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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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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판위량은 기녀 출신으로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고 예술가로 성공한 중국 근현대 미술의 중요한 여성 화가이다. 1895년 장쑤성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세관 감독 판찬화의 도움으로 상하이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유럽에서 활동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판위량의 작품은 여성의 몸을 통해 억압적인 사회에 저항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그녀의 삶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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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위량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판위량 자화상 (1924)
자화상(1924)
본명장위량, 천슈칭, 판스슈
출생일1895년 6월 14일
출생지양저우, 장쑤성, 청나라
사망일1977년 7월 22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안장 장소몽파르나스 묘지, 파리
국적중국
직업화가
교육
사사홍예
주치잔
왕지위안
학력상하이 미술학교
리옹 프랑스-중국 연구소
리옹 국립 미술학교
파리 국립 미술학교
로마 미술 아카데미
작품 활동
장르누드
초상화
풍경화
스타일인상주의
표현주의
아르 데코
대표작여성 누드 (女人體)
참여 운동프랑스 예술가 협회
중국 예술가 협회
영화/TV영화: 《화혼》 (1994)
TV 드라마: 《판위량》 (1990)
수상 내역
수상여성 누드, 로마 국제 미술 전시회 금상 수상
파리 금상
프랑스 자유 예술 연맹 국제 살롱 상
프랑스 문화 교육 금메달
예술-과학-문학상

2. 생애

판위량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도박에 빠진 삼촌에 의해 기루에 팔리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우후시세관 감독 판찬화와의 만남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913년 판찬화와 결혼한(이미 본처가 있었다) 판위량은 그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화가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그녀는 파리에 정착한 후에도 '판'이라는 성을 사용하며, 재혼하지 않고 판찬화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21]

상하이에서 서양화를 접한 판위량은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192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리옹파리의 국립 미술학교, 로마 국립 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며 예술적 역량을 키웠다.

1929년 귀국 후 상하이 미술전문학교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창작 활동에 매진했으나, 기녀 출신이라는 과거와 대담한 화풍은 보수적인 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1937년 다시 파리로 떠난 판위량은 조국을 그리워하면서도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간 판위량은 서양화에 중국 전통 기법을 접목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유럽과 일본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959년 파리 대학교에서 상을 받았다.[28]

사후 판위량의 유작은 안후이 박물관에 소장되었고, 전국 규모의 회고전을 통해 그녀의 업적이 재조명되었다.

2. 1. 생애 초반

판위량은 1895년 장쑤성에서 첸슈칭(陳秀清)으로 태어났다. 14세에 부모를 여읜 후, 삼촌에게 팔려 사창가로 가게 되었지만, 매춘을 거부했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노래하는 기녀가 되었다.[3][4] 이후 부유한 세관 관리인 판짠화[5]의 눈에 띄어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판짠화는 그녀에게 자유를 주고 교육을 지원했으며, 그녀는 그의 성을 따라 판씨가 되었다.[5] 판위량이 가족에게 남긴 유언을 담은 법적 서류에는 "판-장 위량"(중국어: 潘張玉良)이라고 서명되어 있는데, 이는 그녀가 인정하고 선호하는 이름이다.[6]

판위량은 남편과 함께 상하이로 이사했고, 1920년 상하이 미술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7] 왕지위안에게 그림을 배웠다. 상하이 미술학교에서 그녀는 "낮은" 출신 배경 때문에 종종 따돌림을 당했고, 동료들과 어울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졸업 후, 판위량은 남편 판잔화의 후원으로 리옹파리로 유학을 갔다. 리옹의 중불학원(中法學院)과 리옹 국립미술학교,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9] 1925년에는 이탈리아 로마 국립미술원에서 유학할 수 있는 로마 장학금을 받았다.[5][1] 로마에서 그녀는 움베르토 코로말디에게서 공부했다.[10]

2. 1. 1. 출생과 불우한 어린 시절

판위량은 1895년 장쑤성 양저우에서 천수칭(陳秀淸)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21]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 부모를 모두 잃고 외삼촌에게 의탁했다.[21] 그러나 도박 빚에 시달리던 외삼촌은 위량을 상하이의 기방에 팔아넘겼다.[21] 기녀가 되면서 장위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21]

