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노국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시나노국은 고대 일본의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나가노현에 해당한다. 명칭은 여러 설이 있으며, 7세기에는 "科野"로, 8세기 초에는 "信濃"로 표기되었다. 713년에는 미노국과 시나노국을 잇는 도로가 확장되었고, 센고쿠 시대에는 다케다 신겐의 주요 권력 중심지 중 하나였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후호조 씨 간의 다툼이 있었으며, 1871년 폐번치현 이후 나가노현으로 통합되었다. 국부는 마쓰모토시 지역으로 추정되나, 우에다시로 보는 설도 있다. 주요 시설로는 국분사, 신사, 칙지목 등이 있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나카쓰가와시의 역사 - 폐불훼석
폐불훼석은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불분리 정책과 함께 일어난 불교 배척 운동으로, 사찰 파괴, 불상 훼손 등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불교계 쇠퇴와 근대화를 가져왔다는 평가와 문화재 파괴라는 비판이 공존한다. - 나카쓰가와시의 역사 - 후쿠오카정 (기후현)
후쿠오카정은 기후현 동부에 위치했던 정으로, 가마쿠라 시대부터 도야마 씨의 영지였으며, 1889년 3개 마을이 합쳐져 촌이 되었다가 1966년 정으로 승격되었으나 2005년 나카쓰가와시에 편입되었다. - 도산도 - 리쿠젠국
리쿠젠국은 1869년 무쓰국에서 분리되어 설치된 일본의 옛 행정 구역으로, 보신 전쟁 이후 미야기현과 이와테현으로 분할 편입되었으며, 14개의 군으로 구성되었다. - 도산도 - 무쓰국
무쓰국은 일본 고대에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미치노오쿠"에서 유래하여 설치된 국으로, 데와국과 분리되어 넓은 지역을 관할하며 호족 세력의 번성, 무사 가문의 지배 시대를 거쳐 메이지 유신 이후 5개 국으로 분할되었다. - 시나노국 - 가와나카지마 전투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1553년부터 1564년까지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시나노 국 가와나카지마에서 시나노 지방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다섯 차례의 전투로, 복잡한 정치적, 군사적 배경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현대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시나노국 - 마쓰모토성
마쓰모토성은 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시에 위치한 평성으로, 센고쿠 시대에 축성되어 에도 시대에 마쓰모토 번의 번청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국보로 지정된 천수각을 포함한 여러 건물이 남아 있다.
시나노국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국명 | 시나노국 (信濃国) |
별칭 | 신슈 (信州) |
소속 | 도산도 |
영역 | 나가노현, 기후현나카쓰가와시 일부 |
국력 | 상국 |
거리 | 주고쿠 |
군 | 10군 67향 |
국부 | (추정) 우에다시 (추정) 마쓰모토시 |
국분사 | 우에다시 (신나노 국분사 터) |
국분니사 | 우에다시 (신나노 국분니사 터) |
일궁 | 스와 대사 (스와 지역) |
기타 | |
로마자 표기 | Shinano no kuni |
일본어 표기 | 信濃国, しなののくに |
주석 | |
주석 | 구 가미사카무라・구 야마구치무라 |
주석 | '나가노현사 통사편'은, '가모 마부치 등의 오독으로 인해 '미스즈카루'가 퍼졌지만,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것은 지역 나가노현 내뿐이다. 보통 '미코모카루'라고 읽는 것은, 우리 나가노현 사람이 충분히 승낙해야 할 문제점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제1권 p.849) |
2. 명칭과 유래
시나노(信濃)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고대에는 しなぬ일본어라고 불렸으며, 일본서기의 게이타이 덴노 조에는 “斯那奴阿比多일본어”, 긴메이 덴노 조에는 “斯那奴次酒일본어”와 “斯那奴일본어”라는 글자가 사용되었다. 7세기에는 “科野일본어”로 표기되었으나, 8세기 초 대보(大宝) 4년(704년) 여러 국인(国印) 주조를 계기로 “信濃일본어”로 바뀌었다.[15] “科野일본어”는 화동(和銅) 6년(713년) 풍토기를 경계로 “信野일본어”를 거쳐 “信濃일본어”로 변화해 갔다.[16]
“科野일본어”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에도 시대의 국학자인 다니가와 시키요는 일본서기통증에서 “シナノキ일본어(科の木)는 이 나라에는 없다”라고 기록했고, 가모 마부치는 관사고에서 “(일설에는) 이 科野일본어라는 국명도 이 나무에서 유래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シナノキ일본어(시나노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옛날부터 제기되고 있다.[12] 또한 가모 마부치는 “명칭은 산악 지방에 しなさか일본어가 있는 곳의 이름이다.”라고도 기록하고 있어, 산악 지방의 지형에서 “단차”를 의미하는 고어인 “과(科)”나 “급(級)”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남기고 있다.[12] 그 외에 “シナ일본어는 철과 관련된 말”이라는 설과 구시나토베노미코토(풍신) 설도 있다.[12] 고바야시 토시오는 “シナ일본어(단차)”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채택하면서, 시나노라는 지명의 발생지를 하니카(埴科)·사라시나(更科) 지역으로 보았다.[13]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는 남송에서 귀국한 선종 승려들에 의해 “신슈(信州)”라고 불리기도 했다.
