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발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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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발칸 전쟁은 1912년 10월부터 1913년 5월까지 발칸 동맹(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과 오스만 제국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발칸반도의 민족주의적 갈등과 열강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발칸 동맹은 오스만 제국의 약화를 틈타 영토 확장을 노렸다. 전쟁은 몬테네그로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었으며, 불가리아는 트라키아에서,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에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와 이피로스에서 각각 승리했다. 오스만 제국은 여러 전선에서 병력 분산, 장비 및 훈련 부족, 해상 수송 차단 등의 이유로 패배했다. 1913년 5월 30일 런던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은 유럽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발칸 동맹은 영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지역의 영토 분배를 둘러싸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그리스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제2차 발칸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 중 양측 모두 잔학 행위를 저질렀으며,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고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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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발칸 전쟁 - 발칸 동맹
발칸 동맹은 1912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그리스가 결성한 군사 동맹으로, 복잡한 국제 정세와 각국의 이해관계 충돌, 오스만 제국의 약화가 배경이었으나, 영토 야망과 불신으로 제2차 발칸 전쟁을 초래하며 붕괴되어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 - 제1차 발칸 전쟁 - 런던 조약 (1913년)
런던 조약 (1913년)은 제1차 발칸 전쟁 종전 후 알바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오스만 제국이 발칸 동맹에 영토를 할양하는 내용을 담았지만, 알바니아 국경선 및 영토 분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제2차 발칸 전쟁을 촉발했다. - 1913년 그리스 - 부쿠레슈티 조약 (1913년)
부쿠레슈티 조약 (1913년)은 제2차 발칸 전쟁의 종결을 위해 체결되었으며, 불가리아는 영토를 잃고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는 영토를 확장하며 발칸 반도 국가 간의 세력 균형을 변화시켰다. - 1913년 그리스 - 제2차 발칸 전쟁
제2차 발칸 전쟁은 1913년 제1차 발칸 전쟁의 승전국들이 마케도니아 분할 문제로 충돌하여 불가리아가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하며 시작되었으나, 주변국의 참전으로 불가리아는 패배하여 영토를 잃고 발칸 반도의 불안정을 심화시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에 영향을 주었다.
제1차 발칸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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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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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발칸 전쟁의 일부 |
시기 | 1912년 10월 8일 – 1913년 5월 30일 (1년, 7개월, 3주) |
장소 | 발칸 반도 |
결과 | 발칸 동맹의 승리, 런던 조약 체결,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가 발칸 동맹국들에게 분할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발칸 동맹: 불가리아 왕국 그리스 왕국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
교전국 2 | 오스만 제국 |
지휘관 | |
발칸 동맹 | 페르디난드 1세 블라디미르 바조프 게오르기 바조프 미하일 사보프 이반 피체프 바실 쿠틴체프 니콜라 이바노프 라드코 디미트리예프 스틸리얀 코바체프 게오르기 토도로프 안드라니크 오자니안 가레긴 즈데 요르요스 1세 (암살)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콘스탄티노스 1세 파나이오티스 당글리스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 요안니스 다미아노스 니콜라오스 델라그라마티카스 콘스탄티노스 사푼차키스 디미트리오스 마타이오풀로스 콘스탄티노스 다미아노스 페타르 1세 알렉산다르 왕자 라도미르 푸트니크 페타르 부요비치 스테파 스테파노비치 보지다르 얀코비치 지보인 미시치 파블레 유리시치 슈투름 니콜라 1세 다닐로 페트로비치 페타르 왕자 얀코 부코티치 라도미르 베쇼비치 |
오스만 제국 | 메흐메트 5세 (항복) 마흐무트 셰브케트 파샤 엔베르 파샤 나짐 파샤 제키 파샤 에사트 파샤 (항복) 압둘라 파샤 (포로) 알리 리자 파샤 하산 타흐신 파샤 (항복) 이스마일 하키 파샤 하산 르자 파샤 (암살) 메흐메트 슈크뤼 파샤 에사드 파샤 톱타니 (항복) 라우프 파샤 |
병력 규모 | |
발칸 동맹 | 불가리아: 450,300+명 세르비아: 230,000명 그리스: 125,000명 몬테네그로: 44,500명 총합: 850,000+명 |
오스만 제국 | 436,742명 (전쟁 말기에 발칸 동맹국보다 훨씬 많음) |
피해 규모 | |
발칸 동맹 | 불가리아: 전사: 14,000명 실종: 4,926명 부상: 50,000명 질병 사망: 19,000명 그리스: 전사: 5,169명 부상: 23,502명 질병 사망: 1,550명 세르비아: 전사: 5,000명 부상: 18,000명 질병 사망: 6,698명 몬테네그로: 전사: 2,836명 부상: 6,602명 질병 사망: 406명 총합: 156,139명 (사망, 부상, 질병) |
오스만 제국 | 전사: 50,000명 부상: 100,000명 포로: 115,000명 질병 사망: 75,000명 총합: 340,000명 (사망, 부상, 포로, 질병) |
민간인 피해 | 다수의 알바니아인과 오스만인 민간인 사상자 발생 |
2. 배경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라 불릴 정도로 민족주의 갈등과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초까지 발칸반도 대부분을 지배했지만, 1829년 그리스 독립을 시작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이 자치령으로 바뀌거나 독립하면서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1912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비밀리에 '발칸 동맹'을 결성했다.[100] 각 국가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며,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았다.
1908년, 오스만 제국에서 청년 튀르크당이 혁명을 일으키자 발칸 국가들은 긴장했다. 청년 튀르크당은 극단적 튀르크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영토를 잃은 오스만 제국의 재침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면서 발칸 국가들의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점령을 원했지만 보스니아 위기로 좌절되었고, 1908년 10월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으로 세르비아는 남쪽으로 전쟁 노력을 돌렸다. 병합 이후 청년 투르크당은 보스니아의 무슬림 인구를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시키려 했고, 이들을 무슬림이 거의 없는 북부 마케도니아 지역에 재정착시켰다. 그러나 이주민들은 기존의 알바니아 무슬림 인구와 결합하여 1911년 알바니아 봉기 및 1912년 알바니아 봉기에 참여했고, 일부 알바니아 정부군도 이에 가담했다.[10][11]
1911년 이탈리아-투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자, 발칸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약화를 확신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1912년 봄과 여름, 기독교 발칸 국가들은 군사 동맹 네트워크인 발칸 동맹을 결성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비롯한 열강들은 발칸 동맹의 형성에 반대했지만 실패했다. 9월 말, 동맹과 오스만 제국은 군대를 동원했다. 몬테네그로가 10월 8일(9월 25일)에 가장 먼저 전쟁을 선포했고,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는 10월 17일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17]
3. 발칸 동맹의 결성
발칸 동맹은 비밀리에 전쟁 확대를 앞두고 슬라브계 3개국 연합(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은 전쟁 노력(산자크 전구에서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전구와 트라키아 전구에서의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을 통합하는 대규모 계획을 수립했다.[100]
불가리아는 4개 발칸 국가 중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으며, 크고 잘 훈련되고 장비가 잘 갖춰진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1]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서의 작전에 집중했으며 3개 군을 편성하여 트라키아에 주력을 배치했다.
세르비아는 오브체 폴레 고원, 즉 스코페 앞에서 오스만 제국 바르다르 군과의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질것으로 예상하고 주력 부대는 스코페를 향한 진격을 위해 3개 군으로 편성되었고, 1개 사단과 1개 독립 여단은 노비 파자르 산자크에서 몬테네그로 군과 협력하도록 배치되었다.
