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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안마리 드 모이리아크 드 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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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제프안마리 드 모이리아크 드 마이야는 1686년 예수회에 가입한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이자 번역가이다. 그는 1701년 중국으로 건너가 강희제의 명을 받아 지도 제작에 참여하고, 중국의 고전 역사서를 유럽 언어로 번역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중국의 역사를 다룬 《중국에 관한 일반 역사》를 편찬하여 유럽에 중국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의 저서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중국에 대한 유럽의 인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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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안마리 드 모이리아크 드 마이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조제프 안마리 드 모이리아크 드 마이야
원어 이름Joseph-Anne-Marie de Moyriac de Mailla
중국어 이름馮秉正 (Féng Bǐngzhèng)
인물 정보
직업예수회 선교사
국적프랑스
출생일1669년 12월 16일
출생지이제르주 또는 앵주
사망일1748년 6월 28일
사망지베이징, 중국

2. 생애

이제르주모이랑 출신이다.[2] 1913년 ''가톨릭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제르 강의 마이야크 성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다른 자료에서는 Ain의 마이야에 있는 성을 언급하기도 한다.[2] 학업을 마친 후 1686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2]

1701년 중국으로 떠나는 예수회 선교사의 일원으로 합류했으며,[2] 1703년 6월 모로코를 거쳐[2] 광둥 지방(광저우)에 도착했다.[2] 이후 마카오 등지에서 중국어중국의 역사 등에 관한 지식을 학습하였고, 특히 중국 역사 연구에 전념했다.

강희제의 의뢰로 장바티스트 레지스, 로만 힌데러 등과 함께 허난성, 저장성, 푸젠성, 타이완 등의 지도 측량 및 제도 작업에 착수했다.[2] 작업이 완료되자 강희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만다린 칭호를 수여했고,[2] 계속 궁궐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마이야는 선교 사업을 위해 기독교와 관련된 중국어 저서를 여러 권 집필하였으며, 중국의 고전 역사서를 유럽의 언어로 번역한 최초의 번역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1730년에는 주희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 <중국에 관한 일반 역사(Histoire Générale de la Chine)>를 편찬하여 당시 유럽에서 접할 수 있었던 중요한 중국 역사 기록물을 남겼다.

1748년 베이징에서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2] 사망 이후 건륭제는 그의 장례식을 후하게 치러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2]

3. 주요 업적

조제프안마리 드 모이리아크 드 마이야는 중국에서 활동하며 여러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청나라 강희제의 명을 받아 지도 측량 및 제작 작업에 참여하여 중국의 지리 정보 구축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중국의 고전 역사서를 유럽의 언어로 번역한 선구적인 번역가였다. 대표적으로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을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3][4][5], 이는 나중에 Histoire générale de la Chine|중국의 일반 역사프랑스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당시 유럽에서 접할 수 있었던 중요한 중국 역사 기록물이 되었다.[6] 그는 중국 고전인 《서경》을 번역한 최초의 유럽 학자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선교 사업을 위해 기독교와 관련된 여러 중국어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들은 유럽 사회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3. 1. 지도 제작

1703년 광둥 지방에 도착하여 마카오 등지에서 중국어중국의 역사 등에 관한 지식을 학습하였다. 이후 청나라 강희제의 의뢰를 받아 장바티스트 레지스, 로만 힌데러 등 다른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허난성, 저장성, 푸젠성, 타이완 등 여러 지역의 지도 측량 및 제도 작업에 참여했다. 이 작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후, 강희제로부터 관직을 부여받아 계속 궁궐에 머물며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3. 2. 역사서 번역

그는 50세에 만주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이를 바탕으로 강희제의 명령에 따라, 주희자치통감 발췌본을 만주어로 번역한 《자치통감강목》을 프랑스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3][4][5] 그는 1730년에 여러 권으로 번역을 마쳤고, 1737년에는 프랑스로 보냈다. 그러나 출판을 계획했던 니콜라 프레레가 사망하면서, 이 번역본은 리옹 대학교 도서관에 30년 동안 보관되었다.

예수회 탄압 이후, 대학교 당국은 이 원고를 아베 그로시에에게 넘겨 출판을 맡겼다. 이 작품은 Histoire générale de la Chine, ou Annales de cet Empire; traduit du Tong-kien-kang-mou par de Mailla|중국의 일반 역사, 또는 이 제국의 연대기; 드 마이야가 통감강목에서 번역프랑스어라는 제목으로 1777년부터 1783년까지 지도와 도면을 포함하여 총 12권으로 출판되었다.[6] 1785년에는 13번째 권이 추가로 출판되었다. 그로시에 외에도 동양학자 미셸-앙주-앙드레 르 루 드 오테레와 루이-다니엘 콜송이 출판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이야는 중국의 고전 역사서인 《서경》을 번역한 최초의 유럽 학자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선교 사업을 장려하기 위해 중국어로 몇몇 종교 서적을 편찬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인들의 생애와 연중 주일 복음에 대한 묵상을 다룬 것이었다.

《기만적인 편지》에는 그가 활동하던 시기 중국에서 일어난 기독교인 박해에 관한 그의 편지 몇 통이 실려 있다.

3. 3. 종교 서적 저술

마이야는 선교 사업을 장려하기 위해 중국어로 몇몇 종교 서적을 편찬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인들의 생애와 1년 내내 일요일마다 복음에 대한 묵상이었다.

《기만적인 편지》에는 그가 활동하던 시기 중국에서 일어난 기독교인 박해에 관한 그의 편지 몇 통이 실려 있다.

4. 영향 및 평가

주희유교 경전에 기반한 마이야의 『중국 통사』는 중국 제국의 역사를 이상화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중국 전례 논쟁의 맥락에서도 이해될 필요가 있다. 당시 유럽에서는 마이야의 저서가 중국 역사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였다. 이로 인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주요 사상가들은 중국을 이상적인 세속 군주국의 사례로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시각은 볼테르가 적극적으로 지지했지만, 몽테스키외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결과적으로는 다소 편향된 관점이었다.

참조

[1] 웹사이트 馮秉正 http://archives.cath[...] 2008-09-14
[2] 서적 Biographie des hommes célèbres du département de l'Ain : qui se sont distingués par leurs sciences, leurs talens, leurs actions, leurs vertus ou leurs vices https://gallica.bnf.[...] 1832–1840
[3] 웹사이트 Chinese Literature: Tongjian gangmu 通鑑綱目 http://www.chinaknow[...] 2007-10-11
[4] 간행물 Jesuits’ Journeys in Chinese Studies http://www.riccimac.[...] 2015-09-24
[5] 서적 An Historical and Descriptive Account of China: Its Ancient and Modern ... https://books.google[...] 1843
[6] 서적 The Dragon and the Eagle: The Presence of China in the American Enlightenment https://books.google[...]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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