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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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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네시아 영화는 1900년대 초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최초로 상영된 이후, 식민지 시대, 일본 강점기, 독립 이후 시대를 거치며 발전을 거듭했다. 초기에는 외국 영화가 주를 이루었으나, 1926년 최초의 인도네시아 영화 《루퉁 카사룽》이 제작되면서 자국 영화 산업이 시작되었다. 일본 점령기에는 선전 도구로 이용되었으나, 독립 후 민족주의 고취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검열을 거치며 우스마르 이스마일과 같은 거장 감독이 등장했다. 1980년대에는 와르콥의 코미디 영화와 청소년 영화가 인기를 얻으며 전성기를 맞았지만, 1990년대 외국 영화의 수입 재개와 텔레비전 드라마의 성장으로 침체기를 겪었다. 2000년대 이후 독립 영화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부활의 조짐을 보였고, 2010년대에는 국제적인 인정을 받으며 다양성과 발전을 이루었다. 2020년대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 방식으로 적응하며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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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영화
영화 산업 정보
스크린 수 (2022년)2088개url=https://industri.kontan.co.id/news/penonton-di-bioskop-membludak-gpbsi-yakin-industri-perfilman-indonesia-akan-membaik
연간 제작 영화 수 (2022년)126편title=Daftar film berdasarkan tahun "2022"
연간 관객 수 (2018년)51,100,000명title=Table 11: Exhibition – Admissions & Gross Box Office (GBO)
연간 박스오피스 총액 (2017년)3억 4,500만 달러title=Indonesia the next biggest box office market
인도네시아 영화 촬영용 클랩보드
인도네시아 영화 클랩보드
인도네시아 영화 역사
초기 영화Loetoeng Kasaroeng (1926년)
영화 협회인도네시아 영화 협회(BPI)
특징
영화 산업 성장인도네시아 영화 산업은 지속적으로 성장 중url=https://www.thejakartapost.com/life/2021/01/07/indonesian-film-industry-in-stasis-but-for-the-better.html
스크린 수 증가Cinema XXI는 2024년에 100개의 스크린을 추가할 예정url=https://jakartaglobe.id/lifestyle/cinema-xxi-to-add-100-screens-in-2024-as-postpandemic-moviegoers-increase

2. 역사

인도네시아 영화의 역사는 여러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식민지 시대 (1900년대 초 ~ 1940년대 초)'''

1900년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영화가 상영된 이후, 주로 미국 영화가 수입되어 상영되었다.[41] 1926년, 네덜란드 감독 L. 회벨도르프가 인도네시아 최초의 극영화 루퉁 카사룽을 제작했다.[6] 이 영화는 순다족의 전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반둥에서 현지 배우들과 함께 제작되었다. 이후 조지 크뤼허르스 감독의 ''Eulis Atjih''(1927) 등이 제작되었다.

1928년에는 웡 형제가 ''Lily van Java''를 제작하며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감독들이 영화 산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초까지 중국계 회사들이 인도네시아 영화 산업을 주도했다.

대공황으로 인해 영화 제작이 감소하고, 미국 영화가 주로 상영되면서 인도네시아 영화 산업은 쇠퇴했다. 그러나 Albert Balink 감독의 ''Pareh''(1935)와 ''Terang Boelan''(1937) 등의 영화가 제작되면서 인도네시아 영화 산업은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Terang Boelan''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13]

'''일본 강점기 (1942 ~ 1945)'''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일본은 인도네시아 영화 산업을 선전 도구로 활용했다. 일본 정부는 모든 영화 제작 조직을 통합하여 니폰 에이가샤(니치에이) 자카르타 지부를 설립하고, 교육 영화와 뉴스릴을 제작했다.[14] 이 시기에는 로무샤 노동자나 일본군 자원 입대를 홍보하는 영화들이 제작되었다.[15]

해영 (히나츠 에이타로)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부르며(豪州の呼び声일본어, 1944)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 이 영화는 일본 포로 수용소를 긍정적으로 묘사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15]

'''독립 후 (1945 ~ 1960년대)'''

수카르노 정부는 영화를 민족주의반제국주의적인 목적으로 활용하고 외국 영화 수입을 금지했다. 수하르토 정부는 검열을 통해 영화 제작을 규제했다.[42] 우스마르 이스마일 감독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인도네시아 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17]

1950년대 후반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영화 산업이 침체되기도 했다. 1960년대 말에는 외국 영화 수입 덕분에 영화 산업이 다시 살아났다.

