 참모본부가 이치키에게 공중, 해군, 중포 지원 없이 15 대 1의 수적 열세로 준비된 진지를 공격하라는 자살 작전을 명령했고, 미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여 이치키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고 주장한다.[6]
3. 평가 및 논란
이치키 기요나오는 노구교 사건 당시 "정말로 발포합니까?"라고 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소심하고 관료적인 장교였다고 전해진다. 실전에서도 미드웨이 해전 당시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과신해 충분한 정찰 없이 행군하다 갑자기 나타난 미국 해병대에 대해 준비 안 된 상태에서 무리한 백병전을 명령해 부대를 전멸시키는 등 유연성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
1942년 과달카날 탈환 작전의 첨병으로 파견되었으나, 핸더슨 비행장 동쪽 일루강 부근에서 미군에 야습을 감행했다가 실패하고, 다음 날 우회 공격했으나 압도적인 미군의 화력 앞에 777명의 사상자를 내고 자결했다고 전해진다.[4]
일본군 기록엔 이치키 부대장이 자결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미군 측 기록에는 전사로 표기되어 있어 உண்மைய인지는 미제로 남아있다.[4]
3. 1. 부정적 평가
노구교 사건 당시 발포 명령이 내려지자 "정말로 발포합니까?"라고 재차 확인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이치키 기요나오는 소심하고 관료적인 성격의 장교였다고 전해진다.[4] 이러한 성격은 실전에서도 단점으로 작용하여,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과신하고 충분한 정찰 없이 행군하다가 미국 해병대에게 기습당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백병전을 지시, 부대가 전멸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등 상황에 대한 유연성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1942년 8월 18일, 과달카날 탈환 작전의 선봉으로 파견된 이치키는 과달카날 전투에서도 정보 부족과 적에 대한 과소평가로 인해 패배하였다. 타이보 갑에서 정보 부족으로 이틀을 허비한 후, 핸더슨 비행장 동쪽 일루강 하구 부근에서 미국 1 해병연대 2대대 진지에 야습을 감행했으나, 철조망과 견고하게 구축된 미군 진지의 기관총 사격에 막혀 실패했다. 다음 날, 우회 공격을 시도했으나 압도적인 미군의 화력에 밀려 777명의 사상자를 내고 자결했다고 알려져 있다.[4]
이치키는 미 해병대를 여성적이고 겁이 많은 존재로 언급하며 적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미국 해병대는 이치키의 상륙을 이미 알고 방어 진지를 구축해 둔 상태였다. 1942년 8월 21일 테나루 전투에서 이치키 부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배했다.[5]
최근 일본 학계 일각에서는 이치키에게 과달카날 전투 패배의 모든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일본 제국 참모본부가 이치키에게 충분한 지원 없이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 공격을 강요했고, 미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여 이치키 부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참모본부가 미드웨이 해전 실패의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이치키 부대를 전투에 투입했다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6]
3. 2. 죽음에 대한 논란
일본군 기록에는 이치키 부대장이 1500연대기를 태우고 자결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미군 측 기록에는 자결을 확인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 전사로 표기되어 있다.[4] 따라서 이치키 대령이 실제로 자결했는지는 현재까지도 불분명하다. 다른 기록에는 이치키 대령이 전투 중 전사했다고도 한다. 공격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치키 대령은 사후에 소장으로 진급했다.4. 이치키 기요나오와 관련된 사건
이치키 기요나오는 시즈오카현 출신으로, 1916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직책을 거쳤다. 그는 노구교 사건,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탈환 작전 등 주요 사건에 연루되었다.
사건 | 날짜 | 내용 |
---|---|---|
루거우차오 사건 | 1937년 7월 7일 | 발포 명령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임[10] |
미드웨이 해전 | 1942년 5월 5일 ~ 6월 13일 | 이치키 지대장으로 임명되어 작전에 참여했으나 일본군 패배[9] |
과달카날 전역 | 1942년 8월 18일 ~ 8월 21일 | 과달카날 탈환 작전 중 전사 또는 자결[7] |
- '''노구교 사건(1937년 7월 7일):''' 당시 중좌였던 이치키는 발포 명령에 대해 "정말로 발포합니까?"라고 확인했을 정도로 소심한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10]
- '''미드웨이 해전(1942년 5월 5일):''' 이치키는 미드웨이 섬 점령 부대인 이치키 지대의 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작전은 일본군의 패배로 취소되었다.[9]
- '''과달카날 전역(1942년 8월 18일):''' 과달카날 탈환 작전의 첨병으로 파견된 이치키는 8월 21일 일루 강 도하 전투에서 전사 또는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군 기록에는 자결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미군 측 기록에는 전사로 표기되어 있어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4. 1.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마르코 폴로 다리 부근에서 야간 훈련 중 공포탄을 발사했다. 이를 공격으로 오인한 중국군이 몇 발의 포탄을 발사하자, 이치키는 자신의 부대 병사 한 명이 실종된 것을 중국군이 납치했다고 판단했다.[2][3] 그는 즉시 완핑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는 중일 전쟁의 첫 실전으로 이어졌다.[2][3]루거우차오 사건 당시, 무타구치 렌야 연대장의 지휘 아래 중국군 진지에 대한 발포 명령을 받았을 때, 이치키는 "정말로 발포하라는 명령입니까?"라고 확인했다고 전해진다.
