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후사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폴란드 후사르는 헝가리어에서 유래된 기병대로, 14세기 말 세르비아에서 기원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헝가리에서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16세기 폴란드 왕국에서 헝가리 후사르를 모델로 중무장 기병대로 재편되었으며, 스테판 바토리 국왕 시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기병대의 주력이 되었다. 폴란드 후사르는 1577년 루비셰프 전투부터 1683년 빈 전투까지 많은 전투에서 활약했지만, 1775년 폴란드 분할과 함께 해체되었다. 이후 폴란드군, 대중문화 등에서 그 유산을 기리고 있으며, 대한민국은 F-35 전투기를 후사르로 명명하여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폴란드 기병 - 우완
우완은 튀르크어에서 유래하여 유럽 여러 국가에서 기병 부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시작되어 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활약했고, 현대에는 역사적 역할을 계승하거나 대중문화에서 묘사되기도 한다. - 폴란드 기병 - 창기병
창기병은 긴 창을 주무기로 사용하여 과거 유럽, 오스만 제국, 인도 등에서 주요 기병 역할을 수행했으나, 총기의 발전과 함께 그 역할이 변화했다. - 20세기 이전의 병과 - 펠타스트
펠타스트는 고대 그리스에서 펠테라는 초승달 방패를 들고 투창을 주 무기로 사용하며 기동성이 뛰어났던 경무장 보병으로, 트라키아에서 기원하여 그리스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는 마케도니아 군대의 핵심 구성원으로 활약했다. - 20세기 이전의 병과 - 사무라이
사무라이는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본의 무사 계급을 일컫는 말로, 본래 귀족을 섬기는 사람을 뜻하는 '사부라이'에서 유래하여 쇼군을 섬기는 무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변화했으며, 무사도를 따르며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기병 - 에퀴테스
에퀴테스는 고대 로마의 기병 계급으로, 왕정 시대에 창설되어 공화정 시대를 거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경제 활동에도 참여했으나, 제정 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혁 이후 군인 기사 계급의 부상으로 쇠퇴하고 소멸하였다. - 기병 - 중기병
중기병은 고대부터 근세까지 전 세계에서 활약한 중장갑 기병으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며 창, 검, 활 등의 무기를 사용했으나, 화기의 발달로 쇠퇴하여 현대에는 기갑부대가 그 역할을 계승하고 일부 의장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폴란드 후사르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별명 | 죽음의 천사 |
표어 | Amor Patriae Nostra Lex (조국 사랑은 우리의 법) |
활동 기간 | 1503년–1702년 (1776년에 해체됨) |
소속 | 폴란드 왕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
종류 | 중기병 |
역할 | 기동전 습격 (군사) 충격 전술 |
장비 | 부르고넷 장창 철퇴 손도끼 사브르 |
전투 및 전쟁 | |
