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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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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종무열왕은 603년에 태어나 661년에 사망한 신라의 제29대 왕이다. 김용춘과 천명부인의 아들이며, 김유신과 혼인 동맹을 맺고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했다. 654년에 즉위하여 당나라의 문물을 수용하고 율령을 정비했으며,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사후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으며, 긍정적 평가와 함께 외세 의존적인 행보로 인한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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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통일전에 있는 무열왕 어진(왼쪽)
통일전에 있는 무열왕 어진 (왼쪽)
김춘추
묘호태종(太宗)
시호무열(武烈)
생년603년
몰년661년
즉위654년
퇴위661년
아버지김용수
어머니천명공주
배우자문명왕후 김씨
자녀10남 5녀 (문무왕, 김인문, 고타소랑, 지소공주, 요석공주)
묻힌 곳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750 (태종무열왕릉)
신라 왕 정보
왕위 계승 순서신라 29대 왕
이전 국왕진덕여왕
다음 국왕문무왕
생애
출생603년, 서라벌
사망661년 6월 (음력), 서라벌 (58세)
가야와의 관계
김유신과의 관계김유신은 왕경 사람이며, 12대 조상인 수로는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후한 건무 18년 임인년에 구봉에 올라 가락의 아홉 마을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가야라고 불렀으며, 후에 금관국으로 고쳤다. 그 자손이 서로 이어 구세손 구충(혹은 구차휴라고도 함)에 이르렀는데, 김유신의 증조부가 된다.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예라고 칭하며, 성을 김씨라 하였다. 김유신 비문에도 "헌원의 후예, 소호의 자손"이라고 쓰여 있다. 즉 남가야 시조 수로는 신라와 동성이다.

2. 생애

603년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과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20] 할아버지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왕위 계승에서 멀어졌으나, 김유신과의 혼인 동맹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김춘추는 아버지 김용수가 진골로 강등되면서 왕위 계승 자격을 잃었으나, 김용수가 성골 공주인 천명공주와 결혼하면서 다시 성골이 되어 왕위 계승 권리를 얻었다. 진덕여왕 사후, 상대등 알천이 왕위 계승 유력자였으나, 김유신의 지지로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압박으로 궁지에 몰렸고, 김춘추는 외교 사절로 고구려와 일본에 파견되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646년 일본은 견신라사 고무코 겐리를 파견하여 임나에 대한 조공 폐지와 인질을 요구했고, 647년에는 김춘추 자신이 인질로 잡히기도 했다.[10][11] 648년 당나라에 파견된 김춘추는 당 태종의 후대를 받고 당나라-신라 동맹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650년부터는 신라 고유의 연호를 폐지하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했다.

642년 백제 윤충이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면서,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가 사망했다. 김춘추는 백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고구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24] 보장왕연개소문을 만나 원병을 청했지만, 고구려는 진흥왕 때 신라가 획득한 죽령 이북 땅의 반환을 요구하며 거절했다. 김춘추는 "돌아가는 대로 왕에게 아뢰어 땅을 돌려주게 하겠다"는 거짓 편지를 쓰고 나서야 고구려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25]

일본서기》에 따르면, 647년 김춘추가 일본에 건너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김춘추의 관등은 상신(上臣) 대아찬으로 표기되어 있다.[26]

654년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알천이 섭정을 사양하고 김춘추에게 왕위를 권했다. 김춘추는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국인들의 천거로 결국 왕위에 올랐다.[35]삼국사기》는 박혁거세부터 진덕여왕까지 28명의 임금을 성골, 무열왕부터 경순왕까지를 진골로 구분하고, 무열왕부터 혜공왕 시기까지를 중대(中代)로 분류하였다.[36] 반면 《삼국유사》는 진덕여왕 이후 무열왕부터의 왕계를 하고(下古)로 분류한다.[37]

즉위 직후, 무열왕은 아버지 김용춘을 문흥왕(文興王)으로, 어머니 천명공주를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존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35] 5월에는 이법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 등에게 율령의 수정·보완을 위한 법령인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게 하였다.[35] 655년에는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삼고, 지소공주김유신에게 시집보내는 등 중첩된 혼인관계를 이루었다.[38]

