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마운트 템플 남작 윌프리드 애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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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프리드 애슐리(1867-1939)는 제1대 마운트 템플 남작으로, 영국의 정치인이자 귀족이었다. 그는 해로우 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후, 1906년부터 1932년까지 하원 의원을 역임했다. 보수당 소속으로 교통부 장관을 지냈으며, 아일랜드 공화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1935년에는 영독 협회를 설립하여 나치 독일과의 유화 정책을 지지했으나, 유대인 탄압에 반대하여 협회 의장직에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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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대 마운트 템플 남작 윌프리드 애슐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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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윌프리드 윌리엄 애슐리 |
| 국적 | 영국 |
| 정치 경력 | |
| 직위 | 교통부 장관 |
| 임기 시작 | 1924년 11월 11일 |
| 임기 종료 | 1929년 6월 4일 |
| 군주 | 조지 5세 |
| 총리 | 스탠리 볼드윈 |
| 이전 | 해리 고슬링 |
| 이후 | 허버트 모리슨 |
| 개인 정보 | |
| 출생 | 1867년 9월 13일 |
| 사망 | 1939년 7월 3일 |
| 사망 장소 | 롬지, 햄프셔 |
| 배우자 | 아말리아 메리 모드 카셀 (1901년 결혼, 1911년 사망) 뮤리엘 에밀리 스펜서 (1914년 결혼) |
| 자녀 | 에드위나 마운트배튼, 마운트배튼오브버마 백작부인 메리 콜몬들리, 레이디 델라미어 |
| 부모 | 에블린 애슐리 시벨라 샬롯 파콰 |
| 모교 | 맥덜린 칼리지, 옥스퍼드 대학교 |
| 기타 정보 | |
| 소속 정당 | 보수당 |
| 계급 | 대령 |
| 경칭 | 추밀원 의원, 부지사 |
2. 초기 생애 및 교육
윌프리드 애슐리는 사회 개혁가인 앤서니 애슐리 쿠퍼, 7대 샤프츠베리 백작의 손자이자, 명예 에블린 애슐리의 아들이었다.[1] 그의 어머니는 월터 파커, 제3대 준남작의 딸인 시벨라 샬롯 파쿼였다. 윌리엄 카우퍼-템플, 초대 마운트 템플 남작은 그의 증조부였다.[1]
애슐리는 해로우 학교와 매그덜렌 칼리지,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았다.[1] 그는 학위를 받지 않고 옥스퍼드를 떠난 후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등지를 여행했다.[1]
2. 1. 가문 배경
윌프리드 애슐리는 사회 개혁가인 앤서니 애슐리 쿠퍼, 7대 샤프츠베리 백작의 손자이자, 명예 에블린 애슐리의 아들이었다.[1] 그의 어머니는 월터 파커, 제3대 준남작의 딸인 시벨라 샬롯 파쿼였다. 윌리엄 카우퍼-템플, 초대 마운트 템플 남작은 그의 증조부였다.[1]2. 2. 학창 시절
윌프리드 애슐리는 사회 개혁가인 앤서니 애슐리 쿠퍼, 7대 샤프츠베리 백작의 둘째 아들 에블린 애슐리의 아들로 태어났다.[1] 어머니는 월터 파커, 제3대 준남작의 딸인 시벨라 샬롯 파쿼였다.[1] 윌리엄 카우퍼-템플, 초대 마운트 템플 남작은 그의 증조부였다.[1]애슐리는 해로우 학교와 매그덜렌 칼리지,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았다.[1] 그는 학위를 받지 않고 옥스퍼드를 떠난 후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등지를 여행했다.[1]
3. 군 경력
애슐리는 에어셔 민병대(1886–9)에서 복무했으며, 이후 근위 보병 연대에서 정규군 현역 장교로 복무했다.(1889–98)[2] 햄프셔 연대 제3대대에 임관하여 민병대로 복귀했다.(1899–1902)[2] 민병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제2차 보어 전쟁(1899–1902)에 자원했으나, 건강 문제로 귀국했다. 1902년 12월 명예 소령 계급으로 민병대에서 물러났다.[3] 1914년에는 킹스 연대 (리버풀) 제20대대를 지휘하는 중령으로 복무했다.