14세에 사창가로 팔려간 위량은[3][4]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3][4] 결국 노래하는 기녀가 되었지만, 훗날 우후시의 세관 감독 판찬화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3][4]

2. 1. 2. 기녀 생활과 판짠화와의 만남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은 천수칭(판위량의 본명)은 도박 빚에 몰린 외삼촌에 의해 상하이의 기방 '이춘위안'에 팔려가 장위량이란 이름으로 기녀가 되었다.[21][16] 기생 아홍의 몸종으로 지내던 중, 아홍이 남자 손님들 간의 다툼으로 죽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21] 이후 성장하여 직접 기생이 된 위량은 상하이로 부임해 온 세관 감독 판짠화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21] 판짠화는 그녀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첩으로 삼았으며, 이춘위안에서 돈을 주고 그녀를 빼내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었던 판짠화는 이미 아내가 있었지만 홀로 부임해왔다. 지역 유지들은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옥랑의 성 상납을 시도하려 했다.[21] 당시 우후현은 뇌물 수수가 만연한 지역이었고, 상인들은 판짠화가 전임 감독들처럼 뇌물을 받고 자신들의 활동을 눈감아주기를 바랐다.[22] 상인들은 판짠화가 가족과 떨어져 생활한다는 것을 알고 뇌물로 위량을 보냈던 것이다.[22]

한밤중에 곱게 단장한 위량이 나타나자 판짠화는 당황했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상인들의 속셈을 알게 되었다. 그는 위량의 처지를 알고 몸값을 지불해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했으나, 위량은 혼자 살아갈 길이 없어 보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22] 고민하던 판짠화는 이 기회를 역이용해 상인들에게 정면 대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신문사에 연락하여 위량과 정식으로 결혼했다는 소식을 알리고 다음 날 아침 신문에 발표하게 했다. 신문물을 배운 판짠화는 축첩제도를 타파해야 할 악습으로 여겼지만, 위량을 위하고 뇌물로 자신을 옭아매려는 상인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결혼을 선택한 것이었다.[22]

다음 날 아침, 신문에서 위량과 판짠화의 결혼 기사를 본 우후현 상인들은 깜짝 놀랐다.[22] 기생인 위량을 이용해 신임 세관 감독을 쥐락펴락하려던 그들은 졸지에 세관 감독의 부인이 된 위량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몰라 당황했고, 그녀가 이춘위안과 상인들의 비리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불안해했다.[22] 판짠화는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판위량을 대했고,[21]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판위량은 그의 성을 따라 '판위량'이 되었고, 그가 가족에게 남긴 유언을 담은 법적 서류에는 "판-장 위량"(중국어: 潘張玉良)이라고 서명하여 자신이 인정하고 선호하는 이름임을 나타냈다.[6]

2. 2. 결혼과 미술 교육

판위량은 판짠화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판짠화는 그녀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첩으로 삼아 속환시켰다.[21] 그는 이미 아내가 있었지만, 축첩제도를 악습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위량을 위해, 그리고 자신에게 뇌물로 족쇄를 채우려는 상인들에게 맞서기 위해 결혼을 선택했다.[22] 판짠화는 위량에게 판(潘)씨 성을 주고,[5]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녀를 위해 가정교사를 구해 가르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판짠화는 우후현에서 위량과 함께 사는 것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앙심을 품은 상인들의 위협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위량을 상하이로 데려갔다.[23] 그곳에서 판짠화는 중산층 지식인들이 사는 곳에 집을 구하고, 친구들을 초대하여 위량을 소개했다. 판짠화는 위량이 그림에 재능이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그녀가 예술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2. 2. 1. 상하이 미술전문학교 시절

