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잔덜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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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르트 잔덜링은 독일 태생의 지휘자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활동했다. 그는 베를린 교향악단,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등에서 지휘했으며, 특히 브람스, 브루크너, 차이콥스키, 쇼스타코비치 등의 곡을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1960년 동독으로 돌아와 활동했으며, 2002년 은퇴 후 201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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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브루흐는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바이올린 협주곡 1번 G단조 Op. 26과 첼로 협주곡 '콜 니드라이' 등 협주곡 작품들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생전에는 합창곡으로 명성을 얻었고, 리버풀 필하모닉 협회 지휘자와 베를린 고등 음악학교 작곡 교수를 역임했다.
쿠르트 잔덜링 | |
---|---|
기본 정보 | |
이름 | 쿠르트 잔덜링 |
로마자 표기 | Kureuteu Jandeolling |
출생지 | 동프로이센・아리스 (현재 폴란드, 바르미아마주리주・) |
사망지 | 독일, 베를린 |
직업 | 지휘자 |
활동 기간 | 1931년 - 2002년 |
음악 경력 | |
악기 | 지휘 |
2. 삶과 경력
동프로이센의 오르지시(현재 폴란드 바르미아-마주리 주)에서 태어났다. 10세에 쾨니히스베르크 (현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의 김나지움에서 음악을 배웠다.
1931년 베를린 시립 가극장에서 코레페티토어로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치가 세력을 확대하자, 유대인 부모를 둔 그는 독일 국적을 박탈당하고 1935년 삼촌이 거주하던 소비에트 연방으로 망명했다. 모스크바 방송 교향악단에서 조르주 세바스티안의 조수로 실력을 연마했다.
1937년 모스크바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를 지휘하며 데뷔했고, 1939년 하리코프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1941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교향악단 제1 지휘자로 취임하여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밑에서 실력을 연마했다. 소련 체류 중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친교를 맺었으며, 1958년 레닌그라드 필의 첫 방일 공연에 지휘자로 참여했다.
1960년 동독 정부의 요청으로 귀국, 베를린 교향악단의 예술 감독 겸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여 단기간에 악단을 동독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 수석 지휘자도 겸임했다.
196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데뷔하여 서방 세계에 이름을 알렸고, 1972년 오토 클렘페러의 요청으로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수석 객원 지휘자로 취임, 이후 명예 지휘자가 되었다.
1973년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의 방일 공연에 메인 지휘자로 동행했고, 이후 1976년, 1978년, 1980년, 1990년 요미우리 일본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며 명예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77년 베를린 교향악단 직책을 퇴임했지만, 종신 객원 지휘자 및 명예 지휘자로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2002년 고령으로 은퇴를 선언, 5월 19일 은퇴 연주회에서 베를린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브람스의 「하리드 주제에 의한 변주곡」,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4번 (우치다 미치코 협연), 슈만의 교향곡 제4번을 연주하며 지휘 활동을 마감했다.
2011년 9월 18일, 베를린에서 노쇠로 사망했다.[11]
2. 1. 초기 생애
쿠르트 잔덜링은 1912년 9월 19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의 아리스(현재 폴란드 오르지시)에서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을 보였으며, 10세에 쾨니히스베르크 (현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의 김나지움에 다니며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1]1931년 베를린 시립 가극장에서 코레페티토어(리허설 디렉터)로 일하며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치 정권이 그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해고하면서 그의 초기 활동은 중단되었다.[1]
1936년 잔덜링은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일했다. 1939년에는 하르키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다.[2] 레닌그라드 포위전 동안 그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일했다.[3] 1942년부터 1960년까지 예프게니 므라빈스키와 함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공동 수석 지휘자로 활동했다. 1942년에서 1943년경, 잔덜링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처음 만났는데, 이는 그들의 전문적인 관계와 개인적인 우정의 시작이었다.[1][2]