2. 1. 어원
고대에는 しなぬ일본어라고 불렸으며, 일본서기 게이타이 덴노 조에는 “斯那奴阿比多일본어”, 긴메이 덴노 조에는 “斯那奴次酒일본어”와 “斯那奴일본어”라는 글자가 사용되었다.“科野일본어”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에도 시대의 국학자인 다니가와 시키요는 일본서기통증에서 “シナノキ일본어(科の木)는 이 나라에는 없다”라고 기록했고, 가모 마부치는 관사고에서 “(일설에는) 이 科野일본어라는 국명도 이 나무에서 유래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シナノキ일본어(시나노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옛날부터 제기되고 있다.[12] 또한 가모 마부치는 “명칭은 산악 지방에 しなさか일본어가 있는 곳의 이름이다.”라고도 기록하고 있어, 산악 지방의 지형에서 “단차”를 의미하는 고어인 “과(科)”나 “급(級)”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남기고 있다.[12] 그 외에 “シナ일본어는 철과 관련된 말”이라는 설과 구시나토베노미코토(풍신) 설도 있다.[12]
2. 2. 표기 변천
고대에는 “시나누(しなぬ)”라고 불렸으며, 일본서기에는 “스나누(斯那奴)” 등의 표기가 보인다.[12] 7세기에는 “科野(시나노)”로 표기되었으나, 8세기 초 대보(大宝) 4년(704년) 여러 국인(国印) 주조를 계기로 “信濃(시나노)”로 바뀌었다.[15] “科野(시나노)”는 화동(和銅) 6년(713년) 풍토기를 경계로 “信野(신야)”를 거쳐 “信濃(시나노)”로 변화해 갔다.[16]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는 남송에서 귀국한 선종 승려들에 의해 “신슈(信州)”라고 불리기도 했다.3. 역사
713년, 현 나가노현 기소 지구를 통과하는 미노국과 시나노 두 지역을 잇는 도로가 늘어나는 여행객을 수용하기 위해 확장되었다.[2]
센고쿠 시대에 시나노는 여러 봉토로 나뉘었고, 고모로시, 이나시, 우에다시를 포함한 성읍들이 발전했다. 시나노는 우에스기 겐신 등과의 전쟁 중 다케다 신겐의 주요 권력 중심지 중 하나였다.[2]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노부나가 암살되자, 시나노는 오다와라성을 근거지로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후호조 씨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졌다. 도쿠가와 씨, 우에스기 씨, 호조 씨는 각각 시나노국, 고즈케국 우에노 지역, 가이국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려 했다. 이 지역은 이전에 다케다 씨를 섬겼던 많은 소규모 씨족의 잔당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노부나가 사후 혼란 속에서, 이에야스는 8,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분쟁 지역으로 향했다. 이로 인해 세 세력 간의 삼각 분쟁이 발생했고, 역사가들은 이를 '''덴쇼진고의 난'''이라고 부른다.[3] 사나다 마사유키가 도쿠가와 진영에 투항함에 따라, 호조 씨는 이에야스와 휴전 협상을 시작했다.[6]
스와 신사(스와 다이샤)는 시나노의 총본궁(이치노미야)으로 지정되었다.[10]
3. 1. 고대
신대(神代) 시대의 국토 분할에서 건어뢰신(建御雷神)에게 패한 건어명방신(建御名方神)가 시나노(科野)국의 스와(洲羽)의 바다까지 달아나 그곳에 자리 잡았다는 기록이 고사기에 보인다.[17]스와(諏訪)에 전해지는 전승인 『스와다이묘진에이시(諏訪大明神絵詞)』 등에서는, 타케미나카타노카미가 스와(洲羽)에 침입하여 토착신인 모레야신(洩矢神)과 싸워 타케미나카타노카미가 승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타케미나카타노카미의 후손은 대축(大祝)인 스와씨(諏訪氏)가 되고, 모레야노카미의 후손은 신장관(神長官)인 모리야씨(守矢氏)가 되었다고 한다.[17]
숭신천황 시대에 신무천황의 후손이자 다(多)씨족인 무오백건명(武五百建命)이 초대 과야국조(科野国造)에 임명되었다고 전해진다.[17]
고고학 유물로는, 야요이 시대 대규모 취락인 마쓰바라 유적(松原遺跡)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큰 도랑으로 거주지를 여러 개로 나누고, 각각에 많은 건물터를 가지고 있는, 킨키 지방의 표준적인 환호를 가진 취락이 4개 정도 들어갈 만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일본해 쪽에서 천곡강(千曲川)을 거슬러 올라 관동평야로 빠지는 교류 루트의 요충지였음을 출토된 다량의 토기와 석기가 보여준다.[18]
