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투 조약 (러시아-에스토니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타르투 조약(러시아-에스토니아)은 1920년 2월 2일 소비에트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국경선을 확정했다. 이 조약은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출생 증명서'로 여겨지며, 러시아는 전쟁 배상금 지급 및 영토 할양을 통해 에스토니아와의 관계를 설정했다. 조약 체결 후 러시아는 약속을 완전히 이행하지 않았고, 이후 에스토니아는 소련에 점령당했다. 에스토니아 독립 회복 후에도 조약의 유효성을 두고 러시아와 국경 분쟁이 발생했으며, 2014년에 국경 확정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비준 절차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 발트 향토방위군
발트 향토방위군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발트 지역에서 붉은 군대의 재점령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으나 독일 제국주의 연장 비판과 전쟁 범죄 연루 의혹으로 논란이 되었고, 이후 영국군 지휘 아래 독일 국적자 해고 후 서러시아 의용군 또는 라트비아군에 합류하여 볼셰비키와 싸웠다. - 1920년 발효된 조약 - 베르사유 조약
베르사유 조약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을 위해 1919년 독일과 연합국이 체결한 강화 조약으로, 독일에게 가혹한 조항들을 부과하여 반발을 일으켰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으며 국제 연맹 설립을 규정했다. - 1920년 발효된 조약 - 타르투 조약 (러시아-핀란드)
1920년 10월 14일 핀란드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간에 체결된 타르투 조약은 핀란드의 독립 승인과 페차모 지역 확보를 통해 북극해로의 출구를 제공했으나, 동카렐리야 지역에 대한 핀란드의 영유권 포기를 포함하며, 1939년 소련의 겨울 전쟁 개시로 파기되었다. - 1920년 2월 - 스발바르 조약
스발바르 조약은 1920년 체결되어 노르웨이의 스발바르 제도 주권 인정, 가입국 국민의 경제 활동 자유 보장, 환경 보존 및 군사적 제한 등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대한민국을 포함한 다수 국가의 스발바르 활동 근거가 되지만, 주변 해역 자원 개발 관련 분쟁도 존재한다. - 1920년 2월 - 니콜라옙스크 사건
1920년 러시아 내전 중 니콜라옙스크에서 적군 빨치산이 일본군과 거류민을 공격하여 대규모 학살과 파괴가 발생했으며, 이는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과 북사할린 점령의 구실이 되었고, 사건의 진상과 책임 소재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있다.
타르투 조약 (러시아-에스토니아) | |
---|---|
조약 정보 | |
이름 | 타르투 조약 |
원어 이름 (에스토니아어) | Tartu rahu |
원어 이름 (러시아어) | Тартуский договор |
종류 | 평화 조약 |
서명일 | 1920년 2월 2일 |
서명 장소 | 에스토니아 타르투 |
발효일 | 1920년 2월 20일 |
당사자 | |
관련 정보 | |
관련 전쟁 |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
2. 조약 이전의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는 18세기 초부터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이전에는 여러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경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러시아 혁명과 내전의 혼란 속에서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을 쟁취했다.
2. 1. 러시아 제국 지배 시기
에스토니아는 1710년부터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으며, 그 이전에는 여러 외국 세력이 돌아가면서 지배하였다. 1721년부터 러시아 제국의 한 지방이었다.[2]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러시아 제국은 혁명과 내전으로 붕괴하였다. 이 혼란기에 에스토니아인들은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유를 쟁취했다. 1920년 러시아 SFSR 정부는 타르투 조약을 통해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인정하였다.[3] 에스토니아는 독립 이후 에스토니아 도시의 러시아어 및 독일어식 이름을 모두 삭제하였다.2. 2. 독립 선언과 독립 전쟁