주요 전투 | 크림-노가이 노예 습격 마르티누프 전투 오흐마투프 전투 (1644년) 리투아니아-모스크바 전쟁 (1512년~1522년) 오르샤 전투 몰다비아-폴란드 전쟁 (1530년~1538년) 오베르틴 전투 단치히 반란 루비에슈프 전투 스테판 바토리의 리보니아 원정 모길레프 전투 (1581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587년~1588년) 비치나 전투 폴란드-스웨덴 전쟁 (1600년~1611년) 벤덴 전투 (1601년) 코켄하우젠 전투 레발 전투 (1602년) 키르홀름 전투 폴란드-모스크바 전쟁 (1605년~1618년) 스몰렌스크 공성전 (1609년~1611년) 클루시노 전투 모스크바 전투 (1612년) 폴란드-오스만 전쟁 (1620년~1621년) 호틴 전투 (1621년) 폴란드-스웨덴 전쟁 (1626년~1629년) 그니에프 전투 벤덴 전투 (1626년) 트르치아나 전투 구르즈노 전투 스몰렌스크 전쟁 스몰렌스크 공성전 (1632년~1633년) 대홍수 (역사) 흐멜니츠키 봉기 조우티 보디 전투 로예프 전투 (1649년) 베레스테츠코 전투 로예프 전투 (1651년) 러시아-폴란드 전쟁 (1654년~1667년) 시클로우 전투 폴론카 전투 류바르 전투 추드노프 전투 제2차 북방 전쟁 보이니치 전투 바르카 전투 클레츠코 전투 바르샤바 전투 (1656년) 폴란드-오스만 전쟁 (1672년~1676년) 호틴 전투 (1673년) 르부프 전투 (1675년) 대튀르크 전쟁 폴란드-오스만 전쟁 (1683년~1699년) 호두프 전투 비엔나 전투 파르카니 전투 포드하이체 전투 (1698년) 대북방 전쟁 클리슈프 전투 |
2. 역사
"후사르"라는 단어는 헝가리어 '후사르(huszár)'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다시 세르비아어 '구사르(gusar, 키릴 문자: гусар)'에서 왔는데, 도둑이나 약탈자를 의미한다.[1] 14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피해 세르비아 군인들이 남부 헝가리로 이주하면서 후사르 부대의 개념이 시작되었다.[3][4] 이들은 처음에는 소규모로 운영되었으나, 헝가리의 마차시 1세 코르비누스 시기에 정예화되고 강력한 부대로 재편되었다.[17] 마차시 1세의 지휘 아래 후사르는 1485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시파히 기병을 포함, 여러 적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17]
1490년 마차시 1세 사망 후, 후사르 기병대는 중부와 서부 유럽으로 퍼져나가 각 지역 경기병 부대의 핵심이 되었다.[17] 오스트리아는 헝가리 후사르를 용병으로 고용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이들을 활용했다.[17]
16세기경 기병 방어구에 날개 장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17] 처음에는 말 안장에 붙였으나, 나중에는 갑옷 등 부분에 부착했다.[17] 1645년 슈초드로프스키는 타조 날개를 사용했다고 기록했다.[17]
폴란드에서는 1500년 국고 기록에서 후사르 부대 창설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6] 초기에는 외국 용병이었으며, '세르비아의'라는 뜻의 '라초비에(Racowie)' 또는 '라스치아(Rascia)'라고 불렸다.[6] 이들은 세르비아 라스 지방 출신이었다.[6]
2. 1. 기원
"후사르(huszár)"라는 단어는 헝가리어에서 유래했으며, 이 단어는 세르비아어 "구사르(gusar, 키릴 문자: гусар)"에서 왔는데, 이는 도둑이나 약탈자를 의미한다.[17] 14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피해 세르비아 군인들이 남부 헝가리로 이주하면서 후사르 부대의 개념이 시작되었다.[17] 이들은 소규모 부대로 운영되었으나, 헝가리의 마차시 1세 코르비누스 시기(15세기)에 정예화되고 강력한 부대로 재편되었다.[17] 마차시 1세의 지휘 아래 후사르 부대는 1485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전역에 참전하여 보헤미아, 폴란드 병사, 오스만 투르크의 시파히 기병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17]1490년 마차시 1세가 사망한 후, 후사르 기병대는 중부와 서부 유럽으로 퍼져나가 각 지역에서 창설된 경기병 부대의 핵심이 되었다.[17] 오스트리아는 헝가리 후사르 기병대를 용병으로 고용하여 오스만 제국에 저항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동안 후사르 부대를 활용했다.[17]
16세기경, 기병들의 방어구에 색칠한 날개나 날개 달린 갈고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17] 처음에는 말 안장에 붙어 있었으나, 나중에는 갑옷 등 부분에 부착되었다.[17] 1645년 슈초드로프스키는 타조 날개를 사용했다고 기록했다.[17]
