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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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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현은 조선 중기의 역관으로, 1639년 역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숭록대부까지 올랐다. 인조, 효종, 숙종 대에 걸쳐 외교, 무역, 정보 수집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효종의 북벌 정책을 지원하고 청나라 기밀을 탐지하는 데 기여했다. 1691년 동생의 밀무역 사건과 본인의 화포 밀반입 혐의로 벼슬이 강등되었고, 1694년 갑술환국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종질녀 희빈 장씨의 무고의 옥에 연루되어 가족들이 화를 입었으며, 1701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 활동

1639년 역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한학 교수 등을 거쳐 종1품 숭록대부에 이르렀다.[1] 사무처리에 능하고 부지런하여 뱃길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637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와 효종을 수행해 심양에서 6년을 모셨다.[1]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과 각별한 친분이 있었으며, 특히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1653년(효종 4년) 역관들이 50수레가 넘는 인삼을 중국으로 가져가다 발각되자[2] 그를 견제해온 문관들에게 인삼의 주인으로 지목되어 곤욕을 치를 뻔 했지만 효종의 비호 아래 처벌에서 벗어났다. 장현은 뛰어난 외국어와 외교 실력으로 수차례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고 자존심을 지켰을 뿐 아니라, 청나라의 기밀을 탐지[4]하고 비밀 문서를 입수하는 공[5][6]을 세웠다. 또한 호란 이후 조선에서 제조가 금지된 화포 등의 무기를 밀입[7]하는 등 목숨과 사재를 아끼지 않았다.

효종의 이러한 비호는 북벌을 추구하였던 효종의 정책과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청의 첩자와 무기 밀입을 자처하던 장현의 행적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의지는 효종이 사망한 후에도 지속되어 숙종 초기 청에서 발생한 삼번의 난을 기회삼아 남인의 주도로 다시 일어난 북벌론 때와 종질녀인 옥정이 왕비로 등극한 후에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현종 3년에 정2품 지중추부사, 1677년에는 종1품 숭록대부에 이르렀다. 수차례 호국의 공을 세워 품계가 올라야 했지만 역관과 의관에게 정1품 보국을 가자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문관들의 반발[8]로 아들이나 조카의 품계를 대신 올려주었다. 숙종 때에는 국중거부 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당대 갑부였다.[9][10]

경신환국 직후인 4월 17일, 인평대군의 아들이자 서인의 모략으로 남인 영수 허적의 서자 허견과 함께 대역죄인으로 처형된 복선군 이남과 친밀히 지내왔다는 죄[12]로 조카 장천익과 함께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곧 석방되어 사역원으로 복직되었다.

1691년 5월, 동생 장찬이 청에서 해외반출을 금지한 일통지(一統志)를 몰래 사서 조선으로 반입하려다 책문(柵門)에서 발각[13]되었다. 같은 해 5월 15일에는 장현이 조선으로 밀입하려던 화포 25대가 봉황성(鳳凰城)의 문지기에게 적발되자 2급 강등되는 벌을 받았다.[7][16][17][18]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 정권으로 교체되자 장희재의 친족이란 죄명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지만, 여러 간접 기록으로 미루어 1701년 이전에 유배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 1. 생애와 관직

장경인의 장남이자 장형의 사촌형이다. 1639년 역과에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여 한학 교수 등을 거쳐 종1품 숭록대부에 이르렀다.[1] 사무처리에 능하고 부지런하여 뱃길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637년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와 효종을 수행해 심양에서 6년을 모시면서 청나라의 사정을 파악하고 주요 인물들과 인맥을 쌓았다.[1]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과 각별한 친분이 있었으며, 특히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과 비호를 받았다. 1653년(효종 4년) 역관들이 50수레가 넘는 인삼을 중국으로 가져가다 발각되자[2] 그를 견제해온 문관들에게 인삼의 주인으로 지목되어 곤욕을 치를 뻔 했지만 효종의 비호 아래 처벌에서 벗어났다. 1657년(효종 8년)에는 중인 역관 신분으로 45세에 정2품 자헌대부에 가자되어 문관에게 공분을 샀다.[3]