러시아 혁명 이후 에스토니아는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을 치렀다.[3]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러시아 제국이 혁명과 내전에 휩싸이면서, 에스토니아인들은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에서 자유를 쟁취했다.[3] 에스토니아는 1710년부터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으며, 그 이전에는 여러 외국 세력이 돌아가면서 지배하였다.[2] 독립 이후 에스토니아는 도시의 러시아어/독일어식 이름을 모두 삭제하였다. 새로 수립된 볼셰비키 러시아 정부는 1920년 타르투 조약에서 에스토니아의 자유를 인정했다.[3]3. 최초 협상
소비에트 러시아는 1919년 여름부터 휴전 및 평화 협상을 원했다. 러시아는 에스토니아 노동자 코뮌을 인정하였고 에스토니아 전선에 배치되었던 저격수를 후방으로 배치하였다.[1] 러시아 공산당 중앙 위원회는 1919년 7월 21일 에스토니아 전선의 확대를 중단하였다.[1]
적군이 프스코프를 공습한 후 1919년 8월 26일 에스토니아 외무부 장관 얀 포스카에게 평화안을 제시하였다.[2] 에스토니아는 러시아 외무부 장관 게오르기 치체린에게 회답하였고, 치체린은 8월 31일까지 휴전하자고 제안하였다. 에스토니아는 협상하겠다고 통보하였고 1주 연기를 요청하였다. 이후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도 협상하기 원했고 9월 10일 리가에서 세 나라의 총리가 만나길 원했다. 다음 날 치체린은 평화 협정에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포함시키겠다고 밝혔다. 9월 14일 탈린에서 가진 두 번째 회담에서는 핀란드 및 발트 3국의 독립 문제를 논의하였다. 9월 16일 적군과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논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으나 핀란드는 부정적이었다.[2]
3. 1. 에스토니아 내부의 입장 차이
에스토니아 제헌 국회에서는 독립한 에스토니아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다. 우파는 러시아 백군을 지지했고, 백군이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하면 영국이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도파는 중립을 선언하거나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같이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다른 국가와 동맹을 맺기를 원했다. 좌파는 즉시 휴전을 원했다.[1]3. 2. 프스코프 및 타르투 협상
소비에트 러시아는 1919년 여름부터 휴전 및 평화 협상을 원했다.[1] 러시아는 에스토니아 노동자 코뮌을 인정하였고 에스토니아 전선에 배치되었던 저격수를 후방으로 배치하였다.[1] 에스토니아 제헌 국회에서는 우파, 중도파, 좌파가 독립한 에스토니아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1] 우파는 러시아 백군을 지지하였고 백군이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하면 영국이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1] 중도파는 중립을 선언하거나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같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다른 국가와 동맹을 맺기를 원했다.[1] 좌파는 즉시 휴전을 원했다.[1] 러시아 공산당 중앙 위원회는 1919년 7월 21일 에스토니아 전선의 확대를 중단하였다.[1]1919년 8월 26일, 적군이 프스코프를 공습한 후 러시아는 에스토니아 외무부 장관 얀 포스카에게 평화안을 제시하였다.[2] 에스토니아는 러시아 외무부 장관 게오르기 치체린에게 회답하였고, 치체린은 8월 31일까지 휴전하자고 제안하였다.[2] 에스토니아는 협상하겠다고 통보하였고 1주 연기를 요청하였다.[2] 이후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도 협상하기 원했고 9월 10일 리가에서 세 나라의 총리가 만나길 원했다.[2] 다음 날 치체린은 평화 협정에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포함시키겠다고 밝혔다.[2] 9월 14일 탈린에서 가진 두 번째 회담에서는 핀란드 및 발트 3국의 독립 문제를 논의하였다.[2] 9월 16일 적군과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2] 프랑스와 영국은 논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으나 핀란드는 부정적이었다.[2]