그리스는 크레타 섬과 남부 마케도니아, 이피로스 지역을 수복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며,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다. 그리스는 발칸 동맹의 주요 3국 중 가장 약하다고 여겨졌으나 해군은 강력했고, 오스만 군의 아시아 측에서 유럽 측으로의 증원 부대의 해상 수송을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발칸 동맹 각국 중에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몬테네그로는 발칸 반도에서 가장 작은 국가였지만, 전쟁 이전 몇 년 동안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향상시켰다. 몬테네그로인은 훈련받은 경험 많은 전사로 명성이 높았지만,[108] 몬테네그로군은 소규모에 구식 상태였다. 몬테네그로의 주요 전쟁 목표는 슈코더의 주요 도시 점령이었으며, 이어서 노비 파자르로의 작전이 예정되었다.
3. 1. 발칸 동맹 국가들의 동기
발칸 동맹은 비밀리에 전쟁 확대를 앞두고 슬라브계 3개국 연합(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은 전쟁 노력(산자크 전구에서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전구와 트라키아 전구에서의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을 통합하는 대규모 계획을 수립했다.[100]
불가리아는 4개 발칸 국가 중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으며, 크고 잘 훈련되고 장비가 잘 갖춰진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1]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서의 작전에 집중했으며 3개 군을 편성하여 트라키아에 주력을 배치했다.
세르비아는 오브체 폴레 고원, 즉 스코페 앞에서 오스만 제국 바르다르 군과의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질것으로 예상하고 주력 부대는 스코페를 향한 진격을 위해 3개 군으로 편성되었고, 1개 사단과 1개 독립 여단은 노비 파자르 산자크에서 몬테네그로 군과 협력하도록 배치되었다.
그리스는 크레타 섬과 남부 마케도니아, 이피로스 지역을 수복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며,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다. 그리스는 발칸 동맹의 주요 3국 중 가장 약하다고 여겨졌으나 해군은 강력했고, 오스만 군의 아시아 측에서 유럽 측으로의 증원 부대의 해상 수송을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발칸 동맹 각국 중에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몬테네그로는 발칸 반도에서 가장 작은 국가였지만, 전쟁 이전 몇 년 동안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향상시켰다. 몬테네그로인은 훈련받은 경험 많은 전사로 명성이 높았지만[108], 몬테네그로군은 소규모에 구식 상태였다. 몬테네그로의 주요 전쟁 목표는 슈코더의 주요 도시 점령이었으며, 이어서 노비 파자르로의 작전이 예정되었다.
3. 1. 1. 불가리아
불가리아는 4개 발칸 국가 중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며, 크고 잘 훈련되고 장비가 잘 갖춰진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1] 430만 인구 중 총 599,878명의 병력을 동원했다.[3] 불가리아 야전군은 9개 보병 사단, 1개 기병 사단, 1,116개 포병 부대로 구성되었다.[1] 총사령관은 차르 페르디난트였으며, 작전 지휘는 그의 부관인 미하일 사보프 장군이 맡았다. 불가리아는 또한 자국의 흑해 해안을 따라 작전을 수행하는 6척의 어뢰정으로 구성된 작은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25]
불가리아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서의 작전에 집중했다. 3개 군을 편성하여 트라키아에 주력을 배치했다. 제1군 (79,370명)은 바실 쿠틴체프 장군 휘하에 3개 보병 사단을 두고 얌볼 남쪽에 배치되어 툰자 강을 따라 작전을 수행했다. 제2군 (122,748명)은 니콜라 이바노프 장군 휘하에 2개 보병 사단과 1개 보병 여단을 두고 제1군 서쪽에 배치되어 아드리아노플 (에디르네)의 강력한 요새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3군 (94,884명)은 라드코 디미트리에프 장군 휘하에 제1군 동쪽 뒤에 배치되어 기병 사단에 의해 가려져 오스만 제국군의 눈에 띄지 않도록 계획되었다. 제3군은 3개 보병 사단을 보유하고 스트란자 산을 넘어 키르크킬리세 (크르클라렐리) 요새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2사단 (49,180명)과 제7사단 (48,523명)은 각각 서부 트라키아와 동부 마케도니아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3. 1. 2. 세르비아
세르비아는 인구 2,912,000명 중 약 255,000명을 동원했으며, 이전 국방부 장관 라 도미르 푸트니크의 실질적인 지휘 하에 228문의 중포를 10개 보병 사단, 2개 독립 여단, 1개 기병 사단으로 편성했다.[3] 세르비아 최고 사령부는 오스만 제국 바르다르 군과의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질 가장 유력한 장소를 오브체 폴레 고원, 즉 스코페 앞이라고 결론 내렸다. 따라서 주력 부대는 스코페를 향한 진격을 위해 3개 군으로 편성되었고, 1개 사단과 1개 독립 여단은 노비 파자르 산자크에서 몬테네그로 군과 협력하도록 배치되었다.
제1군(132,000명)은 알렉산다르 왕세자가 지휘하고 참모장은 페타르 보요비치 대령이었다. 제1군은 스코페로 진격하는 중앙 부대를 형성했다. 제2군(74,000명)은 스테파 스테파노비치 장군이 지휘했으며, 세르비아 사단 1개와 불가리아 사단 1개(제7 릴라 사단)를 포함했다. 이 부대는 군대의 좌익을 형성하여 스트라친으로 진격했다. 불가리아 사단 편성은 세르비아군과 불가리아군 간의 전시 전 약정에 따른 것이었지만,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스테파노비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불가리아 최고 사령부의 명령만 따랐다.[105] 제3군(76,000명)은 보지다르 얀코비치 장군이 지휘했으며, 우익에 위치하여 코소보를 침공한 후 남쪽으로 이동하여 오브체 폴레에서 예상되는 전투에서 다른 군대와 합류하는 임무를 맡았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 너머 세르비아 북서부에는 2개의 집중 부대가 더 있었다. 이바르 군(25,000명)은 미하일로 지브코비치 장군 휘하에 있었고, 야보르 여단(12,000명)은 밀로보예 안젤코비치 중령 휘하에 있었다.
3. 1. 3. 그리스
그리스는 크레타 섬과 남부 마케도니아, 이피로스 지역을 수복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며,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다.
당시 인구가 2,666,000명[4]이었던 그리스는 발칸 동맹의 주요 3국 중 가장 약하다고 여겨졌다. 가장 소규모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게다가 16년 전의 그리스-터키 전쟁에서는 오스만 군에게 허무하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 해군은 강력했고, 오스만 군의 아시아 측에서 유럽 측으로의 증원 부대의 해상 수송을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발칸 동맹 각국 중에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발칸 동맹 측에게 극히 중요한 요소였다. "그리스는 병력 60만 명분에 해당하는 기여가 가능하다"라고, 동맹 가입 교섭을 위해 파견된 그리스 대사가 소피아에서 말했다. 말하자면 "20만 명이 야전에 동원될 수 있으며, 함대에 의해 오스만 군 40만 명이 살로니카 · 갈리폴리 반도 간 상륙을 막을 수 있다"라고[106].