폴란드에서는 1500년 국고 기록에서 후사르 부대 창설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17] 초기에는 외국 용병이었으며, '세르비아의'라는 뜻의 '라초비에(Racowie)' 또는 '라스치아(Rascia)'라고 불렸다.[17] 이들은 세르비아의 라스 지방 출신이었다.[17] 폴란드 왕국의 최초 후사르 기병대는 1503년 폴란드 의회인 세임이 헝가리 용병 세 부대를 고용하면서 창설되었고,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시민들도 지원병으로 참여했다.[17]
2. 2.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후사르
1503년 폴란드 의회(세임)가 헝가리 용병 세 부대를 고용하면서 폴란드 왕국 최초의 후사르 기병대가 창설되었다.[17] 초기에는 외국 용병 중심이었으나, 점차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시민들도 이 부대에 지원하여 참여하였다.[17] 이들은 이전의 용병들보다 더 두꺼운 갑옷을 착용하고 더 자유롭게 움직였다. 오르샤 전투(1514)와 오베르틴 전투(1531)에서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7]
스테판 바토리 국왕 시기(1576-1586)에 후사르 부대는 중세풍의 랜서(장창기병)를 대체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기병대의 주력으로 편성되었다.[17] 1500년대 헝가리의 후사르 부대는 나무 방패 대신 플레이트 메일과 같은 중장갑을 채용하며 중무장 기병으로 변화했다. 트란실바니아와 헝가리의 대공이자 1576년 황금 자유로 폴란드의 왕으로 선출된 스테판 바토리는 헝가리 부대를 따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후사르 부대를 장창을 주력 무기로 사용하는 중무장 편제로 재편하였다.[17] 1590년대에 대다수의 폴란드 헝가리 후사르 부대는 헝가리의 중무장 형태를 따랐으며, 폴란드의 '중무장' 후사르 부대는 헝가리에서 ''후사리아''(husaria)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7]
1577년 루비셰프 전투에서 후사르 부대의 '황금 시대'가 시작되었다.[17] 1683년 빈 전투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후사르 부대는 수많은 적들에 대항하여 무수한 군사적 행동을 벌였고, 거의 패배하지 않았다.[17] 루비셰프 전투(1577), 비치나 전투(1588), 코켄하우젠 전투(1601), 키르홀름 전투(1605), 크우신 전투(1610), 트슈치아나 전투(1629), 호침 전투(1673), 리보프 전투(1675) 등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후사르 부대는 수많은 적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17] 예를 들어 폴란드-모스크바 전쟁 중 크우신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보다 5배나 많았으나 후사르의 활약으로 대패했다.[17]
후사르들도 때때로 패배를 경험했는데, 특히 흐미엘니츠키 반란 시기 1648년 주테 보디 전투는 후사르가 겪은 가장 큰 패배 중 하나이다.[17]
시간이 지나면서 후사르 부대의 역할은 정찰대로 변모했고, 폴란드 분할 등으로 인해 1775년 사라졌으며, 점점 정교해져 갔던 후사르 부대의 갑옷과 무구들은 폐기되었다.[17]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서 울란이라는 사실상 후신인 경기병이 만들어졌다.[17]
2. 3. 쇠퇴와 해체
시간이 흐르면서 후사르의 역할은 정찰 및 선발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변화했다.[9][10] 18세기에 보병 화기가 더욱 효과적이 되면서, 보병 부대를 돌격하여 붕괴시키는 전술을 사용하는 중기병은 점차 쇠퇴했고, 후사르는 정예 전투 부대에서 열병식 부대로 변모했다.1775년 폴란드 분할 등으로 인해 후사르 부대는 해체되었고, 후사르 부대의 갑옷과 무구들은 폐기되었다.[9][10]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서 울란이라는 경기병 부대가 후사르를 사실상 계승하게 되었다.
