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제정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정구는 1944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도시 빈민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1972년 청계천 판자촌에서 야학 교사로 활동하며 빈민 운동을 시작했고, 이후 '빈민의 벗', '철거민의 대부'로 불리며 도시 빈민의 생존권과 인권 보호에 힘썼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과 제적을 겪었으며, 1986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1987년 6.10 항쟁을 주도하고 야당 후보 단일화 운동을 펼쳤으며, 1992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한나라당 의원을 지내며 정치 개혁을 위해 노력했으나, 1999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사후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받았고, 2011년 민청학련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칠원 제씨 - 제성호
    제성호는 학계, 법조계, 정치 및 사회 활동에서 활동한 인물로,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법원행정처 및 대법원 위원, 외교통상부 인권대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등을 지냈으나, 특정 역사적 사건 및 친일파에 대한 견해에서 논란이 있다.
  • 칠원 제씨 - 제윤경
    제윤경은 사회운동가, 정치인으로, 채무자 권익 보호 활동과 금융 관련 제도 개선에 기여했으며, 제2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경기도일자리재단 대표이사를 거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한겨레민주당 - 김부겸
    김부겸은 1987년 정치에 입문하여 제16·17·18·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의 행정안전부 장관 및 국무총리를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며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대구에서 당선되기도 했으나 2022년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 한겨레민주당 - 유인태
    유인태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된 후 국회의원,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국회사무총장 등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막사이사이상 수상자 - 박원순
    박원순은 대한민국의 법조인, 사회운동가, 정치인으로,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사회적 기업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3선 서울특별시장이 되었으나,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후 사망했다.
  • 막사이사이상 수상자 - 윤석중
    윤석중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로서, 아동문학 운동을 이끌고 수많은 동요와 동시집을 발표하며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제정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제정구
국적대한민국
출생일1944년 3월 1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사망일1999년 2월 9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여의도성모병원
본관칠원
종교천주교(세례명: 바오로)
배우자신명자
자녀슬하 3녀
형제 자매4남 중 둘째
학력
학사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정치학
석사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
경력
정당한나라당
지역구경기 시흥시·군포시(14)
경기 시흥시(15)
의원 선수2
의원 대수14·15

2. 생애

1972년 청계천 판자촌에서 야학 교사로 활동하며 빈민 운동을 시작했다.[4] 정일우 신부와 함께 도시빈민의 생존권·인권 보호 운동을 전개하여 ‘빈민의 벗’, ‘빈민운동의 대부’로 불렸다.[4][1]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는 등 2차례 실형을 선고받고 투옥되기도 하였다.[4] 대학 재학시절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수배·구속과 투옥, 그에 따른 제적과 복학이 반복되어 1980년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4]

1980년 초 천주교 도시빈민사목협의회를 결성하고 서울특별시 목동·상계동 등지의 강제철거 대상 빈민촌에서 빈민운동을 주도해 '철거민의 대부'라는 별명이 붙여졌다.[4] 1984년 복권되었고,[4]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 주민 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목동의 판자촌 강제 철거 저지 투쟁을 벌였다. 같은 해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중앙 위원으로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1] 1985년 천주교 도시빈민 사목 협의회를 창립, 초대회장에 피선되었으며 그해 도시빈민연구소를 세워 빈민의 처우개선과 건강, 권리 문제를 홍보하였다.[4] 1986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4]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과 은행동 일대에 자리잡은 복음자리 마을은 서울 양평동 판자촌 주민들과 함께 건설한 빈민 자활 공동체이다.[4]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서 1987년 6.10 항쟁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단일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끝내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였다.[4]

2. 1. 생애 초반 (1944~1971)

제정구는 1944년 3월 1일 경상남도 고성 대가면에서 태어났다.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4]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투신, 학생회 간부로 활동하였다. 1971년 박정희 정권의 교련 교과목 의무화 제정에 반대하여 교련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가 수배를 당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되었다.[4] 1967년국군에 입대하여 만기 제대 후 1971년에 복학했지만 곧 교련 반대 운동으로 제적된 것이다.[1]

