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유철도 C51형 증기 기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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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국유철도 C51형 증기 기관차는 1919년부터 1928년까지 총 289량이 제작된 여객용 증기 기관차이다. 시마 야스지로의 지도 아래 아사쿠라 키이치가 설계했으며, 일본 최초로 패시픽형 차륜 배치를 채택했다. 최고 속도 100km/h를 목표로 설계되었으며, 당시 협궤용 증기 기관차 중 세계 최대의 동륜 지름을 가졌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 간선 철도의 주력 기관차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초특급 열차 '쓰바메'의 견인에 사용된 것으로 유명하다. 일부 차량은 중국으로 공출되어 운용되기도 했으며, 1960년대에 폐차되었다. 현재 4량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중 3량은 선두 부분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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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유철도 C51형 증기 기관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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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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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C51형 증기 기관차 |
애칭 | 시고이치 |
형식 | 증기 기관차 |
제조 년도 | 1919년 ~ 1928년 |
제작 회사 | 철도원 하마마쓰 공장 기차 제조 미쓰비시 중공업 |
전체 생산량 | 289량 |
퇴역 년도 | 1966년 |
보존 현황 | 4량 보존 (전량 일본 국내) |
기술 사양 | |
축 배열 | 2C1 (화이트 표기법) |
전체 길이 | 19,994 mm |
전체 높이 | 3,800 mm |
기관차 무게 | 67.75 톤 |
탄수차 무게 | 43.87 톤 |
총 무게 | 111.62 톤 |
연료 | 석탄 |
과열기 전열 면적 | 41.4 m2 |
전체 전열 면적 | 167.8 m2 |
화격자 면적 | 2.53 m2 |
소연관 | 57mm×5500mm×84 |
대연관 | 140mm×5500mm×18 |
변 장치 | 왈샤트식 |
실린더 크기 | 530mm×660mm |
실린더 수 | 단식 2기통 |
축중 | 14.61 톤 |
동륜 직경 | 1,750 mm |
제동 장치 | 공기 브레이크 (C51 102호부터 적용) |
최고 운전 속도 | 95 km/h |
설계 최고 속도 | 100 km/h |
정격 출력 | 1040 마력 |
실린더 인장력 | 11,700 kg |
점착 인장력 | 10,860 kg |
전 증발 전열 면적 | 126.4 m2 |
연관 증발 전열 면적 | 115.0 m2 |
운행 정보 | |
운영 회사 | 철도성 일본국유철도 |
파생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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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탄생의 배경과 구조
C51형 증기 기관차는 시마 야스지로의 지도 아래 아사쿠라 키이치가 설계를 맡아 개발되었다. 여러 나라에서 고속 기관차에 주로 사용되던 '퍼시픽형 차륜 배치'(4-6-2)를 일본에서 설계한 증기 기관차로는 처음으로 채택했다. 설계 시에는 미국에서 수입한 알코사제 8900형을 참고하여 18900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C51형은 상용 최고 속도를 100km/h로 계획하고, 설계 당시 독일 기계학회가 권장하는 동륜의 최대 회전수[20]에서 역산하여 동륜 지름이 1750mm인 협궤용 증기 기관차로서는 세계 최대의 동륜 지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 크기는 이후 일본국유철도의 여객용 대형 증기 기관차의 표준 크기가 되어, 태평양 전쟁 이후의 C62형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
이러한 대직경 동륜을 사용하면 보일러의 중심 높이가 높아져야 하지만, 8900형과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 수입된 볼지히사제 8850형에서 보일러 중심 높이를 2438mm로 해도 볼지히사가 문제 삼지 않았던 점을 참고하였다. 또한, 8850형보다 보일러 중심 높이를 높인 9600형이 좋은 성적을 올린 것 등의 이유로 중심 높이를 8850형보다 약간 낮은 2400mm로 제한하면서도 꽤 높은 수치로 설계했다.[21]
보일러는 통상적인 3관동 구성으로, 관동부의 내경과 화상 면적을 8900형과 동일하게 하고 있지만, 전열 면적의 증대를 도모하여 연관 길이를 5500mm로 8900형에 비해 500mm 연장했으며, 이 값은 이후 국철 제식 증기 기관차의 표준값이 되었다.