3. 전술
폴란드 후사르의 주요 전투 전술은 기병 돌격이었다. 돌격은 느린 속도와 느슨한 대형으로 시작하여, 적에게 접근하면서 점차 속도를 높이고 대열을 좁혀 교전 직전에 최고 속도와 가장 가까운 대형을 갖추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폴란드 후사르는 여분의 창을 갖춘 보급 마차를 이용하여 적 대형이 붕괴될 때까지 돌격을 여러 번 반복하는 전술을 사용했다.[11]
후사르는 후사르 동료](Towarzysz husarski)] (동료)가 이끄는 ''
3. 1. 돌격 전술
폴란드-리투아니아 후사르 부대의 주요 전술은 돌격이었다.[11] 이들은 적진에 돌격을 감행하여 적을 돌파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이끌었으며, 이는 그들의 승리에 중요한 요소였다. 적진을 붕괴시키기 위해 여러 번 돌격을 반복하기도 했다.[11] 이러한 돌격 전술과 중무장 갑옷, 그리고 뛰어난 전마들은 2세기 동안 후사르의 승리를 확고히 해 주었다.[11]후사르는 코피아(창), 콘체르즈(찌르는 검), 샤블라(사브르), 2~6정의 권총, 종종 카빈총 또는 아르케부스(폴란드어로 ''반돌렛''(bandolet)이라고 함), 때로는 워해머나 경량 전투 도끼로 무장했다.[11] 오스만 스타일의 가벼운 안장 덕분에 말과 전사 모두 더 많은 갑옷을 사용할 수 있었다.[11] 후사르의 말은 두려움 없고 저항력이 강하도록 특별히 사육되었으며, 무거운 짐을 지고도 빠르게 달리고 회복할 수 있었다.[11] 이 말들은 옛 폴란드 혈통의 말과 타타르 부족에게서 온 동부 말을 교배한 품종이었다.[11] 그 결과, 100kg이 넘는 짐(갑옷과 무기를 착용한 후사르)을 싣고도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한 후 즉시 돌격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11] 또한 매우 민첩하고 기동성이 뛰어나, 중흉갑기병부터 날쌘 타타르 기병까지, 그리고 다양한 보병 부대와도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었다.[11]
3. 2. 무장
폴란드-리투아니아 후사르 부대는 주로 돌격 전술을 사용했다. 이들은 장창(코피아), 기병용 군도(샤블라), 권총 1~2개, 때때로 기병총이나 화승총(폴란드어로 ''반돌레트'')을 사용했으며, 등 뒤에는 호랑이나 표범 가죽을 사용하기도 했다.[11]후사르의 주요 전투 전술은 기병 돌격이었다. 후사르는 ''코피아''(창), ''콘체르즈''(찌르는 검), ''샤블라''(사브르), 권총 2~6정, 종종 카빈총 또는 아르케부스(''반돌렛'') , 때로는 워해머나 경량 전투 도끼로 무장했다.[11]
후사르 기병대는 등이나 말 안장에 달린 거대한 '날개'로 유명하다. 이 날개의 용도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다. 타타르 인의 올가미 공격을 막기 위해서, 또는 깃털의 진동으로 소리를 내어 적을 겁주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실험 결과 이러한 이론들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밝혀졌다. 날개는 퍼레이드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전투 중에는 떼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등 뒤의 호랑이 가죽이나 표범 가죽, 장창의 깃발처럼 적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날개를 달았을 가능성도 있어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11]
3. 3. 날개
폴란드 후사르 기병대는 등 부분이나 말의 안장에 달린 거대한 '날개'로 유명하다. 이 날개가 왜 달렸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이들에 따르면 이 날개는 타타르인의 올가미를 사용한 공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차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이론에 따르면 돌격 시 이 날개에 달린 깃털들이 진동함에 따라 기묘한 소리를 내고 이를 통해 적을 두렵게 하기 위해서라고도 한다.[11] 1970년대부터 리인엑터들과 영화 제작자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2001년에 폴란드 역사가들이 수행한 실험을 해 보았을 때 이러한 이론들은 모두 현실적이지 않다고 밝혀졌다.[11] 아마 이 날개들은 퍼레이드를 할 때 붙여놓고, 전투 중에는 떼어냈을 가능성이 높으나, 등 뒤에 달린 호랑이 가죽이나 표범 가죽, 랜스에 달린 홍백색 깃발이 적의 눈에 혼란을 주기 위해 달려있는 것으로 추정되므로 날개 역시 마찬가지 효과를 위해 달았을 가능성도 있어 여전히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11]4. 갑옷과 무기
후사르 토바지시(동료)는 창을 제외한 자신과 부하의 무기, 갑옷을 제공해야 했고, 창은 국왕이 제공했다.[12] 1574년부터 1705년까지 전성기에 후사르는 다음과 같은 무기와 갑옷을 휴대했다.