에 사신을 보내 즉위를 알렸고, 당 고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신라왕으로 책봉되었다.[35] 652년에는 낙랑군왕(樂浪郡王)을 증봉받았다.[12] 655년, 고구려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33개 성을 탈취하자 당에 구원을 요청했고, 당은 정명진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38] 656년에는 신라의 개국 공신인 사로 6촌장을 왕으로 추존하였고,659년에도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여 공격해 오자, 당에 출병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했다.[39]

658년에는 왕자인 김문왕을 집사부중시로 임명하고,[40] 660년 1월에는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는 등[42] 친족 중심의 내각을 구성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무열왕 이전 상대등은 화백 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였으나, 무열왕 이후 상대등은 왕이 임명하는 직책이 되면서 화백 회의는 왕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661년 음력 6월 59세로 사망하였다. 諡號중국어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를 지냈으며, 廟號중국어를 올려서 태종(太宗)이라고 하였다. 당 고종은 무열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44]

2. 1. 출생과 성장

603년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과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20] 할아버지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왕위 계승에서 멀어졌으나, 김유신과의 혼인 동맹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김춘추는 아버지 김용수가 진골로 강등되면서 왕위 계승 자격을 잃었으나, 김용수가 성골 공주인 천명공주와 결혼하면서 다시 성골이 되어 왕위 계승 권리를 얻었다. 진덕여왕 사후, 상대등 알천이 왕위 계승 유력자였으나, 김유신의 지지로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압박으로 궁지에 몰렸고, 김춘추는 외교 사절로 고구려와 일본에 파견되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646년 일본은 견신라사 고무코 겐리를 파견하여 임나에 대한 조공 폐지와 인질을 요구했고, 647년에는 김춘추 자신이 인질로 잡히기도 했다.[10][11]

648년 당나라에 파견된 김춘추는 당 태종의 후대를 받고 당나라-신라 동맹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650년부터는 신라 고유의 연호를 폐지하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했다.

2. 1. 1. 김유신과의 혼인 동맹

김유신의 누이동생 보희는 서라벌 전역이 소변에 잠기는 꿈을 꾸었는데, 문희는 비단치마를 주고 그 꿈을 샀다. 이후 김춘추는 김유신과 축국을 하다가 옷깃이 찢어졌고, 김유신은 일부러 김춘추의 옷깃을 밟아 끊은 뒤 자신의 집에서 옷을 수선할 것을 권하며 집안으로 들였다. 김유신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불러 옷을 꿰매게 했는데, 보희는 사양했고 문희가 대신 옷을 꿰매 주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김춘추가 문희와 정식으로 혼인하려 하지 않자, 김유신은 문희를 자신이 불태워 죽일 것이라고 소문을 냈고, 선덕여왕남산에 오르는 날을 기다려 뜰에 땔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연기를 피웠다. 여왕은 연기를 보고 김춘추에게 문희를 구하라고 명했고, 김춘추는 문희와 혼인하게 되었다.[22][23]

김유신은 여동생 중 한 명이 김춘추와 결혼하기를 바랐다. 격구(격구|geogku한국어, 전통 한국 폴로) 경기 중 김유신은 의도적으로 김춘추 옷에 달린 을 뜯어냈다. 김유신은 여동생에게 옷을 꿰매도록 제안했고, 보희에게 꿰매도록 했지만, 보희는 낯선 사람 앞에서 너무 긴장해서 거절했다. 문희가 대신 꿰매주었고, 김춘추와 문희는 사랑에 빠졌다. 김춘추는 문희를 자주 방문했지만, 김유신은 관계를 모르는 척했다. 문희는 임신하게 되었지만, 김춘추는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까 봐 비밀로 했다. 김유신은 여동생을 심하게 꾸짖은 후, 하인들에게 여동생의 임신 소문을 퍼뜨리고 죽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김춘추에게 여동생과 결혼하도록 압박하는 계획을 세웠다.