대차는 설계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25mm 두께의 판재에 의한 판대차이다.
동륜은 지름 1750mm의 스포크식으로, 28962호기까지는 17개의 스포크를 갖추고 있었지만, 파손 사고 대책으로 28963호기(C51 164)부터는 18개로 늘렸다.
변장치는 와르샤트식으로, 베를리나사제 8800형을 본떠 피스톤 봉을 단축하고 메인 로드를 약간 길게 하여[8], 제2 동륜을 주동륜으로 했다. 8900형은 피스톤 봉을 길게 하여 메인 로드를 단축하는 설계를 채택했다.[7]
탄수차는 원래 17m³ 크기였으나 18940호기(C51 41) 이후에는 석탄 8t, 물 17t을 적재할 수 있는 8-17형이 표준형 탄수차가 되었다. 또한 후기형에서는 C53형과 같이 석탄 탑재량을 12t으로 확대한 12-17형 탄수차도 볼 수 있다. 1930년의 초특급 '쓰바메' 운행 전용 견인기로 지정된 C51 171, 208, 247~249호기는 도쿄-나고야 간 무정차 운행을 위해 탄수차를 수조 용량이 큰 C52형의 20m³ 후기형 탄수차로 교체하여, 물을 30t 적재할 수 있는 수조차를 달고 '쓰바메'를 운행했다. 탄수차 뒤에 미키 20형 수조차를 추가로 연결하기 때문에, 탄수차와 수조차 사이에 급수관을 설치하고 탄수차 상부에는 통풍관과 천장을 만드는 개조가 실시되었다.[22][23] 모두 강판 조립식 섀시, 판자 스프링 대차를 장착했다.
28901호기(C51 102) 이후로는 공기 브레이크 장치가 설치되었다. 보행판을 2단으로 만들어 보행판과 동륜 사이에 공간을 두었다.
C51형은 광궤 개궤론이 다루어지고 있던 이 시기, 개궤를 추진하던 시마 야스지로 등 공무국 기술진이 협궤[24]의 능력의 한계를 나타내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궤론자였던 시마 야스지로는 당초 장래 광궤 개축이 이루어졌을 때 화실을 확장할 수 있고, 견인 시 동륜의 축중이 일시적으로 증가하는 이점[12] 때문에 종륜이 없는 기관차를 선호하여 계획도를 그리기도 했다. 시마 야스지로는 8620형의 설계 견본으로서 8700·8800·8850·8900의 4형식을 수입했을 때, 알코사제의 8900형이 제조사 측의 주장에 따라 종륜이 있는 패시픽으로 사양 변경된 것에 항의하기도 했다. C51은 그 후 정계의 변화로 광궤 개간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화실 확대를 위해 종륜이 있는 8900형을 기본으로 하여, 8850형의 설계를 참고하면서 일본식으로 다시 설계한 것이었다.
2. 1. 개발 배경
시마 야스지로의 지도 아래 9600형 설계 업무를 담당한 아사쿠라 키이치가 설계 주임으로서 개발이 이루어졌다.여러 나라의 고속 기관차에 많이 사용되던 '퍼시픽형 차륜 배치'(4-6-2)를 일본이 설계한 증기 기관차로서는 처음으로 채용했다. 설계 시에는 미국에서 수입한 알코사제 8900형을 참고했기 때문에 8900형에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18900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C51형은 상용 최고 속도를 100km/h로 계획하고, 설계 당시 독일의 기계학회가 권장하는 동륜의 최대 회전수[20]에서 역산하여, 설계 당시 동륜 지름이 1,750mm인 협궤용 증기 기관차로서는 세계 최대의 동륜 지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 크기는 이후 일본국유철도의 여객용 대형 증기 기관차의 표준 크기가 되어, 태평양 전쟁 이후의 C62형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
이러한 대직경 동륜을 사용하면 보일러의 중심 높이가 높아져야 하지만, 8900형과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 수입된 볼지히사제 8850형에서 보일러 중심 높이를 2,438mm로 해도 볼지히사가 문제 삼지 않았던 점을 참고하였다. 또한, 8850형보다 보일러 중심 높이를 높인 9600형이 좋은 성적을 올린 것 등의 이유로 중심 높이를 8850형보다 약간 낮은 2,400mm로 제한하면서도 꽤 높은 수치로 설계했다.[21]
동륜은 앞서 말한 대로 지름 1,750mm의 스포크식으로, 28962호기까지는 17개의 스포크를 갖추고 있었지만, 스포크 절단 사고의 대책으로 28963호기(C51 164)부터는 18개로 늘어났다.
