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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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주는 촉한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유비가 황제로 즉위할 때 이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 제갈량 사후에는 장완을 보좌하며 학자들을 총괄했고, 강유의 북벌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위나라의 침공으로 촉한이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항복을 주장하여 유선을 설득, 촉한 멸망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위나라에서 벼슬을 받았으나 곧 사망했으며, 항복을 권한 행위로 인해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저서로는 《오경론》, 《구국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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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애는 위나라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농업 관리에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전략적 식견으로 중용되어 강유의 북벌을 막고 촉한 정벌에 공헌했으나 종회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후 명예가 회복되었다. - 조위의 정후 - 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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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과 서진에서 벼슬을 지낸 진수는 환관의 핍박을 받기도 했으나 장화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삼국지》를 편찬, 위나라를 정통으로 하는 역사관을 확립한 역사가이다. - 촉한의 관료 - 제갈균
제갈균은 삼국시대 촉한의 관료이자 제갈량의 동생으로, 형이 유비에게 등용될 때 촉한에 출사하여 장수교위를 지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그를 제갈량으로 착각하는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초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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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谯周 (Qiáo Zhōu) |
자 | 允南 (Yǔnnán) |
출생 | 199년 |
사망 | 270년 겨울 |
출생지 | 랑중시(閬中), 쓰촨 성(Sichuan) |
작위 | 양성정후(陽城亭侯)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초빈(谯 Pin) |
자녀 | 초희(Qiao Xi) 초헌(Qiao Xian) 초동(Qiao Tong) |
관직 및 경력 | |
초기 관직 | 기도위(騎都尉) |
역임 관직 | 산기상시(散騎常侍) 광록대부(光祿大夫) 중산대부(中散大夫) |
섬긴 군주 | 유비 유선 조환 사마염 |
업적 | |
주요 활동 | 천문학, 역사학, 정치, 저술 활동 |
2. 생애
초주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형과 함께 살았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촉한과 서진에서 활동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그의 생애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초기 생애와 학문 활동: 유비가 221년 황제에 즉위하는데 기여하였다.
- 촉한에서의 관직 생활: 유선 즉위 후 제갈량에 의해 권학종사에 임명되었고, 장완 치하에서는 전학종사로 익주 학자들을 총괄했다. 강유의 북벌에 대해서는 〈구국론(仇國論)〉을 통해 비판했다.
- 촉한 멸망과 그 이후: 263년 위나라 침공 시 유선에게 항복을 권고하여 촉한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 멸망 후 위나라에서 양성정후에 봉해졌고, 태시 6년(270년) 산기상시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관직을 받지 못하고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학문 활동
초주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형과 함께 살았다. 성장한 이후 학문에 정진했고, 가난한 집안 형편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진실하고 꾸밈없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익주에서 사우종사(師友從事)를 역임한 초□(譙𡸫)이다.[8]220년 조비(曹丕)가 헌제(獻帝)에게 선양을 받고 위나라를 세웠을 때, 익주에서는 헌제가 해를 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에 유비(劉備)의 신하들이 황제로 추대하고자 했으며, 초주는 황권(黃權) 등 여러 신하들과 함께 황제에 즉위하여 한나라의 뒤를 이을 것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이로 인해 유비는 221년 4월 제위에 올랐다.
2. 2. 촉한에서의 관직 생활
유선이 즉위한 후 제갈량에 의해 권학종사(勸學從事)에 임명되었다.[8] 제갈량 사후, 대장군(大將軍) 장완이 익주자사(益州刺史)를 겸임할 때 전학종사(典學從事)로 임명되어 익주(益州)의 학자들을 총괄했다.연희 원년(238년), 유선의 장남 유선이 태자가 되자 태자복이 되었고, 이후 태자가령으로 옮겨졌다. 그 후 중산대부가 되었지만, 계속해서 유선의 측근으로 있었다.
대장군 강유가 북벌에 몰두하여 나라가 피폐해지자 잦은 정벌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내용을 담은 〈구국론(仇國論)〉을 썼다.[4]
이후 광록대부로 승진했다.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조언을 구했다.
2. 3. 촉한 멸망과 그 이후
263년 위나라의 장군 등애가 험준한 산길을 지나 진격해 오자, 지형만 믿고 방비를 소홀히 했던 촉군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신하들은 오나라나 남중으로 피신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초주는 위나라에 항복하자고 주장했다.[4] 초주는 유선에게 "익주 남부는 먼 지방의 오랑캐(남만)의 땅으로, 반란이 많아 통치의 어려움 때문에 종래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으나, 제갈량이 익주 남부의 반란을 제압한 후 익주 남부에 조세를 부과하게 되어, 그것을 근심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항복을 설득했다.유선은 초주의 의견을 받아들여 스스로 밧줄에 묶인 채 태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등애에게 항복하여 촉나라는 멸망하였다.