선덕여왕은 남산에서 신하들과 산책을 했다. 김유신은 집 뜰에 마른 장작과 잔가지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 여왕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여왕은 유신의 거주지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를 알아차리고, 그 이유를 물었다. 문희가 혼전 임신을 했고 김유신이 그녀를 불태워 죽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게 된 여왕은 김춘추의 초조한 표정을 알아차리고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진실이 밝혀진 후, 여왕은 김춘추에게 문희를 구하고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첫 번째 부인이 죽으면 정식 배우자가 되도록 명령했다.

문희는 김춘추의 부인(보량)이 둘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후 공식적으로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김춘추가 654년에 신라 제29대 왕으로 즉위한 후 왕비가 되었다.[2]

2. 2. 즉위 전 외교 활동

642년 백제 윤충이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면서,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가 사망했다. 김춘추는 백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고구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24] 보장왕연개소문을 만나 원병을 청했지만, 고구려는 진흥왕 때 신라가 획득한 죽령 이북 땅의 반환을 요구하며 거절했다. 김춘추는 "돌아가는 대로 왕에게 아뢰어 땅을 돌려주게 하겠다"는 거짓 편지를 쓰고 나서야 고구려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25]

일본서기》에 따르면, 647년 김춘추가 일본에 건너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김춘추의 관등은 상신(上臣) 대아찬으로 표기되어 있다.[26] 일본은 신라에게 임나에 대한 조공을 요구하고, 김춘추를 인질로 삼으려 했다.[10][11]

2. 2. 1. 당나라와의 관계

648년 12월, 김춘추는 아들 문왕과 함께 에 들어가[28] 태종의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는 당의 국학을 방문하여 석전과 강론을 참관하였으며, 신라의 의복을 중국 제도에 따를 것을 청했다. 당 태종으로부터 특진(特進)의 벼슬을 받고, 당에 머무르던 중 태종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29]

당 태종은 김춘추가 귀국할 때 3품 이상 관리들을 불러 송별연을 열었고, 『온탕비(溫湯碑)』 · 『진사비(晉祠碑)』의 글과 《진서(晉書)》 한 질을 하사하였으며, 장안성의 동문 밖까지 나아가 전송하였다. 김춘추는 당으로부터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벼슬을 받은 아들 문왕을 당에 남겨두고 신라로 귀국하였다.[30]

649년부터 신라는 관복을 당나라 풍으로 바꾸고,[32] 650년 진덕여왕이 직접 당의 왕업을 찬미하는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지어 비단에 수를 놓아 보냈으며, 신라의 고유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영휘(永徽) 연호를 사용하는 등 친당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33]

2. 3. 즉위와 통치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알천이 섭정을 사양하고 김춘추에게 왕위를 권했다. 김춘추는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국인들의 천거로 결국 왕위에 올랐다.[35]삼국사기》는 박혁거세부터 진덕여왕까지 28명의 임금을 성골, 무열왕부터 경순왕까지를 진골로 구분하고, 무열왕부터 혜공왕 시기까지를 중대(中代)로 분류하였다.[36] 반면 《삼국유사》는 진덕여왕 이후 무열왕부터의 왕계를 하고(下古)로 분류한다.[37]

즉위 직후, 무열왕은 아버지 김용춘을 문흥왕(文興王)으로, 어머니 천명공주를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존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35] 5월에는 이법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 등에게 율령의 수정·보완을 위한 법령인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게 하였다.[35] 655년에는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삼고, 지소공주김유신에게 시집보내는 등 중첩된 혼인관계를 이루었다.[38]

에 사신을 보내 즉위를 알렸고, 당 고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신라왕으로 책봉되었다.[35] 652년에는 낙랑군왕(樂浪郡王)을 증봉받았다.[12] 655년, 고구려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33개 성을 탈취하자 당에 구원을 요청했고, 당은 정명진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38] 656년에는 신라의 개국 공신인 사로 6촌장을 왕으로 추존하였고,659년에도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여 공격해 오자, 당에 출병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했다.[39]

