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연문장전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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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주연문장전산고》는 19세기 조선의 학자 이규경이 저술한 60권 60책의 방대한 분량의 백과사전이다. 천문, 지리, 역사, 의학, 농업, 서학 등 다양한 분야를 변증설 형식으로 다루며, 동도서기 사상에 기반하여 서양 기술의 우수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양의 과학적 전통을 중시했다. 농업, 민생, 역사, 민속,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특히 개국통상론을 주장하여 18세기 북학파의 주장을 계승했다. 이 책은 조선 후기 백과사전적 학풍을 체계화하고, 18세기 북학파와 19세기 후반 개화사상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오주(五洲)'는 5대양 6대주의 줄임말이자 저자 이규경의 호이며, 책 제목에 나타난 저자의 겸손함을 보여준다. '연문(衍文)'은 '거친 문장'이라는 뜻이고, '장전'은 문장 형태의 하나이며, '산고(散稿)'는 '흩어진 원고'라는 뜻이다. 이들을 합쳐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제목이 되었다. 이규경은 서문에서 "명물도수(名物度數)의 학문이 성명의리지학(성리학)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가히 폐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며 다양한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1]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이규경이 저술한 책으로, 제목은 그의 호 '오주(五洲)'와 '거친 문장'을 뜻하는 '연문(衍文)', 문장 형태 '장전', '흩어진 원고'를 의미하는 '산고(散稿)'를 합쳐 만들었다. 60권 60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천문, 의학, 역사, 지리, 농업, 서학, 병법, 광물, 초목, 어충, 음악 등 다양한 분야를 1,417개 항목의 '변증설' 형식으로 다룬다. 이규경은 서문에서 다양한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고증학적 태도로 세밀한 문제까지 다루었다.[1]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처음 편찬된 뒤 오랫동안 잊혀졌다. 이 책의 가치가 새롭게 평가된 것은 1930년대였다. 당시 조선광문회를 만든 최남선은 어느 날 우연히 군밤장수의 포장지로 사용되고 있는 《오주연문장전산고》를 극적으로 발견하여 이 책을 입수했다. 이때 입수된 책은 모두 60권 60책이었으나, 이미 몇 장은 없어진 상태였고 그 편집 체제도 일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학자들은 원래의 《오주연문장전산고》는 현재의 분량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1]
《오주연문장전산고》는 19세기 조선 지성사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책은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백과사전적 학풍을 체계화했다는 의의를 지닌다.[1]
조선광문회에서 이 책의 필사본을 제작한 이래, 1959년 동국문화사에서 규장각 소장본을 바탕으로 상ㆍ하 2책의 영인본을 간행하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67년에 「경사편」, 1982년에는 「인사편」의 국역본을 완성했지만, 그 뒤 예산 문제, 책의 방대함, 저자의 학문적 깊이 등으로 인한 난해한 문구 해석 문제로 국역 사업은 한동안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국역 사업이 다시 전개되었다.
[1]
뉴스
http://www.hani.co.k[...]
한겨레
2. 저자 및 집필 배경
3. 구성 및 내용
이 책은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30년대 최남선이 우연히 발견하면서 재평가되었다. 최남선이 입수한 책은 일부 유실되고 편집 체제가 일정하지 않았으나, 필사본으로 제작되어 규장각 도서로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원본은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규장각 소장 필사본(규5627)만 전해지며, 그나마도 1권에서 4권까지는 낙질되어 56책만 남아있다.[1]
3. 1. 주요 내용 분석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다양한 주제에 대해 폭넓게 다루었다.4. 발견 및 전래 과정
최남선이 찾아낸 원본을 바탕으로 필사본이 제작되었고, 이는 규장각 도서로 편입되어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하지만 최남선이 소장한 원본은 6.25 전쟁으로 불타버리고, 대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필사본만 남아 전해지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도서번호는 규5627이며, 현재 1권에서 4권까지는 낙질되어 최종적으로는 56책만이 남아있다.[1]
5. 의의와 평가
또한,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규경은 최한기, 김정호 등 중인 출신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이는 양반 중심의 지식 생산 구조에서 벗어나 중인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18세기 이후의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다.
이규경이 계승한 18세기 후반 북학파의 중상주의 학풍은 훗날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등에게 이어져 초기 개화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규경은 18세기 북학파와 19세기 후반 개화사상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1]
6. 간행본 및 번역 현황
참조
[2]
문서
명 말기에 예수회의 이탈리아 선교사 알레니가 한문으로 지은 세계지리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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