4. 2. 미드웨이 해전
1942년 5월 5일 이치키 기요나오는 미드웨이 섬 점령 부대인 "이치키 지대"의 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대륙명 제625호)[9] 5월 14일, 이치키 지대는 수송선 2척(젠요마루, 난카이마루)에 분승하여 히로시마현 우지나를 출격했다.[9] 5월 25일 사이판 섬에 도착하여 미드웨이 섬 공략을 상정한 상륙 훈련을 실시했다.[9] 5월 28일, 제2수뢰전대(사령관: 다나카 라이조 소장)의 호위를 받으며 사이판을 출발했다.[9]6월 5일, 군기 제사를 거행했지만,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했다.[9] 이 패배로 인해 미드웨이 섬 점령 작전은 취소되었다. 이후 이치키 지대는 6월 13일 괌 섬에 도착하여[11] 두 달 가까이 체류했다.[9]
4. 3. 과달카날 전투
1942년 8월, 미국은 과달카날 전투의 일환으로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 이에 일본군은 헨더슨 비행장을 탈환하고 연합군을 섬에서 몰아내기 위해 이치키 기요나오가 이끄는 이치키 지대를 파견했다.[4]8월 19일, 일본 구축함 6척은 이치키와 그의 병력 916명을 트루크에서 수송하여 과달카날의 타이부 포인트에 상륙시켰다. 이치키는 해변이 비어 있고 섬의 방어가 허술하다고 판단하여 미군 전력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했다. 그는 125명의 후방 경비병을 남겨둔 채 야간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4] 이치키는 이전에 미 해병대를 여성적이고 겁이 많은 존재로 언급하며 적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미국 해병대는 이치키의 상륙을 알고 방어 진지를 구축해두었다.[5]
8월 21일, 테나루 전투(미국명: 일루 강 도하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헨더슨 비행장 동쪽 약 3km에 있는 일루강 하구 부근에서 야습을 감행했지만, 철조망과 미군 진지의 기총 사격에 막혔다. 다음 날, 일본군은 상류에서 우회하여 공격했으나 압도적인 미군의 화력에 밀려 큰 피해를 입었다.[5] 이치키 지대는 괴멸되었고, 이치키 기요나오는 전사 또는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일본군 기록에는 이치키 부대장이 군기를 불태우고 자결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미군 측 기록에는 자결을 확인한 자가 없어 전사로 표기되어 있다. 이치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다.[6]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이치키가 개인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며, 일본 제국 참모본부가 이치키에게 불리한 조건에서 공격을 명령하고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6]
참조
[1]
서적
Bloody Ridge
[2]
서적
The Search for Modern China
Norton &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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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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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Rising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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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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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kigu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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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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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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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宮日記4巻
1942-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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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宮日記4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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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16年4月10日(発令4月10日付)海軍辞令公報(部内限)第615号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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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宮日記4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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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宮日記4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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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宮日記4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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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宮日記4巻
1942-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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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宮日記4巻
194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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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宮日記5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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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宮日記4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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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宮日記4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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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宮日記4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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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宮日記4巻
1942-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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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ies of 870 Japanese Troopes Buried in Ten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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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ppu Jiji, 1942.09.08 Edition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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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宮日記4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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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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グワダルカナル島の兩部落攻略戰從軍記(一)【ソロモン諸島米國陸戰隊本部にてトレガスキーISS特派員八月二十日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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グワダルカナル島の兩部落攻略戰從軍記(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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テナル河激戰記 敵の上陸部隊大敗を喫す(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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テナル河激戰記 敵の上陸部隊大敗を喫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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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ppu Jiji, 1942.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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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4763号「叙任及辞令」
194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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