탄수차는 원래 17m³ 크기였으나 18940호기(C51 41) 이후에는 석탄 8t, 물 17t을 적재할 수 있는 8-17형이 표준형 탄수차가 되었다. 또한 후기형에서는 C53형과 같이 석탄 탑재량을 12t으로 확대한 12-17형 탄수차도 볼 수 있다. 1930년의 초특급 '쓰바메' 운행 전용 견인기로 지정된 C51 171, 208, 247~249호기는 도쿄-나고야 간 무정차 운행을 위해 탄수차를 수조 용량이 큰 C52형의 20m³ 후기형 탄수차로 교체하여, 물을 30t 적재할 수 있는 수조차를 달고 '쓰바메'를 운행했다. 탄수차 뒤에 미키 20형 수조차를 추가로 연결하기 때문에, 탄수차와 수조차 사이에 급수관을 설치하고 탄수차 상부에는 통풍관과 천장을 만드는 개조가 실시되었다.[22][23] 모두 강판 조립식 섀시, 판자 스프링 대차를 장착했다.
28901호기(C51 102) 이후로는 공기 브레이크 장치가 설치되었다. 보행판을 2단으로 만들어 보행판과 동륜 사이에 공간을 두었다.
C51형은 광궤 개궤론이 다루어지고 있던 이 시기, 개궤를 추진하던 시마 야스지로 등 공무국 기술진이 협궤[24]의 능력의 한계를 나타내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시마 야스지로는 8620형의 설계 견본으로서 8700·8800·8850·8900의 4가지 형식을 수입했을 때, 알코사제의 8900형이 제조사 측의 주장에 따라 종륜부가 퍼시픽 사양으로 변경되었던 것에 항의하려 했다. C51은 그 후 정계의 변화로 광궤 개간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화실 확대를 위해 종륜이 있는 8900형을 기본으로 하여, 8850형의 설계를 참고하면서 일본식으로 다시 설계한 것이었다. 이렇게 완성된 C51의 성능은 매우 뛰어나, 당시의 일본용 증기 기관차로서는 철도원 수뇌진도 "이 정도의 기관차가 있으면 협궤로 충분하다"고 하여, 결국은 광궤론자들이 주류를 이루던 공무국이 스스로 개궤를 취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2. 2. 주요 특징
시마 야스지로의 지도 아래, 9600형의 설계를 담당했던 아사쿠라 키이치가 설계 주임으로 개발을 진행했다.C51형은 여러 국가에서 고속 기관차에 선호되는 "패시픽형 축 배치"(2C1=선륜 2축, 동륜 3축, 종륜 1축)를 국산 설계의 증기 기관차로서는 처음으로 채용했으며, 설계에는 미국에서 수입한 알코사제 8900형을 참고했다.[20] 상용 최고 속도를 100km/h로 계획했으며, 설계 당시 독일의 기계 학회가 권장하는 동륜의 상용 최대 회전수[21]로부터 역산하여 1,750mm라는, 설계 당시 협궤용 증기 기관차에서는 세계 최대의 동륜 직경을 갖게 되었다. 이 동륜 크기는 이후 국철의 여객용 대형 증기 기관차의 표준 크기가 되었으며, 태평양 전쟁 후의 C62형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
이러한 대직경 동륜을 채용하면 보일러의 중심높이가 높아져야 하지만, 8900형과 동시기에 독일에서 수입된 볼지히사제 8850형에서 볼지히사의 권장에 따라 보일러 중심높이를 2,438mm로 한 것이 문제가 없었던 점을 참고하여, 8850형을 약간 밑도는 2,400mm로 억제하면서도 높은 보일러 중심높이를 허용하고 있다.[21]
동륜은 지름 1,750mm의 스포크식으로, 28962호기까지는 17개의 스포크를 갖추었지만, 스포크 절단사고 대책으로 28963호기(C51 164)부터는 18개로 증강되었다.