658년에는 왕자인 김문왕을 집사부중시로 임명하고,[40] 660년 1월에는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는 등[42] 친족 중심의 내각을 구성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무열왕 이전 상대등은 화백 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였으나, 무열왕 이후 상대등은 왕이 임명하는 직책이 되면서 화백 회의는 왕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2. 3. 1. 백제 멸망

660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당은 소정방과 유백영 등이 이끄는 13만 명의 군사를 파병하였고, 김인문은 소정방 부대의 부총관 자격으로 참전했다. 태종무열왕은 김유신 등과 함께 5만 군사를 이끌고 백제로 진격했다.[42]

7월 9일,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도 기벌포에 상륙하여 7월 13일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7월 18일에는 웅진성으로 도망쳤던 의자왕도 항복하여 백제는 멸망하였다.[42] 항복한 의자왕과 백제의 여러 신하들은 신라군에 의해 조롱을 당하기도 하였다.[42]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 부흥 운동을 틈타 (對) 신라, 당나라 공작 기지로 활용하려 하였다. 이에 태종무열왕은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 항복한 백제 관료들에게 관직을 내리는 등 백제 유민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다.[42]

2. 4. 죽음

661년 음력 6월 59세로 사망하였다. 諡號중국어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를 지냈으며, 廟號중국어를 올려서 태종(太宗)이라고 하였다. 당 고종은 무열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44]

삼국사기》는 태종 무열왕의 무덤이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있다고 기록하였으며, 지금의 경주시 서악동 842번지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소재한 서악리 고분군의 다섯 고분 가운데 가장 아래에 위치한 원형봉토분이 태종 무열왕의 능으로 비정되고 있다. 봉분의 면적은 14169m2로, 신라의 왕릉 가운데 피장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덤으로서 가치가 있으며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었고, 1972년부터 1973년에 걸쳐 주변 정비가 이루어졌다.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은 다른 왕릉에 비해 봉분 장식이 소박한 편으로 무덤 주위에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 동북쪽에는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는데, 일제 강점기 이전에 이미 비석의 몸돌 부분은 사라지고 귀부와 이수 부분만 남아있었으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어 묘의 주인이 무열왕임을 확실히 규명할 수 있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비는 무열왕이 사망한 661년에 건립되었고, 비문의 글씨는 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이 썼다.[46]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부모조부(부계)진지왕신라 제25대 왕
조모(부계)지도부인 박씨
아버지문흥왕으로 추존된 김용춘진지왕과 지도부인의 아들
어머니문정태후로 추존된 천명공주
외가외조부진평왕신라 제26대 왕
외조모마야부인
이모선덕여왕신라 제27대 왕
왕후문명왕후 김문희김유신의 여동생
자녀아들문무왕신라 제30대 왕
며느리자의왕후 김씨파진찬 김선품의 장녀
손자신문왕신라 제31대 왕
아들김인문
아들김문왕강릉 김씨의 선조
아들김노차
아들김인태
아들김지경
아들김개원
고타소공주 (? ~ 642년)사위: 김품석
지소부인사위: 김유신
기타원성왕의 증조모
신목왕후의 모후사위: 김흠운 (? ~ 655년) - 소판 김달복의 아들. 백제와 전투에서 전사. 외손녀: 신목왕후(신문왕의 왕비)
후궁보희
자녀요석공주사위: 원효 (617년 ~ 686년) - 신라의 고승. 외손: 설총 - 신라의 문장가.
아들김개지문
아들김거득
아들김마득