창은 후사르의 주요 공격 무기였다. 발칸 및 헝가리 창을 기반으로 제작되었지만, 폴란드 창은 더 길었고, 발칸 및 서유럽의 창처럼 속이 비어 두 조각을 접착하여 칠했으며 종종 화려하게 금도금되었다. 일반적으로 전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창끝은 단조 강철로 만들어졌다. 손잡이 보호대 역할을 하는 큰 나무 공인 갈카가 있었다. 후사르의 창은 보통 길이가 4.5m에서 6.2m였으며 국왕 또는 깃발 소유자가 제공했다. 대형 '실크'/태피터 프로포르제츠 페넌이 창 끝 아래에 부착되었다. 데미 랜스 또는 코피야카라고 알려진 또 다른 유형의 창은 길이가 3m에서 3.6m였으며 17세기 말 전쟁에서 타타르인과 투르크인에 대항하여 사용되었다.
토바지시 후사르스키는 왼쪽 허벅지 아래에 콘체르즈(길이 1.5m까지)와 오른쪽 허벅지 아래에 종종 팔라쉬(브로드소드의 일종)를 휴대했다. 사블라는 왼쪽에 휴대했으며, 유명한 ''사블라 후사르스카''를 포함하여 여러 종류의 사브르가 날개 달린 후사르에게 알려졌다.
후사르는 때때로 '나지아크(기마병의 피크)'와 같은 추가 무기를 휴대했다. 토바지시 후사르스키는 안장 홀스터에 한두 개의 휠락(나중에 플린트락) 권총을 휴대했으며, 부하들도 권총 또는 경량 휠락 아르케부스나 카빈을 휴대했을 수 있다. 1680년대부터 부하를 위한 카빈이 의무화되었다.
개별 후사르는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 많은 '판체르니' 동료가 후사르가 되었을 때 타타르인 또는 투르크인의 복합 궁을 화살통에 넣어 화살과 함께 휴대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17세기 말 일부 자료에서는 후사르 동료들 사이에 활이 존재했음을 언급한다. 18세기 전반 동안, 비군사 복장을 할 때, 후사르의 동료는 군사적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활집에 활을 휴대했다. 그러나 활집에 활은 작센 군에서 근무하는 울란 부대를 포함하여 1770년대 개혁까지 국민군 기병 장교가 모두 휴대했다.
1576년부터 1653년까지의 전성기 동안 후사르 갑옷은 빗 모양의 치스차게(시샤크), 부르고넷 또는 모리온 헬멧(반구형 두개골), 중앙에 하트 모양의 절개가 있는 '뺨받이', 슬라이딩 리벳으로 고정된 여러 개의 판으로 된 목 보호대, 잎 모양의 바이저로 끝나는 조절 가능한 비강으로 구성되었다. 하위 계급(부하)을 위한 치스차게 및 케틀 햇 헬멧은 갑옷과 마찬가지로 종종 검게 칠해졌다. 흉갑(가슴판), 등판, 고르겟, 어깨 보호대, 거대한 스텝, 철제 장갑이 있는 서부 완갑 및 나중에 1630년대에는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카르바쉬 완갑(팔뚝 보호)이 사용되었다. 토바지시는 또한 허벅지 길이의 사슬 갑옷 코트 또는 사슬 갑옷 소매가 있는 특별히 패딩된 코트 아래에 태셋 엉덩이, 퀴스 허벅지 및 폴린 무릎 보호대를 착용할 수 있었다. 부하는 일반적으로 덜 비싸고 오래된 갑옷을 착용했으며, 종종 검은색으로 칠했으며, 1670년대 이후 일부 자료에 따르면 흉갑이 없을 수도 있다.
후사르 갑옷은 가벼웠고, 일반적으로 약 15kg여서 비교적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고 말들이 오랫동안 전속력으로 질주할 수 있었다. 비록 1670년대부터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남동부 국경에서 무슬림 타타르족과 싸울 때 사슬 갑옷이 사용되었다. 거의 사용되지 않는 사르마티아 카라체나 갑옷(가죽 지지대에 리벳으로 고정된 철 비늘)은 비늘 헬멧, 흉갑, 고르겟, 다리 및 어깨 보호대로 구성되었을 수 있으며 얀 소비에스키 국왕 통치 기간 동안 인기를 얻었지만, 아마도 비용과 무게 때문에 날개 달린 후사르 지휘관에게 주로 인기가 있었다.