탄수차는 당초 17m³형이었으나, 18940호기(C51 41) 이후에는 석탄 8t, 물 17t을 적재할 수 있는 8-17형이 표준형 탄수차가 되었다. 후기형에서는 C53형과 같이 석탄 탑재량을 12t으로 확대한 12-17형 탄수차도 볼 수 있다. 1930년의 초특급 「쓰바메」 운행 전용 견인기로 지정된 C51 171, 208, 247~249호기는 도쿄-나고야간 무정차 운행을 위해 탄수차를 수조 용량이 큰 C52형의 20m³ 후기형 탄수차로 교체하고, 물을 30t 적재할 수 있는 수조차를 연결하여 「쓰바메」를 운행했다. 탄수차 뒤에 수조차를 증결하는 관계상, 탄수차와 수조차 사이에 급수관을 설치하고 탄수차 상부에는 통풍관과 천장을 만드는 개조가 실시되었다.[22][23] 모두 강판 조립식 섀시, 판자 스프링 대차를 장착했다.
28901호기(C51 102) 이후로는 공기 브레이크 장치가 설치되었다. 보행판을 2단으로 만들어 보행판과 동륜 사이에 공간을 두었다.
C51형은 광궤개궤론이 다루어지고 있던 이 시기, 개궤를 주장하는 시마 야스지로 등 공무국 기술진이 협궤[24]의 능력의 한계를 나타내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2. 3. 성능
시마 야스지로의 지도 아래, 9600형의 설계를 담당했던 아사쿠라 키이치가 설계 주임으로 개발을 진행했다.여러 국가에서 고속 기관차에 선호되는 "패시픽형 축 배치"(2C1=선륜 2축, 동륜 3축, 종륜 1축)을 국산 설계의 증기 기관차로서는 처음으로 채용했으며, 설계 시에는 미국에서 수입한 알코사제 8900형의 콜식 1축심 외측 축상식 종대차를 참고했다. 8900형에 이어 18900형이라는 형식명이 주어졌다.
C51형은 상용 최고 속도를 100km/h로 계획했으며, 설계 당시 독일의 기계 학회가 권장하는 동륜의 상용 최대 회전수[20]로부터 역산하여 1,750mm라는, 설계 당시 협궤용 증기 기관차에서는 세계 최대의 동륜 직경을 도출했다. 이 동륜 크기는 이후 국철의 여객용 대형 증기 기관차의 표준 크기가 되었으며, 태평양 전쟁 후의 C62형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대직경 동륜을 채용하면 보일러의 중심 높이가 높아지지만, 8900형과 동시기에 독일에서 수입된 볼지히사제 8850형에서 볼지히사의 권장에 따라 보일러 중심 높이를 2,438mm로 설정해도 문제가 없었던 점과, 이를 참고하여 8850형보다 보일러 중심 높이를 높게 설계한 9600형이 좋은 성적을 거둔 점 등을 고려하여, 8850형보다 약간 낮은 2,400mm로 억제하면서도 높은 보일러 중심 높이를 채택했다.[21]
보일러는 통상적인 3관동 구성으로, 관동부의 내경과 화상 면적은 8900형과 동일하게 유지하면서 전열 면적을 늘리기 위해 연관 길이를 5,500mm로 8900형에 비해 500mm 연장했다. 이 값은 이후 국철 제식 증기 기관차의 표준값이 되었다.
대차는 설계 당시 일반적인 25mm 두께의 판재를 사용한 판대차이다.
동륜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750mm 직경의 스포크식으로, 28962호기까지는 17개의 스포크를 갖추었지만, 파손 사고 대책으로 28963호기(후의 C51 164) 이후에는 18개로 늘렸다.
