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안 릭파이는 태국 화교 출신으로, 태국 민주당 대표를 역임하고 두 차례 태국 총리를 지낸 정치인이다. 1969년 정계에 입문하여 법무부 장관, 상무부 장관,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1992년 민주당 대표가 되었다. 그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경제 개혁을 추진했으나, 부패 스캔들과 경제 위기 극복 실패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3년 민주당 대표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당 최고 고문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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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랑 주 출신의 태국 화교 가정에서 태어나 탐마삿 대학교를 졸업한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1969년 뜨랑 주 선거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으며, 이후 법무부 장관, 상무부 장관, 교육부 장관 등 주요 각료를 역임했다. 1992년에는 민주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2. 1. 출생과 성장
추안 릭파이는 1938년 7월 28일 태국 뜨랑 주 므앙 탭 티앙에서 태어났다.[3] 그의 부모는 교사인 니욤 릭파이와 투안 릭파이였으며, 9명의 형제 중 셋째였다. 그의 가족은 태국 화교 출신으로 호클로족이었으며, 그는 3세대 화교에 해당한다.[4][5][6]
어린 시절 아유타야 주에서 잠시 지내기도 했으나, 5세 때인 1943년 가족과 함께 방콕으로 이주하여 성장했다. 방콕에서는 왓 아마린트라람 사찰 학교에서 6년 동안 거주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학업에 매진하여 탐마삿 대학교에 진학해 법학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태국 변호사 협회 소속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9년에는 고향인 뜨랑 주에서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2. 2. 정치 입문
뜨랑 주 출신의 태국 화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환경이었으나 고학으로 탐마삿 대학교에 진학하여 졸업했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69년 뜨랑 주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첫 번째 임기는 1992년 5월 암흑 사건 이후 실시된 총선에서 민주당이 제1당으로 부상하면서 시작되었다. 군부 출신이 아닌 민간인 총리로서 국민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여러 정당이 참여한 연립 정부 운영 과정에서 내부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임기 말 푸껫주 농지 개혁 관련 부정 부패 사건이 불거지면서 결국 1995년 총선 패배로 물러났다.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로 차왈릿 용짜이윳 내각이 붕괴하자, 추안은 다시 총리직에 올라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이 시기 추안 내각은 IMF의 지원과 권고 아래 경제 위기 극복에 주력했으며, 금융 전문가들을 내각에 기용하여 부실 채권 처리 등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이례적으로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며 군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제 정책은 일부 성과를 거두었으나 서민 경제 회복에는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결국 2001년 총선에서 탁신 친나왓이 이끄는 타이락타이당에 패배하며 다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3. 1. 제1차 추안 내각 (1992-1995)
1992년 수친다 크라프라윳 군사 정권이 민주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며 많은 사상자를 낸 피의 5월 사건 이후, 푸미폰 국왕의 중재로 사태가 수습되었다. 곧이어 치러진 1992년 9월 태국 총선에서 민주당은 79석을 얻어 77석의 차이타이당을 누르고 제1당이 되었다. 이에 따라 추안 릭파이는 새로운 희망당, 에카파르 당과 함께 연립 정부를 구성하며 총리로 취임했다. 군인 출신이 아닌 민간인 총리의 등장은 많은 국민의 기대를 모았다.[7]
추안 총리는 민주주의 발전, 소득 불균형 해소, 지방 분권 강화, AFTA(ASEAN 자유 무역 지대) 추진 등을 주요 국정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연립 여당 간의 갈등과 내부 분열이 계속되어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1994년12월에는 차왈릿 용짜이윳이 이끄는 새로운 희망당이 연정에서 탈퇴하면서 소수 여당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으나, 국가 개발당을 연정에 참여시켜 가까스로 과반수를 유지했다.[7]
추안 내각의 주요 정책과 활동은 다음과 같다.
