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나바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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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나바즈 1세는 조지아의 전설적인 인물로, 조지아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에 이베리아 왕국을 건국한 왕이다. 그는 이란계 혈통을 지녔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 이후 카르틀리의 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파르나바즈는 이란식 행정 제도를 도입하고 군사 제도를 정비했으며, 조지아 문자를 창제하고 조지아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는 등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선조로 여겨지며, 현재 조지아의 여러 도시에서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기념물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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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나바즈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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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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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파르나바즈 1세 |
로마자 표기 | Parnavaz I |
조지아어 | ფარნავაზ I |
조지아어 발음 | pʰaɾnavaz |
통치 | |
칭호 | 이베리아와 콜키스의 왕 |
계승 | 이베리아 왕국의 왕 |
재위 기간 | 기원전 302년 – 기원전 237년 (다른 설 존재) |
선임자 | 아존 (직위 창설) |
후임자 | 사우르마케스 1세 |
개인 정보 | |
출생 | 기원전 329년, 326년 또는 311년 |
출생 장소 | 므츠헤타, 카르틀리 |
사망 | 기원전 237년, 234년 또는 219년 (92세) |
사망 장소 | 므츠헤타, 이베리아 왕국 |
매장지 | 아르마지, 이베리아 왕국 (미공개) |
배우자 | 두르주크 여성 |
자녀 | 사우르마케스 1세 |
왕조 | 파르나바지드 왕조 |
아버지 | 조지아 왕자 |
어머니 | 페르시아 여성 |
종교 | |
종교 | 조지아 이교 (아르마지 신) (자기 신격화) |
2. 중세 기록들과 역사적 배경
파르나바즈는 카르틀리의 부족장이었던 조상을 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약 800년 경의 ''왕의 삶'' 연대기에 관련 기록이 있다. 그의 삼촌 사마라는 므츠헤타 주변 조지아 부족들의 ''마마사클리시''("가문의 어른") 지위에 있었다. 파르나바즈의 어머니는 이란 혈통이었다. 파르나바즈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기독교 연대기 작가에 의해 쓰여졌지만, 고대 이란과 유사한 이미지와 신비로운 암시들이 풍부하며,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자료들은 그 시대에 이란과 카르틀리 사이에 문화적, 정치적 유대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파르나바즈"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 ''farnah''를 어원으로 하는 ''par''-를 가진 예시이며, 고대 이란인들은 이것을 합법적인 왕조를 상징하는 신성한 광채로 믿었다(cf. ''khvarenah'').[65]
조지아 연대기에서 가장 미화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파르나바즈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따르고 있다.[66]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카르틀리에서 군사 작전을 펼치는 동안 파르나바즈 가문은 풍비박산이 났고, 상속 재산 마저 알렉산더가 임명한 아존에게 몰수당했다. 파르나바즈는 아버지가 죽었지만, 마법같은 꿈을 꾸었고, 페르페테이야를 예고하며 태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고귀한 위업에 (스스로를) 헌신"할 수 있는 통찰력이 생겼다. 그는 사냥을 나갔다가 사슴을 쫓던 중 동굴에서 엄청난 크기의 보물을 발견했다.[67] 파르나바즈는 그 보물로 폭군 아존에 대항하는 군대를 일으켰다. 에그리시(고전 작가들의 글들에서는 콜키스)의 영주 쿠지가 그를 도왔으며, 파르나바즈의 누이와 결혼했다. 아존의 병영에서 온 1,000명의 군인들도 반란에 가담했는데, 이들은 시대에 맞지 않게 작가들에 의해 로마 군인들이라고 기록되었으며, 아존에게 승리한 파르나바즈에 의해 ''아즈나우리''(귀족) 칭호가 붙여졌다.[63]
연속되는 전투에서 아존은 패배했고 죽임을 당했으며, 파르나바즈는 27세 때에 카르틀리의 왕이 되었다. 그는 셀레우키즈의 주권자로 알려졌으며,[63] "이란식" 행정을 본떴다고 한다.[68] 군사-관리 조직은 지역 통치자 또는 ''에리스타비''들과의 교섭으로 기반을 이뤘다고 알려져 있다.[69]
2. 1. 파르나바즈 가문의 기원
