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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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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지왕은 신라의 제2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6년부터 579년까지이다. 즉위와 함께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으며, 백제와의 대립 속에서 알야산성을 빼앗기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578년에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사치스러운 생활과 국정 운영의 혼란으로 인해 폐위되었으며, 폐위 후 3개월 만에 사망했다. 삼국유사에는 진지왕이 도화녀와의 관계를 통해 비형랑을 낳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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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신라 군주 (22-30)
신라 군주 (22-30)
김사륜(金舍輪), 김금륜(金金輪)
묘호미상
시호진지(眞智)
시대신라
재위 기간576년 ~ 579년
출생일생년 미상
사망일579년 8월 24일 (음력 7월 17일)
매장지경주 영경사 북쪽
로마자 표기Jinji Wang
신상 정보
성씨김(金)
부왕진흥왕
모후사도왕후
배우자지도부인
재위
즉위 년도576년
이전 국왕진흥왕
다음 국왕진평왕
섭정김거칠부(577~578)
연호홍제

2. 치세

신라의 제25대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재위 기간은 4년에 그쳤다. 이 시기 백제와의 군사적 충돌이 계속되었으며[13][14][15], 남조의 나라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12]

진지왕의 짧은 치세는 폐위로 끝난 것으로 기록된다. 《삼국유사》는 그가 정사를 어지럽히고 문란하게 하여 백성들에 의해 폐위되었다고 전하며 도화녀 설화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 위서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미실과의 약속 파기 및 국정 소홀을 이유로 미실과 사도태후가 노리부를 내세워 폐위시켰다고 주장한다. 579년 7월 17일에 사망하였으며[15], 시호는 진지(眞智), 능은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마련되었다.[15]

2. 1. 즉위 초

진지왕(眞智王)의 본명은 사륜(舍輪) 또는 금륜(金輪)이었으며, 그는 진흥왕과 박씨 출신 사도왕후(思道王后)의 차남이었다. 그의 형인 동륜 태자는 서기 572년에 사망했고, 사륜은 태자가 되었다.[1]

서기 576년에 사륜은 신라의 25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즉위에 대해 일부에서는 그의 행실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등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1] 즉위와 동시에 이찬 거칠부상대등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10] 이듬해에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드렸다.[11]

백제와는 대결 양상을 이어갔다. 재위 2년인 577년 10월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이에 왕은 이찬 세종(世宗)을 파견하여 물리치고, 내리서성(內利西城) 등을 쌓아 방비를 굳게 하였다.[13] 재위 3년(578년) 7월에는 남조의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외교 관계를 이어갔다.[12] 그러나 같은 해 백제에게 알야산성(閼也山城)을 주었고,[14] 579년 봄에는 백제가 웅현성(熊峴城), 송술성(松述城)을 쌓아 산산성(䔉山城), 마지현성(麻知峴城), 내리서성 등의 길을 끊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17일, 왕이 죽고, 시호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15]

야사 《삼국유사》에 의하면, 즉위한 지 4년 째 되던 해에 정사가 어지럽고 문란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하였다. 폐위되기 직전 진지왕은 도화녀(桃花女)를 후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도화녀가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2년 뒤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진지왕의 혼령이 도화녀에게 나타나 둘이 관계를 맺었고, 도화녀는 이후 비형을 낳았다. 이후 비형진평왕 대에 관리로 등용된다.

한편, 위서 논란이 있는 야사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미실을 왕후로 만드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과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던 것 때문에 미실과 사도태후가 결의하여, 노리부를 앞세워 폐위시켰다고 한다.

2. 2. 백제와의 대립

신라는 진지왕 재위 기간 동안 백제의 공격에 계속 직면하며 대결 양상을 이어갔다.

진지왕 2년(577년) 10월에는 백제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이에 왕은 이찬 세종(世宗)을 파견하여 백제군을 물리쳤다.[13][2] 이후 내리서성(內利西城) 등을 쌓아 국경 방비를 굳건히 하였다.[13]

그러나 이듬해인 재위 3년(578년)에는 백제에게 알야산성(閼也山城)을 빼앗겼다.[14][3]

재위 4년(579년) 봄에는 백제가 웅현성(熊峴城)과 송술성(松述城)을 쌓아 신라의 산산성(䔉山城), 마지현성(麻知峴城), 내리서성 등으로 향하는 길을 끊었다.[15][4]