3세기 유적으로, 기지마다이라무라(木島平村)에서 네즈카 유적(根塚遺跡)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철검이 출토되었는데, 유사한 철검은 한국의 울산 하아저 유적에서도 발견되어, 도래인과의 관련성이 지적되고 있다. 또한, 야요이 시대 유적으로 이세궁 유적(伊勢宮遺跡)과 시노노이 유적(篠ノ井遺跡)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적에서 발견된 인골은 도래인의 특징이 보였다.[18]
4세기 전기부터 6세기 초두에 걸쳐, 북부 시나노에서 하니카 고분군(埴科古墳群)이나 가와야나기 장군즈카 고분(川柳将軍塚古墳) 등, 야마토 왕권의 영향을 받은 전방후원분이 다수 축조되었다. 한편 남부 시나노에서는 4세기에 다이다산 고즈카 고분(代田山狐塚古墳)이 조영되고, 그 후 1세기 정도 축조가 중단되었지만,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 무렵에 걸쳐 이이다 고분군(飯田古墳群)이 성립하여, 다종다양한 고분이 축조되었다. 6세기 중기에는 현재의 미노와 마치(箕輪町)에 마쓰시마 왕묘 고분(松島王墓古墳)이 축조되고, 츠쿠마군(筑摩郡) 주변에도 고보산 고분(弘法山古墳)이 조영되었다. 그러나 스와 지대(諏訪地域)로의 고분 문화 유입은 훨씬 늦어, 5세기에 후네 고분(フネ古墳), 가타야마 고분(片山古墳)이 축조되었지만, 전방후원분은 시모스와 아오즈카 고분(下諏訪青塚古墳)이 유일하게 축조된 데 그쳤다.[13]
고분 시대에는, 왜계 백제 관료로서 '''과야(科野)'''의 씨(氏)를 가진 인물이 사서에 보인다. 과야국조 군으로서 조선에 출병한 국조의 자제가 현지인의 아내와의 사이에 남긴 자손이라고 한다.[19] 신농의 사람이 외교에 종사한 것은, 야마토 왕권 내에서 신농의 사람이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그렇게 된 것은, 도래인에 의해 신농에 군사 행동의 요소인 말의 문화가 전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17] 현재의 이나 시(伊那市) 테라(手良)에는 「다이 백제모(大百済毛)・쇼 백제모(小百済毛)」라는 지역이 있지만, 이 지명은 백제에서 온 도래인에 의해 개발되었다는 전승이 있다.[21]
아스카 시대 중기인 고교쿠 천황 3년(644년), 혼다 젠코(本多善光)에 의해 젠코지(善光寺)가 창건되었다. 다이카(大化) 원년(645년)에는, 다이카 개신(大化の改新)에 의해 령제국(令制国)이 발족하여, 그때까지의 국조(国造)의 지배에 의존해 온 지방 지배를 고쳐, 「평(評)」이라고 하는 행정 구획을 전국에 설치했다. 신농국은 당초, 이나(伊奈) 평(評)・스와(諏訪) 평(評)・츠쿠마(束間) 평(評)・아즈미(阿曇) 평(評)・미즈우치 평(評)・타카이 평(評)・오가타(小懸) 평(評)・사쿠 평(評)・과야 평(評)(후에 코시키와 하니카로 분립) 등이 성립했다고 생각되며,[24] 현재의 키소 지방을 뺀 대부분을 영역으로 했다. 이들 평은, 다이호 률령(大宝律令)의 성립 후, 군(郡)으로 개편되었다.
덴무 천황 원년(672년)의 진신의 난(壬申の乱)에는, 과야의 병사가 도시 바테(土師馬手) 등에 따라, 오오아마토노 오우지(大海人皇子)(덴무 천황(天武天皇))의 편에 서서 활약했다. 지토 천황(持統天皇) 5년(691년)의 「스와 신(須波神)」 「미즈우치 신(水内神)」의 칙제 등, 과야는 야마토 조정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땅 중 하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이호 2년(702년) 12월에, 처음으로 미노쿠니에 키소산도(木曾山道)를 연다는 기사가 있고,[27] 와도(和銅) 6년(713년) 7월에는, 미노쿠니와 신농국의 국경의 길이 험준하고, 왕환이 어렵다는 것으로, 키소지(木曽路)가 개통하고 있다.[28]
나라 시대에는, 좌마료의 관할하에 모치즈키 목(望月牧) 등, 관영에 의한 16개의 칙지목(勅旨牧)과, 그것을 통괄하기 위한 목감청(牧監庁)이 설치되었다. 요로(養老) 5년(721년) 6월 26일에 남부를 스와쿠니(諏方国)로 하여 분치했지만, 덴표(天平) 3년(731년) 3월 7일에 합병하여 원래대로 돌아갔다.[13]
3. 2. 중세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는 관동고분국의 하나로 가마쿠라 막부의 지행국이었다. 그 후 지행권은 공경이나 흥복사, 동대사 등의 유력 사찰로 옮겨갔으나, 재청관인이나 국인들의 막부 고케닌화가 진행되면서 교토의 원임 국사나 지행국주, 장원 영가 등의 영향력은 약해지고, 막부의 개입 없이는 세금 징수도 어려워져 “국사가 그 용도가 없는 나라”라고 조롱받았다(『명월기』). 전국 시대까지 존재했던 수호직에는 비키 씨나 집권 호조 씨, 오가사와라 씨, 스와 씨, 키라 씨, 우스이 씨, 스파 씨, 다케다 씨 등이 있었다.막부 성립 후, 초대 신슈 수호에는 비키 요시카즈가 취임하여, 신슈국 국사(国司) 대리를 겸임하여 국아(国衙) 기구도 장악했으나, 겐닌 3년(1203년)의 비키 요시카즈의 변에서 호조 시게마사에게 멸망하고,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근신으로 13인의 합의제에 대항하는 측근이었던 나카노 요시나리나 오가사와라 나가쓰네도 연좌되었다. 