4. 평가

태종무열왕은 뛰어난 외교술과 군사적 결단력을 바탕으로 신라의 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일본서기》에는 고토쿠 천황 3년(647년) 김춘추가 사신으로 왔을 때 "용모가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26] 《삼국유사》에는 무열왕이 당나라에 갔을 때 당 태종이 그의 풍채를 보고 "신성한 사람"이라 칭찬하며 붙잡아두려 했으나, 간청하여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23] 《삼국사기》는 무열왕의 용모가 영특하고 뛰어나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뜻이 있었다고 기록했다.[45]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열왕은 대식가였다. 한 끼에 서 말과 아홉 마리를 먹었고, 660년 백제 멸망 후에는 점심을 거르고 아침, 저녁만 먹었는데 하루에 쌀 여섯 말,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고 한다.[23]

4. 1. 긍정적 평가

당대 신라인들은 태종 무열왕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48] 이는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올린 것에서 알 수 있는데, 삼국 역사상 최초이자 신라 임금 중에는 열조 원성왕과 함께 유이한 사례였다.[49] 당 고종[50]이 신라가 천자의 칭호를 참칭한다며 묘호 변경을 요구하자, 신문왕은 무열왕이 김유신이라는 신하를 얻어 삼한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당 고종은 이를 확인하고 묘호를 허락했다고 한다.[23]

성덕왕은 태종 무열왕의 명복을 빌고자 봉덕사를 지었으며,[52] 혜공왕은 미추왕과 더불어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을 대대로 헐지 않는 신주로 삼았다.[53] 이는 애장왕 2년(801년)에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사당을 따로 지어 신주를 옮길 때까지 계속되었다.[54]

9세기 중엽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890년경 건립)에서 무열왕의 업적을 찬양하며, "두 적국(敵國)을 평정하고 문명에 접하게 하여 주셨다"고 평가했다. 또한 진성여왕 7년(893년)에 당나라에 보내는 글에서 "3백여 년 동안 한쪽 지방은 무사하고 넓은 바다가 편안한 것은 곧 우리 무열대왕의 공로"라고까지 평가했다. 고려조선의 유학자들도 대부분 이와 비슷한 인식이었다.

무열왕은 당나라 고종 황제와 친분이 두터웠다. 고종이 황제가 되기 전부터 두 사람은 친구였으며, 서로 도왔다. 무열왕은 당나라에 백제 멸망을 위한 증원을 끊임없이 요청했고, 당나라는 660년소정방 장군 휘하의 13만 군사를 보냈다. 김유신은 5만 군사를 이끌고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했다. 백제 의자왕은 결국 항복했고, 고구려만 신라와 대적하게 되었다.

이듬해 6월에 무열왕이 죽자 아들 문무왕이 왕위를 계승했다.[3]

4. 2. 부정적 평가

태종 무열왕은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통일을 이루었지만, 이 과정에서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의 강역을 축소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55]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장지연은 김춘추가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국 역사가 천여 년 동안 외국의 사상에 휩쓸리고, 민족의 위엄은 사라지고 외세의 위세만 높아졌다고 비판했다. 또한 이것이 한국이 하나로 뭉치지 못한 원인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55]

신채호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모두 '신성한 부여족', 즉 '조선 한민족의 형제'로 보았다. 그는 김춘추가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한 것을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인" 행위로 규정하고, "다른 민족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 백제를 없앤 역사의 죄인"이라고 비판했다.[56]

안재홍 역시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평양과 관북 지역을 비롯한 대부분의 북방 영토를 포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당나라의 명령을 빌려 외세의 힘을 이용한 신라의 행동에서 '사대주의'가 비롯되었다고 평가했다.[57]

해방 이후 손진태김유신과 김춘추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족을 공격하기 위해 이민족과 연맹하는 것은 민족적으로 최대의 죄악"이며, 신라가 당나라와 손잡은 것을 "귀족 국가의 비민족적 본질"이라고 비난했다.[58]

1993년 성균관대학교 김영하 교수는 천리장성을 예로 들며, 축소된 강역으로 인해 만주 요동 땅을 밟지 못하고 고토를 잃고 살다가 조선에 와서야 겨우 압록강두만강, 백두산을 찾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당나라의 한반도 경략에 발맞춰 외세와 공조하여 백제만을 겨우 정복한 신라는 "통일을 완수할 힘도 의도도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고, '통일신라 시대' 대신 '신라와 발해' 또는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4. 2. 1. 비판에 대한 반론

20세기 초, 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면서 태종 무열왕은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사적 강역을 축소시켰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삼한통일'에 대한 비판의 주된 쟁점은 김춘추가 활동할 당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 사이에 서로를 '동족'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존재했느냐는 것이다.