2. 3. 대외 관계

재위 2년인 577년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13] 이에 왕은 이찬 세종(世宗)을 보내 이를 물리치고, 내리서성(內利西城) 등을 쌓아 방비를 강화했다.[13][2] 그러나 이듬해인 578년에는 백제에게 알야산성(閼也山城)을 내주었다.[14][3] 같은 해 7월에는 남조의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12][3]

579년 봄, 백제는 웅현성(熊峴城)과 송술성(松述城)을 쌓아 신라의 산산성(䔉山城), 마지현성(麻知峴城), 내리서성 등으로 향하는 길을 끊었다.[15][4] 또한 백제는 내리서성을 포함한 신라의 3개 요새를 점령하고 여러 주요 길을 파괴하였다.[4]

3. 폐위와 죽음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지왕 재위 2년인 577년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입하자 이찬 세종(世宗)을 보내 물리치고 내리서성(內利西城) 등을 쌓아 방비를 강화했다.[13] 그러나 이듬해인 578년에는 백제에게 알야산성(閼也山城)을 내주었으며,[14] 재위 4년인 579년 봄에는 백제가 웅현성(熊峴城)과 송술성(松述城)을 쌓아 신라의 산산성(䔉山城), 마지현성(麻知峴城), 내리서성 등으로 향하는 길을 끊었다.[15] 결국 같은 해 7월 17일, 진지왕은 재위 4년 만에 사망하였으며, 시호는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15]

삼국사기에는 진지왕의 폐위 기록이 명확히 나타나지 않지만, 야사인 삼국유사와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는 폐위와 관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삼국유사의 한 기록에 따르면, 진지왕은 즉위 4년째에 정사가 어지럽고 문란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고 한다. 다른 삼국유사 기록에서는 진지왕 재위 기간 동안 조정 내 갈등이 심화되고 관리들이 분열되었으며, 계속되는 백제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왕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아 관리들과 백성들이 양위를 요구했고, 결국 양위 후 3개월 만에 유폐되어 죽었다고 전한다.

화랑세기에서는 폐위의 원인을 미실과의 관계에서 찾는다. 진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미실을 왕후로 삼겠다고 약속했지만, 즉위 후 다른 여인에게 빠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미실과 진지왕의 어머니인 사도태후가 결탁하여, 노리부를 내세워 "부도덕한 왕 때문에 하늘이 신라를 버려 백제에게 땅을 빼앗겼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하늘을 달래기 위해 양위해야 한다고 압박하여 폐위시켰다고 한다. 폐위된 진지왕은 유폐되었고 3개월 후에 사망했으며, 그의 어린 조카(진평왕)가 왕위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사도태후가 수년간 섭정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진지왕과 도화녀(桃花女)에 얽힌 설화도 기록되어 있다. 폐위되기 직전 진지왕이 아름다운 도화녀를 후궁으로 삼으려 했으나, 그녀는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2년 뒤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진지왕의 혼령이 나타나 관계를 맺었고, 이후 도화녀비형랑을 낳았다. 비형랑은 후에 진평왕 대에 관리로 등용되었다고 전해진다.

4. 전설

야사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지왕이 즉위 4년째 되던 해 정사가 어지럽고 문란해지자 백성들이 그를 폐위시켰다고 한다. 폐위 직전, 진지왕은 아름다운 도화녀(桃花女)를 후궁으로 삼으려 했으나, 그녀는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2년 뒤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세상을 떠난 진지왕의 혼령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둘은 관계를 맺었고, 이후 도화녀비형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비형은 훗날 진평왕 대에 관리로 등용되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위서 논란이 있는 야사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진지왕 폐위와 관련하여 다른 설명과 함께, 도화녀 설화와 유사하면서도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진지왕은 미실을 왕후로 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국정을 소홀히 하여, 미실과 사도태후가 결의하고 노리부를 내세워 폐위시켰다고 한다.

화랑세기》 속 도화녀 관련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진지왕은 평민 신분의 한 여인에게 반해 후궁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여인은 이미 결혼한 몸이라며 거절하고 남편에게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왕이 거절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자, 여인은 알고 있지만 두 남편을 섬길 수는 없다고 답했다. 왕이 여인의 남편을 죽일 수도 있다고 하자, 여인은 그 또한 알고 있지만 다른 남자와 사느니 죽음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왕이 미혼이었다면 자신을 받아들였겠냐고 묻자, 여인은 "예"라고 답했다. 결국 왕은 여인을 풀어주었다.