미얀마와의 관계: 이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미얀마 군사 정권에 대해 건설적 관여 정책을 유지했으나, 이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8]
재조림 사업: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즉위 50주년(1996년)을 기념하여 1994년부터 5백만 라이 규모의 대규모 재조림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목표 달성률이 40%에도 미치지 못해 공식적으로 실패했으며, 이 과정에서 산림청장이 부패 혐의로 직무 정지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9]
경제 및 지방 분권: 국가 경제 안정, 지방 행정 권한의 분산, 국민 소득 증대, 기회 균등 확대, 지역 경제 개발 등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추안 내각은 임기 말 푸껫주의 농지 개혁(소 포 코 4-01 토지 프로젝트) 과정에서 내각 각료들이 불법적으로 이익을 취했다는 부패 스캔들에 휘말렸다. 이 사건은 거센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야당의 공세가 이어지자 추안 총리는 결국 하원을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했다. 하지만 총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하면서 추안 내각은 1995년에 막을 내렸다.[10]
3. 2. 제2차 추안 내각 (1997-2001)
추안 릭파이는 1997년 11월 9일, 차발릿 용차이윳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총리직에 올랐다. 초기 내각은 6개 정당 연립 정부와 프라차콘 타이당에서 탈당한 12명의 무소속 의원으로 구성되어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있었다. 이후 1998년 10월 찻 파타나당이 연정에 합류하면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추안의 두 번째 임기는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직후 시작되었으며, 정부는 여러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국제 통화 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금융 정책 전문가인 타린 니만해민을 재무부 장관, 수파차이 파니치팍디를 상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위기 극복에 나섰다. 주요 정책으로는 감세, 고용 창출, 공공 투자, 중소기업 지원, 부실 채권 처리 촉진 등이 있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IMF의 권고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시장 경제 국가들의 정책과 유사한 방향성을 가졌다. 추안은 또한 이례적으로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며 당시 수라윳 쭐라논 육군 사령관과 함께 군비 현대화와 군 구조 조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추안 정부의 경제 정책, 소위 "쓴 약" 정책은 심한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경제 위기 이후 몇 년간 서민 경제 회복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으며, 대형 금융 기관만을 구제하고 국가 경제의 외국 자본 의존도를 높였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후 타이락타이당은 민주당 정부가 일반 국민의 어려움을 외면했다고 비판했으며, 이는 2001년 총선에서 탁신 친나왓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안겨주는 배경이 되었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IMF 권고에 따른 개혁 조치들은 이후 태국 경제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추안 2기 정부는 여러 논란과 비판에 휩싸였다. 팍 문 댐 건설에 반대하는 시위대 223명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체포한 사건은 큰 비판을 받았다. 역사학자 니디 이아스리웡은 이를 1992년 5월의 유혈 진압 사태에 비견하며 "오만하고 국민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 폭압적인 정부"라고 강하게 비판했다.[13]
1999년 초에는 1973년 민주화 시위 유혈 진압의 책임자 중 한 명인 타놈 끼띠카쫀 전 총리를 명예 왕실 근위대 직책에 임명한 사실이 알려져 광범위한 비판이 일었다. 논란이 커지자 타놈은 결국 사임했다.[14][15]
2000년 4월에는 정부에 비판적인 보도를 이어가던 치앙마이 지역 신문 ''팍 누아''의 편집장이 총격을 받아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편집장은 자신의 피습이 정부 비판 보도와 관련 있다고 주장했다.[16]
추안 행정부는 이전 정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청렴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임기 내내 여러 부패 스캔들에 시달렸다.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사건
