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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더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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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위더르해는 네덜란드 북부에 위치했던 내해로, 여러 차례의 홍수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형성되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플레보 호수라고 불렸으며, 중세 시대에는 알메르 호수로 불리다가 1170년의 홍수 이후 자위더르해로 명칭이 바뀌었다. 자위더르해는 암스테르담 등 주변 도시의 발전을 이끌었지만, 잦은 홍수 피해를 입었고, 20세기 초 대규모 간척 사업인 자위더르해 간척 사업을 통해 아이설 호수로 바뀌었다. 이 사업은 코르넬리스 렐리의 주도로 진행되었으며, 아플슬라위트데이크 건설과 여러 개의 폴더 조성을 통해 국토를 확장하고 농경지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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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더르해
개요
1665년의 자위더르 해 지도
1665년의 자위더르 해 지도
위치네덜란드
상태이전의 내해, 현재는 아이셀호와 바덴해로 분리됨
면적약 5,000 제곱킬로미터
최대 깊이4 ~ 5 미터
소멸 시기1932년 (아이셀호가 됨)
역사
형성 원인13세기 이후 해수면 상승과 폭풍 해일의 빈번한 발생
기존의 담수호였던 Lacus Flevo가 염수호로 변화
주요 사건1282년 성 루치아 홍수: 수많은 마을이 침수되고 자위더르 해 형성 가속화
1916년 홍수: 자위더르 해 방조제 건설의 결정적 계기
간척 사업자위더르 해 계획: 1920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간척 사업
노르도스트폴더르, 플레볼란트, 노르트홀란트 일부 지역 간척
자위더르 해 계획 (Zuiderzee Works)
목적홍수 방지
새로운 농경지 확보
담수 자원 확보
주요 시설아프슬라위트데이크 (Afsluitdijk): 자위더르 해를 아이셀호와 분리하는 방조제
폴더 (Polder): 간척으로 조성된 땅
결과아이셀호 형성
새로운 농경지 및 주거 지역 확보
네덜란드의 국토 확장
현재 상태
아이셀호자위더르 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담수호
네덜란드의 중요한 담수 자원
다양한 수상 스포츠 및 레크리에이션 활동 장소
바덴해자위더르 해의 북쪽 일부가 남은 갯벌 지역
중요한 철새 도래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문화적 중요성
어업자위더르 해는 한때 중요한 어업 지역이었으나, 간척 사업으로 인해 어업 환경이 변화함
민속자위더르 해 주변 지역에는 독특한 문화와 전통이 남아 있으며, 어업과 관련된 민속 문화가 발달함
지리
주요 섬위링언, 스호클란트, 우르크 (현재는 육지와 연결됨)
기타
관련 용어자위더르 해 계획 (Zuiderzeewerken)
아프슬라위트데이크 (Afsluitdijk)
아이셀호 (IJsselmeer)
마르케르호 (Markermeer)
폴더 (Polder)

2. 역사적 배경



조이데르 해는 원래 북해와 분리된 호수였다. 고대 로마 제국 시대에는 플레보 호(Flevo Lacus)라고 불렸으며, 여러 강이 이 호수로 흘러들어 블리를 통해 북해로 나갔다.[2] 로마 시대에는 네덜란드 북부 해안선이 현재의 서프리슬란트 제도 부근에 있었고, 그 안쪽은 습지였다. 현재 아이설 호 남부에 해당하는 곳에는 플레보 호수가 있었는데, 이는 후의 자위더르해보다 작았다. 플레보 호수와 북해 사이는 습지로 막혀 있었으나, 호안의 이탄이 파도에 침식되면서 호수는 점차 커졌다.

중세 초기, 해수면 상승과 폭풍으로 플레보 호수는 알메르(Almere) 호수라는 만으로 확대되었다. 12세기와 13세기에는 대홍수로 해안선이 크게 변했다. 1282년의 홍수는 텍셀 근처의 방파제를 뚫어 암스테르담 등의 도시들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5]

이후 여러 차례의 홍수와 해수면 상승으로 알메르 호수는 "남쪽 바다"라는 뜻의 자위더르해가 되었다. 1170년 만성절 홍수와 1287년 성 루치아 홍수로 큰 피해가 발생했고, 자위더르해는 북해와 연결되었다.[2] 이로 인해 암스테르담은 항구 도시로 성장했다.

1932년 아프슬라위트데이크 완공으로 자위더르해는 북해와 격리되었고, 유입 하천의 물로 인해 점차 담수호가 되어 소멸되었다. 현재는 예전 자위더르해 수역을 아이설 호라고 부른다.