효종의 이러한 비호는 북벌을 추구하였던 효종의 정책과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청의 첩자와 무기 밀입을 자처하던 장현의 행적에서 그 연유를 파악할 수 있다. 장현은 사신 대행 역관으로서 뛰어난 외국어와 외교 실력으로 수차례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고 자존심을 지켰을 뿐 아니라, 청나라의 기밀을 탐지[4] 하고 비밀 문서를 입수하는 공[5][6]을 세우고 호란 이후 조선에선 제조가 금지된 화포 등의 무기를 밀입[7] 해 들여오는 등 목숨과 사재(개인재산)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효종이 사망한 후에도 지속되어 숙종 초기 청에서 발생한 삼번의 난을 기회삼아 남인의 주도로 다시 일어난 북벌론 때와 종질녀인 옥정이 왕비로 등극한 후에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현종 3년에 정2품 지중추부사로 있었으며, 1677년에는 품직이 종1품 숭록대부에 이르렀다. 수차례 호국의 공을 세워 마땅히 품계가 올라야 했지만 그때마다 역관과 의관에게 정1품 보국을 가자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문관들의 반발[8]로 아들들의 품계를 대신 올려주었고, 이후에는 그의 공이 조카에게까지 넘어갔다. 역관의 수장이자 신화였으며, 당대의 갑부로서[9], 숙종 때에는 국중거부 라는 별칭이 붙었다.[10] 사돈지간[11] 이자 역시 국중거부로 꼽히는 일본어 역관 수장 변승업과 함께 직접무역이 불가한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중계무역을 주도해 조선에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경신환국 직후인 4월 17일, 인평대군의 아들이자 서인의 모략으로 남인 영수 허적의 서자 허견과 함께 대역죄인으로 처형된 복선군 이남과 친밀히 지내왔다는 죄[12]로 도체찰사부 군관이던 조카 장천익과 함께 유배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유배형을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되어 사역원으로 복직되었다.

1691년 5월, 동생 장찬이 청에서 해외반출을 금지한 일통지(一統志: 중국 전역과 조공국(朝貢國)의 지리와 기후, 풍속 등을 총 기술한 지도)를 몰래 사서 조선으로 반입하려다 책문(柵門)에서 발각[13] 되었다. 같은 해 5월 15일에는 장현이 조선으로 밀입하려던 화포 25대가 봉황성(鳳凰城)의 문지기에게 적발되자 장현 역시 모든 책임을 전가받고 벼슬이 2급 강등되는 벌을 받았다.[7][16][17][18]

1694년 갑술환국이 발발하여 서인 정권으로 다시 교체되자 노론의 총공격을 받아 장희재의 친족이란 죄명으로 윤5월 13일 유배되었다. 유배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지만, 여러 간접 기록으로 미루어 1701년 이전에 유배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1705년, 이미 사망한 죄인을 사면토록 해주었을 때 노론에 의해 누락되었던 장현의 죄가 비로소 사면되었는데 이는 장현이 1699년 이전에 이미 사망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20]

2. 2. 청과의 관계 및 외교 활동

인조 17년(1639년) 역과에 장원으로 합격해 한학 교수를 거쳐 최고 종1품 숭록대부에 이르렀다. 사무처리에 능하고 부지런하여 일찍이 뱃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 1637년(인조 15)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와 효종을 수행해 심양에서 6년을 모시면서 은밀히 청나라의 사정을 파악하고 청나라 주요 인물들과 인맥을 쌓았다.[1] 심양에서 귀국하여 수석 역관이 된 후, 40년간 30여 차례나 북경에 다녀오면서 조선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했다.[1]

효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장현은 사신 대행 역관으로서 뛰어난 외국어와 외교 실력으로 수차례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고 자존심을 지켰을 뿐 아니라, 청나라의 기밀을 탐지하고[4] 비밀 문서를 입수하는 공을[5][6] 세우고, 호란 이후 조선에서 제조가 금지된 화포 등의 무기를 밀수입해[7] 들여오는 등 목숨과 개인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

1691년 5월, 동생 장찬이 청나라에서 해외 반출을 금지한 일통지(一統志: 중국 전역과 조공국의 지리와 기후, 풍속 등을 총 기술한 지도)를 몰래 사서 조선으로 반입하려다 책문(柵門)에서 발각되었다.[13] 이에 청나라에서 조선을 문책하자 장찬에게 모든 책임이 미루어져, 현 왕비의 당숙임에도 불구하고 70대 노구를 이끌고 금오산성 변경에 충군(充軍: 죄를 범한 자를 억지로 군역에 복무시키는 제도)되는 벌을 받았다.[14][15] 5월 15일에는 장현이 조선으로 밀수입하려던 화포 25대가 봉황성(鳳凰城)의 문지기에게 적발되자 장현 역시 모든 책임을 전가받고 벼슬이 2급 강등되는 벌을 받았다.[7][16][17][18]