판위량은 이웃에 살던 상하이 미술전문학교 교수 홍예의 권유로 이 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게 되었다.[23] 입학 시험에는 낙방했지만, 류하이쑤(劉海粟)[25] 교장과 천두슈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입학이 허가되었다.[23]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서 교장 류하이쑤와 서양학과 주임 왕지위안의 지도를 받으며 예술적 역량을 키워나갔다.[16] 특히 왕지위안 교수의 수업을 통해 누드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16] 판위량은 남편 판찬화의 경제적 지원 덕분에 학비와 재료비 걱정 없이 그림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고, 이는 그녀가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23]

2. 2. 2. 누드화 발표와 사회적 논란

상하이 미술전문학교 교장 류하이쑤(劉海粟)와 서양학과 과주임 왕지위안(王濟遠)의 지도를 받으며 예술로서의 누드화를 접한 판위량은, 고된 작업 끝에 자신의 누드를 그린 〈나녀(裸女)〉를 학교에서 열린 사제 간 연합 전시회에 출품했다.[27] 이는 당시 보수적인 중국 사회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5]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가감 없이 그린 위량의 파격적인 작품은 학교는 물론이고, 남편 판찬화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27] 판찬화는 위량의 그림을 반대한 적이 없었지만, 누드화만큼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했고, 위량에게 거의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27]

결혼 후 처음으로 판찬화는 위량에게 화를 냈고, 그의 말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위량 또한 상처를 받았지만, 판찬화와의 사랑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27] 이러한 갈등을 거쳐 위량은 차츰 성숙한 시야를 지닌 예술가로 성장해 갔다.[27]

당시 중국에서 여성 예술가들은 자연 묘사나 초상화에 국한되었고, 누드는 부적절하다고 여겨졌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위량은 여성 누드 묘사를 계속했으며, 종종 자신을 모델로 삼았다.[9] 그녀의 작품은 정부 관리들과 보수적인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5] 동료 여성 화가 관즈란과 함께 근대성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중화민국 (1912–49)의 미술계에서 호평을 받았다.[11]

2. 2. 3. 유학 결심과 판짠화의 지원

판위량은 홍야 선생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여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류하이쑤, 왕지위안과 인연을 맺었다.[16] 판짠화는 재능을 찾은 위량을 응원했다. 서양미술은 재료비가 많이 들고 작업실이 필요했지만, 판짠화의 배려로 위량은 집 전체를 작업실로 사용하고 학비 부담도 없어 다른 학생들보다 여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다.[23]

판위량은 누드화를 예술로서 접하게 되었고,[16] 판짠화는 그녀의 재능에 감동하여 첩으로 맞아들였다.[21] 이후 판위량은 판씨 성을 갖게 되었다.[21] 1920년, 상하이 미술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했고,[7] 졸업 후 남편 판짠화의 후원으로 리옹파리로 유학을 갔다.[9] 리옹의 중불학원(中法學院)과 리옹 국립미술학교에 다녔고, 이후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9] 1921년에는 유학을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2. 3. 유럽 유학

1921년 판위량은 남편 판찬화의 지원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서 서양화를 접하고 그 매력에 빠져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27]

2. 3. 1.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의 학업

남편 판짠화의 도움으로 상하이 미전을 졸업하고 프랑스 리옹에 유학하여 리옹 국립 미술전문학교에 진학했다.[21] 1923년에는 프랑스국립미술학원에 입학했다.[27] 1925년 프랑스국립미술학원을 졸업한 뒤 로마국립미술학원에 들어가 회화뿐 아니라 조각도 공부했다.[27] 그는 그림 공부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등을 두루 구사하였다.[21] 이후 파리 국립미술학원으로 옮겨 졸업하고 다시 이탈리아 국립미술학원에 진학했다.[21]

2. 4. 귀국과 교육, 작품 활동

192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판위량은 리옹파리의 국립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1925년 로마 국립 미술학교에 입학했다.[27] 1929년 귀국 후 상하이 미술전문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고 창작 활동을 했으나, 대담한 작풍과 기녀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보수적인 사람들로부터 비판받았다.[20] 결국 1937년 다시 파리로 떠났다.