시게마사는 비키 씨 외에도 막부 중신의 숙청을 진행하여, 겐큐 2년(1205년)에는 히라가 아사마사를 괴뢰의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하려고 했으나, 실각했다(마키 씨 사건). 겐레이 3년(1213년), 고케닌 이즈미 친히데가 신슈 무사와 결탁하여 요리이에의 유자 에이지쓰를 쇼군으로 옹립하고, 신슈 수호도 겸임하는 집권 호조 요시토키의 타도를 꾀하는 음모가 발각되었다(이즈미 친히데의 난). 조큐 3년(1221년)의 조큐의 난에서는 막부의 니나카 모리토오에 대한 처우도 난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 신슈 무사의 대부분은 막부 측에 붙어, 도산도군의 다케다 노부미쓰, 오가사와라 나가키요에 따라, 고토바 상황 측의 니나카 씨는 호조 토모토키의 호쿠리쿠도군에 패했다. 막부 측에 붙은 신슈 무사는 신보지토로서 세이코쿠에 장원령을 얻었으나, 그때까지 도코쿠에 한정적이었던 막부의 권위를 침투시키는 목적으로 세이센을 강요받은 자도 많았다. 또 막부가 조정에 대해 우위에 서고, 신슈 국내에 있어서의 호조 씨의 장원령도 관동고료의 하루치카료를 중심으로 확대되자, 호지 원년(1247년)의 호지 합전에서 무공을 세운 스와 모리시게나 내관령을 역임한 스와 모리쓰네를 대표로, 호조 씨의 특종히칸(어내인)으로 활약하는 자도 나타났다. 특종전제가 강화되어 가는 가운데, 고안 8년(1285년)의 시모쓰키 소동에서는 막부의 유력 고케닌 아다치 야스모리의 인척이었던 반노 씨나 오가사와라 씨가 휘말려, 핍색을 강요받았다.
이 시대의 불교 신자로 많은 것이 임제종, 조동종 등의 선종과 일향종, 정토종(젠린지파) 등이다. 특히 엔타류 호조 씨의 엔타쇼는 “신슈의 학해”(『불심선사대명국사무관대화상탑명』)라고 칭송될 정도로, 선종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안 연간, 흥복사가 지행국주였던 시절, 메다이에 보임된 간슌보 정요라는 승려는 신슈로부터의 검주물이나 연공을 횡령하고, 고안 7년(1284년), 본소법인 “만지평정”에 의해, 국외 추방형이 되었다. 엔케이 2년(1309년)의 국아령의 검주의 조진은 국사 메다이가 하고 있으나, 오안 6년(1373년)에는 수호사로 바뀌고 있다[37]. 이와 같이 신슈에서도 국아는 차차 형해화되고, 국사의 권능은 수호로 이행해 갔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 겐코 원년(1331년)부터의 겐코의 난에서는 신슈의 고케닌은 신슈 수호를 겸임하는 육파라탐제 북방 호조 나카토키에 따라, 고다이고 천황이 거는 가사기야마나 아카사카 성을 공격했다(『고묘지잔편』). 그러나 겐코 3년/쇼케이 2년(1333년)에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 추토의 선지를 내리고, 아시카가 다카우지, 닛타 요시사다 등 막부의 유력 고케닌이 막부로부터 이반하자, 오가사와라 사다무네도 이에 따라 가마쿠라 공격에 참가하여, 후에 새로운 신슈 수호에 보임되었다. 한편, 호조 나카토키는 교토에서 도망치는 도중 자살로 몰렸다. 토쇼지 합전에서는 고나이닌의 스와 나오카쓰가 특종 호조 다카토키에게 순절하여 자살했으나, 다카토키의 유자 호조 도키유키는 스와 씨에 숨겨졌다. 겐무 2년(1335년), 스와 신토의 스와 요리시게나 시게노 씨·니나카 씨 등은 도키유키를 봉하여 거병하여, 가마쿠라 시를 탈환했으나(나카센다이의 난), 불과 20일 만에 진압되고, 스와 씨 등은 자살하고, 도키유키는 도망쳤다. 이듬해가 되자 호조 도키오키가 남조에 호응하여 교토에서 아사마미쿠리야에 들어가 거병하고(『이치가와케 문서』), 오가사와라 사다무네나 무라카미 노부사다의 군세와 충돌했으나 패했다. 그 후에는 기라 미쓰요시가 수호가 되고, 호조 잔당 일소를 위해 기라 도키히라가 파견되었다.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에서는 공가 중심의 정치에 대해 무사의 불만이 높아졌다. 엔겐의 난에서 다카우지가 겐무 정권으로부터 이반하자, 천황 측은 가마쿠라를 향해 도카이·도산 양도에 대군을 발하고, 추후 히토히코가 이끄는 도산도군이 오이 성을 함락시켰다. 다카우지의 신제 옹립으로 조정이 둘로 나뉜 남북조 시대에 들어가면, 남조 측의 스와 씨나 니나카 씨·코우사카 씨·네쓰 씨·모치즈키 씨·우미노 씨 등과 북조 측의 오가사와라 씨나 무라카미 씨·다카나시 씨 사이에서 항쟁이 벌어졌다. 레키오 3년/코코쿠 원년(1340년)에는 호조 도키유키가 토토미 국으로부터 이나야에 들어가 다이토쿠오지 성에 거점을 마련했으나, 오가사와라 씨가 이것을 격파했다. 간노 원년(1350년)의 간노의 소란에서는 남조 측 아시카가 나오우지파의 스와 나오요리 등도 호응하여 거병하고, 고모리 후유를 토벌하는 등의 전공을 세우고, 나오우지가 수호의 임면권도 장악하자, 간노 2년(1351년)에는 나오요리가 신슈 수호에 보임되었으나, 다카우지파가 세력을 회복하면 삿타산 체제에 의해 수호는 오가사와라 씨로 복귀했다.