4. 정치 경력
애슐리의 아버지는 자유 연합주의자였으며, 애슐리는 처음에는 야당 대표였던 헨리 캠벨배너먼 경의 개인 비서로 1899년부터 활동했다. 1901년 남아프리카에서 건강 문제로 귀국한 후, 그는 1901년 6월 캠벨배너먼의 "야만적인 방법" 연설에 대해 축하했다.[2]
영국 육군에서 대령 계급을 지낸[4] 애슐리는 정계에 입문하기 전 다양한 압력 단체에서 활동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해군 연맹의 주요 인물이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국가 개입 반대 위원회를 설립했다.[5] 그는 이후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 전우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이 단체의 회장으로서 퇴역 군인 운동이 창립 당시 보수당과 긴밀하게 연결되도록 도왔다.[6]
애슐리는 1906년 의회에 블랙풀을 대표하는 의원으로 선출되어 1918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고, 이후 1922년까지 파일드의 의원, 1922년부터 1932년까지 뉴 포레스트의 의원을 지냈다.[7] 애슐리는 1914년 킹스 연대 (리버풀)의 제20대대에서 중령 계급으로 지휘했으며, 1915년 영국으로 돌아와 전쟁부 재무 장관의 의회 비서가 되었다.[2] 아일랜드 남부에 있는 클래시본 성을 소유한 애슐리는 아일랜드 공화주의의 강력한 반대자였으며, 당시 총리였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에게 1921년 아일랜드 영지를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2]
그는 보나 로와 스탠리 볼드윈 밑에서 1922년 10월부터 1923년 10월까지 교통부 의회 비서와 공공사업부 의회 비서로 재직했으며, 그 후 전쟁 차관으로 임명되어 1924년 1월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7] 애슐리는 1924년 2월 추밀원에 서임되었으며[8], 11월 볼드윈 하에서 보수당이 권력을 되찾았을 때 그는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9], 1929년 볼드윈 행정부가 몰락할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그는 1932년 하원에서 물러났고, 그의 증조부가 소유했던 작위를 부활하여 사우스햄튼주 리의 '''마운트 템플 남작'''으로 봉해졌다.[10]
4. 1. 초기 정치 활동 (1906년 이전)
애슐리는 자유 연합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으며, 1899년부터 헨리 캠벨배너먼 경의 개인 비서로 활동하며 정계에 입문했다.[2] 1901년 남아프리카에서 건강 문제로 귀국한 후, 그는 1901년 6월 캠벨배너먼의 "야만적인 방법" 연설에 대해 축하했다.[2] 영국 육군에서 대령 계급을 지냈으며[4], 정계에 입문하기 전 해군 연맹 등 다양한 압력 단체에서 활동가로 알려져 있었다.[5]4. 2. 하원 의원 시절 (1906-1932)
윌프리드 애슐리는 1906년 총선에서 블랙풀 지역구의 보수당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했다.[7] 1918년까지 블랙풀, 1918년부터 1922년까지 파일드, 1922년부터 1932년까지 뉴 포레스트 지역구 의원을 역임했다.[7] 영국 육군에서 대령 계급을 지낸[4] 애슐리는 정계 입문 전 해군 연맹 등 다양한 압력 단체에서 활동했다.[5]보나 로와 스탠리 볼드윈 내각에서 1922년 10월부터 1923년 10월까지 교통부 의회 비서와 공공사업부 의회 비서를 역임했고, 이후 전쟁 차관으로 임명되어 1924년 1월까지 재직했다.[7] 1924년 2월 추밀원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8] 같은 해 11월 볼드윈 내각에서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1929년까지 재직했다.[9]
애슐리는 아일랜드 공화주의에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1921년 당시 총리였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에게 아일랜드 영지를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2]
1932년 하원에서 은퇴하고, 사우스햄튼 주 리의 '''마운트 템플 남작''' 작위를 받았다.[10]
4. 3. 아일랜드 문제
윌프리드 애슐리는 아일랜드 남부에 있는 클래시본 성을 소유하였으며, 아일랜드 공화주의에 강력하게 반대했다.[2] 1921년에는 당시 총리였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에게 아일랜드 영지를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2]5. 영독 협회와 친독 활동 (1935-1939)