2. 4. 1. 귀국 직후

9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판위량은 유학파 서양화가가 드물었기 때문에 귀국 직후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귀국하던 해에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첫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했고,[27] 곧바로 모교인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의 서양화과 주임으로 부임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27] 류하이쑤의 초청으로 상하이 미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난징의 국립 중앙 대학교 미술 교수로도 초빙되었다.

판위량은 예술가이자 화가로서 한창 주목받던 시기에, 판찬화에게 고향에 있는 아들 무얼을 상하이로 데려와 함께 지내자고 부탁했다. 어린 시절 이후 가족다운 생활을 한 적이 거의 없던 판위량은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했다.[28] 판찬화의 아들 무얼과의 생활을 통해 ‘엄마’ 노릇을 경험하며 또 다른 행복을 느꼈고, 이러한 행복은 판위량의 감수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작품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28]

2. 4. 2. 교육 활동과 사회적 편견

1929년 제1회 전국 미전에 참가한 위량은 중국 서양화 부문에서 최고의 인물로 선정되었다.[28] 신화예전, 중학대학, 난징의 중앙미술대학 교수를 겸임하며 후학 지도에 힘쓰는 한편 작품 활동 또한 계속했다.[28] 난징 대학에도 출강했다. 그러나 '기생 출신'이라는 과거는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20] 온갖 구설수에 휘말리며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20] 이러한 상황은 판짠화의 지위까지 위협했다.[21] 결국 위량은 다시 프랑스로 떠날 결심을 한다.[21]

2. 4. 3. 누드화에 대한 집념과 사회적 반발

판위량은 누드화를 통해 여성의 몸을 예술적으로 탐구하고, 사회적 속박에 대한 반항 의지를 표현했다.[17][18][19] 그러나 당시 중국 사회는 여전히 보수적이었고, 판위량의 누드화는 끊임없이 비난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5][16]

판위량이 〈나녀(裸女)〉를 학교에서 열린 〈사제 간 연합 전시회〉에 출품하자 학교는 큰 충격을 받았다.[27] 남편 판찬화는 판위량의 그림을 반대한 적이 없었지만,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그린 누드화를 전시한 것에 대해 모욕감을 느꼈다.[27] 그는 결혼 후 처음으로 판위량에게 화를 냈고, 판위량 또한 그의 반응에 상처를 받았다.[27]

1920년대 당시 춘화에서나 볼 수 있던 누드를 두려움 없이 고집하는 판위량의 선택에는 사회적 속박에 대한 반역성이 담겨 있었다.[19] 여성에게 폭력적인 중국 사회에 대한 반항의 의지를 여체의 그림으로 표출한 것이다.[17]

1927년 이탈리아 국제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습작 유화 〈나녀(裸女)〉로 중국인 최초로 3등에 당선되었다.[27] 그러나 파리이탈리아 유학 후 귀국했지만, 판위량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여전했다.[16] 1936년 난징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판위량의 작품이 훼손되고, ‘몸 파는 창녀가 나체화가가 되다’라는 전단지가 뿌려지는 사건이 발생했다.[28]

정치적 억압 속에서도 판위량은 누드화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지만, 사회적 시선은 냉담했다.[34] 판위량은 작품을 그리기 위해 직접 각지를 여행하였고, 직접 사물을 보고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누드화를 그릴 때 판위량은 모델을 구할 수 없자 자신의 누드를 그리기도 했다 한다.[31]

2. 5. 생애 후반

1929년에 귀국한 위량은 상하이 미술전문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정력적으로 창작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담한 작풍과 전 기녀라는 출신 배경은 풍기를 중시하는 보수적인 사람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에 실망한 그녀는 1937년 다시 파리로 향했다. 결국, 사망할 때까지 40년간 조국을 그리워하면서도 두 번 다시 그 땅을 밟지 못했다.[21]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화재(畵材)마저 부족한 어려운 생활을 했지만, 파리 해방 후 본격적으로 화가로서의 활동을 재개했다. 서양화에 중국의 전통화 기법을 살린 그녀의 작품은 프랑스 화단에서 주목을 받았고, 유럽과 일본에서의 전시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며 명성을 높였다. 1959년에는 파리 대학교로부터 상을 받았다.