남조 측은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로, 고코쿠 5년(1344년)부터 신슈에 입국한 정이대장군 소랴 킨오(신슈궁)을 봉하여, 코우사카 다카무네가 거점을 마련한 이나야에 일대 거점을 구축했다. 분와 원년(1352년)에는 킨오가 신슈의 남조 세력을 규합하여 무사시노 합전에 출진했으나 패배하고, 분와 4년(1355년)의 키쿄우가하라의 싸움에서도 오가사와라 씨에 패배하자, 신슈에 있어서의 남조 세력의 쇠퇴는 결정적이 되고, 스와 씨나 니나카 씨 등도 북조 측에 돌아서서, 마침내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에 종속하게 되고, 분추 3년(1374년) 킨오도 신슈를 떠났다. 신슈는 레키오 2년/엔겐 4년(1339년)부터 코우에이 3년/고코쿠 5년(1344년)까지와, 테이지 4년/쇼헤이 20년(1365년)부터 오안 3년/겐토쿠 원년(1370년)까지,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가마쿠라부의 관할로 이행했으나, 다시 막부로 되돌아왔다. 막부와 가마쿠라부의 용화에 의해, 가마쿠라부의 추거로 우스이 아사후사가 수호에 임명되었으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와 칸페이 아시카가 우지미쓰가 대립하면, 신슈는 가마쿠라부 감시의 최전선이 되고, 가마쿠라 시대와는 일변하여, 교토의 정정이 크게 영향을 주게 되었다. 텐슈 5년/고랴쿠 원년(1379년)의 고랴쿠의 정변에서 대폭적인 수호 개체에 의해 스파 요시타네가 수호에 보임되었다.
메이토쿠 3년(1392년)의 메이토쿠의 화약에 의한 남북조의 합일 후, 막부는 지지 호족의 장원이나 궁령의 횡령·남용을 수호에 명하여 정지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복잡한 대립 관계가 발생하고, 스파 씨에 대한 국인중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 후, 메이토쿠의 난이나 오에이의 난에서 무공을 세우고 신슈 수호에 복귀한 오가사와라 씨와 지지 호족의 대표격 무라카미 씨가, 국인중(대문일기)을 휘말려 싸우고(다이토 합전), 오가사와라 나가히데는 교토로 추방되었다. 오에이 9년(1402년) 신슈는 무로마치 막부료국(직할지)이 되고, 정소의 직접 지배하에 놓이고, 수호직은 공백화되었다. 그 사이, 막부 대관으로 호소카와 씨가 파견되었으나, 오에이 10년(1403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무라카미 씨나 다카나시 씨를 중심으로 한 국인중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 후에는 쇼군과 가마쿠라 칸페이, 가마쿠라 칸페이와 간토 관령의 대립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강력한 지배권을 가진 자립한 대명가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에 의해 신슈 수호에 복귀하고, 우에스기 젠슈의 난이나 에이쿄의 난, 유키 합전 등에서 활약한 오가사와라 마사야스는 칸페이 아시카가 모치우지파의 무라카미 씨를 억누르고 신슈를 일시 평정했으나, 가키쓰의 난에서 요시노리의 후원을 잃고, 마사야스의 사후, 오가사와라 씨의 가독 상속과 수호 서임에 막부 유력자의 하타케야마 씨와 호소카와 씨의 대립 관계가 얽혀, 오가사와라 씨는 삼가로 분열했다. 막부에 의한 교토쿠의 난에의 출진 명령에도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하고, 수호 권력도 땅에 떨어져, 우스이 후사사다에 반국 수호를 억눌렸다.
무로마치 말기에 걸쳐 게코쿠죠의 양상을 보이고, 지지 호족의 제세력이 격항을 계속했다. 하니카 군을 거점으로 북부나 동부에 세력을 확대하는 무라카미 씨, 스와 타이샤의 신앙을 배경으로 하는 스와 씨, 신슈 수호가로 막부와 강한 연계를 가지는 오가사와라 씨, 키소가야에 할거하는 키소 씨 등이 그 대표격이며, 이 4씨를 후세 “신슈 4대장”이라고 부른다. 그 외에도 오가사와라 일족으로 수호대를 역임하고, 유소기의 코가 칸페이 아시카가 시게우지를 피호한 오이 씨, 에치고 나가오 씨와 인척 관계를 맺는 다카나시 씨, 관동 관령 야마우치 우쓰이 씨를 배후로 한 우미노 씨, 일찍이 토착하고 신슈 겐지의 조가 된 이노우에 씨, 경무사로 조정과 강하게 결합하고, 아즈미군에 거점을 두고 일대 세력을 구축하는 니나카 씨 등의 구래의 명족도 건재했다. 오닌 원년(1467년)부터의 오닌의 난에서는 니나카 씨, 키소 씨, 이나 오가사와라 양 씨, 스와 타이샤 조샤 등이 동군(호소카와 가쓰모토), 후쿠다 오가사와라 씨가 서군(야마나 소젠)에 붙었다. 조쿄 원년(1487년)의 조쿄·엔토쿠의 난에 시작되는 막부의 롯카쿠 씨 정벌에서는 니나카 씨, 키소 씨, 무라카미 씨, 우미노 씨, 오가사와라 씨 등이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 아시카가 요시타네에 따라 출병했다.