년 연대기인 ''왕들의 삶''에 따르면, 파르나바즈는 카르틀리의 신화적 민족장인 카르틀로스의 후손으로서 훌륭한 족보를 가지고 있었다.[10] 그의 아버지의 삼촌인 사마라는 므츠케타 주변 조지아 부족들의 ''마마사클리시''(집의 아버지)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11] 파르나바즈의 어머니는 가바이 출신의 페르시아인 여성으로 알려져 있으며,[3][12] 조지아의 테이무라즈 왕자와 조지아의 안톤 1세 총대주교는 그녀를 다리우스 3세의 딸로 특정한다.[13] 파르나바즈의 이야기는 기독교 연대기 작가에 의해 쓰여졌지만 고대 이란과 유사한 이미지와 신비로운 암시로 가득 차 있으며, 이는 당시 이란과 카르틀리 사이의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문화적, 정치적 유대 관계를 반영한다. "파르나바즈"라는 이름은 또한 페르시아어 ''farnah''를 기반으로 하는 그 뿌리 ''par''-를 가진 예시이며, 고대 이란인들이 합법적인 왕조를 나타내는 신성한 광채로 믿었던 것이다(cf. ''khvarenah'').[14] 왕조 꼬리표 파르나바지아니("파르나바즈의/파르나바즈에서/파르나바즈를 위해 이름 지어진")는 초기 아르메니아 역사에서도 P'arnawazean(''비잔티움의 파우스투스'' 5.15; 5세기) 및 P'arazean(''아르메니아 역사'' 14; 아마도 5세기 초)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파르나바즈라는 왕이 조지아 왕조의 창시자로 이해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9][15] 파르나바즈는 또한 세라피트 비석에도 언급되어 있다.[16][17]2. 2.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과 파르나바즈의 등장
년 경의 연대기 ''왕들의 삶''에 따르면, 파르나바즈는 카르틀리의 부족장이었던 조상을 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고 한다.[10] 그의 삼촌인 사마라는 므츠헤타 주변 조지아 부족들의 ''마마사클리시''(집안의 어른) 지위에 있었다.[11] 파르나바즈의 어머니는 가바이 출신의 페르시아인 여성이었다고 전해지며,[3][12] 조지아의 테이무라즈 왕자와 조지아의 안톤 1세 총대주교는 그녀를 다리우스 3세의 딸이라고 특정한다.[13]파르나바즈에 대한 이야기는 비록 기독교 연대기 작가에 의해 쓰여졌지만, 고대 이란과 유사한 이미지와 신비로운 암시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그 당시 이란과 카르틀리 사이에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문화적, 정치적 유대 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파르나바즈"라는 이름 또한 페르시아어 ''farnah''를 어원으로 하는 ''par''-를 가진 예시이며, 고대 이란인들은 이것을 합법적인 왕조를 상징하는 신성한 광채로 믿었다(cf. ''khvarenah'').[14]
조지아 연대기에서 가장 예술적으로 완결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파르나바즈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따르고 있다.[18] 3살 때,[19][20] 어린 파르나바즈의 가족은 몰락했고, 그의 유산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카르틀리에서 벌인 원정 동안 세운 아존에게 빼앗겼다. 조지아의 역사적 전통뿐만 아니라 대 플리니우스(4.10.39)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솔리누스(9.19)에 의해서도 기억되는 알렉산드로스의 이베리아 침략은, 스트라보가 기원전 323년에 이베리아 변방으로 금광을 찾기 위해 보낸 원정(11.14.9)과 관련된 이베리아에 대한 일부 마케도니아의 간섭에 대한 기억으로 보인다.[4]
파르나바즈는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그가 태양의 정수로 자신을 도유하는 마법의 꿈은 반전을 예고한다. 그는 이 환상에 의해 "고귀한 행위에 헌신"하도록 설득된다. 그 후 그는 사냥을 떠난다. 사슴을 추적하던 중 그는 숨겨진 동굴에서 엄청난 양의 보물을 발견한다.[21] 파르나바즈는 보물을 가져와 그것을 이용하여 폭군 아존에 대항하는 충성스러운 군대를 조직한다. 그는 결국 파르나바즈의 여동생과 결혼하는 콜키스의 쿠지의 도움을 받는다.[22] 반군들은 또한 아존의 진영에서 온 1,000명의 병사들과 합류하는데, 작가는 시대착오적으로 그들을 로마인이라고 부르며, 아존에게 승리한 파르나바즈가 그들에게 ''아즈나우리''(즉, 귀족)라는 칭호를 부여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이 어원은 잘못되었다).[9]
파르나바즈 이야기의 주요 줄거리 - 외딴 산에 숨겨져 길러진 아버지 없는 소년, 잊혀진 혈통, 그의 꿈, 신성한 왕권, 태양 이미지, 사냥, 동굴에 숨겨진 보물의 발견 등은 키루스 대왕과 아르다시르 1세와 같은 이란의 건국 왕들에 대한 전설을 연상시킨다.[23] 파르나바즈가 스스로를 왕위에 올린 것은 일부 초기 ''사산 제국''의 샤한샤들이 자신을 왕위에 올렸기 때문에 나중의 사산 제국에서 영감을 받았을 수도 있다.[24]
3. 파르나바즈의 통치와 업적
파르나바즈는 사회, 문화적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두 개의 건축 프로젝트를 감독했는데, 하나는 산비탈에 파르나바즈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우상 아르마지를 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슷한 이름의 요새를 건설하는 것이었다.[43]
파르나바즈는 재위 기간 동안 두르주크 여인과 결혼하여 이베리아와 두르주크의 동맹을 공고히 하였고,[44] 여동생을 사르마티아인 족장과 결혼시키는 등[45] 다양한 북캅카스 민족과 동맹을 맺어 마케도니아와 내부의 적에 맞서기 위한 도움을 요청했다.