귀족원에서 활동한 제1대 마운트 템플 남작 윌프리드 애슐리는 나치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반공주의를 존경했지만, 그의 신념은 대부분 베르사유 조약이 애초부터 부당했고, 독일의 정부가 누구인지와 상관없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었다.[11] 1935년, 그는 독일인에 대한 지지를 강조하기 위해 영독 협회를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2] 그는 1930년대 후반에 이 단체와 반사회주의 연합의 의장을 동시에 역임했다.[13]
영독 협회는 문화 교류와 경제 협정을 장려하여 독일과 영국의 엘리트들을 결합시키려는 엘리트주의 단체였다. 이 협회는 1936년 초에 약 250명의 회원을 보유했으며, 마운트 템플 외에도 집행 위원회에는 런던데리 경, 로시안 경, 글래스고 백작, 웰링턴 공작, 맥고완 경, 모티스톤 경, 레데스데일 경, 브로켓 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운트 템플은 그의 단체가 훌륭하고 부유한 영국 귀족들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매우 존경받을 만한 단체라고 주장했다. 마운트 템플은 협회의 의장이었지만, 이 단체의 가장 중요한 두 명의 회원은 상인 은행가 어니스트 테넌트 경과 역사가 필립 콘웰-에반스였으며, 후자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영국 대리인이었다.
1935년 12월 5일, 런던에서 열린 협회 회의에서 마운트 템플은 또 다른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면 "상대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하며 영국과 독일이 프랑스에 맞서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는 같은 연설에서 "영국과 독일 간의 전통적인 우정"을 칭찬하며 "우리는 독일이 공정하게 싸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다음 전쟁에서는 – 아, 제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말할 수는 없네요!"라고 덧붙였다. 마운트 템플의 연설은 영독 동맹을 암묵적으로 요구하며 당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36년 1월 11일 베를린에서 열린 영독 협회 회의에서 마운트 템플은 "우리 여론은 우리 두 국민 간의 최종적이고 명확한 이해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확립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같은 연설에서 독일 공산당을 금지한 나치 정권을 칭찬하며 "당신의 힘과 결단력은 유럽을 진정한 위험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이 위험은 잠시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운트 템플의 연설은 또 다른 전쟁이 독일과 벌어진다면 세계에 너무나 치명적이므로 거의 모든 대가를 치러서라도 피해야 한다는 그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다른 세계 대전의 끔찍한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믿음과 함께,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심각하게 부당했기 때문에 '제국'은 베르사유 조약에 도전할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마운트 템플과 영독 협회의 다른 회원들은 베르사유 조약을 고수하는 데 가장 헌신적인 세력인 프랑스를 독일보다 세계 평화의 주요 위협으로 간주했다. 마운트 템플은 종종 "다음 전쟁에서" 독일과 영국이 같은 편에서 싸우기를 바라며 나치 독일이 영국이 선택해야 할 가장 논리적인 동맹이라고 주장했다.
1936년 4월 4일자 ''타임스''지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서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는 전년도에 소련과 프랑스-소비에트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한 프랑스이며, 라인란트 재무장 이후 시작된 영불 참모 회담이 영국이 프랑스와 소련과 함께 독일과 싸우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마운트 템플은 정부에 대한 위협처럼 들리는 내용으로 "볼셰비즘을 옹호하는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대다수의 영국 국민들에게 매우 혐오감을 줄 것입니다."라고 썼다. 마운트 템플은 라인란트 재무장을 평화의 전망을 개선하는 환영할 만한 발전이라고 썼다.