3. 3. 센고쿠 시대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센고쿠 시대(1467년 ~ 1573년)에 시나노는 여러 봉토로 나뉘었고, 코모로, 이나, 우에다를 포함한 성읍들이 발전했다. 시나노는 우에스기 겐신 등과의 전쟁 중 다케다 신겐의 주요 권력 중심지 중 하나였다.[2]다케다 하루노부(신겐)의 신슈 침공이 본격화되면서 스와 요리시게, 니나카 모리마사를 멸하고,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나 무라카미 요시키요 등을 쫓고, 기소 요시아키나 사나다 요시타카를 종속시켰다. 오다이하라 전투에서는 사쿠 군에서 관동 관령 우에스기 노부마사를 격파했다. 다케다 신겐은 신슈의 대부분을 영토로 만들고 유력 국인들을 가신으로 삼았다. 다카나시씨나 이노우에씨 등 북부 시나노 지역(호쿠신) 국인들은 나가오 가게토라(우에스기 겐신)을 의지하여 다케다 가문과 나가오 가문(우에스기 가문)은 가와나카지마를 중심으로 전투를 벌였다.
1557년 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이후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다케다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 사이의 조정을 실시했고, 1558년 다케다 하루노부는 시나노 슈고(守護)에 임명되었다.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1561년 제4차 전투를 계기로 수습되었고, 이후에도 양 가문의 대립은 계속되었으나, 북부 시나노 지역은 최전선으로서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안정되어 다케다 가문의 시나노 영토화는 계속되었다.
다케다 가쓰요리가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동맹을 맺고 시나노를 통일 지배했으나, 1582년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하여 멸망하고, 다카토성 성주 니나카 모리노부 등이 전사했다. 그 후 시나노는 오다 가문의 영토가 되어, 모리 나가요시(북부 시나노), 다가와 가즈마스(동부 시나노), 모리 나가히데(이나), 가와지리 히데타카(스와), 기소 요시마사(아즈미, 쓰쿠마) 등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약 3개월 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시나노에서 잇코잇키가 발생하면서 오다 가문의 세력은 와해되었고, 권력의 공백 지대가 된 시나노에는 도쿠가와, 호조, 우에스기 세력이 진출했다(덴쇼진고의 난). 곧 호조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과 화해 및 동맹을 맺고 영토 교환을 통해 간토로 철수했다.[3]
이 결과, 북부 시나노 4군은 우에스기 가문, 그 외 지역은 도쿠가와 가문의 영토가 되었으나, 양자의 대립 속에서 사나다 마사유키가 자립하여 제1차 우에다 전투를 일으켰다. 이 대립은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립으로 바뀌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화목하고 후에 신하가 됨으로써 1590년 간토로 이봉되자, 도쿠가와 측 국인들도 간토로 이동하여 후다이 다이묘나 하타모토가 된 사람도 많았다.
시나노는 도요토미 측 무장들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센고쿠 히데히사(사쿠), 이시카와 가즈마사(아즈미, 쓰쿠마), 모리 히데요시(이나), 히네노 다카요시(스와)가 들어왔고, 기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할령이 되었다. 1598년 북부 시나노 4군을 다스린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아이즈로 이봉되자, 북부 시나노에는 세키 가즈마사, 다마루 나오마사가 들어왔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양자를 미노국으로 옮기고, 대신 자신의 부하인 모리 다다마사를 들여보냈다.
3. 4. 근세
에도 시대 시나노 국에는 여러 번(藩)들이 설치되었고, 기소(木曽) 지방은 오와리 번(尾張藩)의 영지가 되었다.[2] 정쿄 소동(貞享騒動), 우에다 소동(上田騒動) 등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막부 말기에는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의 국학(国学)이 유입되면서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이 성행했다. 보신 전쟁(戊辰戦争)에서는 시나노의 여러 번들이 관군(官軍)에 참여하여 막부군과 싸웠다.