에스토니아는 외무 장관과의 협상과는 별개로 프스코프 지역에서 러시아와 협상을 시작하였다.[3] 러시아 대표는 막심 리트비노프와 레오니트 크라신이며, 에스토니아 대표는 아두 비르크(Aadu Birk)였다.[3] 협상에서 결론은 없었으며, 영국을 비난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3] 에스토니아는 협상을 중단하였으나, 다른 발트 연안 국가와 핀란드를 포함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재개한다고 하였다.[3] 9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타르투에서 핀란드와 발트 3국 총리 및 외무부 장관 회담이 진행되었다.[3] 회담에서 러시아 적군과 10월 25일까지 평화 협상을 갖자는 결론이 나왔다.[3]
니콜라이 유데니치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전선에서 퇴각하면서 발트 3국은 러시아와 평화 회담을 11월 4일까지 열자고 제안하였다.[4] 에스토니아 총리 피프 안츠(Piip Ants)는 치체린에게 11월 9일 발트 3국이 협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러시아의 참여 여부는 자유에 맡긴다고 하였다.[4] 러시아는 리트비노프를 11월 16일과 19일에 파견하여 포로 교환 문제를 협상하였다.[4] 러시아 적군이 백군 북서 집단군이 주둔 중이던 에스토니아 인근 잉그리아 지방을 공격한 후 평화 협상은 중단되었다.[4] 1919년 11월 16일에 새로 선출된 얀 터니슨의 새 정부는 우파 노선을 택하였다.[4] 에스토니아는 평화 협상의 여지를 열어 두었으나 러시아는 계속 거부하였다.[4]
3. 3. 협상 재개와 중단
소비에트 러시아는 1919년 여름부터 휴전 및 평화 협상을 원했다.[1] 러시아는 에스토니아 노동자 코뮌을 인정하였고 에스토니아 전선에 배치되었던 저격수를 후방으로 배치하였다.[1] 에스토니아 제헌 국회에서는 독립한 에스토니아에 대해 여러 정파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1] 우파는 러시아 백군을 지지하며 백군이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하면 영국이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1] 중도파는 중립을 선언하거나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같이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다른 국가와 동맹을 맺기를 원했다.[1] 좌파는 즉시 휴전을 원했다.[1] 러시아 공산당 중앙 위원회는 1919년 7월 21일 에스토니아 전선의 확대를 중단하였다.[1]적군이 프스코프를 공습한 후 1919년 8월 26일 에스토니아 외무부 장관 얀 포스카에게 평화안을 제시하였다.[2] 에스토니아는 러시아 외무부 장관 게오르기 치체린에게 회답하였고, 치체린은 8월 31일까지 휴전하자고 제안하였다.[2] 에스토니아는 협상하겠다고 통보하였고 1주 연기를 요청하였다.[2] 이후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도 협상하기 원했고 9월 10일 리가에서 세 나라의 총리가 만나길 원했다.[2] 다음 날 치체린은 평화 협정에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포함시키겠다고 밝혔다.[2] 9월 14일 탈린에서 가진 두 번째 회담에서는 핀란드 및 발트 3국의 독립 문제를 논의하였다.[2] 9월 16일 적군과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2] 프랑스와 영국은 논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으나 핀란드는 부정적이었다.[2]
에스토니아인들은 외무 장관과의 협상과는 별개로 프스코프 지역에서 협상을 시작하였다.[3] 프스코프에서 러시아 대표는 막심 리트비노프와 레오니트 크라신이며, 에스토니아 대표는 아두 비르크이다.[3] 협상에서 얻어낸 결론은 없었으며, 영국을 비난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3] 에스토니아는 협상을 중단하였으나, 다른 발트 연안 국가와 핀란드를 포함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재개한다고 하였다.[3] 핀란드와 발트 3국 총리 및 외무부 장관 회담은 타르투에서 9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진행되었다.[3] 회담에서 얻은 결론은 전선의 변화에 따라서 러시아 적군과 10월 25일까지 평화 협상을 갖자는 것이었다.[3]