'''1980년대: 전성기'''

나가 보나르(1987), 차타탄 시 보이(1989) 등의 영화가 성공을 거두면서 인도네시아 영화는 전성기를 맞았다. 아리잘 감독의 코미디 영화들과 10대들에게 인기 있는 영화들도 많이 제작되었다.[43] ''쬣 냐 디엔''(1988)은 인도네시아 영화제에서 9개의 시트라상을 수상하고, 칸 영화제에서 상영된 최초의 인도네시아 영화였다.

'''1990년대: 침체기'''

외국 영화 수입이 재개되면서 인도네시아 영화는 경쟁에 어려움을 겪었고, 제작 편수도 줄어들었다.[44] 텔레비전 드라마가 성장하면서 영화 산업은 더욱 위축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로 B급 영화 성인 영화가 제작되었다.[20]

'''2000년대: 부활'''

레포르마시 운동 이후 독립 영화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인도네시아 영화 산업은 다시 부활했다. 종교, 민족 문제, 사랑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영화들이 제작되었다.[42][16] 루디 수자르워 감독의 《아다 아파 등안 친타?(Ada Apa dengan Cinta?)》(2002년) 등이 주목받았고, 애니메이션 영화도 제작되기 시작했다.

하눙 브라만툐 감독의 《아얏아얏 친타(Ayat-Ayat Cinta)》(2008년)는 이슬람과 현대적인 로맨스를 융합하여 무슬림 관객들에게 인기를 얻었다.[22]

'''2010년대: 다양화와 국제적 인정'''

외국 영화 수입 과세 강화로 인해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외국 영화가 줄어들었다.[45] 2011년에는 사샤 그레이 등 포르노 배우들이 인도네시아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46]

그러나 ''레이드''(2011)와 속편(2014), ''모두스 아노말리''(2012) 등의 영화들이 국제적으로 호평을 받으면서 인도네시아 영화는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27] 인도네시아 공포 영화는 스트리밍 미디어를 통해 국제적인 인기를 얻었다.[28][29]

'''2020년대: 코로나19와 새로운 기회'''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영화 제작이 중단되거나 영화관이 폐쇄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스트리밍 서비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독립 제작사들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 새로운 기회를 찾았다.[1]

에드윈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다른 모든 사람은 현금으로 지불한다가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 표범상을 수상하는 등 인도네시아 영화는 국제 영화제에서 தொடர்ந்து 주목받고 있다.[2]

2. 1. 식민지 시대 (1900년대 초 ~ 1940년대 초)

인도네시아에서 영화가 처음 상영된 것은 1900년이었으며,[41] 이후 20년 동안 주로 미국에서 제작된 외국 영화가 수입되어 전국적으로 상영되었다. 1911년에는 다큐멘터리가 인도네시아 국내에서 제작되기 시작했지만, 수입된 작품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1923년에는 현지 장편 영화 제작이 발표되었지만 완성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제작된 최초의 극영화인 ''루퉁 카사룽''의 광고.


인도네시아 국내에서 제작된 최초의 영화는 1926년 네덜란드인 감독 L. 회벨도르프의 무성 영화 ''루퉁 카사룽''이었다. 이 영화는 순다 전설을 각색한 것으로, 반둥에서 NV 자와 영화 회사가 현지 배우들과 함께 제작했으며, 1926년 12월 31일 반둥의 엘리트 극장과 메제스틱 극장에서 초연되었다.[6] 이듬해 ''루퉁 카사룽''의 기술자이자 촬영 기사였던 조지 크뤼허르스는 감독 데뷔작이자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째 영화인 ''Eulis Atjih''를 공개했다. ''루퉁 카사룽''의 제한적인 개봉으로 인해 크뤼허르스는 자신의 영화를 식민지의 첫 번째 영화로 홍보할 수 있었다. 1년 후, 인도네시아에서 영화로 각색된 두 번째 소설인 ''Setangan Berloemoer Darah''가 Tan Boen Soan에 의해 제작되었다.

중국 상하이에서 제작된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1928년 웡 형제가 ''Lily van Java''를 완성하면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감독과 제작자가 식민지 영화계에 참여하게 되었다. 웡 형제가 잠시 활동을 중단했지만, 다른 중국계 사람들이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1929년부터 여러 중국 소유의 신생 기업이 기록되었다. 1930년대 초까지 중국 소유 기업이 인도네시아 영화 산업을 지배했다.