위나라의 권신 사마소는 초주를 양성정후(陽城亭侯)에 봉하고 위나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초주는 병이 들어 태시 3년(267년)이 되어서야 낙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8]
태시 5년(269년), 제자인 진수는 휴가 전에 초주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방문했다. 초주는 진수에게, "옛날에 공자는 72세에, 유향・양웅은 71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나의 나이는 70세가 넘었다. 바라건대 공자의 유풍을 사모하고, 유향・양웅과 궤를 같이 하고 싶다. 아마 다음 해를 맞이하지 못하고, 분명 긴 여행길에 오를 것이니,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진수는, 초주는 미래를 예측하는 술법을 얻었던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태시 6년(270년) 가을, 조정에서는 초주를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하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초주는 병이 위독하였기 때문에 받들지 못하였고, 겨울에 숨을 거두었다.
《삼국지》에서 역사가 진수는 유씨 왕족을 보존하고 촉한을 돕기 위한 초주의 유선에 대한 제안을 칭찬했다. 진수의 이러한 견해는 서진 왕조의 신하로서의 그의 입장과 초주가 진수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손성과 같은 다른 견해를 가진 역사가들은 초주의 항복 입장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초주를 "반역자"라고 불렀다.[4]
이중톈은 초주의 "반역"은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초주는 훌륭한 도덕적 행위로 잘 알려져 있었다) 정치적 입장의 차이 때문이라고 논평했다. 초주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촉한 정부와 오랫동안 대립해 온 현지 촉 지식인 (사족)의 대표였다:[5]
# 촉 정부는 오랫동안 현지 귀족과 정부 관직 및 정치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외국" 출신 관리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언, 유장, 유비와 그들의 측근들은 대부분 현지 촉 귀족이 아니었다. 제갈량은 이후 현지 촉 학자 및 지식인들을 많이 등용하는 "공정한" 인재 등용 과정을 시행하여 그들의 존경과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갈등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 제갈량의 공정하고 투명한 법치주의는 그들의 사회적 특권을 제한하고 현지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귀족에게 해로웠다. 한편, 조위와 나중의 서진의 구품관인법은 귀족들이 자신의 자손을 추천하고 승진시킬 수 있게 했으며, 이는 현지 촉 가문에 유리했다.
# 촉한 정부는 끊임없이 조위를 상대로 북벌을 감행하여 막대한 지출을 초래했다. 이러한 지출은 일반 백성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금이 그들에게도 부과되었기 때문에 촉 귀족에게도 해로웠다.
그 결과, 초주의 비판가들은 촉한 국가를 배신하고 조위에 항복함으로써 초주의 행동이 조위의 침략을 환영한 현지 촉 귀족에게 유익했다고 주장한다.
후세에는 항복론자로 간주되어 평가는 낮다. 예로, 왕부지의 『독통감론』에는 "간사하고 아첨하며 나라를 팔아먹었다"라고 쓰여 있다.
3. 평가
양희는 초주와 동시대의 인물로, 다른 이의 자손이 초주의 자손만 못할 것이라며 칭찬했다.[4] 초주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했지만 학문에 정진하여 육경을 연구하고 서간과 천문에도 밝았다. 신장은 8척으로 성실하고 꾸밈없는 성격에 두뇌가 명석했으나, 즉흥적인 질문에는 약했다.
993년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이지백(李知白)은 초주가 유선에게 항복을 권하여 나라를 위나라에 바친 것을 후세의 비웃음거리로 언급하며 항전을 주장했다.[4] 왕부지는 『독통감론』에서 초주를 "간사하고 아첨하며 나라를 팔아먹었다"라고 혹평했다.
경요 5년(262년), 궁궐의 큰 나무가 예고 없이 부러지자 초주는 기둥에 "무리가 크면 그 아래에 모인다. 덕을 갖추고 천명이 내려지면 다시 움직일 수 없다."라는 글을 적었다. 이는 훗날 촉한의 멸망과 조위의 건국을 예언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장번은 초주가 유선의 유약함을 알고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위나라에 항복하는 책략을 실행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만약 군주가 격분하여 무모한 행동을 했다면, 초주 일족은 몰살당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3. 1. 긍정적 평가
양희는 초주가 아직 주변에서 인정받지 못했을 때부터 "우리 자손은 초주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높게 평가했다.[4] 진수는 《삼국지》에서 유씨 왕족을 보존하고 촉한 백성을 돕기 위한 초주의 유선에 대한 항복 제안을 칭찬했다. 이중톈은 초주의 "반역"은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의 차이 때문이라고 논평했다. 초주는 촉한 정부와 오랫동안 대립해 온 현지 촉 지식인 (사족)의 대표였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5]# 촉 정부는 오랫동안 현지 귀족과 정부 관직 및 정치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외국" 출신 관리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언, 유장, 유비와 그들의 측근들은 대부분 현지 촉 귀족이 아니었다. 제갈량은 이후 현지 촉 학자 및 지식인들을 많이 등용하는 "공정한" 인재 등용 과정을 시행하여 그들의 존경과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갈등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 제갈량의 공정하고 투명한 법치주의는 그들의 사회적 특권을 제한하고 현지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귀족에게 해로웠다. 한편, 조위와 나중의 서진의 구품관인법은 귀족들이 자신의 자손을 추천하고 승진시킬 수 있게 했으며, 이는 현지 촉 가문에 유리했다.