2. 3. 효종과의 관계 및 북벌 지원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과 각별한 친분이 있었으며, 특히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과 비호를 받았다. 1637년(인조 15)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와 효종을 수행해 청나라 심양에서 6년을 모시면서 은밀히 청나라의 사정을 파악하고 청나라의 주요 인물들과 인맥을 쌓았다.[1] 심양에서 귀국하여 수역(首譯)이 된 후, 40년간 무려 30여 차례나 북경에 다녀오면서 조선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했다.[1]

1653년(효종 4년) 역관들이 50수레가 넘는 인삼을 중국으로 가져가다[2] 발각되자, 그간 그를 견제해온 문관들에게 아무런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삼의 주인일 것이라고 지목되어 곤욕을 치를 뻔했지만 효종의 노골적인 비호 아래 처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657년(효종 8년)에는 중인 역관의 신분으로 45세의 젊은 나이에 정2품 자헌대부에 가자되어 문관에게 공분을 얻었다.[3]

효종의 이러한 비호는 북벌을 추구하였던 효종의 정책과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청의 첩자와 무기 밀입을 자처하던 장현의 행적에서 그 연유를 파악할 수 있다. 장현은 사신 대행 역관으로서 뛰어난 외국어와 외교 실력으로 수차례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고 자존심을 지켰을 뿐 아니라, 청나라의 기밀을 탐지[4]하고 비밀 문서를 입수하는 공[5][6]을 세우고, 호란 이후 조선에선 제조가 금지된 화포 등의 무기를 밀입[7]해 들여오는 등 목숨과 사재(개인재산)를 아끼지 않았다.

2. 4. 숙종 대의 활동과 몰락

효종이 사망한 후에도 북벌론은 계속 이어졌으며, 숙종 초기 청나라에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남인 주도로 다시 북벌론이 제기되었다. 이때 장현은 종질녀 옥정(훗날 희빈 장씨)이 왕비로 등극하면서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다.[1]

목내선(睦來善)은 "역관(譯官) 장현(張炫)은 청(淸)나라 내각(內閣)에 비장(秘藏)했던 문서(文書)를 얻어 왔으니, 그 공이 당연히 품계(品階)를 올려 주어야 한다. 그러나 숭록(崇祿)의 품계를 다시 가자(加資)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사(下賜)하는 것으로 그쳤으니, 격려하고 권장하는 의의에 매우 벗어난 조처였다."라고 아뢰었다. 권대운은 "말을 하사하는 것으로는 그의 공을 보상할 수가 없다. 대신(大臣)이 공이 있으면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는 것을 허락한다."라고 했고, 목내선은 "장현(張炫)이 모치(募致)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전일에도 많이 있었다."라고 아뢰었다. 권대운은 "이제 6백 금(金)을 들여 문서(文書)를 구입하였으니, 그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다."라고 하였다.[1]

현종 3년에 정2품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1677년(숙종 3년)에는 종1품 숭록대부에 올랐다.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품계가 올라야 했지만, 역관과 의관에게 정1품 보국을 가자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문관들의 반발[8]로 아들이나 조카의 품계를 대신 올려주었다. 장현은 역관의 수장이자 당대 갑부[9]였으며, 숙종 때에는 '국중거부'[10]라는 별칭을 얻었다. 사돈[11]이자 역시 국중거부였던 일본어 역관 변승업과 함께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중계무역을 주도하여 조선에 큰 이득을 안겨주기도 했다.