토바지시는 일반적으로 왼쪽 어깨에 표범(때로는 호랑이, 재규어 또는 사자) 가죽을 걸치거나, 포도르체 성 그림에 자주 묘사된 것처럼 안장 아래에 이국적인 가죽을 걸치거나 엉덩이에 감았다. 늑대, 갈색 곰 및 스라소니 가죽은 지도자 및 베테랑(스타르시즈나)을 위해 보존되었다.
4. 1. 갑옷
후사르 토바지시(동료)는 창을 제외한 자신과 부하의 무기, 갑옷을 제공해야 했고, 창은 국왕이 제공했다.[12] 1576년부터 1653년까지 전성기에 후사르 갑옷은 빗 모양 치스차게(시샤크), 부르고넷 또는 모리온 헬멧(반구형 두개골), 중앙에 하트 모양 절개가 있는 '뺨받이', 슬라이딩 리벳으로 고정된 여러 판으로 된 목 보호대, 잎 모양 바이저로 끝나는 조절 가능한 비강으로 구성되었다. 하위 계급(부하)의 치스차게 및 케틀 햇 헬멧은 갑옷처럼 검게 칠해졌다.흉갑(가슴판), 등판, 고르겟, 어깨 보호대, 거대한 스텝, 철제 장갑이 있는 서부 완갑, 1630년대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카르바쉬 완갑(팔뚝 보호)이 사용되었다. 토바지시는 허벅지 길이 사슬 갑옷 코트 또는 사슬 갑옷 소매가 있는 특수 패딩 코트 아래 태셋 엉덩이, 퀴스 허벅지, 폴린 무릎 보호대를 착용할 수 있었다. 부하는 덜 비싸고 오래된 갑옷을 착용했고, 종종 검은색으로 칠했으며, 1670년대 이후 일부 자료에는 흉갑이 없을 수도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후사르 갑옷은 가벼워서(약 15kg) 비교적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고 말은 오랫동안 전속력으로 질주할 수 있었다. 1670년대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남동부 국경에서 무슬림 타타르족과 싸울 때 사슬 갑옷이 사용되었다. 얀 소비에스키 국왕 통치 기간 동안 사르마티아 카라체나 갑옷(가죽 지지대에 리벳으로 고정된 철 비늘)이 비늘 헬멧, 흉갑, 고르겟, 다리, 어깨 보호대로 구성되어 인기를 얻었지만, 비용과 무게 때문에 날개 달린 후사르 지휘관에게 주로 인기가 있었다.
4. 2. 무기
폴란드 후사르의 주 공격 무기는 코피아(pl: kopiapl)였다. 코피아는 4.5m에서 6.2m 길이의 속이 빈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끝에는 강철 창끝이 달려 있었다. 보통 전나무로 만들어졌고, 손잡이를 보호하는 큰 나무 공인 갈카가 있었다. 창에는 '실크'/태피터 프로포르제츠 페넌이 부착되었다.[12]
보조 무기로는 찌르는 검인 콘체르즈(pl: koncerzpl)를 사용했다. 콘체르즈는 왼쪽 허벅지 아래에 휴대했고, 길이는 1.5m에 달했다. 오른쪽 허벅지 아래에는 팔라쉬(브로드소드의 일종)를 휴대하기도 했다. 사브르(샤블라)는 왼쪽에 휴대했으며, 유명한 ''사블라 후사르스카''를 포함하여 여러 종류가 있었다.

후사르는 때때로 '나지아크(기마병의 피크)'와 같은 추가 무기를 휴대하기도 했다. 토바지시 후사르스키는 안장 홀스터에 한두 개의 휠락(나중에 플린트락) 권총을 휴대했으며, 부하들도 권총 또는 경량 휠락 아르케부스나 카빈을 휴대했을 수 있다. 1680년대부터 부하를 위한 카빈이 의무화되었다.
개별 후사르는 타타르인 또는 투르크인의 복합 궁을 화살통에 넣어 화살과 함께 휴대했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 많은 '판체르니' 동료가 후사르가 되었을 때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으며, 17세기 말 일부 자료에서는 후사르 동료들 사이에 활이 존재했음을 언급한다.