위량의 사후 유작은 중국으로 돌아가 고향인 안후이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또한 전국 규모의 회고전이 개최되어, 비로소 그녀의 공적이 중국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2. 5. 1. 유럽 순회 활동과 국제적 명성

1937년 판위량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 텐수신의 도움으로 프랑스, 영국, 벨기에,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일본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21]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1940년 전후 서양화에 중국 전통의 선묘법을 접목하여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했다.[29]

판위량은 유럽 미술상과의 계약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고, 어느 화랑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후원자 없이 독자적으로 작품을 판매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작품 판매 수입으로만 생활했다.[28]

2. 5. 2. 프랑스 생활과 왕서우이와의 동거

프랑스 유학을 떠날 때, 판위량은 첩의 신분으로 유학을 가는 것에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으나 남편 판짠화는 개의치 않았다. 판짠화는 유학을 망설이는 위량에게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독려했다.[21]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로 간 판위량은 리옹에 있는 국립 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프랑스국립미술학원을 졸업한 위량은 귀국 대신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로마국립미술학원에 들어가 회화뿐 아니라 조각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2. 5. 3. 판짠화의 죽음과 귀국 좌절

1950년대가 되자 판위량은 귀국을 결심한다. 그러나 판짠화는 병석에 누운 몸으로 직접 편지를 써서 그녀의 귀국을 만류했다.[28] 서양화가인 판위량이 귀국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했기 때문이었다. 판짠화의 편지를 받은 위량은 귀국을 잠시 미루고 화가로서 계속 활동했다. 1959년, 파리에서 오르리에상을 수상한 위량은 자신의 작품 〈짱다첸 두상〉이 파리 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영광을 누렸다.[28]

판위량은 계속 귀국을 결심하고 준비했지만, 판짠화는 편지와 연락을 통해 귀국하지 말라고 하였다. 아까운 재능이 사장될 것이라는 게 판짠화의 대답이었다. 1959년 여름, 판짠화는 세상을 떠났다.[28] 죽기 전, 판짠화는 위량이 귀국할 것을 염려해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28]

2. 5. 4. 최후

1977년 프랑스에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묻혔다.[21]

3. 작품 세계

판위량은 유화, 소묘, 조각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을 남겼다.[29] 앙리 마티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국 전통 회화의 필선과 색채를 융합하여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했다.[21] 후기 인상파와 야수파 등 서양 회화 기법을 수용하고, 동서양 문화의 융합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했다.[29][30]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폴 세잔,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인상주의 화가들의 화풍과 동양화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26] 서양 수채화 안료를 사용하면서도 온화한 색감과 힘 있는 선을 표현했는데, 이는 동양 여체를 그릴 때 두드러졌다.[19] 1932년 류하이쑤의 지적을 받아들여 장다첸에게 그림을 배우는 등 끊임없이 노력했다.[28]

주로 누드화와 인물화를 그렸으며, 특히 여성 누드화가 많다.[20] 1926년 로마 국제 미술 전시회 금상[14], 1929년~1936년 중국 5회 개인전, 난징 국립 중앙 대학교 미술 교수[5], 1959년 파리 금상 및 벨기에 은상[14]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1937년 프랑스로 돌아가 ''에콜 데 보자르'' 교수가 되었고, 중국 미술 협회 회장을 역임했다.[12] 영국, 미국, 독일 등 세계 각국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12]

안후이 박물관은 판위량의 작품 4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유화 10점은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14] 2014년 [https://www.mutualart.com/Artwork/Nude-by-Window/C820DC00C9BB5BA9 Nude by Window]는 4451802USD에 낙찰되어 최고가를 기록했다.[15]

3. 1. 작품에 나타난 사회 비판 의식

판위량은 여성의 몸, 특히 누드를 소재로 한 작품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사회적 억압에 저항했다. 기녀 출신으로 한 남자의 첩이 되어야 했던 판위량에게 여성의 몸은 단순한 신체를 넘어선 정신이자 영혼이었다.[33]

1920년대 당시 춘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누드를 예술 작품으로 당당하게 그린 것은 폐쇄적인 중국 사회와 여성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는 행위였다.[19][26] 판위량은 여성의 몸을 통해 생육 능력을 부각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20]

''Untitled'', 1930. 잉크와 과슈 on 종이.