개전 당시, 그리스 육군은 1911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군사 원조 하에 재건 중에 있었다. 동원 후, 그리스 육군은 2개 군으로 분할되었다. 그 중 테살리아군은 왕태자(후의 콘스탄티노스 1세)를 군 사령관,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 중장을 참모장으로 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제 조직 운용 및 작전상 의사 결정은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소령 (후에 장군)이 담당했다. 예하에는 7개 보병 사단과 1개 기병 연대, 4개 독립 에우조네스대대가 있었고, 병력 약 10만 명이었다. 테살리아군의 임무는, 요새화된 오스만 제국 국경을 돌파하여 마케도니아 중부 및 남부에 진격하여, 살로니카와 모나스티르(현 비톨라)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에피루스군은 8개 대대 편성으로 총 10,000~13,000명으로 구성되어, 콘스탄티노스 사푼자키스 중장을 군 사령관으로 하여 이피로스로 침공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고도로 요새화된 이피로스의 중심 도시 요안니나를 공략하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당분간은 오스만 군을 견제하여 유인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테살리아군의 임무 완료 후에 증원을 얻을 계획이었다.
그리스 해군은 엄청난 수의 신형 함정 수입과 1911년부터의 영국의 원조 하에서의 개조로, 비교적 현대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주력은 1910년 진수한 고속의 장갑순양함 "게오르기오스 아베로프"였다. 또한 1912년과 1906년에 각각 8척씩 건조한 현대적인 구축함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외의 주력함은 구식이었지만, 이러한 훈련이 잘 된 신예함의 존재로 인해 에게 해에서의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107]. 함정의 대부분은 에게 해 함대에 속해 있었고, 뛰어난 제독인 파블로스 쿤두리오티스 소장의 지휘 하에 있었다. 별도로, 구축함과 어뢰정으로 구성된 몇몇 소규모 임무 부대가, 에게 해 및 이오니아 해에서의 오스만 제국의 소형 함선 소탕을 위해 편성되었다.
3. 1. 4. 몬테네그로
몬테네그로는 발칸 반도에서 가장 작은 국가였지만, 전쟁 이전 몇 년 동안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향상시켰다. 또한, 오스만 제국에 의해 완전히 정복된 적이 없는 유일한 발칸 국가였다. 몬테네그로는 동맹의 가장 작은 구성국으로서 큰 영향력은 없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의 행동에 대응하려 할 때 몬테네그라가 충분히 준비할 시간이 있었고, 이는 몬테네그라의 성공적인 군사 작전에 도움이 되었기에 유리했다.
몬테네그로인은 훈련받은 경험 많은 전사로 명성이 높았지만[108], 몬테네그로군은 소규모에 구식 상태였다. 몬테네그로는 동원이 완료된 10월 첫째 주 시점에서 44,500명의 병력을 25만 명의 인구에서 충원했다. 118문의 화포와 3만 6천 정의 소총, 44정의 기관총을 장비했으며[109], 각 3개 여단으로 편성된 4개 사단을 구성했다. 명목상의 통수권자는 국왕 니콜라 1세였고, 실제 최고 지휘는 총참모장 라자 로비치 장군이 담당했다. 몬테네그로의 주요 전쟁 목표는 슈코더의 주요 도시 점령이었으며, 이어서 노비 파자르로의 작전이 예정되었다.
4. 전쟁의 경과
몬테네그로는 1912년 10월 8일(율리우스력 9월 25일) 오스만 제국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제1차 발칸 전쟁을 시작했다. 이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가 차례로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했다.
4. 1. 주요 전선
4. 1. 1. 불가리아 전선
트라키아 전선의 오스만 제국군은 적 전력 추정에 관한 정보상의 오류로 인해 위기에 놓였다. 오스만 제국 측은 마케도니아 전선에 관한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정치적 및 군사적 비밀 협정에 눈치 채지 못하고 마케도니아 전선에 주력을 배치한 채였다. 당시 오스만 제국 정부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 중 한 명인 독일 대사 한스 폰 방겐하임(en)은 오스만 제국 측의 상황 판단에 대해, 불가리아군의 주력은 세르비아군과 함께 마케도니아 전선에 투입될 것으로 예상한다는 취지로 10월 21일 베를린에 보고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군의 압둘라 파샤 사령부는 트라키아의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 동쪽에서 마주칠 불가리아군의 전력을 보병 3개 사단과 지원 기병대로만 추정했다.[115] 군사 역사가 에드워드 에릭슨에 따르면 이러한 오스만 제국 측의 추정은 발칸 동맹의 전쟁 목적에 대한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트라키아의 오스만 제국군에게는 치명적인 판단이었고, 절망적인 전력비로 불가리아군 주력을 맞이해야 하는 결과를 낳았다.[116] 또한 이러한 잘못된 상황 판단은 트라키아 전선에서의 오스만 제국군의 초기 전략 방침이 파멸적으로 공격적이 된 원인이기도 했다.
트라키아 전선에서 불가리아군은 병력 346,182명을 투입하여 트라키아 동부의 오스만 제국 제1군 105,000명 및 서부의 크르자알리 지대 24,000명과 싸웠다. 불가리아군의 전투 서열은, 트라키아 동부에는 제1군(바실 쿠친체프 중장), 제2군(니콜라 이바노프 중장), 제3군(라트코 디미트리예프 중장)의 총 297,002명, 서부에는 제2사단(스틸리얀 코바체프 장군)을 주력으로 49,180명(상비군 33,180명, 기타 16,000명)이었다.[117]
첫 번째 대규모 전투는 아드리아노플과 크르크 킬리세(오늘날의 크르크라렐리)를 잇는 방어선에서 일어났다. 불가리아 제1군과 제3군의 총 174,254명이 오스만 제국의 동부군 96,273명을[118][117] 게치켄리, 쉴로르, 페트라 근교에서 격파했다. 이 지역에 있던 오스만 제국 제15군단은 그리스군의 상륙 작전에 대비하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로 급히 이동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상륙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다. 제15군단의 전출로 인해 아드리아노플과 디메토카(en) 사이가 무방비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대신 동부군 예하의 제4군단이 배치되었다. 이 두 개 군단의 동부군 전투 서열에서의 이탈 결과, 트라키아 전선의 오스만 제국군은 두 개로 분단되었다.[119] 아드리아노플 요새 부대 61,250명은 고립되어 아드리아노플 전투()와 크르크라렐리 전투(en)에서 불가리아 제3군에게 압도당하여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패배했다.[119] 그리스 해군이 에게 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계획에 있던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으로부터의 군단 해상 수송은 실행할 수 없었다.[120] 그리스 해군은, 3개 군단이라는 오스만 제국 육군의 강력한 전력을 무력화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가장 중요한 초전인 트라키아 전선에 관해 수행했다.[120] 게다가, 그리스 해군은, 마케도니아에서의 작전이 고비를 넘긴 후, 불가리아 제7사단 "릴라"에 속하는 48,000명의 불가리아 병사를 마케도니아에서 트라키아로 급속 수송함으로써, 보다 직접적인 기여도 하고 있다.