2. 2. 빈민, 노동 운동 (1972~1987)

1972년 청계천 판자촌에서 야학 교사로 활동하며 빈민 운동을 시작했다.[4] 정일우 신부와 함께 도시빈민의 생존권·인권 보호 운동을 전개하여 ‘빈민의 벗’, ‘빈민운동의 대부’로 불렸다.[4][1]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는 등 2차례 실형을 선고받고 투옥되기도 하였다.[4] 대학 재학시절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수배·구속과 투옥, 그에 따른 제적과 복학이 반복되어 1980년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4]

1980년 초 천주교 도시빈민사목협의회를 결성하고 서울특별시 목동·상계동 등지의 강제철거 대상 빈민촌에서 빈민운동을 주도해 '철거민의 대부'라는 별명이 붙여졌다.[4] 1984년 복권되었고,[4]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 주민 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목동의 판자촌 강제 철거 저지 투쟁을 벌였다. 같은 해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중앙 위원으로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1] 1985년 천주교 도시빈민 사목 협의회를 창립, 초대회장에 피선되었으며 그해 도시빈민연구소를 세워 빈민의 처우개선과 건강, 권리 문제를 홍보하였다.[4] 1986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4]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과 은행동 일대에 자리잡은 복음자리 마을은 서울 양평동 판자촌 주민들과 함께 건설한 빈민 자활 공동체이다.[4]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서 1987년 6.10 항쟁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단일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끝내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였다.[4]

2. 3. 정치 활동 (1987~1999)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공동 대표를 역임했고, 6·10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1] 1988년에 재야권의 분열을 겪고, 한겨레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공동 대표를 맡았지만, 같은 해 제13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1] 같은 해에 방콕에서 설립된 "민중주거쟁취 아시아 연합"에 정일우와 함께 한국 대표로 참여했고, 1989년에 아시아 도시 빈민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했다.[1]

1991년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사무총장을 역임했다.[3] 1992년의 제14대 총선에서 구 민주당 공천으로 당선되었으며, 주택연합 대표, 한국도시연구소 이사, 민주개혁정치회 상임위원회 간사, 민주당 당무 계획 실장·사무총장·원내총무·부총재, 국회 건설·재경 위원, 도시빈민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3]

2. 3. 1. 정계 입문과 야당 생활 (1987~1995)

1987년 11월 김대중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학생운동가들은 비판적 지지를 선언하며 평화민주당에 입당했지만, 제정구는 이를 무원칙한 야합이라며 비판하였다. 제정구에게도 평민당 입당 권유와 당내 요직 제의가 들어왔으나 단호히 거절하였다.

1988년 재야 운동권의 정치권 진입을 위해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하고 대표에 선출되었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겨레민주당 후보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원내정당 진입에 실패한 뒤 정치활동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학생운동가들의 추천으로 자발적으로 그의 비서와 보좌진을 자청하는 청년들이 그의 사무실에 수시로 출입하였다.

노태우 정부 초반, 제정구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대상 중 한사람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다. 1990년 10월 4일 오후6시40분쯤 외국어대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5] 윤석양은 탈영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당시 보안사에서 갖고나온 동향파악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디스킷을 공개하여[5] 알려졌다.