그러나 판위량의 누드화는 당시 보수적인 중국 사회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위량은 여성 누드 묘사를 계속했으며, 종종 자신을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9] 이러한 노력은 동료 여성 화가 관즈란과 함께 근대성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중화민국 미술계에서 호평을 받았다.[11]

판위량의 작품은 중국 수묵화 기법을 서양화 스타일에 자연스럽게 통합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수묵화가 유럽 미술 전통의 권위를 은근하게 훼손하는 능력으로 칭찬받았다.[2]

4. 평가 및 영향

판위량은 중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여성 화가이다. 기생 출신이라는 어려운 환경과 사회적 편견을 이겨내고 예술가로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33] 그녀의 삶과 예술은 여성 해방과 예술의 자유를 상징하며, 많은 현대 여성 화가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판위량은 평생 '여체'에 대한 탐구를 이어갔는데, 이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33] 기녀 출신이자 한 남자를 본부인과 공유해야 했던 판위량에게 여성의 몸은 단순한 몸을 넘어선 정신이자 영혼이었다.[33] 또한, 그녀의 그림을 통한 정체성 확인 작업은 전근대사회의 폐쇄성과 여성성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는 일이기도 했다.[33]

1926년 로마 국제 미술 전시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14] 1929년에는 류하이쑤의 초청으로 상하이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고, 난징의 국립 중앙 대학교 미술 교수로도 초빙되었다. 중화민국 (1912–49) 시기, 여성 예술가들은 주로 자연 묘사나 초상화에 국한되었지만, 판위량은 여성 누드를 묘사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8]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동료 여성 화가 관즈란과 함께 근대성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11] 판위량은 중국 수묵화 기법을 서양화에 자연스럽게 통합하여, 수묵화가 유럽 미술 전통의 권위를 훼손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

1937년 프랑스로 건너간 판위량은 에콜 데 보자르 교수로 합류했고, 중국 미술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12] 그녀의 작품은 영국, 미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국제적으로 전시되며 널리 찬사를 받았다.[12] 1959년에는 파리 금상과 벨기에 은상을 수상했다.[14] 그러나 오랜 해외 체류로 인해 중국 현대 미술에 대한 기여가 간과되기도 했고, 파리에서는 주류 미술 감상에서 제외되기도 했다.[9]

판위량은 1977년 사망하여[13]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1985년 그녀의 많은 작품이 중국으로 반환되어 중국 미술관과 안후이성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안후이 박물관은 판위량의 작품 4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녀의 유화 중 10점만이 시장에 나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14] 2014년에는 [https://www.mutualart.com/Artwork/Nude-by-Window/C820DC00C9BB5BA9 Nude by Window]가 4451802USD에 판매되어 최고가를 기록했다.[15]

판위량의 일대기는 많은 현대 여성 화가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중국 작가 스난은 1982년 '판위량'이라는 작품을 통해 작가로 발돋움했다.[19]

5. 관련 작품


  • 영화 화혼 : 공리가 판위량 역을 맡아 판위량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이다.[1]
  • 황메이 희곡 《기루 여화가》(風塵女畫家) : 마란이 주연을 맡았으며, 판위량의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1]
  • TVB 드라마 《회혼》(Painting Soul) : 리자신이 판위량 역을 맡았다.[1]
  • 소설 《상하이의 화가》(The Painter from Shanghai) : 제니퍼 코디 엡스타인의 국제 베스트셀러 소설로 판위량의 삶을 바탕으로 하며, 16개 언어로 번역되었다.[1]
  • 소설 《판 위 량, 상하이의 마네》(Pan Yu Liang, La Manet de Shanghai) : 마리 로르 드 샤제르가 쓴 책으로, 판위량의 중국과 프랑스에서의 삶을 바탕으로 했다.[1]