크르크라렐리 전투 이후, 불가리아군 상층부는 며칠간 대기를 명령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군은 루르부르가즈-카라아치-부나르히사르를 잇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가리아군은, 제1군단과 제3군단의 보병 107,386명과 기병 3,115기, 기관총 116정, 화포 360문의 전력으로 공격을 재개하여, 증원을 받아 보병 126,000명과 기병 3,500기, 기관총 96정, 화포 342문을 모은 오스만군을 격파하고[121], 마르마라 해에 도달했다. 이 회전은, 유럽에서는 보불 전쟁 종결 이후 최대의 전투였으며,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이것을 넘는 규모의 전투는 없었다.[122] 패배한 오스만군은, 차탈자에 최종 방어선을 구축하고, 수도 이스탄불이 있는 반도 방어를 꾀했다. 아시아 측으로부터의 증원 부대도 도착한 덕분에, 오스만 제국군은 불가리아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 방어선의 진지는, 1877년의 러시아-튀르크 전쟁 중부터 독일인 기술자 폰 블루 파샤(von Bluhm Pasha)의 설계로 건설되었지만, 1912년 당시에는 이미 노후화되었다고 여겨졌다.[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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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oter = 안드라니크 오자니안 ''(왼쪽)'' 과 가레긴 느즈데 ''(오른쪽)'' 은 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폴리스 의용군에서 아르메니아 의용병 부대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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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투 동안, 불가리아의 제2 트라키아 사단 지휘하의 4,9180명은 하스코보 종대와 로도피 종대로 나뉘어, 에게 해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오스만군의 크르자알리 지대(크르자알리 예비 사단, 크르자알리 방어 사단 및 제36연대의 총 24,000명)는, 살로니카와 데데아치(현 알렉산드루폴리)를 잇는 철도선을 가로지르는 400km의 전선을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만족스러운 저항은 하지 못했다. 11월 26일에는, 오스만 측 사령관 야베르 파샤가 부하 장병 10,131명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크르자알리 지대의 항복은, 그리스군의 살로니카 점령과 함께, 마케도니아 전선의 오스만 제국군으로부터 트라키아 주둔군의 완전한 분단으로 이어졌다.
1912년 11월 17일(율리우스력 11월 4일), 불가리아군은 차탈자 방어선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러시아 정부는, 불가리아에 대하여, 만약 이스탄불을 점령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불가리아에 대해 개전하겠다는 경고를 보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단행되었다. 이것은, 불가리아의 지도자들에게 현실적인 사고가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징후였다. 불가리아군의 공격 병력은 176,351명과 화포 462문으로, 방어하는 오스만군의 140,571명과 화포 316문[124]보다 우세했지만, 오스만 제국군은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1912년 12월 3일(율리우스력 11월 20일)에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 사이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그 후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도 따랐다. 런던에서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 협상에 참여했지만, 속으로는 강화에 응할 마음이 없었고, 에피루스 방면에서의 작전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 후, 1913년 2월 5일(율리우스력 1월 23일)에 오스만 제국에서 엔베르 파샤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여, 카밀 파샤(en) 정권이 무너지자, 강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2월 16일, 휴전 기간이 끝나고,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2월 20일, 오스만 제국군은 차탈자(Çatalca)와 남쪽의 갈리볼리 반도 2개 방향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갈리볼리 반도에서 고립된 약 3만 명의 오스만군 중 약 15,000명이 화포 36문의 지원을 받아 남쪽의 보라유르(갈리볼리 반도의 지협 도시)로 출격했다. 이와 동시에 제10군단에 속하는 19,858명과 화포 48문이 샤르쾨이(en, 현 테키르다그 주의 도시)에 상륙했다. 이 두 공격은 해군 함정의 지원도 받았다. 오스만 제국 측의 노림수는 포위망에 압력을 가해 간접적으로 아드리아노플을 돕는 데 있었다. 당시 적 병력은 10,000명과 화포 78문이었다[125]. 이 외에도 이 지역에는 불가리아군의 신설된 제4군(스틸리안 코바체프 en 장군)의 92,289명이 전개되어 있었지만, 오스만 측은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폭 1800m의 좁은 지협에 대한 오스만군의 공격은 짙은 안개와 강력한 불가리아군의 포격 및 기관총탄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리고 불가리아군의 역습으로 격퇴되어 그날의 끝에는 원래 위치로 되돌아갔다. 그 사이에 샤르쾨이에 상륙한 오스만 제국 제10군은 2월 23일(율리우스력 2월 10일)까지 전진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불가리아군 코바체프 장군이 보낸 증원 부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양군 모두 손실은 경미했다. 보라유르 방면의 공격이 실패하자 2월 24일에 오스만 제국 제10군은 원래의 수송선에 탑승하여 갈리볼리 반도로 철수했다.
한편, 차탈자에서 벌어진 불가리아군 주력인 제1군 및 제3군에 대한 반격은 단 1개 사단만으로 시작되었다. 당초의 목표는 갈리볼리 반도·샤르쾨이 방면에서의 반격을 지원하기 위해 불가리아군을 유인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 공격은 뜻밖의 성공을 거두었다. 전선의 북부에서 불가리아군은 15km나 후퇴했고, 남부에서는 20km 이상 밀려나 제2선 진지로의 철수를 강요당했다. 갈리볼리 반도 방면의 반격이 실패로 끝나자 오스만군은 차탈자 선을 떠나는 것을 꺼려 부대를 정지시켰지만, 불가리아군은 며칠이 지나서야 적의 공격이 멈춘 것을 알아차렸다. 2월 15일까지 다시 전선은 교착 상태가 되었지만, 휴전 발효까지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 공세는 오스만군이 불가리아군에게 큰 손해를 입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보면 갈리볼리 반도 방면의 공격은 실패했고, 아드리아노플 구원도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군의 패배라고 할 수 있다.
아드리아노플 공방전 (1912–13)}}
샤르쾨이-보라유르 방면의 반격 실패가 아드리아노플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3월 11일, 발칸 동맹군의 최후의 아드리아노플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게오르기 바조프() 장군이 이끄는 불가리아 제2군 153,700명과 세르비아군 2개 사단 총 47,275명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아드리아노플 시가지를 점령했다. 동맹군 측의 손실은 불가리아군 8,093명과 세르비아군 1,462명에 달했다[126]. 불가리아군의 포위전 개시 이후 총 손실은 18,282명에 달했다. 오스만군의 손실은 포위전 개시 이후 전사자 13,000명, 부상자 수는 불명, 19,750명이 포로가 되었다[127]. R.C. Hall과 E.J. Erickson에 따르면, 이 엄청난 사상자는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들에 따르면 손실이 많아진 원인은 주로 정치적 판단과 페르디난트 1세 등 불가리아 지도자 일부가 국가의 위신을 과도하게 의식한 데에 있다. 만약 서두르지 않고 포위를 계속했다면 식량 부족으로 아드리아노플은 언젠가는 함락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 전투가 가져온 최대 영향은 오스만 제국군 지휘관들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는 것을 포기했다는 데에 있다. 이후 오스만군의 전투는 항상 신통치 않게 되었다[128].