1936년 7월 14일, 바스티유의 날을 기념하기 위한 반프랑스 제스처로 마운트 템플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을 협회 만찬에 초대했다. 만찬에서 여러 연설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군대를 명예롭고 고귀한 적이라고 칭찬하는 데 할애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 군대를 불명예스럽고 비열한 동맹이라고 비난했다.
1936년 9월, 마운트 템플은 연례 나치당 뉘른베르크 집회에 참석했다. 집회에 참석한 마운트 템플과 다른 협회 회원들은 "리벤트로프의 유치원"의 일원으로 묘사되었으며, 협회 회원들은 모두 집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준 리벤트로프에게 큰 감사를 표했다.
1937년 5월 14일, 마운트 템플 경은 독일 국방부 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원수를 런던으로 환영했다. 블롬베르크를 기리기 위해 열린 협회 만찬에서 마운트 템플은 그를 "새로운 독일의 탁월한 인물"로 칭찬하며 "보복적인 조약이 빼앗으려 했던 자기 방어 수단을 독일을 위해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마운트 템플은 블롬베르크를 독일 재무장과 베르사유 조약 위반에 기여한 영웅이라고 칭하며, 그는 "어떤 공정한 역사가도 위대한 국가에 필수적이라고 간주할 만한 것, 즉 자존심과 세계적 평등을 창조했다"고 말했다.
1937년 7월, 마운트 템플은 ''영독 리뷰''(협회 저널)에 영국 신문들이 "히틀러 정권의 사회 분야에서 건설적인 노력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고 썼다.
1938년 2월 26일자 ''타임스''지에 실린 편지에서 마운트 템플은 안슐루스를 베르사유 조약으로부터 나치의 "민족 해방의 역동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불렀다. 같은 편지에서 마운트 템플은 "동유럽 국가들의 통합성은 그러한 철학으로부터 위험에 처해 있지 않습니다"라고 썼다.
1938년 10월, 뮌헨 협정 이후 그는 협정을 "평화 조약에서 가장 노골적인 불의 중 하나를 수정하는 것"이라고 부르는 ''타임스''지에 보낸 서한에 서명한 26명 중 한 명이었다.[2] 1938년 10월 10일 런던에서 열린 협회 만찬에서 마운트 템플은 뮌헨 협정을 영독 우정의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칭찬하며 "영국인 20명 중 17명이 독일과의 이해를 간절히 원한다"고 선언했다.
자유 방임 자본주의자인 마운트 템플은 이념적인 나치즘을 지지하지 않았다(아마도 그의 첫 번째 부인이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 부분적인 이유일 것이다). 수정의 밤 이후 그는 의장직에서 항의하며 사임했지만, 협회 회원 자격은 유지했다.[15] 마운트 템플은 사임 편지에서 "독일 정부의 유대인 대우에 항의하기 위해" 사임했다고 밝혔다. 이 시점에서 협회 회원 900명 중 20명만이 ''수정의 밤''에 항의하여 사임했다. 단치히 위기 동안 마운트 템플은 영국이 폴란드를 방어하기 위해 독일과 전쟁을 벌이는 것을 피할 방법을 찾기 위한 "평화" 정책을 로비했다.