대공황이 인도네시아를 강타한 후, 영화 제작은 크게 감소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는 더 높은 세금을 징수했고, 영화관은 더 낮은 가격에 티켓을 판매하여 현지 영화의 이윤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식민지의 영화관은 주로 미국 영화를 상영했고, 국내 영화 산업은 쇠퇴했다. 1931년 ''Boenga Roos dari Tjikembang''으로 데뷔한 The Teng Chun은 1934년과 1935년 초에 영화를 개봉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제작자였다. 그의 저예산 영화는 주로 중국 신화나 무술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중국계를 대상으로 했지만, 액션 장면으로 인해 토착 인도네시아인 관객들에게도 인기를 얻었다.

인도네시아의 쇠퇴하는 영화 산업을 부활시킨 것으로 여겨지는 세 영화 중 하나인 ''Terang Boelan''의 포스터.


영화 경험이 없는 네덜란드 저널리스트 Albert Balink는 현지에서 제작된 영화가 수익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1935년에 넬슨 웡과 그의 형제들과 협력하여 ''Pareh''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당시 대부분의 영화보다 20배나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결국 실패했고, The Teng Chun의 연출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다. The Teng Chun은 덜 전통적인 이야기를 선택했다. Balink의 다음 시도인 ''Terang Boelan''은 2년 후에 개봉되었다. ''Pareh''와 달리 ''Terang Boelan''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여 2개월 만에 200000스트레이츠 달러를 벌어들였다. 미국의 시각 인류학자 Karl G. Heider에 따르면 이 두 영화는 1930년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이다.[13]

''Terang Boelan'', ''Fatima''(1938), ''Alang-Alang''(1939)의 3연속 성공으로 인도네시아 국내 영화 산업이 부활했다. 1940년에 4개의 새로운 제작사가 설립되었고, 이전에 연극단에 소속되었던 배우들이 영화 산업에 진출하여 새로운 관객에게 다가갔다. 새로운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Terang Boelan''에서 확립된 공식, 즉 노래, 아름다운 풍경, 로맨스를 따랐다. ''Asmara Moerni''와 같은 다른 작품들은 언론인이나 성장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인물을 영화에 끌어들여 증가하는 토착 인도네시아인 지식인에게 다가가려고 시도했다.

2. 2. 일본 강점기 (1942 ~ 1945)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 영화 산업을 선전 도구로 활용했다. 일본 정부는 모든 영화 제작을 중단시키고, 이시모토 도키치가 이끄는 문화 계몽 사무소(啓民文化指導所일본어)를 통해 모든 영화 제작 조직의 시설을 압수하여 니폰 에이가샤(니치에이) 자카르타 지부라는 하나의 스튜디오로 통합했다.[14]

인도네시아에서 제작된 대부분의 영화는 일본 관객을 위한 교육 영화와 뉴스릴이었다. 자카르타 지부는 일본 제국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뉴스릴 제작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남쪽의 뉴스", "자바의 영화 뉴스"와 같은 뉴스 연재물이 제작되었다. 일본 뉴스릴은 징집된 로무샤 노동자(ロムシャの生活일본어, 1944), 일본 제국 육군 자원 입대(南の願望일본어, 1944), 인도네시아 어린이들의 일본어 습득(ニッポン語競技会일본어, 1944) 등을 홍보했다.[15]

일본이 후원한 현지 영화 제작은 미미했지만, 니치에이의 인도네시아 영화 산업 점령은 서방에 대한 전략적 승리를 보여주었다. 인도네시아는 일본 제국에서 마지막으로 항복한 지역 중 하나였으며, 니치에이에서 일했던 많은 사람들은 패전 후에도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계속 일했다.[15]

해영 (히나츠 에이타로)은 1945년 한국에서 자바로 이주하여 논란이 된 다큐멘터리 오스트레일리아를 부르며(豪州の呼び声일본어, 1944)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일본 포로 수용소를 긍정적으로 묘사하여 논란이 되었으며, 전쟁 후 네덜란드령 동인도 영화 부대가 반박 영화 ''일본의 선물''(1945)을 제작하게 만들었다. 해영은 전쟁 후 휘융 박사로 개명하고 인도네시아 여성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으며, 1952년 사망하기 전까지 ''하늘과 땅 사이''(1951), ''글래디스 올라 라가''(1951), ''분가 루마 마칸''(1952) 등 세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15]

2. 3. 독립 후 (1945 ~ 1960년대)

수카르노 정권은 영화를 민족주의와 반서구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외국 영화의 수입은 금지되었다. 수카르노 정권이 종식된 다음의 수하르토 정권에서는 사회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검열을 실시해 영화 제작이 규제되었다.[42] 이 시기의 주요 감독으로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활동한(마지막 작품은 1970년작) 초창기 인도네시아 영화의 거장 우스마르 이스마일 감독이 있다.