4. 1. 2. 그리스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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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정보력은 그리스군의 작전 방침에 대한 예측에서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오스만 제국군 참모들은 그리스군의 침공이 마케도니아 전선과 이피로스 전선 양쪽에서 동등한 전력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 때문에 오스만 제2군 사령부는 예하 7개 사단을 각각 이피로스와 마케도니아 남부에 있는 야니아 군단과 제8군단으로 균등하게 분배했다. 이는 서부군 집단에게 치명적인 결정이었다. 마케도니아 전선의 주요 3거점의 전략적 핵심인 테살로니키의 조기 함락을 초래했고, 그 시점에서 패배를 사실상 결정짓게 했다. 반면 그리스군은 역시 7개 사단을 보유했지만, 그 전부를 마케도니아 전선의 오스만 제8군단에 투입하고, 이피로스 전선에는 총 1개 사단 상당의 독립 대대군만을 투입했을 뿐이었다. 당연히 그리스군은 오스만 제8군단에 대해 우위를 점했다[129]。
선전 포고와 동시에 그리스의 테살리아군은 왕세자에 이끌려 북부로 진군하여 사란다포론의 전투에서 오스만군의 방어선을 돌파, 사란타포로(en, 현재 라리사 현)로 향했다. 1912년 11월 2일(율리우스력 10월 20일) 예니제의 전투에서도 그리스군이 승리를 거둔 후, 오스만군 테살로니키 수비대 26,000명이 항복했고, 같은 해 11월 9일(율리우스력 10월 27일) 테살로니키 시는 함락되었다. 그리하여 오스만 측에서는 우스투르마 군단과 제8군단 사령부 및 2개 정규 사단(제14사단・제22사단), 4개 예비 사단(테살로니키, 드라마, 나스리치, 세레스)이 전선에서 탈락했다. 게다가 테살로니키는 서부군 집단의 주요 무기 집적소였기 때문에 70문의 화포와 30정의 기관총, 70,000정의 소총까지 잃었다. 오스만 측 기록에 따르면, 마케도니아 남부에서의 전사자는 15,000명, 인적 손해는 총 41,000명에 달했다[112]。 마케도니아의 오스만군 궤멸은 북쪽에서 세르비아군과 교전 중이던 바르다르군의 운명마저 결정했다. 테살로니키 함락으로 바르다르군은 전략적으로 고립되었고, 보급과 증원도 끊겨 궤멸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예니제의 전투 결과를 알게 된 불가리아군 사령부는 릴라 제7사단을 북쪽에서 예니제(en)로 급파했다. 1주일 후 동 사단은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전날 그리스군이 진주하여 수비대가 항복한 후였다. 그 후, 11월 10일까지 그리스군은 점령지를 확대하여 도이란 호(en)에서 카발라 서쪽의 판가이온 산 (en)까지 제압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서부에서는 그리스군과 세르비아군 사령부 간의 협력이 부족하여 1912년 11월 15일(율리우스력 11월 2일) 솔로비치의 전투에서 그리스군이 패하여 밀려났다. 이는 그리스 제5사단이 오스만 제6군단과 조우전이 된 전투이다. 오스만 제6군은 세르비아군과의 프리레프(현 프릴레프)에서의 전투에서 패하여 알바니아로 철수 중인 부대였지만, 그리스군은 그 존재를 알지 못했고, 제5사단은 고립되었다. 우세한 오스만군의 반격이 모나스티르를 향했고, 그리스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세르비아군이 모나스티르에서 그리스군을 몰아냈다고 할 수 있다.
에피루스 전선에서 그리스군은 열세한 병력으로 개전을 맞이했지만, 오스만 제국군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인해 1912년 10월 21일에 프레베자 점령에 성공했고, 이어서 요안니나를 향해 북진을 계속했다. 11월 5일에는 케르키라 (코르푸)에서 출격한 그리스군 소부대가 히마라 해안에 상륙하여 별다른 저항 없이 점령했다[130]。 또한 11월 20일에는 마케도니아 서부에서 침입한 그리스군이 코르차로 입성했다. 그러나 그리스군의 에피루스 전선 초기 병력으로는 비자니에 구축된 독일식 요새를 함락시킬 수 없었고, 비자니 방어선에 지켜진 요안니나로 진군할 수 없었다. 그리스군은 멈춰서 마케도니아 전선으로부터의 증원 부대를 기다리게 되었다[131]。
마케도니아 전선의 결착이 나자, 그리스군은 그 주력을 왕태자가 직접 이끌고 에피루스 전선으로 전진시켰다. 그리고 비자니 전투(en)에서 오스만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1913년 3월 6일 (율리우스력 2월 22일)에 요안니나를 점령했다. 비자니 공성전 중이던 1913년 2월 8일, 러시아인 조종사 니콜라이 사코프 (Николай Ставрович Саков)가 조종하는 그리스군의 복엽기가 비자니 요새의 성벽을 폭격하려 할 때, 대공포화에 의해 격추되었다. 이것은 세계 전사상 최초의 군용 비행기 피격 기록이었다. 사코프의 비행기는 프레베자 (레프카다 섬 북쪽 반대편) 근처에 불시착했고, 친그리스 주민들에게 구조받아 수리 후 다시 이륙하여 기지로 돌아갔다[132]。 요안니나 함락으로 그리스군은 에피루스 북부 (알바니아 남부)로 침공을 계속할 수 있었고, 해당 지역을 점령했다. 그리스군의 진군이 멈췄을 때, 그 전선은 북방의 세르비아군 지배지까지 가까이 있었다.
해상에서는 그리스 함대가 개전 초일부터 적극적인 작전 행동을 펼쳤다. 1912년 10월 6일부터 10월 20일 사이에 에게해 동부와 북부에 떠 있는 대부분의 섬들을 그리스 해군과 육군 분견대가 점령했다. 그리고 림노스 섬의 마우드로스 만에 전진 기지를 설치하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제압했다. 11월 8일에는 니콜라오스 보치스(en) 해군 대위를 정장으로 하는 그리스 어뢰정 11호가 테살로니키 항에 야음을 틈타 잠입하여 오스만 장갑함 "페트히 뷔렌트"를 격침하는 전과를 올려 크게 그리스 해군의 사기를 높였다.
한편, 오스만 제국 해군은 처음에는 다르다넬스 해협 내부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육상 전황이 악화되자 증원 부대를 긴급 수송하기 위해 에게해 침입을 시도했다. 그 결과, 1912년 12월 16일 (율리우스력 12월 3일)에 엘리 해전 (:en:Battle of Elli) 이 일어났지만, 그리스 측 제독 파블로스 쿤두리오티스 소장의 탁월한 전술 지휘와 그리스 함대 기함 "예오르요스 아베로프"의 고속 성능 앞에 오스만 제국 함대는 패배했다.