5. 1. 영독 협회 설립 및 의장직 수행
제1대 마운트 템플 남작 윌프리드 애슐리는 귀족원에서 활동하며 나치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반공주의를 존경했지만, 그의 신념은 베르사유 조약이 부당하며 독일 정부와 상관없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기반했다.[11] 1935년, 애슐리는 영독 협회를 설립하고 의장을 맡아 나치 독일과의 우호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했다.[12]영독 협회는 문화 교류와 경제 협정을 통해 영국과 독일 엘리트 간의 결속을 추구한 엘리트주의 단체였다.[12] 런던데리 경, 로시안 경 등 영국의 저명 인사들이 참여했다.[12] 마운트 템플은 협회가 훌륭하고 부유한 영국 귀족들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존경받을 만한 단체라고 주장했다.[12]
1935년 12월 5일 런던에서 열린 협회 회의에서 마운트 템플은 또 다른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면 "상대가 달라질 것"이라고 언급하며, 영국과 독일이 프랑스에 맞서 동맹을 맺어야 함을 시사했다.[13] 그는 "영국과 독일 간의 전통적인 우정"을 칭찬하며, 다음 전쟁에서는 독일이 공정하게 싸울 것임을 안다고 덧붙였다.[13] 1936년 1월 11일 베를린 회의에서는 "우리(영국) 여론은 양국 간의 최종적이고 명확한 이해가 세계 평화와 안정을 확립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13] 또한 독일 공산당을 금지한 나치 정권을 칭찬하며, 유럽을 "진정한 위험"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언급했다.[13]
마운트 템플은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부당했기 때문에 '제국'이 베르사유 조약에 도전할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며, 프랑스를 독일보다 세계 평화의 주요 위협으로 간주했다.[13] 그는 "다음 전쟁에서" 독일과 영국이 같은 편에서 싸우기를 바라며, 나치 독일이 영국의 가장 논리적인 동맹이라고 주장했다.[12] 1936년 4월 4일 ''타임스''지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프랑스-소비에트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한 프랑스가 서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이며, 라인란트 재무장 이후 시작된 영불 참모 회담에 우려를 표명했다.[13]
1936년 9월, 마운트 템플은 나치당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 참석했다.[13] 1937년 5월 14일, 독일 국방부 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원수를 런던으로 초청하여 "새로운 독일의 탁월한 인물"로 칭찬하며, 독일 재무장에 기여한 영웅이라고 말했다.[13] 1937년 7월, ''영독 리뷰''에 영국 신문들이 히틀러 정권의 사회 분야에서의 건설적인 노력을 거의 설명하지 않았다고 기고했다.[13]
1938년 2월 26일 ''타임스''지에 실린 편지에서 안슐루스를 베르사유 조약으로부터 나치의 "민족 해방의 역동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언급했다.[13] 1938년 10월, 뮌헨 협정을 "평화 조약에서 가장 노골적인 불의 중 하나를 수정하는 것"이라고 칭송했다.[2] 그러나 수정의 밤 이후, 그는 의장직에서 항의하며 사임했지만, 협회 회원 자격은 유지했다.[15]
5. 2. 나치 독일 옹호 및 유화 정책 지지
윌프리드 애슐리는 귀족원에서 활동하며 나치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11]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반공주의를 존경했으나, 그의 신념은 베르사유 조약이 부당하며 독일 정부와 상관없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기반했다.[11] 1935년, 독일 지지를 위해 영독 협회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2]애슐리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부당하다고 여겨 독일의 재무장과 조약 수정을 옹호했다. 그는 나치 독일의 반공주의를 높이 평가하며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영국과 독일이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5년 12월 5일 런던에서 열린 협회 회의에서 그는 또 다른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면 "상대가 달라질 것"이라고 언급하며, 영국과 독일이 프랑스에 맞서 동맹을 맺어야 함을 암시했다.[11] 그는 "영국과 독일 간의 전통적인 우정"을 언급하며 "우리는 독일이 공정하게 싸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다음 전쟁에서는 – 아, 제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말할 수는 없네요!"라고 덧붙였다.[11]
1936년 1월 11일 베를린에서 열린 영독 협회 회의에서 애슐리는 "우리 여론은 우리 두 국민 간의 최종적이고 명확한 이해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확립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11] 그는 독일 공산당을 금지한 나치 정권을 칭찬하며 "당신의 힘과 결단력은 유럽을 진정한 위험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이 위험은 잠시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11]
애슐리는 프랑스를 서유럽의 주요 위협으로 간주했다. 1936년 4월 4일 ''타임스''지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프랑스-소비에트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한 프랑스가 가장 위험한 국가라고 주장하며, 라인란트 재무장 이후 영국이 프랑스, 소련과 함께 독일과 싸우는 상황을 우려했다. 그는 "볼셰비즘을 옹호하는 전쟁에 휘말리는 것은 대다수의 영국 국민들에게 매우 혐오감을 줄 것입니다."라고 썼다.[11] 1936년 7월 14일, 바스티유의 날에 반프랑스 제스처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을 협회 만찬에 초대했다.[11] 만찬에서 여러 연설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군대를 명예롭고 고귀한 적이라고 칭찬하고, 프랑스 군대를 불명예스럽고 비열한 동맹이라고 비난했다.