구당서》 등에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이 서로 말과 풍속이 같았다고 서술하고 있어 서로를 '동류'로 파악하는 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부여 계열인 고구려, 백제[59]와 삼한(三韓) 중 진한변한(가야) 계열인 신라는 시조 신화나 제사, 정치 체계 및 혼인 풍속 등에서 여러 차이가 있었다. 특히 수백 년에 걸쳐 계속된 치열한 경쟁 속에서 특화된 이질성과 오랜 전쟁으로 인한 적대감이 상당히 누적되어 있었다.

642년 김춘추와 연개소문 사이의 교섭은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신라에게 죽령 이북의 한강 유역 전체를 내놓고 현재의 영남 지역에 국한된 약소국으로 남기를 요구하는 제국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반면 한강 유역[60]을 잃으면 패망을 면할 수 없다는 신라 지배자들의 인식은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이러한 당시의 현실에서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김춘추의 선택은 그가 현대 한국인이 아닌 고대 신라인, 그것도 신라의 지배자였다는 점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바탕 위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사방의 적에 둘러싸여 궁지에 몰린 신라는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 정책에 편승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 결과 당시 신라인들은 수백 년간 지속된 전쟁 상태를 종식시키고, 백제 영토를 흡수했으며, 중국 신문물을 수입하여 중화식 개혁을 이루는 등 국가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고구려 영토 역시, 근·현대의 민족주의적 관점과 같은 인식이 없었던 고대의 신라 지배층에게는 땅을 상실하기는커녕 대동강 이남 지역(현재의 황해도)을 획득함으로써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낸 것이었고, 당대 최강 국가인 당나라를 상대로 한 최선의 결과물이었다.

백제의 영토를 흡수하고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을 차지하게 된 신라는 후대의 한반도 통일국가인 고려, 조선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에 7세기 말에 신라인들이 사용했던 '삼한일통'이나 '삼국통일'과 같은 말은 19세기까지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져 계속 쓰였다.[61]

5. 대중 문화 속 태종무열왕

다음은 태종무열왕이 등장하는 대중 문화 작품들이다.

작품명방송/개봉 연도방송사배우
원효대사1986년KBS1박인환
삼국기1992년~1993년KBS1송영창
황산벌2003년이호성
연개소문2006년~2007년SBS김병세
선덕여왕2009년MBC유승호(아역: 정윤석)
계백2011년MBC이동규
대왕의 꿈2012년~2013년KBS1최수종(아역: 채상우)
한국사기2017년KBS1박준혁