니콜라이 유데니치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전선에서 퇴각하면서 발트 3국은 러시아와 평화 회담을 11월 4일까지 열자고 제안하였다.[4] 에스토니아 총리 피프 안츠는 치체린에게 11월 9일 발트 3국이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러시아의 참여 여부는 자유에 맡긴다고 하였다.[4] 러시아는 리트비노프를 11월 16일과 19일에 파견하여 포로 교환 문제를 협상하였다.[4] 러시아 적군이 백군 북서 집단군이 주둔 중이던 에스토니아 인근 잉그리아 지방을 공격한 후 평화 협상은 중단되었다.[4] 1919년 11월 16일에 새로 선출된 얀 터니슨의 새 정부는 우파 노선을 택하였다.[4] 에스토니아는 평화 협상의 여지를 열어 두었으나 러시아는 계속 거부하였다.[4]
4. 타르투 평화 회담
1919년 12월 4일 타르투에서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1] 러시아 측에서는 레오니트 크라신을 단장으로 아돌프 요페, 막심 리트비노프 등이, 에스토니아 측에서는 얀 포스카를 단장으로 피프 안츠 등이 협상단으로 참여하였다.[1] 양측은 국경선 문제 등에서 이견을 보였으나, 1920년 2월 2일 최종적으로 평화 조약에 서명하였다.[1]
4. 1. 협상 시작과 진행

조지 커즌 경은 1919년 11월 25일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사이의 평화를 지지하였다. 반면 프랑스는 11월 29일 프랑스 외무부 장관을 통하여 북서 집단군의 보급선 유지를 요청하는 등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프랑스 정부는 12월 2일 외교 행낭편으로 에스토니아에 메모를 남겼다. 12월 10일 영국은 파리 대사를 통하여 영국 정부의 입장이 변함 없음을 밝혔다. 에스토니아는 영국과 프랑스와는 관계 없이 러시아와 평화 협상을 시작하였다.[1]
러시아는 적군의 잉그리아 공격이 중단된 후 평화 협상을 시작하였으며, 러시아의 평화 협상단은 1919년 12월 4일 타르투에 도착하였다. 러시아 측 평화 협상단 단장은 레오니트 크라신이고, 단원으로는 아돌프 요페, 막심 리트비노프, 표도르 코스타예프스키, 이시도르 구코프스키가 있었다. 에스토니아 측에서는 얀 포스카가 단장이었고, 피프 안츠, 율리우스 셀리아마(Julius Seljamaa), 마이트 퓌만(Mait Püüman)이 참가하였다.[1] 러시아와의 협상은 12월 5일에 시작되었다.[1] 협상 진행 중 러시아 측에서는 에스토니아의 나르바 쪽을 공격하라는 압박이 있었고, 12월 6일에 공격이 시작되어 에스토니아 측의 방어로 12월 12일에 공격이 끝났다.[1]
4. 2. 평화 협상의 마무리

러시아군은 1919년 12월 14일과 15일 나르바 방면 공세를 재개하였고, 남아 있는 에스토니아군을 북쪽으로 보내고 나르바강 서안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1] 12월 18일 에스토니아군은 러시아의 공격을 막아내었다.[1] 12월 16일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17일에 러시아군의 승전보를 듣고 러시아 측에서 협상을 중단하였다.[1] 12월 22일 공격이 실패한 이후 협상을 다시 시작하였다.[1] 12월 24일에는 평화 협상이 완성되었지만 아직까지는 서명하지 않았다.[1]
아돌프 요페는 전선의 양쪽에 10베르스트(약 10.669km) 비무장 지대를 선언하여 협상 양쪽을 당황하게 하였다.[1] 에스토니아 입장에서는 방어선을 후퇴시키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협상이 중단되었다.[1] 러시아군은 에스토니아의 방어선을 12월 28일 다시 공격하였으며, 이번에도 실패하였다.[1] 12월 31일, 러시아군은 후퇴하면서 휴전 협정에 서명하였다.[1] 휴전 협정은 1920년 1월 3일 발효되었다.[1] 이와 함께 평화 협정의 실질적인 준비가 시작되었고 1920년 2월 2일 평화 협정에 서명할 수 있게 되었다.[1]
러시아 의회에서는 2월 4일에 제안을 통과시켰고, 에스토니아는 건국 의회에서 2월 13일에 통과시켰다.[1] 공식적인 조약 발효일은 2월 20일이다.[1]
5. 조약의 내용
이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에스토니아 영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제정 러시아 시기의 모든 빚을 청산하고 금 보유고에서 전쟁 배상금으로 을 지불해야 했다.[4]
1920년 2월 2일 소비에트 정권과 에스토니아 간에 체결된 이 조약 제2조에서 처음으로 법적으로 에스토니아의 독립이 승인되었다. 레닌은 이 조약이 러시아가 서방 세계를 향해서 연 최초의 문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조약에서 러시아는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당시 생포한 러시아 군 포로 석방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조약의 모든 조항을 이행하지는 않았다. 에스토니아인의 귀국이 방해받은 시기가 있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을 비롯하여 러시아로 반출된 에스토니아의 자산은 제대로 반환되지 못했다. 반환되지 못한 자산 중에는 대표적으로 러시아 보로네시 대학교로 이동된 타르투 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이 있다.