참조

[1] 논문 MODERNISM AND ORIENTALISM: THE AMBIGUOUS NUDES OF CHINESE ARTIST PAN YULIANG
[2] 학위논문 Negotiating the Discourse of the Modern in Art: Pan Yuliang (1895–1977) and the Transnational Modern. 해당없음 2013
[3] 웹사이트 画坛女杰潘玉良先生 https://120.seu.edu.[...]
[4] 웹사이트 曲折经历恍若传奇 https://www.qingdaon[...]
[5] 뉴스 Pan Yuliang's painting of bathing nudity http://www.chinadail[...] China Daily 2006-11-11
[6] 웹사이트 女画家潘玉良姓名考-新闻-华东站 -雅昌艺术网 http://huadong.artro[...] 2011-02-06
[7] 논문 The Shanghai Fine Arts College: Art Education and Modern Women Artists in the 1920s and 1930s 2007
[8] 논문 The Art of Pan Yuliang-Fashioning The Self in Modern China https://www.academia[...] 2019-01
[9] 서적 Rewriting modernism : three women artists in twentieth-century China : Pan Yuliang, Nie Ou and Yin Xiuzhen https://www.worldcat[...] 2016
[10] 서적 The Golden Key: Modern Women Artists and Gender Negotiations in Republican China (1911-1949) https://books.google[...] BRILL 2021-08-16
[11] 서적 Liangyou, Kaleidoscopic Modernity and the Shanghai Global Metropolis, 1926–1945 https://books.google[...] BRILL
[12] 서적 Art and Artists of Twentieth Century China
[13] 서적 The Guerilla Girls' Bedtime Companion to the History of Western Art
[14] 웹사이트 Pan Yuliang - Portrait of chinese Masters https://www.lingnana[...] 2020-03-04
[15] 웹사이트 Pan Yu-liang {{!}} 123 Artworks at Auction {{!}} MutualArt https://www.mutualar[...] 2023-03-21
[16] 뉴스 편견 맞선 여류화가의 질곡된 삶 http://news.naver.co[...] 헤럴드경제 2004-09-25
[17] 뉴스 화혼(畵魂) 판위량(潘玉良) 外 http://news.naver.co[...] 한국일보 2004-09-24
[18] 뉴스 화혼 판위량 http://www.seoul.co.[...]
[19] 뉴스 "[문학예술]‘화혼 판위량’…누드화속 외침 “나는 나”"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4-10-01
[20] 뉴스 기생출신 판위량 예술세계 한눈에 http://news.heraldco[...] 헤럴드경제 2010-04-04
[21] 뉴스 근대기 여성으로 살아내기 http://weekly.hankoo[...] 한국일보 2009-05-07
[22] 웹사이트 외조의 기술- 예술가의 남자 (편찬화-1) http://www.segye.com[...]
[23] 웹사이트 예술가의 남자 (편찬화-2) http://www.segye.com[...]
[24] 문서 판찬화의 고향과도 멀지 않았다.
[25] 문서 중국현대미술의 대표 작가. [[중국]]화단에서는 ‘미전파(美專派)’ 지도자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26] 뉴스 [김재희칼럼] 중국을 흔든 화혼, 판위량 http://legacy.h21.ha[...] 한겨레 21 2005-01-19
[27] 웹사이트 예술가의 남자 (편찬화-3) http://www.segye.com[...]
[28] 웹사이트 예술가의 남자 (편찬화-4) http://www.segye.com[...]
[29] 서적 지도로 보는 세계 미술사 시그마북스
[30] 서적 지도로 보는 세계 미술사 시그마북스
[31] 뉴스 "[책을 고르고 나서] 고구려-백제-신라 지금 싸운다면…]"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4-10-01
[32] 뉴스 2003年8月23日,合肥晚报 http://www.hf365.com 合肥晚报
[33] 뉴스 '女體' 마다 영혼을 담은 중국 첫 여류화가 판위량 http://news.naver.co[...] 매일경제 2004-09-24
[34] 뉴스 "[비디오] 화혼" http://weekly.hank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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