3. 5. 근대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1871년 폐번치현으로 시나노의 옛 번들은 나가노현(당시 나카노현)과 지쿠마현으로 통합되었다.[39] 1875년에서 1876년에 걸쳐 두 번째 현 통합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지쿠마현은 서부 지역(히다국)이 기후현에 합병되고, 시나노국의 동부 지역은 나가노현에 통합되었다.[39]현대에 이르러 나가노현은 옛 시나노국의 영역 대부분을 계승하고 있다.[39] 나가노현은 넓은 영역으로 인해 지역 간, 특히 나가노시와 마쓰모토시 간의 대립이 있어, 현을 지칭할 때 "나가노현"보다 "신슈(信州)" 또는 "시나노(信濃)"라는 명칭이 더 선호되기도 한다.[39]
4. 국내 시설
와명류주초(和名類聚抄), 『습개초(拾芥抄)』, 『역림본(易林本)』 절용집(節用集)에는 모두 주쿠마군(筑摩郡)으로 기록되어 있다. 10세기일본어에 편찬된 『와명초(和名抄)』(유포본) 제5권 신농국 항목에 "국부재주쿠마군(国府在筑摩郡)"이라는 주석이 있어, 헤이안 시대 중기에는 주쿠마군에 국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마쓰모토시 지역으로 보인다.
延喜式内社일본어 (연희식신명장)에는 대사 7좌 5사, 소사 41좌 41사의 총 48좌 46사가 기록되어 있다. 대사 5사는 모두 명신대사이다.
- 스와군 남방도미신사 2좌
- * 비정사: 스와대사 (스와 지역에 이좌사궁)
- 아즈미군 호다카신사
- * 비정사: 호다카신사 (아즈미노시 호다카)
- 코시키군 무스이베쓰신사
- * 비정사: 무스이베쓰신사 (치쿠마시 하치만), 오케치대신사 (나가노시 오오오카헤이)
- 미즈우치군 겐미나가타토미노미코토카미베쓰신사
- * 비정사: 겐미나가타토미노미코토카미베쓰신사 (나가노시 하코시미즈), 겐미나가타토미노미코토카미베쓰신사 (나가노시 신슈신마치), 겐미나가타토미노미코토카미베쓰신사 (이나마시 도요다)
- 오가타군 이키시마아시지마신사 2좌
- * 비정사: 이키시마아시지마신사 (우에다시 시모노고우)
총사 및 일궁 이하는 다음과 같다.[41]
- 총사: 카노다이묘샤 (우에다시 쓰네다), 이와신사 (마쓰모토시 소샤) (2가지 설)
- 일궁: 스와대사 (스와 지역)
- 이궁: 오노신사 (시오지리시 기타오노)
- 삼궁: 호다카신사 (아즈미노시 호다카)
- 사궁: 무스이베쓰신사(치쿠마시 하치만)
이외에, 사다신사 (마쓰모토시 시마다테 미노미야)를 삼궁으로 하는 전승이 있다.[42]
시나노국에는 16개의 칙지목(勅旨牧)이 설치되어 말 사육이 이루어졌다. 칙지목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위치 |
---|---|
대실목 | 수내군 |
갓바라목 | 고이군 |
고이목 | 고이군 |
신장목 | 소현군 |
시오바라목 | 소현군 |
보즈키목 | 사쿠군 |
나가쿠라목 | 사쿠군 |
시오노목 | 사쿠군 |
이노시카목 | 안도군 |
하니와라목 | 츠쿠마군 |
오오노목 | 츠쿠마군 |
오카야목 | 스와군 |
야마가목 | 스와군 |
하기쿠라목 | 스와군 |
히라이데목 | 이나군 |
미야도코로목 | 이나군 |
하니와라목에는 목감청이 병설되었다. 좌마료에 속했고, 후에 좌마료령의 쇼엔이 되었다.
4. 1. 국부(国府)
『와명류주초(和名類聚抄)』, 『습개초(拾芥抄)』, 『역림본(易林本)』의 절용집(節用集) 모두 주쿠마군(筑摩郡)으로 기록하고 있다. 10세기일본어에 편찬된 『와명초(和名抄)』(유포본) 제5권 신농국 항목에 "국부재주쿠마군(国府在筑摩郡)"이라는 주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헤이안 시대 중기에는 주쿠마군에 국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마쓰모토시 지역으로 추정된다.하지만 여러 설이 있는데, 국분사(国分寺)[40] 및 총사(総社)의 하나인 코노 다이묘샤(科野大宮社)가 우에다시에 있는 점, 동산도(東山道)의 노선과 숙역(宿駅)의 배치(오가와군 와타리(요리)역), 코노 고쿠조(科野国造)의 본거지였던 점 등을 근거로 오가와군(小県郡)에 국부가 있었다는 학설도 있지만, 1차 사료에 의한 증명·뒷받침은 현재로서는 전무하기 때문에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2022년 현재 유적에서 나온 유력한 출토품이나 유구도 발굴되지 않았다.
헤이안 중기 944년, 천재지변으로 국아(国衙)가 붕괴되어 국사(国司)가 압사한 기록이 남아 있다.
4. 2. 국분사(国分寺)·국분니지(国分尼寺)
4. 3. 신사(神社)
延喜式内社일본어 (연희식신명장)에는 대사 7좌 5사, 소사 41좌 41사의 총 48좌 46사가 기록되어 있다. 대사 5사는 모두 명신대사이다.- 스와군 남방도미신사 2좌
- * 비정사: 스와대사 (스와 지역에 이좌사궁)
- 아즈미군 호다카신사
- * 비정사: 호다카신사 (아즈미노시 호다카)
- 코시키군 무스이베쓰신사
- * 비정사: 무스이베쓰신사 (치쿠마시 하치만)
- * 비정사: 오케치대신사 (나가노시 오오오카헤이)
- 미즈우치군 겐미나가타토미노미코토카미베쓰신사
- * 비정사: 겐미나가타토미노미코토카미베쓰신사 (나가노시 하코시미즈)
- * 비정사: 겐미나가타토미노미코토카미베쓰신사 (나가노시 신슈신마치)
- * 비정사: 겐미나가타토미노미코토카미베쓰신사 (이나마시 도요다)
- 오가타군 이키시마아시지마신사 2좌
- * 비정사: 이키시마아시지마신사 (우에다시 시모노고우)
총사 및 일궁 이하는 다음과 같다.[41]
- 총사: 다음 2가지 설이 있다.