5. 1. 영토 및 국경선 확정
이 조약을 통해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사이의 국경선이 확정되었고, 추가적으로 에스토니아는 나르바강 동안의 영토와 페초리(현 프스코프) 및 2000km2 상당의 인접 영토를 할양받아 국토 면적이 5% 증가하였다.[4] 할양받은 페초리 지역의 인구 58,850명 중 38,000명은 러시아인이었으며, 나머지 에스토니아인의 대부분은 동방 정교를 믿는 세토 인이었다. 나르바 강 동안의 잉그리아 지역은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사이의 완충 지대가 되기를 원하였고, 이 지역의 인구는 약 1,800명이었다. 조약에 할당된 영토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령이 되었고, 재독립 이후 영유권 주장의 원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국경의 반대쪽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새로 설정된 국경선 안쪽으로 귀국하는 것을 허용하였다.5. 2. 경제 및 문화적 합의
러시아는 에스토니아가 에스토니아 국경에서 모스크바까지 이어지는 철도 건설을 지원하고, 에스토니아는 러시아가 에스토니아 영내에 자유 무역항을 건설하고 나르바강에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4] 또한 RSFSR은 100만 헥타르의 러시아 산림 토지를 개발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4]6. 조약 서명자
에스토니아 측에서는 얀 포스카가, 소련 러시아 측에서는 아돌프 요페가 서명했으며, 양측의 다른 대표자들도 서명했다.[1]
7. 조약의 의의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에스토니아 영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제정 러시아 시기의 모든 빚을 청산하고 금 보유고에서 전쟁 배상금으로 을 지불해야 했다.[4]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사이의 국경선이 확정되었고, 에스토니아는 나르바강 동안의 영토와 페초리(현 프스코프) 및 2000km2 상당의 인접 영토를 할양받아 국토 면적이 5% 증가하였다. 할양받은 영토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령이 되었고, 재독립 이후 영유권 주장의 원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국경 반대쪽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새로 설정된 국경선 안쪽으로 귀국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러시아는 에스토니아가 에스토니아 국경에서 모스크바까지 이어지는 철도 건설을 지원하였고, 에스토니아는 러시아가 에스토니아 영내에 자유 무역항을 건설하고 나르바강에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당시 생포한 러시아 군 포로 석방도 조약 이후에 진행되었다.[4]
러시아는 이 조약의 모든 조항을 이행하지는 않았다. 에스토니아인의 귀국이 방해받은 시기가 있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을 비롯하여 러시아로 반출된 에스토니아의 자산은 제대로 반환되지 못했다. 반환되지 못한 자산 중에는 대표적으로 러시아 보로네시 대학교로 이동된 타르투 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이 있다. 이 외에도 러시아가 에스토니아에게 조약 상으로 할양한 숲 지대는 실제로 할양되지 않았다.[4]
갓 독립한 소비에트 러시아는 에스토니아와 최초로 외교 관계를 맺었고, 에스토니아 역시 러시아에서 최초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이 조약은 전간기 두 나라 외교의 시발점이 되었다. 레닌은 이 조약이 러시아가 서방 세계를 향해서 연 최초의 문이라고 평가하였다.
7. 1. 에스토니아의 국제적 지위 확립
타르투 평화 조약은 에스토니아 공화국이 처음으로 de jure 승인을 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출생 증명서"로 여겨졌다.[5] 이 조약은 외교적으로 고립된 소비에트 러시아에게도 매우 중요했으며, 레닌은 이 조약을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비할 데 없는 승리"라고 표현하며 만족했다.[4]1920년 2월 2일 소비에트 정권과 에스토니아 간에 체결된 이 조약 제2조에서 처음으로 에스토니아의 독립이 법적으로 승인되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에스토니아 대표단의 회의 참가가 인정되지 않았고, 독립도 법적으로 승인되지 않았다.
에스토니아는 이 조약을 체결한 후 같은 해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과 같은 파리 강화 회의의 주요 국가들로부터 법적 독립을 인정받았다. 미국은 에스토니아의 법적 독립 승인에 소극적이었으나, 이듬해인 1921년에 독립을 승인했다. 이 조약을 계기로 에스토니아는 국제 사회에서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7. 2. 소비에트 러시아의 외교적 돌파구
이 조약은 외교적으로 고립된 소비에트 러시아에게도 지대한 중요성을 지녔다. 레닌은 이 조약을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비할 데 없는 승리"라고 표현하며 만족감을 드러냈고,[4] 소비에트 정권에게 이 조약은 권력 탈취 후 처음으로 체결하는 국제 조약으로서 소비에트의 국제적 지위 확립을 향한 첫걸음이 되었다.[9] 일부 연합국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이 조약에 반대했다. 레닌은 이 조약이 러시아가 서방 세계를 향해서 연 최초의 문이라고 평가하였다.8. 조약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는 조약의 일부 조항을 이행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타르투 대학교의 박물관 소장품은 오늘날까지도 보로네시에서 반환되지 않고 있으며[6], 에스토니아인의 이주가 방해받았다.[7]