변장치는 와르샤트식으로, 베를리나사제 8800형을 본떠 피스톤 봉을 단축하고 메인 로드를 약간 길게 하여[8], 제2 동륜을 주동륜으로 했다. 8900형은 피스톤 봉을 길게 하여 메인 로드를 단축하는 설계를 채택했다.[7]
텐더는 당초 상단을 직선으로 통과시킨 17m3형이었지만, 18940호기(후의 C51 41) 이후에는 석탄 8t, 물 17t을 적재 가능한 8-17형이 표준형 텐더가 되었다. 또한, 후기형에서는 C53형과 같이 석탄 탑재량을 12t으로 확대한 12-17형 텐더도 사용되었다. 1930년 초특급 "쓰바메" 운행 개시 시 전용 견인기로 지정된 C51 171, 208, 247 - 249는 도쿄 - 나고야 간 무정차 운행을 위해 텐더를 수조 용량이 큰 C52형의 20m3 후기형으로 교체하고, 물 30t을 적재 가능한 물탱크차("쓰바메" 운용 시에는 C51 247 - 249의 번호가 부여되었다. 후의 미키20형)를 추가 연결했다. 이 때문에 물탱크차와의 사이에 급수관, 텐더 상부에는 통풍관 및 덮개 틀을 설치하는 개조가 실시되었다.[22][23] 모두 강판 조립식 대차, 판 스프링의 보기 대차를 장착했다.
28901호기 (C51 102) 이후에는 공기 브레이크 장치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보행판을 2단으로 하여 보행판과 동륜 사이에 공간을 만들고, 제2 동륜 위 보행판 아래에 공기통을 장착했으며, 운전실 바닥에서 보행판까지의 거리도 위로 연장되어 높아졌다.
이렇게 완성된 C51형의 성능은 당시 국산 또는 일본 내에서 사용되던 증기 기관차로서는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8900형과 대등한 수준으로 평가되었다. 철도원 수뇌부는 "이 정도의 기관차가 있다면 협궤로 충분하다"라고 평가했으며, 결국 광궤론자가 주류였던 공무국 스스로 개궤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가 되었다.
3. 제조
1919년부터 1928년까지 철도원(철도성) 하마마쓰 공장, 기샤세이조(오사카), 미쓰비시 중공업(고베)에서 총 289량이 제작되었다.
최초의 18량은 국철 각 공장에서 부품을 분할 제조하고 하마마쓰 공장에서 최종 조립을 하는 특이한 제조법을 채택하였다[25]. 이후 성능시험 등 여러 가지 실험을 거쳐 민간 제조업체에서 양산이 시작되었다. 양산형 중 대부분인 249량은 기샤세이조가 독점적으로 제조했으며, 1926년부터 미쓰비시 중공업이 22량을 제조했다.
4. 운용
C51형 증기 기관차는 견인력, 고속 성능, 신뢰성이 우수하여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주요 간선의 주력 기관차로 활약했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초특급 "쓰바메"의 도쿄-나고야 구간을 견인했으며, C51 239는 어전 열차 전용 기관차로 지정되어 쇼와 천황 즉위식 등에서 104회 견인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수송량 증가와 객차 중량화로 인해 후속 기종(C53형, C59형 등)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지방 간선으로 운용 범위가 변경되었으며, 일부는 중국으로 공출되었다.
전후에도 지방 간선 여객 열차 견인에 투입되었으나, 동력 근대화 계획에 따라 1965년 운행이 중단되었고, 1966년 2월 C51 251을 마지막으로 폐차되었다. 말년에는 잦은 개조로 원형을 유지한 차량을 찾기 어려웠다.[27]
1939년 대일본제국 육군의 요청으로 16량이 표준궤로 개조되어 중국 화중 철도로 보내졌다. 이들은 난징-상하이 간을 주로 운행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도 운행되다가 1990년에 소멸되었다.[26]
4. 1. 일본 내 운용
C51형 증기 기관차는 견인력, 고속 성능, 신뢰성에서 높은 수준을 달성하여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주요 간선의 주력 기관차로 이용되었다.