2. 1. 플레보 호수 (Flevo Lacus)



고대 시대에 이 지역에는 이미 호수가 있었으며, 로마 제국의 저술가들은 이를 플레보 호(Flevo Lacus[2])라고 불렀다.[1] 베흐트, 엠, 이셀을 포함한 여러 하천이 이 호수로 흘러들었다. 호수 자체는 블리를 통해 북해로 흘러나갔다 (라틴어: ''Flevus'').[2]

2000년 전 로마 제국 시대에는 네덜란드 북부 해안선은 현재의 서프리슬란트 제도 부근에 있었고, 그 안쪽의 현재 바덴 해가 된 부분은 습지였다. 현재 아이설 호 남부에 해당하는 곳에는 큰 호수가 있었고, 로마인들은 "Lacus Flevo"(플레보 호수)라고 불렀다. 이것은 후의 자위더르해보다 작았고, 플레보 호수와 북해 사이는 많은 하천과 호수가 펼쳐진 습지로 막혀 있었다. 그러나 플레보 호반의 피트(이탄)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호안은 파도에 침식되기 쉬웠고, 중세까지 호수는 커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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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름은 인도유럽어족 어근 ''*plew-'' "흐르다"에서 유래되었으며,[3][4] 로마의 지리학자 폼포니우스 멜라가 이 지역을 묘사하면서 전해졌다. 서기 44년에 폼포니우스는 지리에 관한 논문에서 ''Flevo Lacus''에 대해 "라인 강의 북쪽 지류는 플레보 호수로 넓어지며, 같은 이름의 섬을 둘러싸고, 그 후 평범한 강처럼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라고 썼다.

20세기 후반에 플레보폴더와 새로운 주 플레볼란트는 오래 전에 존재했던 호수의 이름을 따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호수들은 부드러운 이탄 해안을 점차 침식시키고 확장되었다(이 과정은 물늑대라고 알려져 있다).[2]

2. 2. 알메르 (Almere) 호수

중세 초 해수면 상승과 폭풍으로 인해 해안 지역이 침식되면서, 플레보 호수는 알메르 호수라고 불리는 만(灣)으로 확대되었다. 알메르는 "장어 호수"를 의미하며, 당시 담수 또는 약간의 기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 12세기와 13세기에 발생한 대홍수는 해안선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1282년의 재앙적인 홍수는 텍셀 근처의 방파제를 뚫어 암스테르담과 같은 도시들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5]

네덜란드 서기 800년경의 지역. 당시 이 호수는 알메르라고 불렸다.


알메르 호수가 자위더르 해로 변화하는데 영향을 준 사건은 다음과 같다.

  • 중세 온난기로 인한 해수면 상승
  • 프리지아인족이 북해와 알메르 호수를 연결하는 강인 플리에 근처의 서프리슬란트에서 이탄을 채굴한 사건.
  • 1170년의 만성절 홍수와 1287년 성 루시아 홍수


12세기, 1219년과 1282년에는 높은 조수와 폭풍으로 인해 플리에의 서쪽 제방이 침식되어 넓은 지역이 물에 잠겼다. 스타보렌, 텍셀, 메뎀블리크 사이의 땅은 1170년경에 쓸려 내려갔고, 스타보렌과 엔크하위젠 사이의 수로는 1400년경에 나타났다.[2]

현대 도시 알메르는 이 호수의 이름을 기념하여 1984년에 명명되었다.

2. 3. 조이데르해 (Zuiderzee)의 형성

중세 시대에 발생한 여러 차례의 홍수와 해수면 상승은 알메르 호수를 자위더르해, 즉 "남쪽 바다"라고 불리는 내해(內海)로 변모시켰다. 특히 1170년 만성절 홍수와 1287년 성 루치아 홍수는 큰 피해를 입혔으며, 이로 인해 자위더르해가 북해와 연결되었다.[2] 이 재앙은 암스테르담이 만의 남서쪽 끝에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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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 해수면 상승과 겨울철 북해의 거친 날씨로 인해 네덜란드 북부 해안의 사구와 이탄지가 침식되기 시작했고, 사구 뒤의 습지대는 바다로 변했다. 플리 호수는 "Almere"(알메레)라는 만으로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큰 석호 정도였다.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해수면 상승이 두드러지면서, 북홀란트를 잇따라 덮친 큰 폭풍·고조·홍수로 해안가 땅이 수몰되고 이탄지가 쓸려 내려갔으며, 플레보 호수와 바다 사이의 하구도 넓어졌다.