1680년 경신환국의 발판이 된 삼복의 변 직후, 인평대군의 아들이자 허적의 서자 허견과 함께 대역죄인으로 처형된 복선군 이남과 친밀하게 지냈다는 죄[12]로 조카 장천익과 함께 유배되었다. 그의 아우이자 장천익의 아비인 역관 장찬(張燦)도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석방되어 사역원에 복직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1685년부터 1686년까지 장현 형제를 역관 명부에서 제거하고 유배해야 한다는 상소가 《승정원일기》에 40여 건이나 기록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 정권이 들어서고 종질녀 옥정숙종의 계비가 되면서 장현은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1691년 5월, 동생 장찬이 청나라에서 해외 반출을 금지한 지도인 일통지(一統志)를 몰래 사서 조선으로 반입하려다 발각[13]되었다. 청나라의 문책에 장찬이 모든 책임을 지고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금오산성 변경에 충군(充軍)되는 벌을 받았다.[14][15] 같은 달 15일에는 장현이 조선으로 밀반입하려던 화포 25대가 봉황성(鳳凰城) 문지기에게 적발되어 장현 역시 모든 책임을 지고 벼슬이 2급 강등되었다.[7][16][17][18]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자 노론의 공격을 받아 장희재의 친족이라는 죄명으로 유배되었다.[19] 유배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1701년 이전에 유배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1701년 종질녀 희빈 장씨숙빈 최씨의 발고로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원했다는 혐의를 받고 자진하는 무고의 옥이 발생하자, 노론의 강력한 주장으로 장현의 식솔들도 모두 죄에 연루되었다. 조카 장천한과 종질부 김씨(장희재의 처)는 옥사했고, 종질 장희재는 참형되었다. 1705년, 1699년 왕세자(경종)의 두창 회복 기념으로 이미 사망한 죄인을 사면할 때 노론에 의해 누락되었던 장현의 죄가 사면되었는데, 이는 장현이 1699년 이전에 사망했음을 보여준다.[20]

2. 5. 경제 활동과 부의 축적

장현은 사무 처리에 능숙하고 부지런하여 뱃길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1637년(인조 15)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와 효종을 수행하여 심양에서 6년간 머물면서 청나라 주요 인사들과 인맥을 쌓았다.[1] 귀국 후 40년간 30여 차례나 북경을 드나들며 조선의 대소사를 처리했다.[1]

효종의 신임을 받은 장현은 역관으로서 많은 재산을 모았다. 1653년(효종 4년) 역관들이 50수레가 넘는 인삼을 중국으로 가져가다 발각되었을 때, 문관들이 장현을 인삼 주인으로 지목했지만 효종의 비호로 처벌을 면했다.[2]

뛰어난 외교 능력과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장현은 청나라와의 중계 무역을 주도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특히, 사돈이자 일본어 역관 수장인 변승업과 함께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중계 무역을 통해 조선에 큰 이득을 안겨주었다.[9][10][11] 숙종 때에는 "국중거부"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큰 부자가 되었다.[10]

3. 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장수(張壽, 1553~1632)증 좌의정[23]
조모충주 지씨증 정경부인
부친장경인(張敬仁, 1578~1646)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증 정헌대부 공조판서[24]
생모영산 신씨판관 신철수[25]의 딸
아우장찬(張燦, 1626~1695)부호군, 가선대부, 용양위
제수제주 고씨정부인
조카장천익(張天翼, 1645~?)숙종 4년 무오증광시 무과 급제
조카장천핵(張天翮)
조카장천숙(張天䎘)
조카장천록(張天祿)
숙부장충인(張忠仁, 생몰년 미상)부호군
숙부장응인(張應仁, 1594~1660)역학훈도, 첨지중추부사, 증 우의정
숙모남포 박씨산학 별제 박심의 딸
종제장형(1623-1669)사역원 봉사, 증 보국숭록대부 영의정[26]
전처 종제수제주 고씨증 정경부인
종질장희식
후처 종제수파평 윤씨정경부인
종질녀인동 장씨김지중에게 출가
종질장희재
종질녀옥산부대빈 장씨
원적여흥 이씨(생몰년 미상), 지중추부사 이질(李耋)의 딸
계적전주 최씨(생몰년·부친 미상)
장남장천우(張天羽)
장자부평양 조씨조응현(趙應賢)의 딸
손자장성유(張聖維, 1664~?[27])숙종 10년(1684) 갑자 식년시 의과 급제, 내의원정
손부고령 신씨사역원정 신찬(申燦)의 딸
차남장천한(張天漢, ?~1701)무과 급제, 숙종 3년(1677) 부호군·호군, 숙종 15년(1689) 충장위장, 숙종 16~20년(1690~4) 희천군수
차자부김해 김씨
손자장대유(張大維)숙종 23년(1697) 정축 중시 무과 급제[28], 사과(정6품 무관직)
삼남장천택(張天澤)무과 출신, 강동 현감
삼자부천녕 현씨
손자장문유(張文維, 1675~?)숙종 23년(1697) 정축 중시 무과 급제, 어모장군 용양위 부사과
손자장두유(張斗維, 1677~?)숙종 23년(1697) 정축 중시 무과 급제, 부사용
사남장천범(張天範)
오남장천헌(張天憲)사역원 봉사
오자부우봉 김씨역관 김기문(金起門)의 딸
손자장채유(張采維, 1697~?)장천강의 생자, 숙종 43년(1717) 정유 식년시 역과 장원
육남장천서(張天叙)
칠남장천석(張天錫, 1647~?)현종 10년 기유 식년시 무과 급제, 현종 11년 부호군으로 특진
칠자부청주 한씨
손자장태유(張泰維, 1662~?)아명(兒名) 억기[29], 무과 급제, 훈련원 판관
팔남장천강(張天綱)첨지중추부사, 통정대부 절충장군
팔자부광산 김씨계사(計士: 종8품 산원) 김석령의 딸
손자장붕유(張鵬維)
손자장진유(張震維)
변승업의 적장자부, 변이창(卞爾昌, 1648~?, 한학 역관)에게 출가
상궁 장씨
미상
서자장천위(張天緯)