''그루지야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또한 그루지야 문자를 만들고 그루지야어를 왕국의 공용어로 만들었다고 한다.[46]
연대기는 파르나바즈의 65년의 긴 재위를 보고한다.[9][47][4]
그가 죽자, 그는 아르마지 우상 앞에서 묻혔고 숭배를 받았다. 그의 아들 사우로마케스 1세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49][50][51]
파르나바즈의 무덤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그의 무덤을 방문하여 장식하고 존경을 표한 마지막 군주 중 한 명은 미리안 3세 왕이었다.[52] 파르나바즈가 우상 아르마지 앞에서 묻힌 것은 이베리아 초기 군주들의 헬레니즘적인 신격화를 시사한다.[39]
3. 1. 이베리아 왕국의 건국과 행정 개혁
아존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죽자, 파르나바즈는 27세의 나이로 카르틀리의 왕이 되었다.[4] 그는 헬레니즘 시대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중동 계승자였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종주권을 인정했다고 전해진다. 그루지야 왕실 연대기에서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안티오코스라는 일반적인 이름으로 언급된다.[9]파르나바즈는 아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왕에게 사절단을 보내고, 엄청난 선물을 보냈다. 그리고 그에게 복종할 것을 약속하고, 그리스인에 대항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안티오코스는 그의 선물을 받고, 그를 아들로 부르며 왕관을 주었다.[25]
파르나바즈는 자신의 행정을 아케메네스 제국의 모델에 따라 만들었다고 한다.[26][27][28] 그는 지역 총독 또는 ''에리스타비''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군사-행정 조직을 도입했다.[29] 왕으로부터 받은 에리스타비의 표식은 홀, 특별한 인장 반지, 허리띠 및 무기로 구성되었다.[30]
이베리아는 총 7명의 에리스타비를 두었는데, 다음과 같다.
에리스타비 관할 지역 |
---|
콜키스[31] |
카헤티[32] |
후나니[33] (오늘날 북부 아제르바이잔) |
삼슈빌데[34] (크베모 카르틀리) |
춘다[35] (자바헤티, 콜라 및 아르타아니 포함) |
오즈르케[36] |
클라르제티[37] |
왕국에는 내 카르틀리에 기반을 둔 왕실 권력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1명의 스파스페트가 있었다.[38] 에리스타베이트는 아케메네스 ''사트라프''와 셀레우코스 ''스트라테고이''의 측면을 모방했다. 연대기의 후대 역사가들의 주된 동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쟁 이후 최초의 그루지야 군주가 카르틀리의 기본적인 정치 구조를 만들었고, 아케메네스 행정 시스템을 따랐으며, 헬레니즘 시대, 파르티아 및 사산 시대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는 것을 후세에게 확신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루지야 왕국의 장기적인 생존 능력과 안정성이 확립되었다.[39]
파르나바즈가 만든 계층 구조는 다음과 같다.