1170년 11월 1일부터 2일에 걸친 "만성절의 홍수"(Allerheiligenvloed)로 고조가 사구를 넘어, 해수가 "Creiler Woud"라는 삼림 지대를 통과하여 플레보 호수로 흘러 들어갔다. 이 홍수로 사구 뒤에는 바덴 해가 형성되었고, 플레보 호수는 "자위더르해"로 변했으며, 파도에 쓸려나간 이탄지나 삼림 지대는 다시 육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1196년 성 니콜라스의 홍수(Sint-Nicolaasvloed)로 1170년에 열린 해협이 확대되어, 프리슬란트 서부의 광대한 이탄지가 바다로 변했다. 1212년에는 6만 명이 희생되었고, 1219년 1월 16일 성 마르켈루스의 홍수(Sint-Marcellusvloed)에서도 36,000명이 희생되었다. 1282년 대홍수로 현재 테셀 섬 부근의 사구가 파괴되어, 바덴 해 및 자위더르해가 확대되었다.

1287년 12월 14일, 북해의 폭풍으로 저지대에 해수가 덮쳐 5만 명에서 8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성 루치아 축일의 홍수, Sint-Luciavloed). 이 홍수로 침몰한 땅 대부분은 이후에도 해수가 물러나지 않아 그대로 바덴 해 혹은 자위더르해의 일부가 되었다. 서프리슬란트 제도의 Griend 섬은 해중에 가라앉았고, 현재는 작은 사주만이 해면에 남아있다. 자위더르해가 확대되어 북해와 연결되면서, 암스텔 강 연안의 어촌 암스테르담은 자위더르해를 거쳐 북해로 나가는 항로가 열려, 발트 해 교역로와 연결되는 교역 도시로 성장했다.

3. 자위더르해 시대의 생활상

15세기 이후 해안선에 제방(다이크)이 축조되면서 자위더르해의 확장은 멈추었지만, 북해에서 폭풍이 불어올 때마다 해수가 유입되어 잦은 홍수와 선박 침몰 사고가 발생했다. 1421년 11월 18일 심야부터 19일 새벽까지 발생한 1421년의 성 엘리자베트 홍수는 72개 마을을 침수시키고 1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를 냈다.[2]

자위더르해 연안에는 많은 어촌이 형성되었고, 그중 일부는 해상 무역으로 발전하여 성곽 도시가 되었다. 오버레이설주의 캄펜, 홀란트주의 암스테르담, 호른, 엔크하위젠 등이 그 예이다. 이들 도시는 처음에는 발트해, 잉글랜드, 한자동맹과의 무역을 시작으로, 대항해 시대에는 전 세계로 무역로를 확장하여 네덜란드 식민지 제국 건설에 기여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무역이 쇠퇴하자 많은 항구 도시가 어업으로 돌아섰고, 20세기 관광업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자위더르해와 북해에서의 어업이 주 산업이었다.

자위더르해 내부에는 비에링겐, 위르크 섬, 스호클란트 섬, 마르켄의 4개 섬이 있었다. 이 섬들의 주민들은 어업을 주업으로 삼았다.[2] 그러나 파도의 침식으로 해마다 면적이 축소되는 것에 시달렸고, 스호클란트 섬은 19세기에 주민이 떠나 버려졌다. 이 섬들은 20세기 후반 간척지의 확대로 인해 모두 본토의 일부가 되었거나 본토와 도로로 연결되었다.

4. 자위더르해 간척 사업 (Zuiderzeewerken)

자위더르해는 잦은 홍수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다. 1287년 성 루치아 홍수는 기록상 5번째로 큰 홍수로 5만~8만 명이 사망했고, 1421년 성 엘리자베스 홍수 때는 72개 마을이 침수되고 약 1만 명이 사망했다. 이러한 피해는 자위더르해를 불안정한 '물의 용광로'로 만들었다.[7]

1667년부터 간척지 조성 논의가 시작되었고, 1916년 대홍수를 계기로 코르넬리스 렐리의 주도 하에 1919년부터 본격적인 간척 사업이 추진되었다. 렐리는 이전부터 이 사업을 꾸준히 주장해왔던 인물이다. 20세기 전반에는 북해의 폭풍으로부터 자위더르해 연안의 토지를 보호하고 간척지를 확대하기 위해 거대한 아플슬라위트데이크가 건설되었다.