과거 영화관 메가리아(1960–80년경), 오늘날 시네마 메트로폴 XXI


독립 이후, 수카르노 정부는 영화 산업을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목적에 활용했으며 외국 영화 수입을 금지했다. 수하르토신질서 정권에 의해 수카르노가 전복된 후, 영화는 사회 질서와 수하르토의 사회 장악력을 유지하기 위한 검열 규정을 통해 규제되었다.[16] 서수마트라 출신의 감독 우스마르 이스마일은 자신의 회사 페르피니를 통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인도네시아 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17]

1950년대 후반에는 많은 정치적 측면이 영화 산업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제작뿐만 아니라 배급에도 영향을 미쳤다. 반제국주의 운동의 영화관 방화 위협과 영화 보이콧은 영화관의 수익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1954년, 최초의 인도네시아 슈퍼히어로 영화인 ''스리 아시''가 제작되었다.[19] 1964년경 인도네시아에는 700개의 영화관이 있었으나, 1965년에는 350개로 줄었다. 독립 이후 시대는 9월 30일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이로 인해 제작된 현지 영화가 프로그램 슬롯을 채울 만큼 충분하지 않아 현지 영화관 소유주들에게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경제 위기로 인해 성장하던 산업은 중단되었고 사람들의 구매력은 마비되었지만, 1960년대 말에는 인기 있는 외국 영화 수입 덕분에 영화 산업이 살아남았다.

2. 4. 1980년대: 전성기

1980년대 들어 나가 보나르(1987), 차타탄 시 보이(1989) 등이 성공을 거두며 인도네시아 영화는 전성기를 맞았다. 아리잘이 감독한 인도네시아의 코미디 그룹 와르콥의 코미디 영화들 역시 성공적이었다. 《핀타르핀타르 보도(Pintar-pintar Bodoh)》(1982)나 《마주 크나 문두르 크나(Maju Kena Mundur Kena)》(1984) 등 10대들에게 인기를 끈 작품들도 있었다.[43] 영화가 성공함에 따라 데디 미즈와르, 에바 아르나즈, 리댜 칸다우, 온키 알레산드르, 므리암 벨리나, 라노 카르노, 파라미타 루사디 등 유명 배우들이 많이 나왔다.[20] 영화 ''쬣 냐 디엔''(1988)은 1988년 인도네시아 영화제에서 9개의 시트라상을 수상했고, 칸 영화제에서 상영된 최초의 인도네시아 영화였다.

2. 5. 1990년대: 침체기

1990년대에 외국 영화 수입이 재개되면서 인도네시아 영화의 전성기는 끝나게 되었다. 이 시기 인도네시아 영화는 미국홍콩 등지의 외국 영화와 경쟁해야 했고, 작품의 심미성이 떨어지고 생산량도 줄어들었다. 1990년에는 115편의 영화가 만들어졌으나 1993년에는 37편으로 줄었다.[44] 모조품의 만연과 텔레비전 보급 역시 영화의 질적 저하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 텔레비전 연속극(sinetron)은 영화 산업을 압도하며 성장했고, 람 푼자비(Raam Punjabi)의 멀티비전 플러스(Multivision Plus) 등 텔레비전 연속극 제작사는 호황을 맞았다. 이 시기 제작된 영화는 B급 성인 영화가 주를 이루었다. 1996년에는 33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대부분 성적이거나 폭력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1999년에는 인도네시아 국내에서 단 7편의 영화만 제작되는 지경에 이르렀다.[20]

인도네시아 영화 제작 편수 (1926년~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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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 2000년대: 부활

수하르토 시대의 종언과 레포르마시 운동 하에서, 독립 영화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인도네시아 영화 산업은 차츰 부활하게 된다. 이제 영화는 검열로 표현이 제한되었던 종교, 민족 문제, 사랑 등의 주제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42][16] 2000년2001년의 영화 제작 편수는 각각 단 6편씩에 불과했으나, 2002년 10편으로 다시 증가했고, 해를 거듭함에 따라 영화 제작이 다시 증가하며 영화 산업은 활기를 서서히 되찾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전반의 주목할 만한 영화는 루디 수자르워 감독의 《아다 아파 등안 친타?(Ada Apa dengan Cinta?)》(2002년), 리리 리자 감독의 《엘리아나, 엘리아나(Eliana, Eliana)》(2002년), 토라 수디로 감독의 《아리산!(Arisan!)》(2003년) 등이 있고, 이 시기 인도네시아에서 처음으로 애니메이션도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수카르노와 수하르토의 독재에 저항한 운동가 수혹기의 전기를 다룬 《기(Gie)》(2005년)라는 영화(리리 리자 감독)도 나왔다.