- * 카노다이묘샤 (우에다시 쓰네다)
- * 이와신사 (마쓰모토시 소샤)
- 일궁: 스와대사 (스와 지역)
- 이궁: 오노신사 (시오지리시 기타오노)
- 삼궁: 호다카신사 (아즈미노시 호다카)
- 사궁: 무스이베쓰신사(치쿠마시 하치만)
이외에, 사다신사 (마쓰모토시 시마다테 미노미야)를 삼궁으로 하는 전승이 있다.[42]
4. 4. 칙지목(勅旨牧)
시나노국에는 16개의 칙지목(勅旨牧)이 설치되어 말 사육이 이루어졌다. 칙지목은 다음과 같다.이름 | 위치 |
---|---|
대실목 | 수내군 |
갓바라목 | 고이군 |
고이목 | 고이군 |
신장목 | 소현군 |
시오바라목 | 소현군 |
보즈키목 | 사쿠군 |
나가쿠라목 | 사쿠군 |
시오노목 | 사쿠군 |
이노시카목 | 안도군 |
하니와라목 | 츠쿠마군 |
오오노목 | 츠쿠마군 |
오카야목 | 스와군 |
야마가목 | 스와군 |
하기쿠라목 | 스와군 |
히라이데목 | 이나군 |
미야도코로목 | 이나군 |
하니와라목에는 목감청이 병설되었다. 좌마료에 속했고, 후에 좌마료령의 쇼엔이 되었다.
5. 각주
(출력할 내용 없음)
참조
[1]
서적
Ōmi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2005
[2]
서적
Annal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1834
[3]
웹사이트
天正壬午の乱【増補改訂版】─本能寺の変と東国戦国史
https://sengokumap.n[...]
Ebisukosyo
2016-05-17
[4]
서적
日本城郭史研究叢書 第8巻 大坂城の諸研究
https://www.kosho.or[...]
名著出版
2024-06-06
[5]
서적
1982
[6]
서적
真田信之 : 父の知略に勝った決断力
https://www.book61.c[...]
PHP研究所
2024-05-17
[7]
서적
日本古文書学の諸問題
https://books.google[...]
名著出版
2024-05-15
[8]
서적
藤原氏族系図 6
https://www.kosho.or[...]
展望社
2024-05-15
[9]
학술지
北条・徳川間外交の意思伝達構造
https://doi.org/10.2[...]
国文学研究資料館
2015
[10]
웹사이트
Nationwide List of Ichinomiya
http://eos.kokugakui[...]
2011-08-10
[11]
문서
旧神坂村・旧山口村
[12]
서적
風土と人間
山川出版社
2003
[13]
서적
論集 東国信濃の古代中世史
岩田書院
2008
[14]
학술지
『古事記』と木簡に見える国名表記の対比
2012
[15]
서적
律令制国名表記の成立
塙書房
2001
[16]
서적
日本書紀
[17]
서적
古代信濃の氏族と信仰
吉川弘文館
2021
[18]
서적
「シナノ」の王墓の考古学
雄山閣
2006
[19]
서적
長野県史 通史編 第一巻 原始・古代
1989
[20]
학술지
古代東アジアにおける政治的流動性と人流
https://doi.org/10.3[...]
専修大学社会知性開発研究センター
2017-03
[21]
서적
日本歴史地名大系 第20巻 長野県の地名
平凡社
1979
[22]
서적
赤い土器のクニの考古学
雄山閣
2008
[23]
서적
古代信濃の地域社会構造
同成社
2017
[24]
서적
信濃国のなり立ち
山川出版社
2003
[25]
서적
日本書紀
660
[26]
서적
日本書紀
627
[27]
서적
続日本紀
702
[28]
서적
続日本紀
713
[29]
서적
続日本紀
789
[30]
서적
日本後紀
797
[31]
서적
続日本紀
757
[32]
서적
日本後紀
799
[33]
서적
東部町誌 歴史編
東部町
1990
[34]
서적
信濃の歴史と文化の研究
黒坂周平先生の喜寿を祝う会
1990
[35]
서적
延喜式
927
[36]
문서
山本英二
2008
[37]
문서
市河家文書
[38]
서적
新装普及版 江戸語辞典
東京堂出版
2014
[39]
웹사이트
信濃の由来|須坂のまるごと博物館
https://suzaka-marug[...]
2023-08-29
[40]
간행물
長野県史
長野県史刊行会
1989
[41]
서적
中世諸国一宮制の基礎的研究
岩田書院
2000
[42]
문서
沙田神社由緒書
[43]
서적
法然上人絵伝(下)
岩波文庫
[44]
문서
興福寺の記録
147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