- 국왕
- 왕실 군대의 사령관(스파스페트)
- 에리스타비
- 왕실 요새에 주둔한 주둔군의 중대 지휘관(''아타시스타비스 치히스타비스'')
- 귀족 가문의 젊은 아들들인 소령 지휘관(''아시스타비스'')
- 인접 국가에서 온 용병 전문 전사들과 왕국 전체를 중심으로 조직된 모든 군인[40]
파르나바즈가 이베리아를 사에리스타보로 나눈 것은 군사적 목적, 즉 방어를 위해 사람들을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왕국의 총 인구는 외국인 포로와 조공을 바치는 지역의 인구를 포함하여 약 60만 명이었으며, 이는 최소 10만 명 이상의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스트라보에 따르면 이베리아 군대는 7만~8만 명이었으므로, 각 사에리스타보에는 1만 명의 군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1]
그루지야와 고전 자료는 당시 카르틀리가 셀레우코스 왕조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파르나바즈가 에리스타비 봉토를 개혁했다는 주장은 중세의 분할 패턴을 과거로 소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43]
3. 2. 군사 제도 정비
파르나바즈 1세는 지역 총독, 즉 에리스타비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군사-행정 조직을 도입했다.[29] 왕으로부터 받은 에리스타비의 표식은 홀, 특별한 인장 반지, 허리띠 및 무기로 구성되었다.[30]이베리아는 총 7명의 에리스타비를 두었는데, 다음과 같다:
에리스타비 관할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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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키스[31] |
카헤티[32] |
후나니[33] (오늘날 북부 아제르바이잔) |
삼슈빌데[34] (크베모 카르틀리) |
춘다[35] (자바헤티, 콜라 및 아르타아니 포함) |
오즈르케[36] |
클라르제티[37] |
왕국에는 내 카르틀리에 기반을 둔 왕실 권력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1명의 스파스페트가 있었다.[38]
파르나바즈가 만든 계층 구조는 다음과 같다:
- 국왕
- 왕실 군대의 사령관(스파스페트)
- 에리스타비
- 왕실 요새에 주둔한 주둔군의 중대 지휘관(''아타시스타비스 치히스타비스'')
- 귀족 가문의 젊은 아들들인 소령 지휘관(''아시스타비스'')
- 인접 국가에서 온 용병 전문 전사들과 왕국 전체를 중심으로 조직된 모든 군인.[40]
파르나바즈가 이베리아를 사에리스타보로 나눈 것은 군사적 목적, 즉 방어를 위해 사람들을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왕국의 총 인구는 약 60만 명이었으며, 이는 최소 10만 명 이상의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스트라보에 따르면 이베리아 군대는 7만~8만 명이었으므로, 각 사에리스타보에는 1만 명의 군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1]
이러한 군사 제도 정비는 아케메네스, 헬레니즘 시대, 파르티아 및 사산 시대의 행정 시스템을 따른 것으로, 그루지야 왕국의 장기적인 생존 능력과 안정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39]
3. 3. 문화 발전과 조지아 문자 창제
파르나바즈 1세는 사회, 문화적 사업을 추진하고 건축 프로젝트를 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르마지 산에 자신의 이름을 딴 우상 아르마지 (신)를 세우고, 아르마지 요새를 건설했다.[43]그루지야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파르나바즈 1세는 그루지야 문자를 창제하고 그루지야어를 왕국의 공용어로 만들었다.[46] 그는 그루지야어를 널리 보급하고, 그루지야 문자를 창제하여 그루지야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4. 아르리안의 기록과 파르나바즈
현대 여러 학자들은 조지아의 중세 시대 문헌에 기록된 파르나바즈와 2세기 문헌 ''아나바시스 알렉산드리''의 저자인 그레코-로마 역사가 아르리안이 기록한 파라스마네스를 동일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아르리안은 "콰레즘의 왕 파라스마네스(Фαρασμάνης)"가 15,000명의 기수들을 거느리고 알렉산더를 방문했고, 알렉산더가 에욱시네와 관련된 영토들을 정벌할 열정과 콜키스를 복종시킬 야망을 북돋우는 지원 서약을 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여기서 콜키스의 왕은 파르나바즈로 이웃국의 파라스마네스와는 다르다. 두 이름의 유사성(기원은 이란어 파르나흐)으로 인해 중앙 아시아에 있던 초라스미아의 왕이 인접해 있던 콜키스(오늘날의 서부 조지아, 예를 들어 고대 카르틀리/이베리아의 서쪽 이웃 나라) 왕이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기록되기도 했다.[74] 조지아의 몇몇 학자들은 아르리안의 그리스어 필경자가 고전 지도에서 그 시대에 실제 콜키스와 폰투스의 국경이 있었던 조지아의 서남부 국경 지대(중세 타오-클라르제티)가 그려진, 촐라제네(초르제네)와 코라스미아를 혼동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73][75]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5. 유산
바그라티오니 왕조는 파르나바즈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했다.[56] 조지아 군주제가 지속되는 동안 조지아 왕들은 파르나바즈 왕이 건국한 이베리아 왕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57]
트빌리시에는 파르나바즈 왕의 거리, 대로가 있으며, 파르나바즈의 동상도 있다. 또한 바투미, 쿠타이시, 하슈리, 고리, 구르자니, 사치헤레, 제스타포니 등에도 파르나바즈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학교, 호텔 등 일부 건물과 약 500명의 조지아인들도 그의 이름을 사용한다.[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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