2000년대 후반에는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하눙 브라만툐 감독의 《아얏아얏 친타(Ayat-Ayat Cinta)》(2008년)는 동명의 소설에 기반한 영화로서, 영화 자체에서 새로운 요소는 별로 없었으나 이슬람과 현대적인 로맨스를 적절히 융합하여 처음으로 무슬림들에게 어필한 멜로 영화가 되었다.[22] 2009년 인피넛 프레임워크스는 호민퐁의 소설 《새벽의 노래(Sing to the Dawn)》를 원작으로 한 최초의 장편 3D 애니메이션 《므라이 밈피(Meraih Mimpi)》를 내놓기도 하였다.

2. 7. 2010년대: 다양화와 국제적 인정

2010년-2011년, 외국 영화 수입 과세 강화로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외국 영화가 줄어들었고, 이는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관에서 볼 수 없는 영화가 늘어나면서 해적판 DVD 수요가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45]

2011년 당시 인도네시아 영화 시장은 수준이 높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사샤 그레이, 오자와 마리아, 아오이 소라 등 포르노 배우들이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국내 제작 영화는 대부분 저예산 공포 영화였으며, 속편이 제작되는 경우도 드물었다.[46]

2010년부터 2011년까지 외국 영화에 대한 부가가치세 인상으로 영화관에서 더 이상 많은 외국 영화를 상영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무허가 DVD 구매 증가를 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2011년, 현지에서 상영되지 않는 외국 영화를 보기 위한 최소 비용은 100USD 정도였다.[23]

인도네시아 영화 시장은 C, D, E 등급으로 분류되었으며, 이로 인해 외국 포르노 스타들이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현지 제작 영화는 저예산 공포 영화였다.[24]

그러나 2011년부터 ''레이드''(2011)[25]2014년 속편[26], ''모두스 아노말리''(2012), ''딜레마''(2012), ''러블리 맨''(2012), ''자바 히트''(2013), ''펭아비 세탄''(2017) 등의 영화들이 국제적으로 개봉되면서 현지 제작 영화들이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27]

인도네시아 공포 영화, 특히 조코 안와르 감독의 작품들은 2010년대에 스트리밍 미디어를 통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블랙 매직 퀸'', ''사탄의 노예,'' ''임페티고어''는 동남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민속 공포 영화 흐름으로 인식되었다.[28][29]

이 시기 인도네시아 영화는 산업 생산 및 유통 면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새로운 협회가 등장하고 자바 섬 외곽 지역에 새로운 영화관이 건설되었다.

국내적으로는 2009년 영화 관련 법률 33호의 규정을 통해 현지 영화를 장려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산업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법은 인도네시아 영화를 우선시하고 국내 자원 활용을 장려하며, 수입 영화의 독점을 방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도네시아 영화는 국제 영화제에 더 많이 등장했으며, 다른 국가와의 영화 배급 및 제작 협력도 증가했다.

2. 8. 2020년대: 코로나19와 새로운 기회

코로나19 범유행은 인도네시아 영화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21년 7월,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코로나19 감염률을 기록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고, 정부는 지역 활동 제한(PPKM)을 시행하여 영화 제작 활동이 중단되거나 영화관이 폐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영화 제작자들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 새로운 기회를 찾았다. 스트리밍 서비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독립 제작사들은 Vidio와 Viddsee와 같은 플랫폼을 통해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1]

2020년대 인도네시아 영화는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에드윈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다른 모든 사람은 현금으로 지불한다는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 표범상을 수상했고, 카밀라 안디니 감독의 유니는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서 플랫폼 상을 수상했다. 레가스 바누테자 감독의 페냐린 카야와 막불 무바라크 감독의 자서전 등도 국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2]

3. 영화제

1998년 이래 매년 12월에 열리는 자카르타 국제 영화제(JiFFest)가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영화제 중 하나이다.[33] 이 영화제는 2011년과 2012년에 잠시 중단되었다가 2013년에 마지막으로 개최되었다.[34]

1955년 이래 간헐적으로 열리다 1973년부터 1992년까지 매년 열렸고, 잠시 중단되었다가 2004년에 부활한 인도네시아 영화제(Festival Film Indonesia|인도네시아 영화제id)도 주목할 만하다.