1920년에 체결된 타르투 조약은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간의 국경선을 확정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하면서 이 국경선은 변경되었다. 현재 에스토니아-러시아 국경은 타르투 조약에서 에스토니아에 할양되었던 일부 영토가 러시아의 통제하에 있는 상태이다.[8]
8. 1. 소련의 에스토니아 점령
1940년부터 1991년까지 에스토니아는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다.[7] 1990년 2월 2일, 조약 체결 70주년을 맞아 "대의원 합동 총회"가 열려 70년 전 타르투 조약의 유효성이 선언되었으나, 소련 측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에스토니아는 1991년에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회복했다.[8]에스토니아 영토는 소련 시대에 타르투 조약의 국경선보다 서쪽으로 이동하여 국토가 5% 축소되었고, 이 때문에 독립 회복 후에 러시아와 국경 문제가 발생했다. 쟁점은 에스토니아 영토를 규정한 1920년 타르투 조약이 유효한가 하는 점이었다. 러시아 측은 에스토니아가 소련 지배하에 들어간 것이 "자발적"이었기 때문에 타르투 조약은 무효라고 주장했고, 에스토니아 측은 강제 병합이었기 때문에 타르투 조약이 유효하다고 주장했다.[8]
러시아에게 국경 확정이 중요하지 않았던 점도 있어[10] 영토 협상은 길어졌다. 그러나 EU 가입을 우선시한 에스토니아 정부는 결국 1996년 11월에 영토 반환 요구를 포기하고 2005년 5월에 소련 시대의 국경선에 합의했다. 그러나 에스토니아 측이 국내 비준법에 "소련의 침략 희생"이라는 전문을 포함했기 때문에 러시아 측이 비난하며 협의가 중단되었다.[8]
2014년 2월 18일, 라브로프와 파에트 양국 외무 장관은 구 소련 시대의 국경선에 따라 양국 국경을 확정하는 조약에 서명했다.[11] 이에 따라 에스토니아 의회는 국경 조약 비준 절차를 진행했지만, 이후 러시아 측이 에스토니아의 "반러시아 감정"에 대해 항의를 반복하면서[11] 2019년까지도 비준 절차는 정체된 상태이다.[12]
8. 2. 국경 분쟁
1991년 독립 회복 이후, 에스토니아와 러시아는 타르투 조약으로 확정된 국경선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에스토니아는 타르투 조약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며 1944년에 러시아로 편입된 프스코프 주와 레닌그라드 주 일부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다. 이 영토는 원래 타르투 조약에 따라 에스토니아 영토였으나, 에스토니아 SSR 정부가 주민들의 요청을 이유로 러시아에 편입시켰다고 발표한 지역이다.[8]반면 러시아는 에스토니아가 소련에 자발적으로 병합되었기 때문에 타르투 조약이 무효이며, 새로 독립한 에스토니아는 1920년의 에스토니아가 아닌 에스토니아 SSR의 후계 국가라고 주장하며 조약에 설정된 동부 국경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1996년 11월, 양국 외무부 장관은 회담을 통해 타르투 조약을 기준으로 국경선을 결정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1999년에는 새로운 국경 조약이 확정되었으나, 양국 모두에서 비준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2005년 5월, 양국 외무부 장관은 국경 조약에 합의했고, 7월에 에스토니아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국회는 에스토니아 측이 타르투 조약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조약 처리를 유보했다.
2014년 2월 18일, 양국 외무 장관은 소련 시대의 국경선을 따르는 새로운 국경 조약에 서명했다.[11] 그러나 이후 러시아 측이 에스토니아의 "반러시아 감정"에 대해 항의하면서,[11] 2019년까지도 비준 절차는 정체된 상태이다.[12]
참조
[1]
간행물
League of Nations Treaty Series
[2]
웹사이트
Remembering the Tartu Peace Treaty
http://estoniaonthem[...]
[3]
웹사이트
Introduction to Tartu
http://www.autahvel.[...]
[4]
서적
The Baltic States: The Years of Independence 1917–1940
Hurst & Co
[5]
서적
Eastern Europe
https://books.google[...]
ABC-CLIO
[6]
웹사이트
UT ART MUSEUM PRESENTED CATALOGUE OF UNIVERSITY ART COLLECTION HELD AT VORONEZH, RUSSIA – University of Tartu
https://web.archive.[...]
2012-02-07
[7]
서적
Eesti Entsüklopeedia 9
Eesti Entsüklopeediakirjastus
[8]
웹사이트
Россия отозвала подписи под договорами о границе с Эстонией
https://rg.ru/2005/0[...]
2005-09-01
[9]
문서
小森、橋本 2002
[10]
문서
小森、橋本 2002
[11]
뉴스
Moscow: Border treaty won't be ratified if Estonia doesn't change conduct
https://news.err.ee/[...]
ERR
2019-03-30
[12]
뉴스
Budget cuts may be necessary this year, says Ratas
https://news.err.ee/[...]
ERR
2019-03-3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