그리스 함대에 의한 봉쇄를 돌파하기 위한 다음 수단으로 오스만 제국 해군은 방호순양함 "하미디예"를 에게해에 잠입시켜 통상 파괴를 감행하게 했다. 그리스 측에서 "하미디예"에 대항 가능한 대형 고속함은 "아베로프"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베로프"를 유인하여 봉쇄 함대에 틈을 만들 수 있다고 기대했다. 출격한 "하미디예"는 그리스 측 경계선을 빠져나가 그리스의 소항 시로스(en)를 포격하여 정박 중이던 상선 1척을 격침했다. 그 후, 에게해에서 지중해 동부로 진출하고자 항해를 계속한 "하미디예"였지만, 그리스의 소형 함정에 쫓겨 홍해로 도망쳤다. 그러나 오스만 측이 기대한 "하미디예" 추격 명령은 그리스의 쿤두리오티스 소장에게 하달되었지만, 그는 이 명령을 거부했다. 그 때문에, 4일 후인 1913년 1월 18일 (율리우스력 1월 5일)에 오스만 주력 함대는 다시 에게해 침입을 시도했지만, 림노스 해전 (:en:Battle of Lemnos (1913))에서 "아베로프" 이하의 그리스 함대에 저지당했다. 림노스 해전에서의 패배를 마지막으로 오스만 제국 해군은 다르다넬스 해협 돌파를 포기했고, 그리스의 에게해에서의 제해권이 확립되었다. 후에 불가리아 제2군 사령관 이바노프 장군은 그리스 해군이 발칸 동맹의 승리에 관해 수행한 역할에 대해 "전 그리스 함대의 활동은 동맹군의 승리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고 지적하고 있다[133]。
4. 1. 3.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 전선




세르비아군은 오스만 제국의 서부군 주력 부대를 상대로 노비 파자르, 코소보, 북부 및 동부 마케도니아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전략적으로 세르비아군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작전을 수행하는 4개의 독립적인 군대와 부대로 나뉘었다: 노비 파자르의 야보르 여단과 이바르 군, 코소보의 제3군, 북부 마케도니아의 제1군, 동부 마케도니아의 불가리아에서 온 제2군. 결정적인 전투는 오스만 제국 바르다르군의 주력이 집결할 것으로 예상되는 오브체 폴레 평원에서 북부 마케도니아에서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세르비아 최고 사령부의 계획은 세 개의 세르비아군이 그 지역에서 바르다르군을 포위하여 격멸하는 것이었다. 제1군은 북쪽에서 (브라네-쿠마노보-오브체 폴레 선을 따라), 제2군은 동쪽에서 (크리바 팔란카-크라토보-오브체 폴레 선을 따라), 제3군은 북서쪽에서 (프리스티나-스코페-오브체 폴레 선을 따라) 진격했다. 제1군에게 주된 역할이 부여되었다. 제2군은 바르다르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필요할 경우 후방과 우익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제3군은 코소보를 점령하고 필요할 경우 바르다르군의 좌익과 후방을 공격하여 제1군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이바르 군과 야보르 여단은 계획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노비 파자르 산자크를 확보하고 제3군이 남쪽으로 진격한 후 코소보에서 제3군을 대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세르비아군은 (훗날 원수) 라토미르 푸트니크 장군의 지휘 하에 전쟁의 주요 목표인 바르다르 마케도니아에서 세 차례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그 지역의 오스만 제국군을 효과적으로 격멸하고 북부 마케도니아를 점령했다. 세르비아군은 또한 몬테네그로군이 산자크를 점령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에디르네 포위전에 불가리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두 개 사단을 파견했다. 마케도니아를 위한 마지막 전투는 비톨라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 바르다르군의 잔존 세력은 중앙 알바니아로 후퇴해야 했다. 전투 후, 세르비아 총리 니콜라 파시치는 푸트니크 장군에게 테살로니키 쟁탈전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푸트니크는 거절하고 군대를 서쪽으로 돌려 알바니아로 향했다. 그는 그리스와 불가리아 간의 테살로니키를 둘러싼 전쟁이 바르다르 마케도니아에 대한 세르비아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열강의 압력 이후, 세르비아는 북부 알바니아와 산자크에서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몬테네그로군이 계속되는 슈코더 포위전을 돕도록 중포 부대를 남겨두었다. 1913년 4월 23일, 슈코더 수비대는 기아로 인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라토미르 푸트니크 장군(후에 공작)이 지휘하는 세르비아군은 바르다르 마케도니아(현재 북마케도니아 영역)에서 세 번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이 지역의 오스만군을 교묘하게 격멸, 제1차 전쟁 목표인 마케도니아 북부 점령을 달성했다. 또한 세르비아군은 몬테네그로군의 산자크 제압을 지원하고 불가리아에 대해서도 아드리아노플 공략전 지원을 위해 2개 사단을 파견했다. 세르비아군의 마케도니아 방면에서의 마지막 작전은 알바니아 중부로 철수하려는 오스만 제국 바르다르군의 잔당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이 모나스티르 전투 이후 세르비아 총리 니콜라 파시치는 푸트니크 장군에게 타국보다 먼저 테살로니키를 공략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현명하게도 푸트니크 장군은 이 지시를 거부하고 대신 군대를 알바니아로 서진시켰다. 푸트니크는 테살로니키를 두고 그리스와 불가리아가 충돌할 것을 예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세르비아의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지배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 후 열강의 간섭을 받아 세르비아군은 알바니아 북부 및 산자크에서 철수하게 되었지만 몬테네그로군의 슈코더 포위전 지원을 위해 중포는 남겨졌다. 1913년 4월 23일, 마침내 식량이 떨어진 오스만군이 항복에 응하여 슈코더가 함락되었다.
5. 오스만 제국의 패배 요인
오스만 제국은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여러 요인으로 인해 패배했다. 우선,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병력이 분산되었다.[91] 오스만 제국은 이탈리아와 전쟁 중이었고,[110] 발칸 국가들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발칸 반도의 입지를 강화할 수 없었다.[110]
군사적으로, 오스만 제국군의 현대화는 늦었고, 장비와 훈련 수준이 발칸 동맹 국가들에 비해 열세였다.[92][93] 특히, 청년 튀르크당 혁명 이후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94] 압둘 하미드 2세의 폭압적 정권 하에서 오스만 군대는 쿠데타를 우려하여 전쟁 훈련이나 기동이 금지되었고,[92] 1908년 혁명 이후에도 충분한 훈련 시간을 갖지 못했다.[92] 또한, 오스만 군대는 ''니자미예'' 군대와 ''레디프'' 군대로 나뉘었는데, ''레디프'' 군대의 훈련은 소홀히 되어 전투력이 매우 낮았다.[93]
오스만 제국의 전략적 상황은 발칸 국가들의 협공에 대해 국경을 방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려웠다. 오스만 지도부는 모든 영토를 확보하기로 결정하여 병력이 분산되었고, 그리스의 해상 통제로 인해 아시아로부터 증원을 받기 어려웠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 3개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최고 사령부는 기존의 지휘 구조를 무시하고 새로운 상위 지휘부를 창설하는 실수를 반복했다.[111]
오스만 제국 해군은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 개혁을 시작했지만, 정치적 격변과 부서 간 갈등으로 인해 개혁은 더뎠다.[31] 그리스 해군에게 에게 해의 제해권을 빼앗겨 아시아 지역으로부터의 증원과 보급이 차단되었다.[112] 오스만 제국은 투르구트 레이스급 장갑함의 바르바로스 하이레딘과 같은 강력한 함선을 보유했지만,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아베로프보다 속도가 느렸다.
결정적으로, 오스만 정부는 동원령이 부분적으로 완료된 상태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결정을 내렸다.[91] 전쟁 선포 당시 발칸 반도의 오스만 군대는 발칸 동맹 군대보다 수적으로 열세였고,[91] 동원은 지연되었으며, 많은 지휘관이 신참이었다.[91]
6. 전쟁의 결과
1913년 5월 30일, 런던 조약이 체결되면서 제1차 발칸 전쟁이 종결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에네즈(en)-키이쿄이(en) 선 서쪽의 유럽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불가리아 왕국은 마케도니아 지방 일부를 제외한 루멜리아(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대부분을, 그리스 왕국은 크레타섬과 남부 마케도니아 지방 일부 · 남부 이피로스를, 세르비아 왕국은 북부 마케도니아 지방 일부를 합병하거나 세력권 내에 넣었다. 알바니아는 독립 국가로 승인되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지방에 대한 영토 배분을 둘러싸고 불가리아 왕국과 세르비아 왕국 · 그리스 왕국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불가리아는 북부 마케도니아 분할을 놓고 세르비아와, 남부 마케도니아를 놓고 그리스와 분쟁을 겪었으며, 군대를 동트라키아에서 분쟁 지역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리스와 세르비아는 불가리아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을 체결 (1913년 그리스-세르비아 동맹)하여, 결국 1913년 6월 29일 제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났다.