2006년부터는 아시아 영화를 중심으로 하는 족자-넷팩 아시아 영화제(JAFF)가 족자카르타에서 개최되고 있다.[30] 2023년 행사에는 2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참석했으며, 아시아 전역에서 출품된 총 205편의 영화가 상영되었다.[31]

자카르타 영화 주간은 인도네시아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영화 산업 부흥을 지원하기 위해 2021년에 처음으로 개최되었다.[32]

자카르타는 2008년 11월 18일부터 22일까지 제52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APFF)를 개최하기도 했다.[35]

4. 주요 영화 목록

제목연도
Loetoeng Kasaroeng1926
Harimau Tjampa1953
Badai Pasti Berlalu1977
Naga Bonar1987
Kejarlah Daku Kau Kutangkap1987
Tjoet Nja' Dhien1989
Petualangan Sherina2001
Jelangkung2001
Pasir Berbisik2001
Ada Apa Dengan Cinta?2001
Eliana, Eliana2002
Arisan!2003
Belahan Jiwa2005
Janji Joni2005
Gie2005
Denias, Senandung di Atas Awan2006
Jomblo2006
Berbagi Suami2006
Opera Jawa2006
Nagabonar Jadi 22007
Kala2007
The Photograph2007
Love is Cinta2007
Ayat-Ayat Cinta2008
Laskar Pelangi2008
Pintu Terlarang2009
Merantau2009
Sang Pemimpi2009
Garuda di Dadaku2009
Rumah Dara2010
The Raid2011
The Raid 2: Berandal2014


5. 영화 시장

인도네시아의 영화 시장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26년 반둥에는 오리엔탈과 엘리타라는 영화관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7] 1931년 자와브사르에 설립된 알함라 극장은 자카르타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관이었다.[8] 자카르타에는 아스토리아, 그랜드, 메트로폴, 렉스, 캐피톨, 리볼리, 센트럴, 오리온 등 다른 오래된 영화관들도 있었다.[8]

2019년 기준 인도네시아에는 약 2,000개의 스크린이 있었으며, 2020년까지 3,000개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다.[1] 인도네시아 최대 영화관 체인은 21 시네플렉스로, 전국에 영화관을 보유하고 있다. 1987년 설립된 Cinema XXI는 2023년 7월 현재 71개 도시에서 230개 극장, 1,235개 스크린을 운영하며, 향후 5년 안에 2,000개 스크린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Cinema 21, Cinema XXI, The Premiere의 세 가지 브랜드를 통해 다양한 시장을 공략하고 있으며, 2012년부터 Cinema 21 매장은 점차 Cinema XXI로 전환되고 있다.

2006년 첫 지점을 열고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영화관 체인이 된 블리츠 메가플렉스는 2017년 CGV로 브랜드명을 변경했다.[36] 2019년 1월 기준 인도네시아 21개 도시에 57개 극장, 249개 스크린을 운영하고 있으며,[37] 자카르타 그랜드 인도네시아의 메가플렉스는 MURI에 의해 인도네시아 최대 시네플렉스로 선정되기도 했다.

립포 그룹이 시작한 시네맥스(현 시네폴리스)는 2014년 8월 17일 더 플라자 스망기에 첫 영화관을 열었으며, 2018년 기준 인도네시아에서 45개 영화관, 203개 스크린을 운영했다.[1] 2018년에는 향후 10년 안에 85개 도시에 300개 영화관, 2,000개 스크린을 개점할 것으로 예상했다.[38]

2017년 5월 아궁 세다유 그룹이 FLIX 시네마를 개장하여 북 자카르타 PIK 애비뉴에 첫 매장을 열었고, 3개월 후 브카시 그랜드 갤럭시 파크에 두 번째 매장을 열었다. 남 자카르타 District 8 쇼핑 센터와 북 자카르타 몰 오브 인도네시아에도 매장을 개점할 계획이다. 플래티넘, 뉴 스타, BES 시네마, 수르야 유다 시네마, 다코타 시네마 등 소규모 독립 영화관도 다수 존재한다.