1938년 뮌헨 협정 이후, 애슐리는 "평화 조약에서 가장 노골적인 불의 중 하나를 수정하는 것"이라고 칭송하는 ''타임스''지에 보낸 서한에 서명했다.[2]
5. 3. 유대인 탄압에 대한 반대
제1대 마운트 템플 남작 윌프리드 애슐리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이념적으로 나치즘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특히 그의 첫 번째 부인이 유대인이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15] 1938년 수정의 밤 사건 이후, 애슐리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에 항의하며 영독 협회 의장직에서 사임했다.[15] 그는 사임 편지에서 "독일 정부의 유대인 대우에 항의하기 위해" 사임했다고 밝혔다.[15] 당시 협회 회원 900명 중 20명만이 수정의 밤에 항의하여 사임했다.그러나 애슐리는 협회 회원 자격은 유지하며, 단치히 위기 동안 영국이 폴란드를 방어하기 위해 독일과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기 위한 로비 활동을 계속했다.[2] 그는 뮌헨 협정을 "평화 조약에서 가장 노골적인 불의 중 하나를 수정하는 것"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2]
6. 사생활
제1대 마운트 템플 남작 윌프리드 애슐리는 1901년 금융가 경 어니스트 카셀의 외동딸 아말리아 메리 모드 카셀과 결혼했다.[1] 이 결혼식에는 카셀의 친구였던 웨일스 공 에드워드 7세가 하객으로 참석했다.[16] 부부는 두 딸을 두었다.[1]
- 버마 백작부인 에드위나 마운트배튼(1901–1960), 버마 백작 루이스 마운트배튼과 결혼
- 루스 메리 촐몬들리, 델라메어 여사(1906–1986), 알렉 커닝햄-레이드와 결혼 후 이혼, 메이저 어니스트 로리 가드너와 결혼 후 이혼, 4대 델라메어 남작과 결혼 후 이혼.[17]

1911년 첫 번째 부인과 사별 후, 1914년 머리엘 에밀리 ("몰리") 포브스-셈필과 재혼했다. 그녀는 해군 소장 명예로운 아서 포브스-셈필의 전 부인이었으며, 헤리퍼드셔 포운호프 코트의 목사 월터 스펜서의 딸이자 마저리, 바이카운트 그린우드의 여동생이었다. 이 부부는 건축가 올리버 힐에게 두 채의 웨스트민스터 타운하우스를 설계하도록 의뢰하여, 두 건물 모두 게이퍼 하우스라고 명명했다.[18] 첫 번째 집은 게이퍼 가 12번지에 지어졌으며(1923–26년),[19] 금박으로 완전히 장식된 응접실을 가지고 있었다.[18] 게이퍼 가와 그레이트 피터 가의 코너에 있는 두 번째 집(1929–32년)은 아르 데코 스타일로 장식되었으며,[20] 거울 벽과 천장을 많이 사용했는데, 언론에서 "마운트 템플 여사의 크리스탈 궁전"이라고 불린 욕실이 가장 유명했다.[18]
가족은 아일랜드 서부 해안에 클래시본 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7. 사망
8. 평가 및 유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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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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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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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y Delamere, Figure in Murder,
https://query.ny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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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House and Gayfere House
201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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