1930년에서 1934년까지 초특급 "쓰바메"의 도쿄 - 나고야 구간 견인에 사용되었다. C51 239는 C51 236과 함께 어전열차 전용 기관차로 지정되어, 1928년 11월 쇼와 천황의 즉위식으로부터 1953년 5월 지바현 식목제까지 견인 횟수 104회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수송량 증가와 중량이 많이 나가는 강철제 객차의 제식화 등으로 인해, 후속기인 C53형이나 C59형 등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1930년대 이후 도카이도 · 산요 본선의 우등열차 운행에서는 물러나 지방 간선 운행으로 전환하였다.
1939년에는 육군의 요구에 따라 16량(C51 8·28·30·33 ~ 35·88·95·96·116·130 ~ 132·173·175·178, 모두 주산식 급수 가열기를 장비)을 표준 궤간에 맞게 개조한 후 중국에 보냈다. 이들은 주로 양쯔강 이남을 중심으로 난징 - 상하이 간에서 운행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도 존재하여 1951년 '파시'가 되고, 훗날 SL9형이 되었지만, 1990년에는 차적조차 존재하지 않고 소멸되었다.[26]
전후에도 적당한 크기 덕분에 지방 간선의 여객 열차 견인차로 사용되었지만, 노후화 때문에 동력 근대화 계획이 실행되자 빠르게 폐차가 진행되어 1965년에 모든 차량이 운행을 중단했고, 1966년 2월 C51 251의 폐차가 마지막이었다.
운용 후기에 개조가 매우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27], 말기에는 원형에 가까운 스타일을 유지한 차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4. 2. 중국 대륙으로 공출
1939년, 육군의 요청에 따라 C51 8, 28, 30, 33~35, 88, 95, 96, 116, 130~132, 173, 175, 178호(총 16량, 모두 스미야마식 급수 가열기 장착)가 표준궤 사양으로 개조된 후 공출되어 중국의 화중 철도로 보내졌다.[17] 이 기관차들은 파시나형이라고도 불렸으며,[18] 난징·상하이·항저우의 각 기관구에 배속되어[17] 장강 남쪽 지역을 중심으로 난징-상하이 간에서 운행되었다.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도 계속 운행되어 1951년에는 ㄆㄒ9형(주음 부호 파시)이 되었고, 이후 SL9형(승리 9형)이 되었지만, 1990년에는 차적이 소멸되었다.[19] 현지에서의 차량 수가 적었던 탓에, 보수 면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조기에 폐차된 것으로 추측된다.[17]
5. 시험 개조기
제조 직후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연소율과 효율 개선을 목적으로 각 관리국별로 다양한 개조가 이루어진 차량이 존재했다. 모든 차량은 시험 기간이 종료된 후 원형으로 되돌아갔다.
- 연실 연장: 연소 효율을 높이기 위해 C51 13, 33이 500mm, C51 133, 155, 159가 800mm씩 연실을 연장하는 개조를 받았다.
- 2개 굴뚝: 쇳가루 비산 방지를 위해 C51 50, 78, 143, 246이 2개 굴뚝으로 개조되었다. 덮개로 인해 외관상으로는 1개 굴뚝으로 보인다.
- 경사 굴뚝: 배연 효과를 높이기 위해 C51 78, 121, 182, 192, 270이 경사 굴뚝으로 개조되었다. C51 78은 2개 굴뚝에서 개조되었다.
- 반 유선형화: C51 61이 전면, 운전실, 탄수차 주변의 반 유선형화 개조를 받았다.
- 집연 · 배연 장치 부착: C51 135가 굴뚝 전면에 경사판, C51 130이 굴뚝 후면에 반사판, C51 176이 굴뚝 상부에 경사 원통판, C51 278이 굴뚝 양쪽에서 후부에 걸쳐 배연 장치를 부착하는 개조를 받았다.
- 연소실 부착: C51 184가 연소실을 부착하는 개조를 받았다.
6. 제원
※최종 8량만 처음부터 C51로 완성, 나머지는 18900형으로 완성된 후 개번
38917 - 38939, 38944 - 38964,
38969 - 38980
38965 - 38968, C51 282 - 289 (38981 - 38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