내용
관련 인물
결과
보건부 장관 뇌물 수수 사건
제약 회사로부터 500만태국 밧 (당시 약 12.5만달러) 상당의 뇌물을 받고 국립 병원에 고가의 의약품 구매를 강요
라키아트 쑥타나 (보건부 장관)
유죄 판결 후 보석 중 도주
교통통신부 장관 비리 의혹
불법 토지 거래 중개 및 수랏타니 주 협동조합 설립 관련 자금 유용 의혹[17]
수텝 타우숙반 (교통통신부 장관)
추안 1차 내각 붕괴 원인 제공
"식용 울타리" 종자 스캔들
농촌 지역 배포용 종자 가격 부풀리기 의혹[18]
농업부 차관
사임
살윈 강 벌목 스캔들
매홍손 주 살윈 숲에서 최대 2만 그루 불법 벌목 및 일부 목재가 피찟 주 민주당 사무실 부지에서 발견[18]
-
-
고위 공직자 자산 축소 신고
신고 자산 가치 축소[19]
사난 카조른쁘라삿 (내무부 장관) 및 각료 8명
사난, 헌법재판소로부터 5년간 정치 활동 금지 처분
총리 본인 미신고 재산 의혹
농촌 협동조합 지분 미신고[19]
추안 릭파이 (총리)
전국반부패위원회(NCCC) 조사
이러한 경제 정책에 대한 불만과 연이은 부패 스캔들은 2001년 총선에서 추안 릭파이가 이끄는 민주당이 탁신 친나왓의 타이락타이당에 참패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선거 패배 후 추안은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2003년에는 민주당 대표직에서도 물러났다.[20]
4. 총리 퇴임 이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야당 지도자를 지냈다.[1]2003년에는 민주당 당수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민주당 최고 고문직을 맡고 있다.[1]
5. 평가
1992년 5월 암흑 사건 이후 실시된 재선거에서 민주당이 제1당으로 부상하면서, 추안 릭파이는 5개 당 연립 정권의 총리로 취임했다. 군인 출신이 아닌 문민 총리로서 국민들의 기대를 모았다.[27]
추안 정권은 민주주의 발전, 소득 격차 해소, 지방 분권 강화, AFTA(ASEAN 자유 무역 지역) 추진 등을 주요 정책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연립 정권 내의 잦은 갈등과 내부 분열로 인해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27]1994년12월, 차왈릿이 이끄는 새로운 희망당이 연정에서 이탈하면서 소수 여당으로 전락하는 위기를 맞았으나, 국가 개발당을 연정에 참여시켜 정권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껫 지역의 농지 개혁과 관련된 부정 부패 사건이 불거져 야당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고, 결국 하원을 해산했으나 이어진 총선에서 패배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다.[27]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로 차왈릿 정권이 붕괴하자, 추안은 다시 연립 정권을 구성하여 총리직에 복귀했다. 그는 금융 정책 전문가인 타린 님만해민을 재무부 장관으로, 훗날 세계 무역 기구(WTO) 사무총장이 되는 수파차이를 상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경제 위기 극복에 나섰다. 또한 이례적으로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며 당시 군 사령관이었던 수라윳과 함께 군비 현대화 및 군 구조 조정을 추진했다.[27]
추안 정부는 국제 통화 기금(IMF)의 지원과 권고를 받아들여 감세, 고용 창출, 공공 투자 확대, 중소기업 지원, 부실 채권 처리 촉진 등을 골자로 하는 경제 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경제 회복에 일정 부분 기여했지만, 긴축 재정 등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27] 결국 2001년 총선에서 탁신이 이끄는 타이 락 타이 당에 패배하며 다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27]
개인적으로는 총리 재임 기간에도 전셋집에 거주하는 등 청렴하고 성실한 인품으로 알려져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푸미폰 국왕으로부터도 깊은 신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연립 정권의 복잡한 역학 관계와 상대적으로 부족한 개인 자금력(당시 자산 약 300만태국 밧)[27] 등의 요인으로 인해 국정 운영에서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7]
추안 릭파이는 사실혼 관계에 있는 팍디폰 수자리쿨과의 사이에서 아들 수라봇 릭파이(สุรบถ หลีกภัย|수라봇 릭파이tha)를 두고 있다. 그의 모국어는 남부 태국어이며,[21]태국어 실력은 원어민 수준이다. 그는 영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22]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전세집에 거주하는 등 청렴하고 성실한 인품으로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푸미폰 국왕으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총리로서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연립 정권의 특성이나 본인의 자산이 300만태국 밧에 불과했다는 점[27]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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