참조

[1] 뉴스 The memorial stele for King Taejong Muyeol of Silla https://koreajoongan[...] 2013-02-03
[2] 뉴스 King Munmu the Great, the Guardian of Silla https://world.kbs.co[...] 2010-06-11
[3] 뉴스 King Munmu the Great, the Guardian of Silla https://world.kbs.co[...] 2010-06-11
[4] 문서 Recorded as the daughter of Lady Boryang in the Hwarang Segi
[5] 문서 According to the Samguk sagi, she was married to her uncle Kim Yu-sin when he turned 60. See Samguk sagi, book 5, Taejong Muyeol year 2 (655).
[6] 문서 It is certain that Kim In-t'ae, Kim Kaejimun, and Kim Ma-tŭk were the sons of concubines. The identity of Kim Mun-wang, Kim No-ch'a, Kim Chi-gyŏng, and Kim Kae-wŏn's mothers are uncertain. According to the Samguk yusa, they were sons of Queen Munmyeong, but the Samguk sagi lists them as the sons of concubines.
[7] 웹사이트 金春秋
[8] 서적 三国史記
[9] 서적 三国遺事
[10] 서적 日本書紀 642
[11] 서적 日本書紀 643
[12] 서적 旧唐書 652
[13] 서적 朝鮮史 山川出版社 2000-08
[14] 논문 隋唐の北東アジア支配と倭国の政変 北海学園大学
[15] 문서 당시 신라의 군사력의 중핵은 왕도 금성 부근을 기반으로 하는 중앙 귀족의 사병의 연합이었어서, 반드시 신라왕이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백제 토벌전이나 그 후의 고구려 토벌전에서의 왕의 공훈 행상은, 하급의 지방 호족이나 투항한 적장 등 중앙 귀족의 사병으로서 속하지 않은 층을 중시하고 있어, 이러한 계층이 삼국 통일 후 신라 왕권을 지탱해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 보이고 있다. (→井上1972)
[16] 서적 三国遺事
[17] 서적 三国史記
[18] 웹사이트 http://encykorea.aks[...]
[19] 웹사이트 태종무열왕 http://encykorea.aks[...] 한국학중앙연구원
[20] 문서 김용수(金龍樹)라고도 한다.
[21] 논문 〈신라 骨品制 연구의 새로운 傾向과 課題〉 http://www.riss.kr/l[...] 한국고대사학회 2009
[22] 문서 이 사건이 구체적으로 언제 있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문희의 소생으로 무열왕의 장자인 문무왕 법민(法敏)이 태어난 것이 626년이라는 『문무대왕비』 기록에서 유추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아마 그 이전의 일로 보인다. 이 경우 《삼국유사》가 전하는 김춘추의 혼인 에피소드가 있었을 당시 선덕여왕은 아직 즉위하기 전이었음에도 '왕'으로 표기한 《삼국유사》 기록은 모순이 생기게 된다.
[23] 서적 삼국유사 권제1 기이 태종춘추공
[24] 서적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선덕왕 11년(642) 642
[25] 서적 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 상
[26] 서적 일孝德天皇 大化 3년(647) 647
[27] 서적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1년(647) 647
[28] 서적 자치통감 권199 唐紀十五太宗文武 貞觀 22년(648) 648
[29] 서적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2년(648) 648
[30] 서적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2년(648) 648
[31] 서적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32] 서적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3년(649) 649
[33] 서적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4년(650) 650
[34] 서적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5년(651) 651
[35] 서적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1년(654) 654
[36] 서적 삼국사기 권제12 신라본기 제12 경순왕
[37] 서적 삼국유사 권제1 왕력(王曆)
[38] 서적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2년(655)
[39] 서적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3년(656)
[40] 서적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5년(658)
[41] 서적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6년(659)
[42] 서적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7년(660)
[43] 문서 신라 10정 중 하나
[44] 서적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8년(661)
[45] 웹사이트 삼국사기 https://db.history.g[...]
[46] 웹사이트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http://encykorea.aks[...]
[47] 서적 화랑세기 소나무
[48] 웹사이트 http://contents.hist[...]
[49] 문서 묘호와 시호 논쟁
[50] 서적 삼국사기 중 당 중종 관련 내용
[51] 서적 성종실록 성종 18년 정미(1487년) 2월 경진(10일)조
[52] 서적 삼국유사 권제2 기이 성덕왕
[53] 서적 삼국사기 권제32 잡지 제1 제사(祭祀)
[54] 서적 삼국사기 권제10 신라본기 제10 애장왕 2년(801)
[55] 뉴스 團體然後民族可保 대한자강회월보 1906-11-25
[56] 간행물 독사신론 제9장 김춘추의 功罪 대한매일신보
[57] 간행물 한양조 5백년 총평 개벽 1926-07-01
[58] 서적 한국민족사개론
[59] 문서 토착세력과 삼한 마한
[60] 문서 현재의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충주권
[61] 뉴스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인가 http://legacy.h21.ha[...] 한겨레21 2008-07-16
[62] 웹사이트 삼국사기 https://db.history.g[...]
[63] 웹사이트 삼국유사 https://db.histor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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