7. 전쟁의 영향
제1차 발칸 전쟁은 1913년 5월 30일 런던 조약 체결로 종결되었다.[134] 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 주변을 제외한 유럽 영토 대부분을 잃었고, 발칸 동맹 국가들은 영토를 확장했다.[96] 불가리아 왕국은 루멜리아(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대부분을, 그리스 왕국은 크레타섬과 남부 마케도니아 지방 일부 · 남부 이피로스를, 세르비아 왕국은 북부 마케도니아 지방 일부를 합병하거나 세력권에 넣었다. 알바니아는 독립 국가로 선언되었다.[134]
그러나 마케도니아 지방의 영토 분배를 둘러싸고 불가리아 왕국과 세르비아 왕국, 그리스 왕국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134]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고, 세르비아와 그리스는 각각 북부와 남부 마케도니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불가리아는 군사적 해결도 불사하며 군대를 동원 해제하지 않았다. 이에 1913년 5월 1일, 그리스와 세르비아는 불가리아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5월 19일에는 상호 우호 방위 조약을 체결했다. 결국 1913년 6월 29일, 제2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열강들은 전쟁으로 이어진 상황을 인지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영토 보전에 대한 공식적인 합의를 이루었고, 이는 발칸 국가들에게 엄중한 경고로 이어졌다. 그러나 각 열강은 이해관계가 상충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비공식적인 외교적 접근 방식을 취했다. 혼재된 비공식적인 신호로 인해 상호 공식 경고의 예방 효과가 무효화되었고, 그들은 전쟁을 예방하거나 종식시키지 못했다.
- 러시아 제국은 발칸 동맹 결성을 주도했으며, 이를 경쟁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항하는 미래의 전쟁에서 필수적인 도구로 여겼다.[134][96] 그러나 러시아는 불가리아가 트라키아와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프랑스 제3공화국은 1912년에 독일 제국과의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껴, 전쟁에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동맹국인 러시아에게 발칸 동맹의 행동으로 인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잠재적인 분쟁이 발생할 경우 참전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 대영 제국은 공식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토 보전을 지지했지만, 러시아의 영향력에 대응하기 위해 그리스의 동맹 가입을 장려하는 비밀 외교적 조치를 취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아드리아 해로의 진출과 남쪽으로의 확장을 모색했으며, 이 지역에서 다른 국가의 확장에 반대했다.
- 독일 제국은 오스만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으며, 공식적으로 전쟁에 반대했지만, 불가리아를 중앙 동맹국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결국,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촉발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 간의 갈등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8. 주요 전투 목록
전투 명칭 | 공격 측 | 지휘관 | 방어 측 | 지휘관 | 날짜 | 승리 측 |
---|---|---|---|---|---|---|
크르크킬리세 전투(en) | 불가리아 왕국 | 라트코 디미트리예프 장군, 이반 피체프 장군 | 오스만 제국 | 마흐무트 무흐타르 파샤 등 | 1912년 10월 24일 | 불가리아 왕국 |
룰레 부르가스 전투 | 불가리아 왕국 | 라트코 디미트리예프 장군, 이반 피체프 장군 | 오스만 제국 | 압둘라 파샤 | 1912년 10월 28일 ~ 31일 | 불가리아 왕국 |
바르나 해전 | 불가리아 왕국 | 디미타르 도브레프 대령 | 오스만 제국 | 후세인 라우프 베이 | 1912년 11월 21일 | 불가리아 왕국 |
불레이르 전투 | 오스만 제국 | 페트히 베이 | 불가리아 왕국 | 게오르기 토도로프 장군 | 1913년 1월 26일 | 불가리아 왕국 |
사르쾨이 상륙 작전(en) | 오스만 제국 | 엔베르 베이 | 불가리아 왕국 | 스틸리얀 코바체프 장군 | 1913년 1월 26일 ~ 28일 | 불가리아 왕국 |
아드리아노플 공방전(Battle of Adrianople]) | 불가리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 게오르기 바조프 장군, 스테파 스테파노비치 장군 | 오스만 제국 | 슈크뤼 파샤 (tr) | 1913년 3월 11일 ~ 13일 | 불가리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
8. 1. 불가리아-오스만 제국 전투
트라키아 전선에서 불가리아군은 346,182명을 투입하여 트라키아 동부의 오스만 제국 제1군 105,000명 및 서부의 크르자알리 지대 24,000명과 싸웠다. 불가리아군의 전투 서열은 트라키아 동부에 제1군(바실 쿠친체프 중장), 제2군(니콜라 이바노프 중장), 제3군(라트코 디미트리예프 중장)의 총 297,002명, 서부에는 제2사단(스틸리얀 코바체프 장군)을 주력으로 49,180명(상비군 33,180명, 기타 16,000명)이었다.[117]
첫 번째 대규모 전투는 아드리아노플과 크르크 킬리세(오늘날의 크르크라렐리)를 잇는 방어선에서 일어났다. 불가리아 제1군과 제3군의 총 174,254명이 오스만 제국의 동부군 96,273명을[118][117] 게치켄리, 쉴로르, 페트라 근교에서 격파했다. 키르크킬리세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이 승리 하였다. 이 지역에 있던 오스만 제국 제15군단은 그리스군의 상륙 작전에 대비하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로 급히 이동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상륙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다. 제15군단의 전출로 인해 아드리아노플과 디메토카 사이가 무방비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대신 동부군 예하의 제4군단이 배치되었다. 이 두 개 군단의 동부군 전투 서열에서의 이탈 결과, 트라키아 전선의 오스만 제국군은 두 개로 분단되었다.[119] 아드리아노플 전투와 크르크라렐리 전투에서 불가리아 제3군에게 압도당하여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패배했다.[119]
크르크라렐리 전투 이후, 불가리아군 상층부는 며칠간 대기를 명령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군은 루르부르가즈-카라아치-부나르히사르를 잇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가리아군은, 제1군단과 제3군단의 보병 107,386명과 기병 3,115기, 기관총 116정, 화포 360문의 전력으로 공격을 재개하여, 증원을 받아 보병 126,000명과 기병 3,500기, 기관총 96정, 화포 342문을 모은 오스만군을 격파하고[121], 마르마라 해에 도달했다. 이 회전은, 유럽에서는 보불 전쟁 종결 이후 최대의 전투였으며,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이것을 넘는 규모의 전투는 없었다.[122] 패배한 오스만군은, 차탈자에 최종 방어선을 구축하고, 수도 이스탄불이 있는 반도 방어를 꾀했다. 제1차 차탈자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승리하였다. 아시아 측으로부터의 증원 부대도 도착한 덕분에, 오스만 제국군은 불가리아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칼리아크라 해전에서 불가리아 해군이 승리하였다.
이러한 전투 동안, 불가리아의 제2 트라키아 사단 지휘하의 4,9180명은 하스코보 종대와 로도피 종대로 나뉘어, 에게 해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오스만군의 크르자알리 지대(크르자알리 예비 사단, 크르자알리 방어 사단 및 제36연대의 총 24,000명)는, 살로니카와 데데아치(현 알렉산드루폴리)를 잇는 철도선을 가로지르는 400km의 전선을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만족스러운 저항은 하지 못했다. 카르잘리 전투와 메르함리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이 승리 하였다. 11월 26일에는, 오스만 측 사령관 야베르 파샤가 부하 장병 10,131명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크르자알리 지대의 항복은, 그리스군의 살로니카 점령과 함께, 마케도니아 전선의 오스만 제국군으로부터 트라키아 주둔군의 완전한 분단으로 이어졌다.