인도네시아 공화국 교육문화부 장관 규정 2019년 제34호에 따르면 영화 산업 발전을 위해 영화 관람객 수를 매달 통지해야 하며, 이는 국내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의 상영 시간 및 위치에 따른 관객 수를 포함한다.[39][40]

연도영화 관람객 수
201115,565,132
201218,887,258
201312,716,790
201415,657,406
201634,088,298
201739,135,910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영화 관람 형태는 다양해지고 있으며, 영화관 관객은 전체 영화 관람객의 일부일 뿐이다.[39][40]

5. 1. 영화관

자카르타에 위치했던 La Piazza(이후 La Piazza XXI)의 외부 모습, 2023년 3월에 철거됨


기록에 따르면 1926년 반둥에는 오리엔탈과 엘리타라는 영화관이 있었다.[7] 1931년에 설립된 자와브사르의 알함라 극장은 자카르타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관이었다.[8] 자카르타의 다른 오래된 영화관으로는 아스토리아, 그랜드, 메트로폴, 렉스, 캐피톨, 리볼리, 센트럴, 오리온 등이 있었다.[8]

2019년 기준으로 인도네시아에는 약 2,000개의 스크린이 있었으며, 2020년까지 3,000개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다.[1]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영화관 체인은 인도네시아 전역에 영화관을 보유한 21 시네플렉스이다. 1987년에 설립된 Cinema XXI는 현재(2023년 7월 기준) 71개 도시에서 230개의 극장에 걸쳐 1,235개의 스크린을 운영하고 있으며, 향후 5년 안에 2,000개의 스크린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회사는 서로 다른 시장을 타겟팅하기 위해 Cinema 21, Cinema XXI, The Premiere의 세 가지 별도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 2012년부터 Cinema 21 매장은 점차 Cinema XXI로 개조되고 있다.

또 다른 영화관 체인은 2006년에 첫 번째 지점을 열고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영화관이 된 블리츠 메가플렉스이다. 2017년에는 브랜드 이름을 CGV로 변경했다.[36] 2019년 1월 기준, 인도네시아 21개 도시에 57개의 극장과 249개의 스크린을 개점했다.[37] 자카르타의 그랜드 인도네시아에 있는 이 회사의 메가플렉스는 MURI(인도네시아 기록 박물관)에 의해 인도네시아 최대의 시네플렉스로 꼽힌다.

시네맥스는 립포 그룹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2014년 8월 17일 더 플라자 스망기에 첫 번째 영화관을 열었다. 2018년, 시네맥스(현재 시네폴리스)는 인도네시아에서 45개의 영화관과 203개의 스크린을 운영했다.[1] 2018년에는 향후 10년 안에 85개 도시에 300개의 영화관과 2,000개의 스크린을 개점할 것으로 예상했다.[38]

2017년 5월, 아궁 세다유 그룹은 북 자카르타의 PIK 애비뉴에 첫 번째 매장을 열면서 FLIX 시네마를 개장했다. 3개월 후, 브카시의 그랜드 갤럭시 파크에 두 번째 매장을 열었다. 남 자카르타의 District 8 쇼핑 센터와 북 자카르타의 몰 오브 인도네시아 (CGV 대체)에 매장을 개점할 계획이다.

플래티넘, 뉴 스타, BES 시네마, 수르야 유다 시네마, 다코타 시네마 등 많은 소규모 독립 영화관도 존재한다.

5. 2. 관객

인도네시아 공화국 교육문화부 장관 규정 2019년 제34호는 영화 산업 발전을 위해 영화 관람객 수를 매달 통지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 데이터는 디지털 방식으로 수집되며, 국내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의 상영 시간 및 위치에 따른 관객 수를 포함한다.[39][40]

연도영화 관람객 수
201115,565,132
201218,887,258
201312,716,790
201415,657,406
201634,088,298
201739,135,910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영화 관람 형태는 다양해지고 있으며, 영화관 관객은 전체 영화 관람객의 일부일 뿐이라고 한다.[39][40]