그 해 진지왕은 폐위되어 사망했다. 2년 후, 여인의 남편도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죽은 지 열흘째 되던 날 밤, 진지왕의 혼령이 여인의 집을 찾아와 과거 그녀가 했던 약속(미혼이었다면 왕을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말)을 상기시켰다. 여인은 이 사실을 시부모에게 알리고 허락을 구했고, 시부모는 죽은 아들이 저승에서 왕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이를 허락했다.

그 후 7일 동안 여인의 집에는 자욱한 연기와 향 냄새가 가득했고, 7일 뒤 연기와 향기가 사라지며 진지왕의 혼령도 떠났다. 얼마 후 여인은 임신하여 비형을 낳았다. 진평왕은 이 소식을 듣고 비형을 궁궐로 데려와 키웠다.

비형이 성장하자 밤마다 궁궐을 몰래 빠져나가는 일이 잦았다.[5] 진평왕은 시종에게 비형을 미행하여 어디로 가는지 알아보게 했다. 시종은 비형이 매일 밤 서라벌 서쪽 황천(荒川) 강둑에서 혼령(귀신)들과 어울린다고 보고했다. 왕은 비형에게 황천에 다리를 놓으라고 명했다. 비형과 혼령들은 하룻밤 만에 다리를 완성했고, 사람들은 이 다리를 '귀교(鬼橋)', 즉 귀신 다리라고 불렀다.

혼령들 중 길달(吉達)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비형이 그를 진평왕에게 추천하여 절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길달이 여우로 변신하여 달아나려 하자 비형이 그를 쫓아가 죽였다. 이 일로 다른 혼령들은 비형을 두려워하며 궁궐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때의 여우 중 하나가 훗날 김유신의 연인을 해치려다 김유신에게 죽임을 당한 금여우(金狐)였다고도 한다.

5. 가계

사륜(舍輪) 또는 금륜(金輪)[1]? ~ 579년신라 제25대 왕 (재위 576년 ~ 579년)왕비지도부인(知道夫人)박씨자녀 (적자)김용춘(金龍春)579년? ~ 646년?문흥왕(文興王) 추존, 무열왕의 아버지
어머니: 지도부인후궁도화녀(桃花女)자녀 (서자)비형랑(鼻荊郞)581년 ~ ?어머니: 도화녀후궁보명궁주(寶明宮主)지소태후와 구진(仇珍)의 딸자녀석명공주(昔明公主)어머니: 보명궁주자녀양명공주(兩明公主)어머니: 보명궁주



진흥왕사도왕후의 차남이다. 형인 동륜태자가 572년에 사망하자 태자가 되었고,[1] 576년 신라 제25대 왕으로 즉위했다.

6. 진지왕이 등장하는 작품

작품방송사방영 연도배우
연개소문SBS2006년~2007년최성준
선덕여왕MBC2009년임호
대왕의 꿈MBC2012년~2013년손효원
한국사기KBS2017년허재훈


참조

[1] 서적 Samguk sagi
[2] 서적 Samguk sagi
[3] 서적 Samguk sagi
[4] 서적 Samguk sagi
[5] 뉴스 Silla, when giants ruled the peninsula https://www.koreatim[...] 2023-11-18
[6] 문서 思道夫人の表記は『三国史記』新羅本紀・真智王紀による。同・真興王紀では「朴氏息道夫人」、『三国遺事』王暦では「朴氏尼英失角干之女思刁夫人。一作色刁夫人。朴氏」、同・興法・原宗興法では真興王妃として「思刀夫人朴氏。牟梁里英失角干之女」と記す。
[7] 문서 知道夫人の表記は『三国史記』新羅本紀・真智王紀による。『三国遺事』王暦には「如刁夫人。起烏公之女。朴氏」、同・紀異・桃花女花荊郎条では「起烏公之女知刀夫人」とする。
[8] 문서 사도왕후](思道王后)가 아닌 숙명공주 (신라)|숙명궁주](叔明宮主)가 친어머니라는 설도 있음.
[9] 문서 사도왕후](思道王后)가 아닌 숙명공주 (신라)|숙명궁주](叔明宮主)가 친어머니라는 설도 있음.
[10] 서적 삼국사기
[11] 서적 삼국사기
[12] 서적 삼국사기
[13] 서적 삼국사기
[14] 서적 삼국사기
[15] 서적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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