4. 기타

연운만리(燕雲萬里)를 어디라고 가니는고
봄풀이 프르고 프르거든 즉시 돌아오소서


  •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장현이 조선에 투전을 전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옥살이를 하던 장현이 청나라에서 배운 카드 게임을 응용해 투전을 만들었고, 함께 옥살이를 하던 사람들을 통해 조선 전체에 퍼져 도박화되었다는 것이다. 투전 패의 글자는 여진어로 추정되는데, 장현은 한어뿐만 아니라 여진어에도 능통했다.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도 "투전놀이가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숭정(崇禎) 말엽에 장현(張炫)이 북경에서 배워 가지고 왔다. (중략) 장현이 처음에는 국수(國手)로 일컬어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나라에 퍼져 사람들이 바둑이나 장기보다 더 탐닉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1]
  • 김수장이 편찬한 《해동가요(海東歌謠)》 서문에는 효종~영조 때의 이름 높은 가객(歌客) 56인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중 한 명이 장현이다. 김수장이 정의한 가객(=歌者)은 노래를 직업으로 한 전문 창곡가가 아니라, 음률에 능하여 노래의 가사인 한시문을 지은 작가를 의미한다.[22]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張炫|장현중국어을 연기한 배우

배우작품방송사
오영갑2002년 장희빈KBS
성동일2013년 장옥정, 사랑에 살다SBS
남궁민2023년 연인MBC


참조

[1] 뉴스 '[서울신문]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6) 역관 명문 인동 장씨'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 문서
[3] 문서
[4] 실록 숙종 즉위년(1674 갑인 / 청 강희(康熙) 13년) 11월 7일(병인)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1674-11-07
[5] 등록 숙종 1년 4월 23일 《비변사등록》 1675-04-23
[6] 실록 숙종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윤3월 13일(경술)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1689-04-22
[7] 일기 숙종 17년/ 06월/17일(신미) 《승정원일기》 1691-06-17
[8] 문서
[9] 서적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2 다할미디어 2009
[10] 서적 조선의 거상 경영을 말하다 비즈페이퍼 2007
[11] 문서
[12] 문서
[13] 일기 숙종 17년/ 05월/07일(임진) 《승정원일기》 1691-05-07
[14] 일기 숙종 17년/ 윤07월/21일(갑술) 《승정원일기》 1691-08-14
[15] 실록 《숙종실록》 17년(1691 신미 / 청 강희(康熙) 30년) 6월 8일(임술) 1번째기사 《숙종실록》 1691-06-08
[16] 일기 숙종 17년 5월 15일 (경자) 《승정원일기》 1691-05-15
[17] 일기 숙종 17년/ 06월/23일(정축) 《승정원일기》 1691-06-23
[18] 실록 《조선왕조실록》 1691-05-15
[19] 서적 조선 최대 갑부 역관
[20] 일기 숙종 31년 11월 16일 (병자) 원본427책/탈초본23책 (16/16) 《승정원일기》 1705-11-16
[21] 잡기 투전(鬪牋)놀이와 나라 정세 《청성잡기(靑城雜記)》제3권 성언(醒言)
[22]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terms.naver.[...]
[23] 문서
[24] 문서
[25] 문서
[26] 문서
[27] 문서
[28] 문서
[2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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