# 촉한 정부는 끊임없이 조위를 상대로 북벌을 감행하여 막대한 지출을 초래했다. 이러한 지출은 일반 백성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금이 그들에게도 부과되었기 때문에 촉 귀족에게도 해로웠다.
그 결과, 초주의 비판가들은 촉한 국가를 배신하고 조위에 항복함으로써 초주의 행동이 조위의 침략을 환영한 현지 촉 귀족에게 유익했다고 주장한다.
3. 2. 부정적 평가
손성은 초주를 반역자라고 비판하였다.[4] 왕부지는 초주를 간사하고 아첨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인물로 평가하였다. 이지백은 993년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초주가 유선에게 항복을 권하여 나라를 위나라에 바친 것을 후세의 비웃음거리로 언급하며 항전을 주장했다.3. 3. 현대적 관점
초주의 항복은 촉한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지지만, 당시 상황에서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초주의 항복이 백성을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평가하는 반면, 국민의힘은 그의 항복이 나라를 잃게 한 행위였다고 비판한다.[4]진수는 유선에게 항복을 권하여 유씨 왕족을 보존하고 촉한을 도운 초주의 제안을 칭찬했다. 그러나 손성은 초주를 "반역자"라고 비판했다.[4]
이중톈은 초주의 "반역"이 성격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 차이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초주는 촉한 정부와 오랫동안 대립해 온 현지 촉 지식인(사족)의 대표였다.[5]
이중톈이 제시한 초주와 촉한 정부의 대립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유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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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 정부 구성 | 촉 정부는 주로 현지 귀족이 아닌 "외국" 출신 관리들로 구성되어 현지 귀족과 관직, 정치 권력을 놓고 경쟁했다. 제갈량이 현지 촉 학자 및 지식인들을 많이 등용했지만 갈등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
제갈량의 법치주의 | 제갈량의 공정하고 투명한 법치주의는 귀족의 사회적 특권을 제한하고 현지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귀족에게 해로웠다. 반면, 조위와 서진의 구품관인법은 귀족들이 자신의 자손을 추천하고 승진시킬 수 있게 하여 현지 촉 가문에 유리했다. |
촉한의 북벌 | 촉한 정부는 끊임없이 조위를 상대로 북벌을 감행하여 막대한 지출을 초래했다. 이는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세금이 부과된 촉 귀족에게도 해로웠다. |
결과적으로 초주의 비판자들은 초주가 촉한을 배신하고 조위에 항복함으로써 조위의 침략을 환영한 현지 촉 귀족에게 유익했다고 주장한다.[5]
4. 저서
초주는 《오경론》(五經論), 《법훈》(法訓), 《고사고》(古史考) 등을 저술했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8] 《원국론(仇國論)》 외에도 《고사고》, 《촉본기(蜀本紀)》, 《논어주(論語注)》, 《오경연부론(五経然否論)》 등을 저술했다고 전해지지만, 대부분은 흩어져 없어졌고, 배송지가 《삼국지》의 주석으로 인용한 것 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화양국지를 저술한 상거는 자신의 선구자로서 초주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어, 그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저작은 아니지만, 초주가 사용한 표현으로 후세에 남은 어구로 "전오(典午)"라는 말이 있다. 당시 초주가 사마소의 죽음을 은어처럼 전한 것이 그 유래이다. 전(典)은 사(司)와 같은 뜻이며, 오(午)는 12지 중 말에 해당한다. 즉 "사마(司馬)"를 의미한다. 어느새 사마씨(司馬氏)·진조(晋朝)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예를 들어 팔왕의 난은 전오상란(典午喪亂)이라고 바꿔 말해진다. 또한, 관직명 사마의 별칭으로도 사용된다.
5. 삼국지연의에서의 초주
유비가 익주를 공격해 유장을 궁지에 몰자, 초주는 유장에게 천문을 거론하며 항복을 권했다.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에 소극적인 입장이었고, 이를 거듭 말렸다.[1] 초주의 구국론은 연의에서 〈수국론(讐國論)〉이라는 이름으로 강유에게 보내졌으나, 강유는 이를 썩은 선비의 글이라고 비판하며 출정을 강행했다.[1] 촉 멸망 시에는 정사와 마찬가지로 다른 신하들에게 오나라보다 위나라에 항복하는 것이 낫다고 유선에게 청하였다.[1]
삼국지연의에서 초주는 점성술가로 묘사되며, 그의 연구는 제갈량이 조위에 대한 북벌 작전에서 제갈량을 크게 도왔다.[2]
삼국지연의에서는 유장의 부하로 처음 등장하며, 유비에게 항복할 것을 먼저 주장하여 황권과 유파에게 죽을 뻔했다. 또한, 『仇国論(구국론)』은 강유에게 비웃음을 샀고, 이 때문에 사료보다 북벌이 1회 더 많아졌다.[3]
6. 가계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Analysis of the Three Kingdoms, Vol. 2, Vietnamese translation
Publisher of People's Public Security
2010
[6]
사전
𡸫の字
[7]
서적
捜神記
[8]
문서
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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