2. 2. 독일에서의 초기 활동과 소련으로의 망명
잔덜링은 유대인 부모에게서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의 아리스(현재 폴란드의 오르지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을 보여, 10세에 쾨니히스베르크 (현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의 김나지움에 다니며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1931년에 베를린 시립 가극장의 코레페티토어로서 음악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에리히 클라이버를 위한 레페티토어(리허설 디렉터)로 일했던 도이체 오퍼 베를린에서의 그의 초기 활동은 나치 정권이 그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해고하면서 중단되었다.[1]
1936년 유대인 혈통 때문에 독일을 떠나 소련으로 망명했다. 1935년에 삼촌이 거주하고 있던 소비에트 연방으로 망명하여, 모스크바 방송 교향악단에서 조르주 세바스티안의 조수로서 실력을 연마했다. 1937년에 모스크바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를 지휘하여 데뷔했다. 모스크바의 차이콥스키 교향악단과 일했다. 1939년에는 하리코프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했다.[2] 레닌그라드 포위전 기간 동안 그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일했다.[3] 1941년에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교향악단의 제1 지휘자로 취임하여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밑에서 더욱 실력을 연마했다. 1942년부터 1960년까지 그는 예프게니 므라빈스키와 함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공동 수석 지휘자였다. 이 소련 체류 중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알게 되어 친교를 맺었다. 1942~1943년경, 잔덜링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처음 만났는데, 이는 그들의 전문적인 관계와 개인적인 우정의 시작을 알렸다.[1][2] 1958년 레닌그라드 필의 첫 방일 공연에서는 지휘자 중 한 명으로서 일본을 방문했다.
2. 3.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시절
1942년부터 1960년까지 예프게니 므라빈스키와 함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공동 수석 지휘자로 활동했다.[1][2] 레닌그라드 포위전 기간 동안에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일했다.[3] 1942~1943년경,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처음 만났는데, 이는 그와 쇼스타코비치 간의 전문적인 관계와 개인적인 우정의 시작이었다.[1][2] 1958년 레닌그라드 필의 첫 방일 공연 때 지휘자 중 한 명으로서 일본을 방문했다.2. 4. 동독 귀환과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교향악단
1960년, 잔덜링은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Konzerthausorchester Berlin)의 수석 지휘자가 되기 위해 동독으로 돌아와 1977년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2] 1964년부터 1967년까지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Dresden Staatskapelle)의 수석 지휘자를 겸임했다.[2]2. 5. 국제적 명성과 활동
1936년 유대인 혈통 때문에 독일을 떠나 소련에서 거주하며 모스크바의 차이콥스키 교향악단과 일했다.[2] 1942년부터 1960년까지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교향악단에서 활동하다가 1960년 동독으로 돌아와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교향악단과 일했다.[2]1960년, 잔덜링은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Konzerthausorchester Berlin)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기 위해 동독으로 돌아와 1977년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2] 1964년부터 1967년까지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Dresden Staatskapelle)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다.[2] 1970년 영국에서 데뷔했고,[2] 1972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Philharmonia Orchestra)에서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를 대신하여 처음 객원 지휘자로 출연했다.[2] 1980년 1월 웸블리(Wembley)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교향곡 전곡 연주를 하고, 이후 EMI에서 베토벤 교향곡을 상업적으로 녹음하면서 그들의 협력 관계는 더욱 발전했다.[2] 필하모니아는 1996년 잔덜링을 명예 지휘자로 임명했다.[2] 그는 또한 마드리드 심포니 오케스트라(Madrid Symphony Orchestra)의 명예 지휘자이기도 했다.[4] 미국에서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Los Angeles Philharmonic)의 객원 지휘자로 자주 활동했다.[5]