1912년 11월 17일(율리우스력 11월 4일), 불가리아군은 차탈자 방어선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불가리아군의 공격 병력은 176,351명과 화포 462문으로, 방어하는 오스만군의 140,571명과 화포 316문[124]보다 우세했지만, 오스만 제국군은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1912년 12월 3일(율리우스력 11월 20일)에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 사이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그 후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도 따랐다. 런던에서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1913년 2월 5일(율리우스력 1월 23일)에 오스만 제국에서 엔베르 파샤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여, 카밀 파샤 정권이 무너지자, 강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2월 16일, 휴전 기간이 끝나고,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2월 20일, 오스만 제국군은 차탈자(Çatalca)와 남쪽의 갈리볼리 반도 2개 방향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불라에르 전투와 샤르코이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이 승리 하였다. 갈리볼리 반도에서 고립된 약 3만 명의 오스만군 중 약 15,000명이 화포 36문의 지원을 받아 남쪽의 보라유르(갈리볼리 반도의 지협 도시)로 출격했다. 이와 동시에 제10군단에 속하는 19,858명과 화포 48문이 샤르쾨이(현 테키르다그 주의 도시)에 상륙했다.
제2차 차탈자 전투는 결론 없이 끝났다.
한편, 차탈자에서 벌어진 불가리아군 주력인 제1군 및 제3군에 대한 반격은 단 1개 사단만으로 시작되었다. 당초의 목표는 갈리볼리 반도·샤르쾨이 방면에서의 반격을 지원하기 위해 불가리아군을 유인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 공격은 뜻밖의 성공을 거두었다. 전선의 북부에서 불가리아군은 15km나 후퇴했고, 남부에서는 20km 이상 밀려나 제2선 진지로의 철수를 강요당했다. 갈리볼리 반도 방면의 반격이 실패로 끝나자 오스만군은 차탈자 선을 떠나는 것을 꺼려 부대를 정지시켰지만, 불가리아군은 며칠이 지나서야 적의 공격이 멈춘 것을 알아차렸다. 2월 15일까지 다시 전선은 교착 상태가 되었지만, 휴전 발효까지 충돌이 계속되었다.
샤르쾨이-보라유르 방면의 반격 실패가 아드리아노플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3월 11일, 발칸 동맹군의 최후의 아드리아노플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게오르기 바조프(Georgi Vazov영어) 장군이 이끄는 불가리아 제2군 153,700명과 세르비아군 2개 사단 총 47,275명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아드리아노플 시가지를 점령했다.
8. 2. 그리스-오스만 제국 전투
그리스-오스만 제국 간의 전투는 1912년 사란타포로 전투에서 그리스군이 승리하면서 시작되었다.[129] 콘스탄티노스 1세가 이끄는 그리스군은 사란타포로 (en, 현재 라리사 현)에서 오스만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이어 예니제 전투에서도 승리하여 1912년 11월 9일(율리우스력 10월 27일) 테살로니키를 함락시켰다.[112]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테살로니키 수비대 26,000명과 주요 무기 집적소를 잃었다.그러나 마케도니아 서부에서는 1912년 11월 15일(율리우스력 11월 2일) 소로비치 전투에서 그리스군이 패배하기도 했다.[129] 이는 그리스 제5사단이 알바니아로 철수 중이던 오스만 제6군단과 조우하면서 벌어진 전투였다.
에피루스 전선에서는 그리스군이 열세에도 불구하고 1912년 10월 21일 프레베자를 점령하고, 11월 5일에는 히마라 해안에 상륙하여 점령했다.[130] 11월 20일에는 코르차를 점령했다. 이후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증원된 그리스군은 비자니 전투에서 승리하고, 1913년 3월 6일(율리우스력 2월 22일) 요안니나를 점령했다.[131]
해상에서는 그리스 함대가 에게해의 섬들을 점령하고 림노스 섬의 마우드로스 만에 전진 기지를 설치했다. 1912년 12월 16일(율리우스력 12월 3일) 엘리 해전과 1913년 1월 18일(율리우스력 1월 5일) 레므노스 해전에서 그리스 해군이 승리하여 오스만 제국 해군의 다르다넬스 해협 돌파를 저지하고 에게해의 제해권을 확립했다.[133]
8. 3. 세르비아-오스만 제국 전투
라도미르 푸트니크 장군이 지휘하는 세르비아군은 바르다르 마케도니아(현재 북마케도니아 영역)에서 쿠마노보 전투, 프릴레프 전투, 모나스티르 전투 등 세 번의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들을 통해 세르비아군은 해당 지역의 오스만 제국군을 효과적으로 격파하고 제1차 전쟁의 목표였던 마케도니아 북부 점령을 달성했다. 또한, 세르비아군은 몬테네그로군의 산자크 점령을 지원하고, 불가리아의 아드리아노플 포위전을 돕기 위해 2개 사단을 파견했다.세르비아군의 마케도니아 방면에서의 마지막 작전은 알바니아 중부로 퇴각하려는 오스만 제국 바르다르 군의 잔존 병력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모나스티르 전투 이후, 세르비아 총리 니콜라 파시치는 푸트니크 장군에게 다른 국가보다 먼저 테살로니키를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푸트니크 장군은 이 지시를 거부하고 군대를 알바니아로 서진시켰다. 그는 테살로니키를 두고 그리스와 불가리아가 충돌할 것을 예상했고, 이것이 세르비아의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지배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열강들의 압력으로 세르비아군은 알바니아 북부와 산자크에서 철수해야 했지만, 몬테네그로군의 슈코더 포위전을 지원하기 위해 중포를 남겨두었다. 1913년 4월 23일, 식량이 고갈된 오스만 제국군이 항복하면서 슈코더는 함락되었다.
한편, 2월 20일 오스만 제국군은 차탈자와 남쪽 갈리볼리 반도 두 방향에서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9. 잔학 행위 및 이주
제1차 발칸 전쟁 중 양측 모두 다양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으며, 민간인 희생자 수는 상당했다. 전쟁 기간 동안 공정한 관찰자가 부족하여 민간인 사상자 수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62]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약 89만 명의 다양한 국적의 민간인이 발칸 국가의 국경을 넘었으며, 여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민간인도 포함된다.[88]
오스만 군대의 패배로 인해 63만 2천 명[64]에서 150만 명[65][66]에 달하는 오스만 무슬림이 사망했고, 약 40만[67]~81만 3천 명[68]이 난민이 되었다. 특히 세르비아군과 몬테네그로군에 의해 알바니아인 공동체가 표적이 된 사례가 보고되었으며,[69][70][71] 코소보 빌라예트에서 분쟁 초기 2~4개월 동안 약 2만~2만 5천 명의 알바니아인이 살해되었다.[72][73][74][75] 제2차 발칸 전쟁이 끝날 무렵 알바니아인 사망자 수는 12만 명을 넘어섰고,[76][77][78][79][80][81][82][83] 수십만 명의 알바니아인이 추방되었다.[84][85][86]
알바니아 독립 선언 이후, 알바니아 준군사 조직은 교회를 파괴하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마을을 공격하여 여성과 어린이를 살해하기도 했다.[87]
오스만 제국 내에서는 1913년 봄부터 동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들을 대상으로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89] 오스만 당국은 보이콧, 추방, 강제 이주 등의 방법으로 에게해 지역과 동 트라키아의 그리스인들을 탄압했다.[90] 1913년 7월부터 동 트라키아가 오스만 제국의 통제 하에 들어가자 지역 그리스 공동체를 상대로 약탈, 위협, 폭력 행위가 자행되었다.[89]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오스만 제국 사회에 이미 존재했던 소수 민족에 대한 증오를 더욱 증가시켜 제1차 세계 대전의 오스만 제국 학살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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