참조

[1] 뉴스 Penonton di Bioskop Membludak, GPBSI Yakin Industri Perfilman Indonesia Akan Membaik https://industri.kon[...] 2023-03-09
[2] 웹사이트 Daftar film berdasarkan tahun "2022" http://filmindonesia[...]
[3] 웹사이트 Table 11: Exhibition – Admissions & Gross Box Office (GBO) https://web.archive.[...] UNESCO Institute for Statistics 2013-11-05
[4] 웹사이트 Indonesia the next biggest box office market https://web.archive.[...] Film Journal 2017-12-11
[5] 웹사이트 BPI – About https://www.bpi.or.i[...] 2022-05-04
[6] 서적 The Guinness Book of Movie Facts & Feats https://archive.org/[...] Abbeville Press 1993-09
[7] 웹사이트 Loetoeng Kasaroeng https://web.archive.[...] Konfidan Foundation 2012-07-21
[8] 뉴스 Potret Bioskop di Jakarta dari Masa ke Masa https://m.liputan6.c[...] 2019-10-14
[9] 뉴스 Rising from a century of lost hopes https://southeastasi[...] 2019-11-19
[10] 뉴스 Cinema XXI to Add 100 Screens in 2024 as Post-Pandemic Moviegoers Increase https://jakartaglobe[...] 2024-05-27
[11] 뉴스 Indonesian film industry in stasis, but for the better https://www.thejakar[...] 2021-09-23
[12] 웹사이트 Coming soon in 2019, a year to watch in Indonesian cinema https://www.theconve[...] 2019-08-18
[13] 서적 Indonesian Cinema: National Culture on Screen https://archive.org/[...] U of Hawaii P 1991
[14] 서적 The Attractive Empire: Transnational Film Culture in Imperial Jap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15] 문서 Baskett, The Attractive Empire.
[16] 서적 Contemporary Asian Cinema, Indonesia: Screening a Nation in the Post-New Order https://archive.org/[...] Berg
[17] 서적 The Oxford History of World Cinema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18] 서적 A Dictionary of Film Studies Oxford University Press
[19] 웹사이트 Trailer Film Sri Asih Dirilis, Siapa Sebenarnya Tokoh Rekaan RA Kosasih Ini? https://seleb.tempo.[...] 2023-01-22
[20] 뉴스 Sepuluh Tahun Terakhir Perfilman Indonesia http://www.kompas.co[...] Kompas 2016-10-31
[21] 웹사이트 Kondisi Perfilman di Indonesia https://web.archive.[...]
[22] 뉴스 Pertemuan Baru Islam dan Cinta http://www.kompas.co[...] 2008-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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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웹사이트 Porn Stars, Clad? They Seem to Appeal to Indonesian Filmgoers https://www.nytimes.[...] 201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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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웹사이트 "The Raid 2: Berandal" Mengguncang Festival Film Internasional https://www.viva.co.[...] Viva 2018-04-06
[27] 웹사이트 'Pengabdi Setan' opens at No. 1 in Hong Kong http://www.thejakart[...] The Jakarta Post 20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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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웹사이트 New wave of horror flicks puts Indonesian cinema on map https://asia.nikkei.[...]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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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웹사이트 Daftar Lengkap Pemenang JAFF 2023 https://www.kompas.c[...] 20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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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웹사이트 Jiffest – Jakarta International Film Festival https://www.filmfest[...] 2022-05-04
[34] 웹사이트 A new chapter for JiFFest https://www.thejakar[...] 2022-05-04
[35] 웹사이트 Quake fails to shake awards https://www.hollywoo[...] 2022-05-04
[36] 뉴스 CGV Blitz Rebrands, Changes Name to CGV Cinemas http://jakartaglobe.[...] The Jakarta Globe 2017-06-09
[37] 뉴스 Kontrak Habis, CGV MoI Ditutup https://properti.kom[...] Kompas 2019-01-15
[38] 뉴스 Cinemaxx Hadir di Mall Living World Pekanbaru http://www.beritasat[...] Berita Satu 2018-09-28
[39] 간행물 Measuring the Economic Capacity of the Indonesian Film https://kafein.or.id[...]
[40] 간행물 The Fragmentation of Indonesian Film Audience http://journalarticl[...]
[41] 서적 The Guinness Book of Movie Facts & Feats Abbeville Press 1993-09
[42] 서적 Contemporary Asian Cinema, Indonesia: Screening a Nation in the Post-New Order Berg 2006
[43] 문서 리댜 칸도우 또는 리댜 칸두일 수 있음.
[44] 웹인용 Kondisi Perfilman di Indonesia https://www.webcitat[...] 2009-10-25
[45] 웹인용 New Import Policy Will Kill Indonesian Film Industry: Noorca https://web.archive.[...] 2016-10-31
[46] 뉴스 Porn Stars, Clad? They Seem to Appeal to Indonesian Filmgoers http://www.nytim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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