5. 유산
폴란드 후사르는 여러 분야에서 그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2016년, 스웨덴의 메탈 밴드 사바톤은 앨범 ''The Last Stand''에 "날개 달린 후사르"라는 곡을 수록했다. 이 곡은 1683년 비엔나 전투에서 후사르의 돌격이 오스만 제국을 격퇴하는 데 기여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15]
캐나다 TV 시리즈 ''머독 미스터리'' 2018년 시즌 11 에피소드 16 "왕들의 게임"에는 후사르가 등장한다.
2023년, 넷플릭스 시리즈 ''1670''에서 보그단은 시즌 1 에피소드 1 "의회"에서 날개 달린 후사르 복장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2024년 5월 1일, 폴란드는 자국에서 운용하는 F-35 전투기를 후사르를 기리는 의미에서 "후사르"로 명명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6]
5. 1. 기념 주화
500 즐로티 금화에 후사르가 묘사되어 있다.[13]5. 2. 폴란드군 상징
폴란드 육군 제11 기갑 기병 사단의 배지에는 양식화된 후사르 날개와 헬멧이 묘사되어 있다.[14] 이 사단의 수호 성인은 얀 3세 소비에스키로, 그는 비엔나 전투에서 날개 달린 후사르를 이끌었으며, 부대의 기념 배지에는 "비엔나 1683"이라는 전투 명예가 새겨져 있다.[14]
5. 3. 대중문화
폴란드 후사르는 기념 주화인 500 즐로티 금화에 묘사되어 있다.[13] 폴란드 육군 제11 기갑 기병 사단의 배지에는 양식화된 후사르 날개와 헬멧이 묘사되어 있으며, 사단의 수호 성인은 비엔나 전투에서 날개 달린 후사르를 이끌었던 얀 3세 소비에스키이다. 부대의 기념 배지에는 "비엔나 1683"이라는 계승된 전투 명예가 새겨져 있다.[14]
2016년, 스웨덴 메탈 밴드 사바톤은 앨범 ''The Last Stand''에 "날개 달린 후사르"라는 곡을 수록했다. 이 곡은 1683년 비엔나 전투에서 후사르의 돌격이 오스만 제국을 격퇴하는 데 기여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15]
캐나다 TV 시리즈 ''머독 미스터리'' 2018년 시즌 11 에피소드 16 "왕들의 게임"에 한 장면에 한 명, 그리고 두 명의 후사르가 등장했다.
2023년, 넷플릭스 시리즈 ''1670''에서 보그단은 시즌 1 에피소드 1 "의회"에서 날개 달린 후사르 복장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2024년 5월 1일, 폴란드는 폴란드에서 운용하는 F-35 전투기를 후사르를 기리는 의미에서 "후사르"로 명명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6]
5. 4. 대한민국과의 연관성
대한민국은 F-35 전투기를 도입하면서 폴란드 후사르를 기리는 의미에서 "후사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16]참조
[1]
Harvnb
[2]
Harvnb
[3]
Harvnb
[4]
Harvnb
[5]
Harvnb
[6]
Harvnb
[7]
Harvnb
[8]
Harvnb
[9]
서적
Husaria: The Winged Horsemen
Interpress
1998
[10]
서적
Opis obyczajów i dziejów za panowania Augusta III
Bolesław M. Wolff
1855
[11]
웹사이트
Husaria w Kętrzynie
http://hij.com.pl/hu[...]
2012-10-04
[12]
웹사이트
Ciekawostki na temat husarii, o których nie uczyli Cię w szkole
https://ciekawostkih[...]
2021-06-10
[13]
웹사이트
Husarzy na monetach
https://wiadomosci.o[...]
2021-07-10
[14]
웹사이트
11th Lubuska Armored Cavalry Division: Colours and symbols
https://www.wojsko-p[...]
Wojsko Polskie
2022-11-23
[15]
웹사이트
Winged Hussars – Lyrics
https://www.sabaton.[...]
2021-07-10
[16]
뉴스
Poland's Future F-35s Have Been Officially Named 'Husarz'
https://www.twz.com/[...]
2024-04-29
[17]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