1992년 김대중의 신민당과 이기택의 민주당(꼬마민주당)이 합당한 민주당 공천으로 경기 시흥-군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4년 김영삼이 민자당에 입당을 권유했으나, 제정구는 처음에 김영삼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이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의 당권욕과 대권욕을 지적, 규탄했다가 동교동계 사람들로부터 멱살잡히고 폭행을 당하는 등의 수난도 겪었고, 이를 계기로 김대중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2. 3. 2. 한나라당 입당과 사망 (1995~1999)

1995년 지방선거 이후 민주당이 김대중 주도로 새정치국민회의로 분당되자 이를 강하게 비판하고 노무현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구성하였다. 이후 1996년 15대 총선에서 재선되었고 민주당 원내총무에 선출되었다.[3]

1997년 민주당 부총재가 되었으나, 그해 말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을 지지한 노무현, 김원기 등의 통추 주류와는 달리 양김정치 청산의 취지로 이철 등과 함께 이회창을 지지하고 신한국당과의 합당에 동참하였다. 신한국당 내에 김덕룡 등의 존재가 신한국당과의 합당에 참여하는데 결정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6] 이후 한나라당 의원을 지내면서도 소장파 의원들로 이루어진 '희망연대'를 조직하는 등 정치개혁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그러나 폐질환이 악화되었고, 과로로 쓰러지는 일도 있었다.

그밖에 동북아시아권의 분쟁, 평화문제에도 관심을 가진 그는 동북아평화센터의 출범[7] 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한국 사회의 정치 개혁을 위해서는 양김과 삼김으로 상징되는 정치세력이 퇴출당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세 김씨가 각자 자기 파벌의 정치인들을 심어놓고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그는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장렬히 전사할 망정 양 김씨의 줄을 서지 않겠다. 젊은 사람들 중에 거기에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옳지 않다"라며 이를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이후 그는 국회 건설위원회 위원, 재정경제위원회 위원, 산업자원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98년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위원을 거쳐 한나라당 당무위원을 지냈다.[3] 1999년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1999년에 폐암으로 의원 재임 중에 사망했다. 사후 민주화와 도시 빈민을 위해 투쟁해 온 공로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받았다. 김수환추기경시인 김지하도 추도사를 보냈다.[1]

2. 4. 사후

1999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1999년 10월 20일 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이 창립되었고, 그 뒤 제정구 기념사업회로 발족되었다.

2011년 2월 25일 서울고법 형사11부(재판장 강형주)는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반국가단체인 민청학련을 조직해 내란을 준비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제 전 의원에 대한 재심(再審)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제 전 의원이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고 내란을 준비한 것으로 볼 만한 증거가 없다”며 “오히려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로부터 구타를 당하거나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을 당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3. 학력

4. 저서


  • 신부와 벽돌공 (1997)

5. 상훈


  • 1986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 1999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6. 일화

그는 평생 재산이 없었으나 독지가들의 지원과 후원으로 기탁금을 마련하여 빈민 생활을 했다. 한번은 김수환 천주교 추기경이 그의 생활을 확인해보러 그의 집에 갔다가 화장실이 너무 허름하여 용변을 참고 갔다고도 한다.

그가 죽자 여야 정치인들은 삼김 파벌정치가 그를 죽게 만들었다고 했고, 일각에서는 그가 김대중 때문에 죽었다며 DJ암으로 죽었다고 하기도 하였다.

7. 역대 선거 결과

wikitable

연도선거 종류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88년총선한겨레민주당15,031표 (12.26%)4위낙선서울 종로구
1992년총선민주당199148,406표 (47.12%)1위당선경기 시흥시·군포시, 초선
1996년총선민주당199525,584표 (42.94%)1위당선경기 시흥시, 재선


참조

[1] 웹사이트 제정구(諸廷坵) http://encykorea.aks[...] 2022-08-02
[2] 웹사이트 “하늘은 곧 국민이니 정치인은 하늘을 두려워하라” http://www.gosnews.k[...] 2022-02-11
[3]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www.rokps.or[...] 2022-08-02
[4] Daum 백과사전 제정구 http://enc.daum.net/[...]
[5] 웹사이트 보안사, 저명인사 1300명 사찰 http://www.cathright[...] 천주교인권위 1990-10-05
[6] 뉴스 이부영·김덕룡 '애증의 40년 인연' 관심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4-08-24
[7] 웹사이트 제정구, 동북아 평화운동의 대부 http://h21.hani.co.k[...]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