1928년 암스테르담 하계 올림픽에서는 요트 경기 중 6 미터 및 8 미터 경기가 자위더르해에서 개최되기도 했다.[6]

4. 1. 아플슬라위트데이크 (Afsluitdijk) 건설

코르넬리우스 렐리의 계획에 따라 1927년과 1932년 사이에 30km 길이의 제방(아플슬라위트데이크)이 건설되면서 자위더르해가 갇혔다. 이 댐의 건설은 1916년 1월 홍수로 인해 가속화되었다. 자위더르해를 폐쇄하려는 계획은 30년 전에 세워졌지만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7] 1932년 아플슬라위트데이크가 완공되면서 자위더르해는 아이설 호가 되었고, 바깥 부분은 바덴 해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자위더르해를 막는 댐 사업은 구상되었으나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했고, 1916년 1월의 대홍수가 건설 승인의 계기가 되었다. 오랫동안 건설을 주장해 온 토목 기술자이자 정치가인 코르넬리스 렐리(1854년 - 1929년)의 지휘 아래, 1919년부터 자위더르해 개발이 시작되었다. 1932년 아플슬라위트데이크 완성 후 자위더르해는 담수화되어 아이설호가 되었다.

4. 2. 폴더(Polder) 조성

코르넬리스 렐리의 계획에 따라 1927년과 1932년 사이에 30km 길이의 제방(아플슬라위트데이크)이 건설되면서 자위더르해는 갇혔다.[7] 이 댐의 건설은 1916년 1월 홍수로 인해 가속화되었다. 자위더르해를 폐쇄하려는 계획은 30년 전에 세워졌지만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7] 1932년 아플슬라위트데이크가 완공되면서 자위더르해는 아이설 호가 되었고, 그 후 댐, 펌프, 기타 수문 기술을 사용하여 간척지를 건설하여 주로 농업용으로 넓은 토지를 물에서 간척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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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더르해 간척 사업의 일부가 주석된 현대 지역의 위성 사진


1980년대 초까지 4개의 간척지가 건설되었다. 1930년에 건설된 뷔링에르메이르, 1942년에 건설된 북동 폴더, 1957년에 건설된 오스트렐리크 플레볼란트, 1968년에 완공된 쥐델리크 플레볼란트이다.[8] 다섯 번째 간척지인 마르케바르트는 1963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부분적으로 완공되었지만 1980년대 중반에 중단되었다.[8] 댐, 제방 및 간척지의 이러한 시스템을 통틀어 자위더르해 간척 사업이라고 한다.[9]

19세기 후반부터 자위더르해를 막는 댐 사업은 구상되었으나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했고, 건설이 승인되는 계기가 된 것은 1916년 1월의 대홍수였다. 오랫동안 건설을 주장해 온 토목 기술자이자 정치가인 코르넬리스 렐리(1854년 - 1929년)의 지휘 아래, 1919년부터 자위더르해 개발이 시작되었다. 1932년 아플슬라위트데이크 완성 후 자위더르해는 담수화되어 아이설 호가 되었고, 호수 내부에 방조제가 축조되어 뷔링에르메이르, 북동 폴더, 플레볼란트 동부 및 남부의 4개의 폴더(간척지)가 탄생하여 "플레볼란트주"가 새롭게 탄생했다. 최초 계획에서는 마르커르 호수(아이설호 남서부의 수면)도 간척할 예정이었으나 이 계획은 2000년에 무기한 연기되었고, 1986년 플레볼란트 남부 폴더 완성으로 자위더르해 개발은 완료되었다.

5. 현대의 아이설호와 주변 지역

1932년 아플슬라위트데이크 완공으로 자위더르해는 담수호인 아이설호가 되었다. 호수 내부에는 방조제가 건설되어 뷔링게르메이르, 북동 폴더, 동부 및 남부 플레볼란트의 4개 폴더(간척지)가 조성되었다. 이 간척지들은 플레볼란트주라는 새로운 행정 구역이 되었다. 원래 마르커르 호수도 간척할 계획이었으나, 2000년에 무기한 연기되었다. 1986년 플레볼란트 남부 폴더가 완성되면서 자위더르해 개발은 완료되었다.[2]

아이설호는 주변 지역에 농업 용수를 공급하고 홍수를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플레볼란트주는 현대적인 도시와 농경지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발전했다. 과거 자위더르해 연안의 항구 도시들은 어업과 관광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Oosthoek encyclopedie OOSTHOEK'S UITGEVERS MIJ. N.V (1916-1925) 2019-01-17
[2] 문서 Zuider Zee
[3] 서적 Celtic culture: a historical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ABC-CLIO
[4] 서적 Nederlands Etymologisch Woordenboek http://www.etymologi[...] 1971
[5] 서적 Duizend jaar weer, wind en water in de Lage Landen http://www.duizendja[...] Van Wijnen 1995
[6] 간행물 1928 Summer Olympics official report http://www.la84found[...] 2008-04-08
[7] 문서 Zuider Zee https://archive.org/[...]
[8] 웹사이트 IJsselmeer Polders https://www.britanni[...] 2024-07-16
[9] 웹사이트 Zuiderzee Works https://earthobserva[...] NASA 2021-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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