잔덜링은 2002년 5월 지휘에서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5] 2002년 9월, 잔덜링은 대영 제국 훈장(CBE)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베를린시 최고 훈장인 에른스트 로이터(Ernst Reuter) 플라크를 수여받았다.[6] 필하모니아와 함께한 베토벤 교향곡 연주 외에도, 피아니스트 우치다 미츠코와 함께 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녹음(제3번, 4번은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Royal Concertgebouw Orchestra)와, 제1번, 2번, 5번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과 녹음)을 남겼다.[2] 그는 친구 베르톨트 골트슈미트(Berthold Goldschmidt)가 초연했던 데릭 쿡(Deryck Cooke)이 완성한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교향곡 10번 (말러)(Symphony No. 10)을 연주하고 녹음한 최초의 지휘자 중 한 명이었다.[2]
2. 6. 은퇴와 사망
1960년, 잔덜링은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Konzerthausorchester Berlin)의 수석 지휘자를 맡기 위해 동독으로 돌아와 1977년까지 재직했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Dresden Staatskapelle)의 수석 지휘자를 겸임했다.[2] 1972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Philharmonia Orchestra)에서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를 대신하여 객원 지휘자로 처음 출연했다. 1996년 필하모니아는 잔덜링을 명예 지휘자로 임명했다.[2] 그는 마드리드 심포니 오케스트라(Madrid Symphony Orchestra)의 명예 지휘자이기도 했다.[4]잔덜링은 2002년 5월 지휘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했다.[5] 2002년 9월, 잔덜링은 대영 제국 훈장(CBE)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베를린시 최고 훈장인 에른스트 로이터(Ernst Reuter) 플라크를 받았다.[6]
잔덜링은 2011년 9월 18일, 99세 생일 하루 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8][9][10] 사망 원인은 노쇠로 보인다.[11]

3. 가족 관계
쿠르트 잔덜링은 두 번 결혼했다. 1941년 니나 보바스와의 첫 번째 결혼에서 아들 토마스 잔덜링(지휘자)을 낳았다. 이 첫 번째 결혼은 그가 동독으로 돌아간 후 이혼으로 끝났다. 두 번째 부인은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더블 베이시스트였던 바바라 바그너였다. 1963년에 결혼했으며, 슬하에 지휘자 슈테판 잔덜링과 미하엘 잔덜링 두 아들을 낳았다.[1]
토마스와 슈테판은 지휘자이며, 미하엘은 첼로 연주자이자 지휘자이다.[1]
4. 음악 세계와 주요 레퍼토리
브람스, 브루크너 등 독일-오스트리아 계 음악과 차이콥스키, 쇼스타코비치 등 러시아-소련 음악을 특기로 했다. 특히 쇼스타코비치와는 직접 교류하기도 했다. 작곡가 사후 한동안 거의 평가받지 못했던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을 일찍부터 레퍼토리로 삼았던 지휘자 중 한 명이다. 말러의 교향곡 10번을 데릭 쿡의 보필 완성판에 독자적인 교정을 가해 연주했고, 독일-오스트리아 계 지휘자들이 비교적 잘 다루지 않는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을 독자적인 해석으로 연주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4]
그러나 활동 중심이 구 동구권이었고, 녹음에 적극적이지 않아 메이저 레이블의 녹음이 적었기 때문에 실력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4]
주로 베를린 심포니,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을 지휘한 녹음이 DENON이나 BERLIN Classics에서 출시되었다. 은퇴 연주회 녹음은 Harmonia Mundi에서 발매된 박스 세트에 수록되어 있다.[4]
5. 서훈
2002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 (honorary CBE, 외국인대상 정원외 명예훈장)을 받았다.
참조
[1]
뉴스
Kurt Sanderling, Eastern Bloc Conductor, Dies at 98
https://www.nytimes.[...]
2011-09-20
[2]
뉴스
Kurt Sanderling obituary
https://www.theguard[...]
2011-09-18
[3]
뉴스
Conductor thrived behind Iron Curtain
https://www.latimes.[...]
2011-09-19
[4]
웹사이트
Director Honorífico
http://www.osm.es/es[...]
Madrid Symphony Orchestra
2009-08-17
[5]
뉴스
Off the record, one of the masters
http://www.sptimes.c[...]
2003-09-21
[6]
뉴스
Kurt Sanderling
https://www.telegrap[...]
2011-09-19
[7]
뉴스
Fingers on the pulse
https://www.theguard[...]
2002-12-20
[8]
뉴스
Mort du chef d'orchestre Kurt Sanderling
http://www.lefigaro.[...]
Lefigaro.fr
2011-09-18
[9]
뉴스
YOMIURI ONLINE
http://www.yomiuri.c[...]
2011-09-18
[10]
뉴스
Andere machten Geschichte, er machte Musik
http://www.berlinonl[...]
2011-09-21
[11]
뉴스
クルト・ザンデルリンク氏死去 ドイツの名指揮者 - 47NEWS(よんななニュース)
http://www.47news.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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